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예품
경주 감은사 동 삼층석탑 출토 사리기
감은사 동 · 서 삼층석탑 중 서탑에서는 1959년 채체 복원할 때 3층 몸돌 위쪽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1996년 해체 복원 과정에서 역시 3층 몸돌 위쪽의 사리공舍利孔에서 똑같은 세트의 사리장엄구
가 발견되었다. 특히 보존 상태가 양호한 동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완벽하게 복원되어 더없이 장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감은사 동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네 면에 사천왕상 조각을 붙인 사각형 사리함 안에 보장형寶帳形
사리기舍利器를 따로 모시고 그 가운데에 수정사리병을 봉안 하였다.
좌) 경주 감은사 서 삼층석탑 사리함, 통일신라, 높이 31cm, 보물366-2호, 국립박물관 소장
우) 경주 감은사 서 삼층석탑 사리기, 통일신라, 높이 202.3cm, 보물 366-1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좌) 경주 감은사 동 삼층석탑 사리함, 통일신라, 높이 30.2cm, 보물 135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경주 감은사 동 삼층석탑 사리기, 통일신라, 높이 18.8cm, 보물 135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통일신라, 사리기 높이 14.2cm, 보물 325호,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송림사탑 사리장엄구는 감은사탑과 같은 보장형 사리기이다. 송림사 오층전탑은 1959년 해체 수리할 때
2층, 4층, 5층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는 탑을 중수할 때마다 별도로 사리장치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곡옥, 대롱옥, 금관장식 등 시대가 올라가는 것도 있고 고려 상감청자 사리함도 섞여 나왔으며,
거북 모양의 뚜껑이 있는 석함과 그 안에 아름답고 화려한 보장형 사리기가 2층 몸돌 적심석積心石 속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기는 높이 14.2센티미터의 소품이지만 전혀 작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입체적인 구조이다.
여러 장의 금판을 잇대어 만든 네모난 판에 낱장의 복련 꽃잎들을 못으로 고정해 기단부로 삼았으며, 그
위로 난간을 두른 네 개의 기둥이 이중의 보개를 떠받치도록 했다. 사리기 안에는 초록빛 투명한 유리잔 속에
초록빛 유리사리병을 봉안했다. 찬란한 금빛과 투명한 초록빛의 환상적인 조화는 통일신라의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취미를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우리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사리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 사리장엄구, 통일신라, 사리함 높이 18cm, 국보 126호, 불국사박물관 소장
불국사 석가탑에서는 2층 몸돌 위에 파여 있는 네모난 사리공 안에서 높이 18센티미터의 사리함이 1966년 10월
수리 보수 중에 발견되었다. 받침대 위에 보상넝쿨무늬가 투각으로 새겨진 네몬잔 금동 상자로 방추형의 뚜껑이
덮여 있다. 받침대의 안상 조각, 사리함이 투각 무늬, 뚜껑의 연꽃 드림, 꼭지를 마무리한 연꽃 형상 모두가 조용
하고 고고한 기품을 풍기고 있다. 화려한 인상을 주는 감은사탑 사리함과는 달리 단아한 멋이 있어, 석가탑이
보여준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는 검이불루儉而不陋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사리함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보자기에 싸인 한 뭉치의 문서
달걀 모양의 은사리함이 들어 있었고, 이 은사리함 속에는 초록빛 유리사리병, 향나무로 깎은 목이 긴 병,
은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합이 함께 들어 있어 아주 정연한 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곡옥, 수정
구슬, 청동거울 등이 들어 있어 부장품을 함께 봉안하던 신라의 전통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음도 알수 있다.
여기에서 나온 문서를 해독한 결과 석가탑을 고려시대에 한 차례 중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사리장엄구 중에 고려시대 유물이 있지는 않은지를 다시 검토해야겠지만, 사리함과 달걀 모양의
은사리함이 통일신라 금속공예의 뛰어난 기술과 세련된 디자인을 보여준다는 사실에는 아무 이론이 없다.
좌) 구미 도리사 세존사리탑 사리함, 통일신라, 높이 17cm, 국보 208호, 직지성보박물관 소장
우)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함 판, 통일신라 863년 무렵, 높이 14.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일신라의 석탑에서는 이 밖에도 특색 있는 사리장엄구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구미 도리사桃李寺 세존사리탑 사리함>은 육각형 전각 모양이며,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함>은
금동판 4개로 짜 맞추었는데 각 면에 약사여래(동쪽), 아미타여래(서쪽), 비로자나불(북쪽)이
사방불 개념으로 조각되었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통일신라, 높이 8.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함>은 금동제 사각함으로 사방에 사천왕이 조각되었고
그 안에 금동 소탑이 들어 있었다.
금동긴손잡이향로, 통일신라, 높이 8.8cm, 길이 42cm, 리움미술관 소장
향로는 사리장엄구와 함께 불교 공예의 필수품이자 꽃이다.
향로는 계속 사용되기 때문에 손상되면 새것으로 교체될 수밖에 없어 전세품傳世品으로 전하는 것은 없고
출토품으로 <익산 미륵사 출토 금동향로>, <안압지 출토 납석제사자장식향로뚜껑>,
<창녕 출토 금동긴손잡이향로> 들이 몇 점 전하고 있다.
익산 미륵사 출토 금동향로, 통일신라, 높이 30cm, 보물 1753호,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소장
<미륵사 금동향로>는 16년간의 미륵사터 발굴작업을 끝내고 난 뒤 관람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 정비 작업을 하던 중인 2000년, 중금당中金堂 뒤편 회랑 기단석 옆에서 발견되었다.
출토된 장소가 절의 건물 안이 아니라 사람이 다닌는 길목인 데다 향로 다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거꾸로 놓여 있어 무슨 급박한 상황에서 묻어둔 것으로 생각된다.
향로의 무게는 7킬로그램으로 향로의 다리가 특이하게도 네 개다.
향로의 몸체는 입술이 넓게 달린 둥근 화로 모양으로 짐승 발 모양의 다리 네 개가 연결된 자리에는
사자의 얼굴이 장식되었고 다리 사이에는고리를 물고 있는귀면鬼面이 넷 달려 있다.
사자의 얼굴에는 볼륨감 있는 눈, 위쪽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 둥근 코, 날카로운 이빨 등이
아주 실감나게 표현되었고 귀면도 강한 이미지를 준다.이에 반해 뚜껑은 조각 없이
여러 겹의 동심원을 그리는 원반 모양으로 매끄러운 질감을 그대로 살려내고 가운데에 4개의
새털구름무늬를 투각했으며 꼭지 바로 아래에 8판 연꽃잎을 새겨 향 연기가 나오는 구멍으로 삼았다.
그리고 연꽃 봉오리 꼭지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향로의 제작 시기는 하대신라 또는 고려 초로 보는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 있다.
하대신라로 보는 견해는 주변의 출토 유물 중 856년 명문이 새겨진 도편이 있고
염거화상탑에이와 비슷한 향로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전체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 특유의 섬세함이 있기보다는
기형이 튼실하고 조각에 육중한 무게감이 있어 고려 초 유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좌) 청동금은입사새무늬항아리, 통일신라, 높이 4.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청동금은입사봉황무늬세발항아리, 통일신라,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통일신라의 금속공예는 청동기에서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생활용기로 도기와 함께 청동으로 만든 그릇들이 널리 사용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대부분 도기와 비슷한 형태의 뚜껑 있는 합과 크고 작은 종지들인데
기벽이 얇고 단단하여 주조 기술이 상당해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기형도 아주 세련되었다.
청동에 장식을 가하는 방법으로는 입사入絲기법, 평탈平脫기법, 나전螺鈿기법이 있다.
입사기법은 청동 표면에 음각으로 그림을 새겨 그 얕은 홈 안을 가는 금실이나 은실로 메우는 방법이다.
이를 금입사, 은입사라 한다. 평탈기법은 얇은 금판이나 은판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낸 다음 옻칠로
부착시키는 기법이고, 나전기법은 전복이나 조개껍질로 무늬를 만들고 이를 옻칠로 붙이는 기법이다.
통일신라의 금속공예품 중에는 각각의 기법을 보여주는 명품들이 한두 점씩 전하고 있다.
<청동금은입사새무늬항아리>는
금입사 · 은입사 기법이 동시에 구사된 아주 귀엽고 앙증맞은 청동항아리이다.
어깨 위에는 넝쿨무늬 띠를 둘렀고 몸체에는 무성한 나뭇잎으로 가득 채운 다음 나뭇가지에 다정히
앉아 있는 새와 나무 아래로 헤엄치고 있는 한 쌍의 원앙을 금실과 은실로 새겨 넣었다.
무늬의 구성이 아주 현대적이고 금과 은의 흔연한 조화로 더없이 고귀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와 같은 무늬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이와 똑같은 기법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작은 항아리가 국립전주박물관에 전하는데
다만 세 발이 달리고 무늬의 내용이 나뭇잎 속에서 봉황이 날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 귀여운 두 항아리는 대개 통일신라 유물로 생각되고 있지만 고려 초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좌) 금은평탈보상넝쿨무늬거울, 통일신라, 지름 18.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나전꽃동물무늬청동거울, 통일신라, 지름 18.6cm, 국보 140호, 리움미술관 소장
<금은평탈보상넝쿨무늬거울>은 얇은 금판과 은판을 마치 종이꽃 만들 듯이 오려내어 장식한 평탈거울이다.
아름다운 보상넝쿨무늬를 여섯 곳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금판을 넓적하게 오려 사슴, 학 등 귀여운
짐승들을 장식했다. 무늬 일부가 떨어져 아가기도 했지만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눈[雪]의
육각형 구조처럼 구성이 정밀하고 금판, 은판을 오려낸 기법이 섬세하다.
이와 비슷한 평탈거울이 일본의 쇼소인[正倉院]에 전하는데
통일신라에서 일본으로 보낸 선물로 생각된다.
나전청동거울, 일본 쇼소인 소장
<나전꽃동물무늬청동거울>은 무늬 구성이 대단히 화려하다.
가운데 꼭지 주위에 자개를 구슬을 꿰매듯 연결시켜 연주무늬[連珠紋]로 돌리고 약간 바깥쪽으로
타원형의 자줏빛 꽃잎을 이중으로 둘러 중앙부로 삼았으며, 바깥쪽에 크고 작은 꽃송이와 작은 새, 사자
등을 밀집시켜 배치하였다. 꽃무늬들이 기하학적 대칭이 아니라 회화적이고 사이사이
붉은 호박과 푸른 터키석을 박아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본래 나전은 당나라에서 창안한 기법이며 일찍이 당나라 나전공예품이 통일신라에 전해졌다.
《삼국사기》 성덕왕 32년(733) 조에는 "당나라 황제(현종)가 흰 앵무새 한 쌍, 자주색 비단에 수놓은 상의,
금은으로 만든 세공기물, 금은 보전寶鈿을 보내왔는데 그 공예품들이 너무 뛰어나 보는 사람은 눈이 부시고
듣는 사람은 마음이 놀랐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보전'이 나전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이 나전거울을 당나라에서 보내온 유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당나라의 청동거울 중에 나전기법이 들어간 것은 많아도 이처럼 꽃무늬를 빼곡히 채운
유물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오히려 이와 비슷한 나전거울이 일본 쇼소인에 9점 전한다.
아직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힘들지만 공예 솜씨와 당시 대외 교류를 감안할 때
통일신라에서 보내준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쇼소인 소장 나전거울에 쓰인 재료를 분석한 결과 호박은 미얀마, 녹색 보석은 페르시아, 터키석은
아프가니스탄이나 티베트 산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통일신라는 이런 재료들을
아라비아 상인과의 교역을 통하여 들여왔다는 얘기다.
금동수정장식촛대, 통일신라, 높이 36.8cm, 밑지름 21.5cm, 국보 174호, 리움미술관 소장
고대사회에서 조명은 기본적으로 기름을 태우는 등이었다.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 응고된 기름에 심지를 박아 태우는 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보았듯이
등은 종지 모양의 등잔에 기름을 넣어 불을 밝혔고, 초는 촛대 위에 꽂아 놓고 사용했다.
초의 발명은 조명 기구의 획기적인 발전을 의미하는데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아직은 알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다운 <금동수정장식촛대>가 쌍으로 전하고 있다.
촛대는 받침대, 촛대 기둥, 초꽂이 등 3단으로 구성되는데 후대의 촛대와 달리 대단히 화려하고
듬직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6판 꽃잎과 겹꽃봉오리를 기본 모티브로 하고 있다.
받침대는 2중, 3중 구조로 안정감을 주고 적당한 높이의 촛대 기둥은 손잡이 역할을 겸하며
그 위에 원통형의 초꽂이를 얹었다. 촛대 전체를 금으로 도금하였고 48개의 자수정을 상감해 넣었다.
필시 궁중이나 사찰에서 사용되었던 고급 공예품임에 틀림없다. 화려한 구성과 알맞은 비례 감각,
섬세한 장식 등에서 궁중 유물에서 보이는 품위와 권위가 느껴진다. 이런 촛대는 당시 꽤 많이
제작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현재 전하는 것은 이 외에 개인 소장품 한 쌍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금동초심지가위, 통일신라, 경주 안압지 출토,
길이 25.5cm, 보물 1844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다 탄 초 심지를 자르는 금동가위 하나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되었다.
가윗날의 테두리에 턱을 두어 심지를 떨어트리지 않고 잘라낼 수 있는 구조이다.
넝쿨무늬 손잡이의 곡선 모양이 멋스럽다. 실제로 사용해보아도 손가락이
편하게 걸리고 절단할 때 맞부딪치는 이가 있어 멈추어지는 등 무척 기능적이다.
가위 몸체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 있다. 이와 똑같은 초심지가위가
일본 쇼소인에 전하는데 이 역시 통일신라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상원사 동종, 통일신라 725년, 높이167cm, 입지름 91cm, 국보 36호
한국종의 선행 양식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유물로는 익산 미륵사터에서 출토된 높이
14센티미터의 금동풍탁風鐸과 경주 감은사터에서 출토된 높이 28센티미터의 풍탁이 있다.
석탑에 달렸던 것으로 생각되는 미륵사 출토 금동풍탁에는 한국종의 특징인 종유와
당좌 무늬가 새겨져 있어 한국종이 백제종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한다.
감은사 출토 풍탁은 종유와 연화당좌가 더욱 분명하여 신라종의 원형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이를 소형 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형태가 둥글지 않고 모가 나 있어 풍탁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한국종 특유의 양식이 삼국시대부터 독창적으로 개발된 것임을 뒷받침해준다.
<상원사上院寺 동종>은 몸체에 장식된 조각이 아주 정교하고 역동적이다.
용뉴의 용은 큰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있어 마치 이 무거운 종을 입으로 물어 나르는 듯 보이고
뒷다리는 천판을 힘껏 누르고 있다 유곽의 종유는 젖꼭지처럼 동글게 돌출되어 있다.
연꽃과 넝쿨무늬로 구성된 연화당좌의 조각은 화려하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그것이 만개한 모습이라면 이 당좌는 만개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천판에는 모두 70자의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 있는데 주조 연대와
주조에 참여한 스님, 기부자 이름이 적혀 있다.
동종의 몸체 앞뒷면에는 비파와 공후를 연주하는 한 쌍의 주악천인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새겨졌다.
마치 스카이다이빙을 하듯 빠른 속도로 내려오다가 앞으로 솟구치는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얼굴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면서 뒷다리를 옆으로 비튼 모습으로 강한 동세가 살아 있다. 주악천인의 맵시
있게 묶어 올린 머리, 잘록한 허리와 날씬한 몸매, 균형 잡힌 인체 비례, 달라붙은 옷에 드러나는
볼륨감 있는 다리, 하늘로 퍼져 오르는 환상적인 천의자락의 표현 등은 당대 조각을 대표하는 솜씨다.
<상원사 동종>은 본래 안동의 어느 사찰에 있던 것을 안동 읍성의 문루에 달아 놓고 사용하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옮겨왔다고 알려져 있다. 안동의 옛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세조가 문수동자의 도움으로 피부병이 낫자 감사하는 뜻으로 발원한 상원사에 예종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 종을 옮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 통일신라 771년, 높이 375cm, 입지름 227cm, 두께 11~25cm,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은 <상원사 동종>과 똑같은 한국종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 크기가 높이 약 12척으로 <상원사 동종>의 2배가 넘는 대종이다.
<성덕대왕신종>의 형체는 더없이 장중하면서 고고한 품위를 보여준다.
돋을새김한 조각들은 청동 조각인 만큼 석굴암의 그것보다 더 정교하다.
향로를 받들고 공양하는 비천의 자태와 꽃구금과 함께 휘날리는 천의자락이 매우 부드럽고
우아하게 표현되었다. <상원사 동종>이 강한 동세를 자랑한다면 여기에는 원숙한 아름다움이 있다.
종유는 돌출된 돌기가 아니라 정교하게 돋을새김되었다. 상대, 하대, 연화당좌, 유곽, 종유의 연꽃과
넝쿨무늬의 새김도 우아하다. 그리고 종의 아랫부분인 종구가 여덟 모로 엷게 각지면서 맵시있게 마무리되었다.
<성덕대왕신종>에는 총 1037자의 명문이 비천상 양옆 두 곳에 나누어 돋을새김되어 있다.
'한림랑翰林郞 김필중金弼重이 왕명을 받들어 짓다'로 시작하는 이 명문에는 종의 제작 시기, 제작 동기
범종이 갖는 의미 등을 모두 밝히고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 9명의 이름과 관직, 주종 기술자 5명의
직책과 이름을 밝혀 놓았다. 명문은 앞머리에서 범종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 · · · ·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神鐘을 달아 진리의 원음圓音을 듣게 하셨다.
즉, 종소리는 진리의 원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옮기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으로
옮기면 불상이 되듯이 부처님의 목소리를 옮겨 놓은 것이라는 말씀. 그런 지극한 정성으로 종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은 이어 성덕왕의 치적을 칭송하였다.
성덕대왕의 덕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었으며 · · · · · 항상 충직하고 어진 사람을 발탁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고, 예禮와 악樂을 숭상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하였다. 들에서는
농부들이 천하의 대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에는 사치한 것이 전혀 없었다.
풍속과 민심은 금과 옥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문학과 기술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치세 기간 동안 한 번도 전란으로 백성을 놀라게 하거나 시끄럽게 한 적이 없는 태평성대
였다는 이야기다. 효자인 경덕왕이 어머니와 부왕을 여의고서 추모의 정이 더하여 황동 12만 근을 희사해
대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아들 혜공왕이 부왕의 유언에 따라
종 기술자에게 설계하여 본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마침내 신종이 완성되니 그 모양은 "산처럼 우뚝하고 소리는 용이 읊조리는 것과 같아
위로는 하늘에 이르고 아래로는 지옥에까지 통하여 보는 사람은 신기神奇를 칭송하고 종소리를
듣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고 했다. 종이 완성된 날까는 771년 12월 14일이라고 했다.
성덕대왕신종의 음통과 천판
이어 이 일에 참여한 9명의 직함과 이름을 모두 기록하였는데, 감독관은 대각관 김옹과 각간 김양상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가 책임자였다는 것인데 김양상은 훗날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이다.
주종 기술자 5명은 모두 박씨로 그중 책임자는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 박종일이었다.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은 봉덕사奉德寺에 봉안되었다.
그러다 경주 북천이 홍수로 넘쳐 봉덕사가 매몰되자 절터에서 뒹굴던 종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세조 6년(1460) 경주부윤인 김담이 영묘사 옆에 달아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중종 원년(1506)에 경주부윤인 예춘년이 경주 남문 밖 봉황대(높이 22미터의 고분)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와 성문을 열고 닫을 때 그리고 군사의 징집을 알릴 때 종을 쳤다고 한다.
이후 1915년에는 경주 관아 자리로 옮겨졌고, 그곳에 국립경주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박물관에서
관리하였으며,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이전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 범종의 최고 걸작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와 소리를 지닌 종으로, 무수한 미술사가와 공학자들이
상찬하며 그 구조의 신비를 밝히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다.
<성덕대왕신종>에서 풀리지 않는 문젠즌 종의 천판에 달린 음통과 종의 바닥에 움푹 파인 울림통의
기능이다. 음통은 한국종만의 특징으로 중국종이나 일본종에는 없다. 천판 위에 솟아 있는 음통은
뚫린 상태로 내부와 통해 있고 아래쪽은 지름 8.2센티미터, 위쪽 지름 14.8센티미터, 밖으로
노출된 길이는 63.3센티미터로 나팔 모양이다.
울림통은 현재 옛 모습 그대로를 전하는 예가 없어 확실한 형태를 모른 채 국립경주박물관 구관에
걸려 있을 때의 형태에 따라 종구 아래에 웅덩이 모양으로 파 놓았는데 이것이 종소리에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참조: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