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주조소
돈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아마도 도시 문명만큼이나 오래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물리적 표현의 한 형태인 주화는 놀랄 만큼 새로운 것이다. 금속을 표준화된 단위로 표현한 돈은 서기전 제1천년기에 적어도 세 차례 이상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명됐다. 터기 동부의 리디아아 중앙아시아 중국에서다. 2700년 전 불과 몇 개 뿐이던 주조소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세기가 되면 지중해 연안, 서아시아, 이란의 일부, 중앙아시아 북부, 중앙아시아 동부의 오아시스 도시들, 북인도의 왕국들에 주조소사 있었고, 남인도 일부 왕국들에도 있었다. 주화 생산은 중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도 널리 퍼져 이었다. 그러나 북유럽과 스텝의 목축민 사회들(다른 측면에서는 발달한 사회들이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왕국들에서는 주화를 만들지 않았다. 주화가 만들어진 곳이라 할지라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주화를 만드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했다. 서방에서는 쇠를 두드려 만들었고 동방에서는 거푸집을 이용했다.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처음에 구멍을 뚫어 표시했다. 어떤 방법이 더 절대적인 이점을 갖지는 않았다. 주화 생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은 금속을 채굴 · 용융 · 제련하고 주조를 관리하는 일 등이 포함된다. 이에 따라 모든 주조소는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기반시설에 의존하는데,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것을 보기 어렵다. 주조소가 존재하고 유지되려면 이런 구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조소가 만들어지면 뭔가 이점이 있어야 한다.
한자와 카로슈티 문자가 쓰인 호탄의 주화
1~2세기에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왕국 호탄 왕들의 이름으로 동전이 발행되었다. 구르가, 구르가다마, 구르가모야, 이나바, ···토카, 파냐토사나 같은 왕들이다. 앞면에는 말이나 낙타 등의 동물과 함께 카로슈티 문자로 쓰인 프라크리트어 새김글이 왕 이름과 칭호를 보여주고 있다. '이티라자'는 '호탄 왕'이라는 뜻이다. '마하라자 라자티라자 이티라자'는 위대한 왕, 왕 중의 왕, 호탄 왕'이다. 뒷면에는 무게를 나타내는 한자 새김글이 있다. '육수전(六銖錢)'이나 '무게 24수 동전' 같은 식이다. 어떤 것은 사진에서 보듯 뒷면에 탐가 문양(유라시아 기마민족들이 씨족 상징을 문자 비슷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주화의 연대는 액면가 및 새김글과의 밀접한 관계를 이용해 1세기 간다라의 인도계 파르티아 왕들, 1~2세기 박트리아 · 간다라 · 카슈미르의 쿠샨 왕들 등으로 비정할 수 있다. 구르가모야왕의 주화는 때로 바그람에서 들여온, 쿠산의 첫 왕 쿠줄라 카드피세스(재위 30?~80?) 치세의 조화에 겹쳐 찍기를 한 경우도 있다.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거래에는 돈이 쓰이지 않았고, 더구나 주화가 쓰이는 일은 더 적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실크로드 지역에 있는 수비대에 국가에서 주화를 지급했지만, 중요한 지불은 거의 비단으로 했다. 그러한 '실물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심지어 국가의 권위 없이도 운용될 수 있었다. 인도 동북부에서 사용된 자패(紫貝)가 그런 경우다. 거래는 또한 현물로 이루어지거나, 신용으로 처리하거나, 개인적인 관계 안에서 돈 같은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실 과거의 장거리 교역은 돈 보다는 내재적 가치가 있는 상품에 더 의존했다. 돈이 더 널리 쓰인 곳에서는, 예컨대 중국에서 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서로 연결된 해로에서와 마찬가지로 자패 같은 실물화폐가 주화보다 더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오래된 거래 형태의 상당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사용 되고 있고, 주화라는 형태의 돈으로 완전히 대체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화는 분명히 더 흔해졌다. 서기 첫 몇 세기가 되면 대부분의 큰 나라들은 주화를 발행했다. 중국의 한(서기전 202~서기 220)과 이란의 파르티아(서기전 247~서기 224), 로마 제국(서기전 27~서기 395) 등의 도시 중심지에서는 주화가 화폐 거래의 주요 수단이 됐다. 이 주화는 아주 흔해져서 교역로를 따라 이동했으며, 때로는 잔돈으로, 때로는 선물로, 때로는 재질이 되는 금속 자체로서 쓰였다. 주화를 받은 사람들은 이를 창고에 저장하기도 했다. 5세기 스리랑카에서처럼 가끔은 외국 주화가 현지 유통에 쓰이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인도에서 수입된 로마 주화가 사용됐다. 중앙아시아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는 은화 가운데는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또한 동로마의 금화가 중국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예컨데 장식품 같은 것으로 재활용된 경우다.
타클라마칸사막 왕국들의 주화
타림분지와 몽골 스텝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주화들은 중국이 이 지역에 강력하게 힘을 뻗치고 있을 때 중국의 주화도 함께 밀려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다. 대부분은 한 왕조(서기전 202~220)의 오수전(五銖錢) 유형(또는 모방품)과 621년 처음 발행된 당 왕조(618~907)의 개원통보(開元通寶) 유형(또는 모방품)이다. 관리와 병사들에겐 급료를 지불할 필요가 있었고, 주화와 군 장비들이 함께 수송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값싼 주화를 멀리까지 수송하는 비용과 물류 관리의 문제로 인해 현지, 특히 타림분지 북부 지역엣 주화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많은 양의 '중국식 주화'가 쿠처 일대에서 만들어졌다. '중국식'이란 구리합금 주물이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기전 118년에서 서기 621년 사이에 발행된 오수전을 본떴는데, 현지에서 만들어진 주화는 |때로 글을 새겨 넣거나 자기네 지역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표시를 추가하기도 했다. 당 왕조의 주화 개원통보는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일본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유적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시기부터 현지 모방품의 발행도 많아졌다.
사자가 황소를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진 리디아 왕국의 스타테르 금화.
크로이소스(재위 서기전 560?~546?) 시대에 라디아 수도 사르디스에서 주조 되었다.
처음에 주화는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의 도구인 것처럼 보였다. 주화는 행정 비용 지불, 특히 군대의 급료 지불에 사용됐고, 이어 그런 지불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데 사용됐다. 이런 순환은 사회의 중요한 부문을 국가에 묶어놓는 구실을 할 수 있었고, 수입을 창출할 수도 있었다. 주조소에서 어떻게 원자재를 공급받았는지 또는 주화가 어떻게 유통됐는지에 대한 증거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주화가 공익적인 것으로 인식됐다면 주조소는 많이 있어야 하고,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데 적당하거나 원자재 생산지에 가까이 위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조는 대개 중앙에서 이루어졌다. 흔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곳이었다. 실용보다는 통제가 더 중요했다. 중국은 초기에 국가에서 주화 생산을 분산시키려 시도했다. 한 문제(제위 서기전 180~157) 때 사주(私鑄)를 허용하는 실험을 했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주화 공급이 서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부 위조자들은 이득을 얻기 위해 비금속(卑金屬)에 금이나 은을 입혀 가짜 금화와 은화를 만들었지만, 위조 주화의 대부분은 가치가 낮은 것들이어서 이문이 그리 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위조 주화는 국가에서 만든 것에 비해 조악했다. 위조자들은 원자재를 채굴 · 제련하는 능력이나, 만든 주화를 널리 유통시킬 능력이 없었다. 많은 경우 거푸집을 이용하는 방법에 의존했다. 심지어 금속을 두드려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독특한 도안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도구 없이도 주화를 베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조 시설은 또한 관영 주조소에 비해 흔적들이 더 잘 확인되는데, 이는 위조범들이 사용했던 도구들을 파괴하는 데 관심을 덜 기울였기 때문이다.
6세기 중반의 악숨 왕 요엘의 구리 합금 주화.
그의 이름이 그으즈어, 즉 이티오피아어로 새겨져 있다.
4세기에 자나 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악숨의 주화 뒷면에는 십자가가 그려졌다.
아프리카의 쿠샨 주화 저장소
1940년, 2세기에서 3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쿠샨 금화 105개가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 있는 고대 악숨 왕국(100~940)의 데브레다모 기독교 수도원 담장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그 주화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이탈리아 고고학자 안토니오 모르디니는 그 주화들에 대해 조금 상세하게 묘사한 예비 보고서를 발표했다. 쿠샨은 1세기에서 3세기 사이 북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고, 데브레다모에서 발견된 주화 대부분은 박트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쿠샨 동전은 널리 유통되었고, 일부는 서아시아에서도 발견됐다. 상인이 지갑에 넣고 왔다가 그저 둔 곳을 잊어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금화는 쿠샨인들에에는 비교적 새로운 혁식이었다. 데브레다모 주화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쿠샨 군주 비마 카드피세스(재위 90?~127?)의 2스타테르(고대 그리스의 하혜 단위) 금화 다섯 개인데, 이것이 처음 주조된 금화 가운데 일부일 것이다. 아마도 본래는 왕이 인심을 쓰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데브레다모에는 카니슈카 1세의 주화(위 사진) 등 역대 왕들의 주화도 있었다. 이 시기에 악숨 왕국은 도아프리카의 중요한 왕국이었다. 그곳 상인들은 인도양과 남아시아를 누비며 무역을 했다. 그러나 이곳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4세기에 들어서였고, 데브레다모는 6세기 돼서야 건설됐다. 따라서 이 주화는 아마도 본래 인도의 장식된 함에 담겨 외교적 선물로 주어졌거나, 높은 자리에 있던 여행자의 재물 창고에 들어 있다가 나중에 선물 또는 보관을 위해 수도원에 맡겨졌을 것이다. 아니면 수도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화폐 기능을 한 비단
피륙은 고대 중국에서 중요한 화폐 형태였다. 이 평견(平絹) 두루마리와 손으로 쓴 글씨가 들어 있는 평견 잔편들은 모두 중앙아시아 사막에 남아 있던 것으로, 그러한 비단이 한 왕조(서기전 202~서기 220) 동안에 통화로 사용됐음을 입증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두루마리는 타클라마칸사막의 크로라이나에서 발견돼 현재 영국국립박물관에 보관 돼 있다. 잔편들은 중국 하서주량 동|쪽의 한 망루 밑에 있던 쓰레기 더미에서 나왔고, 현재 영국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 가장자리는 두루마리의 것과 일치한다. 거기에 쓰인 내용은 이렇다. "고부(古父) 비단 1필, 임성국(任城國) 산(産), 폭 2척 2촌, 길이 40척, 무게 25량, 값 618전." 이 비단 두루마리의 가격은 600전으로 보는ㅁ 게 맞을 것이다. 600으로 해야 우수리가 없기 때문이다)3퍼센트인 18전은 흥정용으로 보인다). 길이 40척의 비단 한 필이 600전이라면 비단 1척의 값은 24전이다. 비단이 돈으로 쓰인 사실은 당대의 여러 기록들이 언급하고 있다. 여기 보인 계약서는 북송 순화(淳化) 2년 11월 12일(991년 12월 20일)자로 돼 있는데, 비단을 빚진 데 대한 대가로 여자 노예 한 명을 준다는 내용이다. 이 계약서는 현재 영국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