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과일 깎는 소년>
1592~93, 캔버스에 유채, 63×53cm, 런던, 로열 컬렉션 소장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1593~95, 캔버스에 유채, 70×67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카라바조가 로마에 온 초창기에 사귀었다는 친구 마리오 민니티로 추정된다.
또 다른 명작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의 모델이기도한데 미소년의 외모가 매혹적이다.
뛰어난 정물 묘사와 테네브리즘의 독창적 스타일을 볼 수 있다.
※
Tenebrism
17세기의 화파로서,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명암대조에 의한 극적인 표현, 특히 야경을 특색으로 한다.
이탈리아 어의 테네브라(tenebra, 어둠)를 어원으로 한다. 이 파에 속하는 화가를 테네브로시(tenebrosi[이])라고 함.
1600년대 초에 로마, 나폴리에 퍼지고 이어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에 파급되었다. 대표화가로는
만프레디, 칼라치오로, 혼트호르스트, 피테르 판 랄, 조르주 드 라 투르, 호세 데 리베라 등이 있고,
벨라스케스와 귀드 레니도 일시적으로 그 영향하에 있었으며 렘브란트 역시 이 영향하에 있었다고 본다.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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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바쿠스>
1593~94, 캔버스에 유채, 67×53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바쿠스는 포도주의 신으로 탐욕과 쾌락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가 말라리아 혹은 흑사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와
그린 자화상이라고 한다. 얼굴의 색도 어둡고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바쿠스와는 많이 다르다.
아래는 카라바조가 몇 년 뒤 또 한 번 바쿠스를 그린 것으로 위의 작품과는 다르게
본래 신의 모습처럼 풍요로운 모습이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1593~94, 캔버스에 유채, 65.8×52.3cm, 피렌체, 롱기 컬렉션 소장
고통의 순간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유리 화병에 반사된 빛을 비롯, 어깨가 드러난 모습과
손가락, 도마뱀, 장미 등은 에로티시즘적으로 해석된다는 평.
<카드놀이 사기꾼들>
1594~95, 캔버스에 유채, 94,2×130.9cm, 포트워스, 킴벨 미술관 소장
사기가 만연한 당시 로마의 시대상을 실감 나게 그려냈다.
눈 뜨고 코 베이는 냉혹한 현실을 위트 속에 담아 낸 작품이다.
<점쟁이>
1595~97, 켄버스에 유채, 99×131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손금을 봐주는 척 하면서 반지를 빼는 여인과 그런 여인을 보느라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
두 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속임수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 상류층 귀족들의 주목과 함께 델 몬테 추기경이 <카드놀이 사기꾼들>과
<점쟁이>를 매입하면서 카라바조의 명성이 드높아지기 시작한다.
<류트 연주자>
1595~96, 캔버스에 유채, 94×119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대변인이자 예술품 관리를 담당하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몬트 추기경은
자신의 대저택으로 카라바조를 불러들여 작업실을 마련해 주고 재능을 펼칠 수 있게 한다.
이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상류 문화를 경험하면서 카라바조의 예술적 재능이 일취월장하게 된다.
<황홀경에 빠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1595~96, 캔버스에 유채, 92.5×127.8cm, 하트퍼드 워즈워스 미술관 소장
<과일 바구니>
1596~1600, 캔버스에 유채, 54.5×67.5cm,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소장
카라바조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싱싱한 과일과 시들음이 한 화폭에 실감나게 펼쳐놓았다.
삶과 죽음의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이를 바니타스화라 하는데 이는 공허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바누스(vanu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나르키소스>
1597~99, 캔버스에 유채, 113.3×94cm, 로마, 바르베리니 국립고전미술관 소장
카라바조는 신화적 주제를 매우 사실적으로 재해석하곤 했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자신을 사랑ㅎ하다가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를
극도의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고뇌와 집착을 강조하고 있다.
<메두사>
1597~98, 켄버스에 유채, 60×5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그리스 신화를 모티프로 한 이 자품은 아테나의 저주로 머리카락이 독사로 변한 메두사가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리는 장면을 순간 포착한 것으로, 메두사의 눈을 보는 순간
누구든 돌로 변했기에 페르세우스는 청동 방패를 거울로 사용해 그 속에 비친 메두사의
목을 벨 수 있었다. 아테나는 메두사의 얼굴을 자신의 방패에 장식하여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삼았다. 카라바조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이다.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1594~98, 캔버스에 유채, 122.5×98.5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소장
카라바조가 종교화의 주인공으로 여성을 그린 첫 작품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 순간을 그렸다.
목걸이 등의 장신구가 바닥에 떨어진 채 매무새가 흐트러진 가운데 진정 속죄하는 모습이다.
내면적 감정이 극도의 사실적 묘사와 빛과 어둠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작품은 매춘부를 막달라 마리아의 모델로 삼았다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아래 두 작품 <마르다와 막달라 마리아>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또한
매춘부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르다와 막달라 마리아>
1598~99, 캔버스에 유채, 100×134.5cm,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1598~99, 캔버스에 유채, 173×133cm, 마드리드, 태센 브로네미사 미술관 소장
<성 마테오의 소명>
1599~1600, 캔버스에 유채, 322×340cm,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소장
카라바조의 운명을 바꿔놓은 결정적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예수가 세금 징수원이던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는 순간이 빛과 어둠의 테네브리즘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예수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빛이 절묘함으로 마태오에게 떨어지면서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수제자이자 첫째 교황이었던 베드로를 예수 바로 앞에 배치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의도를 충실히 담아낸다. 믿음과 기도와 구원이라는 명제와 중재의 메시지 말이다.
<성 마태오의 순교>
1599~1600, 캔버스에 유채, 323×343cm,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소장
<엠마오에서의 저녁 식사.
첫 번째 버전, 1600~01, 캔버스에 유채, 141×196.2cm,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에서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제자들은 비로소
그가 부활한 예수임을 깨닫고 경탄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무겁고 거대한 주제를 매우 현신적이고 개인적인 순간으로 풀어낸 명작이다.
<성 마태오의 영감>
1602~03, 켄버스에 유채, 292×186cm,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소장
이 작품은 카라바조가 마태오와 천사를 그린 두 번째 버전으로 마태오가 천사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신성한 천사와 인간의 협력을 통해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따뜻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에게 우여곡절을 안겨준
그림이기도 하다. 두 번째 버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첫 번째 버전을
성당이 거부했던 것. 이 사안은 카라바조가 제단화를 거절당한 첫 사안으로 기록된다.
<성 마태오와 천사>
1602, 캔버스에 유채, 232×183cm
베를린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1945년 2차 세계대전 때 화재로 유실되었다.
첫 번째 버전인 <성 마태오와 천사>의 탈락 이유는 마태오가 너무 서툴고 평범한
농부처럼 그려졌다는 것과, 천사가 그의 손을 잡고 직접 글을 쓰게 돕는 모습도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신성함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이다.
<성 바울의 회심>
두 번째 버전, 1600~01, 캔버스에 유채, 230×175cm,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소장
본디 사울로 불리던 바울은 열정적인 유대교 신자였으며,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서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는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회심 사건 이후, 바울이라는 이름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된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강렬한 빛을 받아 말에서 떨어진 사울은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은 같은 주제의 두 번째 버전이다.
첫 번째 버전은 성스러움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평가에 따라 개인 소장품으로
넘어간다. 카라바조는 말과 사울의 자세를 다이내믹하게 표현해서 극적 긴장감을 주었지만,
성당 측으로부터 비종교적이고 과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카라바조는 두 번째 버전에서 구성을 크게 변경해 신성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한다.
신비롭고 영적인 회심의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사울을 훨씬 더 차분하고 묵직하게 묘사했고,
말과 주변 인물들이 차지하는 공간과 역할은 훨씬 축소한다, 대신 신성한 빛과 사울의 몸짓을
대비시켰는데, 말에서 떨어져 쓰러져 있는 연악한 사울의 모습을 통해 신 앞에 인간의 힘이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주게 된다.
신앙의 힘으로 변화된 인간의 묘사는 성당의 승인을
받았고 당당히 제단에 걸리게 된다.
<승리자 아모르>
1601~02, 캔버스에 유채, 156.5×113.3cm, 베를린 국립회화관 소장
사랑의 신 큐피트가 사랑의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라틴어 제목은 '아모르 빈킷 옴니아(Amor Vincit Omnia)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의미이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 구절인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하고 우리는 사랑에 굴복한다
(Omnia vincit amor et nos cedamus amori)'에서 유래한 말이다.
카라바조는 모델을 사용해 큐피트를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그려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너무 노골적인 묘사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화 속 인물이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발밑에 흩어진 물건들은 음악, 학문, 군사를 상징하며, 사랑이 이 모든
것보다 강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의심하는 도마>
1601~03, 캔버스에 유채, 107×146cm, 포츠담, 상수시 궁전 소장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거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거라."
이 작품은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상처를 손으로 만져봐야 예수의 부활을 믿겠다는
도마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는 '토마스'로 불리지만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도마'로 더 익숙한 인물이다.
카라바조는 이 중요한 순간을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더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묘사가 대단히 혁신적이라는 평가다. 도마의 손과 예수의
상처가 부각되어, 그 만남의 순간이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스도의 체포>
1602~03, 캔버스에 유채, 133.5×169.5cm, 더블린,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소장
카라바조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는 긴박한 순간 속에서, 그 안에 뒤섞인 배신, 폭력,
그리고 신성함이라는 감정들을 포착하고있다. 명암 대비를 극대화해서 예수의
얼굴을 밝게 비추고, 유다와 병사들은 어둠 속에 묻히도록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한쪽에 등불을 든 사내에 주목해 보자.
익숙한 얼굴 바로 카라바조이다. 그는 거기 서서 무엇을 하는 걸까?
화가들이 작품에 자화상을 넣는 것은 일종의 자의식의 표현이다.
카라바조는 직접 등불을 들고 작품 속으로 들어간 뒤,
예수를 향해 신성한 빛을 비추고 배신과 폭력을 어둠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삭의 제사>
1603, 캔버스에 유채, 104×13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아브라함아, 너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의 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이삭을 희생시키려는 찰나, 빛 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막는다. 이삭은 두려움에 떨고, 아브라함은
고뇌와 결단이 가득한 얼굴로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숨막히는 긴장감의 고조, 인간적 갈등과 신앙의 순종, 신성한 개입의 포착,
이 모든 것을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 포착, 긴장감 넘치는 극적인 구성은
그야말로 카라바조의 주특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람을 보라>
1605, 캔버스에 유채, 128×103cm , 제노아, 팔라조 비앙코 소장
<성모의 죽음>
1601~06, 캔버스에 유채, 369×24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카라바조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으로부터 이 대형 제단화를 의뢰받는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공대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너무 과하게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려냈기 때문.
부풀어 오른 배도 사망 후의 인체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모델이 익사한 매춘부 여성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파격적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죽음에 이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성모 마리아는 얼굴은 창백하고, 손과 발은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다. 성모 마리아의 주변에는 비탄에 잠긴 제자들이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카라바조는 이 장면을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연출해 더욱 현실적이고 감정적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종교적 신비로움보다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죽음과 슬픔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국 철거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성모 마리아를 너무 인간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사안은 카라바조로서는 충격적 결과였고, 이 때문에 평생 괴로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천재를 알아보는 또 다른 천재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화가 루벤스.
루벤스는 자신의 후원자에게 철거되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구입하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많은 논란이 무색하게 오늘날 종교미술의 새로운 전환점이었노라는 평가다.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두 번째 버전, 1605~06, 141×175cm,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소장
위 첫 번째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버전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제자들이 놀란 마음을 진정치 못해
격렬한 반응을 보였으나, 이 두 번째 버전에서는 훨씬 더 절제되고 고요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일곱 가지의 자비로운 행동>
1606~07, 캔버스에 유채, 390×260cm, 나폴리, 피오 몬데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성당 소장
성경에서 권하는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이 하나의 장면 안에 담겨 있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 주기,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 주기, 헐벗은 자에게 옷 입히기,
나그네를 맞아들이기, 병자를 돌보기, 죄수를 방문하기, 죽은 이를 묻어주기.
카라바조는 일곱 가지 상황을 하나의 장면으로 통합하는 것도 모자라, 각각의
인물도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특유의 강렬한 명암
대비를 통해 일곱 가지 선행을 모두 모자람 없이 강조하고 있다.
또한 언제나 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성경의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성 세바스찬>
1606, 캔버스에 유채, 170×120cm, 개인 소장
성 세바스탄은 로마 군인 출신으로, 그리스도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순교한 성인이다.
화살을 맞았어도 여전히 평온해 보이는 모습은 고통 속에서도 굳건한 영적 믿음을 보여 준다.
<명상하는 성 프란치스코>
1605~07, 캔버스에 유채, 123×92.5cm, 로마, 바르베리니 국립고전미술관 소장
어두운 배경 속에서 성인을 비추는 빛은 그의 영적 깨달음을 상징하며,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신과의 교감이 느껴진다. 청빈을 강조했던 성 프란치스코 성인.
카라바조는 그가 명상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적 헌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옆으론 십자가와 해골이 놓여 있는데, 이는 신의 영원성과 인간 삶의 유한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메시지를 담았다.
<성 아가피투스(산 젠나로)의 참수>
1606~09, 캔버스에 유채, 116.5×98cm, 팔레스트리나, 종교 예술 교구 박물관 소장
카라바조는 도피 생활 내내 메멘토 모리의 의미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죽음은 내가 저지른 죽음, 그리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 두 가지 모두일 터.
이 시기 카라바조의 작품은 어둠이 빛을 더욱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성 세례 요한의 참수>
1607~08, 캔버스에 유채, 360×520cm, 발레타, 산 조반니 대성당 소장
세례 요한이 헤로데 왕의 명령에 따라 참수당하는 순간이다.
카라바조의 종교화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감정을 전달하는 작품으로
처형 순간의 무거운 침묵과 비극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알로프 드 위냐쿠르와 시종의 초상>
1607, 캔버스에 유채, 194×13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나폴리가 아닌 몰타에서 그려진 것이다.
카라바조는 약 1년간의 안정적인 나폴리 생활을 접고 돌연 몰타로 떠난다.
이는 몰타의 기사 작위를 받아 로마의 귀족과 몰타의 기사단의 힘으로 사면을 받으려 한 것.
그는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 성 요한 기사단의 총책임자알로프 드 위냐쿠르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허나 초상화의 대가로 기사 작위를 받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어쨌던 그는
몰타의 기사가 되었고 성 요한 기사단의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의
참수 장면을 담은 제단화를 완성하게 된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하다가 몰타의 기사가 된 카라바조는 피로써 죄를 용서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지금껏 하지 않던 자신의 서명까지 남기게 된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내면을 장악한 폭력성은 피의 맹세도 무력하게 만들고 만다.
결국 그는 동료 기사와 싸움을 벌이고 또다시 감옥에 갇히고 만다.
로마에서 나폴리로 나폴리에서 몰타로 건너갔지만 결국 갇힌 신세가 된 것.
결국 그는 또다시 벽을 타고 도주하게 된다. 운명의 끝자락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
카라바조는 다시 도망자 신세로 돌아가 시칠리아의 시라쿠스, 메시나, 팔레르모를 거쳐 나폴리로
이어지는 긴 도피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몰타에서 벌인 싸움과 도주로 기사단에서도 제명되고 만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은 카라바조의 심정을 대변해 주듯 강력한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자화상을 넣은 작품도 여럿 남겼다. 초창기 바쿠스를 자신의 얼굴로 표현하던 그는
이제 잘린 목에 스스로의 얼굴을 그려 넣기 시작한다.
이 마지막 여정이 막다른 길이었음을 몰랐을까?
그는 최후의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나사로의 부활>
1608~09, 캔버스에 유채, 380×275cm, 메시나 지역박물관 소장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묘사한 작품이다.
예수의 오른 손목 위, 빛을 정면으로 주시한 한 남자가 바로 카라바조이다.
"저 빛을 따라가면 나에게도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거야!"
<이 뽑는 사람>
1608~10, 캔버스에 유채, 139×194.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생니를 뽑는 고통' 이라는 말처럼 치과 기술이 발달하기 전만 해도 발치는 매우 원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구원을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아주 원초적이 고통 앞세서도 괴로워하는 인간,
카라바조는 그런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삶의 한 단면을 그대로 담아냈다.
<세례 요한>
1610, 캔버스에 유채, 159×124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막달라 마리아의 황홀경>
1606, 캔버스에 유채, 106.5×91cm, 로마, 개인 소장
이 작품은 카라바조가 로마로 가는 배에 들고 탔던 그림으로 추정된다고.
연구자들은 이 작품과 앞서 본 <세례 요한>이 배에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본다.
사면을 위해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10, 캔버스에 유채, 125×101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학자들에 따라서는 카라바조가 골리앗의 얼굴에는 현재 자신을, 소년 다윗의 얼굴에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그려 넣었다고 보는데요, 단순한 성경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카라바조 자신의 내면적 고뇌와 용서에 대한 열망이 담긴 작품이다.
결국 카라바조는 스스로 목을 내리친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자른 칼에 심오한 문구를 적어놓는다.
'H-AS OS'
이는 라틴어 경구 '겸손은 교만을 죽인다(Humilitas Occidit Superbiam)' 를 줄인 말이라고.
벼랑 끝의 카라바조는 교만에 사로잡혀 골리앗이 된 자신을 베어버린다.
<성 우르술라의 순교>
1610, 캔버스에 유채, 154×178cm, 나폴리, 인테사 상파울로 컬렉션 소장
그리스도교 전설에 따르면 성 우르술라는 신앙을 지킨 대가로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화살을 맞고 순교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바로 그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눈 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서도 그녀는 신앙적 평온함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혹자에 따라서는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을 최후의 작품이라 하기도 한다.
도피 시절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 이 그림 또한 카라바조 개인의 고통과 고뇌가 함께 담겨 있다.
카라바조는 성 우르술라의 뒤에 자신을 등장시켜 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려냈다.
곧 다가올 마지막을 예감한 듯, 공포에 질린 그의 얼굴에는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 서려 있다.
참조 : 김선현 著 「카라바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