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조선 '도시'에 녹아들다 1
※ 아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엮어낸 『도시로 읽는 조선』을 옮겨 본 것이다.
<1장>
天命을 받은 새 나라의 새 도읍, 한양
- 강문식 -
「경기도, 『지도』, 채색필사본, 32.3×38.5cm,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한양漢陽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은 기원전 1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약 500년간 백제이 도읍이었다가 고구려가 남진 정책으로 이 지역을 차지한 후 북한산군
北漢山郡으로 명명되었다. 이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한주漢州가 설치 되었고, 경덕왕대에는 다시 한양군漢陽郡으로이름이 바뀌었다.
고려에 들어서는 태조대에 양주楊州로 개명되었고, 수도 개성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주목되면서 성종대에는 좌신책군절도사左神策軍節度使가
설치되었다. 한양이 수도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문종대부터다. 고려는 건국 이후 고구려의 수도 평양과 신라의 수도 경주를 각각
서경西京과 동경東京으로 지정해 수도 개경開京과 함게 3경三京 체제를 갖추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에 양주를 '경'으로 승격시켜
인근의 군민郡民들을 옮겨 살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남경에 궁궐을 조성했다.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킨 데에는 이곳이 백제의 고도였을
뿐만 아니라 국토 한가운데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고 산수가 유려하며 풍수적으로도 길지吉地라는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수도로서의 남경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숙종대였다. 숙종은 1101년(숙종6)에 남경개창도감南京開倉都監을 설치하고 남경 건설을
위한 대규모 공역에 착수했다. 1104년까지 3년여 간 진행된 공역을 통해 삼각산 면악面嶽 남쪽(지금이 경복궁 인근)에 새 궁궐이 조성되는
등 남경은 명실상부한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숙종과 예종 · 인종 등은 수시로 남경에 행차했으며, 이곳에서 대규모 연회와
불사佛事를 거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1128년(인종 6) 남경 궁궐에 화재가 발생하고 이듬해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이 조성되면서 남경의
중요성은 이전만 못해졌다. 이후 무신 집권기를 거치고 몽골의 침입을 겪으면서 남경은 빠른 속도로 화폐하되었다. 더구나 원 간섭기에
들어 '경京'은 천자국天子國에서만 설치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고
국왕이 사냥이나 휴양을 하는 장소로 이용될 뿐이었다.
「한성전도」, 『고지도첩』, 채색필사본, 31.4×51.8, 18세기 후반, 영남대박물관.
한양이 수도로서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공민왕대에 들어서였다.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 옛 남경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했고,
이듬해에 한양으로의 천도遷都를 추진하면서 남경이란 이름도 회복했다. 공민왕의 천도에는 반원反元 개혁 추진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 당시 승려 보우普愚 등이 주장했던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 36개 나라가 내조來朝한다"는 도참설圖讖說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천도 추진은 궁궐을 조성하는데 그쳤을 뿐 실제 천도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왕대와
공양왕대에도 천도는 중요한 안건으로 떠올랐다. 우왕은 1382년(우왕 8) 8월 남경 천도를 단행했는데, 그 이유는 개경의 지덕이 쇠하여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난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왕대와 공양왕대 모두 천도한지 5개월 만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완전한 천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산수의 형세가 뛰어나고 배와 수레가 통하며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면서 475년간 명맥을 이어온 고려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새 나라 조선이
세워졌다. 당시로서는 고령이었던 58세에 즉위한 태조는 국정 운영의 대부분을 정도전을 비롯한 측근 관료들에게 위임했다. 그런 와중에
태조가 큰 관심을 갖고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었다. 나라가 세워진 후 한 달도 되지 않은
8월 13일, 태조는 도평의사都評使司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지시했고, 이틀 후에는 한양부의 옛 궁실을 수리하도록 했다. 이처럼 천도를
서둘러 추진한 까닭은 고려 왕조가 500년 가까이 뿌리내렸던 개경을 떠나 새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태조실록』권1 태조 1년 9월 3일자, 태조대의 한양 천도 논의가 실려 있다.
지중侍中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등이 온천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의 궁궐이 이뤄지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해서 호종扈從하는 사람이 민갈르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날씨는 점점 추워오고 백성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태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천도는 일단 중지되었다.
천도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이듬해인 1393년 1월이었다.
당시 태실胎室을 물색하기 위해 전라도에 다녀온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 지역을 새로운 도읍 후보지로 추천한 것이다.
이에 태조가 직접 계룡산으로 행차하여 도읍 후보 지역을 둘러보았다. 당시 조정 관료들은 태조의 계룡산 행차에 부정적 반응이었지만,
태조는 "예로부터 새 왕조를 개창하여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 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계룡산의 도읍 후보지를 돌아본 태조는 이 지역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이에 동행한 관료 성석린成石璘 · 남은南誾 등에게 계룡산 지역의 조운漕運과 도로, 성곽터 등을 조하하도록 지시했다.
또 권중화가 작성한 새 도읍의 설계도를 서운관書雲觀 관원들과 풍수학인風水學人들에게 검토하게 했으며, 도읍이 들어설 지역의 측량도
진행하도록 했다. 마침내 2월 13일 태조는 계룡산을 떠나면서 김주金湊 등에게 도읍 건설 공역을 감독하도록 명령했고, 그에 따라
1393년 3월부터 새 도읍을 조성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이후 약 10개월간 진행되던 신도新都 건설 공사는 그해 12월 11일 갑자기 중단되었다.
하륜河崙이 계룡산 일대의 풍수상 문제점을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계룡산 전도』, 86.8×60.5cm,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 · 서 · 북면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략 보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계룡산의 땅은 건방乾方에서
나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 이르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치 못합니다. (『태조실록』권4, 태조 2년 12월 11일)
하륜은 송나라 학자 호순신의 지리 이론을 근거로 계룡산 지역이 흉화凶禍를 초래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태조는 그 타당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는데 사실로 확인되어 계룡산 지역으로의 천도 추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유람도』, 목판본, 102.5×56.5cm, 20세기 전반, 영남대박물관.
계룡산 부근은 수도로 지정하기엔 남쪽으로 치우친 형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난 1394년 2월, 하륜은 새로운 신도 후보지로 무악(현재의 신촌, 연희동 일대)를 추천했다.
이에 대해 조준과 권중화 등은 무악을 살펴본 결과 지역이 협착해 도읍에 적당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하륜은 무악이 개경의 강안전이나 평양의 장락궁보다 넓고 풍수상으로도 좋은 땅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태조는 직접 무악을 돌아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1394년 8월 11일 태조는 무악에 행차했다. 도읍 후보지를 돌아본 왕은 동행한 관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때 대신들은 하나같이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태조는 중신들에게 글로 의견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 성석린, 정총鄭摠, 하륜, 이직李稷 다섯 사람이 올린 글이 실려 있는데, 하륜을 제외하면
모두 무악 천도에 반대했으며, 나아가 천도 자체에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정도전과 성석린이 이때 내세운 의견이다.
정도전이 말했다. "전하께서(기장이) 무너진 왕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신 초기에 백성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터전이 아직 굳지 못했으니, 마땅히(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 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입니다."
성석린이 말했다. "부소扶蘇의 산수는 혹 거슬러 놓인 데가 있으므로 선현들이 좌소座蘇와 우소右蘇에 돌아가면서
거주하자는 말이 있으나, 그 근처에 터를 잡아서 순주巡住하는 곳을 삼고, 부소 명당으로 본 궁궐을 지으면 심히 다행일까 합니다.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이하여서 생겼고 뒤 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민력을 휴양하여 두어 해 기다린 뒤에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태조실록』권6, 태조 3년 8월 12일)
먼저 삼봉은 개국 초기에 가장 주력해야 할 문제가 '민생의 안정'임을 강조한다.
천도는 민생의 안정이 바탕을 이룬 다음 추진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성석린은 부소의 명당에 궁궐을 짓자고 했는데, 부소는 바로 개경 일대를 가리킨다.
즉, 성석린은 개경 일대가 도읍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입장으로 이는 당시 관료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태조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관료들이 천도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드러내자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개경에 가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8월 13일) 개경으로 돌아 가는 길에 한양에 행차하여 옛 궁궐터를 돌아본 다음 여러 재상들에게
남경이 도읍지로 어떠한지 의논하도록 명했다. 이에 재상들은 꼭 천도를 하겠다면 한양이 도읍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태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여 한양 천도를 결정했다. 아마도 재상들은 태조의 천도 추진을 더 이상 막기 어렵다고 판단해
한양으로의 천도에 동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394년 8월 24일, 도평의사에서 한양 천도를 공식적으로 건의했고, 태조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한양은 새 도읍지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미 11일 전에 결정된 사항이지만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다. 이때 도평의사사에서는 한양이 산수의 형세가 뛰어나고,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균등하며, 배와 수레가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읍으로 적합하다고 했다.
이는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종래의 풍수적 측면의 효율성이 함께 고려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양이 조선의 새 도읍지로 결정되고 2개월이 지난 후인 1394년 10월 25일, 태조는 전격적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개경을 떠난다.
당시 한양에는 수도로서 갖춰야 할 어떤 시설도 조성되지 않았지만, 태조는 천도를 강행한 것이다.
이는 태조의 천도 의지가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보여 준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목판에 채색, 33.8×44.6cm, 1751, 서울역사박물관.
도성 경비를 담당했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삼군의 담당 구역을 나타낸 지도다.
1751년경 서울의 모습인데, 당시 한양은 풍수지리적 측면 뿐만 아니라 군사적 측면의 효율성도 고려해 수도가 되었다.
첫 삽을 뜬 후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다.
1394년 8월 한양이 새 나라 조선의 도읍지로 확정되면서 수도 건설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먼저 9월1일 건설 사업을 총괄할 임시 기관으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심덕부心德符, 김주金湊,
이염, 이직李稷을 도감의 판사判事로 임명했다. 이어 9일에는 정도전, 권중화, 심덕부, 이직, 김주 등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와 사직, 궁궐, 관아 장시, 도로 등을 조성할 터를 정하게 했다.
정도전 등은 새 도읍의 건설 구상을 담은 설계도를 작성해 태조에게 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도읍 건설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다. 「주례」의 원칙은 「고공기考工記」에 니오는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궁궐을
중심으로 앞에는 관청, 뒤에는 시장,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도전 등은 먼저 기준이 되는
궁궐터를 정했는데, 고려 숙종 때 건설했던 남경 궁궐의 옛터가 지나치게 좁았다고 판단해 그보다 좀 더 남쪽에 새 궁궐의 터를 정했다.
그리고 궁궐의 동쪽(왼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종묘의 터를 정했고, 이어 서쪽(오른쪽)에는 사직, 궁궐의 정문 앞 도로 양측에
관청 거리,그리고 궁궐의 후문인 북문 밖에 시장을 조성하도록 했다.
1394년 10월 25일, 태조는 천도를 단행해 사흘 뒤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했다.하지만 이때는 건설 공역이 아직 시작되기 전이어서
왕이 기거할 궁궐이 없었던 터라 한양부의 객사를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 이어 11월 3일 건설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이튿날엔 종묘와 궁궐터의 오방신五方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터 파기를 시작함으로써 새 도읍 건설의 대역사가 발을 내딛었다.
1395년 1월 14일에는 한양으로 이주하는 관리와 서민들에게 나누어줄 집터의 기준을 제정했다. 정1품 관리에게 35부를 주고,
이를 기준으로 한 품 내려갈 때마다 5부씩 감하며, 6품 이하는 모두 10부, 서민은 2부씩 주도록 했다. 이 집터의 기준은 개성부에서
제정했는데, 당시에는 한양의 행정을 담당할 관원들이 아직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6월 6일, 한양은 한성부漢城府로 승격되었고, 한성의 행정을 총괄할 첫 번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성석린이
임명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성석린이 태조의 천도 추진에 반대 입장을 표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성석린 뿐만 아니라 한성의 설계를
담당했던 정도전 역시 천도에 찬성하지 않았다. 즉 태조는 자신의 천도 추진에 반대했던 정도전과 성석린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