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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걸작의 탄생과 컬렉션의 여정


지은이 / 마틴 베일리  *  옮긴이 / 박찬원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부분)

런던, 내셔널갤러리


반 고흐는 단 일주일만에 해바라기 그림 네 점을 완성하는데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를 제일 나중에 그렸다.

구성적인 면을 살펴보면 이 마지막 작품은 소박한 항아리, 해바라기 한 다발, 테이블, 배경이 되는

벽이라는 네 가지 요소만을 갖춘 단순함 자체다.


19세기 예술가들은 꽃 정물화를 그릴 때 우아한 꽃병을 선택아는 경향이 있었지만,

고흐는 소박한 용기를 고르는 편이었다. 그는 늘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서 더 친밀감을 느꼈다

(심지어 낡은 신발을 소재로삼기도 했다). 그 도기 항아리는 아마도 노란집 1층

아틀리에 옆 그의 부엌에 있던 것이라 생각된다.


해바라기 자체는 일반적인 종류인 '헬리안투스 안누우스'

(그리스 태양신 헬리오, 꽃이란 뜻의 안토스, 그리고 1년생이라는 뜻의 안누우스)다.

19세기 프랑스에서 해바라기는 지금처럼 기름을 얻기 위해 재배된 건 아니고 관상용으로 정원에서 키웠다.


반 고흐는 정물화에 각기 다른 생장 단계에 있는 해바라기들을 병치시켜 극적 효과를 증대했다.

시간의 흐름을 반영한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는 17세기 네덜랜드의 바니타스 정물화 전통을 따른 것이다.

당시 반 고흐는 그 한 주동안 그린 작품이 세게 미술계에 끼칠 영향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생전에 그는 파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테오의 인맥으로도 해바라기 작품들을 판매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그가 사망한 후 매우 빠르게 인정받기 시작하며, 그가 남긴 아를의 정물화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작품들은 곧 후기인상주의의 절정이자

표현주의에 대한 영감으로 이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늘날 이 해바라기 그림들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 받고 사랑받는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해바라기 네 송이(부분)

 오테를로 크뢸러퀄러미술관


반 고흐가 처음으로 해바라기를 그린 것은 1886년 여름, 몽마르트르에서 였다.

동생과 지내기 위해 파리에 도착한 지 몇 달 지나지 앟은 시점이었다. 당시는 몽마르트르가 변모하던 시기였다.

반 고흐가 1875년에 예술품 딜러로 일하며 잠시 그곳에 살았던 적이 있지만, 그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블뤼트 팽 풍차

캔버스에 유채, 46×38cm, 글래스고, 캘빈그로브미술관.


전경에 해바라기 세 그루가 보인다. 17세기 초에 세워진 이 풍차는 옥수수를 빻는 곳이 아니라

레스토랑, 카페, 댄스홀, 전망대(그림의 오른쪽에 보인다.) 등 당시 유흥시설로 활용되었다.

이는 왼쪽으로 조금 멀리 보이는 또 다른 풍차와 함께 '갈레트 풍차'로 알려져 있다.


위 그림은 반 고흐가 네덜란드에서 그렸던 초기 풍경화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파리에서 체류하는 6개월 동안

그의 팔레트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초기 네덜라드 그림을 특징짓던 어둡고 냉철한 분위기와 지배적으로

 자주 사용되던 회색과 갈색, 1860년대부터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헤이그파 예술가들의 전형적인 색채가

사라졌다. 기슭의 생기있는 초록색과 하늘의 파란색은 당대 프랑스 미술의 영향을 반영한다.







「해바라기와 다른 꽃들이 있는 꽃병」

캔버스에 유채, 50×61cm, 1886, 만하임, 시립미술관.


그림 속 해바라기 네 송이의 타는 듯 강렬한 꽃잎들은 수적으로 더 많이 그려진 흰색과 분홍색의

장미꽃 사이에서도 두드러져 보인다. 또한 해바라기의 뒤틀린 꽃잎들이 구성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드브레 정원의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32×41cm, 1887, 개인 소장.


해바라기를 주제로 한 풍경화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으로, 반 고흐가 파리에 도착한 지 1년 남짓 되었을 무렵인

1887년 7~8월에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몇 세대에 걸쳐 블뤼트 팽 풍차를 소유했던 가문의 18세기 농장을

그린 것으로, 반 고흐는 이 농가가 마치 시골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했지만 유흥시설에 포함 되어 있었다.

울타리 앞에 키 큰 해바라기 여러 그루가 서 있어 구성의 초점을 형성한다.







「해바라기가 있는 시민농장

캔버스에 유채. 43×36cm, 1887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미술관.


커다란 잎이 달린 키 큰 해바라기 하나가 나이든 여인 뒤로 거의 위협적으로 솟아 있다.

그 이그림은 캔버스 뒷면에 그려진 것으로, 앞면에는 2년 전에 완성한 뉘년 시골 여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늘 돈이 부족했던 반 고흐는 이렇듯 재료들을 재활용했다.







「몽마르트르 갈레트 풍차 뒤편」

캔버스에 유채, 81×100cm, 1887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반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해바라기 풍경화 중 가장 야심작은 의심할 여지없이 「몽마르트로-갈레트 풍차 뒤편」이다.

늦은 7월, 다시 한 번 드브레 농가 아래편에 펼쳐진 전경을 그린 이 그림은 빛의 효과를 포착하려는 인상파의

영향을 보여준다. 베르나르는 2년이 지난 후 반 고흐의 몽마르트르 풍경화를 회상하며 :언덕 기슭에서

무리지어 자라고 있는 커다랗고 아주 노란 해바라기들"을 떠올린다.


불행히도 반 고흐가 사용했던 불안정한 아연 유채물감의 색이 바래

오늘날 그림에서 해바라기는 간신히 보이는 정도다.










위 「해바라기 두 송이」는 연작의 첫 작품일 것이다.

 반 고흐는 해바라기 두 송이의 머리 부분을 세밀하게 다루며 아주 치밀하고 과학적이며 정교하게 표현했다.

정밀하게 그린 이 해바라기들은 황금빛 색조가 풍부한 배경을 바탕으로 노란색, 빨간색, 청록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송이는 더 밝고 한 송이는 그보다 조금 더 어둡다. 가까이 보면 그림이 마치 복잡하게 짜인 직물 같다.

반 고흐가 언젠가 밀과 양귀비가 있는 풍경화를 "여러 색깔로 짠 스코틀랜드 격자무늬 같다"라고 묘사한 일이

있었던 걸로 보아 어쩌면 의도적으로 장식적인 효과를 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해바라기 두 송이」

캔버스에 유채, 43×61cm, 1887,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구성면에서는 유채 습작과 유사하지만 크기가 훨씬 정교하다.










「해바라기 네 송이」

캔버스에 유채. 60×100cm, 오테를로, 크뤌러뭘러미술관.


이 연작에서 반 고흐의 마지막 정물화는 좀 더 크고 야심만만하다.

앞서 그린 정물화를 정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해바라기들은 매우 역동적이며

 불안정하게 칠한 파란책, 초록색, 오렌지색의 추상정 배경 위로 떠오르듯 두드러져 보인다.








「노란집」(부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나는 항상 어디론가,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자 같다."

반 고흐는 아를로 이사한 후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1888년 2월 19일, 겨울이 깊어가는 계절에 반 고흐는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는 시골 풍경을 찾아 프랑스 남부로 떠난다.

반 고흐는 그 특유의 방식으로 프로방스를 자신이 그토록 예찬하던 예술(특히 목판화)의 나라 일본과 동일시 한다.

"햇빛, 빛, 내가 노란색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유항색, 흐린 레몬, 금빛 - 그 빛, 노란색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꽃이 있는 정원」

캔버스에 유채, 92×73cm, 1888년, 개인 소장.


해바라기가 피기 시작하는 7월 중순이 되자,

 반 고흐가 프로방스에서 그린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해바라기가 등장한다. 

 "내가 다시 정적이고 차분한 구성의 그림을 그리게 될지 잘 모르겠다"라고 테오에게 말한다.







「해바라기 열네 송이」(부분)

뮌헨, 노이에피나코테크


어느 여름날 아침, 반 고흐는 아주 강렬한 열정에 들떠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해바라기 그림 네 점의 연작을 시작해 그 주 주말에 끝마친다. 해바라기가 만개하던 시기였다.

반 고흐가 해바라기로 집을 꾸민 것은  자신의 새집,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그 집에 자신을 투영하고

각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일에 상당히 고양되었는데, '예술가의 집을 만들면 브르타뉴를 떠나

남쪽으로 오는 것을 망설이는 고갱에게 매혹적으로 비춰지리라 기대한 탓이다.








해바라기 세 송이」

캔버스에 유채, 73×58cm, 1888년, 개인 소장


반 고흐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열정으로 해바라기들과 씨름했는지 묘사하다,

"나는 매일 해가 뜨면 아침부터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꽃은 빨리 시들기 때문에 단번에 작업 전부를 하는 것이

뭣보다 중요해." 그는 나중에 "이번 여름 도달한 그 높고 찬란한 '노란 음'에 계속 이를 수 있도록

커피와 술을 마치며 스스로를 고양시켰다"라고 회상한다.


세심한 관찰이 돋보이는 해바라기 세 송이로 시작한 이 연작은 생동감 넘치는 열다섯 송이에서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걸작을 만들어낸다. 이 연작의 처음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대중에 덜 알려져 있다.

「해바라기 세 송이」는 개인 소장품으로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그 그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도 전시된 일이 없다.








「해바라기 여섯 송이」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가 패널에 올려 나무 액자에 끼움, 98×69cm, 1888년, 소실.



「해바라기 여섯 송이」는 2차 세계대전 대 일본에서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마지막 작품 「해바라기 열네 송이」(현재 뮌헨에 있다)와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런던에 있다)」는

 반 고흐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


그가 두 번째로 그린 '해바라기 여섯 송이'는 더욱 진전된 면이 보인다.

구성은 '해바라기 세 송이'와 유사하지만 테이블 위에 꽃이 세 송이 더 놓여 있다.


꽃들의 뾰족한 꽃잎과 꽃받침을 강조하고 식물학적인 세부 묘사를 줄여

훨씬 더 도식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반 고흐는 이제 단순한 묘사를 뛰어넘어 꽃의 정수를 포착하고 있다.

다행히 이 그림은 소실되기 전 1921년, 도쿄에서 포트폴리오를 위해 컬러필름으로 촬영되었다.


반 고흐는 베르나르에게 처음 이 두 작품에서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이

"강렬하고 단속적인 노란색이 옅은 파랑과 로열  블루로 이루어진 다양한 푸른색을

배경으로 뿜어내는 데코라시옹"이라고 설명 한다.








「해바라기 열네 송이」

캔버스에 유채, 91×72cm, 1888년, 뮌헨, 노이에피나코테크.


그의 서명이 꽃병의 유약 부분 바로 아래에 있다.

시선의 분산으로 보일수도 있겠으나 윗 부분 절반이 꽃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구성상의 이유로 서명을 넣은 또 다른 예가 해바라기 연작들을 시작하기 불과 일주일 전 나타난다.

바다 풍경에 "상당히 도발적인 붉은 서명을 넣었는데 나는 초록색에 빨간 색조가 들어가기를 원했다"







「해바라기 열 다섯 송이」

캔버스에 유채, 92×73cm, 1888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이 그림은 그 주의 마지막 그림이었고,

그것을 '열네 송이'라고 설명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왼쪽 꽃봉오리는 그가 그림을 시작하고 며칠 후 추가적으로 그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왼쪽 꽃잎 뒤에 열여섯 번째 꽃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구성은 「해바라기 열네 송이」와 유사하지만 꽃의 배열이 다르다.

이전 그림의 꽃들은 조금 더 무리지어 있는 반면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의 꽃들은

약가 더 작고 배열 간격도 더 넓다.


색깔을 잘 다루는 반 고흐의 솜씨 덕분에 그의 해바라기 연작이

이처럼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이다.








아돌프 몽티셀리, 「꽃병」

캔버스에 유채, 51×39cm, 1875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반 고흐는 몽티셀리의 꽃 정물화에서 큰 영감을 받았기에 그의 머리속에서 몽티셀리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 고흐가 해바라기 정물화를 시작하기 2년 전에 이 마르세유 출신의 화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몽티셀리에게 강한 일체감을 느꼈고, 자신을 "그의 아들 혹은 형제"로 생각하며 작품을 해나간다.


당시 파리에서 테오와 함께 지내고 있던 빌에게 반 고흐는 두 형제가 받은 몽티셀리의 「꽃병」을 볼 것을

권한다. 반 고흐는  또한 고인이 된 몽티셀리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언젠가 마르세유에서

「해바라기 열다섯송이」를 전시하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전한다.









에두아르 마네 「모란 꽃병」

캔버스에 유채, 93×70, 1864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그 주 반 고흐는 두 번이나 편지에 마네의 「모란 꽃병」에 대한 찬사를 표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그림 네 점을 일주일 만에 완성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상황에 불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연작의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그는 테오에게 이렇게 쓴다.


 "인생은 짧고, 특히 모든 것을 용감히 대면할 만큼 강인함을 느끼는 세월은 더욱 짧다.

그래서 새 그림이 인정을 받는 순간 결국 곧 약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내 안에 존재한다."


반 고흐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용돈과 미술재료 등 경제적으로 테오에게

오랫동안 의지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 고갱 「반 고흐를 위한 자화상(레 미제라블)

캔버스에 유채, 45×55cm, 1888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반 고흐는 당시 풍타벤에서 함께 있던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편지를 써서 초상화 교환을 제안한다.

반 고흐가 고갱에게 파리 해바라기 그림 두 점을 주었던 이후 첫 그림 교환이었다.

10월 초, 반 고흐는 이미 그 두친구들에게서 자화상을 받은 상태였다.


고갱의 자화상에는 배경에 꽃을 형상화한 그림과 베르나르의 작은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고갱은 이 작품에 빅토르 위고의 제목을 붙였다.


반 고흐는 그림에 대한 댓가로 고갱에게는 이름을 넣은 자화상을,

 베르나르에게는  아를의 강을 그린 풍경화 한 점을 보낸다.









「고갱을 위한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61×50cm, 1888년,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포그미술관.


고갱에게 보낼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반 고흐는 그의 침실 그림에 그려져 있는 거울을 사용했을 것이다.

거의 민머리에 가깝게 짧게 자른 머리의 반 고흐가 「해바라기 열네 송이」에 사용된 것과 비슷한

청록색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고갱에게 이 그림을 설명하며 그는 자신을 일본 승려에 비유한다.


"또한 내 성격을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부처를 경배하는 소박한 일본 승려에 가깝다."








클로드 모네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캔버스에 유채, 101×81cm, 188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모네는 자신의 정원에서 해바라기를 키웠다. 모네의 리드미컬한 붓질은 그림에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몇 년 후 반 고흐가 그린 뾰족한 해바라기 꽃잎과는 대조적이다.

기본적 구성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그림은 인상주의를 따르는 반면,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훨씬 더 형상화된 작품이다.








「에턴 정원의 추억」

황마에 유채, 74×93cm, 188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국립박물관


고갱은 곧 노란집에 정착해 반 고흐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이는 미술사에서 가장 치열한 공동작업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격려하며 상당히 생산적일 때도 있었으나,

두 사람 다 고집이 셋던 탓에 그들의 관계는 자주 격렬한 논쟁 속에서 파열되었다.


고갱은 상상력으로 작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반 고흐는 자신의 눈 앞의 풍경, 인물, 꽃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 고흐는 이 토론의 결과에 대해 테오에게 처음으로 긍정적인 태도로 이야기 한다.

"고갱은 내게 상상할 용기를 주고, 그 상상의 산물들은 더욱 신비로운 특질을 갖는다."


반 고흐가 고갱의 조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데

갱이 도착하고나서 몇 주 후 그린 그림이 바로 '에턴 정원의 추억'이다

그림 속 숄을 걸친 노인은 반 고흐의 어머니 아나이고, 양산을 든 여인은 누이 빌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에 대해 누이 빌에게 이렇게 쓴다.

"음악으로 위로의 말을 들려줄 수 있는 것처럼 잘 배열된 색으로 시를 읇조릴 수 있단다."










「반 고흐의 의자」

황마에 유채 93×74cm, 1888~189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반 고흐가 고갱과 함께 지낸 주 달 동안 작업한 그림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11월에 완성한 빈 의자 두 점이다. 분명 이 정물화는 고갱의 격려로 그린 작품일 것이다.

이들 그림은 반 고흐가 자신과 고갱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보여주는 심리학적 초상화다.









「고갱의 의자」

황마에 유채, 90×73cm, 1888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이 두 의자는 그들이 작업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공유하고자 했던

반 고흐의 바람이 녹아든 것이기도 하다. 반 고흐는 고갱이 책을 읽는 동안

파이프를 물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었다.









폴 고갱 「해바라기 화가」(부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인물을 돋보이게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그린 고갱의 그림을 본 테오는

"그의 내적 존재를 포착한다는 측면에서 형을 그린 최고의 초상화"라고 믿었다.

그림에 「해바라기 화가」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고갱이었다.

이 그림은  1888년 12월 초, 반 고흐와 고갱이 협업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고갱이 "내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을 그의 역작이 되리라 생각한다." 라고 말한다.

반 고흐는 그 그림이 성공적일 것이라 믿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에서 어느 정도의 불안감이 엿보인다.

맨 위쪽에 있는 해바라기 중심에는 어두운 색조로 타원형의 '홍채'와 가느다란 푸른 눈썹을 그려넣어 외눈박이

형태를 표현했다. 초상화 속 반 고흐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테오는 이 초상화가 형을 잘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림에서 반 고흐는 지쳐 보이고 심지어 우울해 보이기까지 하는데도 말이다.

고갱에 따르면 이 그림을 마친 직후 반 고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분명 내 모습이다. 하지만 미쳐버린 내 모습이야."


반 고흐가 두 개의 자화상, 즉 화가를 표현하는 빈 의자 한 쌍을 그리는 동안,

고갱은 반 고흐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이다.










폴 고갱 「작은 고양이」

황마에 유채, 72×24cm, 1888년 개인 소장.


이 정물화는 오랫동안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02년 고갱 분류 목록에 처음으로 컬러로 인쇄된 과일과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

길고 폭이 좁은 그림 한 점의 이미지가 실렸다.  그림으 좁고 긴 형태, 서명 등으로 보아 이것이 더 큰 그림의

가장자리, 원래 구성의 4분의 1 정도만을 보여주는 왼쪽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고갱 초상화」

황마에 유채, 38×34cm, 1888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그 무렵 반 고흐는 「고갱 초상화」를 시작하고, 과일 정물화를 그리는 친구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반 고흐가 남긴 습작일 뿐 완성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반 고흐는 대략적으로 그린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최종 버전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양파가 있는 정물화」(부분)

오테롤로, 크륄러뭘러미술관


반 고흐와 고갱으 두 달간의 협업은 재앙으로 끝난다. 고갱은 반 고흐가 집안일을 하지 않는 것에 힘들어했고,

반 고흐는 친구의 성공을 질투했으며,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했다. 두 사람 다 거침없이 말을 하고

고집도 셌기 때문에 성격적으로 많이 부딪쳤고,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나날을 보냈다.

12월 초가 되자 고갱은 '남쪽의 아틀리에'를 버리고 파리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자꾸만 악화되던 상황은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고갱은 불같이 화를 내며 노란집을 뛰쳐나갔고, 반 고흐는 그를 뒤따라 라마르틴 광장에서 거칠게 따진다.

고갱은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시내에서 밤을 보낸다.


반 고흐는 집으로 돌아와 위층 침실로 올라간 다음

 면도칼을 들고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자신의 왼쪽 귓볼을 잘라낸다.

그는 잘린 작은 살점을 신문지에 싸서 불과 몇 분 떨어진 부 다를 거리의 사창가로 향한다.

1888년 12월 26일 자 『르 프티 주르날』 기사에 따르면, 화가는 한 유곽 문 앞에서 벨을 울린 다음

 문을 열어준 마담(아마도 라셀)에게 '종이에 싼 자신의 살점'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받아 둬, 쓸모가 있을 거야." 반 고흐의 귓볼을 받아든 마담은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그

는 이미 그 자리에서 도망친 후였고, 상처가 심한 상태로 집에서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진다.


다음 날 아침 노란집으로 돌아온 고갱은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듣고 경악하며

즉시 테오에게 전보를 보낸다. 소식을 들은 테오는 그날 저녁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크리스마스

 아침 일찍 도착한다. 말을 하지 못할정도로 쇠약한 모습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한 테오는

형이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있는일은 없다고 판단

그날 밤 파리로 돌아가기고 결정한다.


거의 업급된 적은 없지만, 반 고흐가 프로방스에서 보낸

2 년 동안 그것이 테오의 유일한 방문이었다는 사실 역시 놀랍기만 하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9년, 61×50cm, 런던, 코톨드갤러리.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반 고흐는 놀랄 만큼 빠른 회복을 보인다.

노란집에 돌아온 반 고흐는 자리에 앉아 고갱의 마음을 달래는 편지를 쓰며

"가장 진솔하고 심오한 우정의 말들을 담는다."


왜 반 고흐는 자신의 귀를 훼손했을까?

이는 자살 시도라기보다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명백히 여러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그가 앓던 질병을 추측했는데,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진단은 간질과 조울증이다.


또한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과 감정적 격변을 겪고 있었고,

러한 상황은 결국 그를 한계 너머로 밀어 냈다. 고갱과의 관계는 갈수록 걱정스러울 만큼 위태로웠고,

반 고흐가 귀를 훼손하기 바로 직전 동생과의 관계는 그보다 더 염려스러운 상태로 치달았다.


크리스마스 2주 전 테오는 네덜란드인 여자 친구 요하나 요 봉어르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그로 인해 반 고흐는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온 동생의 감정적 교류와 재정적 지원을

모두 잃게 될까봐 몹시 두려워진 것이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은 당시 그의 예술적 관심을 집약한 것이다.

배경에 걸린 판화 속 게이샤의 우아하고 화려한 이미지는 일본 미술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반영한다.

사실 이 판화는 두 개를 합친 것이다. 자화상을 완성하자 고흐의 마음은 다시 해바라기 연작으로 돌아가며,

고갱을 위한 해바라기 카피를 그릴 결심을 한다. 이는 고갱의 편지를 받은 후 시작한 일이다.


반 고흐는 나흘 후인 1889년 1월 21일 고갱에게 직접 답을 보낸다.

놀랍게도 그 편지는 거의 한 세기 동안 헌책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해바라기 열네 송이」(서명 있는 카피)

캔버스에 유채, 92×72cm, 1889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고갱이 달라고 한 노란색 배경의 그림뿐 아니라 또 다른 해바라기 작품도 카피

(그는 그렇게 카피한 작품을 레페티시옹, 중 반복이라 불렀다)를 그리기로 한다.

원작들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 '대등'하기는 했지만 분명 '동일'하지는 않았기에 그의 그런 어법이 흥미롭다.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서명이 있는 카피)

캔버스에 유채, 95×73cm, 1889년,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서명된 카피 두 점 역시 1888년 8월에 그려진 원작들과는 달리 배경색이 조금 어둡다.

꽃들은 묘사가 덜 섬세하고 더 많이 형상화되었는데, 이는 실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명이 있는 카피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꽃의 중심 부분이 유난히 눈에 띄는 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꽃들은 식물학적으로는 부정확한 표현이지만 꽃다발에 다양성을 부여한다.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에서는 비슷한 위치에 연녹색으로 중심을 칠한 꽃이 있으며,

왼쪽에는 중심을 붉게 칠한 것도 있다.


두 그림에 통일성을 주기 위해 반 고흐는 비슷한 방식으로 꽃병에서 유약을 칠한 부분과

칠하지 않은 부분이 나뉘는 선 바로 아래에 서명을 한다.

도쿄 카피에는 서명이 없는데 반 고흐가 대개 선물로 그림을 그릴 때 서명을 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그가 이 그림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서명 없는 카피)

황마에 유채, 100×76cm, 1888~89년, 도쿄, 도고세이지기념손보재팬미술관.


1889년 1월 말 아를에는 원작 네 점과 카피 세 점을 포함한 총 일곱 점의 해바라기 그림이 존재한다.

반 고흐는 고갱의 요구를 받아들일 참이었지만 카피를 그리는 동안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몹시 흥분하며 자신의 계획을 테오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쓴다.









「자장가」(부분)

보스턴, 파인아트미술관


반 고흐가 테오에게 전한 그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친구 오귀스틴 룰랭의 초상화를

세속의 성모 마리아처럼 중심에 놓고 해바라기 연작들을 트립티크로 배열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서 그녀는 밧줄을 쥐고 있는데 이 밧줄은 아기팀대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고,

래서 반 고흐는 이 그림에 「자장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장가」

캔버스에 유채 92×72cm, 1889년, 보스턴, 파인아트미술관.



룰랭 가족은 아름에서 반 고흐와 가장 가깝게 지낸 이웃이었다.

그가 귓볼을 자른 후 치료를 받도록도와주었던 이도 조제프였다.

오귀스틴은 상처 입은 화가에게 위로가 되어주었고, 반 고흐는 그녀의 도움에 가슴 깊이 감사했다.











「생레미 산맥」

캔버스에 유채, 72×91cm, 188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1889년5월 8일 반 고흐는 생레미 외곽에 위치한 정신병원에 도착,

어느 정도 병원 생활에 익숙해지자 그는 건물 밖으로 나가 그림 그리는 일을 허락받는다.

그곳에서 반 고흐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는다.



시인지자 비평가인 알베르 오리에는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한 리뷰를 쓴 사람이다.

그의 리뷰는 1890년 1월에 첫 출간된 진보적인 파리 월간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실렸다.

그 글에서 오리에는 상당히 난해한 스타일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눈부신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에 대한 집착적인 열정으로 또 다른 태양, 그 화려한 해바라기를 위해

편집광처럼 쉼 업이 그리고 또 그린다. 모호하고 눈부시게 장엄한 태양 신화적 알레고리에 대한 그의 끈질긴

몰두를 만일 우리가 인정하기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레 뱅> 전시회에서 해바라기 두 작품은 팔리지 않았지만 「붉은 포도밭」은 판매가 이루어져

반 고흐 생전에 거래된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폴 고갱 「카리브해 여인」

패널에 유채, 64×54cm, 1889년, 개인 소장


1889년 10월 초 고갱은 퐁타벤을 떠나 르 풀뒤의 더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 뷔베트 드라플라주로 옮긴다.

그 시절 고갱의 작업으로는 소나무 문에 그린 「카리브해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고갱이 자신의 조각에서 가져온 것이다.

<레 뱅> 전시회가 끝나고 한 달 후, 반 고흐는 파리에서 다시 한 번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얻는다.


이윽고 인상주의 대가들로부터 반 고흐으 작품에 대한 찬사들이 이어진다.

테오는 특히 모네가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회에서 단연 최고"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오베르의 농촌 풍경」

캔버스에 유채, 50×100cm, 1890년, 런던, 테이트갤러리, 런던내셔널갤러리 대여.


조용한 시골 정신병원에서 번화한 도시로 돌아온 것은 반 고흐에게 큰 충격이었고,

결국 그는 파리에 사흘 밖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번잡한 도시를 떠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고갱을 만나지 않은 채 서둘러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보베르쉬르우아즈로 향한다.

그곳에서 주로 풍경화를 그렸으며, 하루에 거의 한 점 씩 완성해나간다.


반 고흐는 계속해서 해바라기를 떠올리며 리넨 표지에 그래프용지로 만든 작은 스키치북에 드로잉을 한다.

해바라기에 대한 반 고흐의 집착을 보여주는 특히 가슴 아픈 예가 최근에야 밝혀졌다.

그는 세상을 떠나던 발 그날에도 풍경화에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까마귀 나는 밀밭>이

그의 마지막 그림이라 여겨 졌었는데, 주된 이유는 그림에 곧 다가올 불길함이 암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죽음으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그 시기에 그는

미완성 그림 두 점,<나무 뿌리>와 <오베르의 농촌 풍경>을 작업하고 있었다.


7월 27일 오후, 반 고흐는 오베르 위 빌밭(아마도 「오베르의 농촌 풍경」에 묘사된 그곳)에서

자신의 배에 총을 쏜다. 그는 미완성 그림 두 점이 기다리고 있는 아래층의 작은 아틀리에로 가지 않고,

심한 부상을 입은 채로 비틀거리며 여인숙으로 돌아와 계단을 올라 침실로 간다.


그리고 이틀 후인 1890년 7월 29일, 테오가 침대 옆을 지키는 가운데 총상으로 사망한다.

장례식은 다음 날 20여 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 들 중 절반이 화가였다.

베르나르는 오베르주라부 뒷방에서 열린 장례식 광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벽에 걸린 그의 마지막 캔버스가 후광 처럼 그를 위해 빛났다."


형이 죽은지 겨우 6개월 만에 서른셋의 나이로 동생 테오도 숨진다. 사인은 매독.

1914년 위트레흐트에서 테오의 시신이 옮겨져 그의 형 옆에 묻힌다.








폴 고갱 / 마르키즈 꽃병의 해바라기(부분)

개인 소장.


반 고흐의 사망 소식은 장례식 사흘 후 브르타뉴에 있던 고갱에게도 전해진다.

믿기 힘들게도 그는 그 소식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1891년 6월 고갱은 타히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열대 낙원이라 상상했던 그곳에서 영감을 얻고자 한것이다.

돈과 의료 문제에 부딪힌 그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2년 후인 1893년 9월 다시 파리로 돌아 온다.








폴 고갱 「해바라기와 바다 풍경」

캔버스에 유채, 66×76cm, 1901년, 취리히, 부를 컬렉션.


1901년 중반, 고갱은 일련의 해바라기 정물화를 그린다.

<해바라기와 바다 풍경>은 그의 첫 번째 꽃 그림이다.









폴 고갱「해바라기와 여인」

캔버스에 유채, 73×92cm,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국립박물관.


무표정하게 시선을 던지는 타히티 여인이 그려져 있다. 그림으 상단, 의자 뒷편으로

어두운 색조의 해바라기 하나가  떠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약간은 부조화스러운 눈 하나가 그려져 있다.


위 두 그림 모두 고갱과 반 고흐가 그린 초기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폴 고갱 / 마르키즈 꽃병의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66×76cm, 1901년, 개인 소장


왼쪽 벽에는 중요한 그림 두 점이 핀으로 꽂혀 있다. 꽃가지를 들고 있는 나체의 여인은 봄을 상징하는 것으로,

1872년 퓌비 드샤반이 그린 「희망」을 복제한 것이다. 이 그림은 고갱과 반 고흐가 노란집에서 자주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을 만큼 두 사람 모두 좋아하던 것이다. 고갱은 「희망」의 복제품을 타히티로,

나중에는 마르키즈 제도로 가지고 가며, 그곳에서 그의 원주민식 오두막 안에 걸어놓는다.


「희망」 아래에는 1879~80년 드가의 파리 사창가 풍경 에칭 한 점이 걸려있다.

나체의 여인이 몸을 구부리고 씻는 모습이다.










폴 고갱 / 마오리 꽃병의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93×73cm, 1901년, 개인 소장.


다시 한 번 외눈박이로 형상화된 꽃이 꽃다발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작은 금속 그릇도 보이는데 그 안에는 줄기를 자른 해바라기 한 송이가 담겨 있다.

고갱이 남긴 해바라기 정물화의 작품 수와 반 고흐가 1888년 8월에 그린 해바라기 수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 스타일과 구성을 보면 두 화가는 각기 고유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 고흐는 해바라기에 중심을 두고 꽃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정수를 포착하고자 했고,

그의 구성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여 오히려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반면 고갱은 보다 복잡한 정물화 구성을 사용하여 유럽의 꽃 예술을 오세아니아 문화의

다양한 측면과 함께 녹여내고 있다.


1903년 4월, 고갱은 외딴 섬에서 볼라르에게 짧은 편지를 보내

8개월 넘게 약속했던 캔버스와 종이, 씨앗을 기다리며 "작업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불평한다.

하지만 고갱의 편지가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때가 늦었다.

그의 건강은 빠르게 악화되었고, 1903년 5월 8일 이른 아침 그는 거의 죽음의 문턱 앞에 선다.

이윽고 오전 11시 무렵, 조용히 숨을 거둔다.







「아이리스」(부분)

로스앤젤레스, J, 폴게티미술관







작가 미상 「과꽃」

캔버스에 유채, 51×43cm, 부페르탈, 폰데어하이트미술관.


위작 시비에 휘말린 <과꽃>은 다른 속이지만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아사크 이스라엘스, 「반 고흐 해바라기 앞에 선 여인의 옆모습」

캔버스에 유채, 70×55cm, 1918년, 헤이노베이허 & 즈볼러, 퓐다시미술관.









앙리 마티스 「꽃병의 해바라기」

캔버스에 유채, 46×34cm, 1898년,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 우리의 것이다 -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 꽃이 상징하는 바를 밝히려 애를 썼다.

전통적으로 해바라기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세상의 빛을 표현하며 인간의 신에 대한,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연결짓고는 한다. 하지만 아를에 도착할 무렵 반 고흐는 예전의 열정적인 신앙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자연으로 옮겨갔다. 봉오리와 활짝 핀 꽃과 씨로 변한 꽃을 한 자리에 그림으로써

반 고흐의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는 계절이 바뀌는 것에 특히 민감했고,

여름의 절정기에서 해바라기의 개화를 고대했다.


반 고흐는 현존하는 그의 편지 37통에서 아를의 해바라기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단 한 번,  그가 처음으로 해바라기를 그린 지 18개월이 지난 후였다.

정신병원의 검소한 그의 방에서 반 고흐는 비평가 오리에에게 자신의 해바라기들이 " '감사함'을 상징하는

아이디어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일주일 후 그는 누이 빌에게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반 고흐는 "하지만 나의 그림들은 전원에 핀 해바라기가 상징하는

감사의 의미 속에 존재하는 고뇌의 울부짖음과도 같다"라고 쓴다.


이는 그림은 힘든 작업이고 화가들은 종종 신경불안에 시달리지만,

자연은 언제나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반 고흐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이제 그의 해바라기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위 내용 모두는 '한영문화사' 발행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중에서 일부를 간추린 것.




The River To Nimanoradee Paradise - Chamras Saewatap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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