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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달항아리와 나누는 대화

 2007-09-01 01:10

 

작품 1

축령산 자락 금곡숲속미술관에 3개의 보름달이 떠올랐답니다.
희뫼요의 김형규선생이 탄생시킨 근래 보기드문 수작이라고 합니다.
미술관의 변동해 관장은 향을 피워가며 수시로 절을 올리며 기도를 드리고 숫제 끌어안고 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 하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너무나 감격스러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달항아리는 숙종시대인 17세기말부터 영정조시대인 18세기까지 백년도 채 안되는 기간동안 반짝 나타났다 사라졌다.

높이 40cm이상으로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일대일 비례를 이루고 몸체가 원만한 원형을 이룬 이 대형 항아리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으로 빚지 못하고 위쪽과 아래쪽 부분을 따로 빚어 접붙여진다.

그리고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후덕함과 적당한 굴곡미를 가진 둥근 선이 매력적인 자연미로 완성된다.

 

 

.

작품 2

날이 갈수록 달항아리 열풍이 거세지도록 만든 공은 1950∼1960년대 일찌감치 그 예술성에 눈뜬 김환기 화백이나

최순우 선생에게 먼저 돌려야 합니다. 여기에 20세기 후반기 이후 국내외를 막론한 급격한 산업화도

자연미 그 자체인 달항아리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조선의 도자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무너지다시피 했습니다.

17세기 후반 철화백자가 나타난 것도 청화백자의 재료인 페르시아산 청화안료가 수입되지 못하자,

철사(鐵砂)안료로 대용한 결과입니다.

달항아리도 이 시기에 금사리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퇴촌에서 들어가자면 분원리로 넘어가는 고개 못미쳐 오른쪽에 있는 동네입니다.

금사리에는 분원리로 옮겨가기 전, 왕실에 그릇을 공급하는 사옹원의 분원(分院)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옹원 분원은 정원이 380명에 이르고,28개 직급 체계로 완벽하게 나눠진 분업조직이었습니다.

당연히 ‘국영 도자기 공장’인 금사리에서 장인 한둘의 안목으로 달항아리와 같이

완전히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이쯤되면 달항아리는 ‘조선왕조의 국책사업’으로 탄생시킨 성과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최순우 선생의 말씀처럼 달항아리가 갖고 있는 ‘폭넓은 흰빛과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도

국가적인 차원의 사업으로 빚어냈다는 뜻입니다.

 

 

 

 

 

달항아리가 세계 도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독특합니다.

최건 광주관요박물관장은 “중국의 징더전(景德津)이 명·청대에 걸쳐 도자기 수출의 중심지가 되고,

일본도 조선 도공이 가세하면서 임진왜란 이후 수출국으로 부상했지만, 문양이나 모양 등에서 주문자인

유럽이나 페르시아의 취향을 수용하다 보니 결국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더군요.
역설적으로 달항아리의 예술성은 세계시장과 소통하지 못한 단절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글로벌 스탠더드’에서

소외된 상태에서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 조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최고조에 이르게 한 것이 곧 달항아리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 서동철 문화전문기자의 글 인용

 

 

찻사발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美)

동양 정신은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의 명품 찻사발 또한 자연주의 정신을 담아내던 그릇이였다.
조선의 찻사발은 형상의 원형과 그 변형의 미학적 의미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

또 하나의 다른 자연’이란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연주의 미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美)다.

무위(無爲)란 글자 그대로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작위(作爲)가 없고 자연 그대로라는 뜻이다. 또 선종(禪宗)에서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이상적인 경지를 무위라고 한다. 무위자연은 타고난 그대로 꾸밈이 없는 상태로서

천연의 모습이 자연에 합일되는 것이며, 차 정신의 심미적 요구에 부합되는 개념이다.

우리 찻사발을 말할 때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무심, 무기교의 기교, 불완전의 미, 질 박과 소박미 등의 수사는 무위자연의 미를 표현하는 구체적 언어다.

이와 같은 수식어들은 사기장들이 찻사발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손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기교를 넘어선 무기교, 완전을 이해한 불완전, 모든 설명적 요소를 걷어낸 후에 얻어 지는 생략의 아름다움으로서의 소박미는

익을 대로 익은 숙련된 손만이 만들어 낼 수 있고, 유심과 무심의 경계를 넘어선 자만이 얻어내는 ‘무위자연의 미학’인 것이다.

사람의 손이 덧붙여졌을 뿐, 무위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재현해낸 최고의 사발을 무 작지작(無作之作)이라고 한다.

만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만들어진 것같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발 중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이도다완’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 사발을 아인 (亞人) 박종환님이 걸림이 없다는 뜻에서 ‘무애(無碍)사발’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 옮긴글 -

 

 

 

■찻사발로부터 배우는 자유의 미학

‘흙맛과 자연스런 변화미’를 갖춘 찻사발은 곧잘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그것 은 단지 미의식의 각성 뿐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한다.


세월이 인성을 바꾸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발 또한 변화해 간다.

다인은 변화하는 사발 모습에서 엔트로피 의 증가를 보고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한국미의 이해」라는 책에서 김영기님은 ‘현상계의 무상함과 그 배후에 깃든 어떤 영원 한 숨결을 깨달아

삶의 자유를 새롭게 자각하고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생성이라는 질서에서 소멸이라는 무질서로 이동해 가는 변화와 운동의 경험 이라고 말할 수있다.

세월은 인간의 자기완성 과정에서 필요한 질서에 대한 삭힘의 과정이고 따라서 무질서로 가는 것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결이 삭는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뜻이고 결이 삭은 사람은 언제인가는 무질서로 회귀하는 인간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온갖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을 영위하게 된다. 이렇게 세월 속에서 삶을 가로막고 있는

괴로움, 슬픔, 홀로감과 외로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인생의 결을 삭혀야 한다는 것과 결이 삭아 본래의 원형(原形)으로 돌아가려 것이

사물의 본성(자유)이라는 것을 찻사발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사마저 뛰어 넘고 희, 로, 애, 락의 감정에도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삶을 희구한다. 엔트 로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찻사발의

미학은 바로 자유의 미학이다. 그리고 찻사발의 엔트로피의 미학은 다인들에게 근원으로서의 자유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김동현 (차문화 연구가)

 

 

다완 2 김치중 작

미국 클리블랜드 박물관(미국내 두번째 규모이고 동양 예술로는 첫째가는 박물관) 관장을 지낸 셔먼 리(Sherman Lee,

관장 재임기간 1952 - 1983년)박사는 우리 찻사발을 중국과 일본의 찻사발과 비교하면서 그 무위자연주의적 특징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 다완은 자연스럽고 순박한 민중들의 요구에 맞도록 신속하고 간단하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한국인들에게는 고려 청자에서도 보여 주었듯이, 중국 다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요소에 있어서 완전성(everything perfection)이 있어야 한다는

바탕에 우려하지 않는 전통이 있는 것 같다. 한국 다완에는 '접근의 자유(Freedom of approach)'랄까, ‘

생긴대로 그대로 둔다(let things happen)'라는 저변이 깔려있다.

완전성을 우려치 않고 변형을 수긍(acceptance of accidence)하는 한국 다완의 기질(quality)에는 분명히 사실적인 그 무엇이 존재한다.

 

일본 다완은 이러한 한국 다완의 자연스런 ‘변형의 수긍’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나치게 왜곡 과장한 감이 없지 않다.”

찻사발에 담긴 연두빛 찻물은 그 속에 차의 정취가 솔바람 소리,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릇이 갖는 본래의 기능 속에 이런 차라는 자연의 풍정이 보태어질 때, 그 그릇은 비 로소 완전한 예술품으로서 생명을 얻고,

이것에 담긴 차는 인간이 마시는 녹색의 보석이 된다.

그리고 다인은 이 한잔에 담긴 차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동현 (차문화 연구가)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싸늘한 사기지만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내가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되었다.…”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뜨겁고 감미로운 헌사를 오롯이 조선 백자 달항아리에 바친 이는 누구일까.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한 봉우리이자 멋쟁이 예인으로 이름 높던 화가 수화 김환기(1913~1974)였다.

아내 김향안의 회고록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보면 수화가 사랑했던 것은 자기 팔로 안아서 한아름 되는 유백색

대호(달항아리)였다고 한다.

“때로는 마당에 내다가 여섯 개의 각이 진 초석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다 뙤약볕을 피해서 그늘에 옮겨놓고,

그 항아리들은 김환기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 같이 보드라운 백자, 쑥떡 같은 구수한 백자’ 등으로 표현하며 애지중지했던 달 항아리는

그가 그린 저 유명한 50~60년대 자연 연작에서 산, 새와 함께 핵심 제재이자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잡는다.

파리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만 될 것 같소”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외면되었던 달 항아리의 미학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 멋진 이름을 유행시킨 것은 김환기와 친구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우정어린 탐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후대 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달항아리는 숙종 시대인 17세기 말부터 영정조시대인 18세기 백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 나타났다 사라졌다.

높이 40cm 이상으로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1대1 비례를 이루고 몸체가 원만한 원형을 이룬 이 대형 항아리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을 짓지 못하고, 윗쪽과 아랫쪽 부분을 따로 빚어 접붙여 만들었다. 그래서 허리께에 대개 이음자국이 보인다.

최순우가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후덕함이라고 극찬했던 대로 항아리의 매력은 깔끔한 정형이 아니라 어딘가 이지러진 듯한 자연미에서 나온다.

중력으로 무너지려는 백토의 힘과 원만한 모양을 쌓아올리려는 도공의 의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산물인 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시대까지도 학자와 문인들은 달항아리에 대한 감평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날렵한 대칭과 깔끔한 몸체의 중국 일본 도자 미학에 익숙한 탓에 인공적 정제를 피하고 자연미를 존중한 달항아리의 미를 절실히

느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시골 장터에 모인 아낙네들의 흰옷 입은 군상이 생각난다”던 최순우의 회고대로 달항아리는

국권을 찾은 뒤 민족의 성정과 문화에 대한 자각 덕분에 재조명된 셈이다.

18세기에 반짝했다 이후 생산이 끊긴 달항아리는 도자사의 계보에서도 배경이 명확치 않다.

방병선 고려대 교수는 <조선후기 백자연구>에서 당시 조선색이 강조되던 문화 중흥기 사대부들의 호방한 심미관을 좇아

주역의 태극을 형상화한 감상용으로 나왔으리란 가설을 내놓았다.

백자 기형 중에 달항아리만큼 상하좌우의 몸체가 천지 음양의 조화를 이룬 것이 드물기 때문에

태극 형상을 입체화하는 데 적합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제작 기법도 서민들이 주로 쓰던 옹기 기법까지 빌려 쓰면서

심미안의 발전 등과 어울려 18세기 대표적 도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도 명저 <조선과 그 예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시대가 내려오면 기교가 복잡도를 더한다…

그런데도 실로 흥미 깊은 예외를 조선의 도자기 공예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아룸다움은 단순으로의 복귀다.…

자연에 대한 신뢰야말로 조선 말기 예술의 놀라운 예외가 아니겠는가.”

고고미술사학자 삼불 김원룡의 ‘백자대호’란 시가 붙어 있는데, 반협박 조(?)의 시구에서 달항아리의 무심한 미학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원은 둥글지 않고 면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 돌리다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출처 - 한겨레신문

 

 

 

 

명경헌
변동해씨가 서울에서 그토록 비쳐주고자했던 달 세덩어리를 오늘은 그예 만나는군요.
전화를 하두 하시길래 '얼마나 반했으면...' 했는데...
바로 달덩어리에 풍덩 빠져 들게 하는군요.
달아,
달아...
같이 놀자꾸나
2007-09-01
10:04:12
류재원
좋은 사진 좋은글 감사합니다.
금곡 숲속 미술관에 달풍년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달처럼 세상을 밝히시는 변동해 선생님과 김환기님,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이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말로만 아니고 경주답사를 오시면 곡차가 제일이라시니 곡차를 꼭 싫컨 드시게 대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7-09-01
10:50:32

[삭제]
산아가씨
류재원님이 그토록 바라던 보름달 3개가
드디어 닷컴에도 환하게 떴네요.
괜히 저까지 이제나 저제나,언제뜨나
보름은 이미 지났는데..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달항아리 역사를 보니 수화 김환기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군요.
오늘날은 다천 김환기님이 닷컴에 올림으로써 그동안 잊고 지냈던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환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리가 되셨다고 생각하니다.

직접 봤을 때 물론 좋았지만 사진으로도 보니 또다른 감동이 있네요.
그런데 달의 위치가 변했어요.날이 바뀌어서 그런가요?ㅎ

고맙습니다.
애쓰셨습니다.
2007-09-01
11:20:23
첨단산인
날마다 달항아리 달항아리 되뇌이고 다니셔서
도데체 어떤 걸출한 물건일까 했는데
이 사진으로만 보아도 멋진 작품 그대로 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와닿는 느낌은 달이라기 보다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다가오는 목성과 같은 느낌이 드는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일지요?
참으로 위대한 세계입니다.
2007-09-03
23: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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