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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민화(民畵) 산책


민화(民畵) 산책



민화에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민화의 세계는 사실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세계다.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느끼고 아는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여

실제적인 사실성보다 관념적인 구성이 두드러진다.


※ 아래 내용은  정병모 著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닭과 모란>

19세기, 종이에 채색, 49.0×31.0cm, 일본 구라시키민예관


모란과 화초, 그리고 닭이 오버랩되어 있다. 가운데 꽃병에는 모란이 꽂혀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화려한 모란꽃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오른쪽에 서 있는 닭이 목을 길게 뽑아 모란 잎과 중첩됨으로써 닭 벼슬이 모란을 대신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왼쪽 아래의 흙더미에서는 죽순이 사선 방향으로 뻗쳐 올라가 닭과 교차하고 있다.

이것은 파격적인 구도다. 전통적인 틀 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감성을 화폭에 풀어놓았다.


그렇다. 민화는 자유다!

관습과 규범, 시간과 공간, 스케일로부터 자유롭다. 이는 엄격한 장중함을 추구하는 궁중회화나

드높은 격조를 지향하는 사대부회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책거리>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채색, 41.2×23.6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첫눈에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분간이 안 된다.

오른쪽은 사슴과 꽃을 그린 것이 틀림없지만왼쪽은 아리송하다.


그러나 좀 더 눈여겨보면, 왼쪽은 머릿장과 그 위에 쌓은 책들, 

이들 사이사이에 과일과 문방구가 배치된 '책거리'임을 알아차리 수 있다.


 책 표지의 문양들이 다채롭고 장식적이며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마치 현대의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보인다.

 전혀 깊이가 없는 평면적인 공간에 납작하게 눌려 표현되었지만, 책문양의 장식성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사슴과 화분의 관계도 모호하다.

연못을 상징하는 물이 간략하게 표현되고, 화분이 사슴 위에 느닷없이 우뚝 서 있다.

더욱이 화분의 꽃은 책의 영역까지 파고들어가 있다.


자유자재한 구성인 것이다. 이것은 서민화가의 자유로운 의식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궁중화원이나 사대부화가들이 생각지 못한 과감한 조합들인 것이다.

무명화가가 펼치는 무한한 변화의 상상력은 기존의 모티프를 넓히고 해체하고 변형한다.


이것은 '현기증이 날 정도의 매너리즘'의 세계이면서 '경이적이라고 할 만한 변형'의 세계다.

이율배반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무명화가의 상상력이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신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새, 73.5×36.0cm,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거북이 내뿜는 상서로운 기운은 하늘에서 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좌우의 산은 겨울 새벽 서릿발 처럼 솟아 있다.

옅은 먹빛의 부드러운 정조 속에서 독특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해 베레니스 조프르와 슈네테르는

"특히 바다 풍경 한가운데 마지막 숨을 내쉬는 거북이는 환상적인 세계 속의 부서기기 쉬운 상징"

이라 묘사하고, 한국 민화를 '자연의 꿈'이라고 표현했다.


민화에 펼쳐진 추상세계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실제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맍 그 표현은 저 너머의 이상을 향하고 있다.

현실을 그린 것 같지만 현실성이 부족하고, 상상의 세계인 것 같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현실이자 꿈이며, 실재이자 환상이다.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간단하게 넘나든다.







<구운몽도九雲夢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80.0×38.0cm, 일본 세리자아케이스미술관


구운몽도의 공간은 전혀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 아래서부터, 가운데가 꺾인 성벽, 마당, ㄷ자 혹은 ㅁ자 집, 국화꽃과 매화나무, 동산과 팔선녀로 전개되고 있다.

겹겹이 펼쳐져야 할 장면이 놀랍게도 한 평면 속에 압축되어 있다.


 평면성이 이 작품의 특색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문설주, 담, 건물 벽, 문, 지붕 등이 반복적인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기하학적인 패턴 덕분에 구상적인 인물이 두드러져 보인다.


『구운몽』의 배경은 중국 당나라이지만, 민화로 그려진 이 작품은 조선을 배경으로 하여 묘사된다.

언뜻 보아서는 구운몽을 그린 것인지 알아채기 힘들지만,

왼쪽 산 위로 보이는 여덟 여인을 보고 팔선녀(八仙女)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 나라의 어떤 소재든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로 바꾸는 것이 민화에 나타난 수용태도다.







<모란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76.0×37.5cm,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꽃과 잎은 최소화하고, 기하학적으로 패턴화된 수석 위에 붉고 흰 모란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민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회화적인 활달함과 자유로움이 그림 전체에 배어있다.

오른쪽으로 날아드는 두 마리 나비가 정감을 더하는 느낌이다.







<괴석모란도병>

19세기, 8폭 중 4폭, 각 231.0×54.5cm, 서울역사박물관


이 <괴석모란도병>은 운현궁의 유물로서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 찬 '궁중회화'다.

궁중에서 제작되는 모란도는 화려하기 그지없으나 벌과 나비가 찾아들 여유가 없다.

엄격함과 완벽함에 치중하다 보니, 벌과 나비가 깃들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넉넉한 민화 모란도에는 여지없이 벌과 나비, 또는 새가 꾀어든다.

그 속에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넉넉함이 가득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문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8×29.2cm, 홍익대학교 박물관


신(信)자는 믿음을 뜻하는 유교적 성격의 문자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문자도>는 훨씬 다양한 조형적 함의를 지닌다.


사선 방향의 1획은 꼬리에 편지글을 달고 있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이는 곤륜산(崑崙山에 사는 여신인 서왕모(西王母)가 보낸 서신을 전하는 청조(淸朝)로, 신자도에 나오는 대표적인 상징.

서신(書信)이란 말 그대로 믿음을 전하는 글이다. 청조가 깃들어져 있는 2획은 단순히 수직 방향의 획 하나를 긋는 데

 그치지 않고 직선 위주의 정연한 조형을 블록처럼 쌓아올렸다. 그것도 내부에 축소된 공간을 두어 서신을 물고 가는

새가 건물 위로 날고 있다. 수직 획 하나가 차원을 달리하여 풍요로운 이미지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의 말씀 언(言)자는 직선 위주로 된 인(人)방변과 달리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선과 곡선의 대비를 통한 구성의 미가 일품이다. 3획은 가는 필선으로 묘사했고,

 나머지 4~9획 내부에는 신호등을 연상케 하는 다채로운 원 무늬와 집, 꽃, 산의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작가의 상상력은 공간을 넘나드는 구조적인 짜임, 상징과 장식의 조화, 화려한 채색 등

감상자에게 다양하고 풍부한 조형세계를 선사하고 있다.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74.0×41.1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책거리는 원래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 주제다.

궁중에서 제작된 책거리는 서양의 원근법에 의해 깊이감이 뚜렷해졌고, 음영법에 의해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민화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의 책거리가 탄생했다. 깊이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평면적인 그림으로

재탄생 했다. 분명 궁중 책거리에서 시작된 그림이지만 철저하게 민화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위 <책거리>는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순함은 민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핵심만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호소력을 높이고 힘을 실어준다.

그것은 또한 단순함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취향과도 부합된다.







<책거리병풍>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 69.3×35.4cm, 교토 고려미술관


민화에는 단순한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도 적지 않다.

이 병풍은 구성과 장식이 조화로운 작품이다.

책은 책대로 문양은 문양대로, 이것은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개념으로 보인다.


책의 자유로운 짜임에서는 구성의 묘미를 맛보고, 정면을 향한 문양에서는

장식성을 향유하기를 바라는 것이 화가의 의도일 것이다.

자유로운 짜임새 속에서 문양은 장식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책과 다른 정면성을 견지한 것이다.








책거리에서 보여준 응집된 구성은 민화의 크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민화는 집안을 치장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집의 크기에 비해 작아질 수밖에 없다.

 궁궐을 장식하는 궁중회화가 크고, 민간을 장식하는 그림이 작은 것은 그 때문이다.

크기는 궁중회화와 민화를 구분하는 일차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민화의 작은 화면에 많은 것을 담으려면 밀집한 공간구성이 제격이다.









<화개부귀>

청(淸). 종이에 다색판화, 59×31cm, 중국 쑤저우의 민간연화


응집된 구성의 근본적인 원인은 작품의 크기보다 한국적인 성향과 관련이 깊다.

중국의 민화인 <화개부귀花開富貴>와 비교하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장식이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다. 모란과 꽃병도 화려하지만, 만(卍)자문 패턴의 배경에

팔보문으로장식되어 있다. 부귀가 집안에 가득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민화에서는 장식들을 밀집하게 표현하고 여백을 충분히 살렸다면,

중국 민화에서는 장식을 화면 전체로 확산한 특색이 보인다.


한국 민화가 구심적이라면 중국 민화는 원심적이다.








<제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75.0×41.0cm,  선문대학교 박물관


꽃과 나무와 글자의 획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획은 새 가운데 형제간의 의가 돈독한 것으로 알려진 할미새로 그려졌고,

첫 번째 획은 팔랑개비 잎을 가진 나무와 모란꽃으로, 나머지 획만 매우 감각적인 곡선의 초서로 그렸다.


화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흥취 때문일 것이다.








<봉황>

19세기, 종이에 채색, 91.5×38.5cm, 삼성미술관 리움


흥겨움과 경쾌함이 충만한 작품이다.

 봉황과 연꽃이 X자로 교차하고 있다. 구불구불한 형상의 매화가지 위에는 닭 한 마리가 곡예를 하는 듯 하다.

이 그림의 모든 것은 흥겨움이 가득하고 그 속에서 한 몸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용화>

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66.5×30.5CM, 국립민속박물관


무슨 꽃을 그린 것인지 분간키 힘들 정도로 도식화되었다.

왼쪽 위에 '동정호에 핀 부용화(洞庭湖上芙蓉花)'라는 표제가 없다면,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다.

허나 훙취까지 도식화하지 않았다. 흥취는 이 그림의 생명과 같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민화는 원래 행복, 출세,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화(吉祥畵)이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밝다.

민화에 배어 있는 흥취는 개인적인 정서 못지 않게 사회적인 정서 차원의 요인도 있는 것이다.







<삼고초려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채색, 54.0×38.0cm, 개인 소장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는 극적인 이야기를 해학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버드나무 위에는 두 마리의 새가 우짖는다. 낭만적 배경과 달리 등장 인물들 사이에는 팽팽한 신경전이 흐른다.


유비가 예물을 들고 찾아왔지만, 공명은 아예 방 안에 드러누워 있고 대신 동자를 내세워 만남을 거절한다.

기단 아래에선 제갈량의 건방에 흥분한 장비를 관우가 제지한다. 유비의 공손함과 장비의 흥분이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이처럼 삼국지의 영웅들을 맘대로 희화화할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절대 불가이다.

이윤 즉, 중국에서의 관우는 가장 많이 추앙받는 신의 반열이기 때문이다.







<책가도병풍> (부분)

장한종, 18세기 말~18세기 초, 종이에 채색, 195.0×361.0cm,  경기도박물관.


이 병풍은 노란 휘장을 걷어 올리면서 서가의 위용을 드러내 보이게 하는 극적인 구성이다.

책을 중심으로 도자기 · 문방구 · 과일 · 꽃 등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서양화법으로 그렸다.


다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그가 물상 자체의 모습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그림자가 뒤의 물체를 가려 어둡게 만드는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이 그림에는 다른 책거리처럼 청대 도자기나 청동기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그저 책에 대한 열정만이 그림 속에 뜨겁게 표출되어 있다.








<책거리병풍> (부분)

19세기, 비단에 채색, 각 161.7×39.5cm, 국립고궁박물관


원래 창덕궁의 유물이었던 병풍으로 학문의 진흥을 강조했던 정조의 의지에 가장 부합된다.

물론 정조 이후 19세기의 작품이지만,

책가 안에 책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은 정조의 책거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책가도병풍> (부분)

19세기 비단에 채색, 161.9×341.6cm, 미국 개인소장


책가 안에 여러 기물들로 가득 차 있다. 

조선 상류층의 명분과 실제의 양면성에 대한 실제라고나 할까

책거리에  즐비한 중국의 기물과 서양의 물품들을 통해서 당시 세계를 향해 눈을 뜨려는

상류계층의 의식 일부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책거리병풍> (부분)

이형록, 19세기, 종이에 채색, 140.2×468.0cm, 삼성미술관 리움


이형록은 조선시대 화가로는 드믈게, 두 번이나 개명을 했다.

고종 원년에 이응록으로 바꾸었고, 불과 7년 만에 다시 이택균으로 바꿨다.

이형록, 이응록, 이택균은 같은 사람 이름인 것이다.

대대로 이어진 화원 내력 답게 가장 완성도 높은 책거리 작품을 구사한 화가였다고.


근래의 연구 결과, 이 병풍에 등장하는 도자기는 다채색의 분채(粉彩)자기로

송나라 도자기를 모방한 청대의 도자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양화의 원근법의 공간에 음영법까지 표현되어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가도병풍>

이응록, 19세기, 종이에 채색, 203.8×289.5cm, 미국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이 병풍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책거리병풍>보다 수직방향으로 길이가 넓어지면서

긴밀함이 덜해진 반면, 더욱 웅장해졌다. 좌우 비대칭으로 다양한 변화를 주였고,

갈색의 배경에 회색 천장과 바닥은 공간감을 높여준다.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64.0×31.9cm. 도쿄 일본민예관


야나기 무네요시는 제자로부터 책거리 두 점을 기증받는다.

그리고 글 한 편을 토해낸다.


"나의 직관은 이 그림이 대단히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뭔가 신비로운 아름다움마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짜서 다시 바라보면 이 그림만큼 모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실은 이 그림이 근대인인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불합리성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서양의 근대미술 교육을 받은 야나기 무네요시는 공간이 깊어질수록 점으로 모이는 서양의 원근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과학적인 그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공간으로 표현된

조선의 민화 책거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주었다는 얘기다.


매우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공간구성으로 점철된 민화 책거리에서,

그는 오히려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이 '불가사의'하다고 토로한 것.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 106×26.8cm, 삼성미술관 리움


궁중에서는 책가가 있는 책거리와 더불어 책가가 없는 책거리가 제작되었다.

책과 기물에 정연함을 부여하는 서가의 틀이 없어지고, 보다 여유로운 공간 속에 책과 기물들이 배치되었다.

사선 방향으로 전개되는 깊은 공간 속에서 책들과 도자기와 생활용구들이 넉넉한 구성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책가도병풍> (부분)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83.0×243.8cm, 뉴욕 킹 콜렉션


균등하게 배정된 24칸의 책가 속에 책과 장식들이 한 곳도 똑같은 것이 없이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궁중 책가도와 달리 서가의 칸막이 벽을 한결같이 윈쪽에 배치하고 음영을 넣어 표현했지만,

책과 장식들은 그 틀에 구애되지 않고 각기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궁중 책가도의 중후한 색조가 파스텔 톤의 밝은 빛깔로 바뀌었다. 언뜻 규격화되고 형식화된 책가도로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민화만의 자유로움이 가득한 작품인 것이다. 궁중화풍의 책거리가 청대의 도자기나

청동기와 같은 골동품으로 장식된 반면, 민화풍의 책거리에서는 삶에 필요한 염원이 담긴 물품으로 채워져 있다.

여러가지 행복의 상징들을 가득 담은 것이다.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52×32.9cm,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책거리는 원래 공부에 대한 소망을 담은 그림인데,

그 주변에 오이, 고추, 불수감, 딸기 등 온통 득남을 위한 상징으로 가득하다.

흥미로운 것은 오른쪽 위 주전자에 고추가 심겨져 있다. 오른쪽 아래 포개어 엎어져 있는 사발들에는

부귀다남(富貴多男)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들을 많이 낳고 출세하기를 소망하는 길상화인 것.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52.2×31.0cm, 삼성미술관 리움


그림의 중심은 책이지만,

 장수의 상징 복숭아와 다산의 상징 수박, 그리고 합격의 상징 연밥을 쪼는 새가 그려져 있다.

학문에 대한 열정 못지 않게 복을 비는 여러 소망이 간절히 배어 있음을 본다.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63.5×34.5cm,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궁중 책거리에서 볼 수 있는 정연함과 중후함, 학문적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학문보다는 길상적인 염원과 생활의 정감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단지 서가의 틀만 없앤 것이지만,

민화 책거리에서는 본래의 의미마저 위협받을 지경이다. 이것은 민화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이 책거리에서 에로티시즘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상식의 허를 찌르는 대담한 시도와 놀라운 상상력으로 에로틱한 책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상천외한 작품을 탄생시겼다.









19세기, 종이에 채색, 80×31cm, 조선민화박물관


책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질적인 소재들이 책과 결합되어 있다.

용 그림인지 책거리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용과 책이 어우러져 있다.

용과 두꺼비가 책을 감싸는 형국이다. 용의 더듬이와 두꺼비의 더듬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서로 교감을 나누고 있는데, 이는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랫 부분에 등장하는 마작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민화 책거리는 더 이상 학문의 증진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중이 원한다면 어떤 소재라도 책과 자유롭게 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








<문자도>

중, 염(廉), 19세기 종이에 채색, 61.0×40.0cm, 일본 세리자아케이스미술관


문자도는 한자에 대한 주술적인 믿음에서 출발했다.

복(福)자를 그린 문자도는 행복을 가져다 주고, 수壽는 장수를, 녹祿은 출세길을 연다는 믿음이다.

효孝는 효심의 상징이요, 충忠은 충성심의 발로.








<청건륭격사복자 淸乾隆緙絲福字>

청, 자수, 147.7×85.1cm,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1610년 남평현의 현감 조유한이 광해군에게 바쳤다는 백수도(百壽圖).


공직생할 중 여러 불명예스러운 이력의 소유자였다는 조유한이

중국인에게서 받은 백수도를 광해군에게 바친 일이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바친 백수도는 우리나라 문자도의 첫머리를 기록한 작품이라고.


'수壽자를 크게 쓰고, 음획(陰劃)으로 된 그 글자 안에 수백자의 '壽'자를 써넣고,

백수도를 구성한 글씨체는 과, 두, 전, 주, 충, 학, 구인 등 모두 전서체이다.

전서체는 갑골문에서 비롯된 서체인지라 주술적인 힘이 강하다.

때문에 다양한 전서체로 길상적인 내용을 표현한 것은 많은 복을 받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








32체의 전서와 예서로 쓴 『금강경』

원(元), 1288년, 반곽 24.9×14.5cm, 서울 개인 소장


조유한이 바친 백수도처럼 여러가지 전서체를 섞어 쓰는 형식을 '잡체전(雜體篆)이라고 일컫는다.

송나라 때에는 사찰에서도 잡체전이 유행했다.

승려 도긍道肯은 기존의 18체에 18체를 더 늘린32체의 전서와 예서체를 섞어 쓴 금강경을 출간했다.

이 책은 청대까지 간행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점점 전서체와 예서체가 다양해지는 까닭은 그 다양함에 비례하여 주술적인 힘이 증가하여

경전의 내용이 더욱효험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부적과 같은 효험이다. 부적도 일반적으로 전서체로 쓰는데,

이는 전서체에 깃든 액막이의 주술적인 힘 때문이다.







<백수백복도>

이형록, 19세기, 비단에 채색, 각 184.7×48.2cm, 서울역사박물관


다양함으로 치닫는 잡체전은 18체에서 36체가 되고 다시 100체로 늘어나면서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에서 그 백미를 장식했다. 

 

초창기 백수도는 수와 복이 짝을 이루는 '백수백복도'로 자리를 잡고,

큰 문자 안에 여러 작은 문자를 배치하는 구성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작품은 궁중화원이었던 이형록이 그린데다 고급의 표구로 꾸민 점으로 보아 궁중회화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림의 수자와 복자가 정확하게 일백 개는 아니다. 모두 207개이다.


백수백복도를 굳이 일백개로 맞출 필요는 없으니 백은 그저 많다는 의미로 새겨질 뿐.







<백수백복도>

19세기, 비단에 채색, 각 102×29.0cm,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디자인적 요소가 풍부한 작품이다.

전서체의 회화적이 특색을 극대화하여 문양과 그림으로 치환시켰다.

예컨데, 항아리나 정(鼎)에 수라는 문양이 새겨져 있거나 부채 옆에 놓여있는 잔에 복자를 그려넣었다.


항아리나 정과 수자는 상관이 없고, 부채도 복자와 어떤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문자와 이미지의 연관성에 집착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를 장식적인 요소로 활용한 것.


잡체전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형식의 전서체는 백수백복도로 정립된다.

다양할수록 주술적 효과가 큰 것으로 여기는 믿음은 일백이라는 온전한 숫자에서 그 전형이 완성되었다.








<문자도> 左 조선 18세기, 종이에 채색, 74.2×42.2cm, 삼성미술관 리움

<수자도> 右   청,  종이에  다색판화,  106×64cm,   문자도,  개인 소장


조선유교의 영향은 민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은 본다.

 '유교문자도(儒敎文字圖)'라는 새로운 문자도가 탄생한 것이다.


문자도란 원래 행복, 출세, 장수를 주 내용으로 하는 복록수(福祿壽)의 길상문자도(吉相文字圖)가 주류를 이룬다.

중국을 비롯, 일본, 베트남, 부탄, 티벳에 이르는 한자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유독 조선에서만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儀廉恥)'의 문자도가 유행한 것.


왼편의 <문자도>는 문자 내부를 내용과 관련된 고사인물화로 채웠다. 백수백복도와 다른 면모다.

먹색의 획 안에 효와 관련된 고사인물화가 화려한 채색화로 표현되어 있다. 붉은 색 원 안에 고사의 제목이 적혀 있어

어떤 내용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 제목을 차례대로 적으면 '대순경우역산(大舜耕于歷山)',

'왕상고빙출어((王祥叩氷出漁)',  래자농치친측(萊子弄稚親側)', 맹종읍죽(孟宗泣竹)', 이 된다.

모두 중국의 유명한 효자에 관한 이야기다.


오른편의 <수자도>는 중국 쑤저우(蘇州)의 문자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해서체의 수자 안에 장수와 관계된 서왕모(西王母)의 설화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것은 전서체로 그려진 이전의 문자도와 다른 형식이다.








<효자도> <왕상빙어王神水魚> <노채반의老蔡斑衣>

비단에 채색, 107.1×34.7cm, 삼성미술관 리움


위용있는 집과 고급 재료에 세련된 화풍으로 미루어 궁중용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

효자도는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세자 교육을 위해 제작되었다.








『오륜행실도』 「중업의장」

종이에 판화, 반과 22×14.7cm, 원주 고판화박물관


 일천 년 넘게 생활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불교를 유교국가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강력한 유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실제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친족제도가 유교식의 가부장적인 종법(宗法)제도로 바뀌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다.

임란에서 병란까지 4차례의 전쟁이 일어나고 인조반정과 같은 쿠데타가 일어나 혼란이 가속된 시기다.

재산상속, 시집살이, 족보 등 가족제도가 부계의 장자 위주로 재편되면서 남녀 차별이 심화된다.

17세기 중엽부터 변하기 시작한 종법제도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정착되었다.

생활 자체가 유교적인 체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1797년 간행된 『오륜행실도』에서 그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삼강(三綱)에 장유(長幼), 봉우(朋友) 에다 스승과 제자간의 윤리인 사생(師生)까지 덧붙여졌다.

당시 규장각의 직제학이었던 이만수가 쓴 서문은 이렇다.


"조정에서도 향리에서도 규문에서도 이렇게 한다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목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3물(三物)의 교화가 일어나고 2남(二男)의 풍화가 실행되며,

이것이 드리워져 이것이 천하의 법칙이 되고 세워서 만대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질서와 조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표면에 나타난 현상이고, 기실 그 이면에는 다른 현실적인 욕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서민 사회가 성장함에 따라 양반문화에 대한 서민들의 동경이 높아졌는데,

이러한 변화가 길상문자도 보다 유교 문자도를 선호하게 되는 또 다른 동력이 된 것이다.








<효자도>

19세기, 종이에 먹, 60.5×41.0cm, 일본 세리자와케이스케미술관


상징으로 전체를 대변할 때에는 상징의 의미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유교문자도는 점차 픽토그램pictogram처럼 기호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유교문자도의 기호가 더이상 특정계층의 지식에만 머물지 않고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문자를 구성한 획들이 이어, 부채, 오현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효자 이야기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1~2획은 왕상빙어(王神水魚)의 잉어이고, 3획은 맹종읍죽(孟宗泣竹)의 죽순이며,

 4획은 황향선침(潢香扇枕)의 부채고, 7획은 순임금의 오현금(五鉉琴)이다. 


황향선침(潢香扇枕)은 전한시대의 효자 황향(潢香)이 9살의 어린 나이에 효성이 지극하여

 여름에는 어버이의 잠자리에 부채질을 하고 모기를 쫒아 시원하게 했고,

겨울에는 베개와 침구를 몸으로 데워 따뜻하게 해드렸다는 고사.








<제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8.2×26.5cm, 도쿄 일본민예관


한 글자 안에서 다양한 이미지의 결합을 보여준다. 제(悌)자의 변화도 다양하다.

문자도에서 제가 효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장자 위주의 가족제도에서 필요한 형제간의 우의를 강조한 것이다.

1획은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가지들의 기세가 등등한 산앵두나무로 표현되고, 2획과 3획은 그것에 깃들어 있는

할미새들로 나타내었다. 4~5획은 모래 결 같은 질감의 해서로 표현되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산앵두나무 아래의 검고 굵은 테두리에 거북이 등 문양이 베풀어진 사각형이다.

돗자리로 보이는 이 사각형은 이 작품에서 시선을 끄는 포인트가 되고 있다.


<제자도>의 화제 중에는

 "봄 깊은 교목에 할미새가 사이좋게 먹네. 해 따스하고 바람 온화한데 잎과 꽃 함께 밝네."

라는 귀절이 있는데 이 그림이 그러한 화제를 묘사한 것이다.








<제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66.5×34.4cm, 국립민속박물관


제(悌)자를 나지막한 언덕 위 하늘에 띄워 놓았다.

2획과 3획에서는 할미새가 우의 좋게 먹이를 나누고 있고, 1획의 세로획은 꽃을 입에 문 새를 형상화 했다.

4획과 5획은 각각 연잎과 빨갛게 핀 연꽃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들이 꽃혀 있는 화분은 7획 안에 두었다.

할미새와 연꽃이 화려하지만, 기본적으로 문자 획의 채색과 장식이 어우러진 색감은 매우 독특하다.


청색 바탕위에 주황색의 선들로 배푼 오방색만 가지고도 이처럼 화려하게 불타는 이미지를 표현해 냈다.

채색은 서민화가의 상상력을 펴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인 것이다.








<예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77.0×39.0cm, 도쿄 일본민예관


유교문자도는 점점 간결해져 아예 대표적인 상징 하나 내지 두개가 획으로 대체되었다.

이 <예자도禮字圖>는 획 하나, 그것도 첫 획인 점만 이미지로 형상화한 문자도다.

첫 번째 찍은 점을 거북으로 환생시키고 나머지는 초서로 나타내었다.


 초서의 획은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형상인데,

 왼쪽의 변은 간간이 뾰족한 삐침을 두어 오른쪽의 두루뭉술한 획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해서체로 그리는 것이 문자도의 관례인데, 이 그림에서는 초서체로 휘갈겨 썼다.

초서로 그린 획의 흐름에 따라가다 보면, 과장된 곡선의 흐름이 어느 순간 하나의 추상으로 다가온다.

구상과 추상의 아름다운 조화가 이 그림에서 맛볼 수 있는 최대 매력이다.


예란 인간이 지켜야 할 질서와 규범을 일컫는다.

仁이 인간다움을 가리킨다면, 禮는 그것의 실천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자도>에서는 주로 "낙구부도(洛龜負圖)"의 고사를 표현한다. 

중국 최초의 글자는 낙수洛水에서 거북이가 등에 지고 나온 낙서洛書다,

이 낙서로 말미암아 세상에 교육이 이루어지고 예禮가 바르게 정립되었다.


그래서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으며 낙서를 등에 짊어진 거북이를

예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염자도>

19세기, 종이에 먹, 64.4×37.3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첫 획이자 첫 점을 오동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커다란 봉황으로 부화시켜 

이 봉황이 나머지 획 위에 깃들어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염(廉)자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점이 커다란 봉황으로 깨어나고

그것이 나머지 획들을 지배케 하는 상상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廉이란 청렴하고 검약하는 것을 이른다. 군자의 진퇴(進退)와 처세 그리고 절제를 뜻하는 것.

염자도에는 게 혹은 봉황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게를 그린 것은  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행적인 

"염계의 차가운 시내, 나아가고 물러남이여(廉溪寒泉 前進後退) "와 관련이 깊다.


본디 청렴의 상징 주돈이를 그려야 하겠지만,  간략한 상징으로 나타내는 추세에 따라

 전진과 후퇴가 분명한 게의 걸음걸이로 주돈이의 행적을 대신한 것.








<신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69.0×33.0cm, 도쿄 일본민예관


급기야 단순화의 추세는 추상적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信이란 문자에는 윗부분만 최소한으로 이미화하는 데 그쳤다. 묵직한 글씨에 경쾌한 묘사의 새들이 대비를 이룬다.

왼쪽 사람 인 변의 첫 획은 청조(靑鳥)로, 오른쪽 방의 첫 획은 흰 기러기를 표현하고,

나머지 획은 행초체의 글씨로 마무리 지었다.


청조와 흰 기러기는 소식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담긴 상징이다.

청조는 중국의 여신 서왕모의 시종이자 메신저 역할을 하는 새이고,

흰 기러기 이야기는 『漢書한서』소무전(蘇武展)에 전한다.


이처럼 문자가 기호화되고 상징화되는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문자의 뜻을 대변하는 기호화된 상징을 하나만 보더라도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

둘째, 서술성 보다 장식성으로 기울면서 문자도의 상징물이 다른 장식문양처럼 단순화되었기 때문.


오늘날 문자도는 현대인들의 기호에 맞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문자가 갖고 있는 주술적 힘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변화가 없는 것이다.







<문자도병풍>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 97.5×48cm,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제주도 문자도는 기본적으로 3단 구성을 취한다.

물론 4단 구성, 2단 구성, 1단 구성도 있지만, 3단 구성이 중심이 된다.

다른 지역의 민화에도 더러 3단 구성이 있지만, 제주도 문자도만큼 유행하지는 않았다.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유교적 덕목을 나타내는 문자에, 상단과 하단은 동식물의 자연과 건물로 장식되어 있다.


충忠자를 보면, 하단에 물고기 3마리가 아가리를 벌린 채 유영하고 있다.

앞의 물고기는 크고, 뒤에 따라 오는 두 마리의 물고기는 작다. 준수한 유선형에 높지 않은 갈기와

 사각형 모양의 꼬리가 돔에 가깝다.  다만 물고기를 표현한 채색과 문양으로 도식화 되어서

확하게 구분하기 힘들지만, 돔이나 볼락의 종류일 가능성이 높다.


제悌 자의 하단에는 참게 3마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들 게 역시 왼쪽에는 큰 참게 한 마리, 오른쪽에는 작은 참게 두 마리를 배치했다.


병풍의 상단 혹은 하단에는 새가 그려졌다. 모두 제주에서 볼 수 있는 철새와 텃새다.

청둥오리, 두루미, 왜가리는 제주도의 철새이고, 큰부리까마귀, 꿩, 오리는 제주의 텃새다.

수꿩은 암꿩 앞에서 과장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자도병> <치자도>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치자도耻子圖>를 보면,

 획의 양 끝 부분을 머리초 단청의 휘로 장식하고 바탕은 비백서(飛白書)로 질감을 표현했다.

비백뿐만 아니라 물결무늬, 삿무늬, 집선문(集線文)등 비백과 유사한 문양으로 질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제주도 문자도가 육지의 비백서 계통의 문자도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비백서란 문자를 먹으로 검게 쓰는 것이 아니라 비로 쓸듯이 붓끝이 잘게 갈라져

바탕이 희끗희끗 드러나게 표현하는 글씨체로써, 필세(筆勢)가 비동(飛動)한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후한(後漢)의 서예가 채옹(蔡邕132~192)이 홍도문(鴻都門)을 보수할 때, 미장이가 하얀색으로

빗질하듯 칠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창안했다고 한다. 문자 획의 끝은 물고기나 새의 모양을 형상화했다. 

이처럼 제주도 민화가들은 육지의 기법을 활용하여 제주식 문자를 재창출한 것이다.








<복록수희>

판화에 채색, 중국 우호


문자도의 내부를 비백으로 처리한 방식은 중국 상하이 부근인 우호의 문자도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우호의 복록수희(福祿壽喜)에서는 글자 안에 평행선을 빽빽하게 그어서 장식했다.

제주도 문자도 양식은 우호나 타오화의 양식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3단 가운데 상단과 하단에 등장하는 도상이 제주도의 자연이란 사실이다.

나무는 전나무, 감나무, 구지뽕나무 등이고 꽃은 모란, 나팔꽃, 연꽃, 쑥부쟁이, 찔레, 백일홍 등이 그려진다.

제주도 문자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은 주로 넝쿨이 긴 수생식물이다.

물고기로는 돔, 볼락, 참게 등이 나타난다. 육지의 문자도처럼 잉어가 나타나기도 한다.









<문자도병>

예자도,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그런데 문제는, '효제충신예의염치'의 8자 가운데

 대개 중앙에 위치한 신(信)자와 예(禮)자의 상단에 그려진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이층 혹은 단층의 기와집이다.

 과연 이 건물은 무엇일까? 의문을 푸는데 결정적인 단서는 건물 하단에 그려진 소반이다.

 제주에서는 이 소반을 '고팡상'이라 부른다. 제사에 사용된다. 소반 위에 술과 같은 제물이 차려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사당일 가능성이 높다. 제주에는 사당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단지 유교문자도에 그려진 사당 그림으로 사당을 대신 했던 것.

장식용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사나 잔치 때 이 병풍을 사용했던 것이다.








<감모여재도>

종이에 채색, 121.7×87.7cm, 교토 고려미술관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란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그의 모습이 나타나는 그림이라는 뜻으로 사당도(祠堂圖)라고도 부른다.







<문자도>

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새, 각 96.5×43.5cm, 동아대학교 박물관


이 병풍이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다면, 꽃, 새, 나무, 물고기 등 제주도의 자연은 제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문자도>의 치 자를 보면 사각형의 구획 안에 사주단자가 적혀있다.

 아마 신랑 댁에서 신부 댁으로 함을 보낼 때

, 문자도 병풍에 사주단자를 적어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의문당 편액>

1846년, 나무, 제주 추사기념관


1846년 11월 추사가 대정향교 유생들을 위해 쓴 것.

바로 이 편액 테두리 문양이 제주도 문자도에 자주 등장한다. 편액의 테두리 무늬를 보면,

상단과 좌우 단에 작은 돌기의 윤곽으로 그려지 동심원문이 둘러싸여 있고, 하단에는 연화문과 국화문이 있으며,

현판 네 구석에는 나비가 배치되어 있다. 또 이들 문양 사이에는 주위에 작은 점으로 둘려 있는 원문양이 보인다.

이 가운데 연속된 구름모양 동심반원문과 원을 작은 점으로 둘러싼 꽃문양은 제주도 문자도병풍에 종종 등장하는 문양이다.








<문자도병풍>

6첩중 1첩, 19세기 종이에 채색, 88.5×46.8cm, 제주 고광민


상단과 하단에 나무와 구름 형상의 단청 문양이 번갈아 배치되어 있고,

나무의 마디와 글자의 중간 중간에작은 점으로 둘러싸인 꽃문양이 보인다.

여기서 구름모양의 동심반원문은 단청의 휘이고, 원을 작은 점으로 둘러싼 꽃문양은 석류 그림의 껍질에 나타나는 문양이다.

<의문당 편액>의 테두리 문양이 바로 이 <문자도병> 문양의 양식과 상통한다. <의문당 편액>이 1846년 작이므로

 제주 개인소장 <문자도병>도 19세기 중엽에 제작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흥미로운 사실은 제주도 문양의 액자 속에 육지의 서예가인 김정희의 글씨를 담은 형식은

 제주도 문양의 틀 속에서 육지의 문자도를 받아들인 것과 상통한 점이다.

이들 모두에서  우리는 육지문화를 받아들이는 제주인들의 자주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문자도>

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도쿄 일본민예관


그렇다면 제주도 문자도의 특색인 3단 구성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주식으로 바꾸어 수용한 제주인들의 태도와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단의 문자가 육지에서 수용한 유교문화라면, 상, 하단의 문양은 제주의 자연과 생활과 관련된 도상이다.

마치 제주의 액자 속에 유교의 문자를 끼워놓은 형국으로 제주인들의 주체적인 수용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제주도의 신당들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제주목사 이형상이 미신을 타파하겠다고 신당을 모두 불태운 것이다.

토속신앙에 대한 대대적인 종교탄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사건은 제주인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이형상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토속신앙은 부활한다.

은 섬에 신당이 3백여 곳이 넘고, 신들의 수는 1만 8천을 헤아린다고 하니 가히 '신의 섬'임에 틀림없겠다.

이러한 섬에 문자도가 성행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 흥미로울 뿐이다.








<건포배은> 『탐라순력도』

김남길 그림, 보물 제652-6호, 종이에 채색, 55×35cm, 제주시청,국립제주박물관 위탁보관


 유자들이 제주목 관아에 모여 북향례를 올리고 있다,

제주에서 토속신앙을 뿌리 뽑고 유교를 전파하려는 결의를 다지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1702년에 제작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중 <건포배은(巾浦排恩)>에 생생하게 실려 있다.


문자도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교문화는 문자도와 더불어 생활 깊숙이, 그것고 전국 구석구석에 파고들었다. 그런데 신의 섬 제주도에서도

육지에 못지않게 문자도병풍의 열풍이 일었다는 사실은 조선초기부터 국가에서 계획했던

유교문화의 생활화가 드디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목표가 완성된 순간,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내왓당 무신도> <상사위相思位>

19세기, 종이에 채색, 620×380cm, 제주대학교 박물관


그로테스크한 형상에 거치 감각에서 육지의 무화와 다른 강한 인상을 준다.

제주도 특유의 강렬한 생명력이 화폭 속에 분출되어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이러한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혀 반대의 단순하고 짜임새 있는 이미지도 공존한다.

강렬한 생명력과 단순한 조형의 조화, 이는 제주도 미술이 갖고 있는 양면성이다.








<문자도병풍>

종이에 채색, 각 106×37cm, 서울 개인소장


제주도식의 생동감과 세련미를 함께 맛볼 수 있다.

한폭 한폭의 그림에서 내뿜는 생동감은 강렬함을 넘어선다. 제주도만의 질박함과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제주도 문자도의 전형인 3단 구성을 지키고 있다.

이러한 틀이 없었더라면 이 그림은 너른 초원을 달리는 조랑말처럼 어디론가 치달렸을지도 모른다.


문자를 규정하는 곡선은 자유롭고, 그 바탕을 채운 비백의 표현은 거칠다. 넝쿨은 구불거리며 왼쪽으로 뻗치고,

한 쌍의 학은 곡예와 같은 과장된 몸짓을 하며, 물고기들은 평화롭게 물속을 노닐고 있다.

자유롭고 활달한 표현에서 우리는 강렬한 생동감을 만끽하게 된다.








<용마도>

종이에 채색, 62.0×31.8cm, 일본 세리자와케이스미술관


새가 하늘을 난 뒤에 생긴 제트기 구름같은 흔적으로 만든 것이 초서로  쓴 용(龍)자다.

첫머리에는 새가 날고 있고, 끝에서는 새가 막대기 위에 깃들어져 있다.

 이처럼 마른 붓질로 붓 자국이 희끗희끗 보이게 쓴 글자를 '비백서'라 한다. 용자 모양으로 된 구름의 우리 안에

같혀 있는 것이 말(馬)이다. '용마(龍馬)'라는 글자를 구름 같은 초서의 용자와 사실적인 말 그림으로

멋지게 꾸며냈으니, 이 얼마나 기발한 아이어어인가!


그런데 말을 자세히 보면 조랑말이다. 제주에서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그림은 세련되지 않고 매우 질박하다. 가장 큰 기교는 졸박한 것과 같다는 노자의 말처럼,

서투른듯 하지만 못 그린 차원의 것이 아니라 '기교를 넘어선 큰 기교'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자도병풍>

종이에 채색, 86.0×39.0cm, 서울 개인소장


단순한 구조 속에서 정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상단과 하단은 사각형의 도안으로 정연함을 나타낸 가운데 제자의 문자는 자유로운 곡선을 뽐내고 있다.

문자의 곡선미와 상하단의 직선미가 대조를 이룬다. 문자 안에는 비나 물결같은 무늬가 글자와 상 하단에 비풀어져

질감의 촉각적인 효과까지 자아내고 있다.








<문자도>

19세기말~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개인소장


빨강, 노랑, 파랑, 녹색의 원색으로 이루어진 색채 구성에서 제주도의 생동감과 화려함을 경험할 수 있다.

색채뿐만 아니라 구성적인 표현에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사당은 입면도의 형식으로 그려져 있고, 양 옆의 꽃병도 아슬아슬한 위치와 상관없이 장식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혀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는 가는 선으로 표현했지만 화려한 채색을 배풀어서 매우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에 반하여 하단의 信자는 비교적 자유로운 곡선 위주에 비대칭으로 묘사하여 위의 사당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주도 문자도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남쪽 섬지방의 감각이 두드러진 그림이다.

육지의 회화와 달리 강렬한 생명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그래픽적인 아름다움으로 현대적인 미술을

방불케 한다. 이러한 매력 때문에 국내외로 흩어져 나가 정작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 되어 버렸다.

이제 제주도 민화는 제주도인의 생활도구가 아니라 타 지역 사람의 미감에 부응하는 예술품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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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에 걸쳐 찬찬히 곱씹어 가며 옮겨 본 우리 민화의 세계.

저자의 권유처럼 '상상의 정원'을 이내 부족한 깜냥을 동원하여 맘껏 유영해 보았다


부쩍 안목이 트인 것만 같은 시건방이 감히 스멀스멀 기어나오려는 느낌. 

오로지 시대를 앞서 간 학인들의 노력과 고뇌어린 공부 결과물에 힘입은 바 크다 해야겠다.


우리 문화의 여명을 열어 간 이들의 피땀어린 열정과 수고로움에 고마움을 전하며...






Ave Maria(Franz Peter Schubert) - Lanfranco Per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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