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이중주 I
동네 도서관에 들렀다가 <노엘라 著>《영혼의 이중주》라는 책을 뽑아들었다.
59쌍의 음악가와 화가를 결부시킨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이내 구미를 당기더라는 사실.
내친김에 공부 삼아 이 자리에 옮겨 가면서 내용을 정리해 볼 요량.
<노엘라>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나는 이제 작가, 작사가, 칼럼니스트, 박사, 연사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언젠가는 할머니로 불릴 날도 찾아올지 모르겠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내가 단 하나의 무엇이 될 수는 없듯이 나는 '무엇'이 아닌
'어떻게'로 살고자 한다. 그래서 난 오늘도 창조, 인내, 공감이 있는 예술적인 삶을 꿈꾼다.
- 책 내용 중에서-
<고흐 - 라흐마니노프>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아래쪽의 평온해 보이는 마을과는 대조적으로 달과 별과 나무가 소용돌이치듯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이 그림은 고흐가 뇌전증으로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 머물 때 그린 것이다.
아를 시절에 그린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과 함께 고흐의 '별밤' 그림을 대표한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매우 촉망받는 음악인이었음에도 스물네 살 때 발표한 <교향곡 1번 d단조, Op. 13>가 세간의
혹평을 받으면서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라흐마니노프는 니콜라이 달이라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를 작곡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흐가 정신 질환으로 입원해 있던 병실.
결국 정신병이 깊어지면서 그는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생폴드모졸요양원에 자기 발로 들어갔다.
이 시절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나무>, <꽃핀 아몬드나무> 등 후기 걸작을 잇따라 탄생 시켰다.
내 작품에 나의 심장과 영혼을 두는 동안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내게는 삶을 위한 어떠한 확신도 없다.
하지만 저 하늘의 별들은 나를 꿈꾸게 한다.
서른일곱 살에 마감한 고흐와 달리 라흐마니노프는 일흔 살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러시아혁명 당시 목숨을 걸고 러시아를 탈출한 그는
유럽을 떠돌았다. 마침내 극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와 고흐의 지독한 우울과 고독, 그리고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몸짓.
서정적이면서도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음표와 색채, 그 안에서 삶을 이겨 내고자 하는 열정적인
몸부림. 모든 감정을 가감없이 표출하고 온전히 드러내는 그들의 작품은 우리에게 말한다.
고흐가 남긴 말처럼 슬픔은 영원한 것이라고, 삶은 아픈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죽음의 섬>(1880).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은 1880년부터 1886년에 걸쳐
총 다섯 번이나 <죽음의 섬>을 그렸으며, 이 그림은 그중 두 번째 것이다.
염세주의적인 라흐마니노프는 이 그림에서 깊은 영감을 받고
교향시 <죽음의 섬, Op. 29>를 작곡했다.
<호퍼 - 바버>
오페라 <바네사>를 보고 있으면 <철길 옆의 집>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가 떠오른다.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버려진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집.
에드워드 호퍼의 <철길 옆의 집>(1925).
호퍼는 20세기 초반 대도시 중심으로의 재편, 세계대전, 경제공황 등
커다란 사회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느꼈을 상실감, 소외감, 외로움, 단절감
등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포착함으로써 풍요로운 미국 사회의 이면을 탁월하게 드러냈다.
새뮤얼 바버(1910~1981).
바버는 현대음악과는 달리 낭만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음악 언어로
현대 미국인의 삶을 표현 했으며, 1935년에는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현을 위한 아디지오>, <1악장의 교향곡>, <바네사> 등이 있다.
부그로 - 브람스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의 <비블리스>(1884).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함으로써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샘이 되어 버린,
그리스 신화 속 비블리스의 깊은 슬픔을 표현한 작품이다.
부그로는 눈물이 되어 사라진 비블리스처럼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그는 생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며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반대하며 고전주의를 고집했고,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비인간적이며 기계적이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비난을 받았다.
인상주의, 상징주의 화가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부그로가 죽은 뒤 그의 그림은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인정받지 못하며 역사의
그림자 속에 묻혀 사라졌다.
하지만 1970년대 우연한 계기로 그의 작품이 다시 발견되었고, 한치의 허점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테크닉과 사진보다도 더욱 사실적인 인물 묘사는
다시금 그를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올려놓았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마지막 주자로 평가받는 브람스는 절제된 감정과 완벽함을 추구했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은 슬프되 지나치게 비통하지 않으며, 중용과 사색의 길로 우리를 이끈다.
부그로와 마찬가지로 요하네스 브람스가 고전주의 형식을 고집했는데, 그는 음악 역사상
루틉히 판 베토벤에 이어 최고의 작곡가로 꼽힌다. 당시 유럽에는 바그너리즘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바그너가 예술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부그로가 개혁파 화가들로
부터 비난을 받은 것처럼 브람스 역시 바그너, 프란츠 리스트, 엑토르 베를리오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독일악파' 음악가들로부터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진부한 음악이라는 이유로 공격 받았다.
브람스와 부그로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전주의를 고집했다.
절제된 감정과 완벽함을 추구했던 그들.
"숙련된 기술이 없는 영감은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것이다"라는
브람스의 말에서 예술에 대한 그의 신념을 느낄 수 있다. 완벽을 추구한 그들의 작품은
우리를 더욱 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이끌며 진정한 의미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의 <보헤미안>(1890).
바이올린을 무릎에 올려놓고 맨발로 벤치에 앉아 있는 집시 소녀의
눈동자에서 가슴 싸하게 하는 슬픔이 느껴지는 듯하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Op. 45> 친필 악보.
이 곡은 브람스가 로베르트 슈만과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만든 것으로, 절제된 가운데서도
강렬하고 신비한 힘을 느끼게 한다.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는 이 곡게 대해
"장엄하고 시적인 그 음악에는 사람들을 흥분하게 하고
차분히 가라앉게도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브람스의 곡 중 '브람스의 눈물'이라 불리는 곡이 있다.
바로 현악 육중주 1번 B플렛장조, Op.18> 2악장이다.
브람스는 이 곡을 클라라의 마흔한 번째 생일에 피아니스트이던 그녀를 위해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여 선물했다고 한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아파하는
브람스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브람스가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브람스의 눈물처럼 아픔이 되어 흐른다.
칼로 - 뒤프레
어쩌면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올 비극을 어렸을 때부터 예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근육이 천천히 마비되어 죽게 되는 다중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너무도 일찍 화려했던 연주 생활을 중단해야 했다.
재클린 뒤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
대뒤 이후 음악계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뒤프레는 1966년에 지휘자 바렌보임과 결혼했다.
둘은 전 세계를 다니며 협연했고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의 숨막히는 기대와 요구에
뒤프레는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73년 마지막 연주 후 14년 동안 서서히 근육이 마비되는 고통스러운 병과 싸우다
결국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1987년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프리다 칼로의 <부러진 기둥>(1944).
칼로는 평생 두 번의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하나는 열여덟 살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면서 온몸이 부러지고 골절되고, 짓이겨지게
된 일이다. 아른 하나는 애증과 상처로 얼룩진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이다.
칼로는 고통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을 달래려는 듯 그림을 그렸다.
특히 자화상을 많이 남겼는데, 전체 작품 중 약 3분의 1이그것에 해당한다.
이 작품 역시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을 리얼하게 대변하는 대표작이다.
뒤프레와 놀라울 만큼 비슷한 삶을 살아던 화가 칼로의 그림이다.
칼로는 뒤프레와 마찬가지로 평생 고통 속에서 인생을 보낸 예술가다.
칼로의 자화상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변한다.
"나는 절대 꿈이나 악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
라고 말해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실감케 한다.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사슴>(1946).
온 몸에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담담하기만한 칼로의 얼굴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한다. 칼로의 그림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칼로 자신은
"나는 결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현실을 그릴 뿐이다"라고 했다.
르누아르 - 라벨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긴 풀들 사이로 나 있는 길>(1876~1877)
르누아르는 가난한 양복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도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만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고통은 지나간다, 아름다움은 남는다" 라는 그 자신의 말처럼
그는 죽을 때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모네, 마네, 카미유 시사로 등과 함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힌다.
하지만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어 모호함을 주는 여느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다르게 르누아르는 고전적인 작풍을 유지했다.
처음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았을 때 난 그가 평생 고통이라는 것을 몰랐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눈부신 색채, 즐거운 사람들, 햇살, 생동감 등은 라벨의 곡 <볼레로> 만큼이나 밝고 화려하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말련에 심한 관절염으로 손목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는 고통을 겪었다.
초상 속 줄리의 표정이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슬프게 했을까? 그녀의 무엇이, 기쁘고 환희에 찬
순간만을 그린다는 르누아르의 마음을 움직여 슬픔을 그리게 만들었을까?
줄리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의 딸이자 마네의 조카였다.
르누아르는 줄리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모델로 종종 그림을 그렸다.
줄리의 어린 시절이 행복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것과 달리 이 그림은
그녀가 엄마를 잃고 3년 뒤에 그린 것이다.
1895년, 줄리가 고아가 되자 르누아르는 시인 말라르메와 함께 그녀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녀를 아끼던 르누아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녀의 아픔과 외로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 그녀의 애달픈 표정에서 어린 소녀가 감당 하기에는너무나 버거웠을 슬픔이 느껴진다.
모리스 라벨(1875~1937).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라벨은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몽포르라모리에서 은둔하다시피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물의 유희>, <볼레로> 등이 있다.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 이는 르누아르뿐만 아니라 라벨의 것이기도 했다.
라벨 역시 만년에 불면증과 신경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1928년에는 이미
전두측두엽 치매에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1932년에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쳤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그 유명하고 아름다운 곡 <볼레로>를, 또 오른팔을 잃어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를 작곡했다.
이듬해인 1933년, <돈키호테의 모험>을 쓸 당시에는 악보를 적는 것조차 힘들어지자 프랑스의
작곡가 자크 이베르를 고용해 악보를 적게 할 만큼 작곡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줄리 마네의 초상>을 보고 있노라니 라벨이 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 떠오른다.
이 곡은 라벨이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레핀 - 마스카니
군대 갔다 돌아오니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를 포기한 남자는 자신만을 순애보적으로 사랑해 주는 여자와 사귄다.
그런데 옛 여인이 남자를 유혹한다. 이내 남자는 그녀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한때 연인 사이였던 커플이 이제는 불륜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바로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작곡한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줄거리다.
이 작품에서 마스카니는 인물들의 심리를 레치타티보recitativo를 통해 섬세하게 그려냈다.
레치타티보란 오페라에서 아리아와 달리 대사에 중점을 둔 형식으로, 등장 인물들의
감정 보다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 창법이다.
슬픔은 '사실'이다
이같이 뛰어난 심리 묘사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인 일리야 레핀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러시아 사실주의의 거장으로 불리는 레핀은 당시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을 작품에 투영했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사회의 비극적 단면을
담아낸 그의 작품에는 민중의 고달픈 삶과 내면 심리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4~1888)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유배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뒤
어느 날 예고 없이 고향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각 인물들의 내면이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속 남자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혁명가다.
초췌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피아노를 치던 아내인 듯한 여인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들은 반가운 표정이고 어린 딸은 경계하는 눈빛이다.
아무런 예고 없이 돌아온 자를 바라보는 각자의 표정과 대테일한 심리 묘사가 가히 압권이다.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1870~1873)
드높은 하늘을 배경으로 누더기를 걸친 인부들이 온몸으로 배를 끌고 있는 모습이
혁명 직전 러시아 민중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림 속 열한 명의 표정은 개성을 드러내며 각자가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보여 준다.
마스카니가 그의 오페라를 통해 이탈리아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그려 냈던 것처럼
레핀의 작품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절망적인 현실을 맞닥뜨린 러시아
민중의 삶을 담고 있다.
19세기 말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 간
이탈리아 서민들과 러시아 노동자들에게도,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도 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직시하고 이겨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다행히도 우리의 몫이다.
바스키아 - 버클리
장 미셀 바스키아는 낙서를 예술로 승화하며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흑인 화가이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소외당하는 세상에 그는 분노했다.
그는 '흑인 화가'가 아닌 '화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ㅗ
마약에 의지한 채 세상의 모순으로부터 도피하다가 결국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바스키아의 생애를 담은 영화 <바스키아>의 엔딩에는 <할렐루야>라는 음악이 흐른다.
"할렐루야"라는 가사로 노래하고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종교적 외침이 아니다.
사랑을 외치고 할렐루야를 외치지만 인간은 서로를 배신하고 밟고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구원을 바라는 모순적인 존재임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외침은 "깨진 할렐루야'다. 그 의미가 차갑게 부서진 찬양인 것이다.
욕망과 배신으로 채워진 찬양이기에 음악은 슬프다. 마치 바스키아가 자신이
속하지 못한 이 세상을 원망하는 듯한 곡이다.
제프 버클리(1966~1997)
미국의 싱어송라이터로, 1990년대에 등장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단 한 장의 앨범만 남기고 요절했다.
대표곡으로 레너드 코헨이 만들고 부른 것을
리메이크한 <할렐루야>가 있다.
버클리의 목소리는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동경이 뒤섞인 듯 허공에서 흐느적 거린다.
닥치는 대로 그려 대던 바스키아의 그림처럼 그의 목소리는
한숨마저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흐른다.
버클리는 클래식을 전공한 피아니스트이자 첼리스트였던 어머니 메리 귀베르와
포크 가수였던 아버지 팀 버클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제프가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졌고, 제프는 아버지를 여덟 살 때 공연장에서 단 한 번 보았다.
얼마 후 팀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스물여덟에 사망했다.
훗날 아버지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간 아들.
버클리는 2집 발매를 앞둔 어느 날 미시시피의 울프강으로 수영을 하러 갔다.
옷을 다 입은 채 강으로 들어갔던 그는 닷새 후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장 미셀 바스키아가 살았던 집.
바스키아는 이곳에서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살다가 죽었다.
바스키아와 절친했던 앤디 워홀마저 그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바스키아는 더욱 약물에 의존했고, 얼마 뒤 워홀이 사망하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는지
자신도 결국 코카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업을 할 때 예술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삶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버클리 역시 유명세로 힘들어했다. 그가 뮤지션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와
비교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와 비교당하며 살아야 했던 그는 아버지보다
나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고, 과거 카페에서 노래하던
무명 시절을 종종 그리워 했다.
바스키아 역시 자신이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88년에
베토벤의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Op. 55 '에로이카>의 제목을 따
세 개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에로이카>를 그렸다.
베로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월츠를 추는 빈 시민들.
4분의 3박자의 선율에 맞추어 두 남녀가 원을 그리듯 추는 월츠는
오스트리아의 민속 춤곡에서 시작되어 19세기 유럽 부르주아 사교계를
점령하다시피 한 것으로, 작곡가로는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가 유명하다.
당시 빈의 또 다른 유행은 오레레타였다.
그 중심에는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가 있었는데, 그는 스트라우스 2세와 일종의 경쟁
구도를 그리고 있었다. 1864년, 오펜바흐는 빈을 방문해 지휘 중이었는데, 그 때 그는 빈 기자
협회를 위한 무도회에 <석간신문>이라는 왈츠를 작곡해 주었다. 이에 신문사는 슈트라우스
2세에게 <조간신문>을 작곡해 줄 것을 의뢰했고, 이를 받아들인 슈트라우스 2세는
아침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경쾌한 월츠를 작곡했다.
장 베로의 <페 거리, 메종 파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19세기경).
베로는 19세기 화려했던 파리 사교계의 모습을 많이 그렸지만 이렇듯 도시 이면의
노동자들의 삶 또한 놓치지 않았다. 메종 파캥은 현대 사업의 선구자인 잔 파캥이
운영하던 가게로,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장 베로의 <파리의 거리>(1885년경)
베이컨 - 펜데레츠키
프랜시스 베이컨의 <디아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
연작 중(1950~1960년대). 신성한 권위와 당당한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교황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바토 - 모차르트
연주 여행을 다니는 어린 모차르트.
남다른 천재성 덕분에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유럽 각지를 돌며
수 많은 연주를 했다. 하지만 풍토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 등
연주 여행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
장 앙투안 바토의 <피에로 질>(18세기경).
무대에서 늘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는 떠돌이 광대의 숨겨진
얼굴이 깊은 애수를 자아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레퀴엠> 자필 악보(1791).
한 백작이 아내의 장례식 때 사용하기 위해 청탁함으로써 탄생한 이 곡은 모차르트의
미완성 유작이 되고 말았다. 이 곡은 제자인 프란츠 크사머 쥐스마이어에 의해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클레 - 슐러
파울 클레의 <폴리포니>(1932).
음악은 클레의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핵심 열쇠와도 같다.
클레는 음악의 리듬과 화음과 시간 개념을 미술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다성음악'을 뜻하는 폴리포니는 단지 음악적 개념만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 그 자체로 인식되었다.
군터 슐러(1925~2015).
클레가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미국의 작곡자이자 지휘자이자
호른 연주자였던 슐러는 재즈와 클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
앵그르 -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歌> 자필 악보.
<무언가>는 멘델스존이 열여섯 살 때부터 서른여섯 살 때까지 작곡한 소품집으로,
총 마흔아홉 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낭만주의 시대 서정적 성격소품의
걸작으로 꼽힌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호메로스 예찬>(1827).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인 앵그르는 외젠 들라크루아로 대변되는 낭만주의 사조에 맞서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을 추종했다.
이 작품 역시 균형과 조화를 이상으로 여기는 고전미에 대한 그의 신념을 대변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1819).
고전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 관능미가 물씬 느껴지는 이 작품은 오스만튀르크제국의 궁정 하녀를
그린 것으로, 당시 머나먼 동방에 대한 유럽인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보여 준다.
바버 - 프로코피예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 Op. 67>.
프로코피예프가 혁신적인 작풍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든 음악 동화로
소년 피터와 동물들이 놀고 있는 곳에 늑대가 나타나 오리를 잡아먹자 피터가
용감하게 늑대와 싸워 이긴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
드리트리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근현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대담하고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성을 가진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다.
아이들을 좋아하여 누구나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피터와 늑대, Op. 67> 같은 음악 동화도 작곡했다.
찰스 버튼 바버의 <끊어진 줄>(1887).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여자아이와 청중인 강아지와 고양이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마그리트 - 수리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1935).
평온한 바다가 내다보이는 그 바다를 재현한 켄버스가 놓여있는 모습을 통해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이 그림이 시사하듯 우리는 세상을
외부에 객관적으로 놓여 있는 자명한 대상으로 여기지만
실은 정신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의 <불가능에 대한 시도>(1928).
한 화가가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실재하는 여자가 아니며,
화가 역시 실재하는 화가가 아니다. 게다가 여자의 팔은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
벨기에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이들.
초현실주의는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성과 합리주의를 내세워 온 서구 문명에 대한 총체적
회의에서 출발한 사조로, 이성이 오랫동안 억압해 온 본능, 직관, 꿈,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하는 데 주력 했다.
루소 - 보로딘
앙리 루소의 <적도의 정글>(1909).
루소는 밀림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상상력으로 그것을 즐겨 그렸다.
체계적인 미술 교육과는 거리가 먼 그의 원시적이고 소박한 그림은
처음에는 아마추어적이라고 조롱받았지만 피카소의 눈에 띠면서ㅓ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이고르공>의 한 장면.
이 오페라는 음악을 취미로만 한 보로딘이 무려 18년 동안 썼지만 끝내 미완으로 남긴 작품으로
훗날 리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알렉산드로 글라주노프가 완성했다.
침략자들을 무찔러 나라를 구한 우크라이나의 통치자 이고르공의 서사를 담은 것으로
민족적 향취가 물씬 느껴진다.
로스코 - 리게티
마크 로스코91903~1907).
그 자신은 추상화가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지만 20세기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다. 커다란 사각형의 판면에 색채로만 채워진 그의 작품들은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빈 묘한 느낌을 준다.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 고동색 위의 붉은색>(1959).
사람들은 극히 단순해 보이는 로스크의 그림 앞에서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게 된다.
로스코는 자신은 어떤 형태를 표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으며 오직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 있을 뿐이라고 했다.
브램블릿 - 글레니
존 브램블릿의 <통찰 11>.
시각 장애를 가진 미국 화가 브램블릿은 마음의 눈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인지한다는 것을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이야기 한다.
존 브램블릿의 <래디언트>.
어둠에 가장 익숙할 테지만 그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세상보다도 환하게 빛난다.
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로 올라선 영국의 에벌린 글레니의 연주 모습.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존 브램블릿이 촉감으로 색을 구분하듯이 글레니는 파동으로 소리를
느낀다. 2015년,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폴라음악상을 받기도 했다.
오키프 - 메시앙
조지아 오키프의 <양귀비>(1927).
오키프는 꽃 그림만 200점 넘게 그렸을 정도로 꽃에 천착했다.
사회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 그림들은 처음에는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치부당했지만
점차 독창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올리비아 메시앙(1908~1992).
프랑스 현대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대표작으로 <튀랑갈리라 교향곡>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 <새의 카달로그> 등이 있다.
조류학자이기도 한 그는 새들에 대한 엄청난 애착을 보여 주었다.
밀레이 - 토마
존 에버렛 밀레이의 <물에 빠진 오필리아>(1851~1852)
햄릿에 등장하는 오필리아는 연인인 햄릿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서서히 미쳐가다가
물에 빠져 죽는 인물이다. 그녀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많지만 밀레이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눈먼 소녀>(1856)
폭풍우가 지나간 어느 날, 길가에 앉아 있는 한 눈먼 소녀와 그녀의 동생
을 그린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가난한 두 소녀
의 모습이 멀리 보이는 초목과 가축과 무지개와 대비를 이룬다.
카푸어 - 패르트
이탈리아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아폴론과 마르시아스>(1483)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버린 피리를 주운 마르시아스는 그 아름다운 소리에
반하게 되고, 열심히 연마하여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결국 패함으로써 그 대가로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죽고 만다. 마르시아스
의 이 초월에 대한 열망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영국 테이트모던미술관에 설치되어 있는 아니쉬 카푸어의 <마르시아스>(2002~2003)
사진은 <마르시아스> 앞에서 아르보 패르트의 <라멘타태>를 초연하는 모습이다.
인도 태생의 영국 조각가인 카푸어는 그리스 신화 속 마르시아스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고 그를 거대한 모습으로 재탄생 시켰다.
아르보 패르트(1935~)
에스토니아 작곡가인 패르트는 중세음악에 바탕을 둔 '틴티나블리'라 불리는
자신만의 기법을 통해 매우 군더더기 없고 단순하고 명상적이고 투명한 음악
세계를 보여 주었다. 마르시아스로 대변되는 인간의 아픔을 위로하려는 듯
<라멘타테>를 작곡하기도 했다.
아브라모비치 - 레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1946~)
세르비아 출신의 예술가로, 행위예술의 대모로 불린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하는, 신체의 위험에 노출된 충격적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다. 피가 묻은 1500여 개의 소뼈가 등장하는 <발칸 바로크>로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평화 시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에 결혼한 비틀스 멤버 존 레넌과 일본의 행위예술가
오노 요코는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퍼포먼스와 노래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는 여기 있다>라는 퍼포먼스에서 만난 울라이와 아브라모비치.
예술가 자신이 관객과 서로 마주 앉아 눈으로 소통하는 이 퍼포먼스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의 옛 연인인 울라이가 관객의 한 명으로서 반대편
의자에 다가와 앉았고,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던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백남준 - 슈토크하우젠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1928~2007)
독일의 작곡가로, 전자음악을 개척하여 다방면으로 실험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음악'을 제창하는 등 현대음악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비틀스, 허비 행콕, 백남준 등 많은 예술가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
서울올림픽을 기념하여 1003대의 브라운관으로 제작한 18.5미터 높이의 비디오 타워로,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과학과 예술의 조화를 꿈꾼 백남준의 이데아가 집약되어 있다.
모네 - 드뷔시
클로드 모네 <수련>(1906)
모네는 '생라자르역' 연작을 시작으로 '포플러' 연작, '루앙대성당' 연작 등 평생 연작에 몰두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수련' 연작으로 약 250편에 이른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그에 따른 대상
의 인상을 포착한 그의 작품들은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준다.
클로드 모네 <해돋이 인상>(1872).
모네가 고향 르아브르에서 내려다본 항구를 보고 느낀 인상을 담은 것으로, 파리에서 열린 첫 인상파
전시회에 선보인 작품이다. 루이 르로이라는 비평가가 이 그림을 보고 제목을 비꼰 데서 '인상주의'
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클로드 드뷔시(1862~1918).
아름다운 선율과 풍부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대표작으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 <바다> 등이 있다.
샤갈 - 차이콥스키
마르크 샤갈(좌)과 ㅂ멜라 로젠펠트.
1909년 당시 열네 살이던 벨라를 보고 첫눈에 반한 청년 샤갈은 부유한 벨라의 부모님을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그녀와 결혼했다. 벨라는 샤갈의 고향 마을인 비테프스크와 함께
그의 작푸 세계를 받쳐 주는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마르크 샤갈의 <에펠탑의 신랑 신부>(1938).
파리와 고향 마을이 뒤섞여 있는 장면을 배경으로 수탉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한 쌍의 부부가 꿈속에서 본 동화처럼 환상적이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1892)의 한 장면.
<호두까기 인형>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더불어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음악 중 하나다.
차이콥스키를 오랫동안 후원했던 폰 메크 여인의 갑작스러운 후원 중단 이후 작곡한 것으로
현실의 고통과는 완벽하게 대비될 만큼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마르크 샤갈의 <과거에 대한 경의>(1944)
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절망한 샤갈은 한동안 제대로 먹지도,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다.
다시 붓을 들면서 그는 벨라와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이 작품을 그렸다.
실레 - 베르크
에곤 실레의 <껴안은 두 여자>(1915).
모든 금기와 제약을 부수고 인간 본능의 가장 깊숙한 곳을 더듬으며 표현한
육체는 그만큼 도발적이고 파격적이면서도 불안하고 슬픈 아우라를 발산한다.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룰루>의 한 장면
베르크가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 기초해 만든 미완성 오페라로, 팜파탈 룰루를 사랑하는
게슈비츠 백작 부인과, 남자들을 파멸에 이르게 한 대가로 매춘부로 전락하여 끝내는
살해되고 마는 줄루의 운명을 그린다.
에곤 실레의 <이중 자화상>(1915).
서로 상반되는 얼굴을 담은 이 작품에서 실레는 불안과 번민으로 뒤척이는
자신의 분열된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들라크루아 - 베를리오즈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Op, 14> 악보.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헤리어트 스미드슨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짝사랑의 비통함을 담고 있는 이 곡은
연인을 상징하는 고정악상이 각 악장에 변주되어 나타나는 등 낭만주의의 음악 어법을 혁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를리오즈는 1827년 파리의 극장에서 공연된 <햄릿>을 보러 갔다가 오펠리아 역으로
출연한 스미드슨을 보고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갖은 상처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1833년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둘은 결혼 10여 년 만에 별거에 들어갔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적들에게 함락당하게 되자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죽이라고 명하고 그 자신도 자살한
고대 바빌로니아 왕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격렬한 색채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모로 - 바그너
귀스타브 모로의 <헤롯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1876).
모로는 유럽의 신화나 성서 이야기를 바탕으로 낭만주의적 색채와 상징성이 풍부한
요소 등을 조합한 양식을 발전시킨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살로메 이야기는
모로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로 그는 유화로 열아홉 점, 수채화로 여섯 점
드로잉으로 150점 이상을 남겼다.
로젤리오 데 에구스퀴자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910).
중세 때부터 전해져 오는 기사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주의 가슴 아픈 연애담을 그 사랑과 죽음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후대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여기에는 바그너와 마틸데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투영되어 있다.
귀스타브 모로의 <에우리디케 무덤 위의 오르페우스>)1891).
모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고
비탄에 잠긴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그렸다.
클림트 - 시마노프스키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1907~1908).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인 나나에를 보고 한눈에 반한 제우스가
헤라의 질투를 피하기 위해 황금비로 변신하여 다나에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 사랑을 나ㅏ누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스타바트 마테르> 악보.
밤의 쾌락과 디오니소스적인도취의 음악을 보여 주었던
시마노프스키가 만년에 폴란드의 민족음악적 요소를
담아 만든 종교곡으로, '농민의 진혼가'로 불린다.
터너 - 슈만
윌리엄 터너의 <눈보라>(1842).
"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호가 하위치항을 떠나던 밤의 폭풍우 속에 있었다" 라는 긴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처럼 보는 이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윌리엄 터너91775~1851).
영국의 대표적 화가로,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을 특유의 강렬한 빛의 대비와
흐릿한 경계, 환상적인 색감 등으로 표현했다. 대상 자체 보다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주목한 그의 작풍은 후대 프랑스 인상주의의
탄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슈만과 클라라.
역경을 뚫고 힘겹게 결혼에 이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밤의 폭풍우를 뚫고 나아가는 터너의 그림속 돛배를 보는 듯하다.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슈만하우스.
스승과 4년간 이어진 소송 끝에 1840년 마침내 스승의 딸인 클라라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 슈만은 1844년까지 이곳에서 신접살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