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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르포라이터 작가 말콤 선생과 함께

                                                                                                                                                                   2011. 9. 20

 전북 고창군 문수사 천연기념물 단풍숲

 

 

 

 

문수전에 모셔진 문수보살상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  청량산에 들어가 삼칠일 기도를 거듭한 끝에  깨달음을 얻고 귀국하여 이곳을 지나던 중, 

 자신이 공부한 중국의 청량산과 이곳의 산세가 너무도 흡사한 것을 기이하게 여겨 산 뒷 중턱의 암굴을 찾아 7일 기도를 올리던 중

 문수보살이 땅속에서 솟아나는 꿈을 꾸게 되었고 땅을 파 보니 화강석의 문수보살상이 나와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문수보살상에 얽힌 전설적 의미와 문수도량의 창건 연기를 볼 때,  문수전의 비중이 주전에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간 것은 636년(선덕왕 5)이며, 그로부터 8년후에 귀국했다.

백제 · 신라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심하게 대립하던 당시의 시대적 정황으로 미루어 

자장율사와 창건설화에 얽힌 연기를 곧이 곧대로 접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기다란 얼굴에 기다란 귀를 가진 아담하고 넉넉한 형태의 석상으로

보면 볼 수록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문수상이다.

 

 

 

 

김정회(金正會) 고가(古家)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29호(고창읍 도산리 소재)

 

조선조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으로 숙종 8년(1682)에 지었다고하며안채, 행랑채, 문간채, 사당, 두 동의 곡간채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보정 김정회는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의 후손으로 장성의 유학자인 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으며,  해강 김규진으로부터는 서화를 익혔다.

그의 예술 세계  중에서도 특히 난과 대나무 그림은 일세를 풍미했다는 평을 얻으리만치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경지였다고 한다.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에서 경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후손들도 대부분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한다.

 

 

 

 

 

 

 

 

김경식 박사

 

보정 김정회 선생의 손자로 교육학 전공의 학자이시다.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 향리로 돌아와 고가에

"연정교육문화연구소"라는 편액을 내 걸고 현재도 왕성한 저술 활동 중이시다.

 

 

 

 

안채  용마루는 지넷발 형국으로 좀체 보기 어려운 지붕 형태라는 설명

.

 

 

 

서실에 내 걸린 편액

 

 

 

 

세계문화유산 사적 제 391호  도산리 지석묘

북방식(탁자형)고인돌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탁자형)고인돌로서 일명 망북단(望北壇)이라고도 불리운다.

 

병자호란을 맞아 이 마을 태생의 송기상(1612 ~ 1667)이 의병봉기하여 진군하던 중,

굴욕적인 화의 소식을 듣고 되돌아와  평생토록 망북 통배 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은 은진 송씨 모은공파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연안김씨종택(延安金氏宗宅) 중요민속자료 제234호

 

- 전남 영광군 군남면 동간리 동편마을

 

연안김씨 종택은 조선후기 영광지역의 양반 가옥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지방 상류층의 주택 구조와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문위의 누각은 세 분의 효자를 기려 고종의 명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두 개의 대문이 달려 있는 장대한 모습은 이 집의 부와 권세를 한 눈에 보여주는 징표이다. 

사진상 열려있는 문으론 지체 높으신 양반이 드나들고 오른편 대문으론 하인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왼편의 문턱은 낮은 화강암이고 오른편 대문의 턱은 아치형 나무로 되어 있다.

 

 

 

 

기품있는 홍련지가 조성되어 있고 왼편은 서당 오른편은 문간채이다.

 

 

 

 

각각의 방 마다  구간재(龜澗齋), 매간당(梅磵堂), 익수재(益壽齋) 등의 편액이 걸려 있고,

기둥 마다에는 시를 적은 편액이 빼곡히 걸려 있다.

 

 

 

 

고가의 장독대

 

 

 

자그만치 150여 칸에 이르는 대 저택이다.

 

 

 

 

 

 

 

안채 일원

 

 

 

삼효문과 효자각

이층으로 오르면 조정에서 내린 삼효자의 정려문이 걸려 있다.

 

 

 

효자각에 내걸린 효자문의 글씨는 고종의 형 이재만이 썼다고 전한다.

수막새 암막새  모두에 삼효(三孝)라는 글자를 넣어 구운 기와를 얹었을 정도다.

 

 

 

여의주를 물고 효자각 추녀와 공포 사이에 고개를 내민 용두

 

 

 

휴림의 안쥔 오타원 여사의 생가.

기막힌 양택지 임에도 불구하고 비어 있음이 안타까울 뿐.

 

 

 

고창과 영광을 거쳐 장성으로 이동 요월정 원림을 오르는 일행.

 

 

 

 

낙화암

 

 

 

 

 

 

 

 

 

 

 

 

 

 

 

 

 

 

 

 

 

 

 

 

위 시의 저자 요월정 지킴이 家松 이수월 선생(왼편)과 청담의 대화.

 영국인 르포라이터 작가 말콤 선생께서는 요월정에 관해 목하 한문을 검색 중이시다.

 

 

 

 

요월정

 

 

 

 

중요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소목장 설석철 옹 / 전남 장성 거주

 

설석철옹은 17세때부터 전문적인 장인의 길을 걸은 후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및 명장선정,

2001년 9월 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선정되었다.
작품의 특징은 페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불에다 굽는 방법과 동백기름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은(東隱) 설석철 옹의 작품

 

 

 

 

 

1925년 11월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 송계마을에서 태어난 설석철 선생.
그의 고향 송계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느티나무와 참죽나무 등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많아 일찍이 나무와 관련된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설석철 씨의 조부와 부친은 부업으로 명패(名牌), 나막신, 말구유, 절구통 등 목재 생활용구를 제작·판매했었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목공예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목과 인연을 맺은 것은 17세. 우연한 기회에 장성읍 충무동에 위치한 김경길의 공방에 들어가게 됐고, 3년 계약으로 견습기간을 끝마쳤다.

당시 대부분의 견습생들이 견습기간을 마치지 못한채 나가곤 했다. 견습기간동안 서춘식과 박승례의 일을 보조하며 기술을 익힌 그는

박승례로부터 반닫이, 뒤주, 제상 등 목공예 제작에 대한 기술적 영향을 받았다. 공방에 들어온지 3년 후, 스스로 반닫이 등 가구제작을 할 수 있는 실력에 도달했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24세 무렵 공방을 그만두고, 장성공원 앞에 개인공방을 차려 주로 반닫이, 뒤주, 제상, 함, 각종 관공서 비품 등 제작을 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생활을 하며 목재생활 용구를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동네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약간의 돈을 받고 만들어 주는 정도였는데

주로 책상, 반닫이 등이었고, 사람이 죽으면 관도 짜줬다.
피난에서 돌아온 뒤, 청운동 곡물검사소 자리에 공방을 차리고 주로 문짝, 반닫이 등을 제작 판매했는데, 반닫이는 당시 나락 2섬 가격이었다고 설명한다.

 

1961년 10월 부인과 혼인을 하고, 혼인 후 2~3년 뒤 현재의 공방에 터를 닦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 한국목재신문 기사 발췌 /

 

 

 

 

 

 

 

   
소목에 오롯이 바친 70년 세월
소목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힘들다고 여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설석철 씨.
오히려 작품 하나를 만들어 가는 재미로 날을 새워 일하기가 일쑤였고, 그런 까닭으로 집안이 어려울 때가 많았다.
소목 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시련은 약 48년 전에 있었던 낙상과 약 23년 전에 있었던 목재재단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낙상으로 인해 약 1년가량을 누워 생활해야했고, 오른쪽 다리에 심한 골절상을 입어 현재도 거동이 불편하다. 또 목재를 재단하던 중 나무가 튀어 왼쪽 눈을 찌르는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하지만 그는 명예보유자로서 소목의 전승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
선생은 물건을 제작하면서 받은 돈을 대부분 목재구입에 사용했다.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의 목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자신의 후대를 생각해 고향 송계마을에 오동나무 약 800주를 심어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고 있다.
특히 그의 자식들 중에서 삼형제가 소목 일을 이어가고 있다. 차남 연운과 셋째 영섭은 선생을 도와 공방 일을 함께 하고 있고, 막내 이환은 공방 일을 겸하면서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설석철 선생은 이들이 자신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보고 연구도 해서 기술이나 기법을 좀 더 향상시키길 바라고 있다. 현재 선생의 건강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작업은 연운·영섭 형제가 도맡고 있다.
선생의 막내아들인 설이환 씨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전통가구와 일반 조형가구에도 조예가깊다.
설이환 씨는 “전통가구 제작이 일반적인 커리큘럼을 통해 습득하는 교육과 달리 도제교육을 통해 하나씩 습득해 나가야 하는 분야”라고 설명하며 “오히려 도제교육을 통해 아버지께 기술을 전수받기에 힘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설이환 씨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일반 가구와 달리 전통가구인지라 아직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는 의견을 내비췄다.
해외명품의 가치만 높이 평가하는 이 시대에 우리나라의 장인정신이 깃든 명품을 외면지 않고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 아닐까. 설석철 선생의 작품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자료제공 : 무형문화재전시회 공연전시팀

 

   
 
   
 
   
 

 

 

 

 

 

 

 

 

 

   
 

/ 한국목재신문 기사 발췌 /

 

 

 

 

 

 

 

소목장 이수자 설석철 옹의 차남 설연운(좌)씨와 말콤 선생.

 

 

 

 

 

 

 

 

공방 내부

 

 

 

 

 

 

 

 

맨 오른쪽의 황지해 작가의 추천으로 연 이틀을 '휴림'에서 묵어간 말콤 선생.

 

 

 

작가 황지해

‘2011 첼시 플라워쇼’의 아티즌(artisan) 정원 부문에서 최고상(금메달)을 받은바 있다.  


 

 

* 첼시 플라워 쇼(Chelsea Flower Show)

             _ 영국의 왕립원예협회에서 주관하며 180여년 동안 이어져온 세계제일의 정원 및 원예 박람회. 

             _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해 각국의 정·재계,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가하는 
               이 행사는 정원 디자이너들에게 꿈의 무대!

             - 가든디자인쇼는 말 그대로 가든, 정원의 디자인을 디자이너가 구성하고 심사를 통해 선정한 다음,
               시공한 뒤 순위를 매겨 관람객에게 선보이는 행사.
               출품정원은 모조품이나 세트를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 바닥과 벽을 쌓고, 식물을 심는 진짜 정원 만들기로 
               5천만원에서 많게는 10억원 이상의 공사비가 들기고 한다.
               이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대부분 스폰서의 후원을 받아 그 스폰서의 이름으로 출품한다.

            - 첼시플라워쇼의 특징은 정원에도 정치적,문화적,환경적 영향이 반영되고 시대정신이 깃든다는 점.
              10년 전부터 지구 온난화 현상이 정원에 미칠수있는 영향을 고려한 작품들이 쏟아졌고,
              세계적인 물부족을 반영한 가뭄에 강한 정원 디자인 등이 출품된다.

              단순히 조경물의 전시장이 아니라 삶의 한 방식으로의 정원을 제시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박람회이다.

 

 

 

 

 똥 귀한 줄 알던 시절이 있었다.
퇴비가 된 똥은 다시 먹을 것을 키워냈다.
인간이 자연의 순환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잊혀진 그 시절의 뒷간이 세계적인 꽃 박람회에서 빛을 발했다.
24~28일 런던에서 열린 ‘2011 첼시 플라워쇼’의 아티즌(artisan) 정원 부문에서
우리나라 작가 황지해(36·환경미술가그룹 뮴 대표)씨가 최고상(금메달)을 받았다.

작품명은 ‘해우소(Hae woo so)’.
부제는 ‘마음을 비우다-한국의 전통 화장실’ 이다.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소박한 뒷간,
그리로 이어지는 좁은 길,
이끼가 낀 전통 담벼락,
그 담벼락 사이에 뚫린 바람길
 작은 공간이지만 한국적인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버려진 듯 놓인 똥장군, 사기 등잔으로 만든 소박한 조명은 물론이요
토종 흰 민들레, 더덕 등 한국의 풀과 나무도 하나같이 외국인 눈엔 이국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생명의 환원과 비움의 철학이 담긴 이 작은 정원은 BBC에서 하루 네 번이나 방송이 됐다.
카밀라 콘웰 공작부인 등 로열 패밀리도 극찬했다.

작품은 영국 그린피스에 기증돼 그 앞마당을 지키게 된다.


 -화장실을 정원으로 꾸미게 된 건.

 “옛날에는 집집마다 저런 화장실이 하나씩 있었잖아요.
옛날 엄마들은 정말로 할 일이 많았어요.
화장실 가는 길이 엄마들의 유일한 티타임이었죠.
해우소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몸과 마음을 비우는 공간이었어요.
그런 전통 화장실에 담긴 철학을 정원으로 구현하고 싶었어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진 않았는지.

 “처음 기획안을 제출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농담 아냐?’라며 박장대소했대요.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다, 정원의 발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는 결론이 나서 초청을 받았죠.
아티즌 부문에 전세계에서 응모한 수많은 작가 중 45명이 선택됐고, 그 중 7명이 전시 허락을 받았어요.
거기서 금메달을 땄는데, 처음 출품한 작가에게 상을 준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래요.
심사위원들이 ‘한국의 정원을, 너의 생각을 보여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어요.”


 -지극히 한국적인데.

 “심사위원들은 ‘conservative(보수적인·보전하는)’라 말하더군요.
일본의 정원이 빗물 떨어지는 자리까지 계산해 만드는 인위적인 것이라면,
한국의 정원은 나무도 큰 바위도 치우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죠.
그런 특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국은 아파트가 지배적이다. 개인이 정원을 가꾸는 문화는 찾기 어렵다.

 “곧 문화가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옛날 엄마들의 마음 속에는 정원이 하나씩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주려고 텃밭을 가꿨잖아요.
세련되게 표현하지 못한 것뿐이죠.”


 -내년에도 출품하는지.

 “스폰서만 해결되면 쇼가든(Show garden·대형 정원) 부문에 출품하고 싶어요.
첼시 플라워 쇼의 후원 효과가 15억 원에 이른다는데, 우리나라만 잘 모르고 있어요.”


 -어떤 컨셉으로 꾸미고 싶은지.

 “DMZ를 주제로 하고 싶어요.
DMZ에서만 자라는 식물이 있거든요.
앞으로 정원에서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저 가든에 분청을 던져 놓으면 우리나라 분청 작가를 소개할 수 있는 거고, 은수저를 던져놓아도 좋고요.
일본의 젠(禪) 스타일이 그렇게 알려진 거잖아요.” 

런던=이경희 기자 


 
* '해우소 가는 길' 스케치/ 황지해




 

 

 

 

 


                  - 엘리자베스 여왕과 배우 기네스펠트로 등 매년 유명인사들이 방문하는 첼시플라워쇼
 
                  * 자료 및 사진 출처
                     - 첼시플라워쇼 홈페이지 http://www.rhs.org.uk/Shows-Events/RHS-Chelsea-Flower-Show/2011
                     _ 환경과 조경 2011년 1월호 (황지혜 作 "해우소 가는 길" - 윤상준 아름지기 선임연구원)
                     -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노블레스 2010년 4월호



 

 

 

 

 

휴림에 피어난 꽃들

 

 

 

 

 

 

 

 

 

 

 

 

휴림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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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르포라이터 작가가 왔는데  몇 군데 같이 돌아 보십시다"

 

"예 ~~~ ? "

 

"나나 청담 당신이나 잉글리시를 알아야 할게 아니오?"

 

 

 외국어엔 도대체 먹통인지라 청담의 이쁜 딸내미 수영양을 통역으로 대동 길을 나선다.

 

바디랭귀지에다 전자사전 그리고 눈치 코치를 총 동원

코쟁이 말콤 선생을 안내하곤 있지만

이거라구야 원,  알아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귀신(?)의 영역이라...

 

듣자하니 이 양반 한국에서 자그만치 6년을 머물렀다는데 우리말엔 전혀 빵점.

나라 안 웬만한 곳은 모조리 돌아 봤다니까 어지간한 곳을 안내 해 봤자 무용지물일게고,

나름대로 생각해 낸 곳이 위 사진상에 열거한 곳 들이다.

 

어떻게 축령산의 '휴림'을 알고 찾아왔느냐 알아 보았더니

청담과 오랜 친분을 쌓은 작가 황지해님이 추천 해서란다.

 

황지해님이라면 지금 처럼 유명 해지기 오래 전 부터 '세심원'을 오르내린 터이고,

심지어는 '세심원' 저온 창고 벽면에 그려진 담백한 솜씨의 그림까지도 그녀가 그려낸 작품일 정도.

 

영국 '왕립원예협회'에서 주관하는 첼시 플라워 쇼(Chelsea Flower Show)에

"해우소" 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일약 최고상을 받은 바 있었는데 이를 본 말콤선생께서

파티에 그녀를 초청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두 분께서 친분을 쌓아 온 듯.

 

말콤 선생은 홍콩에도 머무른 바 있고 중국 생활의 전력도 있는지라 '한자'로 소통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고 한국인의 정서에도 익숙한데다 한식에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는 사실.

 

점심으로 백합죽을 권했더니 화색이 돌 정도로 반겼으며 

심지어는 반찬으로 나온 젓갈까지에도 거침이 없었으니 말이다.

 

롱다리 서양인에게 좌식 생활은 고문일 터. 

아침 식사가 부실함을 보고 백합죽을 떠올리고 탁자와 의자까지를 배려한 

눈치 빠른 청담의 배려에 말콤 선생께서 무척 고마워 하는 눈치.

 

 

이튿날 작별의 시간, 안내했던 곳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고창 문수사와 소목장 설석철옹의 공방 방문을 꼽았다.

 

특히 나라 안에 단 두 분만 생존해 있다는 '무형문화재 소목장'의 세계가 몹시 흥미로운 듯,

깊이 있게 관찰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직업이 '르포라이터' 작가이니만큼 당연한 귀결 아닐까?

 

어떻게 보았으며 어떻게 느꼈으며 어떻게 이해 했는지는 기고문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리라.

아직까지는 어떤 매체에 실릴지 알 수 노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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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큐올습니다. 스터 말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