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만시(挽詩) 4

茶泉 2020. 1. 1. 22:33

 

 

 

푸바오스, <서호추우西湖秋雨>, 1963, 28×39.2cm,

 

 

 

 

불 한 오 생 만    지 한 오 유 이

不恨吾生晩  只恨吾有耳

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네 내게 귀가 있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

만 산 풍 우 시    문 착 시 옹 사

萬山風雨詩  聞着詩翁死

저 수많은 산 비바람 몰아칠 때에 천재 시인 죽었단 소리 내 귀에 들리나니

불 한 오 생 만    지 한 오 유 안

不恨吾生晩  只恨吾有眼

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게 눈이 있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

무 부 견 사 인    위 도 체 공 산

無復見死人  危途涕空澘

다시는 이 사람 보지 못하리니 이 험한 길에 부질없는 눈물만 흐르네

 

- 「석주를 곡하며 哭石洲」 『東岳先生集, 錦溪錄』권10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석주 권필의 죽음을 곡하며 지은 시다.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표현을 써 통절함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만큼 권필의 죽음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리라.

 

이안눌과 권필은 어려서부터 사귀었으며 과거시험 공부도 함께 했던 막역지우 사이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시가 

 

 

140여 수나 될 정도로 이 중 이안눌은 159*6년 당시 호남에 있던 자신을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권필을 전송하며 지은

 

「여장을 이별하며」라는 시에서 "온 세상에서 날 알아주는 오직 하나의 벗, 영가 사람 권선생이라네" 라고 했다.

 

여장은 권필의 자이며, 영가라 경북 안동이니 곧 권필이 안동권씨임을 말한 것. 권필 역시 「네 사람의 벗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서 이안눌을 가장 첫째 친구로 꼽고 그와의 우정을 노래한 바 있다. 이안눌은 궈닐보다 세 살 아래지만 이들은

나이 차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깊은 우정을 나눈 것이다. 이안눌은 권필보다 25년 뒤에 죽었지만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권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하여 권필의 기일이나 그가 남겼던 자취를 만나면 사무치는 마음을 늘 시로 읊곤 했다.

 

뛰어난 재주는 하늘이 시샘한다고 했던가. 권필은 결국 시를 빌미로 죄를 받는 소위 '시안試案' 에 걸려 44세의 나이로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다. 때는 1611년(광해군 4) 3월, 진사 임숙영任叔英이 과거시험 중 책문시策問詩에서 당시 정치

상황을 풍자 비평한 것에 친히 과장을 이끌던 광해군의 심사를 건드렸던 것.

이 사건을 그냥 보고 지나칠 리 없던 권필이 붓을 들었다.

 

 

 

 

 

 

 

 

 

궁 류 청 청 앵 난 비    만 성 관 개 미 춘 휘

宮柳靑靑鶯亂飛  滿城冠蓋媚春輝

궁궐 버들 푸르고 꾀꼬리 어지럽게 나는데 성안 가득한 벼슬아치 봄볕에 아양 떠네

조 가 공 하 승 평 락    수 견 위 언 출 포 의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

조정에는 태평의 즐거움을 함께 축하하는데 뉘라서 바른 말이 포의에서 나오게 했나

 

 

 

 

이 시에서 1구의 '궁류宮柳' 는 왕비 유씨로, '청청' 은 왕비 유씨 집안의 득세를 형용한 것으로, 그리고 2구의 '춘휘'는

임금으로, '미춘휘' 는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비유되었으며, 4구의 '포의' 는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 임숙영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는 당시 척족戚族 유희분柳希奮 등의 횡포와 직언은 커녕 왕에게 아첨하기에만

급급했던 조정 관리들을 비판하고 또한 대신하여 일개 선비가 나설 수밖에 없음을 탄식하는 내용이다.

 

이 시가 빌미가 되고 이듬해 3월 다른 사안에까지 덤튀어 광해군은 권필을 잡아들여 혹독한 형벌을 가해 거의 죽음에 이른다.

당시 좌의정 백사 이항복이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나절이나 울면서 거듭 간청했지만 결국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명하여

권필은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지만 유배 중 주막집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때는 1612년 4월 7일의 일이었다.

 

전하는 이야기론 권필이 죽을 무렵 그 주막집 벽에 걸려 있던 시구가 바로 시참詩讖이 되었다고 한다.

시참이란 무심코 지은 시가 훗날의 예언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대개 죽음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 시참의 사실

여부는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한 천재 시인의 죽음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가 떠돌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유추해볼 수 있으리라. 훗날 이항복은 권필의 죽음을 한스러워하면서 "우리가 정승 자리

에 있으면서 권필 한 사람을 살리지 못하였으니 선비를 죽였다는 책망을 어찌 면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탄식한다.

송우암은 그의 묘갈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평했다.

 

 

 

그 사람됨이 질탕跌宕하고 호방하여 뜻은 우주를 덮을만하였고

안목은 한 세대에서 그와 같은 이가 없을 만한 것이었다.

이 세상 부귀영화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과 사람들이 사모하고 바라는

모든 것들을 한 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직 시와 술로 일생을 즐겼으며

과거는 한두 번 보았으나 다시는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홍현주, <월야청홍도>

 

 

 



하지만 평생을 꼿꼿한 말로 어느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던 권필도 詩의 화禍를 입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듯, 사건에 휘말려 잡혀들어가기 바로 사흘 전에 썼다는 「붓을 꺾으며 絶筆」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평 생 희 작 배 해 구    야 기 인 간 만 구 훤平生喜作徘諧句  惹起人間萬口喧평생토록 익살과 해학 시구 즐겨 짓다가 인간 세상 수만 입 숙덕거림 일으켰네종 차 괄 낭 료 졸 세    향 래 선 성 욕 무 언從此括囊聊卒歲  向來宣聖欲無言이제부턴 입 닫고 생을 마치려고 하나니 지난날 공자님도 말 없고자 하셨으니

 



평생토록 시로써만 할 말을 했건만 바로 그 시 때문에 결국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친구 이안눌은 이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 다음과 같은 시로 권필의 고뇌와 고통을 그려 냈다.


통 입 천 년 극    원 종 일 자 심通入千年劇  寃從一字深통절함은 천 년이 된다 해도 끝없을 것이요 원통함은 한 글자로 인해 깊어만 가는도다천 대 여 유 식    인 경 작 시 유泉臺如有識  忍更作詩○저승에서도 이승처럼 인식함이 있다 한들 차마 어찌 다시 시를 지을 수 있으랴
- 「권필의 시에 따라 차운하며」 『동악선생집, 금계록』권10


욕 견 부 욕 견    욕 견 오 소 사浴見復欲見  欲見吾所思보고 싶고 또 보고 싶고 내 그리운 이를 보고 싶네사 거 당 상 견    하 용 독 생 위

死去戃相見  何用獨生爲

죽어서 만날 수만 있다면 나홀로 살 필요가 있을까

우 소 소 월  교 교    익 사 심 상 비

雨蕭蕭月皎  益使心傷悲

부슬비 내리고 달빛 환할 때면 이내 마음 슬픔만 더해지네

 

 

 

작 아 명 명 월    금 석 우 동 래

昨我明明月  今夕又東來

어젯밤 밝고 밝았던 더 달은 오늘 저녁 또 동쪽에서 뜨건만

가 련 오 소 사    하 일 독 중 회

可憐吾所思  何日得重廻

가련하구나, 내 그리운 이는 어느 때나 다시 돌아올거나

집 파 주 회 구 사    불 각 체 사 최

執㞎酒懷舊事  不覺涕泗漼

술잔잡고 옛일을 생각해보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만 흐르네

 

- 「탄식의 노래 두곡조」'석주가 그리워서 지었다' 『동악선생집, 금계록』

 

 

 

 

 

권 리 천 마 색    의 의 상 안 개

券裏天麿色  依依尙眼開

시집 속 천마산 경치는 아직도 눈앞에 아련하건만

사 인 금 이 의    고 도 일 유 재

斯人今已矣  古道日悠哉

이 사람 이제는 없으니 옛 우정도 날로 아득해

세 우 영 통 사    사 양 만 월 대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가랑비 속 영통사였고 해 지던 만월대였는데

사 생 증 계 활    쇠 백 독 배

死生曾契闊  衰白獨徘徊

생과 사로 이별하니 쇠한 몸만 홀로 배회해

 

-「천마록 뒤에 쓰다」 『용재선생집』권2

 

 

용재容齋 이행李荇(1478~1534)이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절친한 벗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1479~1504)을 그리워하며 『천마록天麿錄』이라는 시집 뒤에다 쓴 시로, 1502년에 이행과 박은이

개성 천마산을 유람하면서 썼던 시들을 모아서 엮은 시집이다.

 

 

 

 

 

천 욕 사 문 상    시 여 진 췌 장

天欲斯文喪 詩如殄瘁章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 하니 이 시절이 '진췌장'과도 같아라

백 신 인 막 속    만 고 야 환 장

百身人莫贖  萬古夜還長

백 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터 만고토록 밤만 다시 길어지겠지

한 묵 여 삼 매    풍 류 진 일

翰墨餘三昧  風流䀌一場

글은 삼매의 경지를 넘었건만 풍류는 일장에서 끝나버렸네

인 장 호 해 주    공 뢰 국 화 방

 

 

忍將湖海酒  空酹菊花傍

억지로 강호의 술을 가지고 부질없이 국화 곁에 술만 붓노라

 

 

- 「읍취헌유고의 뒤에 쓰다」 『용재선생집』권2

 

 

'사문斯文'이란 『논어』자한子罕편에서 공자가 한 말로 흔히 유학儒學을 일컫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진췌장'은

『시경』대아大雅편에 "사람이 죽으니 나라가 시들었네"라고 하여 현인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시다. 박은 한 사람의

죽음을 유학의 도가 없어져버린 듯, 한 나라가 시들어버린 듯하다고 통탄한 것이다. 그의 시문의 경지는 어떤 누구

와도 견주지 못할 정도로 출중했기에 그가 없어지고 난 앞으로의 세상은 밤처럼 캄캄해질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기에 그의 풍류, 곧 시문이 겨우 일장에서 그쳐버린 것을 못내 애석해 한것이다.

아래는 이행이 박은이 죽은지 10년이 되던 해에 생시에 박은이 병풍에다 쓴 글을 어루만지면서 쓴 시다.

 

 

 

고 지 임 리 보 묵   흔  청 산 무 처가 초 혼

古紙淋漓寶墨痕  靑山無處可招

오래된 종이엔 귀한 먹 자국 생생한데 푸른 산 어디라도 혼 부를 곳 없어라

백 년 적 막 두 혼 백    풍 우 공  제독 엄 문

百年寂寞頭渾白  風雨空齊獨掩門

적막한 인생에 머리만 온통 세었는데 비바람 속 빈집에서 홀로 문을 닫노라

 

- 「박은이 그림 병풍에 쓴 시의 뒤에다 쓰며」 『용재선생집』권1

 

 

 

 

 

 

 

 

 

이가염, <하당소하>(부분), 1985, 지본채색

 

 

 

 

 

 

이행은 그의 인생 말년이랄 수 있는 54세 때인 1531년에도 역시 박은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박은이 죽은 지 이미 28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시점이다.

 

 

읍 취 고 헌 구 무 주    옥 량 명 월 상 용 자

挹翠高軒久無主  屋樑明月想容姿

산빛 끌던 높은 집 오래도록 주인 없어 지붕 위 밝은 달에 그 모습 그려보네

자 종 호 새 풍 류 진    하 처 인 간 경 유 시

自從湖海風流盡  下處人間更有詩

이로부터 이 강산에 풍류가 다하였으니 인간 세상 어느 곳에 다시 시가 있으랴

 

 

- 「박은의 시를 읽고서」 『용재선생집』권8

 

 

이행은 1534년 57세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가 죽기 3년 전에 쓴 것이다.

 

 

 

 

 

 

 

정암 조광조 적려유허지 '애우당' 담 너머로 피어난 백매 (화순 능주 소재)




무 등 산 전 증 파 수    우 거 초 초 고 향 귀無等山前曾把手  牛車草草故鄕歸무등산 앞에서 일찍이 손을 잡았는데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돌아가네타 년 지 하 상 봉 처    막 설 인 간 만 시 비他年地下相逢處  莫說人間謾是非훗날에 저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거들랑 인간 세상 부질없는 시비일랑 논하지 마세나
- 「효직의 상을 당하여」 『눌재선생속집』권2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죽음을 기리며 쓴 시이다.박상은 16세기 무렵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로 훗날 정조 임금으로부터 조선에서 가장 출중한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고평을받을 만큼 시의 격이 남달랐던 인물이다. 효직孝直은 조광조의 자子로써  박상과 조광조는 당시 뜻을 공유했던 사림士林이었다. 박상은 담양 부사로 있으면서 1515년 8월에 순창군수 김정金淨(1486~1521)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는 사오를 올렸던 적이 있다. 그것은 신씨가 반정 때 살해된 대역죄인 신수근의 딸이라하여 중종의 비로 책봉된 지 7일 만에 반정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소을 올린 박상은 오히려 중종의 노여움을 사 전라도 남평南平으로 유배되고 만다. 이때 조광조는 박상의 상소가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바로잡은 충언이라 극찬하면서 만일 그에게 벌을 준다면 자신이 사직하겠노라 말하면서까지극구 변호해준 바가 있으며, 덕분에 박상은 조광조의 강력한 비호 덕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박상을가리켜 '그 사람됨이 박학하고 옛날의 도의를 좋아하며 재주가 있고, 그 행실이 고상하고 깨긋하여 진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고 시대를 구할 만한 동지의식이 확고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 4년이 지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소용돌이 속에 조광조가 참담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박상은 조광조의 죽음 앞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과 슬픔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것. 1 ·2구는 과거와 현재의 일을 대비시켰고 무등산 앞에서 손을 잡았다는 것은 두 사람이 뜻을 함께했던 사이임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 2구에서는 차가운 시신이되어 소달구지에 실려 고향을 향하는 옛 동지의 비참함을 대비시켰다. '초초草草' 를 '바쁘게' 라고 새겼지만, '대충대충' 또는'보잘것 없는, 허술한' 이라는 뜻도 있다. 박상은 조광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부질없는 시비' 라는 한마디로 그의 죽음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더불어 소위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기록된 중종조의 대표 성리학자다. 그가 죽음을 맞은 것은 겨우 38세로 그의 반대파가 조작한 여론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의 첫번째 불행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 너무 빨리 진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급제 후 단 4년 만에 종2품인 대사헌大司憲의 지위에 이르는 초고속 승진을 한 것. 당연히 모든 사안에 급진적이고 열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519년 12월 20일 유학에 의한 이상국가 구현을 위해 달려온 조정암이 눈 덮힌 능주 벌판에 피를 토하고 스러진다.


 

 

 

 

 

 

『논어』 「선진편先進篇」에서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는 어느쪽이 어지냐고 묻자,

공자는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럼 자장이 낫단 말씀이냐고 반문하자,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 고 말하였다.

 

 

 

 

기 보 어 타 소    취 환 불 경 야

寄寶於他所  取還不經夜

보배를 다른 곳에 맡겨놓으면 하룻밤도 지체 않고 되찾는데

행 치 주 인 망    오 십 삼 년 차

幸値主人忘  五十三年借

다행히 주인이 잊어버리는 바람에 오십삼 년 동안을 빌려 썼구려

 

 

 

군 상 위 여 언    처 세 여 행려

君甞爲余言  處世如行旅

자네는 일찍이 날 위해 말했었지 "처세는 길 가는 나그네처럼 하다가

사 료 즉 당 귀    만 군 용 군 어

事了卽當歸 輓君用君語

일 끝나면 곧바로 돌아가야 하오" 라고 했는데 자네 만시를 쓰며 자네가 한 말을 쓰는구려

 

- 「장령 유서오의 죽음을 슬퍼하며」 『혜환시집惠寰詩集』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1708~1782)가 유서오柳敍五(1711~1763)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다.

모두 다섯 수인데 그중 둘째와 사섯째 수만 들었다. 유서오라는 인물 기록은 자세하지 못하다. 그의 생몰년도 과거 합격자

명부인 문과방목文科榜目과 이 시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자는 계상季常으로 영조 32년인 1756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로 당시 시대상으로는 이미 늙은이 축에 들어간 나이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이보다 2년 앞선 1754년 7월 8일 44세 때에 칠석날에 실시하는 칠석제七夕製

에서 장원을 차지함으로써 곧바로 임금이 치히 보이던 대궐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바 있다. 늦은 나이에

관로에 올랐으나 뜻을 맘껏 펼쳐보지도 못한 채 안타깝게도 고작 7, 8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용휴는 18세기의 문인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평가 된다고.

다산 정약용은 그를 두고 "영조 말년에 그 명망이 당대 으뜸이었다고 했다. 이용후의 시는 내용도 새롭지만 형식면에서도

매우 다양한 실험을 하였고 특히 만시를 많이 썼는데, 기존의 만시와는 뚜렷히 구분 될 정도로 매우 특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만시라 하면 비통함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함에도 비통은 커녕 오히려 엉뚱한 비유를 들어 유서오라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 그 비유의 첫째로는 유서오를 보배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만 이 보배의 주인이 보배를 남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살았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비유는 오십삼 년 동안을 빌려 썼다는 표현이다.

빌려서 살았으니 곧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즉 이 땅에서 53년을 '빌려서 살았던 삶' 이라는 대목이다.

때문에 빌린 것은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것.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이용후의 말이 아니고, 죽은 유서오가

평소에 했던 말이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두번째 시에서 나타난다. 즉 유서오가 평소 이용휴에게 "처세는 길 가는 나그네

처럼 하다가 일 끝나면 곧바로 돌아가야만 하오" 라고 한 것이다.

 

 이용휴는 유서오가 한 말을 그대로 빌려서 그의 죽음을 놓고 심하게 슬퍼하거나 애통해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홍도, <선인기우도>, 지본담채, 24×33.6cm, 개인 소장

 




허 암 거 사 거 심 진    불 견 유 유 세 사 신虛庵居士去尋眞  不見悠悠世事新허암 거사는 참됨을 찾아 떠나갔지만 세상이 새로워진 것 보지는 못했네상 수 유 혼 공 조    인 간 무 지 가 장 신湘水有魂公弔  人間無地可藏身상수에 혼이 있다면야 조문해야겠지 히 세상에 제 한 몸 숨길 곳이 없었으니

 

- 「정희량의 죽음을 슬퍼하며」 『용재선생집』권8

용재容齋 이행李荇(1478~1534)이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1496~1502?)이 먼 곳으로 떠나가자 지은 시다.이행은 정희량과의 나이 차가 9년 정도 나서 선후배 관계로 봐야겠지만 그들이 나눈 시로 보면 친구 사이나 다름 없다.박은이 26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처럼 정희량도 34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차이가 있다면 박은이 죽임을 당한반면 정희량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데 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불행히도 잘못된세상을 만나는 바람에 억울한 희생자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인물로 역사에 기록된다.
선조 때의 문인 이제신李濟臣(1536~1584)은 『청강선생시화』에서 정희량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했다.

일 모 창 강 상    천 한 수 자 파一謩滄江上  天寒水自波해 저무는 저 푸른 물가에 날씨는 차고 파도가 이네고 주 의 조 박    풍 파 야 응 다孤舟宜早泊  風波夜應多외론 배 일찍 정박해야겠거니 풍랑은 밤 되면 더욱 거세질 테니

1 · 2구의 풍경은 연산군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비유한 것이고 3구의 '외론 배' 는 정희량 자신을, 4구의 밤과 거센 풍랑은앞으로 일어날 정치적 격변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며 그는 이 거센 풍랑이 몰아치기 전에 '죽음'이라는 안전한 포구로미리 들어가 버린 것이다. 실제 이 시의 표현대로 그가 죽은 2년 후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한다.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불려지는1504년의 사화에서 사림들에 대한 참혹한 살육이 자행되어 수많은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다.
훗날 미수 허목은 '청사靑士', 곧 뜻을 고결하게 가진 선비라는 의미로 그들의 사적을 기록한 「청사열전靑士列傳」에다정희량을 넣은 바 있다. 그는 정희량에 대해 서술하면서 끝에다 쓰기를 "아! 그의 마음씨와 사적을 살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눈물이 나게 한다" 고 하면서 그는 옛 사람이 말한 진정한 '청사靑士' 였다고 찬탄한 바 있다.





김홍도, 《영정첩寧靜帖》 한 폭, 25.5×16.7cm,


 

 

 

사 십 년 전 을 밀 음    각 장 심 계 탁 기 금

四十年前乙密陰  却將心契托棋琴

사십 년 전 을밀대 그늘 아래서 바둑과 거문고로 마음 깊이 약속했네

담 간 상 운 능 견 서    필 하 청 시 미 견 금

談間爽韻能蠲署  筆下淸詩未見今

대화 속 시원한 시에 더위 떨쳐버렸는데 써내리던 맑은 시 이제는 볼 수 없네

곡 구 경 뢰 생 사 졸    자 고 음 단 성 명

谷口耕耒生死拙  鷓鴣吟斷盛名沉

곡구는 밭 갈았어도 세상일엔 서툴렀고 자고는 시 그치자 높은 명성 잠기었네

명 춘 당 과 방 성 로    유 신 문 전 초 목 심

明春倘過方城路  庾信門前草木心

내년 봄에 혹시나 방성 길 지날 때면 유신의 문 앞처럼 초목만 깊겠지

 

- 「정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여」 『오봉집五峯集』권4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이 총계당總計堂 정지승鄭之升(1550~1589)의 죽음에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지은 시다.

자신子愼은 정지승의 자를 말한다. 그는 39세에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벼슬하지 않은 채 평생을 야인野人

으로 은거했기에 행적에 관해선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기록에 의하면 정지승은 보봉 이호민, 백호 임제와

가장 가깝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일찍부터 시사詩社를 결성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이 시는 정지승을 은자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 두 가지로 집약하여 나타내고 있다. 즉 5구에서는 그를 한漢나라 때

곡구谷口에 은거하며 도를 닦아 이름이 높았던 정박鄭樸에 빗대었고, 6구에서는 만당시인晩唐詩人으로서 자고시鷓鴣施로

이름 높았던 정곡鄭谷에 비유했다. 또한 마지마 구에서는 남북조 시대 때 북주北周의 이름난 시인이었던 유신庾信을

들었지만 결국 똑 같이 깊은 초목 속에 묻힐 수밖에 없는 허무한 인생이었을 뿐임을 탄식하고 있다.

 

 

 

 

 

 

 

이유신, <행정추상도>

 

 

 

 

구 업 시 서 착 이 모    유 시 서 소 상 동 고

舊業詩書着二毛  有時舒嘯上東皐

시 짓고 글 읽기 일삼다 반백이 다 되었고 때로 동편 언덕 올라서서 휘파람 불어봅니다

  남 빈 치 주 조 훈 족      북 부 훈 천 야 적 고

  南貧置酒朝醺足  北富薰天夜笛高

남녘에선 술 사기 어려웠어도 아침 취기에 족했고 북녘에서 하늘 향기 가득 밤 피리 소리도 드높았지요

객 거 폐 문 류 월 색    몽 회 허 각 산 송 도

客去閉門留月色  夢回虛閣散松濤

객 떠나고 문 닫자 달빛만 남았고 꿈 깨자 빈 누각엔 솔바람 소리만 흩어집니다

사 량 부 재 공 명 리     수 신 인 간 제 일 호

思量不在功名裡   須信人間第一豪

세상사 공명일랑 아예 생각도 두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인간 세상 제일가는 호걸이나 될렵니다

 

- 「숙부님에게 올립니다」 『총계당유고叢桂堂遺稿』

 

 

시 전체에 걸쳐 회한과 외로움이 짙게 배어 나온다.

 

 

 

 

청 하 기 기 회 계 옹    매 약 환 산 지 일 공

靑霞奇氣會溪翁  賣藥還山只一笻

푸른 노을 기이한 기운 속 회계의 늙은이는 약초 팔고 돌아가며 달랑 지팡이 하나

향 루 계 당 서 만 가    설 청 암 경 녹 류 종

香縷桂堂書滿架  雪晴巖逕鹿留蹤

향기 ㅇㅓ린 총계당 서가에는 책이 가득할 터이고 눈 개인 바위 길엔 사슴 발자국만 남을 것이다

천 단 월 랭 생 령 뢰    운 확 빙 심 각 야 용

天壇月冷生靈籟  雲確氷深閣夜舂

천단에 달이 차가울 때면 신령한 소리 울려날 테고 운대에 얼음이 깊어지면 방아 찧기 멈추겠지

응 념 고 인 기 환 구    십 년 유 청 금 성 종

應念故人羇宦久  十年猶聽禁城鍾

응당 생각하리, 친구들은 벼슬살이에 오래도록 묶여서 십 년 동안 아직도 궁궐 종소리나 듣고 있음을

 

- 「장자신을 보내며」 『임백호집林白湖集』권3

 

 

신선 같은 인품이 물씬 느껴지는 시다. 정지승의 호는 '총계당' 또는 '천유자天遊子'이다 총계당이란 계수나무가 빽빽한

초당이라는 의미이고, 천유자란 하늘을 노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가히 신선 같은 삶을 살았던 그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이름이다.

 

 

 

 

 

 

 

<노승도>, 규격 및 소장처 미상

 

 

도가적 삶을 살던 정지승은 1589년(선조 22) 8월 27일 고향 온양으로 돌아와 시골집에서 생을 마친다.

진안 회계산에 은거하던 기기와 사망 시기를 대략 미루어볼 때 온양으로 옮겨와 산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죽은 것으로 보인다.

기이한 일은 그가 죽던 날 신비한 거북이 한 마리가 뜰가를 배회하다가 목을 길게 빼고 큰 우레 소리를 내며 울고 갔다고 한다.

정지승 사후 100년이 지난 무렵 삼연三淵 김창흡昌翕(1653~1722)은 『남유일기南遊日記』에서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신선과 같은 면모를 추억한 바 있다.

 

 

 

총 계 유 인 자 호 일    제 천 대 여 하 고

叢桂幽人自豪逸  祭天臺與霞高

은자 총계당은 홀로 뛰어난 인물이었거니 제천대는 붉은 안개 속에 높이 솟아 있네

촌 옹 불 기 비 승 세    담 상 춘 풍 노 벽 도

村翁不記飛昇歲  潭上春風老碧桃

시골 늙은인 그가 신선 되었던 때 기억도 못 하는데 연못가의 봄바람에 복숭아나무만 늙어가네

 

 

퇴 계 비 초 상 의 희    거 축 교 송 기 일 귀

頹階圮楚尙衣俙  去逐喬松幾日歸

욕 멱 현 구 문 소 식    와 룡 암 반 암 연 비

欲覓玄龜問消息  臥龍巖畔暗○霏

 

- 습유拾遺 『삼연집三淵集』권28

 

 

인용; 전송열 著 『옛사람들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