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백제의 그림자

         장하리 삼층석탑 / 성흥산성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상 / 동곡서원

 

                                                                                                                                                                                                         2011. 7. 18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보물 184

 

 

고려시대 초기의 탑이다. 자연석같은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몸돌(옥신석)에는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두는 대신 목탑에서 많이 보이는 감실(부처를 모시는 방) 모양을 새겼다.

백제계 목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각층의 몸돌과 지붕돌의 비례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지붕돌(옥개석)에는 구멍을 내어 청아한 소리를 내는 풍탁(풍경)을 단 흔적이 있다.

세련된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달리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해발 25m 내외의 야트막한 구릉이  동, 북, 남의 3면을 둘러 탑은 트여진

서쪽을 향하여 약 1km 거리로 백마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한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지형과 유물 산포 범위로 보아  주변지역 전체가 사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성흥산성 남문쪽 오름

 

 

성흥산성 오름길에서 조망한 임천면 군사리 일대

 

 

거침없는 시야

 

 

 

산성의 입구는 남문지다. 돌계단을 따라 50m쯤 올라가면 남문지를 거쳐 성벽 위에 서게 된다.

남문지는 성루나 성문이 남아 있지 않지만 4m 넓이의 초석은 그대로 있다.

남문지에는 특별한 풍경을 완성하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의 별칭은 '사랑나무'다.

드라마 (서동요)방영 이후 장이와 선화공주의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성흥산성

성흥산성은 백마강 하류 임천면 지역에 쌓은 토석혼축성(돌과 흙으로 쌓은 성)이다.

산 정상부를 감싼 형태의 성(테뫼식 성)으로 자연스레 산의 이름을 따서 성흥산성이 되었다.

<삼국사기 >에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위사좌평 백가가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성흥산성을 가림성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성왕 시절 사비(부여)로 천도한 538년보다 30년 이상 먼저 지어진 것이다.

천도 전에 완성됐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 성은 웅진(공주)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한

배후 방어선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백제가 거의 패망에 이르렀을 때,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산성이 자리한 성흥산은 해발 고도가 겨우 268m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는 탓에 시야에 막힘이 없어 부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멀리 강경까지 눈길이 닿기도 한다. 조망에 있어서라면 부여 일대에서 이곳보다 좋은 곳이 드물다.

 

성 내부 우물

 

 

 

남문지에서 성곽을 따라 돌기 전에 중앙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보자.

이곳에는 유금필 장군 사당과 성흥루, 봉화제단 등이 있다.

사당에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유금필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유금필 장군은 황해도 평주 사람으로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이 지역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당은 그를 위해 임천 백성들이 세운 것으로 해마다 제사를 올려왔다.

 

 

 

 

 

성흥루

성흥루는 유금필 사당 바로 위에 있는 2층 높이의 팔각정자인데

주변이 숲에 가로막혀 있어 조망은 별로다.

 

충청권을 대표하는 정객의 서체인 듯...

 

 

성흥산 정상 268m

 

 

 

부여에는 부소산성, 청마산성을 비롯해 석성산성, 증산성, 성흥산성 등 산성들이 많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 산성 중에서도 성흥산성은 부소산성에 견주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대조사

성왕 10년(532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것을 미리 알고 이곳에 사찰을 세웠다고 전한다.

대조사라는 명칭은 원래 같은 자리에 있던 암자의 노승이 꿈에 '커다란 새'를 보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보물 제217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상이다.

높이 10m의 이 석불은 해가 떠오르면 햇빛을 받아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석불은 머리에 네모난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이 4각형으로 넓적하다.

귀, 눈, 코 등을 모두 작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조각기법은 그리 세련되지 않은 모습이다.

파주 용미리석불, 논산 관촉사석불 등과 거의 비슷한 형태다.

이들 거대 석불입상들은 고려 초기 건국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조성된 것들이다.

 

 

 

 

 

 

 

불전 내부에서 바라본 모습

 

 

 

동곡서원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회양(淮陽) 부사(府使)(지금의 군수)였던 조신((趙愼),

생몰연대 미상)선생을 제향(祭享)하는 서원이다.

선생은 고려 말 신돈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임천(林川)의 덕림(德林)(오늘날 장암면 점상리)에 은거하였다.

박팽년(朴彭年)·유성원(柳誠源) 등의 문하생을 길러냈고,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도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태종의 어릴적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건물 배치는 'ㅁ'자집 평면이며 강당과 재실이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각 방이 배치되어 있어

마치 살림집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 바깥채는 전학당(典學堂)이고, 안채는 화수루(花樹樓)이다.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으로 철거되었다가

 1930년 지방 유림(儒林)들에 의해 현재의 상태로 복원되었다.

 

 

 

사당

 

 

 

 

*************************************************************************************************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축소판이랄 수 있는 장하리 삼층석탑.

앙증맞고 귀여운 느낌까지...

 

성흥산성에 오르니 그 막힘없는 시야는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강경, 논산, 홍산, 한산, 익산 함라산에 이르기까지...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상 또한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의 축소판 같다는 느낌.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관음상에 그늘을 드리우고 선 노송의 자태가 일품.

 

대조사 명물로 소문난 꽃사슴 해탈이를 보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고나 할까?

카메라에 해박한 듯, 젊은 스님께서 이것 저것을 물어 오신다.

여기까지 대화는 별 탈이 없었는데.....

 

 

"어디서 오셨수?"

 

'아랫녘 00에서 왔는데요'

 

"아!~~~ 그곳 닭회 맛이 기가막히죠...?."

 

' ~!@#$%^&* 나무관세음...'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호자매(西湖紫梅)와 사미인주(思美人酒)   (0) 2011.08.25
아름다운 사람들  (0) 2011.08.18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0) 2011.06.27
벌써 31년이 흘렀단 말인가...  (0) 2011.05.17
꽃불잔치와 음악감상  (0) 2011.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