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삼계면 소재 수월처사 김형규 선생의 선방 '삼우정'을 찾아갔습니다. |
드넓은 함동호가 눈에 들어오는 삼우정 찻방에 좌정, 팽주의 다감한 손길로 우려진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김형규 선생께서 수월처사란 별호를 얻게된데는 달 밝은 밤에 저 호수 한 가운데 배를 띄우고 차를 마시며 水中月을 감상 한데서 붙여졌다고... |
대낮인데도 방 안엔 보름달이 휘황했습니다.
수월처사의 작품 달항아리를 감상하며 그가 직접 덖은 차를 마시는 이 도도한 경계......
순간, 방안이 훤 해지면서 달이 빙그레 웃습니다.
희뫼요
가마 속, 그 뜨거웠던 불길을 떠 올려 봤습니다. 불의 예술에서 달덩어리가 탄생되는 그 요묘한 세계..... |
기영정(耆英亭) - 장성군 삼계면 소재
기영정(耆英亭)은 용암원 위 높은 대지의 관수정(觀水亭) 건너편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바닥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되어 있다.
중종 38년(1543) 당시 전라도관찰사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을 위해 건립한 정자이다.
용암천 위의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송규암이 전라감사로 부임하려고 할때
중종이 그에게 명을 내려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퇴관하여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송흠을 방문하여
중종 자신의 상회심(相懷心)을 전하고
또 동시에 그의 별업을 기영정이라 이름하도록 하는
소제기(所製記)를 전하도록 한 바,
송규암이 그 명을 받들어 부임하자 곧 12수와 함께 송흠을 방문하여
별업을 정자로 건립하여 주었다는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후 시간이 지나고 병난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는데
다시 송규암의 10세 손인 송겸수(宋謙洙)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철종 7년(1856)에 이를 중건하였다.
낮은 외벌대의 돌 기단 위에 큰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각을 죽인 보아지와 주두를 놓고 굵은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 위에는 장혀받침 굴도리를 두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내부 가구 구조는 평5량가로 대들보 위에 낮은 부재를 놓고
충량을 통부재로 걸쳐 도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종량 위에는 다시 종량을 두어 장혀받침 종도리와 판대공을 얹어 가구를 구성하고 있다.
방이 없는 누정으로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낮은 평난간을 돌렸다.
대지의 위치가 높기 때문에 누마루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기영정에서 건너편을 바라본 모습, 왼쪽 맨 끝 산자락에 지지당 송흠 선생의 '관수정'이 위치. |
두개의 편액 |
관수정(觀水亭) 입구 송흠은 1459년 장성군 삼계면 단산리에서 우찬성의 승직을 받은 아버지 송하원과 어머니 하동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났으며, 천성이 순후하고 덕기가 넘쳐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성종 11년(1480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정6품)로 첫 관직을 받아 근무했다. 연산군때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시문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다가 44세때 부친이 작고하시자 3년상을 치루고 중종이 반정을 하여 다시 불러 홍문관 수찬으로 복직됐다. 사간원 정언, 헌납, 전라도사, 사헌부 지평을 지낸 다음 보성, 옥천, 여산, 순천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나가는 곳마다 덕치가 인정돼 방백의 추천으로 다섯 차례나 왕의 상이 내려졌다. 중종 14년 조정에 들어가 사헌부 장령, 의정부 사인을 지내던 중 조광조 일파가 참화를 당하는 기묘사화가 발발 지지당은 김안국, 김쟁과 함께 화를 당해 고향에 내려와 5년 동안 80이 넘은 모친을 봉양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5년 뒤 다시 기용돼 전주부윤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광주목사, 나주목사를 지내다 모친 봉양을 위해 담양부사를 자청했다. 지지당은 모친을 더 영화롭게 모시려는 효심에서 한사코 고관대작을 마다하고 고향인 장성 가까운 고을의 수령만 자청한 것이다. 장성군 삼계면 용암천 옆에 관수정을 지어놓고 향우들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
1년 후 중종은 다시 부임할 것을 요청하자 늙은 몸을 핑계로 극구 거절했다. 고향으로 돌아 오기를 수 없이 했으며 근검절약하여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백성을 다스려 백성이 스스로 우러나와 따르도록 하니 백성과 통치자가 서로 융화하여 화합하는 것이 선정이요,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은 것이다. 부여잡고 받들었으며, 추위와 더위에도 의관을 벗지 않고 예(禮)를 지켰으며 어머니께 드리는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본 후 드렸다고 전해진다. 8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높은 관직에 있었으면서도 청백한 생활로 가정은 굶주림만 겨우 면할 정도로 지냈던지지당, 그의 충효를 바탕으로한 청백정신은 오늘날 공무원 사회에 정말 값진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지당에게 제일 먼저 수학한 양팽손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어 그 학통이 널리 뻗쳤는데 그 중 아들 양응정과 김경희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최경훈, 최경창과 함께 3형제 의병장으로 유명한 최경회도 학문을 닦았던 제자들이다. |
관수정(觀水亭) 전남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610 |
관수정은 조선 왕조 5백년을 통틀어 몇 안되는 청백리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이 용암천 옆에 정자를 짓고 양팽손, 최경희, 백광훈 등 수많은 제자들에게 청백리 정신을 심어 주었던 곳이다. |
조선 중종 34년(1539)에 관수정 송흠(1459∼1547)이 지은 정자로,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다.
송흠은 효성이 지극하여 101세 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에서 외직을 맡아 효행으로 상을 받고,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 33년(1538)에는 청백한 관리로 뽑히기도 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깔고 왼쪽 1칸은 방을 두었는데,
3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열개문으로 하여 개방적인 면이 보인다.
좌우 옆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리고 뒷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관수정 뒷편 지지당의 묘소로 오르는 계단길 |
묘역을 지키는 문신석
석불의 양식과 조성연대
구 봉정사 오름길에 딱 한송이가 피어났습니다.
금년 들어 처음 맞는 석산화 한송이
동학농민운동 황룡전적지
조선의 눈동자 - 곽재구 -
당시 관군의 수는 300여명, 동학농민군은 6-7천명이었으며, 관군(경군)이 패주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경군보다 먼저 전주로 들어가 전주를 점령하여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휴전을 성립시키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하기로 합의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집강소에 의한 농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된 전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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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9,3 월요일 장성군 서부지역에 소재한 몇개의 정자와 봉정사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황룡전적지를 돌아봤습니다. |
꽃뫼 열자마자 음악이 사람을 휘어잡더니 수천도에서 달구어야 빚어지는 도자기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더니 곽재구님의 시 한편으로 가슴에 물이 흐르게 하시더니 올해 첨 만나는 꽃무릇 한송이로 설레임을 주시더니 . . . 백일동안 피어있는 베롱나무의 붉음으로 내 얼굴을 더 붉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네요 저 백일홍이 지고나면 우리 기다려야 할 꽃들은 과연 뭐가 남았나요 백일홍의 져버림이 못내 가슴 아프네요... |
2007-09-04 07: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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