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정조와 중용中庸

茶泉 2019. 9. 10. 21:58

 

 

 

 

자사 공급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편찬한 인물.

 

 

 

 

 

 

 

첫 장에 나오는 선언적 명제

 

천명지위성(性)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정조 어진

 

탁월한 학자이자 수완 좋은 정치가였으며, 각종 예술 등 다방면에 출중했던 정조에게도 난제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웠던 대목은 천주교(서학)가 성행하는 것이었다. 서양 상선의 서남해안 출몰로

 양인들의 물리적 위력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과 맞물린 시점이었다.

 

사실 천주교 문제는 1780년대 말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이에 대한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

 정조의 선택은 성리학적 이념의 강화로 가닥을 잡았다. 강도 높은 과강課講과 과제課製, 즉 경전 강의와

논술 시험을 통해 초계문신들을 성리학적 이념의 전사로 다잡고자 했던 것이다.

 

그무렵, 정조가 성리학 교육을 강화하는 것과 맞물려 몇 명의 무명 선비가 스타로 부각된다.

평생 초야에 묻혀 지내던 안석임安錫任, 박사철朴師轍 등으로, 1793년(정조 17) 4월 9일자

『정조실록』에 그들의 발굴을 알리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정조가 말하였다. "(...) 횡성의 전 참봉 안석임, 춘천의 전 주부主簿 박사철이 가장 우수하다.

안석임은 나이가 74세이고, 사철의 나이도 70에 가까워 그들에게 억지로 벼슬을 맡기기 어려운 점이 애석하다.

특별히 두 사람을 돈녕도정(정3품)에 올려 임명하라. 두 사람을 각기 영동(안석임)과 영서(박사철)의 분교관

分校官에 임명하여 어린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라. 관찰사에게 명하여 적절한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라.

그리고 만일 그들이 서울에 올라올 수 있으면 올라와서 숙배肅拜하도록 권하라

 

 

안석임과 박사철 두 사람만 특전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수의 선비들이 상을 받았다.

정조는 그들을 선발하는 절차를 낱낱이 기록하고, 선발 시험에서 주고받은 문답까지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자로 만들도록 명한다. 이름 하여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이다. 

 

정조는 성리학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관동 지역의 선비들에게 특히 주목했던 듯하다.

정조는 이듬해인 1794년(정조 18) 3월 7일, 조정 대신들에게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을 읽은 소감을 밝혔다.

 

 

"강원도에서 선발한 경전에 밝은 유생들이 쓴 책문, 곧 그들이 13經에 관해 논의한 글을 나는 차분히 읽었노라.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진실로 경전의 뜻에 이처럼 밝지 않다면 어찌 그처럼 깊이 분석할 수가 있었겠는가."

 

 

모처럼 재능 있는 시골 유생을 여럿 발굴했다는 사실에 정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794년 6월 9일 그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직접 격려하기도 했다. 이날 정조는 특별히 춘천 유생 박사철을 주목한다.

그날의 실록에는 특별히 그에게 지방관 자리를 주라는 특명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의 특명에 따라 박사철은

마침 공석이었던 강원도 회양부사(3품)에 임용되었다. 그야말로 벼락출세였던 셈.

 

정조가 박사철을 특별히 주목했던 점은 어전에서의 문답에서 몇 가지 어려운 질문을 던졌음에도

하나도 막힘없이 훌륭하게 답변했기 때문이다. 화제의 중심에 바로 『중용』이 있었던 것이다.

정조의 문집 『홍제전서』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자면.

 

 

정조: 『중용』의 서문에 관한 것이다. 인심이 사사롭게 되는 이유는 형기形氣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서경書經』홍범洪範에서 말한 바,

 "공손하고 순종하며 밝게 보고 분명하게 듣는다"는 것도 인심이라고 봐야 하는가.

 

박사철: 『서경』홍범에서 말한 다섯 가지는 형질形質을 바탕으로 해서 본연의 이치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을 인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조정: 도심道心이 바른 이유는 천성과 천명에 근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용』제31장에서

포용하고 굳게 잡으며 공경하고 분별하는 것을 타고난 기질[生質]로 본 것은 왜 그런가.

 

박사철: 이런 기질이 있어야 4개의 덕德(인의예지仁義禮智)을 온전히 갖출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힘[文理]'과 '자세히 살피고 세밀하게 따짐[密察]'이라는 4자는

 사람의기질에 관한 것입니다. 표면에 드러난 모습과 기운[形氣]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정조: 인심과 도심이 마음속에 섞여 있는데 또 다른 마음으로 이 둘을 살펴 본래의 마음[本心]을 지킨다고 한다.

그럼 인심도 하나의 마음이고, 도심도 하나의 마음인데, 살펴서 지키는 도 하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인가.

 

박사철: 인심 가운데 바른 쪽을 도심道心이라 하고, 사사로운 것을 인심이라 합니다.

이것을 살펴 본래의 마음[本心]을 지키는 것도 도심입니다. 마음이 하나인 것은 보았지만 둘이나 셋이 되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인심을 사사롭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인욕人欲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정조: 형기形氣가 사사롭다는 말은 꼭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인욕이 사사로워진 다음에야 위태롭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승부가 판가름 난다. 선정先正('옛날의 바른 선비'라는 뜻, 여기서는 주희를 가리킨다)이

호오봉胡五峯(호굉)이 말한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관한 견해를 바탕으로 인심과 도심을 풀이한 것은 무슨 뜻인가?

 

박사철: 호오봉이 "천리와 인욕은 가는 길이 같을 때도 그 마음이 다르다"라고 주장한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심경心經』을 편집한 이가 그것을 머릿장[首草]에 수록했습니다. 선정이 말씀하신

구절을 인용한 것도『심경』의 예를 따른 것입니다.

 

정조: "진실로 가운데[中]를 잡는다"라고 할 때 가운데란 '일의 중간'을 뜻한다.

예부터 성현은 모두 촉발된[發] 상황에서의 '중'을 말하였다. 그런데 자사는 아직 촉발되기 이전[未發]의 '중간'을

말하였다. 『중용』은 앞 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힌 책이다. 그런데 주희는『중용』서문에서 '일의 중간[中]'

으로 그 연원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의 경계가 뒤섞인 것이 아닌가.

 

박사철: 자사가 아직 촉발되기 이전[未發]의 '중간'을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촉발된 상황에서 '중간'이 존재하는

것은 촉발하기 이전에 중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근본을 찾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중용』의 아래 장에서 언급한 시중時中, 택중擇中, 용중用中은 촉발된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주희도 "『중용』이라는

 책 이름에 나오는 중中은 시중時中의 '중'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서문에서 '일의 중간'만

언급했다고 해서 주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논평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정조: 학자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함(계구)을 존양으로 분류하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감(신독)을 성찰로 분류한다.

그리하여 마치 한 궤도에서 나온 것처럼 가르쳤다. 그러나 사계 김장생만은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 '계구'는

동정動靜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본문의 '호기乎其' 두 글자를 인용하여 자신의 설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심학心學에큰 공을 세웠다. 최근에 명나라 학자들의 글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계구'를 움직임으로,

 '신독'을 고요함으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주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박사철: 후세의 학자들이 잘못 판단하여, '계구'를 고요할[靜] 때의 공부로만 이해하였습니다. 자사가 말한,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교훈이나 주희가 말한바, "어느 때이고 그렇지 않음이 없다"는 교훈이나 주희가 말한 바,

 "어느 때이고 그렇지 않음이 없다"라는 해석은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을 아울러 언급한 것인데,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존양 공부가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에 모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김장생의 『경서변의』가 심학에 큰 공을 세웠다고 봅니다.

 

 

 

춘천의 무명 선비인 박사철이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에 대해 이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

정조는 몹시 감격했던 모양, 그리하여 박사철을 일약 회양부사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에게 있어 『중용』은 어떤 의미를 갖는 책이었을까.

 

1798년(정조 22) 정조가 여러 신하들과 『중용』을 공부하고

 그 내용을 『중용강의中庸講義』(6권)로 펴내도록 했다.

『홍재전서弘齋全書』제181권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 『중용』에는 상달上達, 곧 형이상학적이고 고원한 내용이 유교 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많다.

때문에 정자의 여러 제자들까지도 도교와 불교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중용』을 공부하다가

도리어 도교나 불교로 넘어가는 현상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정조는 그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둘째, 그럼 『중용』의 본질은 무엇일까? 일상적인 청소와 빈객 접대에서 지작하여 뜻을 정밀하게 밝히고,

신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실은 하나의 이치가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마음과 이치의 본질과 작용일 따름이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공부를 무시한 채 형이상학적이고 고원한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 그런 점에서 정조는 평이하고 실제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말했다.

학자들이 당연히 토론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다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편집한 『중용강의』가

『중용』을 공부하는 선비들에게 필수적인 참고도서로 읽히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그 책과는 별도로 『홍제전서』제109권에 「중용」이란 별도의 항목이 있다.

그 안에는 『중용』의 여러가지 내용에 관해 임금과 선비들이 주고받은 문답이 보인다. 물론 정조가 주목한 책이

「중용」한 권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정조의 기대가 무척 컸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정조가 신하들에게 던진 질문은 과연 평이하고 실제적인 것이었는가.

정약용 등 초계문신들에게 물었던 「중용책」도 그렇거니와, 박사철과의 문답도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많다. 또 정조가 주희의 『중용장구집주』에 철저히 얽매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실학자 이익이나 이덕무의

『중용』연구와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정조와 그 시대 지배층의 한계였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

 

정조가 『중용』을 강조한 데는 천주교의 퇴치라는 시대적 상황이 작용했을 터. 정조는 이른바 문체반정의

일환으로 선비들에게 고전 교육을 강조했다. 1791년부터 정조의 '문화투쟁(Kultur-Kampf)'이 격렬해졌다

 "천주교(서학)를 금지하려면 우선 패관잡기를 금지해야 한다. 패관잡기를 막으려면 명말 청초에 작성된

 문집부터 금해야 한다." 이것이 정조의 새로운 문화정책이었던 것.

 

1792년부터 조정 대신들은 이가환 등의 '문체'를 문제 삼았다.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부터가 문제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박지원에게

순정醇正한 고문古文을 지어 바치라고 요구한다. 박지원은 왕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다.

 덕분인지 몰라도 그는 정조 치세 동안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연암 박지원

 

 

 

내친 김에 정조는 중국에서 더 이상 어떠한 서적도 구입하지 말라고 명령한다.(1792).

끔직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학문을 사랑하고, 탁월한 학자였던 그가 서적의 수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정조의 '문화투쟁'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문체의 교정[文體之矯正]', 또는 '바른 문체로의 복귀[歸正]'라 불렸던 문체반정,

그 결과는 조선 사회에 또 한 겹의 어둠을 드리운 사건이었다. 

활발하게 살아나는 듯 보였던 조선 사회의 새로운 문예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의 사상계에도 수구적이고 보수 반동적인 경향이 더욱 짙어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정조는 주희의 말씀을 가려 뽑은 『주자선통朱子選統』을 고문의 전범으로 여겼고,

이미 오래전에 수명을 다한 당송팔대가의 낡은 문장을 엮어 『팔자백선八字百選』을 간행,

 선비들에게 절대적인 문장 교범으로 삼도록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문체가 불순한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도 못하게 한다.

보기에 따라선는 역겹고 수구적인 문화정책이었다. 이런 정책을 펴면서 정조는 방황하는

선비들에게 '이 사람을 보라'는 식으로 춘천의 유생 박사철을 추켜세웠던 것이다.

 

쓸쓸히 향리에서 늙어가던 박사철은 어전에 나아가 임금님을 뵈었고,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하루 아침에 회양부사라는 높은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조의 소망과 달리 박사철은 관리 능력이 부족했던 모양.

 

 

1795년(정조19) 4월, 박사철은 회양부사에 임명된 지 불과 몇 달만에 벼슬에서 쫒겨나고 만다.

어이없게도 함경도 함흥과 영흥의 본궁本宮에서 사용할 향축香祝을 예법대로 호송하지 못하고

탈을 낸 것이다. 병이 있다는 이유로 감히 가마를 탄 채 향축을 호송, 큰 물의를 빚은 것.

 

 당시로선 실로 큰 중죄였는지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래도 정조는 박사철을 쉬 잊지 못했다. 1800년(정조 24) 3월 29일, 선비들의 문체를 고문으로

 되돌리기 위해 주희의 시집인 『아송雅誦』과 주희의 산문집인 『주서백선朱書百選』등을 간행했다.

그때 정조는 이 책자를 박사철과 안석임 등에게도 나누어 주라고 명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정조는 지병인 종기로 인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인용서적: 백승종 著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