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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운경(雲耕) 詩문학관

 

 

운경詩문학관

 

- 전북 고창군 무장면 고라리 352 - 26소재 

 

 

 

 

 

무장초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운경 박우영 선생께서 자비로 설립

 

 

 

 

고라리 블루배리 농장 앞 자택에 개관

 

 

 

 

 면 단위 시골에 시문학관 설립이라.....

 

 

 

 

사단법인 운경시문학관 창립 (발기인) 총회

 

 

 

 

시문학관 뜨락에서의 이사진 담소

 

 

 

 

 

 고창의 향토 문인 여러분

 

 

 

 

 

 

“시는 농민의 고달픈 영혼을 담는 것”

ⓒ (주)고창신문


지난해 3월 개관한 운경(雲耕) 시문학관(관장 박우영)은

무장면 고라리마을에서도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문학관은 강의 및 독서실과 창작실, 도서보관실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박우영 관장이 중학교 때부터 수집해온

책 중 약 5천권의 장서들이 양 벽면을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장소가 많이 협조하지만 앞으로는 시설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박우영 관장은 1992년 3월에 한국시에 등단, 70평생을 살면서 시와 함께 동고동락해왔다.

그는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무한한 허공의 안개 속과 같다”며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다만 시적인 것을 많이 탐색하고 읽어보기 위하여 운경시문학관을 개관했다”고 말했다.

운경 시문학관은 일주일에 세 번(월.수.금) 문을 연다.

하지만 시를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환영이다.

박우영 관장은 시문학관에 대한 설명을 하는 도중 자신이 창작한 시 하나를 읊어 주었다.

 


「들길을 거니는 마음」

동백나무 울타리 사이로
먼 들길이 내다뵈는 뜨락에
아무도 모르게 살기엔
너무나 순박한 하얀 들국화 한송이.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없는 들길을 거니는 일 밖엔 없다.
틈틈이 책에서 인생의 진리를 배우고
무한한 고독 속에 내 생이 다할 때까지
몸부림 쳐야 하는 내 인생의 종착역.

 


운경 시문학관이 자리한 곳은

박 관장이 1970년대부터 야산을 개간해 지금의 옥토가 되었고

그 주위에 감나무며 블루베리, 복분자.인삼밭 등을 재배하고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정원수며 과실나무들을 심어 운경농장 또한 운영하고 있다.

운경은 구름 운(雲)에 밭갈 경(耕)이란 한자를 써

구름아래 밭을 일구며 사는 삶을 갈망하는 박 관장의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비, 눈, 바람, 햇볕을 느껴보고 흙을 만져보며 시상을 떠올린다.

오히려 시를 써내려 갈 때는 농장을 일구며 사는 그의 삶이 소중한 시의 소재가 된다.

그는 “시는 농민의 고달픈 영혼을 담고 독서는 지석을 얻고 지성의 원천이 되어 준다”며 “

이 혼탁한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농군의 심성으로

오늘도 사래긴 청보리 밭, 긴 밭을 아침 이슬 해치며 들판에 나가 묵묵히 일하고

밤에는 책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순결을 사랑하는 높은 가늘 하늘의 겸허한 마음으로 또 다른 이상의 길을 열며

고라리 마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박 관장은 전했다.
김희정 기자

 

 

 

 

 

 

 

면 단위 시골에 詩문학관이 들어선다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찾아간 고창군 무장면.

고창향토문인 여러분들이 이사진으로 참여한 총회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엉겁결에 끼어든 셈.

 

평생을 교육계에 종사하시다 정년을 하신 운경 박우영 선생님께서

자신의 자택 한켠에, 지역민들을 위한 독서 문화 공간을 마련하신 것.

존경스런 마음으로 총회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라 안 처처에

이런 활화산 같은 문학 열정이 넘쳐나길 기대하는 심정으로....!

 

 

 

 


 

 

 

 

 

 

판소리의 대가 만정 김소희 선생의 생가

-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번지 -

 

 

 

1917년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1932년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수료하였고,

당대 명창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듣고 감동받아 판소리에 입문하였다.
1930년 열 세살 때 명창 송만갑을 찾아가 판소리에 입문하여, 단가와 〈심청가〉 몇 대목을 배웠다.

송만갑이 떠난 후 이화중선이 어린 김소희를 창극무대에 향단이 역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그 후 15세가 되던 해인 1932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온 지 한달여 만에 김소희는 한성주의 주선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1932년 전계문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 정경린에게 무용을 배웠다.

1934년 정정렬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김종기 명인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1938년에는 박동실에게,

광복 후에는 정응민, 김여란, 정권진, 김연수한테서 판소리를 배웠다.

 

 

 

 

만정 김소희 (晩汀 金素姬)



1936년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1948년에 사단법인 여성국악동호회 이사, 1954년에 민속예술원 원장,

1957년 대한국악원 이사, 1962년 국립창극단 부단장, 196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주요 공연으로는 1949년 제9회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및 유럽 순회 공연, 1964년 동경올림픽 공연,

1972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순회 공연,

1979년 국악생활 50주년 대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공연 등이 있다.

 

정악, 한학, 서예 등을 두루 익혀 그의 예술에 품격을 더 했으며, 수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1995년  4월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고창군 아산초등학교 뒷편에 자리한 두락암과 두암초당

 

 

 

 

 

한 때, 이 곳 두암초당에 올라 독공을 하기도 했다는 만정 김소희

 

 

 

 

 

천길 벼랑 아래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두암초당

 

 

 

 

 두암초당에 좌정하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자연부락에서 만난 소나무 고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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