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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신과 종교의 생성과 소멸 1

종교를 만든 종교들


1. 수메르와 바빌론 신앙

(종교의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는 현재 이라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와 바빌론에서 시작되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에 기록된 창세 신화보다 수메르와 바빌론 신앙의 연대가

약 2000년이나 더 빠르다. 수메르와 바빌론 등 메소포타미아 신앙은 유대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구약성경에 언급된 창세 설화가 그보다 더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신앙과 놀랄만큼 흡사했기 때문이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군 지역으로 유명하다. 수메르인이 믿었던 종교의 역사도 가장 오래되었다.

수메르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그들이 나긴 신화는 아카드인과 가나안인, 바빌론인과 유대인 등

후세의 다른민족들에게 전승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수메르 신화의 원형은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다.

수메르 신화의 원전 <에리두 창세기Enidu Genesdis>sms 점토판에 적힌 상태로 발굴되었지만, 그 중

상당수가 파손되어 그 내용은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점토판을 해독하여 알아낸  수메르 신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바다의 여신 '남무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의 신 '안'과 대지의 여신 '키'를 낳았다.

안은 키와 결혼하여 엔릴과 엔키, 닌릴을 비롯해서 수많은 신을 낳았고, 안과 키의 자녀 신들은

서로 남신과 여신끼리 짝을 지어 다른 자녀 신들을 낳아서 지금의 세상을 이루었다.

안은 최고의 신이 되었으며, 두 아들인 엔리과 엔키에게 지상을 다스리게 했다.



수메르 문명 이후에 등장한 바빌론 신화는 수메르 신들을 이름만 약간 바꾸어서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안은 아누Anu, 엔키는 에이Ea, 엔릴은 엘릴Elil, 이난다는 아쉬타르lshtar, 우투는 샤마쉬shamash,

난나는 신Sin이라고 했다. 바빌론 신화를 기록한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에서는 바빌론인들의

최고 신인 마르두크Marduik를 부각시켜 창세 설화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포장했다.



아주 먼 옛날, 세상에는 오직 만물의 신 압수Apsu와  짠물(바다)의 여신 티아마트Tiamat,

생명의 신 몸무Mummu만이 있었다. 이들 중 압수와 키아마트는 부부가 되어 수많은 신을 낳았다.

그런데 압수와 티아마트의 후손인 나누와 에아 등이 너무나 시끄럽게 굴며 부모를 괴롭혔다.

압수는 자손들이 큰 소음을 일으켜 평화를 어지럽히자 이들을 죽이려 했지만, 이 사실을 안 에아가

먼저 선수를 쳐 압수를 죽이고 몸무를 가둬버렸다. 이에 분노한 티아마트는 자신이 낳은 괴물인

용, 뱀, 사자, 전갈 등으로 이루어진 대군을 이끌고 후손들을 멸망시키려 했다. 그러나 에아의 아들이자

마법의 신인 마르두크가 나서서 티아마트를 죽이고, 그녀의 몸으로 하늘과 땅과 강과 별 등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다.



실제로 바빌론 시대에 가장 열렬한 숭배를 받은 신은 마르두크였다.

 바빌론인들은 마르두크가 우주의신비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를 점성술의 창시자로 여겼다.

하늘의 신이 바다의 용을 죽여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지킨다는 내용의 신화는 바빌론 신화에서 처음  등장하여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시리아 북부 우가리트 지역의 신화에는 용 모습을 한 바다의 신  야무를 바알신이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내용이 있다. 이 부분은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의 야훼가 바다괴물 레비아탄을 죽이는

 이야기로 살짝 바뀌었다. 오늘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경전이 된 구약성경에 들어간 이 설화의 기원은

 바로 바빌론에서 비롯된 메소포타미아 신화였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는 점토판. 대홍수와 방주의 건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기원전 650년경의 것으로 확인된 아시리아의 점토판이 니네베에서 발견되어 현재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수메르어로 기록된 기원전 3세기 경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원본 점토판은 인멸되었다.











수메르인들이 특별히 중시했던 이난나 여신의 부조.


수메르인들은 이난나가 성욕과 풍요의 여신이라고 믿었다, 남녀의 성행위가 출산과 번색으로 이어지듯이 자연에도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난나 여신을 경배하는 행사에서는 남녀 간의 집단 성행위가 벌어졌다.






바빌론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던 마르두크의 부조





창세 설화


대부분의 종교나 신화들은 인간이 신의 사랑을 받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적인 사고가 담겨 있다.

그러나 수메르 신화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을 대신해 힘든

노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신을 대신해 힘든 노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바빌론 신화를 기록한 <에누마 엘리시>의 창세 설화도 비슷하다.

마르두크가 티아마트의 편에 선 사악한 신 킹구를 죽인 후 그 피와 진흙을 섞어, 땅 위에 살면서  신들을 숭배할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르두크는 인간에게 신을 위해 농사를 짓고 곡식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네뎔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1563년 작품 <바벨의 >


구약성경에 기록된 바벨탑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바벨탑의 본래 이름은 바빌론어로 신들의 문이라는 뜻의 '밥일루'다

바벨탑은 바빌론의 사제들이 높은 고에 올라가서 신들을 경배하기 위한 성전이었다.


수메르와 바빌론 신화의 창세 설화는 '인간은 신에게 철저히 종속된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은 신을 대신해 고된 노동을 하며

신에게 봉사하는 노예에 불과하고, 노동을 거부할 권리조차 없다. 애초에 신간이 만들어진 목적이 신을 대신해 일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 설화


수메르와 바빌론 신화에도 홍수 설화가 있다. 수메르 신화에서는, 신을 섬기는 사제인 '지우스드라'가 엔키로부터 계시를 받아, 인간의 소음에

분노한 신들이 장차 대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세상에서 쓸어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무 방주에 가족들을 태워 살아남았다는 내용이 있다.

방주는 약 7일 동안 계속된대홍수를 무사히 버텨냈다. 지우스드라가 목숨을 건진 데 감사하며 신들에게 소와 양을 제물로 바치자, 이에 감동한

 신들은 그를 낙원인 딜문으로 보내 영원한 생명을 주어 축복한다.


바빌론 신화의 홍수 설화를 담은 <네누마 엘리시>도 그 내용과 구조는 수메르 신화와 비슷하다. 다만 수메르 신화보다 나중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다. 방주에 탄 생존자의 이름은 지우수드라에서우트나피쉬팀으로 바뀌었고, 계시를 내린 신은

엔키의 바빌론식 이름인 에아가 되었다.






노아의 대홍수 때 지상의 모든 동물을 태웠다는 방주를 상상한 그림.

노아의 대홍수 설화는 수메르와 바빌론의 홍수 설화에서 유래했다.

- 미국 에드워드 힉스, 1846년. -





성경에서 신은 사악해진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포함된 우트나피시팀의 이야기에서 신은 그 수가 너무 많아지고 소란스러워진 인간들을 벌하려 한다.

이 두 이야기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 신(들)은 홍수를 일으켜 세상의 모든 남자들, 여자들, 아기들, 동물들을 멸망시키려 한다.
  • 신(들)은 정직한 인물 한 명을 선택한다.
  • 신(들)은 그 인물에게 여러 층으로 된 나무 방주를 만들도록 명한다.
  • 그 인물은 처음에는 그 명에 대해 불평을 표한다.
  • 방주는 피치로 틈이 봉해지고 많은 선실이 있으며 문은 하나이고 최소한 하나의 창이 있어야 한다.
  • 그 인물은 방주를 만들고 다른 몇 명의 사람들과 각 종류의 동물들로 방주를 채운다.
  • 거대한 홍수가 범람한다.
  • 최초의 산들은 물에 잠긴다.
  • 그 인물은 주기적으로 새를 보내 근처에 육지가 있는지 살핀다.
  • 처음 보낸 두 마리의 새는 방주로 돌아 오고 세 번째 새는 육지를 찾았는지 방주로 돌아 오지 않는다.(성경에서 처음 보낸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고(먹을 시체가 물위에 널렸기 때문에) 중간에 날려보낸 비둘기만 돌아오고 마지막 비둘기는 육지를 찾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 그 인물과 그의 가족은 방주를 떠나 동물 한 마리를 살생하는 의식을 치르고 그 동물을 희생양으로 바친다.
  • 신(들)은 희생양을 구울 때 나는 냄새를 맡는다.
  • 그 인물은 축복을 받는다.
  • 신(들)은 홍수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한다.





최초의 영웅 설화 길가메시와 엔키두




 길가메시의 부조 / 루부르 박물관 소장



길가메시 이야기가 써진 토판본은 여러 개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몇 개에는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시종으로 그려지고 있다.

수메르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고 노예에게 어느 정도 신분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시종이었다 해도 길가메시에게 있어서는 절친한 친구 같은 시종이었던 듯하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시종의 신분이 보장되었으며

관계는 상호 의무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길가메시 설화에 나오는 뱀이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훔쳤다는 내용은 그 후

중동의 다른 종교와 신화들에 큰 영향을 주어 뱀을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는 나쁜 동물로 인식케 되었다는 사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원형


수메르와 바빌론 신화의 신본주의적 개념은 유대교로 이어지고,  유대교를 계승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도인간이 신에게 복종하는

노예로서 존재한다는 내용은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대홍수 설화와 뱀에 관한 내용도 구약성경에서 '노아의 대홍수'와'에덴동산의

과일'이라는 테마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매년 겨울에 두무지가 죽고 그를 찾기 위해 이난나가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두무지와 함께 돌아와 풍성한 수확을 거둔다는 수메르 신화 역시 훗날 그리스로 전해져

 미소년 아도니스와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화로 변형되었다.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파멸 / 루벤스, 1615년


세계 인구는 약 74억 명, 그중 약 38억 명 이상이 구약에 기반을 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인이다.

유대인은 선진 문명의 수메르와 바빌론 신앙에서 많은 요소를 차용하여 구약성경을 썼다. 즉 수메르와 바빌론의 종교에서 유대교가

나왔고, 유대교에서 다시 기독교와 이슬람이 생성되어인류 역사에 거대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수메르와 바빌론의 고대 신앙은

 그 모습만 바꾸었을 뿐 오늘날까지 세계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게 매우 타당하다 봐야 할 것이다.




수메르가 위치했던 일명 ‘비옥한 초승달’ 지역


수메르가 위치했던 일명 ‘비옥한 초승달’ 지역







2. 오르페우스 신앙

(환생과 윤회)


"육체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 오르페우스 신앙 교리에서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본토 출신이 아닌,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에 해당하는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출신이다. 그는 시의 여신 뮤즈 중 한 명인칼리오페와 트라키아의 왕

옹아그로스의 아들로 음악의 힘을 통해 수많은 모험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가음악의 신 아폴론이라는 말로 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가 여러 갈래로 전승된 데다 유명한 영웅은 진짜아버지가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설정이 널리 펴져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제작된 오르페우스 모자이크 벽화.


시와 음악의 여신에게서 태어난 오르페우스는 음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신기에 가까운 음악 실력을 지닌 오르페우스는 이아손과

 헤라클레스 등 유명 영웅들이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대거 출정한 아르고스 원정대에 참여하기도 했다. 많은 영웅들을 물리적

 힘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위험에서 구했다는 이야기는 마법 그 자체이다.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동식물을 매료시키며, 날씨마저 조종 했다는 게 그리스 신화의 내용.





트라키야 여인들에게 구타당해 죽음을 맞는 오르페우스

알브레히트 뒤러, 독일, 1494년.



사랑하는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독사에게 물려 죽자 살아 있는 몸으로 직접 저승의 신 하데스와 만나아내를 돌려 달라고

담판을 짓기도 했다. 하데스는 그의 용기에 감동하여 돌려보내기로 결심하고 한 가지조건을 내 걸었다.

이승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뒤돌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조바심에 뒤돌아 보고 말았다는  뻔한 내용.  고향으로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상심이 컸던지다른 여자들에겐 관심을

주지 않았고 트라키아 여자들은 자신들의 구애를 무시한 오르페우스를 찢어 죽이고 만다.

하지만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살아남아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나 어쨌다나...




환생 사상


오르페우스를 신으로 섬기는 신앙은 대략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 남부 지역에서 나타났다.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모든 신을

낳았다는 기존의 올림포스 신앙(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신화)과 달리,오르페우스 신앙에서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태초의

가르치고 있다.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은 인간 사후에도 그 영혼은 다른 인간이나 동물로 계속 태어난다는 환생론을 신봉했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구너을 장악한 이후에도 환생론은 한동안 계속 남아 있었다. 3세기경 로마 철학자 플로니토스는 생존시

훌륭한 업적을 남기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죄악을 저지르면 동물이 되어 인간에게

학대를 받거나 잡아 먹히고 만다고  주장했다. 불교의 축생도와 일맥상통하는 애기다.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 우리가 잘 아는 한 사람, 바로 수학자 피타고라스다.





오르페우스의 신화

존 윌리엄 워터 하우스, 영국, 1900년






아테네 학당(부분)

라파에로 산치오, 1509년

아카데미에서 수학을 탐구하는 피타고라스. 그는 음악과 숫자의 규칙적인 운율 속에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 역시 사후 그의 추종자들에게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를 지배한 오르페우스 신앙


철학자 플라톤의 관념론과 이원론은 육체를 약한 것으로, 영혼을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이분법적 교리에서

 영향을 받았다. 육식 금지와 채식, 환생등을 주창한 오르페우스 신앙은 이후 마니교와 영지주의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나타난 보고밀파와 12세기 프랑스 남부의카타리파 같은 기독교 이단 종파들도 물질로 이루어진

 현세를 부정하고 영적 세계를 추구 했는데 이 역시 다분히 오르페우스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남부 톨루즈 이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카타리파.

결혼과 출산은 무의미하며 모든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십자군 전쟁의 잇단 패배로 실의에 빠져있던

유럽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로마 교황청에 의해 와해되었다.


페드로 베루게테, 스페인, 1499년 작품.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현자 비슈와미트라.

그는 명상을 통해 아예 신과 천국을 만들어냈다고 전한다.

신은 인간의 정신 능력에서 만들어졌다는 인도 철학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오르페우스 신앙에서 비롯된 윤회와 환생에 대한 믿음은 고대 로마 전성기인 5세기까지 폭넓게 존재했다. 그러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부터 기독교가 지배하면서 환생의 교리는 철저히 부정당하고 사라졌다. 이렇게 사라진 환생에 대한 믿음은

훗날 20세기 중엽 뉴에이지라는 이름으로 뜻하지 않게 부활한다. 힌두교와 불교 등 동양 종교철학을 폭넓게 수용한

 뉴에이지 운동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정신적 빈곤과 물질만능적 세계관에 환멸을 느낀 서구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어쩌면 뉴에이지 운동은서구인들 스스로 잊고 있었던 올페우스 신앙을

다른 이름으로 부활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이데아론은 이슬람권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언뜻 보기에 이슬람교와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무관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란같이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시행하는 나라들의 정책을 잘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얼마 못 가 사라질 허상에 불과한 대중문화와 유흥에 빠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고, 마찬가지로

영원불멸한 천국에 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이슬람교 교리에서도 하찮고 허무한 현실의 쾌락이나유흥 따위는

가치가 없다. 이러한 플라톤식 사상이 현실 분제를 도외시하고 오직 천구에 가기만 몰두하는 광신도들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순수하고 영원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2종교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2000년 동안 세계 역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데아론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이데아론이 오르페우스 신앙의 교리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결국 오르페우스 신앙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영향을 끼쳐 세계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 조르아스터교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대립)


"1만 번의 기도문을 외우는 것보다 한 번의 경작이 더 많은 수확을 거둔다."

- 로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에서


지금은 본고장 이란에서조차 신도 수가 3만여 명에 그칠 정도로(2016년 현재 이란 인구는 약 8000만 명) 그 흔적이 희미해졌지만,

조로아스터교는고대에 매우 중요한 종교였다. 100년 동안 서아시아를 지배했던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였으며

, 유일신을 믿는 3대 종교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로아스터.


그가 만든 종교는 오늘날 매우 미약해졌으나  그 핵심 교리들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연대 조차 확실치 않다. 기원전 13세기 혹은 기원전 10세기라는 설 등이

다양하게 전해진다. 기록으로 전해진 조로아스터교의 성립은 기원전 7세기 무렵이다. 경전에 따르면,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7세가 되던 해에 성직자 양성학교에 들어가 페르시아 신학 지식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로아스터는 신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기존의 다신 숭배에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20세 무렵 신학교를 나가 세상을 주유하다가 30세 어느 강가에서 '이 세상은 선하고 참된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사악한 신인 아흐리만의 전쟁터다, 인간이 구원을 얻으려면 아후라 마즈다를 따르고 아흐리만을 머리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조로아스터는 이러한 깨우침을 47세까지 주위에  전파했다. 조로아스터는 최고 신인 마즈다를 섬기고

 세계와 인류를 지키는 존재인 '천사' 7명을 고안했다. 이러한 천사의 존재는 훗날 유대교에 큰 영향을 끼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천사로 이어지게 된다. 조로아스터는 77세에 죽었고  후계자는 사위였다.


창시자가 죽은 후에도 조르아스타교는 건재했다. 기원전 7세기 메디아 왕국에서 조로아스타교를 받아 들이고

기원전 6세기 서아시아 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 제국에서 조로아스타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조로아스타교의 위상은 한층 굳건해졌다.





선과 악의 이원론


시간이 흘러 말세에 이르면 이 세상은 아후라 마즈다가 태초에 정해놓은 대로 최후으 전쟁과 심판에 휩싸인다.

 아르리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아후라 마즈다와 전쟁을 벌이지만, 아후라 마즈다의 군대가

승리하여 아흐리만과 그를 따르는 모든 무리들을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다. 

지상에는 사오시안트라는 구세주가 등장하여 인류를 구원하며,  아후라 마즈다가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가 세워져 무한한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선과 악의 이원론이 조로아스터교가 담고 있는 핵심 교리였다.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과 거의 흡사하다.

아후라 마즈다와 아흐리만과 사오시안트라는 이르을 신과 악마와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았다. 또한 신이 6일에 걸쳐 세상을 창조하고 그 다음에 쉬었다는 조로아스타교의 교리는 구약성경의

천지창조에 영향을 주었다. 안식일의 개념은 결코 유대인들이 독자적으로 창안해낸 것이 아니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는 '마구스mAGUS(복수형은 마기Magi)'라고 불렸는데 

마법을 뜻하는 영어 단어 매직magic이 바로 여기서 유해한 것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가 태어났을 때,  멀리 동방에서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바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이 나온다.

국내 번역 성경에는 '동방박사'라는 단어로 되어 있지만, 그리스어, 영어 등 서구권 성경에서는 '마구스'로 표기되어 있다.

 예수를 만나러 온 동방박사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였던 것이다.


또한 마구스는 결혼하여 아이를 갖느 일이 허락되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달리 조로아스터는성욕이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능이며, 성욕을 일부러 억누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결혼과 출산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여겼다.

조로아스터교는 200년 동안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였다. 이들은 주변의 수많은  이민족들과 교류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가 이방인들에게 알려졌다. 페르시아와 가장 가까웠던그리스인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 아후라

마즈다를 자신들의 최고의 신 제우스와 동일시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인과 로마인 모두 동일하게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민족의 신을 자신들의 신과 결부시켜같은 존재로 여겼다. 페르시아와 교류한 중국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拜火敎배화교라

 불렀다. 이는 조로아스터교가 불을 숭배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가 특별히 불 자체를  숭배한 것은

 아니다. 단지 불이 영원히 빛나는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한다고 하여 성스럽게 여겼을 뿐인데 이것이 외부인들에겐 마치 불을

숭배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천주교가 성모 마리아를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이 마치 외부인들에게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처럼

 잘못 비추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다



기원전 330년,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드로스 3세게게 멸망 당한다그리스인을

미개하고 야만스럽다며 멸시했던 자존심 강한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 불쾌한 일이었다.하지만 조로아스터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섬기는 신 아후라 마즈다와 미트라를 자신들의 신 제우스나 헬리오스와 같은

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를 특별히 탄압하지 않았다. 리스의 지배는 약 200년 후,

스키타이족의 후손인 파르티아인에 의해 끝났다.


약 500년 동안 그리스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받던 페르시아인들은 3세기 들어 파르티아를 쳐부수고 페르시아 전역을정복했며

당연히 조로아스터교를 페르시아 국교로 선언했다. 아르다시그가 세운 왕조는 그의 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사산 왕조'라

불린다. 조로아스타교가 사산 왕조 치하에서의 맞은 가장 큰 변화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가 다시 편찬되고,

 조로아스터를 찬양하는 노래를 담은<가타스>가 비로소 문자로 정리되어 책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로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는 미트라교는 동서 무역로를 타고 서양과 동양으로 전파되었다.

 서양의 로마 제국에서는 주로 군인들이 미트라교를 숭배했으며, 동양에서는 미트라의 이름에서 유래된 '미륵'이

 장차 혼란한 세상을 끝내고 평화와 행복의 새 시대를 열 구세주로 알려졌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정부의

정에 분노한 백성들이 자주 들었던 '미륵'이라는 이름도 조로아스터교의 태양신인 미트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재산의 공유를 주장하는 신흥 종교 마즈다크교를 만들기도 했다. 이 마즈다크교는 기득권층인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들의

 핍박을 받아 소멸했으나, 그로부터 약 1400년 후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비슷한 주장을 들고 나왔다.


1000년 동안 지속된 조로아스터교이 전성기는 7세기 중엽, 아랍인들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인해 회볼할 수 없는

치명타를 맞았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은 제위를 둘러싼 계속된 내전으로

쇠약해져 있던 페르시아를 손쉽게 제압했다. 조로앗타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댓가로 별도의 세금인

'종교세'을 내야 했던 것. 정권의 핍박으로 조로아스터교 세력은 나날이 위축되었다. 지난 1977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정식 종교로 인정 받았지만 신도 수는 3만 이하로 줄어 거의 사멸해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사파비 왕조를 세워 페르시아를 다시 번영시킨 아바스 1세

도미니쿠스 쿠스토스, 1600년대 작품



비록 현대에 들어와 조로아스터교 세력은 매우 미약해졌으나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그들의 교리는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와 이슬람교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종말의 시기엔 구세주가 등장하여

 인류를 구원한다는교리도 유대교에 그대로 전파되었다. 그런가 하면 조로아스터교에서 떨어져 나가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재산 공유를 주장했던 마즈다크교, 미트라를 섬기는 미트라교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미래의 구세주를 기다리던  미륵신앙 등은 모두 조르아스터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교들이다






4. 마니교

(페르시아에서 몽골까지 전파된 구세주 신앙)


"모든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마니교 경전에서







마니교는 오랫동안 그리스도교의 이단으로 생각되어왔지만, 일관된 교리, 엄격한 제도와 조직으로 역사 속에서 통일성과 

독특한 성격을 유지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마니는 바빌로니아(지금의 이라크) 남부에서 태어나 24세 때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교리를 선포하라는 하늘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교가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마니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설교를 했는데, 처음에는 방해를 받지 않다가 나중에 왕의 반대로 유죄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혔고

그 제자들이 '빛을 비추는 자의 고통' 또는 마니의 '수난'이라 부르는 26일간의 재판을 받은 뒤 제자들에게 최후의 메시지를 

남기고 죽었다(274~277년 사이로 추정됨).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참종교의 초기계시가 어떤 언어로 특정 민족에게 전해지므로 지역성을 띨 수밖에 없고 또한 나중에 신봉자들이 원래의 진리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 계시효과가 제한되어 있지만, 자신은 모든 다른 종교를 대신하여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적인 타락을 피하고 교리의 통일성을 보장하기 위해 생전에 자신의 교리를 글로 기록하고 이를 정경으로 만들었다.


마니교는 초창기부터 전세계를 개종시키고자 정력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마니는 자신의 저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것을

장려했고 방대한 선교사업을 조직했다. 마니교는 빠른 속도로 로마 제국 서쪽으로 퍼져 이집트에서 북아프리카(여기서 아우그스티누스)가

청년기에 잠깐 동안 마니교에 심취했음)를 거쳐 4세기초에 로마에 전해졌다.마니교의 서부 확장이 절정에 달해 남부 갈리아와

스페인에 교회를 설립한 것은 4세기였다. 그러나 5세기말에는 그리스도교와 로마 제국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서유럽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6세기경 동로마 제국에서도 사라졌다(그리스도교). 마니의 일생 동안 마니교는 페르시아 사산 제국 동부로 

 퍼졌다. 페르시아에서 마니교 공동체는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지만, 10세기에는 이슬람교도 아바시드의 박해로  

마니교 지도자의 자리를 사마르칸드(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내주게 되었다(사산 왕조).


중세 유럽에서 마니교와 유사한 가르침을 가진 이른바 신(新)마니교라는 종파가 다시 나타났다. 바울로파(7세기 아르메니아),

보고밀파(10세기 불가리아), 카탈파 또는 알비파(12세기 프랑스 남부)와 같은 집단은  마니교와 매우 비슷하여 마니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지만, 마니교와 직접적인 역사적 연관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마니는 선대 종교, 특히 조로아스터·

붓다·예수의 계시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통합시켜 보편적인 세계 종교를 창설하려 했고 단순한 혼합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했다. 이렇듯 마니교는 상황의존적이었고 이 점에서 이란 및

인도 종교, 그리스도교, 불교, 도교와도 비슷하다. 마니교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이원론 종교인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에 속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처럼 마니교는 이 세상 삶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극도로 악하며, 신의 본성을

 나누어 가진 영혼이 악한 물질세계에 떨어졌지만 지혜(nous) 또는 영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내적인 조명 또는

영지가 계시해준다고 주장한다. 육체와 물질로 뒤섞여 있어서 자의식의 결핍과 무지로 흐려져 있는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다. 마니교에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신의 본성을 공유하며

초월세계로부터 오는 영혼을 보는 것이다.


영지는 사람이 물질세계의 절망적인 현실에 있지만 영원하고 또 내재하는 끈으로 초월세계와 결합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영지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마니교에서 인간·신·우주의 참다운 성격과 운명에 관한 구원의 지식은

복잡한 신화로 표현된다.그 세부내용이 무엇이든 마니교 신화의 기본주제는 인간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영혼 또는 지혜가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3단계로 전개된다.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실체, 즉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과 어둠이 분리되는 과거의 시기와, 두 실체가 혼합되는 현재, 원래의 2원성이 재설정되는 미래로 구분된다.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간음·출산·소유·경작·추수·육식·음주 등의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


신자의 일부만이 마니교가 주창하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따른다. 이 공동체는 엄격한 규칙을 포용할 수 있는 선별된 자와

선별된 자를 노동과 기부로 도와주는 듣는 자로 나누어진다. 마니교 성례의식의 요소는 기도·자선·단식이며, 죄의 고백과

 찬미도 공동체 생활에는 중요하다. 마니교 경전에는 마니가 시리아 원어로 직접 쓴 7작품도 포함된다. 중세에 마니교가

소멸되고 경전이 분실된 뒤, 20세기에 중국에 해당하는 투르키스탄과 이집트에서 경전 일부가 발견되었다.



















명교, 동방으로 전래된 마니교


마니교의 동양확장은 중국이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한 뒤 대상(隊商) 행로가 재개된 7세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694년 마니교 선교단은 중국왕실에 다다랐고, 732년에는 중국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이 내려졌다. 8세기 동투르키스탄이

 위구르 투르크에 정복될 때, 투르크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마니교를 받아들여 마니교는 위구르 왕국의 패망(840) 때까지 국가종교가

 되었고, 동투르키스탄에서는 13세기 몽골족 침입 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813년에 금지되고 그뒤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적어도 14세기까지는 존속했다.














몽골 위구르 제국의 종교로



마교로 폄하당한 지 30년 만인 726년, 침체 속 마니교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맞았다.마침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대혼란에

휘말렸 있었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몽골 초원의 유목민 위구르족이 용병으로 고용되어 낙양을 함락했는데 바로 이때

낙양에서 활동하던 마니교와 접촉하게 된 것.


마침내 위구르족은 마니교 성직자의 말을 받아들여 마니교로 개종한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에서 누린 마니교의 영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왕위를 둘러싼 내란에 빠져 나날이 쇠약해진 제국은 848년 서북쪽의 시베리아에 살던 키르기스족의

침략을 당해 멸망하고 말았다. 마니교는 위구르족의 멸망과 궤를 같이하고 만다.







위구르 왕족을 묘사한 그림.

위구르족은 본래 자신들의 선조가 나무에서 태어났다는 정령 신앙을 믿었으나

마니교와 접촉하면서 마니교를 받아들이고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몽골까지, 제국에 남긴 영향


마니교의 전성기는 매우 짧았고 핍박받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그럼에도 마니교가 세계 역사에 남긴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마니교를 철저히 핍박했던 서방에서조차 마니교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기독교의 독점 속에서도 마니교의

받은 이단 종파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기독교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나타난

보고밀파와 12세기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러시아에 등장한 스콮츠이 교단도 성욕과 출산을

 부정적으로 여겼는데, 다분히 마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동방으로 전래된 마니교,

즉 명교도 중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농민 반란군이 되어 지도자과 되어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중국의 소설가 김용은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이 '명'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주원장이 명교도, 즉 마니교도였다고 주장했다.






5. 미트라교

(미륵불이 된 태양신 미트라)

"태양은 영원히 빛나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 미트라교 교리에서


근대 이전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는 미륵불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미륵불은 문자 그대로 미륵 부처를 뜻한다.

언제가 미륵이 와서 죄악으로 가득 찬 현 세계를 모두 정화시키고,  평화와 행복이 지배하는 낙원으로 이끈다는 믿음이

바로 미륵불 신앙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미륵불 신앙을 숭상해온 탓인지 미륵불은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미륵불은 석가모니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사실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특정한 신이나

구세주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석가모니 본인도 결코 자신을 신이나 구세주라 하지 않았고 자신을 믿어야 복을 받고

극락에 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본래 불교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였다. 그렇다면 왜 석가모니와는 관련이 없는 미륵이 부처라는 이름을 달고 현재 불교에 들어온 것일까?

여기에는 나름의 긴 사연이 있다.






사실 미륵이라는 말은 불교 용어가 아니다.

미륵은 고대 페르시아에서 숭배하던 신 미트라MIithar에서 유래한 말이다. 미트라는 메흐르Meehr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름은

15세기 무렵 터키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히티'석비에 나타난다. 페르시아인들은 미트라가 태양과 진실과 용기와

생각해  그들의 최고 신 하흐라 마즈다 다음가는 위치에 올려놓고 숭배했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아베스타》에 따르면

 미트라는 100개의 귀와 1만 개의 눈을 지녀 세상의 모든 것을 듣고 볼 수 있으며, 언제나 빛나는 하라 산(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가공의 지명)에 궁전을 두고 있다. 미트라는 모든 나라와 지역에 통치권을 내려주는데, 계약을 어기고 거짓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여 멸망시킨다. 또한 자신을 믿는 인간들이 죽으면 그들의 영혼을 어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사는 빛의

세계로 데려가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주는 일도 맡았다. 이처럼 미트라는 우주 질서를 지키며 악에 맞서 싸우는 심판이자

투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로마 제국은 점차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로마 군사들이 페르시아인의 미트라 신앙을 알게되고

그것을 고국으 돌아가 전했다. 3세기에 이르자 로마 제국에 미트라교의 세가 폭넓게 확산되었다. 아울러 3세기 무렵 로마

제국에서는 '불멸의 태양'이라는 뜻의 '솔 인빅투스sol  lnvictus'라는 신앙이 등장하는데 다분히 미트라의 영향을 받은

 종교였다.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솔 인빅투스 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잔가지에 불과했고 많은 로마 군인들은 미트라에 매료되었는데,

 그 영향력은 거의 기독교에 견줄 만했다.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이 많을수록 그 신이 맡은 일도 더욱 확대되는 것일까?

미트라교는 아무나 신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엄밀한 검증 장치로 선별했다. 신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차가운 눈이나 얼음 위에

오랜 시간 서 있거나, 뜨거운 불 위를 지나가거나, 오랫동안 금식을 하면서 자신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포기하지 않고 그 과정을 모두 통과한 사람만이 미트라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로도 여러 금기시되는 목록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탄압


3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트라교는 4세기 말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맞는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47~395)가 392년 11월 8일, 칙령을 발표하여 오직 기독교만을 로마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언함과  동시에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 것이다. 그 명단에 미트라교도 포함되었다.

미트라교 신도들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수많은 인명 피해만 내고 로마군에게 무참히 진압 당했다. 미트라교

내부의 문제도 한몫햇다. 본래 미트라교는 교리르 글로 남기지 않고 신도들끼리 에배에서 만나 은밀하게 말로만 전하던

비밀 종파였다. 그런데 신도들이 만나는 예배 의식 자체를 금지시켜버리니, 교리를 주고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렇게 미트라교는 더 이상 외부로 전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5세기가 끝날 무렵,

미트라교는 로마 제국의 탄압에 완전히 질식사 하고 말았다.







미륵을 기다리는 세상


미트라교가 후세에 남긴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미트라교를 탄압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트라교의 교리가 기독교에 녹아들었던 것이다. 현재 세계 기독교 교회들은 모두 12월 25일을 예수가 태어난 날로 여기고

경축한다. 하지만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에수가 태어난 달과 날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이다.

반면 미트라교에서 미트라는 12월 22일, 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동짓날에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나중에 가면서 이날은

12월 25일로 바뀌었는데, 로마 황제들은 그것을 예수의 탄생일로 대체했다. 예수가 정의의 태양 이유에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는 원래 미트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미트라교는 동서무역로를 타고 인도로 전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트라는 장차 미래에 나타나 인류를 구원할 부처인 

 마이트레야Maitreya로 이름이 바뀌어 불교에 편입되었다. 인도의 마이트레야는 다시 동쪽의 당나라로 전해져 한자식

 '미륵'으로 바뀌었고, 불교 신자들에게 숭배받기 시작했다. 당나나 이후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일어난

민란들 중 상당수는 '장차 미륵불이 와서 썩은 세상을  뜯어고치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을 연다!"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원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간 홍건적, 청나라에 맞선 백련교도, 조선을 뒤엎으려 했던 승려 집단

'당취'등은 모두 미륵불을 신봉하던 세력이었다. 그처럼 민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미륵불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폭압에 맞섰다. 우리 역사에서도 미륵은 매우 친근한 존재다. 후삼국시대, 가장 강력한 군벌로 활동하며

 후고구려를 궁예는 그 자신이 열렬한 미륵 신봉자이면서 나중에는 백성들에게 아예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난 미륵 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구예는 승려 출신으로 직접 20권의 불경을 지을 정도로 불교 지식에 해박했다.

궁예가 지었다는  불경의 내용 중 일부가 함흥 지방 무당들이 부르던 노래인 <함흥무가>에 실려 있다. 궁예는 자신이

쓴 불경에서 석가모니를 따르는 기존의 불교 교단들이 근본이 비열한 도둑인 석가의 엉터리 가르침을 믿고서 세상을

어지럽혔으니 이제 진정한 부처인 미륵, 즉 자신이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고승 석총은 그런 궁예의 가르침에 반발,

 "대왕께서 지으신 불경은 모두 사악하고 괴이한 말이니, 도저히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궁예는 그런 반발을 힘으로 억누르고 미륵불 신앙을 더욱 굳건히 지켜갔으나, 918년 자신의 부하

왕건이 일으킨 반란으로 제거 당하고 역사 속에 그저 미치광이 폭군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비록 궁예는 정치적으로

패배했지만 그가 설파한 미륵 신앙은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위 내용은 '서해문집'에서 펴낸

도현신 著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에서 발췌한 내용이 주를 이루며

일부 백과사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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