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VARD MUNCH <2편>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 著 · 홍주연 易
<양성의 자화상>, 1925 - 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49×103cm
건강이 회복된 뭉크는 1909년 5월 다시 노르웨이에 자리 잡았다.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게 된 그는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1908년 12월 28일 야페 닐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뭉크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그래, 고통과 기쁨이 뒤섞여 있던 알코올의 세월은 이제 끝났네.
그 이상한 세계는 이제 닫힌 거야. 나는 옛 이탈리아 화가들처럼 여성들을 천국에
남겨두기로 했어. 장미의 가시는 고통스럽기도 한 것. 나는 꽃을 즐기듯 여성들을 즐기기 시작했네.
꽃향기를 맡고 아름다운 잎을 감상하더라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실망할 일은 없지.
<코펜하겐에서의 자화상>, 1909년
캔버스에 유채, 100×110cm, 라스무스 마이어 컬렉션, 노르웨이 베르겐
<양성의 자화상>이 포함된 '인간의 산' 밑그림 옆에 서 있는 뭉크, 1926년경
<사랑의 파도 위에서>, 1896년, 석판화, 30×41.9cm
<시가를 든 자화상>, 1908 - 09년, 석판화, 56×45cm
左) <자화상>, 1908 - 09년, 드로잉지에 연필, 29.9×23.8cm
右) <담배를 문 자화상>, 1908 - 09년, 드로잉지에 연필, 23.8×29.9cm
左) <벌거벗고 팔을 뒤로 꼰 남자>, 1915년, 마분지에 색연필, 60×60cm
右上) <자화상>, 1912 - 15년경, 종이에 목탄, 60×60cm
右下) <누드 토르소 자화상>을 위한 습작, 1915년경, 종이에 목탄
<자화상, 팔을 올린 누드>, 191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5×76cm
<토르발 스탕과 함께 있는 자화상>,1909년경
캔버스에 유채, 100×96.5cm
<역사>, 1911 - 16년,
스크루벤의 옥외 작업실에서 크리스텐 산드베르그와 앤스 티스의 등신대
초상화, <역사>의 밑그림과 함께 있는 뭉크, 1910년
<역사>, 1911 - 16년, 캔버스에 유채, 450×1163cm
오슬로 대학교, 노르웨이
태양>, 1911 - 16년, 캔버스에 유채, 455×780cm
오슬로 대학교, 노르웨이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는 자화상>, 1911년
캔버스에 유채, 83×69.5cm
<그늘이 진 자화상>, 1912년, 석판화, 31×2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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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자화상>, 1911년, 목판화, 55.7×34.6cm
右上) <자화상> 1911 -13년경, 종이에 색연필, 27.8×21.3cm
右中) <오른쪽에서 본 옆모습 자화상>, 1912년경, 목판화, 33.3×35.3cm
右下) <왼쪽을 보고 있는 자화상>, 1912년경, 목판화, 44×35.3cm
<자화상, 유혹자>, 1913년, 캔버스에 유채, 80×99cm
<유혹자>, 1913년, 아연판에 에칭, 24.7×49.3cm
左上) <유혹자>를 위한 습작, 1913년경, 종이에 목탄과 펜, 27×40.8cm
左中) <유혹자>를 위한 습작, 1913년경, 종이에 목탄, 34×25.6cm
左下) <유혹자>를 위한 습작, 1913년경, 종이에 목탄, 25.7×40.8cm
右) <유혹자>를 위한 습작, 1913년경, 종이에 목탄, 40.1×27cm
<붉은 사과들 아래, 정원의 남녀>, 1913 - 15년
캔버스에 유채, 109×133cm
<자화상, 죽음의 춤>, 1915년, 석판화, 50×28.5cm
<노란 배경 앞에서 가벼운 코트를 입은 자화상> 1915년경
캔버스에 유채, 190.5×114.5cm
左) <모자와 코트를 착용한 자화상>, 1915년경,캔버스에 유채 90×67.5cm
右) <붉은 넥타이를 맨 자화상>, 191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75.5cm
<베르겐에서의 자화상>, 1916년, 캔버스에 유채, 90×60cm
뭉크는 발코니 혹은 창가에 홀로 서서 아래쪽 광장의 다채로운 소란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림 거의 중앙에위치한 화가의 오른쪽 눈은
고정점이자 구도상의 초점이된다.
나를 비난하지 마. 대신 내가 삶을 살고 있지도,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슬퍼해줘.
나는 그저 고통스러운 열망을 품고 창가에 앉아 나를 둘러싼 끔직하도록
시끄럽고 낯선 삶의 소란을 지켜볼 뿐이야.
- 툴라에게 보낸 편지 초고, 1899년 5월 25일
<우리 안에 세계가 있다>, 1894년
종이에 연필, 36.3×31.4cm
<베르겐에서의 자화상>을 위한 습작, 1915년경
종이에 연필, 26.4×42.6cm
<자화상>, 1912년경, 바리타지에 목탄 인쇄, 31.9×23.9cm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화상>을 위한 습작, 1919년경
종이에 수채, 50.5×35.3cm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화상>, 1919년, 켄퍼스에 유채.
150.5×131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노르웨이
<자화상, 기관지염에 걸린 남자>, 1920년
캔버스에 유채, 100×95cm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화상>을 위한 습작, 1919년경
종이에 색분필, 12.8×17.7cm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화상>을 위한 습작, 1919년경
종이에 색분필, 17.7×12.8cm
<스페인 독감 이후의 자화상>, 1919년
캔버스에 유채, 59×73cm
뭉크는 자신이 다시 한 번 죽음으로부터 탈출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병이 얼굴에 남긴 흔적들을 관찰하고 있다.
여전히 나약한 자세에 지친 표정이지만, 얼굴빛이 되돌아왔고 시선도 다시 강렬해졌다.
쉰 다섯 살 화가의 얼굴은 이 그림에서 처음으로 늙어 보이기 시작한다.
<내적 혼란에 빠진 자화상>, 1920년
캔버스에 유채, 149×129cm
정신적 압박으로 불안해하는모습이 역력하다.
그림의 강렬한 색감과 모든 것이 안정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화가와 모델>, 1919년, 캔버스에 유채, 134×152cm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 뭉크는 '화가와 모델'이라는 회화 연작을 통해 남녀 관계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뭉크의 모델이었던 아니 피엘드부가 이 작품들의 여주인공이다.
<화가와 모델>을 위한 습작 들.
<실내복을 입는 모델>, 1920년경
종이에 목탄과 구아슈, 98.1×60.8cm
<화가와 모델을 위한 습작>, 1920 - 21년경
종이에 분필, 65×50cm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 3>, 1920 - 21년, 캔버스에 유채, 120 - 200cm
<화가와 모델, 질투 모티프>, 1920 -21년
캔버스에 유채, 85×115cm
이 연작에 나타난 의미는 결국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여자가 남자와의 친밀한 관계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반면, 남자는 여자와 가까워질수록 힘을 빼앗긴다.
남자는 여자와 거리를 둠으로써 힘을 얻지만, 여자는 남자와 떨어지면 고통을 느낀다.
따라서 뭉크의 시각에서 여자에 대한 남자의 갈망과 남자에 대한 여자의 갈망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으로만 남는다. 그러나 이전에 뭉크가 묘사한 남녀 관계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하고 편안한
화법은, 오랜 경험을 통해 그의 역할이 참여자에서 관찰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뭉크가 느꼈던 여자들과의 거리감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들은 모델들로 대체되었다.
그들과의 역할극을 수행하면서 뭉크는 현실감각을 갖고 희망과 욕망에 맞선다.
<자화상, 밤의 방랑자>, 1923 _ 24년, 캔버스에 유채, 90×68cm
左) 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2×63cm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독일, 퀼른
右) <밤의 방랑자>를 위한 습작, 1923 - 24년경, 종이에 유성 연필, 29.9×23.7cm
<별이 빛나는 밤>, 1923-24년, 캔버스에 유채, 120.5×100cm
<개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 1925 - 26년, 캔버스에 유채, 80.5×99.5cm, 개인 소장
<자화상, 보헤미안의 결혼식 1>, 1925 - 26년,
캔버스에 유채, 79.5×64.5cm
<자화상, 보헤미안의 결혼식 3>, 1925 - 26년,
캔버스에 유채, 65×79.5cm
<보헤미안의 결혼식 3>, 1925 - 26년,
캔버스에 유채, 68×90cm
<보헤미안의 결혼식 3>, 1926년경
캔버스에 유채, 72×100cm
<보헤미안의 결혼식>, 1929 - 30년, 석판화, 34×49cm
1930년 완성된 석판화 <보헤미안의 결혼식>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오른쪽 전경에 앉아 있는
뭉크의 모습은, 뒤쪽에서 벌어지는 보헤미안의 결혼식이 단지 그의 상상 속 장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그림에서 뭉크는 마침내 관찰자의 역할로 바뀌어 있다.
예전에 그렸던 그림의 모티프와 주제를 새롭게 바꿈으로써,
뭉크는 계속 자신의 작품과 삶을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팔레트를 든 자화상>, 1926년
캔버스에 유채, 90×68cm, 개인 소장
<자화상>
<에켈리의 집 벽 옆에 서 있는 자화상>, 1926년
캔버스에 유채, 91.5×72.5cm
<가벼운 코트를 입은 자화상>, 1929년
캔버스에 유채, 133.5×80cm
<오른쪽 눈을 강조한 자화상>, 1929- 32년, 캔버스에 색분필과 유채
<모자를 쓴 자화상 1>, 1927년, 석판화
<에켈리의 정원에 있는 자화상, 1940 - 42년,
캔버스에 유채, 60×80cm
<옷을 벗고 있는 자화상>, 1920 - 34년
종이에 수채와 연필, 70×86.2cm
<죽은 사람의 해골과 함께 있는 화가, 병든 눈의 시각적 투영>, 1930년
종이에 수채와 색연필, 32×50cm
<눈병에 걸린 자화상>, 1930년, 캔버스에 유채, 80×64
<해골과 함께 있는 크리스티안 슈라이너 교수>, 1928 - 32년
석판화에 채색, 90×72cm
<대구 머리가 있는 자화상>, 1940년경, 목판에 유채, 54.5×45.5cm
<창가의 자화상>, 1940년경, 캔버스에 유채, 84×108cm
<자화상>, 1940 - 42년, 캔버스에 유채, 57.5×78.5cm
<자화상,정면에서 본 얼굴>, 1940년경
종이에 펜과 검은색 잉크, 17.7×2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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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들>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 1940 - 42년, 캔버스에 유채, 149.5×120.5cm
<병든 소녀가 일어나다>, 1907 - 08년, 종이에 수채와 분필과 연필, 37×49cm
<자화상, 새벽 2시 15분>, 1940 - 44년, 종이에 구아슈, 51.5×64.5cm
화가가 죽음을 예감한 모습이다. 여든한 살의 수명을 누렸던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다음 날, 네덜란드에서 망명 중이던 독일 화가 마그스 베크만은 이렇게 썼다.
뭉크가 죽었다. 내 차례는 언제일까? 그는 꽤 오래 버텼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