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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원림(園林)과 고가(古家) 순례 <4>

 

 

 

 명옥헌 원림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후산마을

 

 

 

 

 

 시냇물이 흘러 한 연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갈 때의 물 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히는 것만 같다고 하여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오희도(吳希道 1584-1624)가 지었다,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 160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623년(인조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였다.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檢閱)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사망하였다.

 

 

 

 

 

 

 

후 100여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져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등이 심어져 있다.

 

 

 

 

 

명옥헌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 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전(前)의 지당부는 명옥헌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고저차는 약 6.3m이다. 동서너비 약 20m

남북길이 약 40m 크기를 갖는 방지의 중심부는 원형의 섬이있으며  

 자미나무가 식재되어있다. 

 

 

 

 

軒은 정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실의 구성은 외부로 퇴간을 돌리고 

 중앙에 실을 둔 중앙실형 (中央室形)이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다.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두었다 

 

 

 

 

워낙 비가 잦아서일까?

2010년 올 명옥헌 원림에 피어난 배롱꽃의 개체수는 예년에 비할 때

그리 열광한 만한 수준은 아니다.

 

 

  

 

 


 

 

 

 

 

 

상월정 (上月亭)

 

문화재자료  제17호 (담양군)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 산76

 

 

 

창평지역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정자로

청평면 소재지에서 바라 보이는 남쪽의 월봉산 기슭에 자리한 정자다.

본디 이곳은 고려 경조 1년에 창건된 대자암(大慈庵)이 있던 자리인데

훗날 폐사되었던 것을 조선 세조7년에 언양인 김자수라는 이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대자암 터에 상월정을 창건하여 손자사위인 이경(李儆)에게 양도 했다.

 이경은 사위인 학봉 고인후에게 다시 양도하여 이어 오다가

조선조 말에 후학을 양성하는 정자로 개조했다. 

1808년 연재, 초정 2公이 이를 중창하였고 1851년 신해년 수해 피해를 입었던 것을

고재준, 고광조 등이 보수하였고,

1858년 월헌장이 서까래와 보를 수리하는 등 여러차례 개,보수하였다.

근세기 들어서는 무등양말 창업주이자 창평고 설립자인 故고일석씨 등이

사비를 들여 상월정을 보수,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상월정을 중수하면서 쓴 중수기에는

처음부터 이 정자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세워 졌음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다른 정자와는 달리 산속 깊이 들어 앉아 있는지라 공부에 열중하기 너무 좋은 곳이다.

상월정의 교육운동·의식개혁운동은 면면히 이어져

일제시대에는 신학문을 받아 들인 학당으로 사용되었다.

 

 

상월정에서 공부했던 근대 인물로서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를 비롯,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등을 들 수 있겠다.

 

 

 

 

 

 

올 여름 내린 비로 상월정으로 오르는 길이 엉앙이 돼 버렸다.

예전엔 사륜구동 정도면 그럭저럭 올라갈만 했는데...

저수지 위에 차를 세우고, 기왕 올라가는김에 땀이나 좀 흘려보자고 내쳐 산길을 달렸다.

 

 상월정은 예나 지금이나 과거시험, 고시를 준비하던 창평의 이름난 교육 明堂. 
월봉산 정기를 받았던 탓인지 최근까지 이곳에서는 많은 고시생들이 공부하였고 고시합격생들도 꽤 배출했다.

그중에 이름 석자를 대면 알만한 유명한 법조인들도 더러 이곳에 올라 공부했던 인물들
담양땅의 이런저런 누정들 중 독수정(1400년 건립, 남면소재)다음의 연륜을 자랑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정자이기도 하다.

 월봉산 자락 하고도 한참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터라,

 산길을 올라가기도 그리 녹록치 않고, 모든 여건이 그저 적막강산이니만큼

죽어라 공부에 매진할 수 밖에 없는 조건임에 틀림없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멀쩡했던 상월정 건물이 한창 리모델링 중이었다.

 '상월정' 바로 위 아래 건물과 산막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있어 물어보려 했으나

모조리 어디로 출타했는지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담양땅 교육열의 진원지 상월정은

 100여년 전통의 신식교육의 전당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재탄생되고

 그 교육의 열과 맥이 오늘날까지도 창평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월정을 내려오는 길.

 

무슨 새소리가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엉망이 된 길에 행여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동무라도 해 주는걸까...!

   차 있는 곳까지 내내 따라오며 이 얼치기 답사객을 배웅해 주고 있었다.

 

 

 

 

 


 

 

 

 

 

 

남극루(南極樓)

 

담양군 향토유형문화유산 제3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396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팔작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전통누각으로 건립연대는

대략 조선후기인 1830년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난 2003년에야 담양군향토유형문화유산(제3호)로 지정됐다.

삼지천(삼천리) 하삼천 마을 논 가운데 세워진 남극루는 1830년대 당시,

흥 고씨 문중인 고광일을 비롯한 30여인에 의해 지어졌고,

원래 현재의 면사무소 앞 옛 창평동헌 자리에 있었으나 191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어떤 몰지각한 자가 누각 마루에 불을 피웠던 적도 있으리만큼 ,

예전 한 때, 관리가 엉망인 시절도 있었는데 근자엔 비교적 신경을  좀쓰는 듯.

 

 

 

 

 

남극루로 들어오는 길에 월봉산을 배경으로 세워진 일주문.

 나무기둥이 아니고 시멘트 기둥이라 해서 한참 말 들이 많았는데...

 

 

 

 

 


 

 

 

 

 

창평현령선정비총각(昌平縣令善政碑叢閣)

 

 

 

 

 

 

 

 

 


 

 

 

 

 

 

 

 

담양 척서정 (潭陽 滌暑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0호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1038 - 4 

 

조선시대에 세워졌던 다른 정자들과는 달리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종회소 및 주민들의 교류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건립 이후 원 기둥은 그대로 두고 덧대어 수리하는 등,

원형 보존에 신경쓴 흔적이 보인다.

남향으로 정면 3탄, 측면 2탄, 팔작지붕형태의 무실형 정자이다.

내부에는 척서정 현판과 시기문(詩記文) 편액 10개가 걸려있다.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1827년 등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죽림재(竹林齋)

 

전라남도 기념물 제99호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338

 

창녕조씨 분중의 글방으로 사용하기위해 지은  수련장.

 

 

 

 

 

봄 날의 홍매, 여름날의 배롱나무꽃등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공간이다.

 

 

 

 

 

붉게 피어난 백일홍, 그 오른쪽에 선 나무는 홍매다.

 

 

 

 

 

죽림재 연못과 백일홍의 어우러짐

 

 

 

 

 


 

 

 

 

 

 

관수정(觀水亭)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355

 

 

광주호 제방 우측 산 언덕에 위치한다.

본래 증암천을 굽어보는 눈 맛 시원한 공간이었을텐데 지난 76년 광주호가 물길을 막아

 예전의 수려함이 다소 아쉬울 뿐이다. 관수정 아래 잣정마을 출신 계월당 조여충이란 인물이

중종 39년(1544년)에 지었다가 임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과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모두 마루로 구성되어있다.

 

 

 

 

 

 

계월당이 읇었다는 시 한 수

 

 

오색구름 머무는 곳 이 용루가 아릴런가

 

북녘 향한 작은 마음 북두성의 시름이네

 

강호에 쉬는 노인의 평소 숨은 뜻은 아닐러니

 

티글 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빈 물결에 눈물만 떨구네

 

 

 

 

1533녀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명교관에 특채되었지만

오래지않아 관직을 버리고 잣정마을 증암천에 내려온 연유와 관련이 있을성 싶은 이 시는

임금에 대한 보답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