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막고굴 (2)

茶泉 2019. 12. 23. 07:48

막고굴

(2)

 

 

막고굴 제276굴 북쪽 벽 보살상

 

수 양제의 서순(西巡)

중국의 전설 가운데 주나라 목왕이 천하를 주유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덟 마리의 준마가 끄는 신비한 마차를 타고 구름과 안개를 몰고 다니면서 세상을 여행했다.

그는 곤륜산에서 꿈에 그리던 서왕모를 만난다. 사서에는 진시황이 즉위 후 27년(서기전 220년), 중국을 통일한

다음 해에 농서 지역을 순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중국 서부를 순시한 황제는

수나라의 양제(煬帝,재위 604~618) 다. 그의 족적은 하서주랑의 장예까지 이르렀다.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체계적인 실크로드 여정에 대한 기록은 배구의 《서역도기》이다.

배구는 이 책을 수 양제에게 바쳤고 양제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매일같이 배구를 불러 실크로드를 따라

이어진 서역 각국의 상황을 질문했다. 그리하여 수 양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진시황, 한 무제를 본보기로 삼아 서역 순시에 나선 것이다.

 

 

 

 

 

 

수 양제의 서순노선도

 

대업大業 5년 609년, 수 양제는 군대와 문무백관, 후궁과 승려, 도사, 악사 등 수 십만 명을 대동하고 수도 장안을 출발했다.

행군의 노선은 대부분 위수(渭水오늘날 황하강)를 따라 서행했다. 부풍扶風(지금의 산시성 평상)을 지나 룽산을 넘고 천수

군(天水郡, 오늘날 텐수이시)에 닿았다. 이어 농서를 지나 적도(오늘날 간쑤성 린타오현)에 도착한다. 타오허강을 건너 서쪽

으로 가면 임진관(오늘날 간쑤성 병령사 석굴 서쪽)에 이르고, 황하 서쪽에서 서평군이다. 다시 이리저리 서행을 계속하여

장녕곡長寧谷에 도착한 다음 북쪽으로 성령 고개를 넘어 비파협을 지나 천신만고 끝에 치롄산의 대투발곡을 통과했다.

드디어 서순 일행은 장예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수 양제는 거쳐간 지역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남겼다.

 

 

 

 

 

 

              막고굴 제427굴 주실 북쪽 벽 동편, 협시보살의 옷 무늬           막고굴 제420굴 보살 의복의 연주수렵문

 

427굴 주실 북쪽 벽의 협시보살 의상은 구슬을 연결한 것처럼 보이는 무늬가 있는 장포를 입은 모습이다.

420굴 불감 내에 그려진 보살의 긴 치마에는 구슬이 둥글게 연결된 장식 무늬 안에 수렵하는 장면이 그려진 연주수렵문이

나타난다. 제425굴에서는 구슬 장식 무늬 안에 날개 달린 말이 그려진 연주익마문, 제401굴에서는 구슬장식무늬 안에

날개 달린 말이 마주보고 있는 연주유익대마문이 나타난다. 옷의 문양으로 볼 때, 수나라 때의 석굴에서는 이국적인 정취가

짙다. 이런 페르시아 비단의 장식 무늬가 나타나는 것은 수 양제의 서역 경영과 대외무역 장려 정책,

이국 문화와의 활발한 교류, 실크로드 등의 요인과 필연적 관계가 있다.

 

연주문은 페르시아 사산 왕조 시기의 전형적인 문양 가운데 하나다.

동진 시기에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전파되었고, 수당 시대에 와서는 완전히 중국화하여 전형적인 장식 무늬로 자리 잡았다.

돈황에 있는 수당 시대 석굴은 이처럼 대담한 이국적 색채를 잘 보여준다. 연주문의 특징은 이어지는 구슬 모양으로 동그라미나

사각형, 마름모 혹은 그 밖의 모양으로 중심이 되는 주제 무늬를 둘러싸는 형태다. 서기전에는 서아시아 및 그보다 더 서쪽의

지역에서 금화나 은화 위에 이런 연주문을 새기고 그 중앙에는 국왕의 초상을 넣었다. 그후 연주문의 사용 범위는

 점차 확장되어 도자기나 직물 등에도 자주 출현했다. 연주문은 둥근 구슬 모양으로

태양, 세계, 풍년, 생명, 그리고 불교의 염주를 상징한다고들 한다.

 

 

 

 

 

 

막고굴 제303굴 내부

 

수나라 때 막고굴에는 일종의 거꾸로 세운 수미산을 중심 기둥으로 하는 중심탑주굴이 출현했다.

중심탑주굴이라는 형식은 같지만 이전 시기의 석굴과는 외형이 크게 다르고 특별하다. 제302굴, 제303굴은 모두

이런 형태로 지어진 석굴이다. 석굴의 주실 중앙 하단에 네모난 모양의 큰 단을 세우고, 단 위에 뒤집힌 수미산 모양으로

탑주를 세워 천장을 받친다. 중심 기둥 앞부분의 천장은 시옷자 모양의 경사 지붕이고, 중심 기둥 뒤의 천장은 편평하다.

이런 형태가 중심탑주굴의 진정한 의미를 더 잘 대표하는지도 모른다.

 

 

 

 

 

 

막고굴 제420굴 내부

 

수나라 때의 불상 제작은 이전 시대의 규모를 훨씬 뛰어 넘는다.

하나의 굴에 통상 대형 불단을 설치하는데, 불단 하나에 여러 좌의 불상을 둔다. 제427굴, 제420굴, 제244굴, 제419굴은

모두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굴이다. 제127굴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것이 거대한 불상 세 좌가 보인다. 불상은 보는 이에게

심리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주며, 거대한 불상을 통해 자신의 보잘것 없음을 느끼게 된다. 불상의 시선에서 몸을 피해 남쪽이나

 북쪽으로 움직여도 남쪽 벽이나 북쪽 벽에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불상 세 좌가 엄숙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석굴에 온 참배자는

어디로도 피할 곳이 없음을 깨닫고 공손하게 부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십사 기원할 수밖에 없다.

 

사면을 둘러싼 벽이나 처장의 네 경사면은 황금빛과 푸른빛이 휘황찬란하다.

수많은 부처가 질서 있게 늘어서 있는 천불도는 마치 아름다운 벽지를 바른 것 같다. 천불도 속의 부처는 크기가 작고

참배자의 위취에서도 거리도 멀다. 또한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참배자는 벽면의 천불도에 대해 멀고 은근한 느낌을 받는다.

반대로 천불도 덕분에 눈앞의 불상과의 거리는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참배자는 시야 내에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에 불상이

자리 잡고, 그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싼 천불도를 보면서 세상에는 어디에나 부처와 불법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는 참배자에게 빛나는 깨달음의 길을 가리켜 보여주는 듯하다.

 

 

 

 

 

 

막고굴 제427굴 주실 내부

 

 

 

 

 

 

 

 

막고굴 제419굴 불감 내부 가섭상




현장의 인도 방문 노선도

 

정관 원년 627년 부터 19년 646년까지 현장은 20년간 홀로 5만 리를 걸었다.

서격,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에 갈 때까지 130개 나라를 지났다. 수많은 고난을 겪었고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도

부지기수였다. 그가 불경을 가지러 서행한 여정은 다음과 같다.

 

장안(시안 )→ 진주(텐수이 → 란저우(蘭州) → 양주(우웨이) → 과주(주취안) → 옥문관 → 이오(하미) → 고창(투루판) → 아기니

(신장 엔치 화족자치현) → 굴지(신장 쿠처) → 발록가(신장 아커쑤) → 릉산(무쑤얼링) → 대청지(키르기스탄 이식쿨호 → 소엽수성

(쇄엽성이라고도 불림, 키르기스스탄 톡모크 서남부 → 삽말건국(우즈베기스탄 사마르칸트) → 소무구성국 및 기타 4~5개 소국국 →

갈상나국(현 우즈베키스탄 경내 옛 명칭은 쿠사나국 → 철문(우즈베키스탄 남부 산간지대) → 도화라국(전한 시대의 대하국) →

 대설산(힌두쿠시 산맥) →  범연나국(아프가니스탄 바미안) → 백사와성( 파키스탄 페사와르) → 인도.

 

 

 

 

 

 

돈황의 봉수대 유적

 

 

 

 

 

 

돈황의 비단그림 <행각승도(行脚僧圖)>

 

현장의 구법 여행 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마갈타국의 나란타사 였다. 그곳에 가장 오래 머물며 공부 했다.

100세를 넘긴 나란타사의 주지 계현 법사에게 1년 5개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배운 것. 나란타사는 당시 인도 불교의

중심지로 가장 명망 높은 학부이기도 했다. 인도의 모든 고승들이 운집하는 곳으로 1만 명의 학도와 1,500명의 법사들이 머물렀다.

나란타사의 명망은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도 유학생이 올 정도로 잘 알려졌다. 정관 8년 635년까지 현장은

나란타사에서 5년간 머무르며 공부했고, 수십 개 인도 도시국가를 여행했다.

 

현장의 배움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계일왕의 신임도 두터워졌다. 642년, 계일왕은 수도인 곡녀성에서 전에 없던

대규모의 변론회를 열었다. 18개국의 국왕이 직접 참관했고, 인도 전역에서 3천 명의 고승이 모여들었다. 바라문 등 다른 종교에서도

참가자가 2천여 명이었다. 나란타사에서도 1천여 명의 학도를 보냈다. 18일 수, 현장은 변론회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변론, 박학다식함에 대승불교에서는 '마하야나제바'(大乘天), 소승불교에서는 '목차제바'(解脫天)라고 존칭했다. 이런 칭호는 고승

에게 지고무상의 존칭이다. 이로부터 현장법사의 명성은 인도 전역으로 퍼졌다.

 

18년 후, 현장은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금은으로 만든 불상, 600여 부의 범어 경전을 가지고 동쪽을 향해 귀환길에 올랐다.

계일왕은 현장법사를 만류하기 위해 100곳의 사원을 짓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현장의 귀국 결심을 꺾지 못했다.

정관 15년 641년, 42세이 현장은 곡녀성을 출발해 귀로에 올랐다. 인더스강을 건너다 물난리를 만나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져

가려던 기이한 식물들의 씨앗과 50권의 불경을 잃었다. 현장은 파키스탄 북부를 통해 지나가는 길을 잡아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동쪽으로 향했다. 정관 18년 644년, 현장은 우전국에 도착한다. 그는 우전에서 7~8개월을 기다려서야 당 태종의 답장을 받는다.

 

"법사가 인도를 다녀와 이번에 귀환했음을 전해 듣고 비할 데 없는 기쁨을 느끼노라.

속히 귀환하여 짐을 만나도록 하라.(····) 돈황의 지방관이 법사를 맞이하도록 하고 ······."

 

현장이 장안에 돌아왔을 때는 정관 19년 645년, 현장의 나이 46세였다.

 장안 사람들이 거리마다 잔뜩 나와서 현장의 얼굴을 보려고 아등바등했다.

너무 사람이 몰려서 행렬의 속도가 느려지고 심지어는 인파에 깔리는 사고도 벌어졌다.

 

 

 

 

 

 

시안의 대안탑

 

정관 22년 648년 당 태종은 현장을 위해  자은사慈恩寺를 짓고 그를 주지로 삼았다.

이곡은 홍복사弘福寺 외에 현장이 불경 번역 및 거주했던 주요 장소다. 영휘永徽 3년 652년, 현장은 인도에서 힘들게 가져온

진귀한 불경이 화재로 소실될까 두려워하여 당 태종에게 자은사 서쪽에 탑을 세우고 그곳에 경전을 보관하겠다고 표를 올렸다.

당 태종이 허락하여 14일 만에 탑이 완성되었다. 주로 범어 경전과 석가모니 사리, 불상 등이 봉안되었다. 하지만 이 탑은

30년 후에 무너진다. 이때가 마침 무측천이 권력을 잡았을 때였는데, 다시 자은사탑을 세웠다. 탑은 10층으로 하고 정식 명칭을

대안탑大雁塔이라고 했다. 탑의 남쪽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쓴 <대당삼장교서大唐三藏聖敎序>, 당 고종 이치李治 재위 649~

683가 쓴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를 새긴 비석 두 개가 세워져 있다.

 

 

 

 

 

 

막고굴 제148굴 <천청문 경변>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은 번역한 후 당나라 때와 그 이후의 돈황 벽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당盛唐 시대에 만든 막고굴 제148굴의 '약사경변藥師經變'과 그 이후 시대에 제작된 여러 '약사경변',

 148굴의 '천청문경변天請問經變'과 역시 제148굴의 '불공견색관음경변不空羂索觀音經變', 만당晩唐 시대에 만든 제14굴의

'십일면관음경변十一面觀音經變' 등은 현장이 번역한 불경의 내용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돈황 장경동에서 현장이 번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천청문경天請問經》, 《불공견색신주심경不空羂索神呪心經》,

《십일면신주심경十一面神呪心經》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심지어 돈황본의 《대당서역기》3질도 나왔다.

 

 

 

 

 

 

돈황문서 S.2695Va 《대당서역기》

 

 

 

 

 

 

 

 

유림굴 제2굴 <현장취경도>

 

 

 

과주 경내에 위치한 유림굴楡林窟과 동천불동東天佛洞에는 여섯 점의 <당승취경도唐僧取經圖>가 있다.

모두 서하西夏 1038~1227 시대에 제작된 석굴로, 명나라 사람인 오승은吳承恩. 1500?~1582? 이 《서유기》를

쓰기 300년 전이다. 여섯 점의 벽화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당승(현장)과 손오공, 백마만 나올 뿐

 저팔게와 사오정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림굴 제2굴의 벽화는 주실 서쪽 벽의 북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아래에 있다.

화면 속에는 젊고 잘 생긴 한족 승려가 보인다. 가사를 입고 머리카락을 다 깎은 민머리이며 합장을 하고 강물을 바라보면서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고요한 순간이다. 젊은 승려가 바로 현장이다. 그의 뒤에는 원숭이를 닮은 외모에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이마에 금테를 찬 남자가 보인다. 승복이 아니라 일반적인 속인의 복장을 입었다. 오른손을 이마에 대고 빛을 가리는

동작을 보면 멀리 뭔가를 쳐다보는 중인 듯하다. 왼손은 머리만 살짝 드러나 있는 백마의 고삐를 쥐고 있다. 이가 바로 손오공이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물가에서 관음보살을 향해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다.

 

 

 

 

 

 

 

 

 

 

 

유림굴 제3굴 <현장취경도>

 

유림굴 제3굴에는 두 점이 있다. 한 점은 서쪽 벽에 있는 <普賢變> 그림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격류가 흐르는  강가에

먼지를 뒤집어 쓴 현장이 서 있다. 민머리에 가사를 입고 발에는 짚신을 신었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면서 허리를 굽히는

 자세를 보면 무언가 기도하는 듯하다. 그 뒤로 손오공이 속인 복식으로 이빨을 드러낸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역시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다. 손오공 옆에는 백마가 세 다리는 땅에 대고 한 다리는 살짝 앞으로 뻗은 채 서 있다.

말도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 멀리서 쉬지 않고 달려오다가 막 멈춘 모양새다. 말등에는 안장이 놓였고,

안장 위에는 연꽃과 불경 보따리가 보인다. 불경 보따리 에서는 찬란한 빛이 새어나온다.

 

 동쪽 벽의 북측에는 <십일면천수관음변十一面千手觀音變>이 그려져 있는데, 그 아래에도 현장과 관련된 그림이

한 점 더 있다. 청년 현장이 두 손을 합장한 채 성심으로 기도를 올린다. 손오공은 원숭이 얼굴에 긴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르고

끈을 맨 속인 복장이다. 손오공의 허리에 불경 보따리가 매어져 있다. 오른손에 쥔 봉을 오른쪽 몸에 기대듯 걸쳐 놓았고,

 봉 끄트머리에 불경이 든 상자를 매달았다. 왼손을 펼쳐서 이마에 대고 빛을 가리면서 멀리 바라보는 자세다.

 

유림굴 제29굴에도 한 점이 있다. 북쪽 벽의 동측에 있으며 <수월관음도> 아래에 위치한다.

역시 현장, 손오공, 빈 안장을 얹은 백마만 그려져 있다.

 

동천불동의 제2굴에는 두 점이 더 있다. 남쪽 벽의 <현장취경도>는 현장이 가사를 입고 두 손을 합장했다.

산을 등지고 물살이 빠른 강이 앞에 놓였다. 손오공은 원숭이 얼굴로,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금테를 썼다.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 왼손은 이마에 대고 멀리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며 오른손은 백마의 고삐를 쥐었다.

북측 측벽에 있는 그림은 현장이 가사를 입고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하는 모습이다. 손오공은 한 손에 봉을, 다른 손에

백마의 고삐를 잡고 있다. 백마의 안장은 비어 있고, 옆에 얌전히 서 있다.

 

위에 설명한 여섯 점의 취경도는 수월관음 옆에 그려졌거나 격류가 흐르는 강가를 배경으로 한다.

이는 현장이 서행을 하면서 산 넘고 물 건너는 힘든 여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취경도 속 현장은 모두

민머리에 출가인의복장을 했지만 손오공은 속인 복장에다 외모가 원숭이를 닮았다.

 뺨에도 원숭이처럼 수염이 숭숭 났고 머리카락도 길게 길렀다.

또한 모든 그림에 백마가 함께 그려져 있다.

 

초당初唐 시대에 만들어진 막고굴 제323굴은 불교서적과 계율을 소재로 한 그림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굴이다.

주실 남쪽과 북쪽의 두 벽면은 불교 사적도가 가득 그려져 있고, 북쪽 벽은 석가모니가 옷을 빤 샘과 옷을 말린 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이 사적은 모두 현장이 쓴 《대당서역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이다.

 

동쪽 벽의 남측과 북측의 하단에는 계율도가 그려져 있다. 문자로 규정한 계율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이다.

그중 동쪽 벽 북측의 계율도는 1925년 미국인 랭던 워너가 뜯어가는 바람에 훼손되었다. 돈황 벽화 중에는

 석가모니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명한 거사 유마힐維摩詰의 형상을 그린 그림이 많다.

 

 

 

 

 

 

 

용문석굴 봉선사 노사나불상

 

높이 17.14m미터의 용문석굴 최대의 불상이다. 노사나불은 석가모니의 보신불이며 '빛이 세상을 고루 비춘다'는 의미다.

이 불상의 얼굴은 둥그스름하고 아름다워서 남성의 장엄함과 여성의 자애로움이 공존한다. 민간에서는 이 불상이 무측천의

외모를 본따 만들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즉 무측천 본인의 이상적인 화신이라는 것이다.

 

 

 

 

 

 

96굴은 산자락에 기대어 지어졌다. 굴 외부 전면에 부설한 9층짜리 목조 굴첨窟檐이 있다.

이것은 돈황 막고굴을 대표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세간에서는 '구층루九層樓'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 건축물 안에 돈황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불상이 있다. 제130굴에 있는 당나라 때의 또 다른

대불상보다 북쪽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북대상北大橡'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돈황 막고굴 제96굴 대불

 

대불의 높이는 35.5미터로 동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얼굴은 둥그스럼하고 눈썹은 날렵하다.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서 발이 땅을 딛고 있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내려놓고 오른손은 위를 향해 치켜들고

중생의 고통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을 맺고 있다. 왼손은 수평으로 뻗어 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을 맺고 있다.

 

불상은 돌로 본을 만들고 그 위에 진흙으로 빚어서 만들었다. 사락암인 벼랑에 대략적인 신체 윤곽을 조각한 다음

그 위에 진흙을 붙이고 세밀한 조형을 다듬은 다음 채색한다. 이것이 돈황 석굴의 대형 불상을 만드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대불상은 높고 웅대하며 정결하고 고요한 엄숙함이 있다.

살짝 아래로 내려뜬 것 같은 시선은 참배자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하다.

 

 

 

 

 

 

 

둔황 막고굴 제96굴 중화민국 시기의 중수 전 대불 모습(랭던 워너 촬영)

 

당나라 때의 문헌인 《막고굴기莫高窟記》를 살펴보면 제96굴이 당나라 연재連載 2년 195년에 짓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석굴을 지은 사람은 영은선사, 음조거사 등이다. 처음 지은 굴첨은 4층짜리 구조물이었고 불상은 금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9세기 말, 4층 굴첨을 5층으로 수리했다. 이어 송나라, 서하, 청나라를 거치면서 몇 차례 수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9층 누각은 중화민국 17~24 1928~1935에 돈황의 유명한 약방인 덕흥항 주인인 류지더와 돈황 향신 장판밍, 막고굴

황경사 주지 라마역창서 등이 1만2천여 위안을 모금하여 8년에 걸쳐 완공했다. 불상의 황토색 가사와 승지지 등을

새로 칠했다. 가사의 늘어진 옷자락에는 청나라색 운룡문을 그렸다. 불상은 1천 년의 역사를 겪으며 몇 차례의

수리를 거쳤지만 신체의 비율이나 앉은 자세, 얼굴의 모습등은 기본적으로 당나라 때 만들어진 그대로다.

 






돈황 막고굴 제275굴 미륵보살상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교각미륵불상이다. 이는 막고굴의 북조 시대 불상 중 가장 유명한 미륵불상이다.수당 시대에는 미륵신앙이 더욱 성행하여, 이를 믿는 사람이 승려 계층을 넘어 황실, 문인, 백성 등 사회 각계각층에 퍼져 있었다. 수나라 때의 고승 언종, 영간, 지엄 등도 미륵정토를 꿈꾸던 사람들이다. 당나라 때의 고승 현장은 미륵불상을 1천 좌나 만들었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 '나무미륵불'을 염하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막고굴 제 445굴 <미륵경변도> 중 '일종칠수(一種七收)' 장면

 

불경에서는 미륵불이 강림하는 세상을 이렇게 묘사한다.사바세계는 땅이 이동하고 변화하여 정토가 된다. 대지는 거울처럼 편평해지고 각종 꽃과 풀이 땅 위를 뒤덮는다. 인간의 수명은 8만4천 살까지 길어지고, 여자는 500살이 지나야 혼인한다. 노인은 스스로의 수명이 다하였음을알고 스스로 깨끗한 땅에 무덤을 만들고 죽음을 맞이하며, 죽음의 고통이 없다. 매일 밤에는 용왕이 물을 뿌려 땅을 씻어낸다. 곡식은 한 번 심으면 일곱 번을 수확할 수 있다. 나무에서 옷이 자라난다. 길을 가다가 귀한 물건을 보아도 줍지 않고 문을 열어 둔다.





돈황 막고굴 제130굴 대불상
개원開元 9년 721년 돈황의 승려 처언과 지역민 마사충 등이 막고굴의 '북대상' 남쪽에 높이 26미터의 거대 미륵불상을 세웠다. 막고굴 제130굴의 '남대상'이다.

 




러산 대불

 

비슷한 시기에 러사천성 러산에도 높이71미터에 달하는 미륵불상이 만들어졌다.

돈황의 북대상, 남대상과 러산 대불은 모두 당나나가 고도로 번영했던 시기에 만들어져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및 종교적인 발전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인용: 둔황연구원 · 판진스 편저 / 강초아 옮김 『실크로드 둔황에서 막고굴의 숨을 역사를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