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김창흡 아내의 묘비명
김창흡(金昌翕,1653~1722) 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는 도타운 정이 있었던 듯.
"병술년(丙戌年1706) 10월 을유 삭 초여드레 경인일, 안동 김창흡은 삼가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죽은 아내 정주 이씨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오. 아아, 당신의 고생은 뼈에 사무쳤다고 할 만 하오.
꿈을 꾸면서도 끙끙대며 신음소리를 내고 고뇌가 쌓여 울음으로 터져 나왔으니,
땅 속에 묻히기 전까지 당신의 삶은 모두 근심의 나날이었소.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앞으로 푹 쉬라는 뜻이 아니겠소.
아아, 나의 반생은 바람에 나부끼는 쑥대 같았으니,
한 곳에 머무르기만 하면 모두 산산조각이 났소..."
정농장의 묘비명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으니,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정농장은 정약용의 넷째 아들로, 기미년(1799) 12월 초 이튿날 태어나 임술년(1802) 11월 30일에 요절했다.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하며 무덤에 묻어주는 편지 형식의 글 '농아광지(農兒壙志)'를
써 보낸다. 유배로 자식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통탄하는 대목이 가슴을 친다.
정약전의 묘비명
"차마 내 아우에게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마땅히 우이도에 나가서 기다려야지."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정약전 · 정약용 형제는 두 번의 유배를 떠나야 했다.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시 나주 율정점에서 서로 헤어졌다. 동생이 해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약전은 자신의 처음 유배지인 우이도로 다시 나간다. 약용이 한 번 더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염려해
그는 그곳에서 3년을 더 아우를 기다리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문건 부모의 묘비명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부모를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부모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 비석을 훼손할 것인가
비를 차마 깨지 못하리니 묘 또한 능멸 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세를 내려가도 화를 면할진저."
465년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고비(古碑)로 한 면은 원문으로, 다른 한 쪽은 한글로 묘비의 훼손을 금하는 내용이다.
이 묘비는 훈민정음 창제 이래 한글이 새겨진 현존 최고의 금석문으로 15세기 고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묵재(默齋)이다.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23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