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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장성의 문화유산 돌아보기 <2>

 

 

장성 향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장성읍 성산리 청룡마을/

 

1394년(태조 3) 북일면 오산리 교촌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장성읍 장안리 장자동으로 위치를 옮겨 복설하였다.

이 때 장성현과 진원현이 합쳐지면서 진원리에 있던 향교는 폐지되고 장성향교로 합쳐졌다.

1658년(효종 9) 현재의 성산리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건물의 구성을 보면, 명륜당ㆍ동재ㆍ서재ㆍ대성전ㆍ내삼문 등과 부속건물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명륜당 우측에 수령 약 300년된 은행나무가 서 있었으나 여러해 전에 고사해 버렸다.

대성전, 동ㆍ서무,내삼문,명륜당,동ㆍ서재,외삼문,홍살문,교직사 등이 있으며

 외삼문 밖 약 300여m거리 고속도로 하부 통로 우측에 하마비가 서 있고, 홍살문, 외삼문, 명륜당,

ㆍ서제 내삼문, 동ㆍ서무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좌향은 서북향으로 되어 있다. 

 

판본 30책, 필사본 28책, 등 총 58책의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다  조선후기 향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다.

 

 

 

 

명륜당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덤벙 주춧돌 위에 민흘림이 약한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2익공식이다.

평면을 보면 좌우퇴칸은 온돌방으로 이용하고 중앙 4칸은 개방된 마루이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동ㆍ서제는 정명 3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가구는 1고주 5량이다.

동ㆍ서무는 정멸 3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3량가에 초익공양식이다.

2009년에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여름 한 철, 명륜당에서 이런 저런 강의가 이루어진다.

 

향교 건물 뒤로 보이는 산은 이 지역 주민들이 '성자산' 또는 '돌봉'으로 부르고 있는데,

'병장산' 자락이 마무리 짓는 지점이면서, 병장산을 거쳐 병풍산으로 이어가는 시작점이자,

병장산, 불태산과,귀바위봉, 이제산성을 지나 제봉산으로 이어가는 대회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코스는 내가 가끔씩 홀로 다니는 코스이기도 하다.)

 

 

 

 

대성전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 10성 6현 우리나라의 18현 등 39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건축형식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약 1m 높이의 기단을 쌓고 자연석 덤벙 주춧돌 위에 민흘림이 약한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2고주 5량이다.

공포는 소 혀모양의 헛첨차에 소루를 얹어 외목도리의 행공첨자를 발치고 있는 주심포계의 외 1출목 2익공양식인데

제공과 헛첨차는 촛가지가 양혀와 수혀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보아지로 보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며 바람막이 판이 있는데 . 

수년 전, 딱따구리가 판재에 구멍 몇 개를 뚫어놓았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계단의 높이가 165cm로 높으며 2익공의 공포에 3량가이며 팔작지붕이다.

 

- 사이트 "한국관" 자료 참조 -

 

 

 


 

 

 

 

 

선정비, 청덕비, 불망비 등의 집합처

 

위치 : 장성읍 성산공원

 

 

 

 

장성읍 관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비석을 한데 모아놓았다.

 

 

 


 

 

 

 

 

기옹 영정 시도유형문화재67호

위치 : 장성읍 안평리 668

 

조선시대의 문신인 기옹(碁翁) 변종락(邊宗洛) 선생을 그린 초상화이다.

선생의 회갑 때 어떤 승려가 그린것이라고 전해오는데,

조선시대 사대부를 그린 일반적인 초상화 양식과는 거리가 먼 풍속화 스타일의 초상화다.

사대부의 엄숙함과 유학자의 분위기가 감도는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하기보다는

 선생의 일화들을 그림 속에 형상화시켜 놓은 것으로 봐야 할 듯.

 

 바둑판·바둑알·술병·담뱃대 등은 선생이 장안리에 거주하면서 동구 앞에 연못과 정자를 조성하고 

  바둑과 글을 잘 하는 명인들을 초대하여 함께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

선생의 일화를 전달하기 위한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건과 의복, 얼굴 형태, 두 손을 모은 공수자세 등은, 그림 기법 상 부족한 점이 많기에 

선생의 인격과 개성을 전달하는 정통 초상화로는  아쉬운 점이 많다.

허지만, 일반적인 초상화와 기법을 달리한 특이한 형태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는 모양.

 

현재 봉안되어있는 '기옹영정'은 복사본이다.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jeonchon42/Hymy/67

 

 

 

 


 

 

 

 

 

고경명 신도비 (高敬命 神道碑)

전라남도 기념물 제241호

장성읍 영천리 430 - 2

 

충렬공 제봉 고경명(1533 ~ 1592)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비로

귀부, 비신, 가첨석을 갖추고 있으며, 문인 학자 윤근수(1537 ~ 1616)가 비문을 지었다.

학자이자 의병장 등으로 일생을 마감한 고경명의 역사적 행적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각종 제도와 지방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신도비가 서 있는 뒷산의 이름이 바로 그의 아호를 딴 '제봉산'이기도 하다.

비의 건립연대는 1800년대 초반,

 

 

/제봉 고경명 (高敬命)/
 
조선 중기의 문인 ·의병장으로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霽峰) ·태헌(苔軒)이다.

그리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l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으며, 1558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박광옥(朴光玉)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6,00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즉, 1592년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북상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 금산(錦山)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仁厚)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과 순절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표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제봉집(霽峰集)》, 저서에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있다. 

 

- 백과사전에서 발췌 -

 

 

 

 


 

 

 

 

 

봉암서원 (鳳岩서원)

지방기념룰 제96호, 장성읍 장안리 19

 

조선 숙종 23년(1697)에 망암(望菴) 변이중 선생(1546-1611)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창건했다.

 

 

 

 

 

변이중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임진왜란 때 입암산성에서 순절한 윤진 장군,

자하(紫霞) 변경윤 선생을 배향하고,

 숙종 때의 유학자인 청류당(廳流堂) 변휴 선생을 추배하였다.

 

 

 

 

 성경당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성경당)이고 그 뒷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마당을 두고 마주한다.

내삼문을 오르면 사당에 이르게된다.

 

 

 

 시징당 (是懲堂)

 

이곳에는 왜군의 조총을 능가하는 화차 3종과 총통 14종, 화살 11종, 신기전 6종, 포통 8종 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 장안리 출생인 변이중선생은 47세 때 어천찰방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화력보다 앞선 무기를 만들고자 상의원직장이란 벼슬을 지낸 사촌 동생 휘암 변윤중과 함께

튼튼한 나무에 쇠로 장갑을 씌워 4면에 40개의 총구를 만들어 40발을 연이어 쏠 수 있는

화차 300량을 만들어 그중 40량을 행주산성 권율장군에게 보내 행주대첩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거북선, 비격진천뢰와  더불어 3대 발명품의 하나인 화차(오늘날 탱크와 같은 무기)가 발명됨으로써

 왜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무서운 신무기로 큰 공헌를 하게된다.

 

 

 

 

   

 

변이중이 임진왜란 중에 종래의 화차를 개량하여 만든 화차.

사진출처 http://cafe.daum.net/ongdalst/4M1O/376

 

 

변이중은 이 화차를 1592년말에 제작해서

이듬해인 1593년 2월 12일의 행주산성전투에서 권율장군에게 40대를 지원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현재 전해오는 변이중의 문집인 《망암집》에는 나와 있는 〈화차도설〉에는

문종 화차에 대한 도면과 설명문, 자신이 개량한 〈화차도〉 도면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비록 간단한 내용이지만

주력 화기에 있어서 기존의 화차와는 차이가 있음도 알 수 있다.

 

먼저 변이중 화차의 수레 구조는 일반 수레와 같이

체가 바퀴의 축 위에 바로 올려져 있다.

또 네 방향으로 방호벽을 설치하고 세 방면에 총통기를 달았다.

총통기에는 각 40개의 승자총통을 장착하여 사용하였으며,

네 방향의 방호벽에는 각기 1개의 관측 구멍을 설치하여

차 안에서 밖을 관측하고 조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다른 화차들이 한 방향 즉 공격방향 중심으로만 화기를 설치한 것과 달리

변이중 화차는 전면은 물론이고 좌우측면도 전면과 동일하게 총통을 설치했고,

화차의 총통수를 보호하기 위해 전 방위 즉 네 방향에 방호벽을 설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어느 화차보다도 탁월한 공격력과 방호력을 구비하였다.

 

 

 

 

 

황주변씨삼강정려(黃州邊氏三綱旌閭)

전라남도 기념물 제54호, 장성읍 장안리 봉암서원 앞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안도 용만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변윤중은 종형 변이중과 함께 선조를 수행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해 왜적들이 장성으로 쳐들어오자 가속들과 장정 200여명을 모아 장안리에서

10 여 일 동안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장졸들이 몰살을 당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자하고

마지막 격전지였던 부엉바위에 올라가 황룡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비보를 전해들은 그의 부인 성(成)씨도 남편을 따라 스스로 남편이 뛰어든 곳에 올라가 몸을 던졌다.

 아들 현윤과 며느리 서(徐)씨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부엉 바위로 가서 보니

부모님의 시신이 나란히 떠 올라있고 아들 형윤 또한 뒤를 따라 죽으려 하자

그의 아내 서(徐)씨가 집안의 후사를 이을 외아들이라며 극구 만류하고 대신 강물에 몸을 던졌다

.

하늘도 이들의 충, 효, 열에 감동하였는지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고 무지개가 서는 이상한 현상이 계속 나타났다.

그 뒤 시어머니의 손을 꼭 움켜잡고 죽어있는 시신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고종 조에 당시 전라 감사 조종필이 살아서도 충절, 죽어서도 충절을 지켰던 변윤중을 충신으로,

그 부인을 열녀로, 며느리 서 씨 부인을 효부로 올려 왕명으로 변윤중을 이조 참의로 증직하고

삼강 정려의 명을 받아낸 세상에 보기 드문 일문삼절의 영광이었다.

 

 

 

 

 

충신 변윤중

 

 

변윤중의 비

 

 

 

 

 

 

열녀(烈女) 함풍서씨

 

 

 함풍서씨 비

 

 

 

 

 

효부(孝婦) 장성서씨

 

 

장성서씨 비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의 도덕률과 

 한 가문, 한 대에서 열녀, 충신, 효자, 소위 일문삼절이 동시에 나와야 

비로소 세울 수 있었다는 삼강정려(三綱旌閭).

 

행주변씨라는 일개 가문의 영광을 떠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들 생각케 해주는 징표요 유물이 아닐 수 없다.

 

 

 

 

부엉바위

 

장성읍 수산리에서 부흥마을 쪽으로 가다보면 황룡강이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건너편에 부엉바위가 보인다.

임란 때는 바위 아래로  큰소(沼)와 함께   내가 굽이쳐 흘렀다는데.....

 

변윤중의 호가 휴암(鵂巖)인 까닭을 말 해 주는 부엉바위.

 

충신, 열녀, 효부의 정신이 깃들어서일까?

 

논둑을 따라 부엉바위 아래로 다가가니 온통 청죽밭이다.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삼강(三綱)의 절개와 기개를 보여주는 듯.

 

 

 

 

 


 

 

 

 

 

 

낙화암 위에 자리한 요월정 원림((邀月亭園林))

시도기념물  제70호,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 171

 

 

 

요월정을 건립하였던 金景愚 선생의 9세손인 京燦(1796∼1819)은 요월정을 다시 중건하면서

경치가 빼어남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이 요월정 重修韻을 지었다.


百日花紅度幾秋 重光重喜且重修

백일홍꽃 붉어서 몇 가을을 지냈는고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서 집을 고치는도다


朝鮮第一黃龍里 夜月更三白鷺洲

조선제일 황룡리요 달 밝은 깊은 밤에 백로 노는 물갓이라


好個東山還舊主 超然南國有名樓

좋은 동산에 옛주인이 돌아오니 남쪽의 유명한 누각이 더욱 뛰어나구나


鳳凰己去臺空在 安得詩仙與共遊

봉황은 이미 떠나고 집은 비어 있으니 어느 때나 시선을 만나 함께 놀아 볼까.


 


 

 

벗나무 낙엽이 스산한  요월정 진입로

 

 

 

 

 

 

위 詩 중 '朝鮮第一黃龍里'란 대목이 문제가 되어

왕도(한양)를 능멸했다는 모함을 받아 임금님께 불려가게 되었다.

 

"朝鮮第一黃龍里라 한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예"하고 대답하자

 

"그러면 한양은 어떤고?"하고 다시 묻자 "天下第一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장안은 어떤고?"하니 "萬古의 第一입니다."

라고 답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요월정 내부에 걸린 수 많은 詩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문곡 김수항 등

여러 명현들이 많은 시를 지어 음풍농월하던 명승지로

이 들의 시들이 지금도 빼곡히 걸려 있다.

 

 


 

 

 

 

 

 

배롱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요월정의 시인 家松 이수월 선생님

 

 

 

  

 

 

 

요월정 원림의 또 다른 먜력, 송림 감상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버린  훤칠한 미모의 여 가수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박경희, 그가 부른 노래 중에"숙명" 이란 노래가 있었는데

노랫말을 작시한 이가 바로 요월정 지킴이 家松 이수월 선생이라는 사실.

 

 

 

 

- 숙명 -

/이수월 작시, 원희명 작곡, 박경희 노래/

 

 

이젠 어디론가 떠나야 해요

외로움은 이젠 싫어요

마지막 잎새 같은 추억들이

내 가슴을 적시겠지만

다시 생각하면 마음만 아파요

허무하게 가버린 사랑

그동안 너무 많은 생각 속에

망설이기만 했어요

화려했던 지난날은 모두가

방황했던 나날들

눈물도 꿈도 사랑도 피랄 수 없는

숙명인 것을

인젠 모든 것을 잊어야 해요

그리고 떠나야 해요

마지막 잎새 같은 추억들이

내 가슴을 적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