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격동의 조선 '도시'에 녹아들다 1

茶泉 2019. 7. 7. 15:43

아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엮어낸 『도시로 읽는 조선』을 옮겨 본 것이다.

 

 

<1장>

天命을 받은 새 나라의 새 도읍, 한양

- 강문식 -

 

 

「경기도, 『지도』, 채색필사본, 32.3×38.5cm,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한양漢陽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은 기원전 1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약 500년간 백제이 도읍이었다가 고구려가 남진 정책으로 이 지역을 차지한 후 북한산군

北漢山郡으로 명명되었다. 이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한주漢州가 설치 되었고, 경덕왕대에는 다시 한양군漢陽郡으로이름이 바뀌었다.

 고려에 들어서는 태조대에 양주楊州로 개명되었고, 수도 개성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주목되면서 성종대에는 좌신책군절도사左神策軍節度使

설치되었다. 한양이 수도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문종대부터다. 고려는 건국 이후 고구려의 수도 평양과 신라의 수도 경주를 각각

서경西京과 동경東京으로 지정해 수도 개경開京과 함게 3경三京 체제를 갖추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에 양주를 '경'으로 승격시켜

인근의 군민郡民들을 옮겨 살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남경에 궁궐을 조성했다.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킨 데에는 이곳이 백제의 고도였을

뿐만 아니라 국토 한가운데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고 산수가 유려하며 풍수적으로도 길지吉地라는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수도로서의 남경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숙종대였다. 숙종은 1101년(숙종6)에 남경개창도감南京開倉都監을 설치하고 남경 건설을

위한 대규모 공역에 착수했다. 1104년까지 3년여 간 진행된 공역을 통해 삼각산 면악面嶽 남쪽(지금이 경복궁 인근)에 새 궁궐이 조성되는

 등 남경은 명실상부한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숙종과 예종 · 인종 등은 수시로 남경에 행차했으며, 이곳에서 대규모 연회와

 불사佛事를 거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1128년(인종 6) 남경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고 이듬해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이 조성되면서 남경의

 중요성은 이전만 못해졌다. 이후 무신 집권기를 거치고 몽골의 침입을 겪으면서 남경은 빠른 속도로 화폐하되었다. 더구나 원 간섭기에

들어 '경京'은 천자국天子國에서만 설치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고

국왕이 사냥이나 휴양을 하는 장소로 이용될 뿐이었다.

 

 

 

「한성전, 『고지도첩』, 채색필사본, 31.4×51.8, 18세기 후반, 영남대박물관.

 

한양이 수도로서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공민왕대에 들어서였다.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 옛 남경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했고,

이듬해에 한양으로의 천도遷都를 추진하면서 남경이란 이름도 회복했다. 공민왕의 천도에는 반원反元 개혁 추진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 당시 승려 보우普愚 등이 주장했던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 36개 나라가 내조來朝한다"는 도참설圖讖說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천도 추진은 궁궐을 조성하는데 그쳤을 뿐 실제 천도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왕대와

공양왕대에도 천도는 중요한 안건으로 떠올랐다. 우왕은 1382년(우왕 8) 8월 남경 천도를 단행했는데, 그 이유는 개경의 지덕이 쇠하여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난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왕대와 공양왕대 모두 천도한지 5개월 만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완전한 천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산수의 형세가 뛰어나고 배와 수레가 통하며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면서 475년간 명맥을 이어온 고려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새 나라 조선이

세워졌다. 당시로서는 고령이었던 58세에 즉위한 태조는 국정 운영의 대부분을 정도전을 비롯한 측근 관료들에게 위임했다. 그런 와중에

 태조가 큰 관심을 갖고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었다. 나라가 세워진 후 한 달도 되지 않은

8월 13일, 태조는 도평의사都評使司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지시했고, 이틀 후에는 한양부의 옛 궁실을 수리하도록 했다. 이처럼 천도를

서둘러 추진한 까닭은 고려 왕조가 500년 가까이 뿌리내렸던 개경을 떠나 새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태조실록』권1 태조 1년 9월 3일자, 태조대의 한양 천도 논의가 실려 있다.

 

지중侍中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등이 온천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의 궁궐이 이뤄지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해서 호종扈從하는 사람이 민갈르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오고 백성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태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천도는 일단 중지되었다.

 

천도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이듬해인 1393년 1월이었다.

당시 태실胎室을 물색하기 위해 전라도에 다녀온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 지역을 새로운 도읍 후보지로 추천한 것이다.

이에 태조가 직접 계룡산으로 행차하여 도읍 후보 지역을 둘러보았다. 당시 조정 관료들은 태조의 계룡산 행차에 부정적 반응이었지만,

태조는 "예로부터 새 왕조를 개창하여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 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계룡산의 도읍 후보지를 돌아본 태조는 이 지역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이에 동행한 관료 성석린成石璘 · 남은南誾 등에게 계룡산 지역의 조운漕運과 도로, 성곽터 등을 조하하도록 지시했다.

 또 권중화가 작성한 새 도읍의 설계도를 서운관書雲觀 관원들과 풍수학인風水學人들에게 검토하게 했으며, 도읍이 들어설 지역의 측량도

진행하도록 했다. 마침내 2월 13일 태조는 계룡산을 떠나면서 김주金湊 등에게 도읍 건설 공역을 감독하도록 명령했고, 그에 따라

1393년 3월부터 새 도읍을 조성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이후 약 10개월간 진행되던 신도新都 건설 공사는 그해 12월 11일 갑자기 중단되었다.

하륜河崙이 계룡산 일대의 풍수상 문제점을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계룡산 전도』, 86.8×60.5cm,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 · 서 · 북면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략 보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계룡산의 땅은 건방乾方에서

나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 이르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치 못합니다. (『태조실록』권4, 태조 2년 12월 11일)

 

하륜은 송나라 학자 호순신의 지리 이론을 근거로 계룡산 지역이 흉화凶禍를 초래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태조는 그 타당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는데 사실로 확인되어 계룡산 지역으로의 천도 추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유람도』, 목판본, 102.5×56.5cm, 20세기 전반, 영남대박물관.

계룡산 부근은 수도로 지정하기엔 남쪽으로 치우친 형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난 1394년 2월, 하륜은 새로운 신도 후보지로 무악(현재의 신촌, 연희동 일대)를 추천했다.

이에 대해 조준과 권중화 등은 무악을 살펴본 결과 지역이 협착해 도읍에 적당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하륜은 무악이 개경의 강안전이나 평양의 장락궁보다 넓고 풍수상으로도 좋은 땅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태조는 직접 무악을 돌아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1394년 8월 11일 태조는 무악에 행차했다. 도읍 후보지를 돌아본 왕은 동행한 관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때 대신들은 하나같이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태조는 중신들에게 글로 의견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 성석린, 정총鄭摠, 하륜, 이직李稷 다섯 사람이 올린 글이 실려 있는데, 하륜을 제외하면

모두 무악 천도에 반대했으며, 나아가 천도 자체에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정도전과 성석린이 이때 내세운 의견이다.

 

정도전이 말했다. "전하께서(기장이) 무너진 왕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신 초기에 백성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터전이 아직 굳지 못했으니, 마땅히(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 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입니다."

 

성석린이 말했다. "부소扶蘇의 산수는 혹 거슬러 놓인 데가 있으므로 선현들이 좌소座蘇와 우소右蘇에 돌아가면서

 거주하자는 말이 있으나, 그 근처에 터를 잡아서 순주巡住하는 곳을 삼고, 부소 명당으로 본 궁궐을 지으면 심히 다행일까 합니다.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이하여서 생겼고 뒤 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민력을 휴양하여 두어 해 기다린 뒤에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태조실록』권6, 태조 3년 8월 12일)

 

 

먼저 삼봉은 개국 초기에 가장 주력해야 할 문제가 '민생의 안정'임을 강조한다.

천도는 민생의 안정이 바탕을 이룬 다음 추진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성석린은 부소의 명당에 궁궐을 짓자고 했는데, 부소는 바로 개경 일대를 가리킨다.

 즉, 성석린은 개경 일대가 도읍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입장으로 이는 당시 관료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태조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관료들이 천도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드러내자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개경에 가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8월 13일) 개경으로 돌아 가는 길에 한양에 행차하여 옛 궁궐터를 돌아본 다음 여러 재상들에게

남경이 도읍지로 어떠한지 의논하도록 명했다. 이에 재상들은 꼭 천도를 하겠다면 한양이 도읍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태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여 한양 천도를 결정했다. 아마도 재상들은 태조의 천도 추진을 더 이상 막기 어렵다고 판단해

한양으로의 천도에 동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394년 8월 24일, 도평의사에서 한양 천도를 공식적으로 건의했고, 태조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한양은 새 도읍지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미 11일 전에 결정된 사항이지만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다. 이때 도평의사사에서는 한양이 산수의 형세가 뛰어나고,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균등하며, 배와 수레가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읍으로 적합하다고 했다.

이는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종래의 풍수적 측면의 효율성이 함께 고려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양이 조선의 새 도읍지로 결정되고 2개월이 지난 후인 1394년 10월 25일, 태조는 전격적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개경을 떠난다.

당시 한양에는 수도로서 갖춰야 할 어떤 시설도 조성되지 않았지만, 태조는 천도를 강행한 것이다.

 이는 태조의 천도 의지가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보여 준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목판에 채색, 33.8×44.6cm, 1751, 서울역사박물관.

 

도성 경비를 담당했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삼군의 담당 구역을 나타낸 지도다.

1751년경 서울의 모습인데, 당시 한양은 풍수지리적 측면 뿐만 아니라 군사적 측면의 효율성도 고려해 수도가 되었다.

 

 

 

첫 삽을 뜬 후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다.

 

1394년 8월 한양이 새 나라 조선의 도읍지로 확정되면서 수도 건설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먼저 9월1일 건설 사업을 총괄할 임시 기관으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심덕부心德符, 김주金湊,

이염, 이직李稷을 도감의 판사判事로 임명했다. 이어 9일에는 정도전, 권중화, 심덕부, 이직, 김주 등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와 사직, 궁궐, 관아 장시, 도로 등을 조성할 터를 정하게 했다.

 

정도전 등은 새 도읍의 건설 구상을 담은 설계도를 작성해 태조에게 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도읍 건설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다. 「주례」의 원칙은 「고공기考工記」에 니오는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궁궐을

중심으로 앞에는 관청, 뒤에는 시장,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도전 등은 먼저 기준이 되는

궁궐터를 정했는데, 고려 숙종 때 건설했던 남경 궁궐의 옛터가 지나치게 좁았다고 판단해 그보다 좀 더 남쪽에 새 궁궐의 터를 정했다.

그리고 궁궐의 동쪽(왼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종묘의 터를 정했고, 이어 서쪽(오른쪽)에는 사직, 궁궐의 정문 앞 도로 양측에

관청 거리,그리고 궁궐의 후문인 북문 밖에 시장을 조성하도록 했다.

 

1394년 10월 25일, 태조는 천도를 단행해 사흘 뒤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했다.하지만 이때는 건설 공역이 아직 시작되기 전이어서

왕이 기거할 궁궐이 없었던 터라 한양부의 객사를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 이어 11월 3일 건설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이튿날엔 종묘와 궁궐터의 오방신五方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터 파기를 시작함으로써 새 도읍 건설의 대역사가 발을 내딛었다.

 

1395년 1월 14일에는 한양으로 이주하는 관리와 서민들에게 나누어줄 집터의 기준을 제정했다. 정1품 관리에게 35부를 주고,

 이를 기준으로 한 품 내려갈 때마다 5부씩 감하며, 6품 이하는 모두 10부, 서민은 2부씩 주도록 했다. 이 집터의 기준은 개성부에서

제정했는데, 당시에는 한양의 행정을 담당할 관원들이 아직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6월 6일, 한양은 한성부漢城府로 승격되었고, 한성의 행정을 총괄할 첫 번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성석린이

임명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성석린이 태조의 천도 추진에 반대 입장을 표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성석린 뿐만 아니라 한성의 설계를

담당했던 정도전 역시 천도에 찬성하지 않았다. 즉 태조는 자신의 천도 추진에 반대했던 정도전과 성석린에게 새 도읍의 설계와

행정이라는 중책을 맡겼던 것이다. 이는 두 사람에 대한 태조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후 한성 건설 공역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95년 9월에 종묘와 궁궐이 준공되었다.

이어 그해 9월 1일에 종묘 신주의 봉안 임무를 수행할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이 설치되었고, 28일에는 신주들을 새 종묘에 봉안한

다음 이안제移安祭를 거행했다. 한편 궁궐, 종묘 등 도성 내부 시설의 공역이 마무리되어감에 따라 그달 13일에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성을 쌓을 터를 정하게 했다.




 

「종묘친제규도설병풍」중 제1폭 '종묘전도', 비단에 채색, 병풍 전체, 141.0×423.4cm,

1866~1868년 추정, 국립고궁박물관.

 

 

1395년 10월 7일,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궐내 전각들의 이름을 짓도록 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경복궁景福宮 · 근정전勤政殿 · 사정전思政殿 · 강령전康寧殿 등의 이름은 바로 이때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술대접 받아 실컷 취하고 또 많은 은덕을 입었으니, 왕께서는 만년 장수하시고 큰 복景福 받으소서" 라는 『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해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했다. 또 정도전은 전각의 이름이 갖는 의미도 설명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근정전勤政殿,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황폐화 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사의 큰 것이겠습니까?

사정전思政殿, "많은 사람 중에는 지혜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한 사람이 있으며, 많은 일 중에는

시비是非와 이해利害가 뒤섞여 있습니다. 진실로 깊게 생각하고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의 옳고 그름을

변별하여 처리하겠으며, 어떻게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알겠습니까?

강녕전康寧殿, "국왕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를 세우면 오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강녕은 오복의 하나인데, 강녕만 거론한 것은 강녕을 얻으면 나머지는 모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태조실록』8권, 태조 4년 10월 7일)

 

 

 

 

 

영조 시기 조선 전기의 경복궁 모습을 추정하여 그린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 현판

 

 

 

 

 

일제강점기 근정전의 모습

 

 

 

 

정도전은 이처럼 궁궐과 전각의 이름에 이상적인 유교 정치가 실현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달리 말해 그가 지은 경복궁과 전각의 이름에는 새 나라 조선이 지향해나가야 할 국정 운영의 원칙과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태조는 그해 12월 28일, 경복궁으로 이어移御 했다.

 

도성 성곽의 조성 공역은 1396년 1월에 시작되었다. 성곽 조성은 두 차례로 나누어 추진 됐는데,

1차는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2차 공역은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진행되었다. 1차 공역을 마친 후인 4월 19일에는 도성 내의

행정구역을 동부東部 12방坊, 남부南部 11방, 서부西部 11방, 북부北部 10방, 중부中部 8방의 총 5부 52방으로 확정했다.

또 2차 공역이 마무리 된 9월 24일에는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이름을 정했다.

 

4대문: 정남-숭례문崇禮門, 정동-흥인문興仁門, 정서-돈의문敦義門, 정북-숙청문肅淸門

4소문: 동남-광희문光熙門, 동북-홍화문弘化門, 서남-소덕문昭德門, 서북-창의문彰義門

 

 

 

 

「한양도」, 『천하산천도』

 , 채색필사본, 20.6×29.1cm,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4대문과 4소문이 명기되어 있다.

이어 1397년 1월 동대문에 옹성甕城을 추가 조성하고, 1398년 2월 9일에 숭례문이 완공됨으로써 태조대의 한양 도성 공역은 마무리 되었다.하지만 태조대의 사업으로 조선 초기 한양 도성 건설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1398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정도전이 실각하고 뒤에 태종이 되는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곧이어 9월 5일에는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고 정종定宗이 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1399년(정종 1) 3월 7일, 정종은 형제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난 한양의 경복궁을  떠나 개경으로 환도했다.
 한양으로의 재천도가 추진된 것은 태종 즉위 이후로, 1404년(태종 4) 10월 한양으로 도읍을 다시 옮길 것을 결정하고 이궁離宮을 조성하도록 지시했다.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추진한 데에는 여러 배경이 있지만, 아버지 태조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한양은 태조가 주도적으로 천도를 추진해 건설한 도읍이었기에, 태조는 한양에 강한 애착을 보였고 정종대에 개경으로 환도할 당시 많은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태종은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김으로써 아버지의 상한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아버지를 계승한 왕임을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다.


『삼봉집』,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도전의 시문집으로 초간본은 정도전의 큰아들 정진이 1397년 간행했다.조선의 건국 이념을 연구하는 데 가장 귀중한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1405년 10월 8일, 태종은 한양으로의 재천도를 단행했다. 그리고 열흘 쯤 뒤 한양의 이궁이 준공되자 그 이름을 창덕궁昌德宮이라 지었다. 이어 태종은 대조대에 미진했던 도성 조성 공역을 추진했는데, 먼저 1407년 2월에는 종로의 간선도로에 시전市廛터를 잡아행랑을 조성해 물자 유통의 중심지로 삼았다. 앞서 보았듯이 태조 대에는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밖에장시가 조성됐는데, 지역이 좁고 바로 뒤가 막혀 있어 제 기능을 하기 힘들었다. 이에 태종은 시장을 종로로 옮김으로써 장시의 유통 기능이활성화되도록 한 것이다. 이어 1411년 9월 부터는 도성 안 개천開川(청개천)의 준설 공역을 준비하여 다음해(14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준설공사를 진행했다.

 



 

1890년 청계천 풍경, 앞쪽으로 수표교가 보이고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한양의 도성 조성 공역은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특히 이 시기에는 성곽의 개보수에 초점을 두었다.세종은 1421년(세종 3) 10월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이듬해 1~2월에 대대적인 성곽 보수 공사를 실시했다.그러는 한편 태종대에 진행됐던 개천 준설의 후속 작업을 진행하고, 동대문 남쪽에 수문 2개를 추가로 설치했다.또 태종대에 나무로 만들었던 개천의 다리들을 돌다리로 교체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양은 마침내 새 나라 조선의 도읍으로서 완전하 면모를 갖추었다.



한국 주재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영국왕립아시아학회의 기관지 Transaction에 처음 소개한 서울 지도.

 

 

 

 

<2장>

옛 도읍 개성에 남은 두문동 교려 유민들의 이야기

- 황재문-

 

 

도읍지가 바뀌었들 때 울던 아들

 

개성開城은 조선시대에 송도松都, 개경開京, 중경中京과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각기 특정한 자연적 · 지리적 특징을 담은 말이지만, 공통적으로 조선보다 앞선 시기의 왕조인 고려의 도읍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은 개성의 위치를 도읍에서 옛 도읍으로 바꿔놓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나라 전체로는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으도 '개성'이라는 공간에선

이와는 다른 감정이 일어났을 것이다.

 

 

 

「경기도」, 『천지명도』, 목판본, 51.8×32.1cm, 18세기 후반, 서울역사박물관.

고려의 도읍 개성이 나타난 지도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 계워하더라.

 

원천석元天錫(1330~?)이 읊었다고 알려진 시조다. 나라의 흥망에 모든 운수가 잇다는 말을 앞세웠다.

정해진 운수를 다한 왕조가 무너진 일은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보편적인 이치를  따라간 것일 뿐이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크게 슬퍼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접하는 풍경의 실감은 이치에 따른 해석을 넘어선다. 가을날 풀에 뒤덮인 황량한

 만월대이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그곳에서 귀를 기울이면 떠들썩한 도회의 소음 대신 한가로운 목동의 피리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를 보고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객客은 고려 5020년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회고할 수 있는 인물일텐데, 이곳이 긴 세월 도읍으로서의

운수를 다 누리고 이제는 폐허가 되었다는 말은 이 '객'을 위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조에 언급된 만월대滿月臺는 고려의 왕궁터다. 500년의 왕업을 회고하는 자리로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그

렇지만 이렇게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려가 망하던 날 고려의 마지막 왕이 왕위를 넘겨주었던 자리는 만월대가 아니었으며,

이곳은 이미 홍건적의 침입으로 페허가 되었노라고 말이다. 만월대는 고려 역사 마지막까지 함께한 궁궐은 아니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풍경에서 고려의 멸망을 떠올리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기로세련계도」, 김홍도, 비단에 엷은색, 137×53.3cm, 개인

만월대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월대의 풍경이 망국의 도읍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유사한 것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망국의 도읍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기자箕子가 보리밭으로 변해버린 은나라의 옛 도읍을 보고 불렀다는 노래인 「맥수가麥秀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노래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거쳐 수많은 문헌에 실려 읽는 이로 하여금 망국의 슬픔을 되새기게 했다.

 

麥秀漸漸兮

보리 이삭을 점점 자라고

禾黍油油兮

벼와 기장 기름지기도 해라

彼狡童兮

저 교활한 아이는

不與我好兮

나와는 사이가 좋지를 않네.

 

기자가 바라본 은나라 옛 도읍의 모습은 원천석이 그려낸 개성의 풍경, 즉 가을 풀에 뒤덮인 만월대에 목동의 피리소리만

들리는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활한 아이狡童'로 일컬어진 주왕紂王에게 망국의 이유를 묻는 대복과 같은 것은 없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객'의 슬픔은 더 큰 울림을 줄 법도 하다.

 

 

 

 

 

'나성'으로 둘러싸인 도성
개성은 2013년 6월에 '개성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여기에 포함된 유적군은 모두 12개인데,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 만월대, 개성 첨성대,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칠릉군, 명릉, 공민왕릉이다.여기에는 성균관처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기관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개성에서 마련된 중세 도시의 면모가 조선 건국과 함께 한양으로 이어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성은 임진강 북쪽과 예성강의 남쪽 분지에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때에는 부소갑扶蘇岬으로, 신라 때에는 송악군松嶽郡으로 일컬어졌다. 이 고을이 도읍으로 변모되는 계기는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발어참성勃禦塹城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궁예가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王隆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을 쌓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世祖(왕릉)는 송악군 사찬沙粲으로 있었는데, 건녕乾寧 3년 병진년(896)에 작기 고을을 바치고 궁예에게 귀순했다.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금성金城 태수로 삼았다. 세조가 궁예에게 이르기를 "대왕이 조선, 숙신, 변한 땅에서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제 맏아들을 성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궁예가 그 말을 좇으니, 태조(왕건)로 하여금벌어참성을 쌓게 하고 그를 성주로 삼았다. 이때 태조의 나이는 20세였다.
젊은 성주 왕건이 고려를 건국함에 따라 발어참성 일대는 고려 도읍으로서의 면모를 하나하나 갖춰나간다.새로운 나라에 어울릴 만한 궁궐을 짓고, 얼마 뒤인 960년(광종 11)에는 개영開京을 황도皇都로 고쳤다. 또 '황도'에 어울리는 성곽을 쌓았는데, 그 규모는 조선에서 세운한양성 漢陽城보다 큰 것이었다. 『지봉유설』궁실부宮室部 「성곽城郭」에는 그 규모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데. 조선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개성부開城府의 나성羅城은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만9700보이고, 나각羅閣은 1만300칸이다.숭인崇仁, 안정安定 등 22개의 문이 있다. 지금의 한양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975보요, 높이는 20척 2촌이다. 개성에 비하면 겨우 36분의 1이 되는 셈이라고 했다. 살피건대, 우리 태조 5년에 조준에게 도성을 쌓도록 했다. 정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서북쪽 안주 이남의 백성 11만9000명을 동원해서 일하게 했는데, 2월 그믐에 방군放軍했다. 8월에 이르러서는 강원, 경상, 전라 삼도의 백성 7만 9000명을 동원했으며, 9월에 역사를 마쳤다고 한다. 선왕이 농사철을 빼앗지 않고 民力을 중시한 지극한 뜻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조그마한 성을 쌓는 역사에서도 히려 시일을 끌고 많은 재물을 소비하면서도 공은 적으니, 탄식치 않을 수 있겠는가.
'나성'은 도성의 외성外城이다. 궁궐 즉 궁성宮城 바깥에 내성內城을 쌓고, 다시 그 외곽에 세운 또 하나의 성벽을 '나성' 또는 '나곽羅郭' 이라 한다. 따라서 개성부 나성의 규모가 한양성의 3배가 된다는 지적은 단순히 성벽의 길이만 비교한 것이니, 이 수치가 실제 도읍의 규모나 축성에 동원된 백성의 노동력 차이를 나타낸다고 하기는 어렵다. 도성의 구조 자체가 다르고, 성벽을 쌓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의 비교를 통해 조선의 왕이 농사와 백성을 존중하는 지극한 뜻을 지닌 데다 그것이 고려의 왕과는 달랐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지봉유설』에서 직접 비판한 것은 백성의 수고와 어려움을 돌보지 않는 당시 관료들의 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고려에서는 왜 도성 바깥에 나성을 쌓는 수고를 들였을까? '황도'에 어울리게 한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될 수 있다. 물론 더 직접적인 이유도 찾을 수 있다. 『고려사』에서는 거란의 침입이 있었던 현종대에 강감찬姜邯贊(948~1034)가왕명을 받을어 나성을 완성했다고 전한다. 왕가도는 원래 이름이 이자림李子琳이었지만 나성을 건설한 공로로 왕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니, 나성을 쌓는 일은 고려 조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다.


고려 최후의 날 신하들의 모습 

 

1392년 조선의 건국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500년간 이어진 왕조가 막을 내린다는 사실은, 적어도 고려의 중심부인 도읍 개성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개성 사람들 중에는 고려를 등지고 새 나라 조선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거나

조선의 성립을 기뻐하던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모든 신하, 개성의 모든 백성이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기뻐했으리라고 생각할 순 없을 것이다. 정몽주처럼 고려에 충성을 바치면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니,

고려 최후의 날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그려진 광경은 이러한 예상과는

어긋난다. 물론 승자의 기록임을 고려하면 당연하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7월 17일의 기사는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말로 시작된다. 고려의 왕궁인 수창궁에서 조선의 개국이 이뤄진 셈이다.

 

 

「충신도-몽주운명」, 『삼강행실도』. 고려말 정몽주가 죽던 순간을 묘사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절차를 살펴보면, 신하들이 간청하고 태조가 사양하는 모습이 거듭 나타난다.

혼시중侍中 배극렴 은 등은 "혼암昏暗한 공양왕"을 폐하라는 교지를 왕대비로부터 받아오고, 남은이 교지를 선포하자 공양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위를 내놓고 원주로 떠난다. 배극렴 등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이 국새를 받들어 바치려 하자 이성계는

극구 사양하다가 나와서 신하들을 맞이했고, '신우辛禑' 이래의 혼란을 논하며 왕위에 오를 것을 거듭 청하자 결국 수창궁으로 가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태조는 관원들, 즉 고려의 신하들에게 덕이 모자란 자신을 보좌해달라고 말하고, 중앙과 지방의 신하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불만을 내비친 사례로는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정도만

언급되는데, 이 또한 남은이 민개를 죽이려 했지만 그만두게 했다 했으니 덕을 베푼 일화 이상의 의미는 업는 듯하다.

요컨데 극소수의 불만은 있었지만 특별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성의 당시 상황이 이처럼 평화로웠을지 어땠을지는 현재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큰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는 말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정몽주의 사례처럼 고려를 위해 절의를 지킨 인물들의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얼마쯤 짐작해볼 수 있다.

 

 

'두문동 72현', 고려 충신의 발견 

 

고려와 운명을 같이한 신하는 정몽주만이 아니었다. 문헌에 전하는 몇 가지 이야기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이야기가 있다. '두문杜門'이라는 명칭에서 짐작되듯 이는 문을 닫아걸고

은둔생활을 했던 72명의 현인賢人에 얽힌 이야기가. '두문동'이라는 지명은 이 일화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전국적으로 알려진 듯하다. 역사서 또는 널리 유통되던 문헌 기록을 찾아보면

그리 짐작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야기의 정치적 함의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답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왕조에서 전조前朝, 즉 바로 전대 왕조에 충성을 바친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특히 시기에 따라 다른 함의를 나타낼 수 있다. 조선 건국 직후라면 새로운 왕조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위험한 태도일 수 있는 반면,

조선 사회가 안정된 후라면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서도 충성을 다했던 고귀한 태도일 수 있는 것이다.

 

 

 

 

「개성부근도開城府近圖」『청구전도』김정호, 목판본, 31.2×20.2cm, 1861, 영남대박물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740년(영조 16) 9월 1일자 기사에서 처음으로 두문동 일화가 언급된 사례가 확인된다.

영조는 태조 비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 등을 참배하기 위해 개성을 방문했는데,

이 행차 가운데 두문동 이야기와 관련된 유적을 언급한다.

 

임금이 연輦을 타고 가다가 시신侍臣들을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주서注書 이회원李會元이 아뢰었다.

"태종太宗께서 과거를 베푸셨는데, 이 고을의 대족大族 50여 家가 과거에 응하려 하지 않은 까닭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므로,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멈추도록 명하고, 근신近臣들에게 말씀하셨다.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진다. 이제 부조현이라 명명한 뜻을 들으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직접 보는 것처럼 엄숙하게 하는구나."

이에 승지에게 명하여 '고려 충신 대대로 계승하기를 힘쓰네'라는 칠언七言 1구를 쓰게 하고, 어가를 따르던 옥당과 승지,

사관으로 하여금 그 뒤를 이어 지어 올리게 했다. 또한 직접 '부조현'이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했다.

 

여러 사람이 시를 짓는 것을 연구聯句라고 하는데, 이렇게 완성된 시는 개성의 읍지인 『중경지中京誌』에 수록되어 전한다.

 

 

 

 

 

『송도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개성'에서 이야기 되는 두문동

영조에게 두문동의 유래를 아뢰었던 인물은 이회원이다. 이회원은 『승정원일기』에서 『송도지』를 보고 부조현과 두문동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고 답하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데 개성의 읍지를 살펴보면, 개성에서 전승되는 두문동 이야기가 모두 같은

 내용은 아니다. 개성 유수 오광운吳光運(1689~1745)이 영조의 개성 거동 이후에 쓴 「두문동기杜門洞記」(1744)에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우리 태조가 천명을 얻으시고 장차 망국의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는데, 태학생 등이 따르지 않았다.

관인寬仁하신 태조는 과장科場을 설치하시며 그들을 불렀다. 태학생들은 또 따르지 않았고, 함께 같은 마을로 들어가

문을 닫고 함께 죽었다. 혹은 불에 타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도륙당해 죽었다고도 하는데, 성대聖代에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필시 말을 전한 이가 망령되었을 것이다. 요컨데 문을 닫아걸고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채 죽었다고 한다면 옳은 말일 것이다.

 

 

 

채제공과 성해응이 노래한 두문동 이야기

 

고려가 망한 뒤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이며, 실제 몇 명이나 될까?

'72현'이라는 인원은 '공자의 제자 72현'을 참조해 후대에 규정된 듯 하다. 요컨데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고려 유민으로 자처하며 은거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 이상의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하기 어려운 형편인 셈이다.

 이처럼 두문동 이야기에는 사실관계가 불명확한 부분이 적지 않은데, 이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해석을 담은

시문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이미 영조에 의해 공론화된 사적이기에,개성 사람 뿐 아니라 그곳을 다스린 관리

 그리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관리까지 시문을 짓기도 했다. 그 중 두 편을 살펴보자.




幽幽我洞邃 / 그윽히 우리 마을은 깊고

 

寂寂我門閉 / 고요히 우리 문은 닫혔네.門前有大路 / 문 앞에 큰 길 있으니云走漢水汭 / 한강 굽이로 흘러간다 하네.漢水之上三角下 / 한강가 삼각산 아래新闕大起何迢遞 / 크게 선 새 궁궐 높기도 하구나.其下千家復萬家 / 그 아래 집은 천 채 또 만채衣冠南去拜玉砌 / 벼슬아치 남으로 가서 배례하네.聖人在上日月華 / 성인이 위에 있어 해와 달은 빛나는데魚鱗雜襲爭權勢 /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하게 권세를 다투네.我非惡簪笏 / 내 벼슬을 싫어함이 아니요我非昧興替 / 내 흥망에 어두움도 아니라.人生且須從吾好 / 모름지기 내 좋은 것 좇으며 살아야지携手同車聊卒歲 / 손잡고 함께 떠나 세상살이 마치려네.豈無朱門入天衢 / 어찌 서울 큰 거리 화려한 집에 사는 것이不如閉却吾門繩爲樞 / 허술한 집에서 문 닫고 지냄만 못함이 없겠나.百年門深不出脚 / 백 년 동안 깊숙한 문을 나서지 않았고分遣子孫爲賈客 / 자손은 흩어 보내 장사치를 만들었네.不見至今杜門洞 / 이제 두문동은 보이지 않건만靑山歲歲春薇綠 / 푸른 산엔 해마다 봄고사리 푸르네.

 

 

 1764년(영조 400에 개성유수를 지낸 채제공蔡齊恭(1720~1799)의 「두문동가杜門洞歌」다.

시상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두 구에서는 흔적만 남은 현재의 두분동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아마도 개성유수로서 두문동 터를 찾아온체재공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인 듯하다.

조선이 건국될 때 개성의 고려 유민들이 처한 상황을 포착하려 노력한 점은 특기할만하지만

다양한 구비전승 가운데 처형이나 적극적 저항의 요소는 제외하고 은거와 상업 정도의 요소만 받아들였으니

조선 관료로서의보편적 시각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리라.

 

 

 

 

 

개성 상인들이 대표 품목인 인삼을 다뤘던 고려 인삼 상회.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여대립행女戴笠行」은 망국 이후 개성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

작품인데, 당시 문헌에서 이들 여성의 절개를 칭송하거나 여성이 삿갓을 쓰는 개성의 풍속을 주목하는 일이

적지 않았던 상황과도 연관되어 보인다.

 

 

촘촘한 내나무 삿갓 쓴 사람 이르길 고려 여자라 하네.

긴 갓은 얼굴 덮으니 스스로 해를 가렸네.

 여인께 묻노니 어찌하여 일흔두 집은 긴 울타리로 안팎을 갈라서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이웃집끼리만 소곤소곤 고초를 호소하는가.

예전에 우리 집은 벼슬을 살아 더할 바 없는 큰 가문이었지요.

장부는 나라의 권력을 잡고 젊은이는 궁궐에서 시위했지요.

아녀자는 규중 규범을 지키고 언제나 부모傅母가 인도했었죠.

진주와 비취로 맘껏 꾸미고 얇은 비단옷을 입었지요.

어쩌다가 하루 아침에 천한 몸이 되어 몸이 노비의 거처에 떨어졌는지.

얼핏 들으니 정몽주 공께선 돌아가셨고 궁궐엔 기장만 자란다고 하네요.

또 듣건대 우리 고려의 왕씨들은 섬에서 나란히 죽었다지요.

우리를 한양으로 몰아간다 하는데 한양은 어떤 곳이던가요.

듣건대 집안 어르신께선 죽더라도 떠나지 않겠다 하시니

여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또한 힘껏 막고자 할 따름이지요.

죽이거나 유배시키지 않고 들판에서 늙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다만 새 왕조의 덕을 읊조리지만 맑은 이슬 같은 눈물 떨어지지요.

 

"고려 여자高麗女"를 만나 마을의 유래를 물었더니, 이 여인은 고려가 망한 뒤 벌어진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 한다.

두문동의 '72家' 가 직접적인 화를 입은 가문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더 넓은 범위에서 망국 당시의 참상을 이야기한  셈이 된다.

 

 

김택영이 찾아나선 두문동의 진실

 

김택영金澤榮(1850~1927)은 개성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개성에서 성장하면서 고려 유민으로서의

깊은 자각을 드러냈으며, 개성의 인물을 집대성한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과 개성 인물들의 시선집인

『숭양기구시집崧陽耆舊詩集』을 편찬했다. 김택영은 두문동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동두문동東杜門洞'의 발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개성의 읍지에는 '고려의 무신 48명'이 은둔한 또 하나의 두문동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김택영은 답사를 통해 그 위치를 성거산聖居山 월령月齡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파악했다.

또8명의 회맹과 은둔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동두문가東杜門歌」를 읊은 바 있다.

 

 

 

 

『숭양기구전』에서는 두문동의 기원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제시했다.

다음은 1903년 간행본에 수록된 「임선비林先味, 조의생曺義生, 맹씨孟氏」의 한 부분인데, 이후 간행본에서는 수정되었으니

최종적인 해석은 아니다. 그렇지만 해석법 자체는 흥미로워 살펴볼만 하다.

 

 

이 세 사람은 함께 선발되어 태학에 머물렀는데, 여러 태학생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우리 태조가 즉위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동궁秋洞宮에서 과거를 베풀어 유민들을 거두어들이고자 했다. 명령이 내리자 세 사람이 강개하면서 "몸을 욕되게 하여

벼슬을 구하기보다는 형적을 숨겨서 근심이 없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 따르기를 원하는 태학생이 69명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마침내 함께 추동秋洞 바깥에 갓을 걸어두고 갈대 삿갓을 쓰고서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갔다.

산 입구에다 대나무 울타리 문을 세우고 문 옆에는 말채찍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맹약하기를, "과거를 보러 가고 싶은 자는

채찍을 들고서 나가라. 감히 사군자와 나란히 하지 못하리라" 라고 앴다. 여러 사람이 모두 "삼가 맹약을 듣겠습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한 사람도 과거를 보러 가지 않았다. 이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불렀다.

 

 

'72명'이 아닌 '69명'의 태학생을 거론한 것은 입전된 인물인 임선미, 조의생, 맹씨 셋을 제외했기 때문이다. 

사실 72인 가운데 그 이름이 기록에 남은 것은 이 세 사람뿐인데, 김택영은 그렇게 된 이유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권당捲堂', 즉 성균관 유생들의 동맹휴업의 관례로 비춰본 것으로, 이미 72인이 모두 태학생이었으리라고 추정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비가 가능해진다. 김택영은 임선미 등 세 사람이 먼저 청론淸論 을 내놓았고 나머지 69명이 이를 좇았을 거라고 봤는데,

이에 따라 세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물어 다스리고 나머지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세 사람만 기록에 남았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김택영이 뒤에 이 구절을 수정했으니, 이 견해의 문제점을 따지는 일은 요긴한 게 아닐터이다.

그렇지만 김택영이 보여준 두문동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깊이는 한번쯤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인용서적: 규장각한국학연구원 著 『도시로 읽는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