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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서라벌의 향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芬皇寺模塼石塔


높이 9.3m. 국보 제30호.


모전석탑 1문에 있는 감실과 인왕상 2구. 모전석탑 4문에는 각 2구씩의 인왕상과

기단 네 모서리에 사자상 1구씩 배치되어 있다.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는 모전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분황사 화쟁국사和諍國師 비부


경북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 대좌.

높이 60㎝.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평면은 직사각형이고, 상대, 중대, 하대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남은 연꽃 조각에서 고려 중기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하루는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에는 석등·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1974년의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발견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 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 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있다.

















경주구황동당간지주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192호. 높이 4.5m.

당간을 받치는 받침돌을 거북이 형태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황룡사지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황룡사 복원 모형


황룡사 복원 모형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한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복원된 우물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황룡사지는 현재 발굴이 중단된 상태.








이 절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親幸)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講)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는데,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립(粒)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한,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鷹遊)·말갈·단국(丹國)·여적(女狄)·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 25)에 몽고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신라삼보(新羅三寶)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화성(畵聖) 솔거(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慈藏)이 《보살계본 菩薩戒本》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元曉)가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을 연설한 곳으로,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감로운무(甘露雲霧)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현재 목탑의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m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다.

그 심초석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다.


1964년 12월에 도굴꾼이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훔쳐갔으나,

그 뒤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다.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이는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인 경주로 실어 와서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3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평왕릉 가는 길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다.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릉에서 바라본 경주 남산 일대.









사적 제180호. 지정면적 4만 3,645㎡, 무덤의 지름은 36.4m, 높이는 7.9m이다.

 

579년에 왕이 되어 632년에 승하할 때까지 54년 동안 왕으로 있었다.

 한지(漢只)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의해 장지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서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렬(石列)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몇 개만이 보인다.


 이와같이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렬을 마련한 예는

아달라왕릉 등 신라왕릉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신라 초대 임금인 혁거세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수나라와 수교하였고,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와 수교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원광(圓光)ㆍ담육(曇育) 등 승려를 중국에 보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진흥에 힘썼다.

특히, 경주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수도 방위대책에 힘썼다.













































전홍유후설총묘 傳弘儒侯薛聰墓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면적 1,168㎡이며, 원형봉 토분이다.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신분은 육두품 출신으로 추측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설총은 경사(經史)에 박학하였고, 이두(吏讀)의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화왕계(花王戒)」를 지었다.









뒷날 그의 학문적 업적이 인정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줌)받았고

문묘(文廟)에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또 조선 중기인 1623년(광해군 원년)에 경주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한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설총을 경주 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설총의 무덤에 대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신라 당시의 형편을 고려해보면 경주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명활산 동쪽 아래에 있는 이 분묘는 족보에는 “묘월토산자좌(墓月土山子坐)”라는 기록에 비추어

 산의 명칭에서 차이가 있지만 경주 단석산을 월생산(月生山)으로 부른 예가 있음으로 보아

명활산을 월토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분묘의 둘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경주 및 순창(淳昌) 설씨 후손들에 의해

상석과 묘비가 만들어졌으며, 호석(능원에 세우는 범모양의 돌)은 흙 속에 묻혀져 있으나

일부의 흔적은 보이고 있다.







명활산성明活山城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둘레 약 6,000m, 지정면적 960,000㎡. 사적 제47호.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405년(실성왕 4) 4월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그 이전에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성방식 역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왜적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때이다.

또한, 실성왕은 즉위하던 해인 402년에 왜(倭)와 화평을 하여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내는 등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왜인의 침략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왜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431년(눌지왕 15)에는 왜인이 이 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수도인 금성(金城)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473년(자비왕 16) 7월에 이 산성을 개수하고 475년 정월에 이 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475년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阿且城)에서 살해되고

그 아들 문주왕이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것이라든지,

죽령과 동해안을 위협해 오던 고구려의 직접적인 압력 등을 종합해보면

자비왕이 명활산성으로 옮겨 거주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554년(진흥왕 15)에 다시 돌로 쌓았을 때의 둘레가 1,906보이며,

 593년(진평왕 15)의 개축시는 3,000보였다고 한다. 지금 이 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져서

겨우 몇 군데에서 자연석으로 깨뜨려 아무런 가공 없이 쌓았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축조는 진평왕 때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산성은 남산성(南山城)·선도산성(仙桃山城)·북형산성(北兄山城) 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 등에 대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Nature's Lullaby - Tony O'Conn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