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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2011 문화재 생생사업 담당자 워크숍 ~2~

 

강의 주제 : 불교 문화로 본 호남의 역사

 

 

 

 월봉서원 생활관에 좌정한 2011 문화재 생생사업 담당자 일동.

 

 

강의에 앞선 행주기씨 문헌공 종중 기규철 님의 환영사.

 

 

국립 광주박물관의 첫번재 프로젝트

"1981년 무등산 원효사 지표조사"에서 발굴되었던 부처상.

 

 

강사 김 정 현 선생.

 

불교문화 전공,

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 현 전라도 닷컴 문화기획팀장.

 

 

익산 미륵사지 석탑.

 

 

7세기 축조.

 목탑이 아닌 석탑으로 축조하게 된 것은 내구성 때문이었다.

 

 

복원 했을 때의 전체 높이는 73미터에 이른다.

 

 

금동 사리기와 사리봉안기

 

/신문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 /


 

사리함의 아름다운 당초문.

최소한 무왕과 선화공주에 얽힌 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동쪽 회랑 부분에서 출토된 금동향로.

문양에나 선의 부드러움에서 백제인의 심성이 절로 느껴진다.

 

 

지하 12미터 까지 판축이 되어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이르면,

군더더기를 빼버린 백제인 특유의 담백의 美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으로

일곱기의 부처가 꽃불위에 새겨져있다.

 

 

두 기의 부처가 나란히 선 모습인데 팔에 걸쳐 흐르는 옷자락이 잘 표현되어 있다.

  흙 속에 묻혀있던 하단부의 디테일한 모습도 백제인의 특질을 잘 보여준다.

 

 

백제인의 미소를 대변하는 명작이다.

 

 

법성포 진내리 미륵불

일부에서 마라난타가 가져온 석상이라 주장한다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8세기 본격적으로 호남지방에 뿌리를 내린 불교.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지어졌을 것으로 본다는 구례 화엄사.

 

 

깨달음의 크기가 황제에 버금 간다는 의미의 각황전.

 

 

 

각황전 이전 그 자리에는 장육전이 존재했었고 

전각 내부엔 위와 같은 화엄 석경을 둘러 놓았다. 

 

 

세계 유일의 사사자가 석탑을 떠 받치고 있는 형태.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기리는 효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석탑으로

사사자가 위치한 부분을 효대라 부른다.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네 마리 사사자의 표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입을 굳게 다문 표정에서 부터 시작하여 조그씩 크게 열어 가다가 마지막엔 다시 굳게 다문 모습이다.

아 ~ , 음 ~ 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말 하는 소위 '우주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자라는 동물은 본디 초원을 지배하는 제왕인만큼 경외심의 대상이었을 터.

그런 사자를 불교의 호법신앙으로 내세운  것은 화엄사상의 심오함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광양 중흥산성에서 나왔던 쌍사자석등이다.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헌데 두 마리 사자 모두다 갈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암 수 한 쌍이어야 할테지만,

불교에서는 반드시 음과 양으로만 해석치는 않는다고.

 

 

 

구례 화엄사 사사자 석탑 탑신에 새겨진 자물쇠와 신장의 모습.

부처님의 말씀을 잘 보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1962년, 화엄경 사경 도굴범의 사면을 관계자들이 요청했으리 만치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되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사경이라는 것은 본디 수도의 의미 보다, 공덕의 의미를 더 크게 담고 있다.

 754년 8월에서 755년 2월에 걸쳐 황룡사의 승려 연기가 화엄경을 사경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 사경 용지가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 등이 담겨져 있는데

이로서 우리나라 사경 문화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중국 일변도의

사경 문화 종속에서 벗어나 체면 치례를 할 수 있게되었다고 한다. 

묵서를 두루마리 형태로 마는 나무의 끝은 수정으로 제작했으며

 그 수정 안에서 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고.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전상도 부분으로 화엄경을 그림으로 축약한 내용이다.

도토리 물로 색을 입히고 금니로 사경한 것인데, 보리수 아래 사사자 네 마리가 앉은 모습에다

각 면에 비천이 그려져 있는 모습인데 '요고'의 원형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  법고 (法鼓)는 크게 홍고(弘鼓), 대고(大鼓), 소고(小鼓),

티벧에서 주로 쓰는 요고(搖鼓) 등으로 구분한다.

 

 

사사자 석탑 기단부 아래층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사진상 장고 형태의 악기는 티벧의 타악기 '요고'로 추정한다고.

 

 

 

화엄사 동오층 석탑 사리장엄구

 

 

 광배를 확대한 사진

 

 

 

 

위 오른편 네모난 두 개의 틀은 부처를 찍어내는 용도의 틀.

 

 

위 불탑판 역시 많은 부처를 한꺼번에 찍어내기 위한 것으로

당시의 '다탑사상'을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이다.

 

 

 높이 636cm.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크다.

귀꽃이 크게 발달한 이유는 부처의 지혜와진리가 널리 펴져 나가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진으로

소년으로 보이는 자를 석등과 비교한 것이다.

 

 

1927년의 사진으로 석등 화사석이 아래로 내려와 있는 모습이다.

 

 

금장암지(金藏庵地) 석탑과 석등으로 1997년 10월 사진이다.

(고려시대,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소재)

 

 

 

 

 

 

 

 

달마대사가 면벽수도한 장소.

 

 

 

 

 

 

당나라에 유학한 대부분의 승려가 골품제 사회에서 하층계급이었다는 사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지식인이었고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인물들이다.

당나라에서 상당한 고위직까지 지내고 들어온 최치원 역시 골품제의 대표적 피해자.

 

 

흥미있는 사실은 구산산문 가운데 물경 3개 산문이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

이는 당시 교종과 선종의 상관 관계를 이해하는 바로미터라는 말씀.

 

 

진전사지 도의선사 승탑

 

 

 해상세력의 정점이었던장보고가 죽임을 당하자 민심이 동요하게 되었고

이를 달래려는 차원에서 보조국사를 보림사에 주석케 한 것이다.

 

 

장흥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국보 제117호, 통일신라 860년 높이 2.7m

 

 

비로자나불 왼편 어깨의 명문으로 조성 내력을 알 수 있다.

 

 

왼손 검지 두 마디를 오른손으로 감싸쥔 이른바 '지권인'형태의 비로자나불은

우리나라의 예가 세계 유일의 것이라고.

 

 

통일신라 문성왕 때의 인물로 당나라에 유학,

 서당 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고 돌아와 동리산문의  개산조가 되었다는 적인선사 혜철.

옥개석 왓골의 모습과 상륜부의 양와, 복발, 보륜 등의 조화가 모두 완벽한 모습이다.

(사진은 필자가 찍은 것이다.)

 

 

 

 

 

 

 

 

강사가 직접 발굴에 참여하였는데 석관 뚜껑을 열자 물이 가득찬 가운데

썩지 않은 인골이 나왔고 조사 결과 162cm 키에 성인 남자로  판명되었다고.

 

 

1920년대의 화순 쌍봉사 사진.

 

 

소실 전, 일제때의 모습(왼편)과 복원한 후의 목탑 모습.

 

 

본디 김제 귀신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했으며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귀국시 그의 스승 남천이 내 뱉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고.

 

"오종(吾宗)의 법인(法印)이 모두 다 본국으로 돌아가는구나."

 

당시 우리나라 유학승들의 뛰어난 실력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씀.

위 철감선사 징소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승탑으로 평가된다고.

 

 

일명 "방가방가 거북이".

오른쪽 발을 들어 흔드는 모습으로 너무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谷寺 東 僧塔)  국보 53호  

기왓골 작은 손톱만한 부분에다 하나 하나 연꽃을 새겨넣을 만큼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한다고.

(필자가 찍은 것이다)

 

 

광주 무등산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암 불상이다. 팔각연꽃 좌대 위에 약사여래불이 안정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

큰 귀에 얼굴은 비교적 둥글다. 당당한 어깨, 쑥 들어간 복부, 결가부좌(오른발의 발바닥을 위로 하여 왼편 넓적다리 위에 얹고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얹는 앉음새)에 항마촉지은 통일신라시대의 공통 양식이며, 얇은 법의와 두툼한 입술,

신비로운 미소는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하다. 유난히 넓은 무릎과 형식화된 표현 등 신라 말기 불상의 특징도 가지고 있다.
원래 있었던 광배가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호남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가운데

가장 미려하고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불상의 시대적 분류를 간단히 알 수 있는 방법으론

 허리선이 꼿꼿하면 통일신라, 약간 굽었으면 고려시대, 구부정하면 조선시대로 보면 된다고.

부처의 자리매김이 시대에 따라 점점 허리가 굽어진 경향을 보이며,

동시에 불전에 모셔진 부처상도 시대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하는걸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시대적 배경과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씀.

본디 불전이란 배례자의 편리를 위한 공간이 아닌 부처만을 모시는 공간이라는 개념이었기에

굳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았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기층민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부처상이 점점 뒤로 밀려나 넒은 공간이 마련된 것이라는 설명.

 

 

앞에서 소개한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의 뒷모습으로 꼬리의 모습이 재미있다.

본디 광양 옥룡산에 있던 것은 근처 학교를 짓기 위해 일인에게 팔려고 했다가

조선총독부 마당으로, 다시 도시자 공관으로, 1936년에는 경무대 뜰로 옮겼다가

 4.19 의거 이후 다시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던 것을 1980년 광주국립박물관 신축때 옮겨와

현재 1층에 전시되고 있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의 이력을 갖고 있다는 말씀.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 총높이 860㎝, 상높이 600㎝, 선재동자상 87㎝. 암벽을 감형(龕形)으로 파고 그 안에 상을 고부조로 새겼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높은 육계(肉髻)가 있고, 네모진 얼굴은 불신(佛身)에 비해 큰 편이다.

약간 치켜올라간 눈꼬리와 꽉 다문 입 등에서 엄숙한 분위기가 풍긴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얇아서 몸체의 굴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왼팔 위에는 촘촘하게 주름이 잡혀 있으며 가슴 부분과

다리 위에는 가는 선으로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고, 흘러내린 옷주름이 대좌를 덮어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그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긴 거신광(擧身光)인데 두광 안에는 연꽃무늬와 당초무늬[唐草紋]를,

신광 안에는 당초무늬를 새겼다. 오른쪽 무릎 옆에는 오른손에 지물(持物)을 든 선재동자상이 작게 부조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신리 마애여래좌상

 

 전체 높이 4.3m, 좌상 높이 2.1m. 통일신라시대 때의 좌상.

율어면(栗於面)의 존제산(尊帝山:해발 704m)으로 올라가는 입구 산기슭에 있다.

유신리 마을에서 약 1km 떨어진 지점인데 가로 4.3m 높이 5m의 암벽에 부조(浮彫)로 양각한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한국에 그 예가 거의 없는 양 어깨의 어깨걸이라는 특이한 의문을 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북위나 북조시대 금동불에서 유행을 보았던 양식으로 이곳 전남지방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불상의문연구에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성 연대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북암 마애여래좌상 국보 제308호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좌상으로 규모가 크고 유려하여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전각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비천상이 들어나게 되어 일약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이다.

왼편은 연꽃을 들고 있고 오른편은 향로를 든 모습이다.

가을 날 오전 10시 쯤에 비천상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다고.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


 오른쪽 옷을 벗은이는 개성 왕건릉에서 출토된 왕건상이고.

탑비의 주인공은  궁예에게 죽임을 당한 형미대사인 것이다 . 나주를 치러  내려온 왕건은

약 10여년을 나주에 거주하며 대표 세력인 오달련의 후원을 얻게된다.

당시 해상세력을 대표하는 장보고가 제거되자 위기를 느끼고 있던 나주 오씨 세력들과

민심이반의 세력을 등에 업은  왕건이 결탁하여 이후 고려를 건국하게 되었고,

왕건의 22번째 부인 가운데 왕건의 둘째 부인으로 오달련의 딸이 간택되었으니 그가 바로 장화왕후 오씨이고.

장화왕후의 장남이 바로 고려 2대 왕에 오른 혜종으로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이다.

 

 

/ 참고로 최근 한겨례 신문에 실린 내용을 옮겨 본다. /

 

“나주 경략 주역은 왕건 아닌 궁예”

 

최연식 교수, 선각대사탑비 분석
고려 정당성 위해 궁예 역할 지워

 

 

» 전남 강진군의 고찰 무위사에 있는 10세기 고승 선각대사 형미의 화강석 탑비(왼쪽)와 탁본(오른쪽). 정연한 해서체로 새긴 이 탑비 내용을 최근 재판독한 결과 사서 기록과 달리 궁예가 912년 직접 전라도 나주 원정을 벌였으며, 선종 승려들을 우대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전라도 나주는 뗄 수 없는 인연의 땅이다. 2000~2002년 방영된 한국방송 대하사극

<왕건>을 본 이들이라면 기억하겠지만, 개경의 해양 세력 수장이던 왕건이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가장 공들였던 군사 작전이

912년 나주 경략이었다. 당시 나주는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의 변방이었지만, 대규모 수군을 동원해 나주와 무진장(광주)벌을

확보했고, 이 성과를 기반으로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2대 혜종을 낳은 호족의 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난 곳도 나주다. 그래서 왕건의 정치·군사적 역량을 논할 때 흔히 꺼내는 사건이 나주 경략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는 이제 다시금 바꿔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주 경략의 주역이 왕건이 아닌, 궁예임을 입증하는 당시

전라도 고승 선각대사 형미(864~917)의 탑비 내용이 최근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불교사연구자인 최연식 목포대 교수는 최근 목간학회 학회지 <목간과 문자> 7호에 실은 논문 ‘전남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에서 이런 사실을 공개했다. 고려왕조를 예언한 고승 형미의 업적을 기려 고려 정종 원년인 946년

그가 수행하던 강진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탑비(보물 507호) 비문을 최근 재판독한 결과가 근거가 됐다.

선각대사는 당나라에서 10여년 유학한 뒤 귀국한 당대의 큰스님. 고려 건국 이전 왕건과 밀접한 관계였으나, 이를 시기한

궁예에 의해 태봉국 수도 태봉(철원)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 교수는 비문 내용을 정밀 판독한 결과 10세기

나주 등 전라도 지역을 원정하고 비석의 주인공 선각대사를 태봉국에 데려간 이는 <삼국사기> 등 사서에 전해지는

왕건이 아니라 궁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재판독한 내용을 보면, ‘대왕’, 즉 궁예는 912년 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 나주와 무부(광주) 등 전남 지역을 공략해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나온다. 최 교수는 비석 문구 중 선각대사를 발탁해 수도 태봉으로 데려간 뒤 뒷날 역모를 씌워

처형하는 ‘대왕’은 문맥상 궁예로 봐야 맞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왕’이 원정 때 형미를 만나보기를 청한 글의 높임말로 기록된 ‘단소’(丹訴), 형미를 태봉으로 데려가라는 왕명인

‘제’(制) 등이나, 형미가 태봉에 이주한 뒤 쓴 비용을 부담한 곳으로 비문에 기록된 왕실 창고 ‘내고’(內庫) 등의 문구들은

당시 신하였던 왕건이 아니라 현직국왕인 궁예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라는 논지다.

궁예의 원정 사실은 역시 궁예의 권유에 따라 수도 태봉으로 옮겨간 다른 고승 경유의 행적을 기록한

법경대사비 내용에서도 확인된다고 한다.

 

 

 지붕이 닿을만큼 전각이 촘촘히 들어선 송광사 풍경.

6.25 이전의 모습이다.

 

 

보조국사 지눌 (普照國師 知訥)

 

고려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꾸준한 구도 끝에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
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을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할 것인가."하며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참석자 모두가 불교 문화 강의에 열중하는 아름다운 현장.

 

 

 워크숍 뒷바라지에 혼신의 열정을 쏟은  교육화공동체 '결' 이예지 양의 마무리 인삿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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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단체, 개인을 가릴것 없이, 

모름지기 문화가 빈곤한 곳에서는  세상사가 그저 몹시 고단하고 피곤하기만한 법.

 

 열기 넘치는 강의에 귀를 곧추 세운 경향 각지의 시선들,

이 시대 왜 문화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너브실 그 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문화 전도사 자격으로 황룡강 자락  '월봉서원'에 모인 사람들.

눈을 반짝이는 지성들의 모습을 강의 현장에 동참하여 늦은밤까지 내내 지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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