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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老子의 世界 제1장

 

老子의 世界

 

제1장

진리여 이름할 수 없는 그것이여

 

 

 

 

 

지난 봄 어느 날,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를 방문하여 경산(耕山) 장응철(張應哲) 종법사님을 뵙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당신께서 역해 하신  "노자의 세계"라는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원불교 종단의 수장께서 설파하시는 "노자의 세계"는...?

 

틈 나는대로 그 내용을 이자리에 옮겨가며,

원불교 종법사님의 시각으로 본 "老子의 세계에 침잠하여 보리라.

 

 

 

 

 

 

 

서문을 간추리자면...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더 높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욱 깊다고 한다.

나는 노자(老子)님을 안다고 할까? 좋아하는 정도인가? 아니면 그를 즐기는 경지일까?

아마도 나는 잘 알려고 하는데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일 것이다.

 

 

- 중략 -

 

 

장자(莊子)가 세상이라는 영역 밖에서 시원하게 노니는 해탈자의 모습이라면, 노자는 해탈자도

그렇다고 세상을 경영하는 경세가도 아닌, 중용적이면서 정교하여 참으로 완숙미를 느끼에 하는

그런 달관을 느끼게 한다. 세상이라는 크나큰 한 물건을 잡지도 버리지도 않고 그것을 알맞게

다루는 잘 숙련된 솜씨 좋은 그런 노인을 만난 듯하다.

 

 

단 한 권의 저서가 어떻게 그 많은 세월에 그 많은 세월에 그 많은 사람의 사색의 대상이되고

그 많은 사상. 정치. 문화. 역사.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경이롭기 짝이 없다.

가령 종교의 성전(聖典)은 그들의 제자와 조직에 의하여 읽혀지고 또 사상화되며 삶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노자는 조직을 갖지도 않았고,

조직화된 제자도 없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 중략 -

 

 

오늘의 시대, 컴퓨터로 상징되는 과학시대, 지구촌 시대, 평등 시대, 인권 시대에 노자가 오셨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주창하실까? 자못 의문스럽다.

 

"도덕경"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치 지도인에게, 교육자에게, 장바구니를 든 생활인게게, 친근한 지혜를 주는 그런 해석을 하고 싶다.

 

우리는 그 동안 노자가 밝힌 도를 너무 고매한 것으로, 관념의 유희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노자가 밝힌 도덕(道德)을 우리의 가장 가까운 현실로 끌어내려서 그의 무명(無名)의

도(道)와 무위(無僞)의 덕(德)을 생활화하는데 정열을 쏟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림의 떡과 같은 "도덕경"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재인 직업, 생활 중에 정신의 양식이 되어

 실효과를 거둘 수 있는 활용의 경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경"의 해석을

되도록 쉽게 생활에 대입하여 설명하도록 노력하였다.

 

 

 

 

 

 

 

진리여 이름할 수 없는 그것이여

 

 

道可道면 非常道요

 

 名可名이면 非常名이로다

 

無名은 天地之始요

 

有名은 萬物之母니라.

 

故常無欲하여 以觀其妙하고

 

常有欲하여 以觀其徼하라.

 

此兩者는 出而異名이니, 同謂之玄하나니

 

玄之又玄하여 衆妙之門이로다.

 

 

 

 

無名(무명) : 도(道)나 진리의 체성을 뜻함. 체성은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으므로 무명(無名)으로 표현함.

 

有名(유명) : 도(道)의 바탕에서 한 걸음 발현되는 법칙(法則), 또는 조화로써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체성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理性)으로써

                       개념화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름할 수 있다고 하였다.

 

徼(요) : 변방 요, 갓 요, 밖으로 나타난 변화의 현상.  妙와 대구를 이룸.

 

 

 

 

생각될 수 있는 진리는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진리는

영원한 진리라고 할 수 없도다.

 

이름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진리가

천지의 바탕이되고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이치가

만물을 기르는 어미가 되도다.

 

 

언제나 무념의 경지에 사무쳐야

궁극적인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언제나 유념의 사색을 하여야

만가지 변화의 이치를 터득할 수 있도다.

 

 

이름할 수 없는 진리와

이름할 수 있는 이치는 본래 하나이나

경우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하나의 큰 진리란

현묘하고 현묘하여

갖가지 묘한 이치를 두루 갖춘 문이로다.

 

 

 

 

- 해설 -

 

 

첫장의 말씀은 "도덕경"의 중심 내용이며 이 경의 등불과 같은 것으로 천지만물을 운용하는

 진리의 체성과 작용 그리고 그것을 체득해 가는 방법과 하나의 진리의 오묘함을 밝혔다.

 

"도덕경" 전체의 내용이 이 첫장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인격화하는 과정,

실천으로 완성을 이룬 성자의 심정, 생활 모습, 처세의 지혜, 정치적 능력,

인간을 지도하는 방향 등을 밝힌 것이다.

 

 

 

 

1. 궁극적 진리

 

도란 무엇일까? 사람이 다니는 길을 인도라고 한다. 차가 다니는 길을 차도라고 한다.

이렇게 형상이 있어서 알 수 있는 사실적인 길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 있다.

이것을 윤리규범이라고 한다. 이 규범이란 추상적이다.

 

사회정의란 것도 매우 추상적이지만 있는 것이다. 윤리규범이나 사회정의란 것은 시대의 형편이나

그 지역에 관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은 인위(人爲)다.

즉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란 뜻인데 대표적인 것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이러한 인위적인 것에 의하여 사람을 평가하고 사회의 건전성 여부를 저울질한다.

그런데 이 인위는 사람의 인식으로 포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라는 것은 좀 다르다.

봄이 되면 따뜻하여 식물들은  생기가 돌고 신록의 여릿한 잎들이 피어난다. 여름엔 무성해 진다.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겨울에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도 늘 쉬지 않고 변화한다. 사회도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변화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이법(理法)이라고 한다. 자연현상을 연출하는 연출자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법칙에 의하여 쉬지 않고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진리가 있어서 만물이 그 이법에 따라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는 인간의 일상적인 인식능력 사고력으로는 알 수 없는 깊고,  넓고, 크고, 영원한 존재이다.

 

인간의 사유의 산물인 윤리도덕은 그 내용이 고정 되어 틀로서 존재한다.

그런 가치기준 즉 옛것을 고집하는 것을 보수적(保守的)이라고 한다. 시대가 변천에 따라 새로운 가치기준을

추구하는 것을 진보적(進步的)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광범위하게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이 사회이다.

이러한 사랑이나 이념은 결국 사람들에 의하여 창출되었기 때문에 알 수 있으며 이름 붙여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다르다.

 

인간의 생각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름으로는 그 내용을 다 담을 수가 없는 신비하고  다양한 그것,

이름할 수 없는 절대적 실체이다. 인위의 도덕은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개념을 알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하여 알맞은 이름을 지어 부를 수가 있다.

러나 자연을 자연이게 하는 그 무위(無爲)의 진리당처는 깨달아 합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포착되지도 않고 포착되었다 하여도 그 일부분만을 알고 있으며, 또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실체는 주객(主客)이 없는 절대 하나이기 때문에 분별을 일으켜서 이것이라고 하면 그 진리의 궁극적인

참모습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도(道)를 도라고 알았다고 하는 그러한 도는 무위의 진리라고 할 수 없다.

 

깨달은 역대의 성자들은 본인들이 각고의 정성으로 진리를 포착하여 이를 그 나름대로 도(道)라고 하거나

자연(自然)이라 하였다. 공자(孔子)님은 천(天)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예수님은 신(神)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불타(佛陀)께서는 법신불(琺身佛)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님은

일원(一圓)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러한 이름들은 그 실체를 그 분들의 깨달음의 셔터에 찍힌 모습을 중심으로 지은 이름이다.

앞으로 수많은 각자(覺者)들이 나와서 새로운 이름을 지을 것이다. 결국 진리에 대한 대명사는 대명사일 뿐

실체라고 할 수 없고 진리를 표현한 이름은 그 실체의 일부분을 표현한 것이며

그 이름들은 부득히 표현된 것이다.

 

 

 

 

 

2. 진리의 바탕과 작용

 

진리는 밝고 조화를 일으키는 작용의 측면이 있고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체성의 측면이 있다.

가령 고요히 천지가 잠들어 있는 듯한 면이 있는가 하면 만물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듯한 작용의 면이 있는가 하면

만물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듯한 작용의 측면이 있다.

가령 우리들의 마음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주 고요한 상태가 있는가 하면

이런저런 사유활동을 하는 때가 있듯이 말이다.

 

"도덕경"에서는 진리의 체성(體性)에 속하는 부분을 생각으로 측량할 수 없고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무명(無名)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이 천지의 비롯이라고 하였고, 진리의 작용의 측면을 만물의 모태(母胎)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름지을 수 없는 그런 진리의 바탕을 유교적 표현을 빌리면 무극(無極)이라고 한다.

원불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무(無) 또는 공(空)이라고 한다.

유명(有名)이라는 것은 그 무명(無名)의 바탕에서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조화를 일으키는 창조의 작용을

나타내는데 이것을 음양(陰陽)의이치라고 할 수 있으며, 인과(因果)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섭리가 만물의 운명을 주재하기 때문에 모태라고 표현한 듯하다.

 

 

 

 

 

3. 진리를 터득하는 방법

 

앞에서 체성의 무명(無名)과 작용의 유명(有名)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제 이러한 진리를 어떻게 깨달아 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무명의 진리는 마음을

지극히고요하고 오롯하게 하여야 느껴서 터득할 수 있다.

 

물밑을 보려고 하면 물결이 잠잠해져야 하는 것처럼 극히 미묘한 진리의 깨달음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라야만이 맛을 느낄 수 있다. 또 긍국적인 도는 그 대상에 대하여 믿음과 깊은 관심으로 의문을 지니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극한 정성을 들여 깊은 명상에 잠겨야만 깨달음이 가능하다.

 

다음의 유명의 이치는 항상 유욕(有欲)으로 즉 유심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등의 사유활동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앞의 무욕(無欲)으로 깨닫는 무명의 진리는 진리의 정태(靜態) 또는

전체의 하나인 그런 체성에 합일하는 공부라면, 유욕으로 알아지는 유명의 이치는 진리의 동태(動態)

또는 부분과 변화현상을 터득해 가는 공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 공부는 반드시 병행해야 하며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4. 진리는 만물을 내고 들이는 문이다

 

무명으로 일컬어지는 진리의 심오한 바탕과 유명으로 일컬어지는 도의 작용은

하나의 실체에 대한 동전의 양면, 또는 내외(內外)의 양면, 체와 용의 양면인 것이다.

주택을 말할 때 집의 좋고 나쁜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 주택이 서 있는 대지를 빼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무명의 변화하지 않는 도와 유명의 변화하는 이치가 둘이 아닌 그 큰 하나의 진리는

세상의 모든 원리와 무궁무진한 보물을 출입시키는 창고의 문과 같다.

 

과학에서 말하는 원리, 예컨데 무거운 것은 아래로 내리는 원리, 공기가 순환하는 법칙,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법칙 등 갖가지 물리현상이 도에 근원하였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의 교리도 성자가 우주의 실체인 도를 깨달아서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부분을 그 진리에서 추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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