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플한 세계사 1
THE COLOUR OF TIME: A NEW HISTORY OF THE WORLD, 1850-1960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세계는 원래 생생하고 선명하며 다채로운 색을 가진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에게 과거는 결코 생생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가 상용화된 이후 사진은 역사를 기록하는 한 부분이 되었지만,
처음 한 세기 동안은 거의 흑백의 매체였다. 그래서 과거의 풍경은 불완전하고 희미해진 채로 우리에게 남겨졌다.
여기 등장하는 사진들은 1850년부터 1960년까지 촬영된 것으로, 본래 흑백으로 촬영된 것을
디지털 작업을 통해 색을 복원하여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새롭게 볼 기회를 얻게 한 것이다.
어떤 사진은 본래 앨범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장시간의 노출과 유리판, 콜로디온, 달걀흰자, 질산은이 사용되는
복잡한 공정을 거쳐 촬영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형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도 있고, 35밀리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도 있다.
이 '역사적인' 사진에 색을 입히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컨대 어느 병사의 초상 사진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진에 등장하는 군복, 메달, 리본, 군장, 피부, 눈동자, 머리칼 등등에 색을 입히려 한다.
그러러면 가급적 서로 다른 시각 자료와 문서 자료를 통해 세세한 사실들을 일일이 검증해야 한다.
농담(濃淡)이 다른 회색만으로 본래의 색을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색』<서문> 중에서 -
카메라는 자연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 선사할 것이다.카메라는 자연의 세밀함과 웅대함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판단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창조의 힘을 발휘하는 일은 예술가들의 몫으로 남겨둘 것이다.
조저 펜턴. 1852년
1855년 3월 8일 당시 35세였던 영국인 조저 펜턴은 법률가에서 사진가로 변신하여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발라클라에 도착한다.두 명의 조수와 함께 그가 가져온 것은 카메라 5대와 렌즈 700개, 조리기구와 캠핑 장비, 지브롤터에서 구입한 말 3필, 그리고와인 장수의 수레를 개조해 이동용 암실과 침실을 설치한 마차 1대였다. 그는 급속히 발전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을 장려하기 위해결성된 사진협회의 창립 회원이었다. 사진을 판매하려는 맨체스터의 출판사가 펜턴의 여행을 재정적으로 지원했고,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이 이들을 후웠했다.
오늘날 펜턴이 세계 최초의 종군기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비록 그가 크림반도에서 수집한 초상 사진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편 영웅들의 모습만 담고 있어 기록물이라기보다는 선전물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 사진들은 1850년대 4개의 제국이 관여한 소모적인 참호전에서 수천 명의 영국군이 폭력과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실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촬영되었다. 한 편에는 영국, 프랑스, 오스만제국이, 다른 편에는 러시아가 있었다.당시 《타임스》가 크림반도의 참혹한 상황에 대한 충격적인 기사를 보도했다. 영국 정부는 펜턴에게서 이런 해로운 기사를 반박할 만한 시각 자료를 얻고자 했다.
어쨌든 크림반도로 향한 펜턴의 여행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세계사의 대사건들이 폭넓게 필름에담기기 시작했다. 사진이 후대를 위한 풍부한 광맥이 된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펜턴과 같은 사람들이 후원자를 위해 한 일은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는 세계사의 사건들을 서술하고 설명하려는 후대의 역사가들을 위한 일이 되었다.
당시는 제국의 시대였다. 당연히 지배적인 세력은 영국이었다. 정복하고 지배한 영역에는 캐나다, 인도, 버마, 남아프리카 일부와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포함되었다. 이와 더불어 영국 해군은 곳곳에 흩어진 수많은 전초기지에서 대양들을 탐사하고 지배하며 영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유럽과 중동에서는 프랑스와 오스만제국, 러시아가 영국의 경쟁 상대이자 적수였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청 왕조와 인도의 무굴제국이 경쟁하고 있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이 지배력을 발휘했다. 멕시코만과 오대호 지역 사이에서는 신생 미국이 국영을 넓혀갔다. 70년 전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대담한 반란을 통해 탄생한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영토를 사들였고 한때 강력했던 스페인 제국의 남은 부분을 장악했다. 자유민이던 미국의 백인들은 유럽계와중국계 정착민들과 함께. 방대한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안선 사이 북아메리카 땅을 분주히 식민지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팽창하면서, 미국인들은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하게 분열했고, 1860년대에는 그 결과들이 끔직할 만큼 명백해졌다.
제국의 시대를 움직인 또 다른 거대 동력은 '기술력'과 '발견'이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신기술 덕분에 사람들이 살아가고 일하고 여행하고 소통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방식이 변화했다. 해저에는 전신선이 설치되었고 해상에는 거대한 정기 여객선이 운행했다. 고색창연한 구도시들을 재건하려는 야심 찬 계획들이 실행되었고, 고대 도시들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화포들이 배치되었으며, 머나먼 이국땅을 탐험하고 생명의 근원을 파고드는 과학 연구가 이루어졌다. 질병과 강제 이주, 폭력으로 오랜 역사를가진 민족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1850년대는 전대미문의 이례적 변화의 시기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기쁨에 젖는가 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이렇듯 세상은 끊임없이 변했고, 개조한 마차를 타고 크림반도로 향한 펜턴 같은 사람들이 그 세계를 영원히 보존했다.그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삶을 포착했고, 그의 의도였든 아니든, 수백 년이 흐른 뒤 우리는 다시 한 번흑백의 (아니 실제로는 천연색의) 그 시대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프랑스는 1853년부터 크림 전쟁에 참가했고, 1859년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 사진이 촬영된 186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압제가 느슨해졌다. 하지만 결국 나폴레옹 3세는뼛속까지 보나파르트 집안의 일원임을 증명했다. 1870년 프로이센과 치른 전쟁에서 패배한 뒤폐위되어 망명길에 올랐고 3년 뒤 영국에서 사망했다.
빅토리아 여왕
나처럼 가정생활이 행복하고 축복을 받으면(내 나라가 안전하다는 전제하에)정치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 1846년 -
여기 실린 빅토리아 여왕의 사진은 1854년 6월 30일 조저 펜턴이 촬영한 것이며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이자 동반자인앨버트 공의 후원을 받아 촬영한 일련의 초상 사진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진을 촬영한 날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에"사진 촬영은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걸렸다" 라고 적었다.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이 사진의 구도는 전형적이다. 꽤나 수수하고 가정적인 옷차림, 무릎에 놓인 책, 반쯤 드러난 머리칼이 무색하게도여전히 그녀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레이트이스턴호
당대 세계 최대의 선박을 완성했을 때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조지 스티븐슨, 조지프 바잘게트와 함께 브루넬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가장 위대한 공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높은 모자와 시가는 브리스톨의 클리프턴 서스펜션 브리지, 런던의 패딩던 역, 대서부 철로같이
건축에서 이룬 그의 업적만큼이나 잘 알려진 것들이다. 부루넬의 작품은 19세기 영국의 야심에 힘을 실어준
모험과 발명의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에 보이는 그레이트이스턴호는 브루넬이 설계한 세 번째 선박으로 그의 주요 프로젝트 중 마지막 작업이었다.
1854년에서 1858년 사이 런던 밀월의 존 스콧 러셀 조선소에서 건조된 것으로 32.000톤 급으로 설계되었다. 유럽을 출발,
재급유 없이 곧장 인도의 무역 거점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로 향하는 긴 여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 브루넬의 목적이었다.
운항하는 동안 가장 위대한 공헌은 대서양 횡단 전신선을 놓은 일이었다. 그러나 규모와 비용 탓에 배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게 확인되었고 1889년에 선체는 헤체되고 만다.
하마 열풍
19세기에 진보된 기술력과 교통에서 이룬 발전 덕분에 세계는 좁아졌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산업사회와 멀리 떨어진 곳을 찾는
취향이 급속히 늘어났다. 아마 이 하마만큼 이국적인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 하마는 아프리카에서 새끼였들 때 포획된 것을 1850년
이집트 총독의 증기선에 실어 영국으로 보냈고, 런던 동물원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오바이시라는 이름은 처음 발견되었던
나일강의 섬에서 따온 것인데,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영국에 들어온 하마 오바이시는 런던에 '하마 열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사진은 1852년에 스페인 출신의 몬티손 백작 후안이 오바이시의 우리 안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런 촬영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사진의 구도와 대상 모두 고독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선택은.......
끊임없이 작용할 준비가 된 힘이다.
자연의 작품이 예술 작품보다 월등히 나은 것처럼.
자연선택은 인간의 보잘것없는 노력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힘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1859년
종의 기원
1859년에 영국인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다윈이 현지 조사와 연구를 위해 해온 오랜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1830년대 비글호를 타고 5년에 걸친 대장정에 올랐던
일을 포함해, 남아멜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갈라파고스섬에서 새와 동물을 채집했고 그들의 차이를 분석
자연계를 연구했다. 이 서적 출판으로 다윈은 여러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으며, 특히 창조론에 맞설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을 쓴 일을 마치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았다" 라고 쓴 바 있다.
말년에 유명 스튜디오 엘리어트 앤드 프라이사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서는
다윈이 20년 동안 길러온 근사한 수염을 볼 수 있다.
세계를 전시하다
제국의 시대는 경이와 약탈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열강이 그들의 지배력을 지구 전역으로 확대하면서 모국에서는
혁신, 신기술, 제조된 상품, 그리고 본래의 맥락에서 잘려 나온 특별한 물품들을 전시하려는 취향이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 이후 산업박람회 전통이 지속되었다.
영국도 그에 착안해 1851년에 처음으로 '대박람회'로 알려진 '세계박람회'를 시작했다.
하이드파크에 철골과 유리로 지어진 수정궁에 전 세계에서 운반된 10만여 개의 전시물이 전시되었다.
전시회를 마친 수정궁은 헤체되어 1854년 시드넘에 다시 설치되었고 새로운 여러 전시물이 추가되었다.
이 사진은 이집트 남부의 아부심벨 신전에서 가져온, 거푸집으로 제작한 두 개의 대형 석고상이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았고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운 당신을 보고 있어......
-알렉산드르 2세가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야에게 보낸 편지 -
추문에 휩싸인 차르
1855년 3월 2일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노인은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충고를 했다. "러시아를 섬겨라!" 그런 다음 그는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덧붙였다.
"모든 것을 이렇게 잡거라." 36살의 알렉산드르 2세는 그날 밤 러시아 로마노프가의 차르(tsar, 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로서
니콜라이를 계승했고 향후 25년 동안,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충고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했다.
방대한 영토 크기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산업, 정치, 문화 발전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크게 뒤져 있었다.
사실 알렉산드르 2세의 칫는 두 열강에 맞서 크림반도에서 벌이던 치열한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수치스럽게도 그 전쟁에서 러시아의 열세가 여실히 드러났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가장 주목한 만한 개혁은 1861년 농노해방이었다.
그는 언론에 대한 규제도 완화했고, 지방정부와 군대를 재편성했으며, 러시아의 철도를 확장했다.
로마노프가의 관능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알렉산드르, 2세는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야 공녀와 뜨거운 밀애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예카테리나가 11살이었을 때 만났고 알렉산드르 2세는 그녀를 "음탕한 개구쟁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인민의 의지당(Narodnaya volya)'이라는 이름의 사회주의 혁명 조직원 3명에게 피살 되었다.
그들은 폭탄으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했다.
"유럽의 병자"
러시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적수 가운데 하나는 오스만제국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1853년 영국의 외교관과 만난 자리에서 오스만 제국을 "노쇠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문구는 몇 년 동안 "유럽의 병자"로 잘못 회자되었지만 바탕에 깔린 생각은 같았다.
14세기에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현재의 이라크와 오스트리아까지의 영토를 장악하며 한때 강성했던
이슬람 제국은 1850년대에 이르러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여기 수록된 콘스탄티노플 사진은 1855년에 영국의 전쟁 사진가 제임스 로버트슨이 촬영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400년 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후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그 도시는 부유하고 다문화적이었으며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어 무역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1850년대 가장 중요했던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출입을 통제하는 지점이었다는 점이다. 그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특히 러시아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제국의 이해관계에도 중요한 장소였다.
크림 전쟁
오스만제국의 붕괴는 단지 외교관들의 공론적인 우려로만 그치지 않았다.
1852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그리스정교회 수도자와 라틴 교회 수도자들이 촛대를 들고
서로를 공격한 일이 전쟁의 구실이 되었다. 이 품위 없는 광경은 결국 2,4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유럽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한 그 전쟁에서 60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이 소동에 이어,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러시아 니콜라이 1세가 모두 앞다투어 예루살렘의 크리스트교
성소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오스만제국의 통치자에게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분쟁은 조정되니 않았고, 러시아가 오늘날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공격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 역시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 가능성에 자극을 받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개입했다. 1854년 9월 영국, 프랑스, 오스만제국은 흑해와
맞닿은 크림 반도와 세바스토폴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심장부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림 전쟁에 가담한 모든 참전국의 조건은
참혹했다. 전선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런더타임즈》에 타전되었지만 질병이나 역경, 인명 피해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없었다.
이 사진은 로저 펜턴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 속 영국 왕립 포병대 소속 토머스 롱워스 데임스 대위는 정교하게 윤색된 전쟁의
광경 속에 말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종군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이 본 전장의 현실은 이 사진과는 달랐다.
그는 기사에 "런던의 거지조차 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영국 병사들과 비교하면 왕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라고 썼다.
경기병대의 돌격
이 사진은 1854년 10월 25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발라클라바의 전장 모습이다. 로저 펜턴이 촬영한 사진 속 전장의 모습은
버려진 포탄들이 나뒹굴고 있기는 하지만 고요하기 그지 없다.(펜턴이 직접 포탄을 가져다 두었는지를 두고 여전히 놀란이 있다).
이후 경기병대의 돌격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에서, 그리고 화가 리처드 케이턴 우드빌의 화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미숙한 장교들의 잘못된 명령에 따라 673명의 영국 경기병이 러시아의 포열(布列)을 향해 달려가는 처참한 작전에 투입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이 일로 1855년 1월 런던에서 애버딘 내각이 사퇴했다.
머리칼에 기름을 발라 ······ 한쪽 머리에 요염하게 붙이고
군복을 입어 드러난 아름다운 허리 ……
매혹적인 그녀의 모습
-《레이놀드 뉴스》에 묘사된 칸티니에르, 1854년 12월 -
전쟁 속 여성
19세기 중반, 전쟁은 남성들의 싸움이었지만 여성들의 도움 또한 매우 컸다.
여성들은 군대에 식량을 배급하고 부상병을 간호하고 크림반도에서는 남성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이 이름 없는 칸티니에르 사진은 크림반도에서 로저 펜턴이 촬영한 것이다.
인도 반란
유럽에서 열강들이 싸우고 있는 동안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또 다른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도에서 영국의 통치는 1600년대 이래 동인도회사를 통해 확장되었다. 왕의 후원을 받고, 정치적 술수와 무자비한 사병 병력의
힘을 이용해, 동인도회사는 19세기 중반까지 히말라야엣 마드라스까지, 아프가니스탄의 국경부터 버마까지 인도 반도 절반 이상을
통치했다. 1857년 5월 10일에 주둔지 메루트에서 저항적인 세포이들의 주도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델리로, 그리고
1856년 5월 동인도회사가 합병한 아와드 지방의 중심지 러크나우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여기 수록된 사진은 반란 직후 러크나우
이슬람 사원을 촬영한 것이다. 1858년 말에 러크나우와 델리는 폐허가 되었고 북부 인도는 18개월 동안 소란스러웠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인도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영국령 인도 제국의 탄생
이 사진은 이탈리아의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가 1858년에 촬영한 것인데 반란은 영국인들 사이에서 즉각적인 복수심을 불러
일으켰고, 영국 내 강경파 언론이 칭찬해 마지 않던 무자비한 복수로 표출되었다.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은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를 끝내버리고 국왕의 직접 통치를 선포했다. 인도 제국(Indian Empire,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한 식민지 인도의 공식 명칭)
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후로 영국은 인도 문화와 위계질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철도와 운하를 도입하고 각급 학교
설립을 장려했으며 근대 인도의 기반이 되는 시설들을 도입했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런던의 이해세력을 염두에 둔 일이었다.
그렇지만 수십 년 뒤에 많은 사람이 보았듣시 그 궁극적인 효과는, 결국 영제국의 붕괴를 초래하게 될 인도 민족주의를 파종한 것이었다.
아편 전쟁
영국인이 인도에 매력을 느낀 가장 큰 이유 하운데 하나는 아편이었다.
당시 영국령 벨골에서 재배되는 양귀비는 중독성 강한 약물로 제조되어 세계 전역에, 특히 중국에 수출되었다.
중국에는 아편이 성기능을 돕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열광적인 아편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척한 모습의 중독자들이
우글대는 아편굴은 중국의 도시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청 왕조는 아편중독으로 사회가 파괴되고 있음을 깨닫고 영국의 아편 판매를 차단하려고 했다.
1839년부터 1842년 사이 제1차 아편 전쟁이 벌어졌고 1856년에는 제2차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가 청에 맞서 싸웠다. 이 사진은 1860년 8월 영국과 프랑스가 승리를 거둔 직후 펠리체 베아토가 촬영한 것으로 베이징
접근을 막아주던 다구 포대들 가운데 하나의 내부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에 담긴 주검들은 1850년대 초 크림 전쟁을 특징
짓던 피 한 방울 없는 전쟁 사진에서 탈피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개월 뒤에 영국 군대는 원명원에서 값비싼 도자기와 보물
들을 약탈하고 그곳에 불을 질렀다. 굴욕을 당한 청 황제는 도주했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매우 유리한 징벌적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의 팽창
유럽의 구제국들이 동쪽으로 팽창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18세기 혁명 전쟁으로 탄생한 신생국 미국도 팽창하고 있었다.
1850년대에 미국 정부는 "명백한 운명(미국이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 사이 모든 땅을 포용할 운명이라는 믿음)" 이라는
기치 아래 오늘날의 미 중서부 영토를 공격적으로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명백한 운명은 결국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출현을 뒷받침했지만, 대평원의 포타와토미족 같은 아메리카 토착 부족들에게는 금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사진은 두 사람의 포타와토미족을 보여준다. 그들은 조약에 따라 본래의 고향을 떠나 네브래스카와 캔자스의 새 영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뒤이어 미국이 미국이 이 지역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정착에 나서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또 다시
강제 이주되었다. 끊임없이 반복된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절멸에 이를 정도로 감소했다.
캘리포니아 드림
미국이 태평양을 향해 팽창하면서 켈리포니아는 1848년에 연방의 31번재 주가 되었다.
같은 해에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금광이 발견되었고 채굴꾼들은 서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엄청난 부를 파내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이 자진에는 백인 광부와 중국인 광부가 나란히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존재했다.
캘리포니아 의회는 입법을 통해 이들 사이 분쟁이 발생할 경우 백인이 유리하도록 보장했고 중국인 광부들에게는
매달 부담스러운 세금과 면허료를 부과했다. 1854년에 캘리포니아주를 상대로 한 조지 W. 홀의 소송에서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백인 시민을 상대로 한 법적 소송의 경우 중국계 미국인과 이민자들은 증언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기본 권리의 부정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흑인, 혼혈인, 아메리카 토착민들과 하나의 범주로 묶었으며
노예제를 법으로 금지한 이른바 자유주들에서조차 암묵적으로 백인들의 우월한 지위를 강조했다.
캐나다를 잇다
북아메카의 정착지들은 철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수천 길로미터의 철길을 뒤덮은 증기 엔진들이 이전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거리를 가로질러 빠르게 육로를 연결했다. 이것은 캐나다와 미국 북부에서 특히 중요했다. 1850년대에는 캐나다의 그랜드 트렁크
철도회가가 몬트리올과 온타리오를 잇는 거대한 철도망 건설에 착수했다. 그 철도는 남족으로 버몬트주와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
등지로도 연결되었다. 철도로 연결된 캐나다는 정치적 통일성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프랑스어권 지역과 영어권 지역
으로 나뉘기는 했어도 1840년에 하캐나다와 상캐나다를 아우르는 하나의 영국령 캐나가가 출현했다. 1867년에 인접한 두 개의
영국령, 노바스코샤와 뉴브런즈웍도 캐나다에 합류했다. 그렇지만 이 정치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캐나다만큼 넓지는 않았다.
퓨리리어호 서부 영역 전체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캐나다가 영국의 감독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1982년이었지만 19세기 중반을 지나는 동안 캐나다의 정착지가 늘어났고 독립성이 커졌다.
이 사진은 스코틀랜드인 월리엄 노트먼이 촬영한 여러 풍경 사진 가운데 하나로 영국령 중 하나인 캐나아의 역사를 보여준다.
노트먼은 1856년에 캐나다로 이주했는데 4년 뒤 장차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될 앨버트 공이 이곳을 시찰할 때 그를 수행했다.
1865년 4월 14일 한밤중에 "나는 미쳤다!" 라고 외치며 미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이 집을 뛰쳐나온 21세의
루이스 파월은 하수구에 피뭍은 칼을 집어 던지고 거리로 달려갔다. 그날은 미국 역사에서 비탄의 날이었다.
파월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수어드를 뒤로하고 달아났다. 수어드는 칼에 찔린 채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장소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몇 블록 떨어진 포드 극장에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링컨은 <우리 미국인 사촌> 을 관람하던 중 유명 배우 존 월커스 부스가
쏜 총에 머리를 맞았다. 수어드는 살았지만 링컨은 다음 날 아침 사망했다. 부통령 앤드루 존슨을 살해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같은 날 링컨의 후임자로 대통령 선서를 했다. 미국의 대통령이 암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파월은 어느 여인숙에 묵고 있는 게 확인되어 3일 뒤 체포되었다. 공범들도 대부분 잡혔다.(부스는 사살되었다).
곧 그들의 동기가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불만을 품은 남부 연합의 지지자들이었다. 남부 연합은 1861년 노예제 반대
진영인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데 항의하며 연방을 탈퇴한 남부 주들의 결사체였다. 남부의 분리 선언은 4년 동안
62만 명의 미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남부 연합의 패배로 끝을 맺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이 사진은 파월이 내너코스티아강에 정박한 미 해군선 소거스호에 감금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촬영된 것이다.
사진가는 알렉산더 가드너로 미국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인이었다. 그는 미국에 와서 가장 중요한 전투와 그 시절
주요 인물들의 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의 생생한 구도와 죽음과 폭력에 미동도 하지 않는 파월의 시선은, 가드너 역시
로저 펜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카메라에 담은 장면들을 심각하게 조작했었다는 사실을 감춰준다. 이 사진에서 파월은
무심하고 냉담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그는 마음이 괴로운 상태였다. 그는 참혹한 상태로 구금되었고, 그래서 바로 며칠
전 감옥의 창살에 거듭 머리를 박아 자살을 시도했었다. 여기 수록된 사진은 반항적인 모습의 전형을 보여 준다. 마치
패션 잡지의 표지에 실린 록 스타의 반항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가드너는 몇 개월 뒤 진행된 파월과 공모자
세 사람의 교수형 자리에 참석한 유일한 사진가였다. 그들은 1865년 7월 7일 워싱턴의 무기고에서 처형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1860년대를 규정하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세계의 다른 곳들 또한 다른 중요한 봉기들 때문에
요동쳤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 아래 있던 프로이센 왕국은 이웃의 덴마크와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중부 유럽의 주도적인 강국으로 떠올랐다. 이탈리아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지배 아래 통일을 이루었다. 총구의
위협을 받으며 같은 시기에 발생한 (서로 연결된) 이 두 국민국가 건설의 물결은, 신성로마제국의 전성기부터 지속된 중부
유럽의 격변이라는 긴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후 20세기 세계 전체를 가로지른 전 지구적 전쟁들 속에서 그
영향이 이어진다. 한편 러시아는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을 선언하며 50년에 걸친 사회적, 정치적 혁명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일본은 혁명과 개혁의 정신에 사로잡혔으며 중국은 카리스마 넘치는 두 사람의 태후 아래
기나긴 근대화의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