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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지독한 아름다움

지독한 아름다움


- 김 영 숙 著 -





아래는 김영숙 著, 「지독한 아름다움」내용 중에서 일부를 간추린 것이다.



마네 / 풀밭 위의 식사


이 그림을 그린 마네 자신은 왜들 그렇게 난리법석을 피우며 자신을 욕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을 그린 게 아니라 그들에게 와 닿는 빛을 그렸을 뿐이니까 말이다.















글림트 「유디트와트와 홀로페르네스」,

캔버스에 유채, 84×42cm, 1901년.


여인의 야릇한 표정이 가뜩인 호기심 많은 우리네 가슴을 자극한다.

묘하게 풀린 눈망울, 게다가 아직도 더 남은 욕망을 찾아 헤매듯 채 다물지 못한 두 입술에

슬쩍 뒤로 젖힌 머리와 그래서 더 도드라져 보이는 관능적인 목덜미,

'옛다' 하고 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약만 부지런히 올리는 흐릿한 가슴선은 감상자를

이미 시각이 아닌 촉각, 나아가 후각의 단계로까지 안내한다.








루벤스 「삼미신」

나무에 유채, 221×181cm, 1636~38


풍만한 그녀들의 다소 요란한 몸집들은 마치 연극 무대에 우르르 뛰어나온 것처럼 과장되어 있으나

살아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힘이 있다. 바로 루벤스의 힘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여자의 두터운

허벅지가 금방이라도 보는 이의 목을 조일 것 같은 운동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고야, 「옷 입은 마하

캔버스에 유채 95×188cm, 1801~03







「옷 벗은 마하」

캔버스에 유채, 97×188cm, 1800년경


프라도 미술관에 걸린 마하 그림 두 점 앞에는 루브르 미술관의 모나리자만큼이나 사람들이 들끓는다.

옷을 입은 여자와 똑 같은 폼으로 옷을 벗은 채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자가 나란히 걸려 있는 모습에

그림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들조차도 "어, 저거 벗기 전, 벗은 후 아냐?" 라며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다가서서 그림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예쁘고 근사하게 잘 빠진

몸매와는 다소 거리가 먼, 축 처진 가슴과 거칠게 마무리한 듯한 붓질이 눈에 거슬린다.

기름기 좌르르 흐르는 신디 크로퍼드의 각선미를 기대하던 그네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듯,

누워있는 여자는 밥하다 말고 '에라이 한숨 자자' 하고 드러누운 집사람 몸매 수준(?)밖엔 안 되니 말이다.








고야 「알바 공작부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10×149cm, 1797


고야와 염문을 뿌린 알바 공작부인이 마하의 주인공이 아니냐는 설이 무성했다고 한다.








뭉크 「마돈나」

석판하 61×44.1cm, 1895~1902


우리에겐 「절규」라는 그림으로 잘 알려진 뭉크.

대상을 그럴싸하게 배껴내는 일을 그만두고, 보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 속이 드러나게 대상을 표현하는

기법을 미술에서는 표현주의적 기법이라고 한다. 뭉크가 바로 그 표현주의의 중심에 선 사람이다.


그가 그려낸 마돈나를 보라. 그녀는 거의 흡혈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퀭한 눈은 성적 욕망으로 얼룩져서 한 치 앞도 못 보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더 이상 여성은 마돈나로 상징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식의 죽음까지 보듬는 아름다운 그녀가 아니다.


그러나 겁내지 마라. 그대들이 아름답다고 극찬하던 우리의 몸이 관념 속에서나 존재했던 것처럼,

그대들이 악녀로 묘사하는 저 일그러진 마돈나도 그대들의 치기 어린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르베, 「샘」

캔버스에 유채, 128×97cm, 1868


쿠르베는 사실주의 화가로 불린다.

'샘'이란 그림에 나온 여자의 엉덩이를 보라, 너무 커서 두려움까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세상엔 저런 엉덩이를 가진 여자가 더 많다는 사실에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쿠르베 이전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는 한마디로 성형미인들이 등장 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듯, 그들은 벗었으되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여자들을 원하는 주문자들을 위해,

더 나을 것도  더 못할 것도 없는 현실의 모델을 앉혀놓고 가슴은 키우고 허리는 더 잘록하게

깎아내고 엉덩이는 적당하게 잘라내거나 붙이는 작업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구에르치로 「수산나와 노인들 」

캔버스에 유채, 175×207cm, 1617


화려한 조명을 받고 선 여인네의 모습이 고혹적이다.

 목욕하는 그녀를 엿보고 있는 두 노인네가 극단적으로 어둡게 처리되어 있는 점에서 바로크적 기질이 엿보인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조금은 과장되고 몸놀림이 현란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명암에서도 빛과 어둠의 처리가

과장되어 있다. 구에르치노의 붓놀림이 바로 그런 바로크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풍텐블로파, 「가브리엘 자매」 (부분)


프랑스의 앙리 4세는 자신의 왕비가 될 가브리엘의 가슴을 유난히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가슴이 하도 아름다워서 그림에 그녀의 가슴을 노출 시키도록 화가들을 종용했고, 화가는 감상자가 그녀의 가슴에

눈이 갈수밖에 없도록 다른 여인이 그녀의 젖꼭지를 잡고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왼쪽의 여자는 왕의 처제가 될 사람이다. 오른쪽 여자는 왕비가 될 아름다운 가슴의 소유자이다.


"언니의 이 아름다운 젖꼭지가 왕의 가슴을 설레게 했어"

"그래, 그 덕분에 난 이 반지를 들고 있어."


자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풍텐블로파, 「가브리엘 자매」

나무에 유채, 96×125cm, 1595


자세히 보라. 그녀의 가슴을. 광고에서 자랑하는, 성형 전의 볼품없을 정도로 작은 가슴은 아닌가?

대체로 프랑스는 이전의 앙리 2세의 애첩도 그랬고, 후대의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랬듯이

작고 소담스러운 가슴을 사랑했다고 한다.


여자들이여. 당신은 스스로 곧 앙리 4세의 왕비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가슴을 가졌다고 생각하라.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게 수술비보다 싸게 먹히지 않는가?









마그리트 「강간」

캔버스에 유채, 73.2×54.3cm, 1934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곧잘 꿈의 세계, 인간의 무의식,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놓인 아슬아슬한 삶의 철학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붓끝 자국 하나 느낄 수 업슬 정도로 완벽해서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는끼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가 그련잰 세계는 의외의 장소에 의외의 대상이 놓인,

즉 우리의 무의식이나 꿈에서나 존재하는 어떤 환상들이다.


아마도 '강간'이라는  이 작품에서 화가는 남성들이 여성을 보는 시각을 꼬집고 싶었거나,

좀더 좋게 말하자면 자신이 여성을 보는 시각을 반성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혹은 '남자들은 당신네 여자를 다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조심하시오'라는 경고를 담은 것일 수도 있다.








보테로 「편지」

캔버스에 유채, 149×194cm, 1976


우리와 거의  동시대인인  이 화가(1932년 생)가 인간의 몸을 이렇게 심각하게

 왜곡시킨 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에 만연한 '미적 기준'에 대한 조롱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다 비만덩어리들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비만이 아름다움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페스트푸드와 소비문화에 중독된 사람들의

과식이 빚어내는 추악한 비만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대리석, 높이 243, 1622~25


아슬아슬하게 금방이라도 다음 동작이 튀어나올 듯한 이 조각상을 보라.

우선 조각의 주인공은 그 잘난 남자의 축에 속하는 제우스의 아들로 의학의 신,

궁술의 신이자 악기를 다루는데 능숙한  아폴론이란 신이다. 그리고 그의 팔에 움켜잡힐 듯하지만

거부하는 몸짓으로 고개를 한껏 젖히고 선 여자는 강의 신의 딸 다프네이다.


베르니니라는 조각가는 이전 시대의 근엄하고 늘 그렇게 부동자세로만 서서 자신의 균형 잡힌 몸매만

자랑하던 고전적인 조각과는 달리 인간의 휘몰아치는 감정과 몸의 움직임을 큰 스케일로 묘사해낸

다분히 바로크적인 기질의 조각가였고, 그 어쩔 수 없는 두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자기 스타일로 잘 표현해냈다.








칼로,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내 마음속의 디에고)

메이소나이트에 유채, 76×61CM, 1943


소아마비로 절룩거리는 다리,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쇠막댁가 척추를 뚫고 들어오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던 여자.

임신과 유산, 게다가 알고 보니 그 유산은 사고의 후유증뿐 아니라 선천적으로 협소한 자신의 자궁 탓이기도 했다.

육십 평생을 간질로 고생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 썩어 들어가는 발가락이 결국 발 하나를 다 잘라내야 할 정도의

치명타가 되어버린 무서운 사소함, 골수이식 수술의 부작용으로 이어진 열 몇 차례의 대수술,


그 아픈 육신에도 살아 번뜩이는 이념에 대한 향수와 비오는 날 열린 정치 집회에 참석하느라 걸려버린 페렴,

그리고 죽음, '프리다 칼로'라는 여자의 인생을 무리하게 나열하자면 이렇다.


디에고 리베라라는 사나이가 있다. 멕시코의 벽화운동가이다. 리베라는 칼로의 남자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한평생 당당함이 그녀의 수식어였던 것처럼 그녀는 당당하게 그를 사랑했다.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와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림을 택했다.


그러나 육신의 아픔만큼 리베라는 그녀를 아프게 했다.  리베라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수많은 여성과 관계했다.

그러나 그렇게 망가진 몸뚱이로도 잉태를 꿈꾸듯,

그녀는 육신만큼 망가진 자신의 가슴에 리베라에 대한 사랑을 박아 넣었다.










칼로 「디에고와 나」

캔버스에 유채, 30×22cm


리베라에 대한 칼로의 감정은 사랑 이상이었다.

리베라의 이마에 지혜의 눈을 하나 더 그림으로써 그를 신격화하기도 했다.

칼로는 자신의 이마에 리베라의 초상을 그린 작품을 여러 점 남겼다.








클로델, 「중년」청동,

163×114×72cm, 1893~1903


「카미유 트로델」이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비로소 알려질 정도로 그녀는 평생을 그리고 그 후에도

로댕의 그림자에 가려진 가련한 예술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댕 갤러리에 전시된 그녀의 작품은

그녀가 그저 로댕의 연인이 아니라 위대한 여성 조각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43세의 로댕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공공연하게 애정행각을 벌리고 다니는

로댕과 자주 격렬하게 다투었고, 결국 그 사랑이 파국에 이르렀다. 그리고 천재적인 예술적 소양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정신병원에서 30여 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로댕과의 15년 간의 사랑은 결국 오랜 감금생활이라는 뼈아픈 결론으로 끝이 났다.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0×65cm, 1917


모딜리아니, 우리에겐 목이 길쭉한 여자들의 초상화로 널리 알려진 화가이다,

수려한 외모에 파리의 뒷골목을 연상케 하는 짙은 눈동자는 누구라도 빨려들 수밖에 없을 정도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를 사랑한 여자는 많았고, 그 역시 사랑한 여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를 마지막으로 지킨 여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잔 에뷔테른, 그녀는 겨우 열 아홉 살. 모딜리아니는 폐병과 과음으로 지친 육신을 가진 서른세 살의

가난한 그림쟁이였다.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결혼생활 3년여 만에 술에 취한 채 거리를 방황하던 그는 그녀의 품으로 돌아와 피를 토해내곤 쓰러진다.

그리고 이틀 후,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드릴게요'라던 맹세를 일삼던 그 가여운 여자는

아파트에서 투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중이었다.


그래서인가. 그가 그린 그녀들은 오로지 모딜리아니라는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인형들처럼

생기가 없다. 그가 그린 슬픈 여자들의 목덜미에서 그를 향한 서글픈 사랑의 전조들이

자꾸만 전해지는 것 같다.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

캔버스에 유채, 181×220cm, 1914


누군가 그랬다. '사랑은 일종의 흥분상태이다. 그리고 그 흥분상태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누구도 그 흥분상태에서 오래 견딜 수 없으므로.' 아마도 사랑은 봄볕 속의 아른거리는 현기증 같아서

그 속에 있을땐 그저 나른하게 젖어들고 취한 채 영원한 휴식을 꿈꾸게 하지만

 결국 해는 지고 봄은 간다. 봄날은 간다. 이 소리다.


그림 속의 사내는 코코슈카 자신이고 그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알마 말러이다.

알마 말러는 유명한 작곡가 구스트프 말러의 아내였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학식으로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구스타프 말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녀가 말러의 피를 '말려' 죽였다,

소리까지 할 정도로 그녀는 남자의 혼을 송두리째 빼버릴 만큼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던 것 같다.


그녀를 위한 구스타프 말러의 여러 곡들이 그렇고, 미완성으로 끝난 마지막 교향곡 10번은 그녀와

당대의 유명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사랑에 대한 구스타프 말러의 분노와 원망으로 얼룩져 있다고 한다.









들라크루아, 「자식을 죽이는 메데이아」

캔버스에 유채, 260×165cm, 1838


같이 죽겠다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한을 품은 오뉴월에 서리 내리는 그 섬뜩함으로

제 자식을 둘씩이나 죽여버린 어미가 있다. 물론 신화 속 이야기이다.


서양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정도로 생각하면 될 이 이야기에서 낙랑공주 역할을 한 이는 바로 메데이아이다.

호동왕자 격인 이아손은 삼촌이 왕위를 찬탈하자 부모와 함께 숨어 지내다 힘을 기른 뒤 당당하게 삼촌 앞에

나타나 이제 왕위를 내놓으로고 요구한다.

이에 삼촌은 콜키스라는 나라의 황금 양털을 가져오면 왕위를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뻔한 이야기겠지만 그 황금 양털은 누구도 근접하지 못하고, 감히 건드렸다가 살아난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용맹한 이아손은 콜키스로 간다. 그러곤 역시 낙랑공주의 도움을 받는다.

사실 황금 양털은 그 나라의 맥을 이어주는 귀중한 보물이다.


그러나 콜키스의 공주였던 메데이아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황금 양털을 이아손에게 넘기고,

추격하는 아버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인질처럼 끌고 왔던 동생마저 죽여버린다.

아들의 죽음에 우왕좌왕하던 사이 이아손가 메데이아가 탄 배는 유유히 바다를 건너갔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동생을 죽이고 아버질 배반하고, 찜찜하지만 그래서 사랑이 세상 무엇보다

 무서운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아손의 배신이었다. 살아보니 섬뜩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아손은 다른 나라 하나를 더 합병하는 조건으로 그 나라 공주와 결혼을 약속하고

 메데이아게 결별을 선언한다. 거의, 아니, 완전히 미쳐버린 메데이아는 그 나라 공주를 죽이고

복수의 제물로 제 자식들을 죽인다.


화가 들라쿠아는 두려움에 가득 찬 채 대롱거리는 두 아이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메데이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당시 '낭만주의'는 달콤함과 밀어 같은 부드러움만 떠오르지만,

 들라크루아에게 낭만은 인간의 본능속에 존재하는 사악함과 부도덕함, 즉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은

'원초적 감정'을 드러낸다.









카라바조 「요한의 목을 든 살로메」

캔버스에 유채, 91.5×107cm, 1606


서양미술 화집을 들추다보면 의외로 남자를 겁주는 그림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그림이다.

극적으로 대비되는 명암, 즉 밝은 쪽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밝고 어두운  쪽은 너무 어두워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만든 카라바조의 그림은 마치 연극무대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다.


이런 어둠과 밝음의 극단적인 대비는

그림 속 인물과 상황을 들여다보는 감상자를 더욱 긴장하게끔 유도한다.

이 양식을 우리가 미술사에서 흔히 말하는 바로크적 기질의 하나로 이해하면 된다.


루 살로메를 떠 올리지만, 이 살로메는 그 낭만적인 여자와는 거리가 먼 치명적인 요부,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팜므 파탈이다.


헤롯이란 왕이 있었다. 원래 왕이었던 형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뒤

형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취한 사나이이다. 이른바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물론 악역은 남자만 맏는 게 아니다. 살로메 역시 희한한 여자이긴 마찬가지다.


사건은 이렇다. 헤롯이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정통성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요한이었다. 바로 이 의로운 남자를 살로메가 짝사랑 한것이다.

일언지하에 살로메의 구애를 거절한 요한. 살로메의 뚜껑이 열릴만 했을 건 충분히 짐작이 간다.


어느 날, 헤롯은 성대한 연회를 베푼다.

 살로메는 의붓아버지 앞에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춤을 추고,넋이 나간 헤롯은 그녀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짐작컨데 그가 던진 미끼는

'네가 원하기만 하면 네 엄마를 몰아내고 널 왕비로 올려 줄 수도 있으니 수청이나 들을래?'라는

의미의 점잖은 표현이었을 게다.

그러나 뜻밖에도 살로메가 밝힌 소원은 요한의 목이었다. 무시무시한 여자다.

사랑을 한순간 광기로 폭발시킨 것이다.


살로메는 죽은 그의 입에 입을 맞추고 혀로 그의 얼굴을 핥아냈다고 한다.

그러니 서양에서 요부를 말할 때 늘 살로메가 도마에 오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살로메는 결국 헤롯에게 죽음을 선사받는다.

 그림 속의 승리자는 결국 더 나쁜 남자에게 철퇴를 맞는 것이다.










르동, 「감은 눈」

캔버스에 유채, 44×36cm, 1890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만큼이나 더 많아진 고통에 생채기로 몸을 내던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비로소 짧은 순간만큼이나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나 자신 속으로의 몰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르동이란 화가가 살던 그 시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이전의 사람들보다 더 고통이 극심한시절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과 외부 세계의 고통에 뭐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팽배했던 시절이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자본이 팽배하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그저 고해성사와 금욕만으로는 이 비뚤어진 세상을 이겨낼 힘이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뭔가 바꾸겠다는 개혁의 의지가 꿈틀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상 속에 어떤 이들은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나 이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 눈을 감은 채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편안한 표정에

갑자기 유한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비록 지금은 세상 밖을 떠도는 듯한 무아지경에 빠져있지만 어느 순간 눈을 뜨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먹구름이 달려들 기세처럼 보이는 것은 그나마 꿈조차 꾸고 있을 시간도 없는

우리네 시민들의 악의에 찬 심상 때문일까?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 비너스의 탄생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5cm, 1485


세상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게 가이아라는 땅덩어리였다고 한다.

이 땅덩어리가 혼자 있기엔 너무 심심해서 우라노스라는 하늘을 만들었다.

즉 하늘은 땅의 자식인 셈이다.


둘은 너무 심심해서 사랑을 했는데 아마도 최초의 근친상간이 그렇게 시작된 모양이다.

하긴 쉽게 생각해도 우리 인간의 선조의 선조의 선조를 역추적해 남자 한두 명과 여자 한 두명만

있을 시기까지만 거슬러올라가면 이미 그들의 결합은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는 근친의 성혼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 감히!'라고 분개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둘은 결합하자마자 자식들을 줄줄이 낳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라노스가 지치지 않는 생식력으로 자식을 퍼뜨리려고 하자 가이아는

'더 이상 너 닮은 애 낳고 싶지 않아'라며 말 잘 듣는 아들 크로노스로 하여금 아버지의 생식기를 잘라버리게

했다는 거다. 그 잘린 생식기가 날아다니다가 바다에 빠졌고 바다를 유유히 떠돌다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품에 의해 비너스(베누스)가 탄생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다.


이 그림의 비너스는 후대 화가들 모두에게 전형적인 비너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라. 비너스의 왼쪽 팔을. 너무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해부학이라면 요즘 어지간한 의대생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했을 르네상스의 화가 보티첼리답지 않게

팔뚝의 모양새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정말 중요한 것' 이란 단순한 여성의 성기가 아니라,

그대들이 목숨 걸듯 덤벼들어도 내줄 수 없는 여성들의 단단한 정신적 순결이라고 말하면

 비약이 너무 심한가?


어쨋거나 그녀는 그대들을 쳐다본다.

"난 미의 여신, 당신들은 내 벗은 몸이나 감상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가련한 감상자."

그녀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를 타고 전해온다.







上, 부그로, 「비너스의 탄생」

캔버스에 유채, 303×216cm, 1879


下, 르동 「비너스의 탄생」

88.4×65, 1912년경










브론치노 「시간과 사랑의 알레고리」(비너스,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

나무에 유채, 146.5×116.8cm, 1540~50


그림은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 걸까?

그렇다 최소한 그림은 몰라도 보이긴 하지만 알면 더 잘 보인다. 대위법이 뭔지, 화성악이 뭔지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가인지, 낭만주의 음악가인지 몰라도 듣다보면 자연스레 몸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음악의 야들야들함을 그림에서 기대하기란 좀 힘겹다.


지금 이 그림이 그렇다.

이 그림이 이른바 매너리즘 시대의 그림이라는  이 그림은 언뜻 보면 뭐 그냥 잘 그린 거 같긴 한데

등장인물들의 폼새가 시장판 보다 더 시끄럽다. 르네상스의 대가들이 규격에 턱턱 맞는,

그리고 해부학적으로도 거의 손색이 없을 만큼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에 비해,

매너리즘 화가들은 인체르 조금 즐이거나 줄여서 기기묘묘한 느낌이 들게끔 장난질을 쳐 놓았다.


장난이라고 너무 폄하하지는 말자. 농담도 머릿속에 든 게 없으면 하기 힘들듯이,

그림을 이렇게 기형적으로 늘이고 줄이는 일도 기본이 안 된 화가들은 엄두도 못 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이 그심 속에 숨겨진 코드는 워낙 복잡하다.


사과를 든 채 이상스레 길쭉하게 느껴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여자는 비너스이다.

보통 그림에서 비너스는 사과를 들고 있으니까, 화살통을 두른채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역시나 좀 길쭉해 보이는 아이는 큐피트(에로스)이다. 비너스의 아들인데, 엄마의 가슴을 만지는 폼이

'젖 주세요' 라는 애교가 아니라, 뭔가 습하고 음흉한 속셈이 있어 보여 보기에 껄끄럽다.


아무튼 비너스나 큐피트가 등장하면 늘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된다.

장막을 걷어내는 노인네는 시간의 신이라고 한다.

즉 사랑이란 것이 이렇게 시간이란 장막을 걷어내다보면 결국 별게 아닌 게 된다는 뜻일 게다.

벌통을 들고 뱀꼬리가 달린 몸을 한 채 오른쪽 귀퉁이에서 스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는 허

무, 속임수 등을 상징하는 하나의 코드이다.


큐피트 뒤에서 자신의 머리채를 고통스레 잡고 있는 남자는 사랑에서의 질투를 상징한다.

자세히 파고들면 끝도 없을 이야기지만, 대충 몇몇 코드로 짧은 글짓기를 하자면 그림이 전하는 주제는

사랑이란 것의 이중성, 그리고 속절없음, 정도가 된다.











브론치노 「행복의 알레고리」

동판에 유채, 40×30cm, 1564


가운데 풍요의 뿔을 들고 있는 여인이 행복을, 그 옆에 큐피트는 사랑을,

하늘 위에서 트럼펫을 부는 천사는 명예, 월계관을 들고 잇는 천사는 영광을 의미한다.

또한 아래 오른쪽에 있는 여자가 들고 있는 것이 운명의 바퀴, 바닥에 굴욕적으로 누워 있는 사람이

평화의 적을 상징한다. 이 그림에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상징이 숨어 있다.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식」

나무에 유채, 82×60cm, 1434


흔히 미술사에서 북유럽과 남유럽의 그림은 잘 비교된다.

쉽게 말하자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나쪽은 풍이 센 아름다움이고, 북쪽은 쫀쫀하지만 현실적인 안목이

있단 소리다. 아마도 꼼꼼하고 섬세한 북유럽에서 시계, 자동차 등의 정밀 산업이 발달한 배경과

남유럽에서 디자인과 광고 등의 산업이 발달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전통들은 종교개혁과도 맞물린다.

구교권으로 상징되는 남유럽의 그림들은 주로 성당을 위한 장식과 홍보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고

당연히 아름다움 그 자체와 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신교권에서는 교회 장식을 위한 그림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려 그런 사치스런

장식을 혐오했다. 당연히 북유럽 화가들을 먹여 살리는 계층은 검소함과 성실함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 층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림의 주제도 훨씬 더 현실적이고 서민적 과시욕에

걸맞은 양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림의 정교함은 숨이 막힐 정도이다.

거울 바롱 ㅟ에 "나, 얀 반 에이크는 이곳에 있었다"라는 문구가 그려져 있다.

게다가 볼록한 거울에 비치는 다른 증인의 모습과 충실하게 생긴 귀여운 털복숭이 강아지의 털까지

화가의 붓질은 거의 자신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기 위한 고행으로 보일 정도로 정교하다.


그림을 두고 풀어헤치기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귀뜀하자면,

촛불 하나만 켜둔 것은 신성한 결혼을 쳐다보는 유일한 그리스도의 눈을  뜻한다.

티없는 거울은 순결, 게다가 신발을 벗은 주인공 부부는 이 결혼식이 치러지는 장소가

아주 성스러운 곳임을 상징한다. 강아지는 충성을 뜻하고

사과는 아름다운 여인에게만 바치는 그 무엇으로 뜻을 맞출 수 있다.


이 상징들을 조합해서 이야길 풀어내자면,

순결하고 아름다운 부부의 결혼은 하느님이 맺어준 신성한 약속이며 서로 충실할 것을

만인에게 기도하는 뜻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다비드, 「사비니 여인의 중재」

캔버스에 유채, 386×522cm, 1796~99


다비드라는 이 화가는 나폴레옹의 충성스런 화가였고,

이 그림 속에서도 무시무시하고 처절한 싸움을 시종일관 고전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윤곽이 분명한 형태, 정확한 좌우대칭에, 동경하던 사내들의 조각처럼 늠름한 골격,

하늘거리는 옷 주름 등,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세밀한 묘사가 그렇다.


대상 하나 하나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외려 하나도 사실성이

 없어 보일 정도다. 오죽했으면 프랑스의 대문호 스탕달도 '저렇게 벗고 싸우다간

온몸이 피투성이 되기 십상이겠군'이라고 비아냥 거렸다고 한다.


내용인 즉,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자나 깨나 영토 확장에 목을 맸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이 이어졌고, 이젠 남자라곤 씨가 마를판이었을 거다.

로물루스는 싸울 인력뿐만 아니라, 자신이 건국한 나라르 이어갈 후손 걱정에 애가 닳았을 거다.


생각해낸 것이 사비니라는 마을 여인들이었다. 로물루스는 전쟁 대신 술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겉으론 평화를 외치면서 밤새 사비니 마을 남자들에게 술을 권하고 또 권했다.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사비니 남자들이 만취한 것을 확인한 로마 병사들은

 그때부터 갑자기 야수로 변해 사비니 여인들을 무작위로 겁탈하고 납치해갔다.

끌려간 여인들은 로마인들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아이를 낳고 길렀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사비니 남자들은 빼앗긴 아내와 딸,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적의 영토를 쳐들어갔다.

그림은 바로 이 싸움의 한 장면이다.

기막힌 싸움을 재현하면서도 조각같은 미적 감각을 탁월하게 표현해낸

 다비드의 냉정한 신고전주의의 화풍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오늘도 전쟁을 우아하게 장식하려는

 몇몇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레이턴, 「페르세포네의 귀향」

캔버스에 유채, 203×152cm, 1891


페르세포네라는 미녀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 신화 속의 여인이다.

신화에 나오는 여자치고 안 예쁜 여자라곤 거의 없으니 그 아름다움에 대한 구구한 해설은

필요 없을 듯 하다. 그녀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이었다. 대지의 여신이 하는 일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산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에 눈이 학 돌아버린 죽음의 신, 하데스가 그만 그녀를 납치해버린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치고 인간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이는 별로 없다.

그래서 성서보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예쁜 여자는 일단 가지고 보자, 라는 죽음의 신의 심보가 고약하다.


결국 이럴 때 나서는 신이 있다.

천하의 바람둥이로만 소문났지만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두 주관하는 제우스는 신들의

이런 대소사에 마지막 등장인물로 나타나는 해결사다. 그는 자신의 전령사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낸다.

물론 '얼른 돌려줘라'였다. 그러나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극진히 사랑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제우스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페르세포네에게 석류 몇 알을 마지막 선물인 척 주었다.


죽음의 세계에서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영원히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규칙을 페르세포네는 몰랐던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유가 아마도 황천길에 목이 너무 말라

막걸리라도 한 사발 받아 마신 탓이려니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제우스는 하데스의 그녀에 대한 집착과 딸을 잃고 대지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어미의 심정에 이런 중재안을 내놓았다. 좋다, 일 년 중 4분의 1은 하데스와 있어라. 그러나 나머지는 제 어미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하라. 하데스도 데메테르도 그 조건을 수락한다. 그래서 겨울이란 계절이 생겼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엔 이런 고상하고 고풍스러운 그림이 인기가 있었다.

레이턴 경은 그녀의 총애를 받는 유명 화가였고 대륙의 유럽이 인상주의 화풍에 휩싸일 때에도 영국만큼은

이런 고전적이고 우아한 그림 양식이 꽤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림 속에는 죽음의 세계에서 막 빠져나오는 페르세포네와 그녀를 부축하는 제우스의 전령사 헤르메스,

그리고 그녀를 맞이하는 데메테르가 보인다. 보통 헤르메스는 그림 속에서 뱀이 둘둘 말고 있는 지팡이와 모자,

그리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잇는데 이 그림에서 헤르메스 장화조차 신지 않았다.


지하 세계의 어둠이 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다.

그리고 자식을 보듬어 안으려는 데메테르 뒤로 환한 빛이 보인다.

자식을 그리워 하는 어미의 마음은 어떤 이유에서건 환한 빛이다.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캔버스에 유채, 491×716cm, 1818~19


달콤한 것은 낭만이 아니라고 했다. 낭만에는 이성으로 정화되지 않은 감정의 처절함이 늘 배어 있다.

그래서 사랑도 때론 처절하지 않던가. 제리코라는 화가는 흐랑스 화단에서 낭만주의적 화풍으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색채에 대한 집착과 인간들의 격한 감성을 거친 붓으로 드러내는 데 주력한

제리코는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통탄할 수밖에 없는 그 당시의 한 사건을 그림으로 옮겼다.


사건 내용은 이렇다. 1816년 여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에 이주할 이주민들과

군인, 도합 400여 명을 태운 메두사호가 난파를 당했다. 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리면 그 아비규환의

순간이 어떠했을 것인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급하게 뗏목을 만들어 작은 범선인 아르귀스호가 구조의 손길을 뻗치기까지 12일간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그 악몽 같은 표류의 끝에 남은 사람은 15명, 이른바 '고급'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10퍼센트만 겨우 목숨을 구한 셈이다.


화가는 이 극적인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 직접 생존자들을 만나고 뗏목의 모형까지 만들어보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체 안치소를 찾아 시신들을 스케치하는 등의 열의를 보였다. 썩어가는 시신과

때마침 지나가던 배라도 발견한 듯 살려달라고 천을 흔들어대는 흑인의 모습에서

 죽음과 삶의 묘한 대조가 엿보인다.


죽은 이조차 움직임이 있어 보이는 이 동적인 구조, 분명하게 경계를 드러내는 명암과 시종일관

비련을 벗지 못하는 어둠침침한 색채는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정적인 구조와 잘 빠진 색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캔버스에 유채, 243×233.7cm, 1907


아비뇽이란 곳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황청의 치욕적 사건 '아비뇽의 유수'의 그곳이 아니다.

에스파냐 제2의 도시로, 우리에겐 황영조를 떠올리게 하는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588쯤 되는

지명이 바로 아비뇽이다. 이쯤되면 이 아가씨들 직업이 짐작되지 않는가?


당시 평론가는 이 그림을 처음 보고선 '깨진 유리 파편이군' 이라고 말했다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 여자들 몸이 온통 쪼개졌다가 다시 붙여놓은 듯하다.

왼쪽에서 두번째 여자의 '시선집중요' 침대 시트도 딱딱한 파편처럼

갈가리 찢어졌다가 다시 적당히 붙여놓은 듯하다.


왼쪽 귀퉁이의 여자와 오른쪽 두 여자의 얼굴은 가면이다. 그것도 원시 가면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와 옛 이베리아 반도 원시부족들의 가면을 피카소가 그림에 차용한 것이다.


이처럼 험악하고 엉뚱해 보이는 이 그림이 미술사라는 커다란 물줄기를

현대로 이끄는 하나의 출발점이자 분기점이 되었다 한다. 피카소는 서양의 화가들이

목숨처럼 덤벼들던 원근법도, 명암법도, 해부학적인 요소도  다 무시해버렸다.

이젠 대상을 보이는 대로 혹은 느껴지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대상이 가지고 있던

속성을 상자 펼치듯 다 펼쳐서 혹은 잘라내서 평면의 캔버스에 노출시켜 버렸다.


어쨌거나 여자들 앞에 놓여 있는 포도송이가 을씨년스럽다.

그 포도송이가 그들 아비뇽 처녀들의 고단한 저녁식사인지, 아니면 '날 잡아드세요'라는

굴욕적인 여자들의 이야길 대변하는지는 모르지만, 집단으로 갇혀있는 창녀들의 파헤져진 심경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조각조각난 그녀들의 몸, 그리고 원시적인 힘으로 상징되는

고도의 성적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갇힌 채 어색한 호객행위의 몸짓을 하고 있는

 다섯 여자에게서 우리는 측은지심을 느낀다.







In The Palm Of God's Hand - Frederic Dela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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