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세계의 음악 1
고대 음악
기원전 6만 년~기원후 500년
"음악은 우주에 영혼을 부여하고 정신에 날개를 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그리고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 플라톤-
음악 생산자, 인류
인류가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음악은 치유와 의례로 부터 수렵, 전투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했다.
선사시대에 음악이 사용된 흔적은 아직도 세계 곳곳의 민속 음악이나 전통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음표는 인간이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냈던 소리에서 비롯되었다."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1871년)
석기 시대 그림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암각화는 주술사가 최면상태로 춤추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기 시대의 인류는 음악에 언어와 춤을 결합해 특정한 의례에 사용했다.
음악의 요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권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북부, 중국에서는 수천 년에 걸쳐 음악 전통이 형성되었다.
고대 사회의 음악이 어떤 소리를 냈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현존하는 유적을 통해
고대의 활발한 음악 생산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이집트의 음악가
고대 이집트의 필경사였던 나크트의 부덤 내부에는 여성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들은 각각 아치형 하프, 목이 긴 류트, 2개의 갈대 줄기로 만든 겹리드 피리를 연주하고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메소포타미아(이라크)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은 '문명의 요람'으로도 불린다.
고대 문명권이 음악을 만들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오래된 유적이 남부 메소포타미아 우르에서 발견되었다.
플릇을 연주하는 힌두 신
16세기에 그려진 이 인도 힌두교의 크리슈나 신은 고피(여자 목동)에 불러싸여
대나무 풀릇을 연주하는 목동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
그리스 철학과 음악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의 음악을 계승한 것은 크레타 섬에서 발생한 미노스 문명이다.
이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그 뒤를 이음으로써 서양 음악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태양을 향한 찬가
러시아 화가 표도르 브론니코프(1827~1902)는 피타고라스 학파를 로멘틱한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
이 그림에서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찬가를 부른다. 음악과 천문학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 그리스 철학자들을 묘사한 내용이다.
신화와 비극
음악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종교 의식과 비극 공연에서 일상적인 노동과 여가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신화도 음악을 종요하게 다뤘으며 기량이 가장 뛰어난 연주자는 부와 명예를 얻었다.
야외 원형극장
고대 그리스의 아프로디시아스(오늘날의 터키)는 규모가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오데이온이라 불리는 공연장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음악 경연 대회와 시 낭송회 등이 열렸다.
배우의 가면
배우가 쓰는 가면은 고대 그리스 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가면은 인물의 성격을 나타낼 뿐 아니라 배우의 목소리를 관객석까지 전달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트럼펫 사운드
고대 로마 사람들은 극장, 연회, 검투사들이 싸움을 벌이는 원형경기장, 길거리 등 다양한 장소에서 음악을 즐겼다.
음악은 의식과 축하 행사에 품위와 엄숙함을 더했으며, 음악다들은 로마 군대를 따라 전장에 나갔다.
거리의 음악가
이탈리아 남부 폼페이의 치체로 별장에서 발견된 모자이크화는
로마의 악사들이 탬버린, 심벌즈, 아룰로스(티비아)로 알려진 겹피리를 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중세 음악
500~1400년
성가
옛날부터 음악과 종교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노래는 초대 교회 의식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수도원과 대성당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세 정치와 사회에 군림했을 뿐 아니라 음악의 중심지로도 번성했다.
11세기의 기보법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사원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문서에는 '엑슬테트(부활절에 부르는 찬송가)'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활한 후에 모습을 드러낸 그리스도가 그려져 있다. 송하는 사람이 독서대 이에 종이를 펼쳐 놓으면
예배석에 앉은 사람들 눈에는 글자의 상하좌우가 반대로 보인다.
트루바두르와 민스트럴
노래와 춤은 충제 유럽의 일상생활 다방면에서 빠지지 않았다.
왕실의 방문이나 종교 축제와 같은 특별 행사의 분위기를 북돋울 뿐 아니라 시장에 모인 군중의 오락거리이기도 했다.
음악 연주자는 고귀한 신분의 왕실 전속 트루바두르에서 거리의 악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음악과 춤
신성 로마 제죽의 궁정 미네징거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이 그림은 14세기의 미네징거 140명이 쓴 6,000여 곡이 담긴 <마네필사본>에 수록된 것이다.
선율의 기록
음악 기보법이 등장하기 전에는 미리 외워 둔 선율이나 즉흥적으로 떠오른 선율을 연주해야 했다.
초대 교회의 전례 성가나 서정시의 필사본에는 문자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점차 문자 위에 기호를 표기하기 시작했으며 음악을 표기하는 수단이 개발되었다.
성가의 기보
전례서의 필사본에서 위의 악보는 성가 선율을 기보한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점과 선, 구불구불한 선을 문자 위에 표기해 선율의 대략적인 윤곽을 나타냈다.
치터와 수금, 색버트와 숌
채색 필사본, 회화 작품, 노래와 춤의 악기 반주가 중세 음악 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을을 알려 준다.
하지만 어떤 악기를 반주에 사용했는지, 그리고 반주 음악이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허디거디허디거디는 크랭크로 작동되는 바퀴를 현에 마찰시켜서 소리를 내는 기계 작동 악기다.몇 가지 현을 음높이가 같은 드론음(지속저음)을 내며, 선율은 다른 현에 부착된 나무 건반을 눌러 낸다.
합창단과 연주자로렌의 공작인 르네 2세에게 헌정된 15세기 필사본에는 프살테리움과 레버크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합창단이 묘사되어 있다.
이슬람 음악
중세 이슬람 세계는 중동, 극동 아프리카, 스페인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지역 전통을 흡수했다.그런 만큼 음악에 대한 시각도 다양했다. 이슬람 음악 이론가들 덕분에 입에서 입을 타고 전승된과거의 음악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황홀경데르비시(수피파의 탁발 수도승)를 비롯한 수피파 금욕주의자들은 종교적인 황홀경에 이르기 위해낭송하고 북을 치며 춤을 추었다. 이 세밀화는 16세기 페르시아의 필사본에 삽인된 것으로, 음악가의반주에 맞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여 준다.
고대 중국의 음악
음악은 중국 문화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 가운데에도 당대(618~907)는 황금기였다.
특히 춤, 노래, 희극, 곡예, 꼭두각시극으로 이뤄진 서민극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경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회음악
10세기 당대의 그림에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궁중 악단의 여성 연주자들이
황궁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생 연주자
생은 입으로 불어서 소리를 내는 리드 악기로, 기다란 관이 세로로 꽂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하모니카와 유사하다.
생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가운데 하나이며, 전통적으로 야외 행사에서 쇄납이나 적자(笛子, 피리)와 더불어 연주된다.
음악가와 무희불교 사원인 중국의 원강 석굴은 5~6세기에 암벽을 파고 만든 252개 동굴 법당으로 이뤄졌다.사진은 12호 석굴 벽을 장식한 채색 조각상으로 음악가와 무희를 형상화 했다.
다성 음악의 발달
음의 높이 뿐 아니라 리듬까지 표시할 수 있는 기보법의 등장은 다성 음악이 탄생하는데 발판이 되었다.다층적이며 여러 성부와 복잡한 리듬으로 구성된 이 새로운 양식은 서양 음악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현에 기보된 선율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400~1600년
르네상스 시기에 종교 음악의 수준과 양식이 폭발적으로 발달했다.한편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쇠퇴했다. 인쇄 악보의 출현으로 성직자가 아닌 사람들도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음악가들은 다른 지역의 엄악 전통을 접할 수 있었다. 기악곡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작곡가들은 구조가 좀 더 복잡한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을 쓰고 새로운 기법과 음색을 탐구했다.
안드레아 아마티가 프랑스 왕 사를 9세를 위해 1538년에 제작한 장식적인 첼로.
<심장 모양의 노래집>1470년 프랑스 귀족인 장 드몽셰뉘의 의뢰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래 43곡을 담은 선곡집이다.
악보 인쇄의 시작
1501년 베네치아의 인쇄업자 오타비아노 페트루치가 인쇄 악보를 출판한 일은
그로부터 50년 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문학을 뒤바꿔 녾은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악보 출판이 보편화됨에 따라 악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급증했다.
인쇄 작업
인쇄기를 작동시키려면 다양한 도구와 기술이 필요했다.
이 16세기 세밀화는 <상루이얄 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잉크를 준비하는 과정(왼쪽), 조판공(오른쪽),
인쇄기를 조작하는 사람, 교정자를 보여 준다.
악보 수집광아보가 널리 보급되자 유럽의 아마추어 음악가 사이에서는 악보 수집이 취미 생활로 인기를 끌었다.취리히의 콘라트 게스너(1516~1565) 역시 악보 수집가였다.
기악곡의 발전
기악곡은 16세기에 급속도로 발달했는데, 악보 인쇄술의 등장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다.작곡가들은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고 악기마다 다른 특성을 보완하거나 강조하는 곡을 썼다.
1562년 이탈리아 트렌토(당시 오스트리아의 트리엔트)에서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를
화가 조반니 다우디네가 그린 것으로 이 회의에서는 교회 음악의 주제에 대한 토론도 이뤄졌다.
르네상스의 작곡가
무명 화가가 그린 이 그림 속의 팔레스트리나는 50세 정도로 추정된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 음악을가장 순수한 형태로 정화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큰 성공을 거뒀지만 사후에도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팔레스트리나 곡의 악보
사진은 팔레스트리나가 작곡해 1591년에 출판된
<내 영혼의 주님을 찬미하네>의 초판을 펼친 것이다.
류트의 황금기
류트는 16세기에 들어 독주 악기와 독창자의 제1 반주 악기로 자리를 굳히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악기의 여왕'으로 불리던 류트의 매력은 영국 작곡가 존 다울런드의 작품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마드리갈
1530년대 이탈리아에 출현한 마드리갈은 곧이어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이 형식이 유행한 것은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적은 비용으로 몇 곡이 수록괸 인쇄 악보집을 구매해 가정에서 연주한 덕분이었다.
베네치아의 영광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의전에서 음악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게다가 교회와 정부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이탈리아 각지에서 최고의 음악가들이 베네치아로 몰려 들었다.
이들의 탁월한 기교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합창과 기악 양식이 탄생했다.
호화로운 의전
젠틸레 벨리니가 산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신도회에 소속된 스쿠올라 그란데의 의뢰로 그린
<산마르코 광장의 행렬>(1946)은 베네치아인이 의전을 중요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도회의 재력
1564년 이탈리아의 화가 틴토레도는 산로코 성당 신도회의 의뢰로 수쿠올라 그란데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했다.
수쿠올라 그란데는 조반니 가브리엘리와 조반니 크로체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활약했던 곳이다.
◆ 인용서적: 이안 블렌킨솝, 키쿠 데이 외 『MU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