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한라산 >

茶泉 2021. 5. 10. 19:34

 

윤제홍尹濟弘, <한라산도漢拏山圖>

 

윤제홍은 63세 때인 1825년에 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한라산을 올랐다.

그리고 81세 때인 1844년에 이 화첩을 만들었다. 한라산에 올랐던 감회가 여전히 생생하여

화면의 위 아래에 빼곡하게 감상을 적어놓았다. 그림 왼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무릇 산들은 모두 상봉이 있지만 이 산은 다만 사면에 봉우리들이 둘러서 있을 따름이다.

가운데는 큰 못으로 사방이 40리라고 한다.

 

 

 

 

 

 

임제林悌, 「남명소승南溟小乘」

 

 

 

2월 15일.

향불의 연기가 꼿꼿이 오른다. 맑은 해가 창문을 비추고 바람은 따스하고 새가 지저귀었다.

잔설이 다 녹아 봄물이 흘렀다. 동행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오늘의 유람은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식사를 재촉해 끝내고 행장을 단속하여 영곡靈谷 동구를 지나가는데

바위 봉우리들이 새로 씻겨 옥잠玉簪이 들쭉날쭉한 듯 보였다.

 

남쪽 기슭으로 올라갔다. 소나무 종류가 잣나무도 아니고 삼나무도 회나무도 아닌데, 미끈하게 열 지어

하나같이 일산 모양을 하고 있다. 승려는 계수桂樹라고 일러준다. 산척山尺이 그 나무를 찍어 껍질을 벗겨

희게 만들고는 돌아가는 길을 표시한다. 나는 농담으로 "너 역시 계수나무를 찍는 사람이냐?" 라고 물었다.

반 리里쯤 가니 거기는 초목이 하나도 없고 만향蔓香이 온통 언덕을 덮고 있는데, 그 잎은 측백나무와 비슷하였다.

미풍이 일어나자 기이한 향기가 옷소매에 가득 찼다. 고개를 돌려보니 산방산山房山과 송악산松岳山이

이미 발밑에 있었다. 간밤의 비가 지상의 먼지를 씻고 남쪽 바다의 음울한 기운을 걷어낸 뒤다.

오르고 또 오를수록 선경에 들어가는 멋이 들고, 한 걸음에 기관奇觀이 펼쳐졌다.

 

서성대는 즈음에 청순淸淳이 지초芝草를 두어 뿌리를 캐어 가지고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어젯밤 꿈에 어떤 사람이 영지靈芝를 그대에게 줍디다. 깨고 나서 마음에 몹시 이상히

여겼는데 지금 이걸 은근히 드리게 되니 꿈과 부합합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당나라 사람 시에 '스스로 신선 재질을 지녔으되 자신은 모르고서 10년을 길이 화지華芝(아름다운 지초)

캐려고 꿈꾸다니' 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와 같구려."

 

이때 적설이 아직 녹지 않은 곳을 만났다. 사람들 말이 "여기는 인적이 끊긴 골짜기로서 깊이가 아마 10여 길은

될 겁니다. 온 산의 눈이 바람에 몰려 모두 이곳으로 밀렸답니다. 그래서 5월이 되어도 다 녹지 않지요" 라고 한다.

나와 동행들은 오싹해서 그곳을 조심조심 건넜다. 계곡 아래 장송長松이 눈 속에 파묻혀 겨우 한 치쯤만 눈 위로

푸른빛이 보일 뿐이다.

 

산 밑바닥에서 존자암까지 30여 리 가량이요, 존자암에서 여기까지 역시 30여 리인데, 정상을 쳐다보니 아직도

평지에서 바라보는 높은 산과 같았다. 봉우리 형세가 벽처럼 서서, 바라보면 마치 솟아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열 걸음에 한 번 쉬었다. 목이 말라 견디기 어려워 아이종을 시켜

밑에서 얼음을 따오게 하여 씹으니 옥 즙을 마시는 것 같았다.

 

최정상에 당도하자 거기는 우묵 파여 못을 이루고 있다. 석등石磴(돌비탈)이 둘러싸서 주위가 7, 8리나 되어 보인다.

석등에 기대어 굽어보니 물이 유리알처럼 맑아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못가에 흰모래가 깔리고 향기로운 덩굴이

뻗어세속의 기운이라고는 한 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인간세계의 바람과 3,000리나 떨어져 있으니 난소鸞簫

(난새를 신선이 부는 퉁소) 가 들리는 성싶고 황홀히 지거芝車(신선이 타는 자하거紫河車) 가 보이는 듯하다.

그 우뚝 융기한 형상이나 바위가 쌓인 모양이 무등산과 흡사한데 높이와 크기는 배나 되는가 싶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무등산은 한라산과 형제이다" 라고 하는데 필시 이 때문일 것이다.

 

산 위의 돌은 모두 적흑색으로 물에 들어가면 둥둥 뜨니 또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눈의 시계視界로 말한다면 해와 달이 비치는 곳으로 배와 수레가 닿지 못하는 데까지 두루 미칠 수 있겠으나

안력의 한계 때문에 단지 하늘과 물 사이에 그칠 따름이다. 역시 한스러워할 노릇이다. 사람들 말이 "등반하는

사람이 여기에 당도하면 연일토록 소낙비를 만나니, 오늘처럼 청명한 날씨는 처음 본다" 고 한다. 멀리 하늘가를

바라보니 바다 위에 무슨 물체가 수레 위의 일산과 같이 둥글다. 희고 검은 것들이 점점이 열 지어 마치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알 처럼 보였다. 모두들 섬이라고 말하였으나, 청순은 "빈도는 매년 여기 올라와서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오. 남쪽 바다에는 절대로 섬이 없소. 저건 구름이오" 하고 하였다. 서로 섬이다 아니다라고

다투고 있을 즈음에 그 물체가 점차 가까워 오는데 구름이었다. 서로 돌아보며 껄껄 웃고서 하산하였다.

 

상봉에서 남쪽으로 돌아 두타사로 향하였다. 그 길가에 움푹움푹 파에 데가 많고 총죽叢竹고 갈대가 위로 덮어

말로 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15리쯤 내려가니 길이 험하고 끊어진 벼랑이 막았다. 두타사가 굽어보이는데 별로

멀리 않았다. 그러나 벼랑이 매달려서 깎아지른 듯한데다 눈이 깊게 쌓여 허리까지 빠졌으며 눈이 쌓인 아래로

개울이 숨어 흘렀다. 그곳을 생선이 꿰인 듯 한 줄로 서서 내려가는데 발이 빠지고 젖는 괴로움은 이루 다 형언

할 수 없었다. 벼랑 아래로는 큰 시내가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마침내 그 시내를 건너서 절로 들어갔다. 절은 두 

시내 사이에 있어 쌍계암이라고 부른다.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여 역시 절경이다. 인마는 길을 돌아오기 때문에

초경에야 당도 하였다. 정의旌義 고을 원님이 술 두 병을 보내왔고 밝은 달이 시내에 가득 비쳤으나,

노곤해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니 한스럽다.

 

 

신선 벗을 따라 영지를 캐어 돌아오는 길

구름 노을 자욱한 골짜기에서 돌문을 두드린다.

절집에 쇠북 소리 그치자 산이 적막한데

시내에 밝은 달이 나의羅衣를 비추누다.

 

 

 

2월 16일, 맑음.

어제는 날이 어둡고 몸도 피곤하여 두루 구경을 못하였기 때문에 특이한 경치가 있는 줄 몰랐다.

떠나면서 앞의 대臺에 나가 앉아보니 두 줄기 맑은 시내와 천 길 푸른 절벽이 십분 빼어났다.

계곡을 나오면서 걸음마다 고개를 돌리며 섭섭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두보杜甫의 "층층 절벽에는

서릿발 같은 칼날을 벌여두고, 내뿜는 샘은 구슬을 뿌리누나" 라는 시구를 읊었다.

참으로 이곳의 경관을 잘 그려낸 셈이다. 적목績木이 어우러져서 그늘을 만들어 해가 보이지 않았다.

10여 리를 가니 충암沖菴의 옛터가 있다. 백록白鹿이 한라산에 산다는데 사람에게는 띄질 않는다.

(원주: 전에 절제사節制使가 사냥할 때 한 마리가 붙잡혀서 죽었다 한다)

돌이 빼어나고 샘이 맑아서 쉬어가며 말에게 꼴 먹일 만하였다.

이곳에 이르러 마침 이곳에 와 계신 부친을 뵈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해는 어느덧 석양이었다.

 

 

 

장실丈室에서 바둑 구경 파하고

대臺에 올라서 둘러볼 즈음

골짜기 깊으니 산색은 예사롭고

바위도 늙어 물소리 기이하다.

하룻밤 묵어가니 어찌 인연 없었으랴만,

다시 찾을 기약은 두지를 못하네.

훗날 서울의 밤 꿈에

구름바다로 그리움을 붙이겠지.

 

하라산은 선계인지라

선록仙鹿이 떼지어 논다네.

털은 눈처럼 하얗고

도화문挑花文 점점히 박혔다지.

세인世人은 만나볼 수 없기에

머리 돌려 구름만 바라보네.

 

아침에는 바위 사이 지초를 먹고

저녁에는 계곡의 냇물 마시고

신선의 자하거紫河車를 끌어

한번 떠나면 삼천 년 세월.

너 어찌 자신을 돌보질 않아

사냥꾼의 손에 잡혔단 말인가.

해월海月은 겨울 산에 떠서 시름 겨운데

숲속 동무들 슬피 부르누나.

 

 

 

 

이 글은 조선 중기 문인 백호 임제(1549~1587)가 제주도를 여행하고 쓴 기행수필 「남명소승南溟少乘」

중에서 한라산을 등반한 일정을 발췌한 것이다. 남명은 남쪽 바다를 말하고, 소승은 작은 역사서,

기록물이라는 뜻이다. 2006년, 제주도가 발간한 <한라산총서>에 따르면 이 「남명소승」에 한라산

정상에 오른 최초의 기록이 들어 있다고 한다. 임제는 1578년(선조 11) 2울 12일에 한라산 정상에

오르려 했으나 일기가 불순해서 2월 14일까지 존자암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2월 15일에 날이 개었

으므로 아침 일찍 영곡을 지나 정상에 올랐고, 다음 날 2월 16일에는 쌍계암을 떠나 기묘사화 때 유배

되어 왔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충암沖암 김정金淨(1486~1521)의 유허遊墟에 들르게 된다.

위의 글은 충암 유허로 향하기까지의 부분이다.

 

임제는 28세 되던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한 후 당시 제주 목사인 부친 임진林晉에게

과거 합격의 인사를 올리려고 그해 11월 3일 고향을 출발하였다.

임제 이후로 한라산을 오른 사람으로는 1601년 선조의 특사 자격으로 제주에 갔던

김상헌金尙憲(1570~1652) 이 있다. <남사록>에 그 사실이 실려 있다.

 

詩의 천재라 일컫는 임제. 그는 실로 최고의 낭만주의적 인물이었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가던 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를 지내고 시를 읊었다는 사유로 파직당했으며

기생 한우寒雨와는 시조를 주고 받았으며, 평양 기생과의 로맨스도 엮었다.

예교禮敎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유를 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중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

 

 

 

 

 

최익현崔益鉉, 「한라산 유람기遊漢拏山記」

 

 

 

일행이 남문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개울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드디어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따라서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수십 명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방선문訪仙門 · 등영구登瀛丘' 란 여섯 자가 새겨져 있고 또

옛사람들의 제품題品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라산 10경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문의 안팎과 위아래에는 맑은 모래와 

흰 돌들이 잘 연마되어 반들반들해서 그 윤기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수단화水團花 · 철쭉꽃이 좌우에 열 지

심어져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으니, 역시 비할 데 없는 기이한 풍경이다. 한참동안 소요하면

서 돌아갈 뜻이 아주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왔다.

인가가 꽤 즐비하고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큰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바람이 고요한데 비가 올 기미가 있어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함을 지세웠다.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살펴보라고 하였더니, 어제 초저녁과 같되 그보다 더 심한 편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갔다가 후일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자가 열에 일고여덟은 되었다.

나는 억지로 홍조紅潮(술인 듯함) 한 잔을 마시고 한 모금의 국을 들이키고는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돌길이 꽤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있었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로 갈아타는 곳이었다. 여기에 이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뱇이 새어 나와 바다의 경치와 산 모양이 차례로 드러나기에 말을 이성理成에게 돌려보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서 올라가는데, 주인 윤규환은 다리가 아파서 돌아가기를 청했고, 나머지

모두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한줄기 작은 길이 나무꾼과 사냥꾼들의 내왕으로 조금의 형태는 있었지만, 험준

하고 좁아서 갈수록 더욱 위태로웠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어

청명하였다. 그러자 일행 중에 당초에 가지 말자고 하던 자들이 날이 좋다고 칭송하므로 나는 "이 산을 중도에서

멈춰 흥이 깨진 것이, 이자들이 말린데서 연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니

계곡의 물이 바위 밑에서 쏟아져 나왔다.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갔다. 평평한 돌 위에 잠시 앉아 갈증을 푼 후에 계곡

물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돌비탈길을 몇 계단 넘고 또 돌아서 남쪽으로 가니, 고목을 덮은 푸른 등나무 덩굴과

어지럽게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막아서 거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런 곳을 10여 리쯤 가다가

우연히 가느다란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해 왔으며 앞도 확 트여 멀리까지 바라볼 만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여 1리쯤 가자 우뚝 솟은 석벽이 대臺처럼 서 있는데, 뾰족하게 솟은 것이 수천 길은 되어 보였다.

이는 삼한三韓시대의 봉수烽燧 터라고 이르지만 근거될 만한 것이 없는 데다가 날이 저물고 힘도 딸릴까 염려되어

가보지 못하였다. 또 몇 보를 나아가서 가느다란 물줄기를 하나 발견하였다. 위에서 흘러내린 물의 흔적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얼음과 눈이 환하게 빛나고 뽕나무와 잡목들이 위와 옆으로 뒤덮여 있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가느라 몸의

위험이나 지대가 높은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렇게 모두 6, 7리를 나아갔다. 여기에 이르니 비로소 상봉上峯이 보이

는데 흙과 돌이 서로 섞이고 평평하거나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하고 풍후한 봉우리가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봉우에는 초목이 나지 않고 오직 푸른 이끼와 담쟁이 넝쿨만이 돌의 표면을 덮고 있어 앉아서 휴식을 취할 만

하였다. 높고 은 전망이 확 넓게 트여 정말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몰아갈 수 있을 만할 뿐 아니라

의연히 티끌 세상을 잊고 홍진(속세)에서 벗어난 듯이 들었다. 얼마후, 검은 안개가 한바탕 냅다 몰려와 주위를

깜깜하게 만들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겼지만, 이곳에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바로 9인九仞의 공이 한 삼태기에서 무너지는 꼴이 되므로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전진해

가서 북쪽 가의 오목한 곳에 당도하여 상봉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이르갑자기 중앙이 움푹 파인 구덩이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백록담이었다. 주위가 1리를 넘고 수면이 담담한데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다.

그리고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줄거나 불지 않는데, 얕은 곳은 무릎, 깊은 곳은 허리에 찼으며 맑고 깨끗하

조금의 먼지 기운도 없으니, 은연히 신선의 종자가 사는 듯하다. 사방의 산각山角들은 높고

낮음이 모두 균등하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이다.

 

석벽에 매달려 내려가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깐 휴식을 취하였다.

일행은 모두 지쳐서 남은 힘이 없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절정이었으므로 조금씩 나아가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갔다. 따라오는 자는 겨우 세 명뿐이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져서 널찍하게 트여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이지는 않았지만, 위로는 별자리를 핍박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쪽의 큰 바다를 접하였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 · 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을

끌어당기고 있다.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 조각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하는 등,

놀랍고 괴이한 것들이 천태만상이었다.

 

<맹자>에 '바다를 본 자는 여타의 물이 물로 보이지 않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 라고 하였는데

성현의 역량을 상상할 수 있겠다. 또 만일 소동파가 당시에 이 산을 먼저 보았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떠 바람을

몰고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 는 시구를 어찌 적벽에서만 읊는데 그쳤겠으랴! 그래서 회옹晦翁(주자)이 축융봉

등산 때 읊은 "낭랑하게 읊조리며 축융봉을 내려온다" 라는 시구를 외며 다시 백록담 가로 되돌아오니, 종자들이

이미 밥을 정성스럽게 지어 놓았다. 곧 밥을 나누어 주고 물도 돌렸는데 물맛이 맑고도 달다.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맛은 금장옥액金裝玉液, (신선이 먹는 선약)이 아니냐? 라고 하였다.

 

북쪽으로 1리 지점에 혈망봉이 있고 거기에 전인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다고 하는데, 해가 기울어 시간이

없으므로 가보지를 못하고 선허리에서 옆으로 걸어 동쪽으로 석벽을 넘는데 벼랑에 개미처럼 붙어서 5리쯤 내려갔다.

그리고 산의 남쪽으로부터 서쪽 밑둥으로 돌아들다가 안개 속에서 우러러보니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석벽이 마치

대나무를 쪼개고 오이를 깎은 듯이 하늘에 치솟고 있는데, 기기괴괴하고 형형색색한 것이 모두 석가여래가 가사와

장삼을 입은 모습이었다. 20리쯤 내려오니 이미 황혼이 되었다. 내가 말하기를 "듣건대 여기서 인가까지는 매우

멀다 하며 밤공기도 그리 차지 않으니 도중에 길거리에서 피곤해서 쓰러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시 노숙하여

내일 일을 홀가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일행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바위에 의지해서 나무를 걸치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후

앉아서 한잠을 자고 깨어보니 벌써 날이 새어 있었다. 밥을 먹은 후에 천천히 걸어가는데

어젯밤 이슬이 마르지 않아서 옷과 버선이 다 젖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또다시 길을 잃어 이리저리 방황하였는데 그 고달품은 구곡양장과 십구당十瞿塘

(양자강 상류 험한 협곡)을 가는 것같았으나 아래로 내려가는 형편이어서 어제에 비하면 평지나 다름이 없었다.

10리쯤 내려와서 영실에 이르니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한 괴석들이 빼곡하게 늘어서서 웅장하고

위엄스러운데, 역시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으며 그 수는 백이나 천 단위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는 바로 천불암

이라 하며, 또는 오백장군이라고도 부른다. 산의 남쪽과 비교해 보면 이곳이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산 밑 길가

에는 얕은 냇물이 나와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다만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 얕고 너무 드러나 있다.

가시덤불을 가르고 앉아서 얼마쯤 쉬다가 이윽고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서쪽 계곡의 입구를 나오니

영졸營卒들이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를 하고 저물녁에 성으로 돌아왔다.

 

 

 

조선말의 지사 면암 최익현(1833~1906)은 1873년(고종 10, 계유) 겨울에 탐라로 유배를 가서 그곳 사람들로

부터 한라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경기도 포선 출생으로 대원군을 탄핵하여 제주도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 유람기는 면암의 강인한 정신 · 치밀한 관찰력 · 비판적 안목이 잘드러나 있는 긴 글로

변화와 흥취를 대화 · 명시 · 명구를 인용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최익현은 1875년(고종 12)에 사면되었다. 그후 선비 이기남의 인도로 한라산 등반에 나선 것.

기록상 한라산 등정에서 최초로 비박노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75년 2월 제주목을

출발하여 동쪽 마을인 죽성을 거쳐 탐라계곡 · 삼각봉 ·백록담 북벽으로 정상에 오른후 남벽으로

하산하다가 선작지왓의 바윗돌에서 비박을 하였다.

 

최익현은 한라산이 백두산의 맥이 뻗어가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산은 백두산을 근원으로 하여 남으로 4,000리를 달려 영암 월출산이 되고, 남으로 달려

해남의 달마산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00리를 건너 추자도가 되었고,

다시 500리를 건너서 이 산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면암은 한라산과 제주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총평하였다.

 

 

이 섬은 협소한 외딴 섬이지만 대해의 지주砥柱 이고 삼천 리 우리나라의 수구水口이며 한문扞門(방어관문) 이므로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산진해착山珍海錯(산과 바다에 나는 진귀한 음식) 중에 임금에게 진상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나며, 공경대부와 서민들의 일용에 소요되는 물건과 경내 6, 7만 호가 경작하고 채굴하는 터전을

여기에서 취해 자급자족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이택利澤과 공리功利가 백성과 나라에 크게 미치므로 금강산이나

지리산 처럼 사람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함께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 산은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어서 청고淸高하고 기운도 많이 차가우므로 지기가 견고하고 근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산을 올라간 사람이 수백년 동안에 관장官長 몇 사람에 불과하였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들의

거필巨筆로도 한 번도 그 진면목을 발휘한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자들이 신산神山이라고 칭하는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혀 왔을 뿐이고 이 산의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찌 이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면암은 을사조약에 반대,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왜군에게 체포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단식과 울화와 풍토병 등으로 반년 뒤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74세의 고령이었다.

19세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혼돈과 고뇌의 시기였다. 그들은 동아시아를 축軸으로 했던

인식 지형의 너머에 서양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성리학의 가치질서와 세계관이 헝클어진 것.

하지만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은 서구나 일제가 선전하는 만인평등과 사해동포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면암이 '위정척사론'의 신봉자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저변에는 중세 봉건왕조를 떠받드는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놓여 있다.

하지만 외세저항은 곧 수구세력이 품고 있던 민족주의의 한 발로이기도 했다.

면암의 강인한 기상은 바로 이 「한라산 유람기」에서도 한껏 느낄 수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