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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삼우정,기영정,관수정,봉정사,황룡전적지

2007-09-04 01:38

 

장성 삼계면 소재 수월처사 김형규 선생의 선방 '삼우정'을 찾아갔습니다.

 

드넓은 함동호가 눈에 들어오는 삼우정 찻방에 좌정,

팽주의 다감한 손길로 우려진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김형규 선생께서 수월처사란 별호를 얻게된데는

달 밝은 밤에 저 호수 한 가운데 배를 띄우고 차를 마시며 水中月을 감상 한데서 붙여졌다고...

 

 대낮인데도 방 안엔 보름달이 휘황했습니다.


 

 

 

수월처사의 작품 달항아리를 감상하며 그가 직접 덖은 차를 마시는 이 도도한 경계......
순간, 방안이 훤 해지면서 달이 빙그레 웃습니다.


 

 

희뫼요

 

 

가마 속, 그 뜨거웠던 불길을 떠 올려 봤습니다.
불의 예술에서 달덩어리가 탄생되는 그 요묘한 세계.....

 

기영정(耆英亭) - 장성군 삼계면 소재

기영정(耆英亭)은 용암원 위 높은 대지의 관수정(觀水亭) 건너편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바닥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되어 있다.

중종 38년(1543) 당시 전라도관찰사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을 위해 건립한 정자이다.

용암천 위의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송규암이 전라감사로 부임하려고 할때

중종이 그에게 명을 내려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퇴관하여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송흠을 방문하여

중종 자신의 상회심(相懷心)을 전하고

또 동시에 그의 별업을 기영정이라 이름하도록 하는

소제기(所製記)를 전하도록 한 바,

송규암이 그 명을 받들어 부임하자 곧 12수와 함께 송흠을 방문하여

별업을 정자로 건립하여 주었다는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후 시간이 지나고 병난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는데

다시 송규암의 10세 손인 송겸수(宋謙洙)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철종 7년(1856)에 이를 중건하였다.

낮은 외벌대의 돌 기단 위에 큰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각을 죽인 보아지와 주두를 놓고 굵은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 위에는 장혀받침 굴도리를 두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내부 가구 구조는 평5량가로 대들보 위에 낮은 부재를 놓고

충량을 통부재로 걸쳐 도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종량 위에는 다시 종량을 두어 장혀받침 종도리와 판대공을 얹어 가구를 구성하고 있다.

방이 없는 누정으로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낮은 평난간을 돌렸다.

대지의 위치가 높기 때문에 누마루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기영정에서 건너편을 바라본 모습,

왼쪽 맨 끝 산자락에 지지당 송흠 선생의 '관수정'이 위치.

 

두개의 편액

 

 

 

 

 

 

관수정(觀水亭) 입구

송흠은 1459년 장성군 삼계면 단산리에서 우찬성의 승직을 받은 아버지 송하원과 어머니 하동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났으며, 천성이 순후하고 덕기가 넘쳐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성종 11년(1480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정6품)로 첫 관직을 받아 근무했다.

연산군때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시문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다가 44세때 부친이 작고하시자

3년상을 치루고 중종이 반정을 하여 다시 불러 홍문관 수찬으로 복직됐다. 사간원 정언, 헌납, 전라도사, 사헌부 지평을 지낸 다음

보성, 옥천, 여산, 순천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나가는 곳마다 덕치가 인정돼 방백의 추천으로 다섯 차례나 왕의 상이 내려졌다.

중종 14년 조정에 들어가 사헌부 장령, 의정부 사인을 지내던 중 조광조 일파가 참화를 당하는 기묘사화가 발발 지지당은 김안국,

김쟁과 함께 화를 당해 고향에 내려와 5년 동안 80이 넘은 모친을 봉양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5년 뒤 다시 기용돼 전주부윤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광주목사, 나주목사를 지내다 모친 봉양을 위해 담양부사를 자청했다. 지지당은 모친을 더 영화롭게 모시려는

효심에서 한사코 고관대작을 마다하고 고향인 장성 가까운 고을의 수령만 자청한 것이다.
78세에 101세의 모친을 여의고 3년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다가 1540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장성군 삼계면 용암천 옆에 관수정을 지어놓고 향우들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

 

1년 후 중종은 다시 부임할 것을 요청하자 늙은 몸을 핑계로 극구 거절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도리는 충효밖에 없다며 실천한지지당은 관직 생활 중에도 부모를 위해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오기를 수 없이 했으며 근검절약하여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백성을 다스려 백성이 스스로 우러나와

따르도록 하니 백성과 통치자가 서로 융화하여 화합하는 것이 선정이요,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은 것이다.
실지로 그는 어머니 나이 99세가 되자 전라도 관찰사직을 사양하고 노모를 위해 집에 돌아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좌우에서

부여잡고 받들었으며, 추위와 더위에도 의관을 벗지 않고 예(禮)를 지켰으며 어머니께 드리는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본 후 드렸다고 전해진다.

8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높은 관직에 있었으면서도 청백한 생활로 가정은 굶주림만 겨우 면할 정도로 지냈던지지당,

그의 충효를 바탕으로한 청백정신은 오늘날 공무원 사회에 정말 값진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그의 학통을 이어 받은 인물로 양팽손, 양은정, 최경회, 백광훈, 최경창, 김경희, 정명세 등이 있다.. 모두 수제자들이다.

특히 지지당에게 제일 먼저 수학한 양팽손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어 그 학통이 널리 뻗쳤는데 그 중 아들 양응정과 김경희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최경훈, 최경창과 함께 3형제 의병장으로 유명한 최경회도 학문을 닦았던 제자들이다.

 

관수정(觀水亭)
전남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610

 

 

관수정은 조선 왕조 5백년을 통틀어 몇 안되는 청백리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이 용암천 옆에 정자를 짓고

양팽손, 최경희, 백광훈 등 수많은 제자들에게 청백리 정신을 심어 주었던 곳이다.

 

조선 중종 34년(1539)에 관수정 송흠(1459∼1547)이 지은 정자로,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다.
송흠은 효성이 지극하여 101세 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에서 외직을 맡아 효행으로 상을 받고,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 33년(1538)에는 청백한 관리로 뽑히기도 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깔고 왼쪽 1칸은 방을 두었는데,

3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열개문으로 하여 개방적인 면이 보인다.

좌우 옆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리고 뒷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관수정 뒷편 지지당의 묘소로 오르는 계단길

 

 묘역을 지키는 문신석




 

 


 

 

 

봉정사(鳳停寺)
장성군 삼계면 신기리

봉정사는 전해진 문헌이나 사적기가 없어 정확한 사찰연혁은 알길이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영광군 불우조) 또는 「범우고」에 사찰 이름인 봉정사만 전해질 따름이다.
장성군사」(1982년)에는 1402년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때 소각되었다.
그 후 복원되었으나 6·25 전란때 완전소실되었으며, 현재 목조 법당 1동과 석불상만 남아 있다는 간략한 내
용이다, 이 지역은 원래 영광군 삼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장성에 편입되었다

현재 봉정사 석조여래입상은 대웅전 좌측에 위치해 있다. 사찰이 소장하고 있는 1643년 봉정사에서 개간한
금강경 목판본이 전해진 것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50여년이 지난 후 한때 목판불사를 시행할 만큼
상당한 재력을 가진 사찰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봉정사는 1402년 창건된 것이 아니라 이 석불이 제작된
고려시대 초반기에 이미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영광군 불정조에 ?재마호사?라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말에 의하면 송광사, 백양사, 불갑사

보다도 큰 절로써 12암자가 있었고 왕이 하사한 청기와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공부해 정승 판서가 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로는 석불 2기와 옛우물등이 있으며 주변에 봉정사절과 관련된 명지가 많이 남아 있다.

 

봉정사 석조여래입상(鳳停寺石造如來立像)

총고 220cm, 두고 42cm, 안고 36cm, 안폭 27cm, 어깨폭 80cm
고려시대
문화재자료 제208호 (1999. 11. 20)

 

석불의 양식과 조성연대


이 석불은 대좌를 별석으로 하였고 불신 전체를 한돌로하여 새긴 것이다. 얼굴 부분과 목, 가슴부위에서
완전히 파손된 상태이긴 하나 전면에 나타난 법의자락과 상호의 분위기, 그리고 군의자락에서 나타난
시대적 특징 등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퍽 다행스런운 일이라 하겠다.

우선 상호부분부터 살펴보면 정상은 소발이긴 하나 인위적으로 손상을 가한 흔적이 었어 나불인지
소발인지, 또 육계가 솟은 상태를 호가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렇지만 이마 밑으로 커다란 백호
모습이 깊게 파여져 이것은 9세기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코와 입 등은 형식화되었으며 양쪽
귀 역시 파손상태가 심하여 그 세부적인 기법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목으로 내려와서 삼도가 분명하며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U자형으로 발전해 내려오다 가슴밑에서
띠매듭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U자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군의자락 역시 일관되게 U자형인 파상문으로
연결되는데 발목부분에서 그 끝이 멈추고 있다. 발목은 대좌위에 별개의 석재에서 묘사되어 있다.

수인은 아미타구품인을 하고 있는데, 중품하생인을 결하고 있는 듯 한다.
석불 뒷면은 광배 유무를 확인할 수 없이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중기(12~12세기)
로 추정된다

 

 

 

지난 여름의 무더위에 지쳤음인가.....?

 

구 봉정사 오름길에 딱 한송이가 피어났습니다.

 

 

 

 

 금년 들어 처음 맞는 석산화 한송이

 

 

 

 

 

 

참고로, 봉정사의 주지를 맡고 계신다는 법해 노스님을 언뜻 뵈었는데 나중 알고보니

그이가 침 잘 놓기로 소문이 자자하신 분 이랍니다. 다음에 봉정사를 찾게되면 침 한방 부탁 해 볼 작정입니다.

 

동학농민운동 황룡전적지


 

 

 

조선의 눈동자 - 곽재구 -

조선의 눈동자들은
황룡들에서 빛난다

그날, 우리들은
짚신발과 죽창으로
오백년 왕조의 부패와 치욕
맞딱뜨려 싸웠다

청죽으로 엮은
장태를 굴리며 또 굴리며
허울뿐인 왕조의 야포와 기관총을
한판 신명나게 두둘겨 부쉈다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은
오직 하나

복사꽃처럼
호박꽃처럼
착하고 순결한
우리 조선 사람들의
사람다운 삶과 구들장 뜨거운 자유

아, 우리는
우리들의 살갗에 불어오는
한없이 달디 단 조선의 바람과
순금빛으로 빛나는 가을의 들과
그 어떤 외세나 사갈의 이름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을
한없이 파란 조선의 하늘의
참주인이 되고자 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 손주가
한상에서 김 나는 흰 쌀밥을 먹고
장관과 머슴과 작부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민들레와 파랑새가 우리들의 황토언덕을
순결한 노래로 천년 만년 뒤덮는 꿈을 꾸었다


 

 

1894년 1월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제거하기 위해 전봉준 등 수천명이 봉기하였고,

1894년 3월 : 손화중, 전봉준, 김개남 등이 무장 봉기, 고부 점령후 백산에 모여 무장과 인접한 장성등 전남지역에서 호응을 얻었다.

1894년 4월 6일에는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 격파하였고, 1894년 4월 7일은 정읍 및 인근 고을을 점령하였다.

1894년 4월 16일은 함평을 점령하였으며, 1894년 4월 22일은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장성으로 진군하여 전주에 주둔하였던 홍계훈의 경군을

유인하여 그 예봉을 꺾고 전주 점령계획을 세웠는데 그 최적장소로 장성황룡을 택하였다. 1894년 4월 23일은 황룡전적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삼봉산과 황룡장터 등에서 이학승의 선봉대와 결전하여 관군(경군)을 참패(선봉장 이학승 사망, 대포 2문과 양총 100여점 탈취), 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굴려 총알을 막으면서 관군에 육박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관군의 수는 300여명, 동학농민군은 6-7천명이었으며, 관군(경군)이 패주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경군보다

먼저 전주로 들어가 전주를 점령하여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휴전을 성립시키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하기로 합의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집강소에 의한 농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된 전적지이다

 

 

#  2007, 9,3 월요일


장성군 서부지역에 소재한   몇개의 정자와 봉정사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황룡전적지를 돌아봤습니다.

 

 

 

 

꽃뫼
열자마자 음악이 사람을 휘어잡더니
수천도에서 달구어야 빚어지는 도자기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더니
곽재구님의 시 한편으로 가슴에 물이 흐르게 하시더니
올해 첨 만나는 꽃무릇 한송이로 설레임을 주시더니
.
.
.
백일동안 피어있는 베롱나무의 붉음으로
내 얼굴을 더 붉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네요
저 백일홍이 지고나면
우리 기다려야 할 꽃들은 과연 뭐가 남았나요
백일홍의 져버림이 못내 가슴 아프네요...
2007-09-04
07:05:15

공명
자연을 벗삼아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껴본
님의 하루가 내 가슴에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마음을 비우고, 또 채울 것을 생각하여 또 비우고.
오늘은 그 빈 마음을 어디서 무엇으로 채울 지 궁금해 집니다.
2007-09-04
10:19:29

[삭제]

한병인
정읍과 고창에서만 동학이 있었는줄 알았는데
장성에도 동학의 커다란 족적이 있었네요
첫째의 한자 표현이 일왈, 이왈, 삼왈, 사왈등 생각하지 못한 단조로움이
재미있습니다.
전대 송인성교수님이 사창초등학교 출신이던가
언젠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나는데 맷돼지 고기 먹으러
관광 농원 가던 길로만 기억나 김환기 형님이 이야기 하신 내용을
아직은 답사하진 못했습니다만 조만간 다녀올랍니다.
2007-09-04
18:00:55

MT사랑
송흠님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고, 가슴 깊은 곳까지 뭉클합니다.
저도 팔순 어머님께 지금 전화부터 한 통 걸고요..
2007-09-04
19:27:12

[삭제]

산아가씨
꼭 널리 알려진 유명한 곳을 답사하지 않아도,
숨져진 소박한 곳을 찾아 보는 것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오히려 거기서 기대치 않은 많은 것을 마음 깊이 배우며
현 생활을 되돌아 보며 반성도 하게 하니까요.

큰 욕심없이 겸손하게 자연에 적응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2007-09-04
22:14:32

류재원
언제 한번 수월처사 김형규님의 삼우정을 들러 보고 싶습니다.
보름달이 사방곳곳에 훤합니다.
좋은 작품, 좋은 사람, 좋은 풍경 감사합니다.
2007-09-05
07:54:34

[삭제]

첨단산인
덕택에 좋은 곳들과 문학의 향기 역사의 향기에 젖어봅니다.
주변에 가까이 있는데도 선뜻 가보지 못하던 곳들
아예 테마여행을 떠나보는것도 의미가 있을듯 합니다.
2007-09-05
21:57:27

하얀나비
가고싶을때 훌쩍 떠나고,
이쁜모습은 카메라엥글로,
유유자적한 모습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
2007-09-06
17: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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