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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무등산권 사림문화 탐방

 

                 ■ 울산 '동림' 팀과 함께

 

 

 2009년 8월 15일

전남 담양군 봉산면 소재 면앙정(俛仰亭)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

 

  

 

 면앙정에 모여드는 울산 "동림" 팀

 

 

 강호 동양학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소천 박영호 선생님과 문도 여러분

 

 

 

동림 팀에게 사림문화 탐방의 출발지로 면앙정을 제의한 배경에 대해 잠시 주절거려보자면...

  

여말선초,

당시의 선비나 사대부는 구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이씨조선에 협력할 것인가

아니면, 불사이군의 명분을 따를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된다.

이 때, 정포은으로 대표되는 불복신(不服臣)들은 두문동에 숨어들게 되었는데

이성계 일파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그만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무렵,

여산송씨에서 출계한 면앙 송순(宋純)의 현조되는 신평송씨(新平宋氏) 희경(希璟)과

그의 동생 송구(宋龜)일가도 충청도 연산을 떠나

전남 담양과 영광(지금의 장성군 삼계면)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어릴적 송순은, 송구의 증손이자 대학자였던 지지당 송흠(知止堂 宋欽) 문하에 수학했으며,

약관 때는, 당시 담양 부사였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에게서 2년을 수학하게 되는데,

그 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학문과 몸가짐이 큰 틀을 잡게되었다고 한다.

 

후로도 육봉 박우(六峯 朴祐),

능성 현감이었던 취은 송세림(醉隱 宋世琳) 등을 사사하였으며,

60여 차례의 관직을 거쳐, 50여년 세월을 조선의 관리로 봉직하게 된다.

 

송순이 평생 도의로 교유한 인물을 살펴보면, 

퇴계 이황을 비롯, 청송 성수침, 인보 정만종, 소쇄옹 양산보, 기재 신광한,

송재 나세찬, 석천 임억령 등이 있고,

 

그의 문하를 보면,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재봉 고경명, 송강 정철, 백호 임제,등

조선조를 대표하는 선비들이 온통 즐비하다.

 

한 때, 진복창의 모함으로 평안도 순천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

단후관용'(端厚寬容)으로 대표되는 그의 인물평 처럼

'단후'한 그의 성격과, 심지어 노비들 조차도 자식처럼 품고 살았다는 

'관용'의 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삶의 자세가 면양정 송순이 지향했던 철학이었으며,

물경 110여 명을 헤아리는 수 많은 교유 인물들이 늘 그의 곁에 상존했다고 한다.

 

전해져 오는 송순의 회방연(回傍宴)에 얽힌 미담 한 토막.

송순의 나이 87세(1519년 기묘년)를 맞이하여 

가인들이 앞장 서 이 곳 면앙정에서 회방연을 배풀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주상께 고하니, 호조에게 명하여 아름다운 꽂과 미주를 내리시고,

신은(新恩:처음 과거 급제) 때와 같이 축하하였다.

 

도백 송인수와 각 읍의 수령 등이 참석 축하하자니 밤이 깊어졌고,

스승인 송순이 숙소로 향 할제 정송강이 나서 스승의 남녀를 메어 드리자고 제의,

기고봉, 고제봉, 임백호 등이 달려나와 선생의 수레를 메었다.

 

주지하다시피 그 시절 가마를 메는 것은 천한 신분을 지닌 아랫것 들의 몫.

헌데,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이요, 사대부 들 이었던 그 들이

스승의 가마 맴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한 없는 존경과

예를 다한 심성의 절절함이 모아진 결과 이리라.

 

 

송순이 지향했던 인생이 어떤 것 이었으며,

그의 가르침이 무등산권 사림문화에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시발지로서  면앙정이 제격일 거라는 지극히 자의적(?) 판단을 앞세워

염천시하 임에도 불구하고,  울산의 '동림' 팀 일행께

면앙정이 자리한 제봉산 언덕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시라 강권한 것이다. 

 

 

 

 

두 번째로 당도한 곳은 송강정

 

 

정송강과 그의 시문학에 대한 소천 선생님의 현장 강의

 

 

송강정에서 송강(松江)을 굽어보노라니

 

 

자미목의 붉음보다도 더 붉은 '동림'팀의 열정

 

 

연계정 

 

미암 유희춘(1513년∼1577년)이 학문을 강학하던 공간으로

임란으로 소실한 것을 문인들 90여명이 힘을 모아 중건하면서

정자 앞의 계류 이름을 따 연계정이라 하였다.

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을 하였다.

미암 유희춘은 중종에서 선조때까지의 학자로서 호는 미암이요 자는 인중이다.

153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등을 지내다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종성등에서 장장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명종때에 비로소 풀려나서 선조초에 대사성, 대사간 등을 지내고

선조때에는 이조참판을 지낸 선비이다.
성리학에 침잠했으며 사후에 좌찬성에 임명되고, 문절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연계정에 피어난 노랑상사화

 

 

 연계정앞에 조성된 연지와 모현관

 

 

 사당이 자리한 미암 종가 (맨 왼편이 종부 어른 : 당 80세)

 

미암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 여사의 학문도 대단한 수준인지라 꼭

 눈 여겨 봐야 할 대목.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  

미암일기에는 동의보감의 주인공 허준에 대한 애기가 여러번 나오고 있다.

허준이 미암을 치료했다는 사실등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해남 내지는 무등산권역의 출신임이 분명하다는 중론.

 

 

 

의제 허백련 선생이 쓴 당호가 내 걸린 모현관

 

보물로 지정된 미암일기는 선조 원년인 1567년 10월부터

선조 10년인 1577년 5월까지 10 여년간에 걸친 유희춘의 일기이다.

 

분명, 한 개인의 일기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국가의 대소사로부터 시작하여

정치, 사회, 경제, 문학등의 흐름을 파악할수 있는큰 상징물이며

임란으로 인해 선조의 승정원일기가 불에 타 버렸을 때 기본 사료로서

 율곡의 경연일기와 함께 미암일기를 사료의 기초로 이용했을 정도라고 한다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던 하서 김인후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던 미암.

대단했던 미암의 학문에 비해 그의 아들은 요즘으로 치면 다소 1%가 부족했던 모양.

그런 아들을 두고 애태웠을 부모 심정이 그려지는 등,

 미암일기엔 너무나도 적나라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기술되어 있기에

사료적 가치로서 그 진가를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명옥헌

 

 

 

 연못과 자미목으로 대표되는 명옥헌 원림

 

 

 

 

 

임금이 수레 타는 것은 즐기려는 것이 아니고

태평스런 모습을 백성들과 함께 하려 함이라. - 이지저

예로부터 가는 세월은 모두 꿈과 같다더니

인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늙어만 가는구나. - 박죽서

조선 사람으로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고

살아 백년 없지만 죽음으로서 영원히 빛나네. - 원세개

냇물이 흐르는 것은 바다로 돌아가려 함이고

나무가 자라는 뜻은 꽃을 피우고자 함이라네.

 

글방 옛터에 꽃은 피고 하였고

대대로 보살핀 무덤은 풀이 쇠었으리. - 강항

때를 만나 하늘과 땅이 함께 도와주지만

운이 다하니 훌륭한 사람도 어찌할 수 없구나. - 전봉준

옛 친구들은 모두 인생을 마감하였고

젊은이들과는 사귈 기회가 없어 세상과 멀어지네.

슬프구나! 세상의 후손들이여

내 한평생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 김병연

 

산과 들의 풀과 나무는 매년 변함없이 푸른데

백성들과 함께 사는 훌륭한 사람은 돌아가기 어렵다네.

꿋꿋한 태도와 의로움은 가을 하늘처럼 높고

꽃을 대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와 같아 나의 스승이라네.

 

※ 주련 중 원세개의 시는 하르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장한 절개를 기려 쓴 것이다.

 

 

 

 

 

 

 

 

 

 

 

 

 

 

 

 

 

한림학사 오희도의 아들 오명중이 조성한 원림

 

 

 후산리 은행나무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거사를 의논키위해 창평땅의 월봉 고부천(고경명의 손자)을 찾았는데

오희도를 찾아보라는 월봉의 권유에 의해 후산마을에 당도한 인조가

위 사진상의은행나무에 말고삐를 매었다는 애기가 전 해온다.

 

※ 여러 그루의 이형주가 은행나무를 감싸며 옥죄고 있었는데 하루빨리 제거해야 할 듯.

 

 

죽림재

 

 

 

 

 

 

 

 

창녕조씨 문중의 교육 공간

 

 

자미목과 나란히 선 오른편의 홍매

 

봄날, 사진 속의 홍매가 흐드러질 때,

어둠 속 죽림재 마루에 걸터앉아 매화나무 위로 떠 오르는 만월을 한번 감상해 보시라.

극락과 자미원의 세계가 거기 펼쳐져 있으리니...

 

 

 

 

무등산권역 사림문화의 효시 수정

 

 

 이성계 일파의 반역을 규탄하다가 배척된 고려말의 충신들은

 범세동의 화재를 계기로 전국으로 흩어진다.

 정지 장군을 비롯, 전신민, 조유, 탁광무등이 이 고장으로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 중 자미탄의 맨 윗쪽에 전신민이 정착, 이 독수정을 짓고 

송도를 향하여 불사이군의 예를 올렸다고 한다.

 

 

 소쇄원의 광풍각

 

 

 

 

 

 

 

 

 

 

 

  "소쇄처사양공지려"(송우암의 서체)와 2단으로 조성된 매대(梅臺)

소쇄원의 쥔 양산보와 김하서는 사상사적 동지이자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양산보의 아들 고암 자징(子徵)과 그의 스승 김하서,

그 두 사람은 지금 장성의 필암서원에 나란히 배향되어 있다.

 

 

 제월당의 담소

 

 

 

 

 

 

 정송강이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지실마을의 계당(溪堂) 앞을 흐르는 계류

 

 

 지실마을의 계류를 따라 오르면

 

 

 자미목이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암반위로는 계류가 졸졸졸 흐르는 멋스런 풍경이 펼쳐지고...

 

 

식영정(息影亭)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어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는 정자

 

 

그 옛날의 자미탄이 지금은 호수로...  주호에 지는 노을

 

 

 

 


 

 

 

 

강렬한 변혁의 시기였던 여말선초를 거치면서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 발버둥쳤던 인물들.

그들과 집권세력에 동조한 훈구대신들 간에 벌어진 각종 사화는

이미 충분히 예견되어 있었던 셈.

 

무등산권 사림의식의 태동은

삼인대의 상소를 그 연원으로 봐야 할 것이라는게 정설이며

기묘사화를 겪으면서 구체적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고,

같은 시기 조정암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림의 학정신이

정암의 능주 유배와 함께 자연스레 무등산권역으로 옮겨오게 되는 것이다.

 

능주 죽수서원 담장아래의 비석에 정암과 함께  이름이 새겨진 학포 양팽손을 비롯,

정암의 문도였던 의리파의 선두 소쇄원의 양산보 등이 있고, 

동복땅에 귀양온 최산두의 문하에선 김하서가 수학하여

도학과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사림정신의 정립과 실천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삼인대의 상소는 결국 기묘사화를 불러왔고,

 이로 인한 도학의 정신은 무등산권에 녹아들고 수용되어

성리학의 천착과 도학을 실천케 되었으니,

 이야말로 사림정신의 형성과 발전 리고 승계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맥을

롯히 볼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삼인대 상소의 주인공으로 호남 절의정신을 이끌었던 눌재 박상의 문학을 비롯,

그의 문하로서 기장 많은 우리말 문학을 남긴 면앙 송순,

무려2000여 수가 넘는 한시를 통해 시가문화를 이끌었던 석천 임억령,

 

소쇄원을 당대의 문예부흥소로 격상시키면서 1600여 수가 넘는

한시를 남긴 하서 김인후,

선조 일기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미암일기의 주인공 유희춘,

 

가사문학의 거목으로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송강 정철,

관직 부임길, 무덤에 한잔 술을 따르며 황진이를 불러낸

호 임제 등등의 면면을 훑노라면

 자연스레 무등산권 사림문화의 전개 과정이 가슴에 와 닿게된다 .

 

또한 의로움으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선 의리실천파 들을 보자면

임란 때의 김천일,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를 비롯

김덕홍, 김덕령 형제등 모두 다 헤아릴 수 조차 없다.

 

한말의 기우만, 기삼연, 전기홍, 최제학, 안규홍 등이 있고

 전봉준으로 대표되는 갑오년의 혁명이나 일제하의 학생운동

가까이는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무등사림의 맥은

다양한 형태로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15세기 도학시대의 중심축이었던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의 학풍과 기풍(氣風)의 흐름이

무등산 사림문화를 형성케 했으며, 그 도학적 기풍이 부정과 불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정신과 자존의식이라는 담대한 사림문화로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무등산권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 많은 누정이 어께를 맛댄 형국의 자미탄 언저리의

이런저런 풍경과 사연들을 깊이있게 더듬으려 들라치면,

단 하루라는 시간은 너무나 짧은 것이라고 해야할 터.

 

 바쁘신 와중에도 머나먼 곳 울산땅에서

열의를 모아 이 곳 무등산권 사림문화 팀방에 나선 동림팀 여러분께

성심을 다해 앞장서지 못했음이 그저 못내 죄스러울 뿐.

 

 다시 한번 즐거운 마음으로 뫼시게 될 날을 손꼽아 고대하련다.

무더위의 막바지, 부디 언제나 청정하시고 늘 평안한 나날이시길...

 

 

 

 

참고문헌 - 湖南學의 世界(한국사상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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