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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부활하는 백제의 혼(魂)

               ● 백제재현단지 - 부여박물관 - 궁남지

                    

                     ▶충남 부여군 소재

                     ▶ 2009. 8. 27 (목)

 

 

백제역사재현단지 

 

원래의 사찰 유적은 이 곳에서 논산 방향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부여 나성(羅城)밖의 능산리 고분군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을 기초로해서 이 곳에다 1:1 크기로 재현하고 있다.

 

 

능사5층목탑

 

능사는 사찰 명칭이 밝혀지지 않아 지명(地名)을 따서 부르는 명칭으로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사찰이라 하여 능산리사지로 부르며

줄여서 능사(陵寺)라고 부른다.

면적은 17평에다 높이는 39m(목탑부 30m, 상륜부 9m)이며

약 28만재의 목재가 사용 되었다고 한다.

 

 

 

심주(心柱) 

 

5층 목탑에 사용된 목재 중 가장 큰 부재로서 목탑 정 중앙에 위치한다.

직경은 0.8m, 길이 10m의 기둥 3개가 연결되어 있다. 

 

 

백제시대 사찰의 배치 특징은 남쪽에서부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되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배치로서

부여 정림사지, 왕흥사지, 익산 미륵사지 등에서도 동일한 배치 형태를 볼 수 있다.

 

 

심주목에 그려진 용문

 

 

능사 전체의 규모를 살펴보면

5층 목탑, 금당, 강당, 회랑, 등 총 1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1867년 경복궁 재건 이래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420여 만재가 소요되는 목공사로서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최기영 선생께서 이끌어 가고 있다.

 

 

중궁 정전

 

사비시대의 왕궁을 재현 중 인데, 외부는 2층, 내부는 1층으로

높이 19m, 면적은 102평으로 27만재의 목재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백제 건축만의 특징이랄 수 있는 서까래 모양으로 경사지게 돌출된

부재로 되어 있는 하항(下昻)구조를 들 수 있겠고,

또 하나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밝은 단청과 대비되는

다소 어두운 색채의 오방색(五方色)을 들 수 있겠다.

 

(참고로, 계백장군의 묘 옆에 지어진 사당에서도 이와 유사한 색상의 단청을 볼 수 있다.)

 

 

중궁 정전 내부에서 중남문을 바라본 모습 

마당 가운데의 어도(御道)에는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문양전(紋樣塼) 8장 중의 하나로

임금을 상징하는 용문전(龍紋塼)을 복원하여 깔아 놓았다.

 

 

 

중남문에서 궁궐 정문에 이르는 모습 

전체적인 왕궁의 건물 형태는 국립부여박물관 뒷편의 금성산에서 출토된

건물모양의 청동소탑(청銅小塔)과 현존하는 정림사지 5층석탑,

익산 미륵사지석탑 등에서 보여지는 목조건축 양식 등을 근거로 삼고

 기타 국내외 고건축 자료들을 참고하여 재현했다고 한다.

 

 

국립부여박물관 뜨락에 서 있는 석조불 입상

(16~17세기)

 

호자

 

마구리 장식 기와

 

네귀단지

 

무녕왕릉 내부 재현

 

금동대향로

 

백제시대 발굴사업의 최대 성과로 꼽는다는데

높이 64cm, 무게 11.8kg이나 되는 대형 향로이다.

백제시대 문화 역량의 모든것이 집약되어 있다라는 평.

 

청동거울

 

칠지도

 

백제사 연구에 있어 사료의 부족에다 적잖은 왜곡까지 더해져 연구사가들은

크게 애를 먹고 있다는데....

하여, 어렵고도 어렵다는 백제의 미스터리는 갈 수록 도를 더 해만 간다고.

그 중, 칠지도가 지닌 의의는 너무나도 큰 것인데,

 이 역시 바다 건너 일본측에서 문을 닫아 걸고있어 어쩔 수가 없는 모양.

 

장군으로 승진한 군인을 청와대로 불러 대통령이 칼을 내리는 모습을 우리는 가끔씩 볼 수 있다.

우리네나 남의 나라를  막론하고 자고 이래로 칼이란, 윗 신분을 지닌자가 아랫 신분에게

내리는 것이지 그 반대란 있을 수 없는 법 인데도 불구하고,

왜인들은 지금도 아니라고 박박 우겨대고 싶은 모양.

 

칠지도의 명문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는 것일까...?

 

 

의자왕대 귀족 사택 지적의 비석

 

백제의 미소라 불리운다는 서산마애삼존불의 복각

 

기와 문양

 

박안식 교수 컬렉션

 

궁남지의 물양귀비 군락

 

붉은색이 혼재되어있는 백련

 

 

홍련

 

 

 황련

 

 

 백제 닮은

 

                             - 고중영 -

 

재법 늙수구레한 한 송이가 있다.

손사래도 힘겨워진 갈바람이

둔덕을 넘을 때

자리바꿈 더딘 낮달을 닮아

창백한 안색에 가슴 찡해진 한송이가

내리 뜬 눈사실

그 아래 나풀나풀 세월을 쌓고 있다.

 

시절은 흘러 기억으로 남고

사람살이 흘러 역사로 남는다던 데

주야삼경 깊은 밤 손수건을 꺼내

밤하늘 맑게 닦아 별 심어놓고

천삼백년 망연히 바라보던 유민들처럼  

갈갈이 찢어진 꽃잎이여! 

 

백제를 닮은 꽃이 시들어

백제 같은 땅에 묻힌 說話가 있다.  

아름답게 저물어간 戰史가 있다.

 

 

*나는 백제유민이다. 그리고 백제는 의자왕의 항복으로 망한 게 아니다. 전라북도 부안에는

의자왕 뒤 백제부흥군들의 전적이 숱하게 남아있고 그것들은 正史로 기록되지 못했다.

 

무왕의 탄생 설화가 깃든 궁남지(宮南地)

 

궁남지의 조성 방법은 신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안압지의 축조로 이어지게 된다.

현제의 궁남지에 대해서 여러 설 들이 제기되고 있는 모양으로

백제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수전과 관련된 유적들이 계속해서 확인되고 있는지라

현재의 위치가 백제 때의 궁남지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고.

 

 

 

 

 


 

 

 

 

 

미스터리는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유발에는 해소가 따라야 하는 법.

 

지난 2월, 탐매여행차 경북 청도의 길상원을 찾게 되었는데

쥔장이신 박복규 선생님으로부터

저녁시간  청도군청에서 한옥에대한 강의가 열린다는 얘길 듣게되었고

관심이 있는지라 당연히 참석하게 되었다.

 

강사로 나선 이는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3대 대목장(신응수, 전흥수, 최기영)

중의 한 분인 최기영 선생.

 

완주 화암사 극락전 뒷편 처마아래 길게 뻗어나온 하앙식 법식에 관한 얘기.

봉정사 극락전 전면 해체 보수와 그 과정에서 나온 명문에 관한 얘기.

뒤틀린 목재를 바로잡는 과정에 얽힌 흥미진진한 얘기,

경주 반월성 아래 냇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복원에 관한 얘기 등등...

 

이런 저런 얘기 도중,

부여에 가면 당신이 주도하여 지어놓은 5층목탑이 있다는 얘길 듣게 되었다.

내친김에, 황룡사 9층목탑 복원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데

자신있다는 말씀을 듣고 어떻게나 가슴이 설레였던지

혼자서 열심히 박수를 보내드린 기억이 있다.

 

3충 이상 올리기가 무척 어렵다는 목탑을 5층씩이나 올렸다고...?

당장에 달려가보고 싶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야 찾게되었다.

 부여 시내에서 백마강을 건너 규암면 어디쯤에 자리한

"백제역사재현단지"

 

상상을 초월한 건물이었다.

이렇게 기품있고, 웅장하고, 질서정연한 건물이 이 시대에 복원되고 있을 줄이야...!

득달같이 달려간 "능사 5층 목탑"

돌아보는 내내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만큼 너무나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특히, 목탑 정중앙 3개의 나무로 이어졌다는 심주목이 내내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고

각종 기둥을 비롯한 여러 부자재들의 결구방식도 여간 흥미로운게 아니었다.

 

철재 H 빔으로 짜 맞춘다고 해도 이 보다 튼튼할 수 있을까?

 지진은 커녕, 그 어떤 재난에도 끄떡 없어보이는 단단한 짜임새를 보면서

이럴 수가... !

 

어떻게 이토록 야무진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단 말인가...? 

선생께서 자신있게 황룡사 9층목탑 복원이 가능하다는 청도군청에서의 말씀이

결코 빈 말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생애 무슨 복이있어, 행여 선생을 모시고  이 능사를 돌아보며

건축 과정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라도 들을순 없단 말인가...!

이 무식한 자의 눈에도, 불멸의 건축물임이 한 눈에 읽혀지고 있었기에 말이다.

 

바로 옆에 지어지고 있는 왕궁으로 향한다.

규모와 비례의 엄정한 함수관계가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중궁전을 비롯

기다란 회랑으로 연결된 건물의 유기적 공간을 보면서

"최고의 건축예술은 이런 것이로구나" 무릎을 치게된다.

 

왕궁 정전의 계단을 내려와  용문전(龍紋塼)을 밟고 서서

강한 햇살이 내리붓는  정궁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자신있는 미소를 머금고 고건축에 대해 설파하시던

대목장 최기영 선생의 얼굴이 마치 환영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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