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컬러플한 세계사 1

茶泉 2019. 10. 18. 10:48

 

THE COLOUR OF TIME: A NEW HISTORY OF THE WORLD, 1850-1960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세계는 원래 생생하고 선명하며 다채로운 색을 가진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에게 과거는 결코 생생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가 상용화된 이후 사진은 역사를 기록하는 한 부분이 되었지만,

처음 한 세기 동안은 거의 흑백의 매체였다. 그래서 과거의 풍경은 불완전하고 희미해진 채로 우리에게 남겨졌다.

 

여기 등장하는 사진들은 1850년부터 1960년까지 촬영된 것으로, 본래 흑백으로 촬영된 것을

디지털 작업을 통해 색을 복원하여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새롭게 볼 기회를 얻게 한 것이다.


어떤 사진은 본래 앨범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장시간의 노출과 유리판, 콜로디온, 달걀흰자, 질산은이 사용되는

복잡한 공정을 거쳐 촬영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형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도 있고, 35밀리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도 있다.


이 '역사적인' 사진에 색을 입히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컨대 어느 병사의 초상 사진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진에 등장하는 군복, 메달, 리본, 군장, 피부, 눈동자, 머리칼 등등에 색을 입히려 한다.

 

그러러면 가급적 서로 다른 시각 자료와 문서 자료를 통해 세세한 사실들을 일일이 검증해야 한다.

농담(濃淡)이 다른 회색만으로 본래의 색을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색』<서문> 중에서 -

 

 

 

 

 

 

카메라는 자연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 선사할 것이다.카메라는 자연의 세밀함과 웅대함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판단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창조의 힘을 발휘하는 일은 예술가들의 몫으로 남겨둘 것이다.
조저 펜턴. 1852년

1855년 3월 8일 당시 35세였던 영국인 조저 펜턴은 법률가에서 사진가로 변신하여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발라클라에 도착한다.두 명의 조수와 함께 그가 가져온 것은 카메라 5대와 렌즈 700개, 조리기구와 캠핑 장비, 지브롤터에서 구입한 말 3필, 그리고와인 장수의 수레를 개조해 이동용 암실과 침실을 설치한 마차 1대였다. 그는 급속히 발전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을 장려하기 위해결성된 사진협회의 창립 회원이었다. 사진을 판매하려는 맨체스터의 출판사가 펜턴의 여행을 재정적으로 지원했고,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이 이들을 후웠했다.
오늘날 펜턴이 세계 최초의 종군기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비록 그가 크림반도에서 수집한 초상 사진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편 영웅들의 모습만 담고 있어 기록물이라기보다는 선전물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 사진들은 1850년대 4개의 제국이 관여한 소모적인 참호전에서 수천 명의 영국군이 폭력과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실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촬영되었다. 한 편에는 영국, 프랑스, 오스만제국이, 다른 편에는 러시아가 있었다.당시 《타임스》가 크림반도의 참혹한 상황에 대한 충격적인 기사를 보도했다. 영국 정부는 펜턴에게서 이런 해로운 기사를 반박할 만한 시각 자료를 얻고자 했다.
어쨌든 크림반도로 향한 펜턴의 여행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세계사의 대사건들이 폭넓게 필름에담기기 시작했다. 사진이 후대를 위한 풍부한 광맥이 된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펜턴과 같은 사람들이 후원자를 위해 한 일은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는 세계사의 사건들을 서술하고 설명하려는 후대의 역사가들을 위한 일이 되었다.
당시는 제국의 시대였다. 당연히 지배적인 세력은 영국이었다. 정복하고 지배한 영역에는 캐나다, 인도, 버마, 남아프리카 일부와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포함되었다. 이와 더불어 영국 해군은 곳곳에 흩어진 수많은 전초기지에서 대양들을 탐사하고 지배하며 영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유럽과 중동에서는 프랑스와 오스만제국, 러시아가 영국의 경쟁 상대이자 적수였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청 왕조와 인도의 무굴제국이 경쟁하고 있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이 지배력을 발휘했다. 멕시코만과 오대호 지역 사이에서는 신생 미국이 국영을 넓혀갔다. 70년 전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대담한 반란을 통해 탄생한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영토를 사들였고 한때 강력했던 스페인 제국의 남은 부분을 장악했다. 자유민이던 미국의 백인들은 유럽계와중국계 정착민들과 함께. 방대한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안선 사이 북아메리카 땅을 분주히 식민지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팽창하면서, 미국인들은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하게 분열했고, 1860년대에는 그 결과들이 끔직할 만큼 명백해졌다.
제국의 시대를 움직인 또 다른 거대 동력은 '기술력'과 '발견'이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신기술 덕분에 사람들이 살아가고 일하고 여행하고 소통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방식이 변화했다. 해저에는 전신선이 설치되었고 해상에는 거대한 정기 여객선이 운행했다. 고색창연한 구도시들을 재건하려는 야심 찬 계획들이 실행되었고, 고대 도시들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화포들이 배치되었으며, 머나먼 이국땅을 탐험하고 생명의 근원을 파고드는 과학 연구가 이루어졌다. 질병과 강제 이주, 폭력으로 오랜 역사를가진 민족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1850년대는 전대미문의 이례적 변화의 시기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기쁨에 젖는가 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이렇듯 세상은 끊임없이 변했고, 개조한 마차를 타고 크림반도로 향한 펜턴 같은 사람들이 그 세계를 영원히 보존했다.그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삶을 포착했고, 그의 의도였든 아니든, 수백 년이 흐른 뒤 우리는 다시 한 번흑백의 (아니 실제로는 천연색의) 그 시대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프랑스는 1853년부터 크림 전쟁에 참가했고, 1859년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 사진이 촬영된 186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압제가 느슨해졌다. 하지만 결국 나폴레옹 3세는뼛속까지 보나파르트 집안의 일원임을 증명했다. 1870년 프로이센과 치른 전쟁에서 패배한 뒤폐위되어 망명길에 올랐고 3년 뒤 영국에서 사망했다.



 

 

 

 

 

빅토리아 여왕

 

나처럼 가정생활이 행복하고 축복을 받으면(내 나라가 안전하다는 전제하에)정치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 1846년 -

여기 실린 빅토리아 여왕의 사진은 1854년 6월 30일 조저 펜턴이 촬영한 것이며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이자 동반자인앨버트 공의 후원을 받아 촬영한 일련의 초상 사진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진을 촬영한 날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에"사진 촬영은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걸렸다" 라고 적었다.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이 사진의 구도는 전형적이다. 꽤나 수수하고 가정적인 옷차림, 무릎에 놓인 책, 반쯤 드러난 머리칼이 무색하게도여전히 그녀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레이트이스턴호

 

당대 세계 최대의 선박을 완성했을 때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조지 스티븐슨, 조지프 바잘게트와 함께 브루넬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가장 위대한 공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높은 모자와 시가는 브리스톨의 클리프턴 서스펜션 브리지, 런던의 패딩던 역, 대서부 철로같이

건축에서 이룬 그의 업적만큼이나 잘 알려진 것들이다. 부루넬의 작품은 19세기 영국의 야심에 힘을 실어준

모험과 발명의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에 보이는 그레이트이스턴호는 브루넬이 설계한 세 번째 선박으로 그의 주요 프로젝트 중 마지막 작업이었다.

1854년에서 1858년 사이 런던 밀월의 존 스콧 러셀 조선소에서 건조된 것으로 32.000톤 급으로 설계되었다. 유럽을 출발,

재급유 없이 곧장 인도의 무역 거점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로 향하는 긴 여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 브루넬의 목적이었다.

운항하는 동안 가장 위대한 공헌은 대서양 횡단 전신선을 놓은 일이었다. 그러나 규모와 비용 탓에 배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게 확인되었고 1889년에 선체는 헤체되고 만다.

 

 

 

 

 

 

 

 

하마 열풍

 

19세기에 진보된 기술력과 교통에서 이룬 발전 덕분에 세계는 좁아졌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산업사회와 멀리 떨어진 곳을 찾는

취향이 급속히 늘어났다. 아마 이 하마만큼 이국적인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 하마는 아프리카에서 새끼였들 때 포획된 것을 1850년

이집트 총독의 증기선에 실어 영국으로 보냈고, 런던 동물원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오바이시라는 이름은 처음 발견되었던

나일강의 섬에서 따온 것인데,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영국에 들어온 하마 오바이시는 런던에 '하마 열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사진은 1852년에 스페인 출신의 몬티손 백작 후안이 오바이시의 우리 안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런 촬영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사진의 구도와 대상 모두 고독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선택은.......

끊임없이 작용할 준비가 된 힘이다.

자연의 작품이 예술 작품보다 월등히 나은 것처럼.

자연선택은 인간의 보잘것없는 노력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힘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1859년

 

 

종의 기원

 

1859년에 영국인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다윈이 현지 조사와 연구를 위해 해온 오랜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1830년대 비글호를 타고 5년에 걸친 대장정에 올랐던

일을 포함해, 남아멜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갈라파고스섬에서 새와 동물을 채집했고 그들의 차이를 분석

자연계를 연구했다. 이 서적 출판으로 다윈은 여러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으며, 특히 창조론에 맞설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을 쓴 일을 마치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았다" 라고 쓴 바 있다.

 

 말년에 유명 스튜디오 엘리어트 앤드 프라이사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는

 다윈이 20년 동안 길러온 근사한 수염을 볼 수 있다.

 

 

 

 

 

 

 

 

세계를 전시하다

 

제국의 시대는 경이와 약탈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열강이 그들의 지배력을 지구 전역으로 확대하면서 모국에서는

혁신, 신기술, 제조된 상품, 그리고 본래의 맥락에서 잘려 나온 특별한 물품들을 전시하려는 취향이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 이후 산업박람회 전통이 지속되었다.

 

 

영국도 그에 착안해 1851년에 처음으로 '대박람회'로 알려진 '세계박람회'를 시작했다.

하이드파크에 철골과 유리로 지어진 수정궁에 전 세계에서 운반된 10만여 개의 전시물이 전시되었다.

전시회를 마친 수정궁은 헤체되어 1854년 시드넘에 다시 설치되었고 새로운 여러 전시물이 추가되었다.

이 사진은 이집트 남부의 아부심벨 신전에서 가져온, 거푸집으로 제작한 두 개의 대형 석고상이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았고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운 당신을 보고 있어......

 

-알렉산드르 2세가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야에게 보낸 편지 -

 

 

추문에 휩싸인 차르

 

1855년 3월 2일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노인은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충고를 했다. "러시아를 섬겨라!" 그런 다음 그는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덧붙였다.

"모든 것을 이렇게 잡거라." 36살의 알렉산드르 2세는 그날 밤 러시아 로마노프가의 차르(tsar, 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로서

니콜라이를 계승했고 향후 25년 동안,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충고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했다.

 

방대한 영토 크기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산업, 정치, 문화 발전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크게 뒤져 있었다.

사실 알렉산드르 2세의 칫는 두 열강에 맞서 크림반도에서 벌이던 치열한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수치스럽게도 그 전쟁에서 러시아의 열세가 여실히 드러났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가장 주목한 만한 개혁은 1861년 농노해방이었다.

그는 언론에 대한 규제도 완화했고, 지방정부와 군대를 재편성했으며, 러시아의 철도를 확장했다.

로마노프가의 관능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알렉산드르, 2세는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야 공녀와 뜨거운 밀애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예카테리나가 11살이었을 때 만났고 알렉산드르 2세는 그녀를 "음탕한 개구쟁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인민의 의지당(Narodnaya volya)'이라는 이름의 사회주의 혁명 조직원 3명에게 피살 되었다.

그들은 폭탄으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했다.

 

 

 

 

 

 

 

 

 

"유럽의 병자"

 

러시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적수 가운데 하나는 오스만제국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1853년 영국의 외교관과 만난 자리에서 오스만 제국을 "노쇠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문구는 몇 년 동안 "유럽의 병자"로 잘못 회자되었지만 바탕에 깔린 생각은 같았다.

14세기에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현재의 이라크와 오스트리아까지의 영토를 장악하며 한때 강성했던

이슬람 제국은 1850년대에 이르러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여기 수록된 콘스탄티노플 사진은 1855년에 영국의 전쟁 사진가 제임스 로버트슨이 촬영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400년 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후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그 도시는 부유하고 다문화적이었으며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어 무역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1850년대 가장 중요했던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출입을 통제하는 지점이었다는 점이다. 그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특히 러시아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제국의 이해관계에도 중요한 장소였다.

 

 

 

 

 

 

 

크림 전쟁

 

오스만제국의 붕괴는 단지 외교관들의 공론적인 우려로만 그치지 않았다.

1852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그리스정교회 수도자와 라틴 교회 수도자들이 촛대를 들고

서로를 공격한 일이 전쟁의 구실이 되었다. 이 품위 없는 광경은 결국 2,4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유럽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한 그 전쟁에서 60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이 소동에 이어,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러시아 니콜라이 1세가 모두 앞다투어 예루살렘의 크리스트교

성소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오스만제국의 통치자에게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분쟁은 조정되니 않았고, 러시아가 오늘날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공격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 역시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 가능성에 자극을 받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개입했다. 1854년 9월 영국, 프랑스, 오스만제국은 흑해와

맞닿은 크림 반도와 세바스토폴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심장부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림 전쟁에 가담한 모든 참전국의 조건은

참혹했다. 전선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런더타임즈》에 타전되었지만 질병이나 역경, 인명 피해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없었다.

 

이 사진은 로저 펜턴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 속 영국 왕립 포병대 소속 토머스 롱워스 데임스 대위는 정교하게 윤색된 전쟁의

광경 속에 말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종군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이 본 전장의 현실은 이 사진과는 달랐다.

그는 기사에 "런던의 거지조차 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영국 병사들과 비교하면 왕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라고 썼다.

 

 

 

 

 

 

 

 

 

경기병대의 돌격

 

이 사진은 1854년 10월 25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발라클라바의 전장 모습이다. 로저 펜턴이 촬영한 사진 속 전장의 모습은

버려진 포탄들이 나뒹굴고 있기는 하지만 고요하기 그지 없다.(펜턴이 직접 포탄을 가져다 두었는지를 두고 여전히 놀란이 있다).

이후 경기병대의 돌격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에서, 그리고 화가 리처드 케이턴 우드빌의 화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미숙한 장교들의 잘못된 명령에 따라 673명의 영국 경기병이 러시아의 포열(布列)을 향해 달려가는 처참한 작전에 투입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이 일로 1855년 1월 런던에서 애버딘 내각이 사퇴했다.

 

 

 

 

 

 

 

 

머리칼에 기름을 발라 ······ 한쪽 머리에 요염하게 붙이고

군복을 입어 드러난 아름다운 허리 ……

매혹적인 그녀의 모습

 

-《레이놀드 뉴스》에 묘사된 칸티니에르, 1854년 12월 -

 

 

전쟁 속 여성

 

19세기 중반, 전쟁은 남성들의 싸움이었지만 여성들의 도움 또한 매우 컸다.

여성들은 군대에 식량을 배급하고 부상병을 간호하고 크림반도에서는 남성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이 이름 없는 칸티니에르 사진은 크림반도에서 로저 펜턴이 촬영한 것이다.

 

 

 

 

 

 

 

 

인도 반란

 

유럽에서 열강들이 싸우고 있는 동안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또 다른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도에서 영국의 통치는 1600년대 이래 동인도회사를 통해 확장되었다. 왕의 후원을 받고, 정치적 술수와 무자비한 사병 병력의

힘을 이용해, 동인도회사는 19세기 중반까지 히말라야엣 마드라스까지, 아프가니스탄의 국경부터 버마까지 인도 반도 절반 이상을

통치했다. 1857년 5월 10일에 주둔지 메루트에서 저항적인 세포이들의 주도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델리로, 그리고

1856년 5월 동인도회사가 합병한 아와드 지방의 중심지 러크나우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여기 수록된 사진은 반란 직후 러크나우

이슬람 사원을 촬영한 것이다. 1858년 말에 러크나우와 델리는 폐허가 되었고 북부 인도는 18개월 동안 소란스러웠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인도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영국령 인도 제국의 탄생

 

이 사진은 이탈리아의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가 1858년에 촬영한 것인데 반란은 영국인들 사이에서 즉각적인 복수심을 불러

일으켰고, 영국 내 강경파 언론이 칭찬해 마지 않던 무자비한 복수로 표출되었다.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은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를 끝내버리고 국왕의 직접 통치를 선포했다. 인도 제국(Indian Empire,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한 식민지 인도의 공식 명칭)

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후로 영국은 인도 문화와 위계질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철도와 운하를 도입하고 각급 학교

설립을 장려했으며 근대 인도의 기반이 되는 시설들을 도입했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런던의 이해세력을 염두에 둔 일이었다.

그렇지만 수십 년 뒤에 많은 사람이 보았듣시 그 궁극적인 효과는, 결국 영제국의 붕괴를 초래하게 될 인도 민족주의를 파종한 것이었다.

 

 

 

 

 

 

 

 

아편 전쟁

 

영국인이 인도에 매력을 느낀 가장 큰 이유 하운데 하나는 아편이었다.

당시 영국령 벨골에서 재배되는 양귀비는 중독성 강한 약물로 제조되어 세계 전역에, 특히 중국에 수출되었다.

중국에는 아편이 성기능을 돕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열광적인 아편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척한 모습의 중독자들이

우글대는 아편굴은 중국의 도시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청 왕조는 아편중독으로 사회가 파괴되고 있음을 깨닫고 영국의 아편 판매를 차단하려고 했다.

1839년부터 1842년 사이 제1차 아편 전쟁이 벌어졌고 1856년에는 제2차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가 청에 맞서 싸웠다. 이 사진은 1860년 8월 영국과 프랑스가 승리를 거둔 직후 펠리체 베아토가 촬영한 것으로 베이징

접근을 막아주던 다구 포대들 가운데 하나의 내부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에 담긴 주검들은 1850년대 초 크림 전쟁을 특징

짓던 피 한 방울 없는 전쟁 사진에서 탈피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개월 뒤에 영국 군대는 원명원에서 값비싼 도자기와 보물

들을 약탈하고 그곳에 불을 질렀다. 굴욕을 당한 청 황제는 도주했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매우 유리한 징벌적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의 팽창

 

유럽의 구제국들이 동쪽으로 팽창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18세기 혁명 전쟁으로 탄생한 신생국 미국도 팽창하고 있었다.

1850년대에 미국 정부는 "명백한 운명(미국이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 사이 모든 땅을 포용할 운명이라는 믿음)" 이라는

기치 아래 오늘날의 미 중서부 영토를 공격적으로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명백한 운명은 결국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출현을 뒷받침했지만, 대평원의 포타와토미족 같은 아메리카 토착 부족들에게는 금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사진은 두 사람의 포타와토미족을 보여준다. 그들은 조약에 따라 본래의 고향을 떠나 네브래스카와 캔자스의 새 영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뒤이어 미국이 미국이 이 지역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정착에 나서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또 다시

강제 이주되었다. 끊임없이 반복된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절멸에 이를 정도로 감소했다.

 

 

 

 

 

 

 

 

 

캘리포니아 드림

 

미국이 태평양을 향해 팽창하면서 켈리포니아는 1848년에 연방의 31번재 주가 되었다.

같은 해에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금광이 발견되었고 채굴꾼들은 서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엄청난 부를 파내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이 자진에는 백인 광부와 중국인 광부가 나란히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존재했다.

캘리포니아 의회는 입법을 통해 이들 사이 분쟁이 발생할 경우 백인이 유리하도록 보장했고 중국인 광부들에게는

매달 부담스러운 세금과 면허료를 부과했다. 1854년에 캘리포니아주를 상대로 한 조지 W. 홀의 소송에서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백인 시민을 상대로 한 법적 소송의 경우 중국계 미국인과 이민자들은 증언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기본 권리의 부정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흑인, 혼혈인, 아메리카 토착민들과 하나의 범주로 묶었으며

노예제를 법으로 금지한 이른바 자유주들에서조차 암묵적으로 백인들의 우월한 지위를 강조했다.

 

 

 

 

 

 

 

 

캐나다를 잇다

 

북아메카의 정착지들은 철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수천 길로미터의 철길을 뒤덮은 증기 엔진들이 이전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거리를 가로질러 빠르게 육로를 연결했다. 이것은 캐나다와 미국 북부에서 특히 중요했다. 1850년대에는 캐나다의 그랜드 트렁크

철도회가가 몬트리올과 온타리오를 잇는 거대한 철도망 건설에 착수했다. 그 철도는 남족으로 버몬트주와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

 등지로도 연결되었다. 철도로 연결된 캐나다는 정치적 통일성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프랑스어권 지역과 영어권 지역

으로 나뉘기는 했어도 1840년에 하캐나다와 상캐나다를 아우르는 하나의 영국령 캐나가가 출현했다. 1867년에 인접한 두 개의

영국령, 노바스코샤와 뉴브런즈웍도 캐나다에 합류했다. 그렇지만 이 정치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캐나다만큼 넓지는 않았다.

퓨리리어호 서부 영역 전체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캐나다가 영국의 감독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1982년이었지만 19세기 중반을 지나는 동안 캐나다의 정착지가 늘어났고 독립성이 커졌다.

 

 이 사진은 스코틀랜드인 월리엄 노트먼이 촬영한 여러 풍경 사진 가운데 하나로 영국령 중 하나인 캐나아의 역사를 보여준다.

노트먼은 1856년에 캐나다로 이주했는데 4년 뒤 장차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될 앨버트 공이 이곳을 시찰할 때 그를 수행했다.

 

 

 

 

 

 

 

 

 

1865년 4월 14일 한밤중에 "나는 미쳤다!" 라고 외치며 미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이 집을 뛰쳐나온 21세의

  루이스 파월은 하수구에 피뭍은 칼을 집어 던지고 거리로 달려갔다. 그날은 미국 역사에서 비탄의 날이었다.

파월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수어드를 뒤로하고 달아났다. 수어드는 칼에 찔린 채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장소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몇 블록 떨어진 포드 극장에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링컨은 <우리 미국인 사촌> 을 관람하던 중 유명 배우 존 월커스 부스가

쏜 총에 머리를 맞았다. 수어드는 살았지만 링컨은 다음 날 아침 사망했다. 부통령 앤드루 존슨을 살해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같은 날 링컨의 후임자로 대통령 선서를 했다. 미국의 대통령이 암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파월은 어느 여인숙에 묵고 있는 게 확인되어 3일 뒤 체포되었다. 공범들도 대부분 잡혔다.(부스는 사살되었다).

곧 그들의 동기가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불만을 품은 남부 연합의 지지자들이었다. 남부 연합은 1861년 노예제 반대

진영인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데 항의하며 연방을 탈퇴한 남부 주들의 결사체였다. 남부의 분리 선언은 4년 동안

62만 명의 미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남부 연합의 패배로 끝을 맺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이 사진은 파월이 내너코스티아강에 정박한 미 해군선 소거스호에 감금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촬영된 것이다.

사진가는 알렉산더 가드너로 미국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인이었다. 그는 미국에 와서 가장 중요한 전투와 그 시절

주요 인물들의 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의 생생한 구도와 죽음과 폭력에 미동도 하지 않는 파월의 시선은, 가드너 역시

로저 펜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카메라에 담은 장면들을 심각하게 조작했었다는 사실을 감춰준다. 이 사진에서 파월은

무심하고 냉담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그는 마음이 괴로운 상태였다. 그는 참혹한 상태로 구금되었고, 그래서 바로 며칠

전 감옥의 창살에 거듭 머리를 박아 자살을 시도했었다. 여기 수록된 사진은 반항적인 모습의 전형을 보여 준다. 마치

패션 잡지의 표지에 실린 록 스타의 반항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가드너는 몇 개월 뒤 진행된 파월과 공모자

세 사람의 교수형 자리에 참석한 유일한 사진가였다. 그들은 1865년 7월 7일 워싱턴의 무기고에서 처형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1860년대를 규정하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세계의 다른 곳들 또한 다른 중요한 봉기들 때문에

요동쳤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 아래 있던 프로이센 왕국은 이웃의 덴마크와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중부 유럽의 주도적인 강국으로 떠올랐다. 이탈리아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지배 아래 통일을 이루었다. 총구의

위협을 받으며 같은 시기에 발생한 (서로 연결된) 이 두 국민국가 건설의 물결은, 신성로마제국의 전성기부터 지속된 중부

유럽의 격변이라는 긴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후 20세기 세계 전체를 가로지른 전 지구적 전쟁들 속에서 그

영향이 이어진다. 한편 러시아는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을 선언하며 50년에 걸친 사회적, 정치적 혁명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일본은 혁명과 개혁의 정신에 사로잡혔으며 중국은 카리스마 넘치는 두 사람의 태후 아래

기나긴 근대화의 시기 에 돌입했다.

 

기술이 지속적으로 진보하고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새로운 철길과 전신선이 건설되어 세계는 더욱 긴밀히 연결되었다.

운하가 건설되었고 잠수함 같은 새로운 운송수단이 만들어졌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원소들을 발견했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급격히 바꾸어놓을 기술들을 창조했다. 살균법은 질병을 예방하고 수명을 연장했다.

그런가 하면 다이너마이트는 점점 더 커지는 인간의 능력이 과학을 파괴의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가리발디

 

1860년 5월 2일 시칠리아 서부 항구에 입항한 선박에서 천인대(I Mille, 天人隊)로 알려진 붉은 셔츠 군대가 앞다투어 하선했다.

당대 가장 유명하고 대담한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주세페가 가리발디의 지휘 하래 이들 무장 군인들은 결의에 차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부르봉 군주가 통치하는 시칠리아를 해방하여 신생 이탈리아 왕국에 합류시키는 것이었다.

 

가리발디에게 이탈리아의 통일은 그가 한평생 헌신해온 대의명분의 마지막이었다. 1807년에 태어난 가리발디는 젊은 아이에

혁명에 이끌렸고 26세의 나이에 때마침 이탈리아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남아메리카로 향했고 운명적으로 연이은 반군

활동에 직면했으며 브라질 제국에 맞서 파라포스 전생(1835~1845까지 브라질 제국 남부 일대에서 농민과 목동이 주축이 되어

 전개된 공화주의 반란)과 우루과이 내전에 참가했다.

 

가리발디는 게릴자전의 대가였으며 아주 유능한 해군 지휘관이었다. 1850년대 그는 미국과 영국 사이를 오가는 상선을 운영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정치적 요구에 의해 이탈리아는 언제나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1860년 그의 시칠리아 상륙은 1871년 이탈리아의 승리로 마무리될 원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가리발디의 전설은 그의 업적들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붉은 셔츠를 입은 모습의 이 사진은 1864년

촬영된 것이다. 그의 이런 복장은 낭만적 탐험가이자 모험가라는 그의 평판과 결합되었고 세게 곳곳에 그의 상징적인 조각상이

세워졌다. 물론 그가 사랑했고 그래서 통일을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했던 이탈리아에 그의 조각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 통일

 

로마 외곽에 자리 잡은 살라리오 다리는 로마 제국의 붕괴에도, 야만인 정복자들의 약탈에도, 나폴레옹 1세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1860년대까지 건재했다. 그러나 1867년 다리 중앙에 있던 유명한 25미터 석조 아치는 결국 다리 아래 강물로 무너져 내렸다. 가리발디

가 이끄는 군대의 진격을 저지하려던 교황과 프랑스 군대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살라리오 다리는 이탈리아 반도의 분열된 국가들을 통일

하려는 정치 군사 운동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어로 '부흥'의 의미)의 희생양이었다. 이탈리라의 민족주의자들은 19세기 대부분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며 보냈다. 그리고 1867년에 이르러 그 꿈은 거의 실현되고 있었다.

로마 중심의 교황령 국가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그들이 장악했다.

 

1861년 로마가 통일된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포되었지만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1867년에 가리발디의 병사들은 로마의 점령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프랑스 동맹군의 지원을 받은 교황 군대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살라리오 다리의 파괴는 바로 이 전투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로마는 결국 1870년 9월 20일에 이탈리아군에 함락되었고

이탈리아는 다음 해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지배 아래 통일되었다. 살라리오 다리는 1874년에 재건되었고

 20세기에자동차 통행을 위해 확장되었다. 오늘날 그 다리는 이탈리아의 국도 SS4의 볼품없는 일부가 되었다.

 

 

 

 

 

 

 

 

 

비스마르크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크림 전쟁의 여파와 결합되어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재편했다.

1860년대에 이르러 가장 뚜렸한 승자의 하나로 떠오른 것은 프로이센 왕국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철의 재상'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성의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이탈리아가 그랬듯이, 소규모 국가들이 느슨하게 결합된 오래된 독일 왕국의 정치는 국민 통합으로 향하고 있었다.

1848년부터 1849년 사이 일련의 혁명이 일어났지만 이러한 통일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고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1862년에

노련한 외교관인 비스마르크를 수상에 앉혔다. 그의 지상 목표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연방을 만들어 통일된 독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향후 10년 동안 인접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신속하고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로록 감독하며

유럽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1866년에 프로이센은 사도바(현재의 체코 공화국)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물리쳤고 다수의

소규모 독일 국가들을 합병했다. 같은 해에 비스마르크는 다섯 차례나 총격을 당하며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1870년부터 1871년 사이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치면서 독일의 완전한 통일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빌헬름 1세는 황제로 등극했고 비스마르크는 그의 수상이 되었다. 이 사진은 노련의 비스마르크를 촬영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이력은 189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그의 전설은 그보다 더 오래 유지 되었다.

 

 

 

 

 

 

 

 

 

마지막 태후

 

중국에서는 또 한 사람의 능란한 정치인이 전쟁으로 얼룩진 청 왕조의 궁정에서 권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서태후였다.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치욕을 겪은 후 함풍제는 베이징을 빠져나갔다. 그는 1861년에 사망했고 서태후, 그리고 황제의 부인들

가운데 최고 연장자이자 자안(Gi'an)으로 알려진 동태후가 작고한 5살 난 동치제(1861~1875)의 섭정으로, 그 다음에는 광서제

(1875~1908)의 섭정으로 지배권을 행사했다. 서태후와 동태후는 '막후에서' 다스렸다. 여성은 남성 관료들의 모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장막 뒤에서 통치했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는 타고난 통치의 재능을 보여 주었다.

 

특히 그녀는 동태후를 능가했다. 1860년대 그리고 그 후 몇몇 중요한 순간에 서태후는 서양의 기술과 교육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그녀의 타고난 보수적 본능과 충돌을 일으켰다. 서태후는 통치에 대한

권위주의적 접근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다툼에 휘말렸다.

 

이 사진은 1908년 서태후가 사망하기 5년 전, 외교관의 아들이자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유순링이 촬영한 것이다.

그녀가 중국을 장악하고 나서 40년 뒤에 촬영한 사진이지만 사진 속 서태후의 위엄은 전혀 빛이 바래지 않았다.

 

 

 

 

 

 

 

 

떠오르는 태양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천황이 다스렸다. 하지만 일본의 천황은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16세기 말부터 천황은

교토의 황궁에 칩거했고 정부는 쇼군의 수중에 있었다. 쇼군은 도쿠가와 가문 출신의 봉건적인 군사 독재자로서 일본 전역의

다이묘들, 곧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영주들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1860년대에 이르면 도쿠가와 쇼군의 막부 정권이 약화되며

대외 관계에서 일본읠 전통적인 고립정책이 와해되고 있었다. 1854년에는 함선을 이끌고 온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일본에

조약을 강요했고, 조약 체격로 일본은 통상에 문호를 개방했다.

 

1863년 펠리체 베아토가 촬영한 이 사진은 일본 역사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일본 남서부 사쓰마번 사무라이들을 보여준다.

1867년 사쓰마번과 이웃한 조슈번의 지배 집단이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혁명을 강행했다.

그해 11월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자 14살 난 그의 아들 뭈끄히토가 황위를 계승했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이후 권력은

쇼군에서 다시 천황에게 이양되었으며 권력의 중심이 에도로 옮겨졌다. 또한 일본의 정책은 개방ㄹ, 제한적 민주주의, 산업화,

동향의 사회적 가치들과 결합된 서양 기술의 수용이라는 화혼양재(和魂洋才, 한국에서는 동도서기로 표현된다)로 선회했다.

 

 

 

 

 

 

 

 

농노해방령

 

"농노제가 아래로부터 제거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위에서 제거해버리는 편이 낫다." 이는 1856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말로, 러시아 전역에 살고 잇는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법적으로 노예상태였던 러시아 사회의 봉건적 조직을 지적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토지에 속박되어 자신들의 신체와 영혼까지 소유한 지주를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며 살아갔다. 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소유

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었느며 결혼도 직접 선택할 수 없었고, 법에 호소할 수도 없었으며 투표도 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는 1649년부터 농노제가 존재해왔지만 1860년대에 접얻르어서는 차르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농노제를 지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1861년에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장문의 농노해방령을 선포해 2천만 명의

 농노를 족쇄에서 풀어주었고 그들에게 재산과 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관대해 보이는 이 법령 덕분에 알렉산드르는 '해방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의 조치가 완전히 밝고 새로운 여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이 구입해 활용할 수 있는 토지는 거의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새로운 지방정부 체제는 봉건적 영주를

대신해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지방 촌락인 미르(mir)에 속박 시켰다. 농노해방은 분명 내전이나 혼란, 무질서 없이 거둔 놀라운 성과

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대다수 러시아 인민의 삶을 본질적으로 개선할 만큼 폭넓은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불완전한 혁명의 결과들은 조만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었다.

 

 

 

 

 

 

 

 

 

자본론

 

근대사에서 가장 우상화된 동시에 가장 경멸당하는 저자인 카를 마르크스는 19세기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소용돌이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는 독일의 사회과학자이자 언론인이며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자였다. 1860년대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살았다.

신문에 글을 기고하며 '자본론'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경제와 역사에 관한 기념비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1867년에『자본론』의 첫째 권이 출간되었고 마르크스는 세계적으로 급진적이며 위험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얻었다.

마르크스는『자본론』을 춘간하기 전에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과 함께 발표한 짤막한 글 『공산당 선언』(1848)으로

 이미 그런 평판을 얻을 바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분석의 토대로 삼은 것은 인간 사회가 계급투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믿음이었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봉기를 일으켜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이상적인 공산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게 두 사람의 믿음이었다.

 

마르크스는 1883년에 사망했고 그의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수십 년이 지나 그의

저술에 영감을 받은 폭력적인 혁명들이 발생했다. 이 사진은 1875년 런던에서 촬영된 것으로 당시 마르크스는 지젠트 스트리트에

있는 존 메이올의 스튜디오를 찾아 여러장의 사진을 연이어 촬영했다. 마르크스는 메이올의 각광을 받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메이올은 1850년대 유명 사진가이며 그의 성공적인 연작 사진 중에는 영국 왕가의 사진들도 포함되어 있다.

 

 

 

 

 


 

 

자유와 노예제

 

카를 마르크스는 1861년부터 1865년 사이 미국을 분열시켰던 분쟁, 미국의 여러 주들 사이에 벌어져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쟁에 관해 수십 편의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남북 전쟁의 핵심에 놓인 것은 노예제였다. 물론 산업화된 북부와,

농업과 면화무역 위주의 경제와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던 보수적인 남부 사이의 불균형 같은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그러나1860년대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은 농제라는 단 하나의 문제로 귀결되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을 지배했다. 노예를

소유할 권리가 헌법에 내포된 미국 시민의 양도할 수 없는 자유에 해당하지, 아니면 자유에 역행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노예제 폐지론자를 자처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제16대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자 1861년에 남부의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다.

이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를 수도로 삼고 그곳 출신의 제프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내세워 남부 연합을 창설했다.

4월에는 남부와 북부의 주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유명한 사진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노예 경매장이다. 푸른 연방 군복을 착용한 흑인 병사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얼핏 보면 남부의 삶을 담은 이미지 같지만 실은 1864년 남부 연합의 패배가 그의 확실시될 때 촬영된 것이다.

사진가 조지 N. 버나드는 사진의 구도를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기본권을 두고 벌어졌던

전쟁의 결과에 대해 논평하고 있다.

 

 

우리 모든 백인은 지위의 고하, 빈부의 격차를 막론하고 법 앞에 동등하다. 그러나 흑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예속 상태가 어울린다. 우리의 체제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며 ······

그들에게는 그것이 걸맞은 상태다.

 

-남부 연합 부통령 알렉산더 스티븐스, 1861년 3월 21일-

 

 

 

 

 

 

 

 

정직한 에이브

 

이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아하지는 않지만 카리스마가 있었고, 영적이지만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을 표방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의 높은 교양 수준은 거의 독학으로 얻은 것이었다. 1809년 일리노이주의

오두막에서 태어난 링컨은 1830년대 내내 정계 진출을 모색했고 1861년에 비로소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의 백악관

입성은 남북 전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링컨은 특유의 성실함과 간결한 연설 덕분에

"정직한 에이브"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 전쟁으로 그는 확실하게 변했다. 이 사진은 1860년에 알렉산더 헤슬러가 촬영한 것이다. 링컨은 남부의 영토와 기존의

생활 방식을 철저히 파괴해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또한 노예제에 대한 그의 생각도 명확해졌다. 1861년

3월 4일 취임 연설에서 링컨은 이렇게 발한 바 있다. "나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노예제를 운용하고 있는 주의 노예제

문제에 관여할 의사가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통해 "남부의 300만 노예는

 이 시점부터 영원히 자유" 라고 선언했다.

 

오늘날 링컨은 조지 워싱턴과 함께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다. 그러나 재임 시절에는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북군 총사령관이덨던 조지 매클렐런은 링컨을 가리켜 "원조 고릴라" 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런던 타임스》는 1863년 링컨의 연설을

"지루하고 상투적" 이라고 폄훼했다. 사실 이런 평은 게티즈버그 연설을 두고 한 것이었는데,

오늘날 미국의 거의 모든 학생이 그 연설을 암기하며 배우고 있다.

 

 

 

 

 

 

 

 

게티즈버그

 

1863년 7월 5일 알렉산더 가드너와 그의 조수 티모시 오설리번은 펜실베니아의 교차로 도시 게티즈버그 인근의 들판과 언덕을 돌며

남북 전쟁 중 인명 피해가 가장 컸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수천 구의 시신이 널브러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 연합 침략군은 7월 첫 3일 동안 조지 C. 마드가 이끄는 대규모 연방군(북군)에 제압되었다. 교전은 묘지의 능선

(Cemetery Ridge), 악마의 소굴(Devil's Den) 처럼 으스스한 지명의 여러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고 165,000명 이상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가드너와 오설리번이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그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사망했거나, 죽어가고 있거나. 불구의 몸이 되었거나,

 실종된 상태였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전쟁 속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 전투로 리 장군의 북부 침공은 사실상 중지되었으며 남부 연합이 무력을 통해 독립을 보장받거나 노예제를 영속시킬 수 있는

 어떤 교섭도 완전히 차단되었다. 미드, 윌리엄 T. 셔먼,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이끄는 연방군은 승리를 향해 나아갔고 1865년 4월

 버지니아주 아포멧톡스 코트하우스에서 리 장군으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아냈다. 확고한 연방지지자였던 가드너는 북군과 동행했고

그와 오설리번이 촬영한 사진들에서는 연방이 고수했던 대의명분의 정의로움과 그 전쟁의 잔인성이 강조되었다.

그들이 촬영한 가장 유명한 사진들 가운데 일부는 연출된 것이었다. 그들은 시체들을 옮겨놓고

이동 스튜디오에 보관하던 소품들을 꺼내 늘어 놓았다.

 

 

 

 

 

 

 

 

 

항복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는 남부 연합의 수도였다. 그곳은 또한 남부의 가장 뛰어난 군인 로버트 리의 고향이기도 했다.

탁월한 전략가였던 리는 전쟁 내내 남부인들이 희망을 걸었던 인물로 그의 위상은 남부 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넘어섰다.

리는 한평생 전사였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유명 인사이자 1840년대 멕시코 전쟁(이 전쟁으로 미국은 텍사스를 합병했다)의

참전 용사였으며 무자비하고 공격적인 장군이며 역경에 맞서 일련의 승리를 얻어낸 인물로 7일 전투(1862), 불런 제2전투(1862),

프레데릭스버그 전투(1862), 첸슬러스빌 전투(1863), 콜드하버 전투(1864)에서 연방 지휘관들을 압도했다.

 

여기 실린 지 장군의 사진은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사진가 매슈 브래디가 촬영한 것이다. 전쟁 기간 알렉산더 가드너 등의 사진가들이

그의 밑에서 활동했다. 1865년 4월 16일 리 장군의 집을 방문한 브래디는 아들 커스티스 리(왼쪽)와 충직한 부하 월터 H.테일러(오른쪽)

와 함께 있는 리 장군을 발견했다. 사진의 음산한 분위기에서 끔찍한 그 시대가 포착된다. 일주일 전 이미 리는 아포멧톡스 코트 하우스

에서 그의 북버지니아군과 함께 연방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이틀 전 링컨 대통령은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리 장군은 한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쟁이 끔직한 건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남자들이 전쟁을 좋아하게 될 테니."

 리가 주역을 맡은 전쟁은 62만 명이 목숨을 잃은 후 결국 막을 내렸다.

 

 

 

 

 

 

 

 

식민지 건설

 

미국 남북 전쟁의 주요 쟁점은 노예의 권리였고, 그 권리의 주체로 여겨진 노예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에서 이송된 사람들이었다.

1810년대 이후 일부 미국인들은 그들을 되돌려 보낼 것을 주장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미국식민협회는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후추해안(아프리카 서부 해안, 후추 집산지로 유명하다)으로 실어 보냈다. 취지는 좋았지만

인종주의적이었던 이러한 정책은 라이베리아 건설로 이어졌다. 그곳에서는 혼혈의 프로테스탄트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지배했다.

 

이 새로운 라이베리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윌멋 블라이든(윗줄 오른쪽 끝)은 장로교회 목사이자 언론인으로

1832년 카리브해의 세인트토머스섬에서 태어나 1850년에 라이베리아로 이주했다. 블라이든은 외교관이자 신문사 평론가이자

학자로 일하면서 라이베리아의 지식계에 깊이 관여했다. 1861년에 그는 라이베리아 대학교의 라틴어와 그리스어과 교수가 되었다.

그의 연구 가운데는 에티오피아 독립교회에 관한 방대한 저술도 포함되었는데, 지구 전역에 흩어져 있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에게 최선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여기 실린 사진은 중년을 맞은 블라이든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당시 그는 라이베리아를 떠나 이에라리온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어께 뒤로 보이는 깃발은 플테스탄티즘과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청년면려회(YPSCE)를 선전하고 있다.

블라이든이 YPSCED의 이상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는 나이가 들면서 차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이슬람교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유람

 

대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 제국의 팽창이 있었던 또 다른 지역에서 1860년대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8세기 갈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 지역은 영국의 유배지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인정되었다.

1860년대에 영국 국왕이 차지한 드넓은 영토에 농민들, 금광채국자 등의 정착민들이 터를 잡았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토지를 개간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려 왔다.

 

이들이 데려온 노동자들 가운데는 남태평양, 토러스 해협, 파푸아뉴기니의 섬들에서 노예로 잡혀 강제로 이주된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인도, 이란을 포함한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도착한 이들도 있었다.

 

북아메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식민지 건설은 4만 년에서 8만 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인근 섬들에

거주해온 토착민들과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담은 이 사진은 1860년대부터 1900년대 사이에 자주

볼 수 있는 구도로 촬영되었는데, 유럽식 의상과 예절이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은 유행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예를 들어 1860년대 멜버른의 입법자들은 원주민 보호법을 도입했다.

그 법은 빅토리아 식민지 총독에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어디에 살고 얼마나 벌지를 결정하고

아이들을 부모들과 갈라놓을 권리까지 부여했다.

 

야만적인 옛 시절에 바로 이 낙원에서

노란 제복을 입은 죄수들이 상륙했고 도적 떼들이 진지를 틀었으며,

캥거루를 쫓는 순진무구한 흑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 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 묘사, 1895년 -

 

 

 

 

 

 

 

 

스에즈 운하

 

수에즈 지협의 이집트 사막 200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조성된 인공 수로인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구상한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서유럽과 극동을 잇는 최단거리 무역로를 건설하는 것이 그 운하의 목적이었다. 당시 상인들은

'아프리카의 뿔(아프리카 대륙 동쪽 돌출부)'을 돌아 항해를 해야 했다. 그 레셉스는 이집트의 총독 모함마드 사이드 파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실현했고, 1869년에 그 운하는 공식적으로 모든 국적의 선박에 개방되었다. 운하의 개통식은

11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 동안 개최되었다. 하루 동안 종교 예식을 치르고 다음날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황제의 요트인

독수리호를 선두로 배들이 통과하는 기념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인들에게 적잖은 논란을 일으켰다. 영국인들은 수에즈 운하 때문에 자신들의 인도 무역이 방해받을까 봐

염려한 것이다. 수에즈 운하를 저지하지 못한 영국은 그 대신 개통식에서 프랑스를 앞지르기로 결정했다. 운하를 통과하는

최초의 선박으로 독수리호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영국 해군의 함선 뉴포트호가 운하 진입을 기다리고 있는

그 프랑스 요트를 앞질러버린 것이다.

 

수에즈 운하는 다가올 세기이 세계 역사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수에즈 운하는 전 지구적 운송을 훨씬 더 빠르게 만들었으며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관심이 확대되는 시기를 재촉했다. 세계 무역에서 아프리카의 중요성이 커졌고

그리하여 아프리카는 식민 정복과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인용서적: 댄 존스, 마리나 아마랄 著, 김지혜 易 『역사의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