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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사우(祠 宇)기행

 

2016. 6. 8

 

 (介川精舍)

 

 

 

 

 

 

 

 

 

 

 

 

 

 

 

<연려실 기술>과 <국조보감>에 나오는 정운룡과 장성현감 이계에 관한 내용.

 진사 정운룡은 장성 사람인데  고을에서 행실이 착하며 이름이 있었다.

이때 현감 이계가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가르쳤는데 운룡을 초빙하여 선생으로 삼았다.

 

 

 

 

 

(霞谷) 정운룡(鄭雲龍 1542~1593)은 1542년 1월 27일에 장성군 북일면 사동(社洞)에서 출생.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외삼촌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1526~1598)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 박광옥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고 나주목사를 한 광주의 선비)

정운룡은 18세인 1560년 무렵에 두 번이나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의 회시(會試)에는 나가지 않았다.

 까닭인즉 “벼슬을 한다는 것은 본 마음을 잃고 몸도 망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


후로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통유(通儒)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사숙했다.

학행을 인정받아 선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했으나 학문이 부족하다며 사양했다.

 

 

 

 

 

 

하곡은 1581년 파주에 사는 서인의 영수 우계 성혼(1535~1598)을 찾아  경치 좋은곳에 서실을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때의 사실을 우계 성혼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하곡이 장성, 정읍 두 고을 사이 노령산에 승지를 얻었다. 시냇물을 따라 산길로 10리 쯤 들어가면 청태 낀 암벽이

깎아 세운 듯 하고 수석이 청류하다. 3리(1,5키로)를 채 못가서 말을 세워놓고 도보로 그곳에 이르면 북, 동, 남쪽이

모두 다 깊은 낭떠러지가 벽과 같이 서 있고, 서쪽으로 석문 石門이 있다. 동쪽 절벽 위에서는 큰 개울이 흘러내려

30질(100M)이나 되는 폭포가 있고 북쪽 절벽에는 저절로 된 돌계단이 있어 동쪽의 절벽으로 오를 수 있다. 동북쪽

암벽은 한 바위로 되어 있고 그 아래 한 돌이 평평하게 깔려 있어 수백명이 앉을 수가 있으며,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 옥처럼 빛이 나니 손으로 물장구를 치며 즐길 만하다. 작은 암자가 북벽 아래 있어 양지쪽으로 면을 했으니

상쾌하고 동쪽으로 폭포수가 보이도다. 칠팔 십 보 앞에 시냇물이 고요하고 깊숙한 암벽 허공 아래로 하얀 물보라를

날리며 떨어지는 기이한 절경을 다 기술할 수 없고 곧은 낭떠러지에 푸른 벽은 황홀하기가 한 폭의 그림 속 같으며

 송창(松槍 소나무 숲)이 하늘을 메워 인적이 드물더라. 그러나 사면의 벽이 그리 높지 않아 추운 겨울에도 암자 앞에

쌓인 눈이 먼저 녹는다.이 암자가 하곡서실이고 시내를 몽계(濛溪)라 하니 이는 다 하곡(霞谷)이 이름 한 바이다.

본래 하곡이 살고 있는 개계촌(介溪村 현 오정리)과는 이십 여리 된다고 한다.』

 

 

 

 

 

 

 신사년(1581) 8월 5일자 '성혼일기'에


 『몽계폭포가 있는 곳은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하곡동 계곡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정운룡의 호 하곡(霞谷)은 바로 위 '하곡'에서 따온 것으로 봐야 할 듯.

하곡은 사암 박순, 우계 성혼,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1536~1593) 등과 친교를 맺었다.

특히 송강 정철과는 매우 친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고봉 기대승의 문인이었다.

 하곡은 송강에게 술을 삼가라고 조언할 정도였고 송강은 하곡을 외우(畏友)로 대했다고 한다.

 

 

 

 

 

 

문묘 18현 중 한 사람인 중봉 조헌(1544~1592)도 정운룡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1586년 10월,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은 선조에게 올린 붕당의 시비를 논한 상소문에서 이의건(李義健)

· 이희삼(李希參) · 변사정(邊士貞) · 정운룡(鄭雲龍)과 같이 공론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 중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선조수정실록 1586년 10월 1일)


46세 (1587) 때 효자로 이름난 절효공(節孝公) 서릉의 뛰어난 효행과 학덕을 추모하여

 장성군 서삼면에 모암서원을 세우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하곡은 절효공 서릉의 외손이었다.
장성현감 이계를 비롯, 지방유림과 향민들이 많은 지원을 받기도 했다. 사암 박순에게서 비명을 받아

고읍(古邑) 동정(東亭)에 정려비를 세우기도 했다.

 

 

 

 

 

 

 

 

 

 

 

 

  

 

 

 

  

 

 

 

 

개천정사 기둥에 걸린 주련

 

 

 

 

 

 

 

 

 

하곡이 황룡강 상류 개천(介川) 근처에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니 박순이 와서 칭찬하기를

 “운림(雲林) 속에 초가집 짓고 고요히 앉아, 학문을 연구하니 그 멋을 아는 이 누구일까?

그대만이 홀로 즐김을 경탄하노라“

또한 장성현감 이계의 아들인 월사 이정구 그리고 임진왜란 의병장 제봉 고경명 등도 찾아와 시를 남겼다.

 

<개천정사 중건기>에 나오는 하곡 정운룡의 시 한 편.

 

皓月盈天地(호월영천지)

밝게 빛나는 달은 천지에 가득한데
人間夜未央(인간야미앙)

인간의 밤은 아직도 중간이네.
起看松竹影(기간송죽영)

일어나서 송죽의 그림자를 바라보니
蒼翠滿池塘(창취만지당)

푸르고 푸른 빛이 연못에 가득하네.

 

 

 

 

 

 

문이 잠겨있는 내부에는 하곡초당기, 개천정사 중건기, 정운룡의 시, 제봉 고경명 ․ 월사 이정구의 7언 율시,

사암 박순, 오봉 김제민, 경호 조집, 명래 조정재, 장성현감 이의록, 정읍군수 이양신의 시가 걸려 있다고.

  그 중 사암 박순(1523~1589)의 詩 한 편.

風塵多少好男兒 (풍진다소호남아)

이 풍진 세상에 흔하지 않은 호남아


誰免勞心逐物移 (수면노심축물이)

괴로운 심정 벗어나 사물의 깊은 뜻 찾으러 가는 이 누구던가.


杳杳獨尋山路去 (묘묘독심산로거 )

아득히 먼 산길을 홀로 찾아가 보았더니


萬株松下一茅茨 (만주송하일모자)

빽빽한 소나무 아래 띠집이 하나 있네.

 

 

 

절효공 서능 정려비각(節孝公 徐稜 旌閭碑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62호(장성군 북일면 박산리 작동 마을)

 

절효공 서능 선생은 이 고장 장성땅에 학문의 기풍을 세웠으며 유교적 덕목과 생활관습을 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훈인「거가십훈」을 남기기도 했다

 

 

 

 

 

 

거가십훈(居家十訓)

 

 

 

 

1. 扶稙三綱(부직삼강) : 삼강을 바로 세울 것

  

.

2. 惇敍五倫(돈서오륜) : 오륜을 돈독하게 하여 질서를 세울 것

 

.

3. 寬以御下(관이어하) :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할 것

 

.

4. 禮以事上(예이사상) : 예로써 윗사람을 섬길 것

 

.

5. 臨喪致哀(임상치애) : 초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픔을 다할 것

 

.

6. 當祭致敬(당제치경) : 제사 때는 공경을 다할 것

 

 

 

7. 持心以公(지심이공) : 마음가짐을 공정하게 할 것

  

.

8. 處事以義(처사이의) : 일을 처리할때는 올바르게 할 것

 

.

9. 敎子以正(교자이정) : 자식은 바르게 교육시킬 것

 

 

10. 待人以恕(대인이서) : 남을 대할 때는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것

 

 

 

 

 

이 비는 당시 호남의 종유(宗儒)로서 명성이 높던 사암 박 순(1523-1589)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1537-1582)이 글씨를 썼다. 그 뒤 1669년 (현종 10) 변휴 등 12人이 발기하여 비각 건립을 시작,

1694년 (숙종20)에 완결시켰으며 이때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편액을 썼다고. 1824년(순조 24)에 김장환 등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3년 서택환 등의 주도로 중건된 것인데 지방문화재 162호로 지정.

 

- 비명 : 高麗侍中 節孝先生 徐公碑銘 (고려시중 절효선생 서공비명)

- 건립년 : 1578년 (선조 11)
- 규 모 : 총 고 266cm (고 136cm) 폭 62cm, 후 53cm
연화태석 : 고 60cm, 폭 178cm, 두께 150cm


 孝者人道之大經自隆古以來見於孔子刪正之書以爲法者兩人在書曰 君陳在詩曰 張仲降及後世鳴呼歁矣今有人焉一國之人皆稱之爲孝子則固一國之善士若 鰲城徐公殆其人歟 公諱稜 字大方 弱冠擢大科仕 高麗安孝王之朝 官至侍中 天性至孝 解官歸家專心奉母是猶安仁賦閒居之意也 母發項疽迎醫視之醫曰 若不得生蛙不可治公曰 當此沍寒豈得生蛙母疾殆不可爲己號泣不己醫曰 雖無生蛙可姑合藥而 試之遂煞藥于樹下忽有物從 樹上墮鼎中視之乃生蛙也 醫警曰 子之誠孝格天天卽賜之母疾必瘳於是更爲劑合貼患處立愈事間旋閭 迄今數百載猶不廢見之者莫不咨嗟感涕知事親之必盡誠其激立民志裨補風敎亦 如何哉鳴呼上天之載 本無聲臭之可求玆心能一則感應如響至於斡造化而回天機吾於 節孝公見之公著居家十訓實羽翼乎 呂氏鄕約之書其所學之正又如此然國史所傳只記其孝而不及於 學豈非韜眞悔光惟務自厚而流俗不知之故歟公十五世孫曰 荃服義思孝無替家風懼 歲月滋久德音或湮願斲堅石假辭紀美建諸 舊閭之上以圖不朽於無窮屬余銘之余旣慕 徐公之德且嘉荃之眷懇不以鄙絀辭遂爲之 銘曰
於休先生 盡孝承親 非性之揉 實出愈眞 母疾無藥 號天而泣 霜雪旣降 坏戶咸蟄 有誠必感 天貺斯申 錦襖皤腹 妙劑通神 壽康而悅 慈顔復春 玄造冥冥 孰識其機 秉心無二 天亦不違 懿乎其純 卓乎所履 故里不改 山崔水瀰 今聞永振 吁 嗟曷己
萬曆 六年 五月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使兼領經筵事 朴淳 撰
從仕郞 靖陵參奉 白光勳 書

 

 

 

                 호남오산 남문창의비(湖南鰲山 南門倡義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장성군 북이면)

 

 

 

 

1차 남문창의는 1592년 8월 24일 김경수()를 맹주로 하여 김홍우()·기효간()·이수일()

등이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일어났다.

순창현감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아 직산읍()에서 적을 무찔렀다.고창에서는 좌랑 김홍우를

중심으로 두 아우 김광우, 김덕우와 박안동, 서홍도, 조여일 138명의 의사와 군량미 59석, 문수사의

승려 처한을 비롯하여 16명의 승군이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집결하였다. 무장에서 김성진, 김기수, 김란,

김경우, 김국서 등 190여 명이 군량미 68석을 모아 거의에 참여하였고, 흥덕에서 서연을 중심으로

40명이 군량미 20석을 모으고 연기사의 승려 자혜를 비롯한 17명의 승군이 참여하여 고창 지역에서는

 458명의 의사와 173석의 군량미, 마태() 21석, 말 11필, 소 5두를 모아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임하였다.

의병소 맹진()의 편제는 맹주 김경수, 의병장 김제민, 부사 기효간, 참모 김홍우, 도유사 서연이

임명되었다. 장성현 남문창의 주축 인사 77명 가운데 14명이 고창 출신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는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현감 이귀는 관군 40명을 선발하고 읍병()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여 2차 남문창의를 일으켰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홍우는 김광우·김덕우와 함께 의병 100명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명나라 장군 해생()접반사가 되어 경기도 소사에서 왜병을 크게 무찔렀다.

나라에서 왜군에 저항하여 창의한 김홍우, 김광우 등에게 선무원종공신()을

제수하였고, 남문창의 주역 72위는 지금도 오산 창의사에서 매년 향사를 올리고 있다.

장성현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장성현감 이귀, 전 좌랑 김경수·기효간, 좌랑 김홍우 등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802년(순조 2) 호남의 유림이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에

장성 남문 창의비를 건립하였다.  장성 남문 창의비석에 새겨진 77명 가운데는 승려 9명과

노복 1명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순조 2년(1802) 호남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세운 비로,

판서 홍양호가 비문을 짓고, 황승원이 글씨를 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죽림사 홍살문

 

 

 

 

 

 

 

 

 

 

 

 

 

 

 

 

 

 

 

 

 

 

 

 

 

 

 

 

 

 

 

 

 

 

 

 

 

 

 

 

 

 

 

 

 

 

 


『문정공서술첩()』은 5책으로 1책[]은 이시수() 등 17인, 2책[]은 김조순() 등

10인, 3책[]은 홍석주() 등 16인, 4책[]은 정동유() 등 30인, 5책[]은 조용진() 등

7인으로 모두 70인의 문정공에 대한 문장작품이다. 문정공은 이수의 시호이다.
『현동첩()』 4책은 정동유의 서간 16장 등 99장 합첩, 『현방첩()』은 순천부사 정동원() 등

 7인의 서간 15장, 『회동서첩()』은 태인현감 정완용() 등 10인의 서간 29장, 『동현첩()』은

 정석원()의 서간 23장, 『풍고외서첩()』은 김조순 등 7인의 서간 24장, 『영백서첩()』은

경상감사 윤광안() 등 5인의 서간 21장, 『밀암서첩()』은 정우용의 서간 18장,

『종애서첩()』은 윤정현() 등 2인의 서간 21장, 『진신서첩()』 9책 등이며,

25책에 나타난 인물은 모두 183인이다.
그리고 1804년(순조 4)의 133명의 계원으로 부조묘 보수, 강당 건립, 서원을 창설하여 청액할 것을 목적으로 한

『종계안』,부조묘 건립, 족보와 『문정공실기』 간행 때의 지출명세인 『하기초출기()』, 1802년내각활자로

간행된 『문정공실기』, 부조묘 건축시의 기록인 『외손구청물재기()』, 문정공의 부인 풍양조씨

()로부터 이기찬의 처가 서원곽씨(西)까지 직계만 정리한 『외가보()』, 『사유당유고』

등의 문적이 있다. 그리고 고문서는 1783년의 명문·수표·의송·원정·통문·서장 등

18세기 후반∼19세기의 것으로 57점이며, 전답매매·산송()·서원관련 내용 등이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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