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묘비명

茶泉 2020. 1. 23. 22:28

 

 

 

 

김창흡 아내의 묘비명

 

김창흡(金昌翕,1653~1722) 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는 도타운 정이 있었던 듯.

 

"병술년(丙戌年1706) 10월 을유 삭 초여드레 경인일, 안동 김창흡은 삼가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죽은 아내 정주 이씨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오. 아아, 당신의 고생은 뼈에 사무쳤다고 할 만 하오.

꿈을 꾸면서도 끙끙대며 신음소리를 내고 고뇌가 쌓여 울음으로 터져 나왔으니,

땅 속에 묻히기 전까지 당신의 삶은 모두 근심의 나날이었소.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앞으로 푹 쉬라는 뜻이 아니겠소.

아아, 나의 반생은 바람에 나부끼는 쑥대 같았으니,

한 곳에 머무르기만 하면 모두 산산조각이 났소..."

 

 

 


 

 

 

 

 정농장의 묘비명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으니,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정농장은 정약용의 넷째 아들로, 기미년(1799) 12월 초 이튿날 태어나 임술년(1802) 11월 30일에 요절했다.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퍼하며 무덤에 묻어주는 편지 형식의 글 '농아광지(農兒壙志)'를

써 보낸다. 유배로 자식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통탄하는 대목이 가슴을 친다.

 

 

 

 


 

 

 

 

정약전의 묘비명

 

"차마 내 아우에게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마땅히 우이도에 나가서 기다려야지."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정약전 · 정약용 형제는 두 번의 유배를 떠나야 했다.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시 나주 율정점에서 서로 헤어졌다. 동생이 해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약전은 자신의 처음 유배지인 우이도로 다시 나간다. 약용이 한 번 더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염려해

그는 그곳에서 3년을 더 아우를 기다리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

 

 

 

 

 

 

 

 

 

이문건 부모의 묘비명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부모를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부모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 비석을 훼손할 것인가

비를 차마 깨지 못하리니 묘 또한 능멸 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세를 내려가도 화를 면할진저."

 

465년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고비(古碑)로 한 면은 원문으로, 다른 한 쪽은 한글로 묘비의 훼손을 금하는 내용이다.

이 묘비는 훈민정음 창제 이래 한글이 새겨진 현존 최고의 금석문으로 15세기 고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묵재(默齋)이다.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2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와 시문에 힘썼는데, 특히 주역(周易)에 천착했다.

그의 시문은 당대의 사림인 성수침 · 이황 · 조식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지함의 묘비명

 

"세상에서는 토정을 잘 알지 못하고 단지 그 외견만을 보고 고인일사(高人逸士)라고 하지만

그 재간, 경륜, 덕량, 행실은 능히 세상을 구할 만한 대인물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기실 이지함은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를

실학적 차원에 접목시키려 애쓴 인물로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잘 소개되고 있다.

 

 

 

 

 


 

 

 

 

노긍의 묘비명

 

"문장의 길이 열리고도 우적의 한계를 넘지 못하더니 노한원에 이르러서야 거침없이 그 울타리를

허물었네. 사람들 둘러서서 바라보건대 마치 닭들이 물소를 바라보고 놀라는 듯하네.

논의가 오래면 필히 뜻이 정해지리니 의미를 새기는 사람은 이 비석에서 뜻을 찾으리.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리나라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실학자 이가환이 노긍(盧兢, 1738~1790)을 두고 쓴 묘비명의 한 구절이다.

높은 식견과 포부를 품고도 남의 집 사랑채의 식객으로 궁핍 속에 일생을 마친 인물로, 과거시험 답안지를 대필하여

귀양을 가야 했던 그는 양반사회를 조소하기 위해 대필을 했다고 한다. 한문소설 『화사(花史)』가 저서로 남아 있다.

 

 

 

 

 

 

 

 

최북의 묘비명

 

"아아, 몸은 비록 얼어 죽었어도

이름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리로다."

 

최북(崔北, 1712~1786)은 우리나 최초의 전업화가로 詩에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김홍도 · 이인문 · 김득신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성호 이익과 각별했다는데,

동가식 서가숙하다 결국, 눈 오는 밤 성곽 구석에서 동사하고 만다.

 

 

 

 

 

 

 

 


 

 

 

 

 

남효온의 묘비명

 

땅 속 개미들은 입에 들어오고,

파리와 모기는 살을 물어뜯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호는 최락당(最樂堂) ·추강(秋江).

 김종직의 문하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을 복위시키려고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갑자사화 때는 소릉 복위와 김종직 문하라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단정할 순 없지만 그의 묘비명은 부관참시를 뜻하는 듯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최영의 묘비명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했구나

삼척동자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한 조각 붉은 마음 응당히 죽지 않아

천추에 태산같이 우뚝하리라.

 

고려의 명장이자 고려 제32대 임금인 우왕의 장인이다. 요동 정벌의 꿈이 이성계로 인해 좌절되고

목숨마저 잃게 된다. 이성계는 새왕조를 세우고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이성계를 인정할 수 없었으니, 풀이 나지 않는다는 무덤, 적분(赤墳)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의 변계량이 이 적분을 보고 묘비명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정몽주의 묘비명

 

高麗守門下侍中 鄭夢周之墓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포은(圃隱) 정몽주는 오부 학당과 향교를 세워 후진을 가르치고, 유학을 진흥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임경업의 묘비명

 

세월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

한 번 나서 한 번 죽는 것이 여기 있도다.

장부 한 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석자 추련겸을 십 년 동안 갈고 닦았노라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의 호는 고송(孤松)으로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명나라와 합세하여 청나라를 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김자점의 모함으로 죽었다.

 

 

 

 


 

 

 

 

유응부의 묘비명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뭇 구멍이 막혔도다

서리와 눈은 희게 덮혔는데 소나무만 홀로 푸르도다

신하의 머리는 임금을 위한 마음으로 희었더니

그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굽힐 수 없는 기개로다

다른 사람의 곡식은 죽을지언정 먹지 않았으니

백이숙제가 뛰놀던 곳의 바람이요, 도연명이 놀던 곳의 달이로다

흙 가운데 귀신이 있으니 원통한 피가 한움큼이네

 

유응부(兪應孚, ?~1456)는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맞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명이다. 1970년대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사육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된 바 있었다.

 

 

 




 

 



 

홍대용의 묘비명

 

아, 슬프다덕보는 민첩하고, 겸손하고, 식견이 원대하여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였다.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여 그의 학설이 오묘하였도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호는 담헌으로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로써 천문과 율력에 뛰어나 혼천의를 만들고 지구의 자전설을 제창하였다. 많은 실학자들 가운데 과학사상 부분에서는 독보적이었다.저서로는『담헌설총湛軒說叢』등이 있다.

 

 





 

 



허목의 묘비명
말은 행실을 덮어주지 못하였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도다.그저 요란하게 성현의 글 읽기만을 좋아했지만자기 허물을 하나도 고치지 못했기에돌에 새겨 뒷사람을 경계하노라
허목(許穆, 1595~1682은 제자백가와 경서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이황 ·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상진의 묘비명
시골 구석에서 일어나 세 번이나 재상의 관부에 들었도다늘그막엔 거문고를 배워늘 임금의 은덕을 곡조로 타다가 천수를 마쳤노라
상진(尙震 1493~1564)은 조선 중기 15년을 재상으로 왕을 보좌했던 명재상으로 불리는 인물.지춘추관사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영의정에도 올랐다.



 

 



방정환의 묘비명
童心如仙동심여선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은 아동문학가이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이자사회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여 소년 운동을주창했고, 1922년 어린이날을 제정하였으며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어린이' 라는 단어도 소파(小波) 로부터 비롯되었다.그의 모든 활동과 사상 저변에는 동학 천도 사상이 깊숙히 내재되어 있다.

 

 

인용: 박경남 著 『묘비명.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