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사랑의 이미지

사랑 이미지


글/사진 정진국



'저자의 말' 중에서


전시장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도판을 함께 들여다보는 방법을 택했다.

사진은 어짜피 복제술이니까. 독자들과 함께 원작을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을

나는 책상 위의 복제존을 "내가 들여다보던 모습대로" 보여 주는 것으로 달랬다.


그렇게 책상 위의 도판 그림들을 촬영했다. 미술관에서 보던 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 이런 접근이 내가 그 그림을 보았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도판만을 뚝, 썰렁하게 도려낸 그림은 원작의 고유한 분위기와 너무나 멀다.


이렇게 이 글과 사진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들을 확인한 '눈'과,

그것에 관해 쓴 적지 않은 글을 읽고 들은 '귀'의 즐거운 합작이다.









「처녀의 초상」


로히에르 반 데어 베이덴

Rogier Van der Weyen


1427 - 1432년경

독일 베를린 시립미술관



우리가 보고 있는「처녀의 초상」은 그의 아내를 그린 것으로 평가된다.

화가가 남긴 초상들 가운데 오직 이 그림 속 여인의 시선만이 화가를 곧장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들어

대체로 이 그림의 주인공이 그의 아내 이자벨 고파르트(엘리자베트 호파르트)일 것으로 믿고 있다.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라는 동정녀를 그리는 '성 루가'의 화신이 된 반 데어 베이던. 

기독교 세계에서 그 어떤 화가도 이보다 더한 예우를 받지는 못했다.


당시 최고의 신학자로 무지에 대한 자각을 통해 우리의 앎을 알차게 하고자 했던 니콜라 드 퀴즈로 부터

'최고의 화가'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로 그의 삶은 영광에 싸여 있다.









「천사들에 둘러싸인 동정녀」


장 푸케

Jean Fouguet


1452년경

벨기에 안트베펜 왕립미술관



나는 아직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은은하며' 깊은 중간 색조를 본 적이 없다.

매끈한 신체 부위의 실처럼 이어지는 선묘는 세밀화의 치밀한 미덕을 보여 준다.


아기에게 젖을 주려는 그녀의 열어젖힌 가슴은

왕의 손길과 관객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는 관능적 긴장의 탄력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정면에서 볼 때 이 장면은 동정녀에게 영광을 부여하는 '동정녀 대관식' 이라는 모티프의 전형이다.

보석으로 치장된 찬란한 옥좌에 오른 그녀는 흰 대리석상의(백옥 같다고 할 만한) 피부로 그 순결성을 과시한다.

왕관 속으로 완전히 숨은 머리카락은 청순함으로 요약된다.









「엘렌 푸르망과 아이들」


피터 폴 루벤스

Pieter Paul Rubens


1635년경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마 이 신선을 내리깔고 있는 아름다운 검은 눈의고운 처녀는 한 폭의 초상이고

또 그 그림을 그리기 두 해 전에 결혼했던 첫째 부인 이자벨 브란트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풍만한 몸매와 잿빛 머리털과 퉁퉁한 형태는 이보다 스무 해 뒤에 재혼했던

아름다운 엘렌 푸르망의 독특하고 화사한 시절의 매력을 연상시킨다.









「연애편지」


오한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62 - 1663년경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아침 햇살 가득한 실내에서 한 여인이 이제 막 새소리와 더불어 날아든 편지를 받는다.

청결하게 집안을 밝히는 햇살은 여주인공의 표정에서 읽히는 첫 소식의 신선함과 결합한다.


전경의 젖혀진 커튼 사이로 펼쳐진 이 장면은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이 '스포트라이트' 효과를 내도록

감쪽같이 고안되었다. 편지를 전해 준 하녀와 그녀에게서 짐짓 동의와 놀라움을 구하는 시선은

화면의 어수선하게 늘어진 듯하면서도 일순간의 정적으로 오직 '편지를 받았다'는 사건을

알리기라도 할 듯이 서로 충돌하는 음향 효과를 낸다.


또 실내 전체는 교묘하게 바짝 다가서서 근접한 시각으로 포착되었으나 막상 그 주인공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물러나 있다. 이는 그가 '카메라 옵스쿠라'라는 광학 장치를 이용했을 가능성을 더 높여 준다.

그가 한동한 스승으로 삼았던 파브리티우스가 독자적인 암상자를 제작하고 이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시모네타 베스푸치」


피에로 디 코시모

Piero di Cosimo


1485 - 1490년경

프랑스 상타이 콩데 미술관


꿈틀거리는 뱀 장식 목걸이는 그녀의 예의 바름과는 상관없이

끈질기게 목을 죄어 오는 사내들의 구애를 비유하고 있는 듯 하다.

화가는 여기에서 전설이 된 그녀의 미모를, 추모하는 가족의 염원에 따라 상상적으로 재구성했다.

후경의 푸른 바다는 그녀의 고향 제노바를 가리킨다.


그러나 앙상한 나뭇가지와 험상궂고 검게 그녀를 덮쳐 오는 듯한 ――― 이 대조 효과에 주목하자 ―――

먹구름은 그녀의 가혹한 운명에 비하면 별것 아닐듯도 하다.

그는 뱀의 구불구불한 곡선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옷감과 머리 장식까지 확대시킴으로써

그녀를 완전한 작가의 환상 속에 사로잡아 두었다.










「승리한 에로스」


카라바조 Caravaggio

(본명은 Michelangelo Merisi)


1602년경

독일 베르린 시립박물관


검은 바탕에 강렬하게 빛나는 육신이라는 이교도적 주제를 소화하고 있는 이 작품은 교회로부터의

자유 선언에 가깝다. 프레스코화나 판자화에서는 강렬한 빛의 반영으로 볼륨이 표현되기 어렵다.

명암대비는 회벽이나 판자에 스며든 안료의 계조 속에서만 허용된다.

따라서 거의 모든 입체감의 표현은 부드러운 간접 조명으로 밝혀진 효과를 내고

 불가분 레오나르도식의 스푸마토(sfumato)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또 유화를 개발한 초기 플랑드르 화가들이나 그 영향을 받은 베네치아 화파들조차도

광선의 강렬한 대비보다색채 대비로써 마찬가지 효과를 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검정과 흰색의 양극 사이에 풍부한 갈색조와 적색조를 연계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빛의 발색, 빛과 어둠의 연결 고리가 되게 하였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반사광으로 회화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한다면

라바조는 '입사광'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고도이 부인」


프란시스코 데 고아

FrFrancisco de Goya Y Lucintes


1800년

에스파냐 마드리드, 개인소장


친촌 백작부인 마리아 테레사는 정략결혼의 희생자로 당시 군부의 실세인 마누엘 데 고도이의 부인.

그녀는 카를로스 국왕의 삼촌이자 선왕의 막내 동생의 딸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으로 어머니가 된, 무자비한 배신의 고통 속에서 연민과 혼화함이 뒤섞인 모습이다.

 

이 그림은 "커다란 안락 의자 속에서 겁에 질린 듯 파묻힌 웅크린 작은 여인"(임신 중의 모습이다.)을

그린 것이다. 그녀의 가지런히 모아진 팔은 그래도 딸 아이를 보호하는 모성의 손길이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애도하는 성녀 이렌」


조르주 드 라 투르

Georges de La Tour


1649년경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 작품은 촛불로 밝혀진 심야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그림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 입방체로 다뤄져 그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형상이 강렬하고 기념비적인

장엄함을 빚어낸다. 이러한 중력과 확고함과 내적 구조의 완벽한 조응이 빚어 내는 깊은 영성의 울림은

입체주의 화가들 못잖게 먼 훗날의 세잔이다 레제의 견고한 이미지를 예고한다.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없는 이 덩어리 구성은 오로지 횃불로 밝혀진 광원의 힘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핏방울과 갑옷과 눈물은 어쩌면 그 불빛보다 더 반짝인다. 죽은 병사인 이 성자를 둘러싼 모든 슬픔과

비탄은 이 불빛에 기대어 너울댄다. 회화적이라기보다 조각 군상이나 심지어 인형 같은 것을 설치하고

조명을 비추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만큼 이미지에 대한 화가의 태도는 독특하다.









「엠마 도비니」


카미유 코로

Camille Corot


1874년

프랑스 파리 루부르 박물관


이 푸르뎅뎅한 보랏빛과 잿빛 바탕 위에서,

우수에 젖은 천사처럼 화가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여인의 지어낸 듯한 새침데기 같은 표정과

 매끈한 어깨를 보자. 그녀의 의상은 평상복이 아니며 상층 부르주아의 야회복이다.

그가 그린 일련의 초상들은 그 자체가 당시 복식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손색이 없다.


1851년생인 파리 근교에서 태어난 엠마는 192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몽마르트 빈민가에 살면서 여러 화가들의 모델로 일했으며 깜찍한 아가씨였다고 한다.

화가는 이렇게 털어 놓았다.


그녀가 가만 있지 않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게야....

 나는 단편적인 조각들이나 그리는 전문가는 아닐세.

삶을 표현해야 하거든. 까부는 모델이 필요해.









「오르막길」


귀스타브 카유보트

GAUSTAVE Caillebotte


1848 - 1894

프랑스 파리, 개인 소장


전문가들은 그림 속의 여주인공이 화가와 동거 중이었던

샬로트 베르티에(본명은 안 마리 아장)일 것이라는 심증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심증이 이 그림에 특별한 매력을 보태 준다.


화가 자신이 겪고 수용한 사랑의 방식을 거울처럼 비쳐 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으며 화가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

화가는 이 그림이 그려진 때로부터 단 두 해를 더 살았다.









「테후라」


폴 고갱

Paul Gauguin


1892년

미국 버펄로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이 작품의 원제는 "밤을 지키는 혼령"이다.

 '테후라'라고 부르는 이 타이티 소녀의 나이는 열셋이었고 그 섬에서 그의 동거녀로 사실상 부인이었다.

여권 신장파 미술가가는 그를 파렴치하며 백인과 남성 우월주의적 시선의 극단적 경우로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일 수 있다. 그의 예술과 미학은 인종주의에 함몰된 미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화가는 어린 소녀를 단순한 쾌락의 대상을 넘어, 자신이 추구했던 미의 화신으로 보고 있었다.

창백한 백인 베누스를 경멸했던 그는 새로운 미의 여신을 이미지로 만들어

그 여신과 더불어 살았던 "신이 되려고 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는 아내에게 종종 편지를 썼다.


이 밤에 네게 편지를 쓴다. 타이티의 밤.

이 침묵은 여전히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낮설다. 오직 침묵 뿐이다.

안식을 깨는 새도 울지 않고, 여기저기 커다란 낙엽들이 소리도 없이 떨어진다.

아니, 영혼들이 가볍게 스치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연인」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1928년

미국 뉴욕, 개인 소장


악몽 속에서나 본 듯한 이 환영은 교수형에 처해지는 죄수의 얼굴을 덮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 이미지에서 구애와 맹목성과, 산맥처럼 천을 주름 지게 하면서 서로를 탐닉하고 집어 삼키며,

서로 숨이 막혀 까무러치거나 죽어 갈 정도로 치명적인 사랑의 욕구도 볼 수 있다.


여우들 처럼 그 옷 주름 속에 정체를 감춘 채 서로를 물어뜯는 단순한 이미지와 내면의 어둠만을 직시하는

그 시선을 고려한다면 그를 현대적 '바로크' 작가라고 불러도 좋겠다.










「피아노 치는 마르그리트」


빈센트 반 고흐

Vincnt Van Gogh


1890년

스위스 바젤 미술관


빈센트는 마르그리트르 모델로 삼아 두 점의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실내에서 피아노 치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푸르른 정원을 거니는 꿈결같이 환상적인 모습이다.


이 두 점의 마르그리트를 모델로 삼은 그림은 자살하기 직전에 그려진 진정한 최후작들이다.

그림들 가운데 이토록 모델 가까이에 바짝 붙어 그렸던 것은 극히 드물다.

이 그림은 까마귀 떼가 날아오고 마른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먹구름 밑의 들판과 나란히 그려졌다.


그는 까마귀 떼의 날갯짓과 밀밭의 바람 소리와 마르그리트의 피아노 소리를

 자신의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여로의 동반자로 삼았을 것이다.









「모성」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919년

프랑스 밀 빌뇌브다스크 현대미술관


빛의 파장에 따른 효과가 배제되고 오직 색의 밝기에 따라서만 밝혀졌기에 실내는 그만큼 차분하다.

경쾌한 선묘와 색면들로 집약괸 이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의 수면처럼 반짝이는 그윽한 눈길과

가벼운 '볼 터치'가 가미된 핑크빛으로 화가는 초상의 생명력을 되살려 낸다.

모델이 된 그녀는 화가와 짧았던 삶의 마지막 4년간 동거했던 잔 에뷔테른이다.


작품은 숭고해 보일 정도로 세속성을 벗어난다.

또 오래된 종교적 주제를 닮았으면서도 무뚝뚝해 보일 만큼 그저 엄숙한 것이 아니라

 인형과도 같은 친근감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모딜리아니가 "인간이란 신의 힘으로 조종되는 인형"이라고 했던 말을 여기서도 공감할 수 있다.









「내에서 목욕하는 여인」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1656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단색조로 절제된 화면 전체에서 빛의 효과는 어떤 '스펙트럼'보다 눈부시고

물에 잠긴 장딴지는 어떤 모델의 발놀림보다 매력적이다.

그렇게 그 솜씨 속에 녹아 버린 그녀의 심리가 효과적으로 두드러진다.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한 이 여인의 이름은 헨드리키에 스토펠스. 당시 나이는스물아홉이다.

1654년 10월에 마흔아홉이었던 화가와의 사이에 코르넬리아라는 딸을 낳은 그 이듬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모든 시련과 사건이 찾아오기 전, 그리고 전처와의 이별과 유모와의 갈등 등으로 시달리던 끝에

오랜만에 되찾은 평화와 안락 속에서 화가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이다,

과거에 그렸던 보석과 비단, 황금과 모피와 비로드 등 그의 작품의 화려한 대목들을 장식했던

소품과 대상들은 모두 한 줄기 빛의 광채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1831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1831년 작으로 그의 화실 근처에서 벌어졌던,

샤롤 10세를 폐위시키고 추방햇던 민중혁명 시위대의 시가전을 재현한 작품이다.


공화주의에 대한 예찬인 위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기운도 없는 나이가 되어서야 이런 체험이 찾아오다니 너무 아쉽다!"

그는 "비록 나가 싸우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는 했던" 것이다.










「잠」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66년

프랑스 파리 프티팔레 미술관


사진에 찍힌 직업적인 모델을 동원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화면에서

그윽한 고전적 여인의 매력은 한 군데도 없다.


화가는 이렇게 고전 화가들처럼 잘 조정되고 꾸며진 인체를 그리는 것을 우롱했다.

그가 즐겨 그렸던 사회 하층민들, 즉 노동자이거나 농부이거나 매춘부이거나 그들의 초상권,

즉 인권은 교묘하게 보호되었다. 쿠르베의 이런 누드화들은

그의 역사, 민중, 현실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이해로 미루어 주문에 따라 그렸으면서도

(도시 여인들의 대담성이 여기에서는 산골 처녀의 건한 신체처럼 당당해 보인다. 그 아편 등의 장식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퇴폐 또는 복잡한 현실을 여러 수준에서 폭로한다.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최고봉 플로베르는 그 당시 200년 동안 프랑스의 삶과 예술이

빈곤하고 삭막해지기만 했다고 한탄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있기는 있다고 믿는다.

예술을 통한 현실의 반어법적 수용과 그 조형적이며 완전한 재구성 말이다."







/////////////////////////////////////////////////////////////////////////////////////////////////////









여기서 부터 아래는 '페이퍼스토리' 에서 펴낸 '살아 있는 미술사 박물관'

 (글쓴이 / 메리 지처즈, 옮긴이 김은령) 내용 가운데 일부를 옮긴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


피터르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


1550 - 1569


16세기 안트베르펜(지금의 벨기에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풍족한 도시였다.

부유한 상인과 은행가 들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 계절을 담은 풍경화를 그렸으며

이 그림들은 미술사상 가장 인기 있는 풍경화 가운데 하나다.


어른처럼 생긴 아이들이 막대기와 굴렁쇠, 나무통, 공을 갖고 논다.

 이 그림은 <아이들의 놀이>(1560년)의 한 부분이다.

전체 그림에는 몇백 명의 아이들이 전통 놀이를 하고 있다.








「예수의 부름을 받는 성 마태오」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si da Caravaggio


1592 - 1610년


<예수의 부름을 받는 성 마태오>(1600년)는 카라바조가 살던 시절,

로마의 어느 도박장을 배경으로 한듯하다. 세금을 징수하는 마태오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장면을 보여 준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하느님의 존재를 나타낸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공주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Rodriguez de


1611 - 1660


에스파냐 왕 펠리페 4세는 젊고, 야심만만하고, 예술을 아끼고 사랑했다.

왕은 젊은 나이의 벨라스케스를 궁정 화가로 임명한 뒤 왕과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왕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딸의 초상화를 예비 신랑인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보냈다.

예비 신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 줄 셈이었다.

 이 작품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에서 공주는 겨우 여덟 살이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얀 페르메이르

Jan Vemeer


1653 - 1675


페르메이르는 네델란드 미술의 '황금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 시기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 크게 유행했다. 페르메이르는 실내에서 요리를 하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머리에 둘러 감은 터번은 페르메이르가 좋아하는 군청색이다.

이 물감은 소녀가 달고 있는 귀고리만큼이나 귀한 물감이었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파어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490 - 1564


산꼭대기에선 남자가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는 자연을 정복한 신처럼 높은 데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웅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아주 작은 존재임을 보여 주려는 걸까?

프리드리히는 삶과 죽음에 관한 감정을 담아 쓸쓸함이 짙게 배어나는 풍경화를 그렸다.








「검정과 금빛의 녹턴 - 떨어지는 불꽃」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75년


 1855년 휘슬러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갔다.

런던과 파리의 미술 아카데미는 역사 속 장면을 웅장하고 세련되게 표현한 그림을 보여 주려고 했다.

휘슬러는 뭔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런던 템스 강변에서 본 불꽃놀이를 그림에 담았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과 연기구름을 볼 수 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조르주 피에르 쇠라

Georges-Pierre Seurat


1884 - 1886


1880년대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리에 열풍을 일으켰다.

쇠라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알게 되었고, 인상주의 전시회에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색채 실험을 한층 더 발전시키고 싶었다.


작은 점을 무수히 찍어 파리 교외에서 휴일을 보내는 사람들을 그렸다.

가까이에서 보면 점들이 하나하나 눈에 띄지만, 멀리서 보면 서로 섞인다.








「밤의 카페테라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1888년


고흐는 설교자와 교사로 일하다가 뒤늦게 화가가 되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을 딱 한 점밖에 팔지 못했지만, 몇 백점에 이르는 그림을 그렸다.

특히 죽기 전 2년 동안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생동감이 넘쳐난다.

 길바닥은 서로 보색 관계에 있는 색들로 두텁게 칠해져 있다.








「열대 폭풍우 속의 호랑이」


앙리 쥘리앵 펠릭스 루소

Henri Julien Felix Rousseau Simoni


1891년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된 앙리 루소,

처음 비평가들은 루소의 '유치한' 그림을 비웃었다. 작품은 잘 팔리지 않았지만,

몇몇 유명한 화가들이 루소의 그림에 찬사를 보냈다.


호랑이가 풀쩍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냥꾼에게 놀란 호랑이라고 생각한다.








「어릿광대 음악가」


파블로 루이스 이 피카소

Pabio Ruiz Picasso


1924년


1907-1908년에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를 창시하여 미술의 흐름을 바꾼다.


알록달록한 옷찰미의 어릿광대를 '입체주의' 방식으로 그렸다.

여러 각도에서 본 모습을 동시에 보여 준다. 어릿광대의 얼굴과 팔, 기타의 여러 면을 볼 수 있다.







「즉흥 31(해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칸딘스키

Wassily   Wassilyevich Kandinsky


1896 - 1944


1900년대 초 파리에서는 피카소와 마티스가 새로운 미술 기법을 실험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칸딘스키가 색채, 선, 형태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미술 양식을 만들었다.


마치 음악을 들을 때처럼, 무지개 색깔과 진동하는 선들이 화면에서 뛰어올라 노래하는 것 같다.

제목이 나타내듯 한가운데에 배의 돚이 있고, 기그재그 선은 대포알이 떨어져 물방울이 튀는 것 같다.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카로 이 칼데론

Magdalena Camen Frieda Kahlo Calderon


1940년


멕시코에서 성장. 6세 때 소아마비를 앓았으며,

 18세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킬로는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의 아픔을 표현했을 뿐 아니라 용기와 굳센 의지를 보여 주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사물과 동물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

살갖을 파고드는 가시는 '고통'을 드러내지만, 잠자리와 나비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나타낸다.







「8번(1950년)」


폴 잭슨 폴록

Paul Jackson Pollock


2차 세계대전 후, 미술가들이 뉴욕에 모여들면서 뉴욕은 현대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폴록은 독특한 작업 방식과 대담한 작품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을 위해 폴록은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펼쳐 놓고 한 손에는 물감통, 다른 손에는 붓을 들었다.

 물감을 뿌리고 끼얹어서, 선과 무수히 겹치고 서로 휘감아 굽이치는 모양과 무늬를 만들었다.






*************************************************************************************







 산천이 타들어 간다고 이내 정서까지 덩달아 메말라 간데서야 어디 원.

하여, 가슴을 적시겠노라 소위 명화로 평가 받는 그림과 해설 일부를 이 자리에 옮겨 보았다.


"사랑의 이미지" 2005년 '민음사'에서 발행된  책으로 가끔씩 들여다 보던 내용이고,

 "살아 있는 미술사 박물관" 은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 온 것.



헌데, 가만있자...


그러고 보면. '사랑의 이미지' 저자의 말 마따나

나 역시도 복제물을 이내 스톼일(?)로 재 복제한 셈....??








Classic - Eldar Mansurov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국보 / 일반회화  (0) 2017.06.18
의암 손병희 평전   (0) 2017.06.10
위대한 사진가들  (0) 2017.06.02
사찰 꽃문살  (0) 2017.05.30
사찰 벽화  (0) 2017.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