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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월봉서원 2011 추향제

                                                                                                                                                                 2011. 9. 30(금)

월봉서원 2011 추향제

 

 

 

 

 

 

 

 

 

 

 

 

 

 

 

 

 

 

 

 

 

 

 

 

 

 

 빙월당에서의 향사제 숙의

 

 

 

 

 

 

 

 

 

 

 

 

 

 

 

 

 

 

 

 

 

 

묘정비(廟庭碑) 해설비(解說碑)

    월봉서원 묘정비문 병서

조선조 명종선조 년간에 문운이 빈빈하고 사류가 성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에 겪은 사화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과 같이 간인의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를 배척하고 청의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이된 분은 가로되 고봉 기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가 되어 경연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사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것이옵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에서 나오는 것이 옵니다. 한때 비록 가리우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은 끝내 없어지지 않사옵니다.`하셧고 또 아뢰기를 `언론창달은 국가에 중대한 일이 옵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하셨으며 또 어진이를 등용하는 도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 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과 백성의 기쁨 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게 되면 묵은 병폐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 옵니다.`하셨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펴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에 실려있다.

선생의 휘는 대승이고 자는 명언이며 호는 고봉이고 또 존재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로 행주인이다. 고의 휘는 진이고 호는 물재며 아우 준 호 복재와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때 복재가 화를 입게되자 세상 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 고룡향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는 진주 강씨로 사과 휘 영수의 따님이다. 종중 22년 1527년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집에서 태어나셨다. 천자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적부터 지절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해 항상 도의를 선양하고 퇴패적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음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했다. 자경설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했다. 154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5년에 물재공의 상을 당해 여묘로 3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을 저술하였다.

1558년 7월에 하서 김선생 인후, 일재 이선생 항을 찾아 뵈었고 10월에 문과을과 제일명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이 달에 퇴계선생을 경저로 찾아 뵈었다. 추만 정지운이 천명도를 선생에게 보여주었다. 1559년 3월에 퇴계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칠이기설을 논변했다.

1563년에 거듭 예문관봉교에 제수되었으며 사관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다. 주강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매어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에 책임이 있다.`고 하셨다.

을축에 성균관직강 지제교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 노수신을 진국원으로 찾아보고 인심도심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이 지은 곤지기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

정묘 5월에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관서로 가서 허위 두 사신을 영송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하여 중로에서 부음을 들었다. 두 사신은 다같이 중국의 명유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하되 상과 변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고 조강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 조광조등 기묘제현의 신원을 건의하였으며 어진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번 옮겨 대사성 대사간에 임명 되기를 두 번이었다. 경오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아래에 자그만 집을 지어 낙암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 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아래 자그마한 집을 지어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심에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존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번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했다.

1572년 2월에 종계변무주청사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참의로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이 생겼고 태인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 김점이 달려와 병문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이니 모름지기 관념하지 마시요. 다만 어릴적부터 문한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의 학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하지 못해 처음 마음 먹은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름름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다만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셨다. 다음날 길을 재촉해 김공의 집에 이르러 이틀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때에 밤이 사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뢰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이었다. 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셨고 간원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적부터 성현의 학에 종사하여 견식이 고명했고 이황과 더불어 의리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하셨고 경악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발한 것이 모두 성제 명왕의 도아닌 것이 없아옵니다. 온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이 되었사오나 불행하게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 하였사옵니다. 가세가 청빈해 상장례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옵서소.`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 선생께서 평일에 주대한 말씀들을 임금이 사관에게 명하여 두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 6권과 주자문록 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 3권과 양선생 이기왕복서 상하 1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 광국공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경연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덕원군에 봉해지고 시는 문헌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1578년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아래 낙암동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때에 황강 김계휘공이 본도의 감사로 있어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의 언답 30여석지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 정철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도 지급해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아래 동천위로 이건 하였으며 효종 5년 1654년에 월봉서원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1655년 4월에 편액을 맞이 하였고 예랑 원격이 제문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1669년에 중창을 했고 1671년에 문간공 눌제 박선생 문충공 사암 박선생을 추향하였으며 숙종 9년 1683년에 문원공 사계 김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 신독제 김선생을 종향 하였다. 정조 12년 1788년 4월에 예조좌랑 박흥복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1868년 훼철 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 않았다.

광복전 1938년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모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너브실)에 빙월당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1979년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유림과 본손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1982년에 숭덕사와 내삼문을 세웠고 1983년에 장판각을 지었으며 1990년에 명성재 4간 존성재 4간 및 외삼문을 세웠다. 1991년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을 순성했으며 3월 상정일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대행이고 사림의 성사가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되는 대종중회장 세훈 서원복원회장 세탁이 나를 성균관으로 찾아와 묘정비문을 청탁하니 제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요.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삼가 명하기를

[미묘를 정밀하게 궁구하니 도체를 꿰뚫었네
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주대한 말씀은 논사록으로 외우고 사칠이기설은 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법도 자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예학에도 달통하였네
많은 선비 추앙해 사당세워 받들고 백세의 모범되니 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길이 뒤를 따르리.]


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

성균관장 후학 경주 최근덕 근찬

 

 

 

 

 

 

 

 

 

 

 

행전폐례(行奠幣禮)

 

 

 

 

 

 

 

 

 

ㆍ초헌(初獻) :  첫 잔을 올리는 제관.
ㆍ아헌(亞獻) :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ㆍ종헌(終獻) :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ㆍ진설(陳設) :  제상에 제사 음식을 차례로 놓는다.
ㆍ집례(執禮) :  홀기를 읽는다. (헌관의 제사 지내는 순서를 읽는다.)
ㆍ축 (祝)      :  축을 읽는다. (고봉선생의 덕과 도를 깊이 여기어 후학들이 신위를 모시고 음식을 바치오니 많이 드십시오.)
ㆍ봉향(奉香) :  향을 들어 초헌관 앞에 들고 있다.
ㆍ봉로(奉爐) :  화로(향그릇)를 초헌관 앞에 놓는다.
ㆍ사존(司尊) :  술잔에 제주(술)를 따른다.
ㆍ봉작(奉爵) :  술잔을 받아 헌관에게 준다.
ㆍ전작(奠爵) :  술잔을 헌관으로 부터 받아서 제상에 놓는다.
ㆍ인례(引禮) :  헌관 앞에서 헌관을 인도 한다.

 

 

집례, 알자, 찬인의 재배

 

 

 

 

 

 

 

 

초헌관

(전 국무총리 고 건)

 

 

 

 

 

향사 참여자 전원 배례

 

 

 

 

 

 향을 올리는 초헌관

 

 

 

 

 

 

 

 

 

 

 

 

 

 

 

 

 

 

 

 

 

 

 

잔을 올리는 초헌관

 

 

 

 

 

 

 

 

 

 

 

축문 소지

 

 

 

 

 

예가 끝났음을 아뢰는 배례

 

 

 

 

 

 

 

 

 

 

 

 초헌관 배웅

 

 

감사의 예

 

 

신도비(神道碑), 해설비(解說碑), 묘정비(廟庭碑), 헌성비(獻誠碑)

 

 

2011 추향제와 함께 간행된

 국역 月峯書院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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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발간된 뒤 200년 지나고 나서  중간된 <논사록(論思錄)>.

기고봉의 <논사록>을 읽고 크게 감동한 성군 정조는1788년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다.

 

 

// 이제 <논사록>을 보니, 이것은 바로 고(故) 승지 기대승이 경연에서 아뢴 말이다.

서문과 발문을 보면 근래에 비로소 중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좋은 말을 아뢰고 착한 선비들을 보호한 그 공로에 대해 책을 어루만지며 세 번 반복해 보니

어찌 존경스럽고 탄상하는 심정을 금 할 수 있겠는가.

살아서는 성군을 만나 자신의 소회를 다 말하였고, 죽어서는 군주가 사관에게 명하여

그가 아뢴 말을 모아 기록하도록 까지 하였으니, 아, 거룩하다.

지금 나는 이 책을 즐겨 보느라 밤이 이미 깊어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켰는지도 몰랐으니,

열 번의 야대(夜對)보다도 훨씬 낫다.

나는 연전에 <사칠속편(四七續編)> 이라 명명한 다음 때로 이책을 펴 읽어 보았는데,

유익함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이 <논사록>은 더욱 정치의 요체에 관계되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먼 시대는 다르나 감동되는 듯이 있으니 어찌 나의 간곡한 뜻을 나타내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예관을 보내어 존가에 치제하게 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은 이름을 물어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라고 해당 관서에 분부하라. //

 

 

이와 더불어 정조가 내린 치제문(致祭文)은 더욱 감동적이다..

 

 

// 명종과 선조의 태평성세에 여러 현인들이 을흥(蔚興)하였네.

퇴계와 율곡에게 많이들 찾아가 고증했는데 경은 당시에 명성과 덕망이 함께 올라갔네.

천품이 크게 뛰어나고 영기는 세상을 덮었어라.

이와 기는 원류와 전례의 상과 변에 대하여 명쾌하게 분석하니 선배들도 존경하였네.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니 군왕의 외척들이 숨을 죽였네.

태평성세를 만나 행하고 그침을 여유 있게 하였네.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명망과 절개가 더욱 드높았네.

내가 그의 유서를 읽으니 그 이름이 <논사록>이었네.

사관이 모아서 기록한 것을 성조께서 명명하셨네.

훌륭한 그 말씀이여!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

시대는 다르나 감동되니 내 그리움은 더욱 두텁네.

이는 실로 정신으로 사귀는 것이니 어찌 옛날과 기금의 간격이 있를쏜가!

그 풍치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저 호남을 돌아보네.

선생의 사당 우뚝 솟아 있으니 그 덕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어라.

관원을 보내어 술잔을 올리니 영령은 오시어 흠향하소서! //

 

 

 

조선의 개혁과 더불어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이가 바로 정조이다.

 그가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서너 번 씩이나 무릎을 쳤다는 <논사록>.

<사단칠정>이 유학의 몸통이라면, <논사록>은 그 몸통을 따라 도는 혈액에 비견 할 수 있을 터.

<논사록]은 선조 이후 역대 조선 임금들의 제왕학 교과서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짧은 생애를 살다간 고봉이 남긴 발자취의 핵심은 과연 무었일까...?

월봉서원 2011 추향제'에 모여든 면면들을 살피는 나의 소회는 이런 것이었다.

학문에 녹아든 철학의 힘은 실로 위대한 것이고, 또한 세세년년 창대하게 이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참고문헌 "국역 월봉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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