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정조(正祖)의 번리어찰(樊里御札) 1

茶泉 2019. 6. 6. 22:17

 

 

 

 

번리어찰(樊里御札) 1

(1799. 8. 7 ~ 1800. 4. 30)

 

 

●  정조가 외삼촌 홍낙임洪樂任에게 보낸 편지로, 번리(樊里)는 지금의 강북구 '번동'지역을 뜻한다.

 

 

 

 

 

 

 

 

 

35.2×54.3cm,  기미년(1799) 8월 7일. (정조 23년)

 

 

며칠간 가을날이 맑은데 안부가 평안하시지요. 나는 아침에 향소(享所)에 가서 직접 희생과 기물(器物)을 살피고 해질녘에

돌아왔습니다. 『주고(奏藁)』는, 이제 이미 서늘한 바람이 부니 마음을 집중하여 정성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이나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한 편이 완성될 때마다 즉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오면 즉시 서문을 지을 계획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 흠배(欠拜).

 

연방(蓮房) 30개를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또 20개는 문상(汶上)에게 전해주세요.

추알(秋謁)이 19일로 정해졌습니다. 32년 후 본 능에 거듭 배알하려니 추모의 생각이 갑절이나 간절합니다.

 

* 향소(享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景慕宮)을 말한다. 

* 주고(奏藁)』: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의 문집.

* 연방(蓮房): 연방에서 연밥을 빼고 어육(魚肉)을 넣고 찐 음식. 연방어포(享所魚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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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53.8cm, 기미년(1799) 8월 11일. (정조 23년)

 

 

34.7×53.5cm

 

그제 온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안부가 더욱 평안합니까?

나는 여름 석 달 동안 『논어』7권, 두율(杜律) 777수, 육률(陸律) 4877수 등을 공부했습니다. 『논어』는 『정의精義』를 묶어

한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두율가 육률은, 죽 읽고 다시 시작하는 식으로 여러 번 보았으니, 이제는 천 수를 뽑아 두고

늘그막의 볼거리로 삼으려 하며 아울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지향할 바를 알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뽑기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두율은 오히려 작업하기가 쉬우나, 율률의 좋은 것은 혹 소품(小品)에 가깝기 때문에

취사선택하기가 지극히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근자에  들으니 좌상左相[이병모李秉模]과 문형文衡[홍양호洪良浩]이 육유(陸游)의 시를 꽤 공부했다고 하지만,

지금 누가 왕복하며, 내 뜻과 혹 맞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집사에게 질문하려 합니다.

동그라미 하나 한 것과 동그라미 둘 한 것은 내가 취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쌍점 한 것은 생각 중에 있는 것입니다.

동그라미와 점을 막론하고 집사의 의견대로 별지의 요령에 따라 첨지를 붙여주시 바랍니다.

내일 새벽에 인편을 보내겠습니다. 육유의 칠언율시와 두보(杜甫)의 오언과 칠언도 차례로 보낼 것입니다.

『주고』는 행행(行幸) 전에는 실로 착수하기가 어려우므로 제 2편 이하는 내가 돌아온 후 들여보내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卽拜).

 

종이 머리에 논의를 써놓은 첨지는, 같고 다른 여러 의견을 대답한 것입니다. 그 중 용단(用短) 한 편을

취하고 싶으나, 혹 소품(小品)에 가까워 주저함을 면치 못합니다. 집사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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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53.6cm. 기미년(1799) 8월 12일 아침. (정조 23년)

 

 

38.8×56.3cm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여니 갠 느낌이 분명하여, 내일 구름이 천 리 만 리나 걷힐 것 같아 매우 다행입니다. 밤새 안부가 어떠합니까?

나는 이 달 안에 교정하고 있는 책의 교정을 마치려고 하다가, 도리어 마음고생의 빌미가 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어제 보낸 것은

이 인편 돌아올 때 부치고, 두율도 오백 수 한도 내에 의견을 첨지에 표시하여 들여 보내기 바랍니다. 대저 두보의 시를 뽑는 것은

천 명이 모인 정시(庭試)의 초시 합격자를 뽑는 것과 같고, 육우의 시를 뽑는 것은 대단히 많은 사람이 모인 증강시의 초시 합격자를

뽑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따르기 어렵습니다. 껄껄. 게다가 두보는 시성詩聖이라 그의 시를 취사선택하기가 갑절이나

어렵습니다. 뜻을 잘 알아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후야(後也)가 도백(道伯)과 서먹서먹한 점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어머니 말씀[자교慈敎]을 통하여 처음 알고, 베껴 둔

소차(疏箚)를 밤에 보았습니다. 신임 황해감사는 병진(1796)년 겨울 승선(承宣)[승지承旨] 으로서

신기(申耆), 이조원(李祖源), 어용겸(魚用謙) 등과 연명되었으나 서열 최하위입니다. 상소에도 당시의 병판(兵判)을 심문

하자는 말이 없으며, 내용은 처분을 언급한데 불과합니다. 이 자리는 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 후야(後也): 정조의 둘째 외삼촌 홍낙신(洪樂信)의 아들 홍후영(洪後榮)

 

 

마침 진전(眞殿) 차례에 쓰고 남은 사과가 있어 20개 보내드립니다. 장주(長注)가 두시 공부에서 얻은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학우(李學愚)를 일전에 불러서 그 글씨를 시험해 보았는데, 들었습니까? 마침 글씨 쓸 일이 있어 지본(紙本)이 되기를 기다려

내보낼 터이니, 즉시 써서 보내세요. 범례는 우야(愚也[이학우])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글씨 쓰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어야 합니까? 역시 즉시 상세히 답하기 바랍니다.

필력을 시험할 겸 우선 초본을 보냅니다. 철로(徹魯)와 자위기(者韋己), 그 밖에 비록 아랫것들이라도 겨우 모양만 낼 수 있으면

힘을 합하여 쓰고, 저녁 후에 인편을 기다려 들여보내기 바랍니다.

글씨를 쓰는 사람들에게 필묵과 초를 지급하기 바랍니다. 집사(執事)는 두율을 보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글씨 쓰는 일에는 절대로 마음을 두지 말기 바랍니다. 글씨 쓰는 일을 오늘 안으로 하기 어려우면 내일 아침에 들여보내도 됩니다.

이 인편 돌아올 때 상세히 답하세요. 연전에 편집하여 놓은 주시(朱詩)를 근자에 비로소 추려서 이용하려고 하나 눈이 어두워

볼 수가 없기에, 『주자전집(朱子全集)』의 시를 분류하고 크게 써서 등불 아래서 보기에 편하게 하려고,

먼저 이렇게 베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 장주(長注): 정조의 외종조부 홍용한(洪龍漢).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막내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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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57.3cm, 기미년(1799) 8월 12일 저녁 (정조 23년)

 

낮 동안 안부가 또 어떠합니까? 일이 완료되었으면, 돌아오는 인편에 부치기 바랍니다.

육률을 다시 보아 이제 막 오백 수를 채웠습니다. 지극히 어려운데, 두율도 육룰에 준한다고 보면 됩니다.

내일 표첨(標籤)을 들여 보내세요. 동그라미 두 개가 삼백 수, 동그라미 하나가 이백 수인 것을 예로 삼아, 오언시가 이백 수,

칠언시가 일백 수면 되겠습니까? 원래 문집에 오언율시가 칠언율시의 여섯 배이니, 칠언율시가 일백 수인 것이 혹 지나칩니까?

만약 육률을 오백 수에 준하면 두율도 당초의 계획에 따라야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합리(合梨)는 금년 들어 처음 보는 것이다. 15개를 편지와 함께 보내드립니다.

 

* 표첨(標籤): 시를 선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원고에 표시한 것과 견해를 쓴 제비.

* 합리(合梨): 우리나라 재래종 배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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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53.5cm, 기미년(1799) 8월 13일 (정조 23년)

 

밤새 안부가 자고 나서 평안합니까?

내가 공무의 여가에 쉴 새 없이 몰두하는 것은 두로와 육옹의 시를 읽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용의 칠언시는 이제 비로소 완성하여, 먼저 좌상[이병모]에게 보냈습니다. 좌상이 육옹의 시를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돌아오면, 내일쯤 보내드리겠습니다. 두시의 동그라미 작업을 마쳤으면, 이 하인 편으로 부치세요.

석양이 가까워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송이 15개를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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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53.3cm. 기미년917990 8월 14일 (정조 23년)

 

 

34.5×53.6cm

 

밤새 안부가 어떠합니까? 나는 새벽에 재소(齋所)에 이르렀습니다. 내일 새벽을 기다려 예를 행한 후 돌아갈 것인데,

재소에 나오는데 익숙해진 것이 마치 옛날의 이른 바 태상(太常)인 것 같습니다. 껄껄. 오늘이 바로 인현성후의 제삿날이라,

옛날을 기념하는 뜻에서 여양가(呂陽家)에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그 사손을 6품으로 진급시켜[出六] 고을 원에 임명했습니다.

오래토록 벼슬을 누리지 못한 후라, 그들에게 아주 다행입니다.

재소가 조용하여 육선(陸選을 가져와 보며 교정하고 있는데 좌상[이병모]에게 보냈던 것이 마침 들어와, 우선 두 권을 부쳐 보냅니다.

나머지 한 권도 내일 추가로 보낼 것이니, 모레쯤 내가 보내는 사람편으로 모두 돌려보내기 바랍니다. 두시와 육시를 각각

 삼백여 수씩 뽑는 것은 실로 좋습니다. 다만 졸렬함을 감추는 데는 각각 오백 수씩 뽑는 것만 못하지 않습니까?

육시 칠언을 다시 보고 생각을 상세히 말해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 태상(太常): 중국 고대의 관직 이름. 제사와 예악을 전담했다.

* 여양가(呂陽家): 인현왕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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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53.5cm, 기미년(1799) 8월 15일 아침 (정조 23년)

 

어제 보낸 답장을 받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밤새 더욱 평안하시지요? 방옹(放翁)의 칠언율시 한 편을 또 보내드리는데,

제목 아래 연한 황색 동그라미는 좌상(左相)의 제비[籤]입니다. 두로(杜老0의 오언, 칠언을 취사선택한 것과 배교하여 두 사람의

안목 중 누가 과연 나은지요? 자주색 동그라미는 문형(文衡[대제학大提學}]이 그린 것입니다.

시 오백 수와 삼백 수 사이는, 말씀하신대로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은 두보와 육유 각각 오백 수씩 뽑기로 결정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고 한편으로는 우습습니다. 다음 편지로 미루고 이만 줄입니다.

8월 15일 올림.

 

반쯤 말린 전복 백 개, 화로(華露) 한 병을 보내드립니다.

 

* 화로(華露): 술 이름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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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53.7 기미년(1799) 8월 15일 오후 (정조 23년)

 

누가 '번촌이 서울에서 약간 떨어졌다.' 고 하겠습니까. 해가 높이 뜨지 않았을 때 편지를 부친 역말이 정오가 되기 전에 돌아와서,

반가이 편지 받아 밤새 평안함을 기쁘게 알았습니다. 나는 해 뜰 무렵 진전에서 차례를 지내고 나서 대봉심(大奉審)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차대(次對)를 행하고 이제 비로소 돌아와 쉬고 있습니다.

나머지 사연은 별지에 있으며, 이만 줄입니다. 편지 받고 즉시 회답 써서 올림.

 

* 진전: 왕과 왕비의 초상을 모셔둔 전각.  * 대봉신 : 봉안된 어진(御眞)을 펼쳐 살피는 일.

* 차대: 매월 여섯 차례 의정부 당상(堂上), 옥당(玉堂), 대간(大諫) 등이 입시(入侍)하여 중요한 정무를 상주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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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53.4cm

 

 

별지

 

지금 두보와 육우의 시를 각각 오백 수씩 뽑기로 정하고 책 제목을 『두륙천선(杜陸千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야 내가 초당(草堂)과 화계(花溪)에 대하여 묵은 빚을 갚았으니, 또한 세상에 없는 지우(知遇)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하.

대저 두로(杜老)와 육옹(陸翁)의  충의와 격분이 읊은 시에 실려 있기 때문에, 한갓 시가(詩家)로 분류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소려(小呂)가 성행하는 때에,  그 시들이 표현하여 밝히는 바가 세교(世敎)와 문풍(文風)에 영향이 있다고 할

따름입니다. 어제 보낸 오려 붙인 것들이 매우 간략하여, 써 두었던 중초(中草)와 첨지가 붙은 초초(初草) 권(券)을 모두 싸서

보냅니다. 다시 모름지기 세세히 본 후 하루 이틀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부득이 하여 더 베낄 경우에는, 옮겨 써서

각 순서에 해당되는 곳에 부치기 바랍니다. 『방옹전집(放翁全集)』이 있습니까?

없으면 써서 들여보내면 역시 순서대로 첨가하여 써 넣겠습니다. 오언율시는 어제 또 다시 고찰하여 몇 편을 얻어 기록해

두었습니다. 빠뜨린 진주라고 해도 좋고 억지로 찾았다고 해도 좋은데, 형편을 보아가며 넣을 것인지

뺄 것인지 결정할 계획입니다. 『화계동영(花溪登瀛)』은 중초(中草)한 것이고 『두륙분운(杜陸分韻)』은 초조(初草)한

것입니다. 이른바 육유의  『화계동영(花溪登瀛)』은  또 두보의 『초당취진(草堂聚秦)』이라는 서명이 있어서, 두 사람의

짝을 맞추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책에 옛 사람들이 쓴 것과 요즘 사람들이 쓴 것을 모두 다 기록하고 각각

갖가지 색의 동그라미로 나누어 표시하려고 하는데, 그 모양이 흡사 홍문록(弘文錄)이나 내각(內閣)의

권점과 같을 것입니다. 두보는 진(秦)에 속하고 육유는 영(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껄껄.

 

 

* 초당은 두보를, 화계는 육우를 말하는 것으로 보임. 

 * 지우(知遇): 원래 마음으로 서로 교제한다는 뜻, 여기서는 자신이 두 시인과 시대를 뛰어넘어 교류한 것을 말한다.

* 소려(小呂): 12율의 하나로 음성(音聲)에 속함.

* 『두륙분운(杜陸分韻)』: 이 두 책은 정조가 두보와 유유의 시를 베껴 모은 필사본으로,

제목도 정조가 직접 붙인 것으로 보인다.

*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교리와 수찬을 선거하고 임명한 기록.  * 내각(內閣): 규장각(奎章閣)을 달리 이르는 말.

*진(秦)과 영(瀛): 두보는 한 때 벼슬을 버리고 진주(秦州)의 객이 되었고, 육유는 문명을 떨쳐

황제의 인정을 받은 것이 마치 영주(瀛洲)에 올라  신선이 된 것 같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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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52.8cm. 기미년(1799) 8월 16일 (정조 23년)
밤새 동풍이 불었는데, 안부가 평안한지요?나는 문을 닫고 깊숙이 들어 앉아 두보의 율시 뽑은 것을

검토하는 한편, 긴요하지 않은 잡다한 업무를 응대하느라 힘이 듭니다.

육유(陸游)의 칠언율시를 인편이 돌아올 때 보내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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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53.0cm. 기미년(1799) 8월 17일 (정조 23년)
근자에 교열하는 일을 번거롭게 부탁하여 필시 정신 쓰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몸이 심히 피곤하지 않은지요?

나는 체기(滯氣)가 약간 있는데, 아마 교열과 편집을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하기 때문이겠지요

.비록 '즐거운 일은 피곤하지 않다.' 고 하지만,  전공자(專攻者)의 적잖은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도리어 우습습니다.

시 더 뽑은 것 두 권은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집사(執事)가 육유의 학문을 이렇게나 지극히 좋아하는 줄을 여태 몰랐으니,

아주 우습습니다.시마다 위의 여백에 내 의견을 약간씩 썼으니, 본 후 다시 여백에 청화묵(靑花墨)으로 평을 써서 보내기

바랍니다.후야(後也[홍우영])가 준 합리(合梨)를 먹어보니, 귀한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 원문의 '할부(割付)'는 '오려붙이다' 는 뜻인데, 두보와 육유의 시 중에서

좋은 시를 뽑아 시선집(詩選集)을 편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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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55.8cm
38.4×56.4cm. 기미년(1799) 8월 18일 (정조 23년)
밤새 안부가 더욱 평한하셨겠지요.자시(子時0 초에 출발하려 하지만, 5일간의 220리 길을 행차하는 일 또한 사소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무자년 난여(鑾與)를 모시고 광진(廣津)으로 나갔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뚜렷이 떠오릅니다. 30여년 세월의

자취를 돌이켜보니, 마치 새벽에 있었던 일 같아 슬픔과 그리움이 더욱 새롭습니다. 두보와 육유의 오언시와 칠언시를 감상

하도록 다시 이렇게 보냅니다. 이것은 집사르 지남(指南)으로 삼아서 산을 유람하는 사람들로하여금 여산(廬山)의 참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견해는 서로 일치하기 어렵고, 게다가 편지로 주고받는 사연은직접 마주보고 토론하는

것과 또 다른데, 집사와 나는 토론하지 않고도 의사가 서로 일치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집사는만년에 회심의 글벗

하나를 얻었고, 나 또한 집사에 대하여 "하필이면 후세의 자운(子雲)과 요부(堯夫)를 기다리겠는가?" 라고 말할 수있습니다.

옛날 형양(荊揚)과 강한(江漢) 일대를 생각해보면, 풍속이 구차하고 게을러 점점 그릇됨에 물들었습니다. 표매(標梅)는

택혜(擇兮)의 심한 것이고, 야균(野麕)은 만초(蔓草)의 변형입니다. 문왕의 교화가 한 세대도 되지 않아 찬란한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아름다움이 되었으나, 대저 바로 잡기 어려운 것이 부녀자의 편협한 성격입니다. 이성을 그리워하는 기생에게

'옥과 같다[如玉]'는 호칭을붙이면, 하물며 양민에 있어서겠습니까. 내가 초당과 화계의 시에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것은, 그

성률(聲律)을 취하려 함이 아니며  그 수사(修辭)를 숭상함이 아닙니다. 서곤체(西崑體)의 아첨과 속됨을 씻고 남풍(南風)의

온화함과 아름다움을 유행시키는 것이 이 하나의 편집 작업에 달려 있으나, 속인들과는 이야기 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집사만이

이 일을 즐거이 도와 날마다 끊임없이 심부름꾼을 보내도전혀 피로함이 없으니, 마치 물소의 두 뿔처럼 신통하게 서로 마음이

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환궁하기 전에 반드시 열심히 보고연구하여 교정을 마친 책이라도 의견이 있으면 일일이

써 보내되, 한인(漢人)의 자황법(雌黃法)을 쓰기 바랍니다.바쁜 중이라 불러주며 대필 시킵니다. 즉 흠배(欠排).
『주고(奏藁)』한 권도 보내 드립니다. 취야(就也[홍취영])에게 들으니, "편집 작업을 하고 싶다."라고 했다더군요.

작업을 속히 시작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호남 비비정(斐斐亭)의 은어는 나라의 일미인데,

마침 보이는 것이 있어서 두 마리를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 난여(鑾與): 임금이 타는 수레.  * 지남(指南): 안재자, 또는 지도자.* 자운과 요부: 주희(朱熹, 『회암집(晦庵集)』권 36

「여진동보(與陳同甫」. 여기서 자운은 한(漢) 양웅(揚雄),요부는 송(宋) 소옹(邵雍)을 말한다.  * 형양(荊揚): 양자강 중하류

형주(荊州)와 양주(楊州) 일대.  * 강한(江漢): 지금의 호북성 지역.* 표매: 『시경』「소남」의 편명, '표유매(標有梅)'. 여자가

이미 결혼할 나이에 이른 것을 비유하는 말.택혜(擇兮):『시경』「정풍(鄭風」의 편명 '야유사균(野有死麕)'    * 만초(蔓草):

『시경』「소남」의 편명 '야유만초(野有蔓草'* 서곤체: 송나라 초 양억, 유균, 전유연 등의 시체(時體).  * 남풍: 순舜이

지었다고 하는 중국 고대 음악.* 자황법(雌黃法): 자황이라는 광물로 만든 황색 안료로 틀린 곳을

지우는 방법.* 비비정(斐斐亭): 삼례역 남쪽 5리에 있었던 정자로 현재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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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53.4cm. 기미년(1799) 8월 20일 아침 (정조 23년)
선침(仙寢)에서 예를 행하며 30년 전 가교(駕轎)를 모시고 행차했던 일을 추억하니, 유모(孺慕)가 더욱 간절했습니다.밤새 안부가

어떠한지요?자후(慈候)의 유절견통(類癤牽通)에 약을 붙였으나, 멀리 나와 있는 애타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환궁할 날이 아직 멀어 더욱 조급하고 답답합니다. 취야[홍취영]를 즉시 들여보내 환후를 알아서, 내게 상세히 알리도록 하세요.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 선침(仙寢): 태종릉인 헌릉(獻陵)의 침전을 말함.  * 유모(孺慕): 부모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여기서는 영조에 대한 정조의 마음을 뜻한다.  * 자후(慈候):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후를 말함.



34.8×53.0cm. 기미년(1799) 8월 20일 오후 (정조 23년)
이 앞 편지는 미처 받아보지 못햇으리라 생각합니다.자후(慈候)의 종기 난 곳의 당기는 통증에 우분고를 붙이려고 하니,

취야[홍취영]를 먼저 들여 보내고 집사와 문상(汶上)[홍낙윤]도 즉시 문안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우선 이만 줄입니다.즉시 올림.

 

 

 

 

 

34.7×54.2cm. 기미년(1799) 8월 22일 오후 (정조 23년)

 

어제 편지를 받아 평온함을 아니 위로가 됩니다. 밤새 여러분의 안부가 또 어떠한지요

어머니 종기에 고약을 붙인 후 통증이 맞을 가망이 없지 않은데, 이대로 깨끗이 나으면 그 경사스러움과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조마조마하여 감히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가져온 화성저로(華城楮露)를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머잖아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또 상언(上言)의 판하(判下)에 쉴 새 없이 매달려 있어,

사연은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이 편지를 문상(汶上)[홍낙윤]과 함께 보고, 보낸 것도 나누어 받기 바랍니다.

 

* 화성저로(華城楮露): 술 이름인 것으로 보임   * 상언(上言): 임금에게 올라온 갖가지 청원하는 글.

* 판하(判下): 신하가 올린 청원이나 건의를 임금이 허가하는 일.

 

 

 

 

 

37.6×55.7cm. 기미년(1799) 8월 22일 저녁 (정조 23년)

 

잠시나마 더욱 평안한지요? 어머니의 환후에 고약을 붙인 것이 분명 낌새가 있는 것 같으나,

 의술에 익숙하지 않고 내 눈으로 본 것도 믿기 어려워 조급하고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두보의 어언시를 이제 비로소 정리했습니다. 취하고 버린 것이 또한 어찌 하나도 착오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버린 것 중에도 취할 만한 것에는 제비를 붙이되 한결같이 푸른 제비의 예에 따름으로서, 만약 숫자가 차지 않을 때는

집사의 의견에 따라 두거나 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흰 제비에 붉은 동그라미가 있거나 혹 동그라미가

없는 것은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레쯤 우선 이 세 권을 들여보내 편집할 수 있도록 하되, 그 가운데 버릴 만한 것도

일일히 기록하여 보내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일 올림.

 

 

 

 

 

34.8×53.4cm. 기미년(1799) 8월 24일 (정조 23년)

 

 

일간 안부가 어떠한지요?

여기는 어머니 환후가 더욱 좋아져 다행입니다. 두보이 오언시를 만약 다 보았다면, 이 인편으로 들여보내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를 장천(長川) 문상(汶上[홍낙윤]과 더불어 화답하여 보내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즉시 올림.

 

* 장천(長川): 홍낙수(洪樂受1755~1819)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그

는 홍용한(洪龍漢)의 맏아들로 자는 경천(景天), 호는 두계(杜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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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헌릉(獻陵)에 배알하러 가는 길에 새벽에 주교(舟橋)에 닿아 무자년 시에 차운하여 감회를 읊다

 

 

 

맑은 가을날 백로 나는 물가에 수레를 세우고

강을 덮은 새벽 안개를 보며 옛일을 생각하니

생생하구나, 무자년 춘삼월에

십리 뱃길에 지은 칠언시七言詩가


호위하는 깃발과 북이 푸른 안개에 싸이고

용과 봉황으로 장식한 나루의 누각에 달이 떠올라

돌이켜 광릉廣陵의 봄물 밖을 생각하고

고개 돌려 오수梧峀의 오색구름 가를 바라보네

등불은 반짝이고 강물은 출렁이며

삼엄한 사기는 들판으로 이어지는데

한강 나루 동남쪽 송백松柏의 푸르름이 길어

이때 유모(孺慕)가 전보다 더욱 간절하네

 

 

 

 

 

 

38.1×59.9cm

 

 

38.1×61.0cm

 

 

38.1×57.8cm

 

헌릉獻陵의 재실에 삼가 짓다.소자(小子)가 무자년(1768) 봄 선조(先朝)[영조]를 모시고 본 능을 배알할 때 삼가 시 한 수를 지어

그 일을 기록했다.지금 32년후, 왕으로서 예를 행하니 유모(孺慕)가 더욱 새로워, 당시의 시에 삼가 차운하여 쓴다.

그리고 임금쎄서 지으신 벽에 걸려 있는 글을 보니, 대략 '오늘 대소 신료들은 선왕들의 성덕을 우러러 살펴 묵은 마음을

광진(廣津)에 씻고 나의 모년(暮年)을 보필하라.나를  따를 자는 누구인가?' 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우리 선조께서 제위하신

50년 동안 세신(世臣)을 보전하고 당시의 오복(五福)을모아 만세에 전하신 것은, 모두 본 능의 주인이신 태종께서 창업하고

수성(守城0하신 많은 공과 큰 과업을 계승하신 것이다.본 능에 친히 제사 지내던 날 지으신 시 10행이 있어, 크게 빛나시고

크게 계승하신 지략과 업적을, 이렇게 대궐문을 나와 순행할 때아직도 우러러 알 수 있다. 이제 30년 만에 전재를 빛내고

후대에 내려주신 성덕을 감히 찬미하고, 아울러 관직에 있는 사람들어게 고하노라!각기 너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하여 너희

직분을 다함에, 치우침이 없고 사사로움이 없으며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대도(大道)를 따라나와 함께 태평성대로 나아가라.

「서경書經」에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다땅히 그 많은 복을 받는다." 라고 했다. 이것이 나의 성조(聖朝)께서 우리 수 많은 자손이

편안하고 삼갈 수 있도록 밝혀 내려주신 변함없는 가르침이다. 때는 나 소자가 즉위한 지 23년째 되는 기미년(1799) 8월이다.

지맥이 종산(鐘山)에서 한강을 건너참된 용의 형체를 크게 경영했는데참배례를 30년 만에 오늘 아침 또 행하니8천 년 전 터 닦는 소리가 간밤의 일처럼 들리에바다처럼 넓은 큰 공으로 그 본을 얻고하늘의 큰 덕을 받들어 끊임없이 나고 또 나는더ㅔ예를 행할 때 어딘가 와 계심을 어디서 보랴상서로운 날 가을 하늘이 가없이 맑네

 

*종산(鐘山): 수종산(水鐘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 용의 형세: 헌릉의 풍수지리를 읊은 것.

 

 



인용서적 / 국립중앙박물관 발행 『정조 임금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