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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회화의 대對 일본 영향

茶泉 2019. 2. 21. 13:10

 

고구려 회화의 대對 일본 영향

 

 

 

우리나라의 미술 문화가 일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이며 그러한 흐름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가 일본의 아스카 조정에 회화 · 서예 · 조각 · 각종 공예 · 건축 등 다방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미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회화가 미친 영향이 특히 컸다. 고구려 출신의 화가로 제일 먼저 주목되는 인물은

 너무나 잘 알려진 담징(曇徵)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는 610년 3월에 승려 법정(法定)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오경(五經)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지묵을 능히 만들었으며, 일본에 맷돌 만드는 법을 전했다고 한다.

 

 

 

 

<천수국만다라수장> 일본 나라현 주구지(中宮寺) 소장, 비단에 자수, 잔편 액자

 

 

현재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계 작품 가운데 제작 연대나 화가 등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천수국만다라수장>이다.622년 2월 22일 사망한 교토쿠 태자를 추모하고 그의 극락왕생을 염원하여 그의 비인 다치바나 다이노로가 스이코 여왕의허락을 얻어 채녀(綵女)들로 하여금 제작케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이 그린 밑그림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명문에 의해 세 사람 중 한 명 고려가서일은 고구려 출신임이 확인된다. 나머지 두 사람 야마토노 아야노 마켄과 아야노 누노 가고리도가야계의 인물이었고 하타쿠마는 신라계 사람이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고대 회화의 영향이 미쳤음은 관계자들의 이름 뿐 아니라 뒤에 살펴보듯이 수장(繡帳)에 나타난 회화적 요소와 양식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고구려 회화의 영향이 현저하다.
<천수국만다라수장>의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아미타정토설이 가장 유력시 된다.전체 내용이 본래 어떠했는지 현존 수장을 통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다만 고수장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구체적으로 관찰한 조엔(定圓)이라는사람이 쓴 《태자만다라강식(太子曼茶羅講式)》이나 《성덕태자전기(性德太子傳記)》의 기록을 통하여 대체적인 내용을 짐작할 뿐이다.
먼저 《태자만다라강식》에 의하면 "사중궁전(四重宮殿)이 층을 이루어 서 있고, 남녀와 금수의 격이 없으며, 일월(日月)의 이륜(二輪)이있고, 양쪽 모서리에는 종경(鐘磬)이 있다" 고 되어 있다. 《성덕태자전기》에는 "보탑 궁전이 겹쳐있고, 금궐누대(金闕樓臺)가 역력하며,마노(瑪瑙)와 호박(琥珀)이 색을 더하고, 성중집회(聖衆集會)에서는 이타(利他)의 일을 얘기하며, 계절의 변화가 없어 추위도 더위도 없는그야말로 완연한 극락을 이루고 있다" 고 전한다. 또한 "그 땅의 중앙에는 사중의 궁전이 있고, 좌우에는 종경이 있어 오쇠(五衰, 천인이죽을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징조)의 꿈을 일깨운다" 고도 했다.
두 장의 <천수국만다라수장>의 내용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연결되고 하부에는 쇼토쿠 태자가 현세에서 공덕을 쌓으며 불심으로 생활 하던 모습이, 상부에는 일월 · 산수 · 서조 · 영초 · 비운 · 연화 등이 있는 아름다운 천상의 정토에서 극락왕생 또는 연화화생하는 장면이 묘사돼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야겠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주구지 소장의 액자에 들어있는 작품은 원형을 그대도 재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되도록 본래의 구성에 근접하도록 배려하여 배치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천수국만다라수장>의 양식을 하나씩 살펴보자. 설명의 편의를 위해 주구지 소장의 액자를 위 그림처럼 '가'~ '바' 의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여 보기로 한다.우선 오른쪽 맨 아래 '' 부분부터 살펴보면, 자릉 바탕의 종루와 백평견 바탕의 길 떠나는 속인의 모습이다. 바탕 깁이 다른 데서알 수 있듯, 종루와 길 떠나는 속인들은 본래는 현재처럼 붙어있지 않았다. 이 점은 길 떠나는 인물들의 아래에 종루에는 없는 연주문대가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종루 안에서 승려가 종을 치고 있다. 승려는 주름치마 위에 가사를 입고 있어 무용총 널방 북벽 <접객도>나 쌍영총 널방 동벽<공양행렬도> 중의 스님의 모습과 유사함을 보여준다. 즉 이 승려는 고구려식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이 <천수국만다라수장>에 보이는 여인들이 한결같이 주름치마를 비롯한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 수장이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존하는 고구려의 것이 남아있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려워도 종의 형태도 고구려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수문전> 잔편 백제, 부여군 규암면 외리 출토, 26.9×28.8cm, 7세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종루는 팔작집인데 지붕은 횡으로 겹치듯 꺾어진 모습을 하고 있어 단을 이루며 포개져 있는 소위 철용(鐵茸), 시코로부키)임을알 수 있다. 이러한 시코로부키, 즉 겹지붕은 부여 규암면 출토의 산수문전(山水紋塼) 가운데 보이는 절의 지붕이나 뒤에 살펴볼옥충주자 궁전부의 지붕과 상통한다. 중국의 남조와 백제계 건축양식으로 믿어지고 있는 이 시코로부키의 지붕 형태로 본다면백제계 건축양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종루의 오른편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서있으나 형태가 명확하지 않아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나무들과 비교하기 어렵다.종루 왼편에 보이는 길 떠나는 인물들도 어렴풋이 그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인물들은 등에 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었으며여행에 간편하도록 바짓가랑이를 무릎 아래쪽에서 질끈 동여매었다. 최소한 세 사람의 모습이 확인된다. 이들과 종루 사이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식물이 서 있어 길 주변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한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수장이불교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아 구도(求道) 또는 구법(求法)을 위해 떠나는 장면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나' 부분은 백평견 위에 수를 놓은 것으로 13세기 가마쿠라 시대에 제작된 신수장의 잔편으로 보인다.여기에는 두 채의 건물과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건물들이 바로 앞에서 살펴본 《태자만다라강식》언급된 사중궁전이나 《성덕태자전기》에서 말하는 금궐누대로 생각된다. 오른편의 제일 높은 건물 안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사람과 그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승려가 보인다. 그 앞에는 고승이 설법을 하고 잇거나 지체 높은 인물이 무엇인가 얘기를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나 박락이 심하여 확인할 수 없다.혹은 불상이 있엇을지도 모르겠다.
왼편의 좀 더 낮은 건물 안에는 연꽃처럼 보이는 꽃을 받쳐 들고 반쯤 무릎을 꿇은 여인이 중앙에 보이고 그 앞에는 무릎을 꿇고앉아있는 승려와 서 있는 승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여인은 높은 신분인 듯, 앞의 승려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후기 고구려식 합임 저고리와 주름치마를 입었다. 이 부인을 따라온 뒤쪽의 인물들도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다. 또한 이 부분의 승려나 옆 건물 안에 서 있는 세 명의 승려가 모두 평양 지역에서 유행하던 우임의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의 인물이 모두 우임이나 합임의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평양 지역 복식 문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밖에 인물을 측면관으로 표현한 점도 물론 고대 회화의 보편적인 특성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인물화의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부분의 위편에는 연주문대가 보이는데 이 연주문대는 아마도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현세를 나타내는 하부와 천상을 나타내는 상부를 감싸는 테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구지 소장 <천수국만다라수장> 가운데 단 왼쪽 면 복원도

'다' 부분에는 연화화생 춤이 긴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인들의 왕래하는 모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부분에도 고수장과 신수장이섞여있다. 비교적 선명해보이는 것이 고수장이고 더 낡아보이는 잔편이 신수장이다. 새하얀 얼굴의 인물들은 본래부터의 것이 아니라고생각된다. 합임의 저고리와 주츰치마가 고구려 복식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임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다만 횡선문이 들어가 있는치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아직까지 발견도 바 없는 것으로 7세기에 새롭게 유행하지 않았나 측측된다. 이 부분의 연꽃 모양은 대체로 무용총의 천정이나 천장고임에 보이는 연꽃과 비슷하다.

 

'라' 부분은 좌우의 잔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릉의 바탕 위에 수를 놓은 것이다.

좌우의 인물들은 앞에서 살펴본 '다' 부분과 비슷하다. '라' 부분의 중앙에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범안호상을 지닌 좌상의 인왕

(혹은 신장)이, 그 위에는 세 명의 앉아있는 승려들이, 그리고 아래쪽에는 보지(寶池)의 수파(水波)와 연꽃이 보인다,

그런데 이곳의 연못과 연꽃은 '바' 부분의 연화화생 장면과 서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인왕 오른편의 잔편은 오하시 가즈부미의

생각대로 연화대좌를 나타낸 것으로 판단된다. 이 연화대좌 위에는 당연히 앉아있는 불상이 표현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연못에서 자생하는 연꽃으로부터 화생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과 연못의 물결을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연꽃에 자생하는 연꽃의 모습을 표현하는 경향은 고구려에서는 덕흥리 벽화고분 널방 동벽 벽화에서 보듯이 이미 5세기 경부터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경향이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보편화 되었을 것이다.

 

'마' 부분에도 연화화생의 모습과 여러 인물의 자태가 보인다.

합임의 긴 저고리를 입고 허리띠를 맨 채 두 손을 소매 속으로 넣은 모습으로 서 있는 인물은 고구려의 복식 문화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이 사람의 아래쪽에는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인물이 보인다. 검은 옷을 입고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의 인물은 신분이

높아 보인다. 왼족 맨 위에 있는 '바' 부분은 월상 · 꽃을 입에 문 함화서조(含花瑞鳥) · 비운(飛雲) 등이 자라에 표현되었는데,

 자릉에 나타낸 연화화생 장면보다 오래된 고수장의 잔편으로 여겨진다. 월상 · 함화서조 · 비운 등은 천상을 나타낸다. 특히 토끼와 월계수가

들어있는 월상은 두 장의 수장 중에서 좌폭 좌측 상단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월상이나 일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정 부분에

흔히 그려지던 것이다. 다만 월상의 경우 두꺼비였던 것이 내리1호분에서 보듯 후기에 토끼와 월계수로 바뀌었으므로

 <천수국만다라수장>의 월상은 고구려 후기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홍감아발루 바둑알> 백제, 일본 나라 쇼소인 소장.

 

 서조나 비운문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나타나는 모티브들이다. 꽃을 문 새의 모습은 서역적인 모티프로 볼 수 있는데

쇼소인 소장의 백제 바둑알, '홍감아발루 바둑알' 에도 나타난다. 또한 비운문은 진파리1호분이나 강서대묘 등 고구려 후기의 것과

유사하며 7세기 동아시아의 공통적인 양식으로 생각된다. 이 '바' 부분의 연화화생 장면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라' 부분의 연화나

연화대좌와 서로 연결되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귀갑이나 귀갑문도 서역적 요소로서, 고대 우리나라 미술에서 자주 표현되던

것임이 주목된다. 다만 삼국시대의 우리나라에서는 육각형의 귀갑문이 주로 그려진 반면, 이 <천수국만다라수장>에서는

거북 모양(鬼形)이 그대로 채택된 점이 큰 차이라고 하겠다.

 

 <천수국만다라수장>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 고구려계의 가서일(가이세쓰)과 가야계의 인물이었음이 말해주듯이

표현된 모티프들의 양식도 고구려적인 특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특히 6~7세기 초의 고구려 양식이 주로 표현되었음이 확인된다.

 

 

 

 

 

<옥충주자> 높이 226×정면 너비 114.5cm, 7세기 중반, 호류지 소장

 

삼국시대 미술의 일본 전래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것이 호류지 소장의 옥충주자(玉蟲廚子), 다마무시 즈시)이다.

'주자(廚子)' 란 불상을 모셔놓는 일종의 불감(佛龕)을 말하는 것으로 상부인 궁전부(宮殿部) 주변으 모서리를 감싸고 있는 투조(透彫)의

금동제 테 밑에 옥충(玉蟲, 비단벌레)의 날개를 깔아 장식을 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옥충주자는 '귤부인주자(橘夫人廚子)'와 함께

호류지에 소장되어온 것으로 하부의 기단, 중부의 수미좌(須彌座), 상부의 궁전부 등 세 부분으로 이뤄져있고, 회화 · 조각 · 공예 · 건축미술

의 여러 분야가 어우러진 종합적 미술문화재의 정수다. 또한 이 주자에는 삼국시대 우리나라 미술의 영향이 많이 투영돼 있어 그 의의가 크다.

 

일본에서는 이 주자가 백제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중국의 남조, 특히 양(梁)나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설, 일본에서 제작되었다는 설, 중국의

간쑤성(甘肅省) 량저우(凉州) 부근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설들은 제각기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지니고 있다.

대체로 백제설, 또는 백제박재설은 옥충주자를 처음 연구하기 시작한 이토 주타로가 1898년에 발표한 《호류지건축론》에서 주장했다.

이 설은 옥충주자의 건축 양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특히 궁전부 지붕의 겹지붕(시코로부키)이

백제의 산수문전에 보이는 사살 건물과 유사하여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옥충주자 정면도

전체높이 133.3cm, 궁전부 높이 108.0cm, 수미좌 높이 94.5cm, 대좌 높이 30.3cm, 대좌 폭 137.6cm,

 

이 밖에도 옥충주자의 수미좌 각주(角柱)를 장식한 금동투조(金銅透彫) 장식이 백제 능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왕관중심식(王冠中心飾)'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백제설이 유력시된다. 그러나 백제설을 처음 주장했던 이토 주타로도 나중에는 종래의 자기 설을 뒤집고

옥충주자가 쇼토쿠 태자의 지휘 하에 일본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백제설이라고 볼 수는 없어도 한국계의 작품일 가능성을 시살하는 견해가 미나모토 도됴무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는 옥충주자의 금속고예와 비슷한 것이 백제 고분에서 나왔고 옥충의 날개로 장식하는 기법이 한국적이며

화풍도 중국이 아닌 한국적이거나 일본적이라고 보았다. 일종의 절충적인 견해를 밝힌 셈이다.

 

일제강점기의 어용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는 처음에는 백제설을 이었다가 뒤에 양나라설로 바꾸었다.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주장을 처음 편 사람은 일제강점기 어용 고고학자로 활약한 하마다 고사쿠이다. 일본제작설은 국수주의적 경향을 띤

일인 학자들 사이에서 추종되어 왔다. 일본에서 제일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소위 귀화인이 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 중에 다나카 호조는 옥충주가가 일본에 있는 불교미술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당시 일본의 문화 수준으로는 도저히 그러한

작품을 만들 수 없었다고 보고, 한(韓) 또는 소위 오(吳)의 땅으로부터 귀화해온 외국 공장(工匠)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보았다.

 

※ 『고구려 회화』 저자는 옥충주자의 건축이나 공예 부문에 백제적 요소도 있지만

회화 부문에서는 고구려적인 요소가 훨씬 강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주자의 수미좌의 4면과 궁전부의 4비(扉, 문)에는 각기 불교적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수미좌의 앞면에는 <공양도供養圖>

우측면에는 <사신사호도(捨身飼虎圖)>, 좌측면에는 <시신문게도(施身聞偈圖)>, 뒷면에는 <수미산도(須彌山圖)>가 각각 그려져 있으며,

궁전부에는 정면에 <천왕상(天王像)>, 좌측과 우측의 비에 <보살상(菩薩像)>, 후면 벽에 <보탑도(寶塔圖)>가 표현돼 있다.

 

 

 

 

 

<공양도> 옥충주자 수미좌 앞면

 

수미좌의 앞면에는 작은 사리탑과 향로가 중심축에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에는 사자(밑부분), 비구(중앙부), 비천(윗부분)이

각각 대를 이루며 묘사되어 잇어 철저하게 좌우대칭적 구성을 보여준다. 이 장면을 사리공양 하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통상적인 경향이나

밑부분의 영수(靈獸)들에 의한 재물공양, 비구니들에 의한 분향공양, 비천들에 의한 산화공양의 세 가지 공양을 함께 묘사한 것으로도 본다.

모든 요소들이 같은 평면상에 상 · 중 · 하로만 표현되어 있을 뿐 깊이감이나 거리감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평면 위에 지상과 천상,

그리고 그 중간의 공간이 수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평면적 공간의 설정이나 공간충전식의 표현은 고대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비구와 비운이다. 특히 오른편의 비구는 비교적 큰 붉은 반점문(斑點紋)이 있는 가사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쌍영총 널방 동벽의 <공양행렬도>에 보이는 승려의 옷과 유사하여 고구려의 승복으로 보인다. 이 점은 수미좌 우측면의

<시신문게도> 중 주인공이 고구려 복장을 하고 있는 사실과 함께 주목된다. 이곳의 비천은 강서대묘의 비천과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통하여 강한 동세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또한 이 비천들의 머리 위쪽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연꽃이 강서대묘의 비천 밑에 그려진 것과 대단히 유사한 점도 주목된다.

 

 

 

 

 

 

<사신사호도> 옥충주자 수미좌 오른쪽 면(정면에서 볼 때)

 

수미좌의 우측면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신품(捨身品)>에 나오는 마하나타 왕의 셋째 왕자 마하살타에 관한 얘기가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는 사람의 눈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하단의 근경에 가장 중요한 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또 이 중요한 장면을 대나무 숲 뒤에 전개시키고 있음도 주목된다. 대나무를 동일 수평선상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뒤에 주제를 전개시키는 방법은 하대부터 육조시대에 걸친 미술품에서 엿볼 수 있는 고식적 표현 방법이다.

대나무의 크기 조절이나 공간의 효율적 구성력도 주목된다. 옷을 벗어 나무에 걸고 있는 왕자는 어깨가 좁아 보이지만 상체를 뒤로

젓히고 배를 내밀고 있어 7세기 이후 불상의 삼곡자세(三曲姿勢, 머리, 상체, 하제가 구부러져 신체를 율동감 있게 표현하는 자세)를

연상시킨다. 또한 몸이 세장(細長)한 점은 호류지 소장의 백제관음과 비교되기도 한다.

 

 

 

 

 


<사신문계도> 옥충주자 수미좌 왼쪽 면 (정면에서 바라볼 때)

 

앞에서의 <사신사호도>와 비슷하다. 깊이감이나 거리감이 없는 평면적 공간, 공간충전식 표현, 원형(圓形)의 이야기 전개,

산과 나무의 묘사법에서 두 그림은 서로 같다. 그림의 내용은 《열반경(涅槃經)》<성행품(聖行品)>에 나오는 것으로, 여래가 전생에

바라문(바라문(婆羅門)으로 태어나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고행하며 수도할 때 생긴 일을 그린 것이다. 하단부에는 설산동자가 나찰과

대화하는 장면, 왼편 중앙의 산에는 그가 들은 구절을 바위에 쓰는 모습, 오른쪽 위에는 그가 뛰어내리는 장면과 그 밑에서 시작하여

원을 그리듯 전개되고 오른쪽 밑부분 가까이에서 끝맺고 있다. 타원형이 이야기 전개법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사신사호도>와 같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는 매가 위 아래로 두 마리 앉아 있는데, 이 나무도 <사신사호도> 속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구구려 내릴1호분의 나무나 금동인왕상의 나무 모습과 유사하다.

 

이 그림에서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것은 인물의 모습이다.

설산동자는 세장한 몸매에 점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있으며 허리에는 띠를 두르고 있다. 춤이 긴 저고리는 좌임을 하고 있으며,

허리를 띠로 맨 모습, 옷에 나 있는 점무늬 등은 바로 고구려 복식, 특히 통구 지방의 순수한 고구려식 복식이다. 이러한 복식은 통구의

무용총 널방 동벽에 그려진 <무용도>를 비롯한 5세기의 여러 고분의 벽화에서 자주 보인다. 다만 옷소매와 바지 끝이 갈라져 있고

짧은 것은 그가 고행하면서 옷이 헤졌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던 바람누의 복장만 보아도

5세기경 고구려의 영향이 이 옥충주자에 짙게 배어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수미산도> 옥충주자 수미좌 뒷면

 

수미좌 뒷면 중심축을 따라서 수미산이 하늘을 향하여 높이 솟아있고 그 상하에는 사찰이, 좌우에는 일상과 월상 · 누각 · 비천 ·

서조 등이 공간을 메우듯 그려져 있다. 철저하게 좌우대칭적 구성을 보여주며 동일 평면상에 상 · 중 · 하 높이의 구분만이 가능할 뿐

깊이감이나 거리감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하부에는 큰 건물이 있고 그 안에는 삼존불의 모습이 보인다. 건물 좌우로 사자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데, 그 뒤편으로 바다가 보인다. 수미산은 바다에서 솟아오른 듯한 모습인데 중간 부분은 흡사 버섯 같으며, 산 허리를 커다란

용 한 쌍이 휘감고 있다. 전체적으로 《해룡왕경(海龍王經)》 <청불품>의 내용과 유관한 수미산 및 해룡 왕궁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수미산의 좌우 공간에 표현된 비운문이나, 삼족오가 있는 일상 및 토끼가 있는 월상 등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 <수미산도>의 맨 위쪽의 좌우에 보이는 새를 탄 신선을 그린 승조선인상(乘鳥仙人像) 역시 통구사신총의

<승학선인도>에서 보듯이 고구려 후기의 고분벽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요소라는 점만은 다시 한 번 지적해 두고 싶다.

 




 

左) <천황상> 옥충주자 궁전부 정면비

右) <보살상> 옥충주자 궁전부 측면비

 

궁전부의 정면비(正面扉)에는 <천왕상>이, 좌측과 우측의 문비(門扉)에는 <보살상>이 각각 둘씩 그려져 있다.궁전부에는 불상이 봉안되므로 그 정면의 문에 천왕이 배치되는 것은 당연하다. 천왕들은 모두 완연한 삼곡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바깥쪽으로 허리를 내밀고 상체를 안쪽으로 굽히고 있어 마름모형을 이루고 있다. 즉 이들은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비교적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 삼곡의 자세는 이 천왕들의 모습이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양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점은 궁전부 좌우측 비면에 그려진 보살상들에도 정도의 차이를 막록하고 나타나 있다. 넓어진 어깨, 가늘어진 허리, 삼곡의 유연한 자세 등에서 새 양식의 수용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자세나 옷자락의 처리,테를 이룬 두광(頭光), 대좌의 연판문 등은 고구려의 금동인왕상과 너무나 유사하여 놀랍다. 다만 고구려의 것이 좀 더 동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 하겠다. 또한 이 고구려 금동인왕상에 보이는 나무들과 이 <사신사호도> 상부의 나무가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보탑도> 옥충주자 궁전부 뒷면

 

 

궁전부의 배면(背面)에는 흡사 등자와도 같은 C자형을 쌓아 올린 듯한 산과 그 꼭대기에 올려져 있는 세 개의 탑이 그려져 있다.

산과 탑 안에는 각각 좌선하는 모습의 비구와 여래가 표현되었고, 좌우로는 서조 · 비운 · 비천 · 일월이 대칭적으로 배열되었다.

 

이 옥충주자의 그림들이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귀화한 고구려계 화가들의 솜씨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다카마스 고분 벽화 분포도

 

고구려 회화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가 1972년 3월 일본 나라현 다카이시군(高市郡) 아스카(明日香)에서

발견된 다카마스 고분의 벽화이다. 회석(灰石)을 다듬어서 석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관을 안치한 후 가옥형 천정석으로 덮고 봉토를

씌원 원형의 횡혈식 석곽봉토분이다. 이 고분이 발견되자 일본 하계에는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나 다양한 견해가 피력되었고, 그 개요

는 여러 저서와 논문에 정리되어 있다. 축조 시기는 대체로 7세기 후반~8세기 초로 의견이 모아져 있다. 이 다까마스 고분은

여러가지 측면에서삼국시대 우리나라의 문화, 특히 고구려 미술의 전통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묘실 동벽에는 가운데에 청룡이, 그 왼쪽(북족)에 여인 군상을, 오른쪽(남쪽)에 남군자상을 그렸다.청룡과 남군자상은 짙은 채색인 반면 일상은 금박을 붙였다. 서벽은 동벽과 같은 구성이다. 북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남쪽 벽에는도굴꾼이 뚫은 구멍이 나있을 뿐, 주작은 없어지고 말았다. 벽면 가장 중요한 부분에 사신이 자리하고 그 나머지 공간에 풍속화적 성격의남녀군상을 그렸다. 사신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인물을 곁들인 형식으로 내용면에서 고구려 중기와 후기 고분 전통이 어우러져 있는 셈이다.


 

 

 

<여인군상> 다카마쓰 고분 널방 동벽

 

 

 

<여인군상> 다카마스 고분 널방 서벽

 

인물상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은 동벽과 서벽 각각 네 명씩 그려져 있는 <여인군상>이다.이 여인들은 노랑 · 빨강 · 초록 등 화려한 색깔의 긴 저고리와 색동치마를 입고 모두 남쪽을 향해 걷고 있다.몸의 자세와 뒤로 나부끼는 치맛자락이 그들의 움짐임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두 벽의 첫 번째 여인은 둥근 모양의 자루와 긴 원예(圓翳, 둥근 햇빛가리개)를 들고 있다. 동벽의 네 번째 여인은 먼지털이 모양의 승불(蠅拂)을 어깨에 메듯이 들고 있고, 건너편 서벽의 세 번째 여인은 현대의 하키채를 연상시키는 여의(如意, 불교 법구의 하나)를 역시 어깨에 메듯이 왼손으로 들고 있다. 여의는 발해 정효공주묘의 남자상에도 보인다.
<여인군상>의 포치는 동쪽 벽이나 서쪽 벽이나 거의 동일하여 함께 보면 좌우대칭을 이룬다.원예를 든 첫 번째의 여인들, 고개를 다른 여자들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는 두 번째의 여인들 등을 비교하면 이 대칭성이쉽게 이해된다. 이러한 대칭성은 여인들의 전체적읹 포치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첫째와 넷째 여인을 거의 동일 선상에 배치하고두 사람 사이의 뒤쪽 공간에 나머지 셋째와 둘째 여인을 그려넣었다. 이 점은 두 벽 모두 마찬가지다, 괄목할 만한 점은 이 여인들의포치에는 거리감과 깊이감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고대 인물화의 삼각구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변화를 주어 거리감과 깊이감을 함께 표현한 것은 고대 회화의 고졸성을 상당히 벗어난 발전된 화법과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그리고 셋째 여인과 넷째 여인은 마치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화면에 생동감을 자아내기도 한다.이러한 점들은 고대 회화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706년에 축조된 당나라 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에 그려져 있는 여인군상과 어느 정도 비교할 만한 요소이다.


 

 

 

 

 

다카마쓰 고분 <여인군상> 복원도

 



 

<궁녀도(宮女圖)>, 영태공주묘, 중국(당), 706년, 중국 섬서성

 

영태공주묘의 여인군상이 삼각구도의 고졸성을 거의 완전하게 탈피한 반면에 다카마쓰 고분의 여인군상의 경우에는 아직 그 전통이남아 있으며, 또 전자의 여인들이 9등신에 가까운 세장한 삼곡자세를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후자의 여인군상에 보이는 인물들은비교적 퉁퉁하고 5등신 정도여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 점은 가카마쓰 고분의 벽화가 아직 성당기(盛唐期)의 영향을 적극적으로받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또 연대적으로 8세기 이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다카마쓰 고분의 여인들 모습에초당대(初唐代) 인물화의 영향이 어느 정도 스며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농려풍비한 몸매, 통통한 얼굴,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등은 아무래도 초당대 인물화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후대적 요소와 함께 구구려 회와와의 관련성이 짙게나타나 있다. 비록 변형되기는 했지만 고구려 고붅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삼각형 구도의 전통이 현저하게 남아있고, 또 여인들의 복식이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삼각구도가 고구려 회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성은 아니며, 또 고구려 복식을 하고있다고 해서 그 회화까지도 고구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누누이 살펴보았듯이 고구려계 화가들이 백제계 화가들과 함께 아스카 시대 이래로 일본 화단을 이끌었으며 그 전통이 8세기 이후까지도 면면히 이어진 사실을 고려할 때, 과연 가카마쓰 고분의 벽화가 고구려의 전통 회화와 무관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고구려계이든백제계이든 일본에 토착한 이후 정도의 차이를 막론하고 일본화되었을 가능성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화풍도 변했을 것임이 십분 짐작되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이 하루 아침에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위 인물들은 대부분 고구려 고분벽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철선묘(鐵線描)로 그려져 있음도 주목을 요한다. 이 밖에 여인들의 머리는

뒤에서 모아 접어 올린 후에 끈으로 동여맨 모습이다. 또한 서벽의 첫째와 셋째 여인의 머리에서는 리본을 단 모습도 보인다.

 

 

 

 

 

上) <남자군상> 다카마쓰 고분 널방 벽면

下) 가카마스 고분 <남자군상> 복원도

 

동벽과 서벽의 남쪽에는 여자군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기 네 명씩의 남자들이 그려져 있고 인물들의 포치 방법도 엇비슷하다.

즉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 세 번째 남자만이 조금 다른 자세이며 인물의 포치는 동 · 서벽이 좌우 대칭을 이룬다.

동벽 <남자군상>의 첫 번째와 세 번째 인물들은 괘대를 어깨에 걸어 가슴 앞으로 내렸으며 두 번째 인물은 산개(傘蓋)를 받쳐 들고

있다. 맨끝의 네 번째 인물은 자루 모양의 천으로 싸서 동여맨 큰 칼을 오른쪽 어깨에 매듯이 들고 있다. 서쪽 벽의 남쪽 <남자군상>도

각각 지물(持物)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 남자는 접는 의자를 들고 있고, 두 번째 인물은 긴 자루 모양의 천으로 감싸서 동여맨 창 비슷한

무기를 어깨에 기대어 들고 있다. 세 번째 남자는 괘대를 앞가슴에 걸치고 있으며, 네 번째 남자는 옥장(玉杖)을 어깨에 매고 있다.

대체로 둘 씩 짝지어 있는 모습에다 칠사관(漆紗冠)을 쓴 모습도 특이하다.

 

남자들은 대체로 수염이 없어 젊어 보이며, 이목구비를 포함한 얼굴이 여인상과 비슷하게 예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몸이 가늘어 보이며 솜씨에도 차이가 있어서 여인군상과 남자군상은 각기 다른 화가의 솜씨로 보인다.

 

 

 

 

 

<사신도> 다까마쓰 고분 널방 벽면


왼편 위로부터 아래로 청룡 · 백호 · 현무의 순이다.

비교된 고구려 <사신도>는 오른편 위로부터 아래로 청룡과 백호는 강서중묘, 현무는 강서대묘의 벽화다.

 

동 · 서 · 북벽의 한가운데에는 각각 청룡 · 백호 · 현무가 그려져 있다. 사신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나 위치를 보면 벽화 가운데가장 중요시 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신을 중요시한 것은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서도 후기의 것이다. 고구려 사신은 본디천정부에 그려지다가 시대 흐름에 따라 풍속적 요소가 강한 벽면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벽면을독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고분의 벽면 그림의 내용은 '인물풍속  → 인물풍속 및 사신 → 사신'으로 바뀌어갔던 것으로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는 고구려 중기 벽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면서도 후기적인 요소를 강하게 반영하고있다. 이 점은 <사신도> 자체의 양식에서도 드러난다. 동벽의 청룡은 혀를 길게 빼고 있는 모습과 S자형을 이룬 목, 적당히 길고유연한 몸체에서 고구려 강서중묘와 대묘의 청룡과 대체로 유사하다. 다만 다카마쓰 고분의 청룡은 앞발을 모두 앞으로 뻗고 있고꼬리가 오른쪽 뒷발을 감듯이 굽어져 있어 강서중묘와 대묘의 청룡과 비슷하나 동세다 강하지 못한 점이 큰 차이라 하겠다.백호 역시 자세는 청룡과 마찬가지인데 대강의 모습은 고구려 강서중묘의 백호와 비슷하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모습,바람에 날리는 어깨 부분의 긴 털들, 횡선들로 표현된 등 위의 줄무늬, 띠모양의 배 줄기 등이 두 <백호도>에 모두 공통적이다.
북벽의 현무는 다리가 굵고 꼬임새가 고구려 강서대묘의 <현무도>를 연상시켜 주지만, 고구려 것에 비하면 박제품 처럼 변화가없고 동세가 결여된 모습이다. 이 <현무도>는 쇼소인 남창(南倉)의 십이지팔괘배원경(十二支八卦背圓鏡)에 표현된 <현무도>와비슷하여 주목된다. 거북이의 굵고 짧은 다리는 가늘고 긴 다리에 비하여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사실성에 더 근접한 것으로수나라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다카마쓰 고분의 <사신도>가 대체로 고구려 후기의 것과 상통하는 점과 함께연대 추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가도 하겠다.



 

<월상>과 그 실측도

 

동벽의 중앙에 그려진 청룡의 위편에는 일상이, 서벽의 가운데에 묘사된 백호의 위편에는 월상이 각각 표현되어 있다.일상과 월상은 모두 직경 약 7.2센티미터의 원 안에 각기 금박과 은박을 붙여 나타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금박이때때로 사용되었던 것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둥근 원의 바깥쪽에는 붉은 칠을 하여 일상과 월상이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일상과 월상의 밑에는 여러 개의 붉은색 수평선을 평행하게 긋고 그 선들의 이곳저곳에 청색이나 녹색으로 산 모양을 나타내었다.이러한 원산(遠山)의 모습은 내리1호분과 강서대묘 등 고구려 후기의 벽화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모습의산들이 수평선과 함께 결합한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벽돌〔塼〕에서 뚜렷하게 엿보인다. 또한 수평선상의 산과 일상 · 월상이함께 나타나는 모습은 당나라 영태공주묘에서도 보이고 있어 당의 영향을 엿보게 한다.


 

 

 

<원산(遠山)> 강서대묘 널방 서쪽 천장고임, 7세기초

<집무늬 벽돌> 통일신라, 8세기

 

다카마스 고분의 일상 및 월상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통구사신총, 5회분 5호묘 등 고구려 후기의 고분에는 일상과 월상이 각각, 종종 인면사신의 복희와 여와가 함께 나타나는 데 반하여, 이곳의 일상과 월상들은 그것들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나 달을 나타내는 섬여 혹은 계수나무와 토끼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고, 금박과 은박으로 대체되었다.

 

 



 

호류지 금당벽화 배치도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가 창건하였던 바,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598년 설과 606년 설이 있으나 623년에는 분명히 금당이 존재 했으므로

7세기 초에 이미 세워졌음이 분명하다. 이 본래의 호류지는 670년에 낙뢰로 인하여 전소되었다. 호류지 금당은 수리중이던 1949년 1월

26일 이른 아침에 화재가 발생하여 내진(內陣) 위쪽 소벽(小蘗)에 그려진 비천상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을 맞게 되었다. 호류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문화의 영향을 종합했다고 보아도 좋을 일본 고대 최고의 가람이며 그 금당의 벽화는 내용과 수준면에서

일본 고대미술의 대표적인 정수인 데도 불구하고, 그 제작에 참여한 화가의 이름이 당대(當代0의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아

분명한 얘기를 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호류지 금당은 사방에 나있는 문을 제외하고 나면 기둥과 기둥의 사이가 이루는 벽면이 영두 개가 되는데 이 벽면들에 벽화가 그려졌다.

이 벽면들을 외진(外陳)이라고 하는데 이 외진에 석가정토(동), 아미타정토(서), 약사정토(북의 동측), 미륵정토(북의 서측), 여러 보살 등

중요한 주제들이 표현되었다. 또한 금당의 중앙부에 수미단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수미단의 내진이라고 지칭되는 스무 개의 작은 벽면들

에는 각각 비천도가 그려졌다. 이 비천상들은 헤체 수리를 하는 동안 일찍 분리되었던 관계로 화재를 면할 수 있었으며 이것들이 본래의

모습을 지닌 유일한 원작들인 것이다. 이 벽화들은 공통적인 시대양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앞에서 언급했던 듯 몇 사람의 다른 솜씨가

확인된다. 이를테면 외진의 열두 그림 가운데 남벽 끝의 대세지보살부터 반가사유보살, 아미타정토를 한 사람이 그렸고, 이어 성관음보살

부터 미륵정토까지는 또 다른 사람이, 약사정토에서 십일면관음보살은 또 다른 사람의 솜씨다. 이렇듯 금당의 외진만 보아도 네 명의 화가

가 벽면의 한 구석씩 맡아서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분담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정토도> 호류지 금당 외진 6호벽, 312×266cm, 1949년 소실

 

외진의 벽화 중에서도 <아미타정토도>가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앙에 본존인 좌상의 아미타여래를, 그 좌우에 입상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표현하고 그 나머지 여백에 화불(化佛)들을 그려넣었다. 아미타여래의 머리 위쪽에는 화려한 천개(天蓋)를

표현하였다. 구도는 철저한 좌우대칭이다. 본존인 아미타여래는 전법륜(轉法輪)의 수인(手印)을 하고, 오른발이 위에 오는 통상의

상좌(吉祥坐)와는 반대로, 왼발을 위에 올려놓는 항마좌(降魔坐)의 자세를 하고 있다. 이러한 항마좌는 "인도에는 없고 중국에서도

남북조 후기부터 생겨 초당대에 일반화된 것으로 일본에서 하쿠호 시대부터 행해진" 것이다.

 

어깨는 넓고 허리는 가늘며, 둥근 얼굴, 가늘고 긴 눈, 뚜렷한 입술, 길게 늘어진 구멍 뚫린 귀를 지니고 있어 당대나 통일신라기의

 불상 조각을 대하는 듯하다. 의습의 표현에는 적극적인 음영법이 구사되어 있어 색채 감각과 함께 서역적 요소를 드러낸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본존을 향하여 서 있는데 8등신의 체격을 지니고 있고, 어깨를 뒤로 젖히고 배를 앞으로내민 유연한 삼곡자세를 하고 있어

굽타(Gupta) 미술의 영향을 수용하여 발전한 당나라 및 통일신라의 보살 조각상을 연상시킨다. 화려한 보관(寶冠)과 경식(頸飾),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자락, 어깨 위에 늘어진 초록색의 긴 머리카락 등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보살상은 인도의 아잔타(Ajanta)

석굴 중 5세기 말의 제17굴 기둥에 그려진 남자상이나 6세기 초의 제1굴 후벽의 보살과 비교된다.

 

이처럼 호류지의 금당벽화에는 인도와 중국 당대 미술의 영향이 함께 갖추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우리나라 삼국시대 전반기

또는 중기의 육조시대 미술에 보이는 고졸한 양식보다 진전된, 당대의 신양식이 지배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이러한 신양식은 우리나라의

경우 불상을 통해서 볼 때 대체로 삼국시대 후반기인 7세기 초에 수용되어 자리 잡기 시작하고 통일신라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호류지

금당벽화에 보이는 당 양식은 당을 통해 직접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나라를 통해서 이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엔닌(圓仁)의 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의 항해술로는 도당에 어려움이 많아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형편 등을

감안할 때, 이 신양식의 일본 유입은 일본과 당나라 간의 직접적인 교류였거나 '당 → 한국→ 일본'의 교류였거나 그 과정에서 주역을

맡았던 인물들은, 당에서 <불족도>를 그려서 671년에 귀일(歸日)했던 고구려계의 기부니노 모토자네처럼 삼국계 화사씨족의 후손들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호류지 금당의 건축양식이나 건축 과정에서 사용된 고려척 등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 가능성을 배제키 어렵다.

 

 

 

 

 

<쌍수비천도>

호류지 금당 약사여래상 목제 대좌 안쪽 벽

묵회, <서일본신문>, 1989년

 

고구려 회화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위에서 살펴본 것들 이외에, 호류지 금당의 약사여래상의 목제 대좌 내벽에 먹으로

그려진 <쌍수비천도(雙樹飛天圖)>와 쇼소인 소장의 자단목제(紫檀木製) 비파의 채에 그려진 <수렵연락도(狩獵宴樂圖)>가 주목된다.

 

<쌍수비천도>는 언덕 위에 크고 작은 두 갈래의 쌍수가 세 그루 서 있고 그 왼편 위쪽 공간에 비천을 묘사하였다. 큰 나무에는 특이한

꽃이 달려있는데 그 꽃 모양으로 보아 이 나무들은 석가가 입적한 장소에 있던 사라쌍수(沙羅雙樹)라는 주장이 나와있다.

나무나 비천이나 모두 쌍구(雙鉤)의 선묘 위주로 그려진 일종의 백묘화다. 그런데 나무들을 보면 중앙에 U자형의 쌍을 이룬 큰 나무를

세우고 그 좌우에 훨씬 작은 규모의 비슷한 형태를 지닌 나무들을 배치하여 묘하하고 있어서 마치 큰 본존여래와 좌우의 작은 협시보살

로 이우어진 삼존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U자형의 나무는 중국 육조시대에 유행하였고 고구려에서는 진파리1호분의

나무에는 잎이 무성한 데 반하여 이 호류지의 것은 잎이 모두 떨어진 고목(枯木)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차이라 하겠다. '고목에 꽃이

핀' 이 나무는 아무래도 불교의 교리를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고구려 후기의 수목과 친연성을 지니고 있어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점은 비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몸을 수직으로 세우고 나는 모습, 바람에 나부끼는

여러 갈래의 옷자락 등은 역시 육조시대의 양식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고구려의 비천상을 연상케 한다. 이 비천을 고구려 강서대묘의 널방

천정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는 비천과 비교하면 그 유사성이 완연하다. 고구려의 것이 좀 더 속도감과 동세가 강하게, 그리고 좀 더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잇는 점이 차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이 호류지의 <쌍수비천도>는 6세기 후반~7세기 초 고구려 회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또한 호류지 금당의 약사여래상은 백제계의 도리가 623년에 만든 석가여래상과 대단히 흡사하여 도리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그 연대

는 607년으로 믿어지나 그보다 후대로 보는 설도 있다. 따라서 약사여래상과 목조대좌가 동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이 <쌍수비천도>

도 7세기 초의 그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에 의거해서 진파리1호분이나 강서대묘 등 고구려 후기 고분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도

참고가 된다. 특장의 분야에 따른 분업과 협동이 일본 조정의 필요에 따라 고구려계와 백제계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수렵연락도>

자단목화조비파한발회, 일본 쇼소인 소장.

 

비파채에 그려진 <수렵연락도>도 어느 정도 고구려 회화와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자단목으로 된 비파의 채에 붙인 가죽에 붉은 칠을 두텁게 하고 그 위에 사냥하는 장면과 들놀이 하는 장면을 채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완성시킨 후에 다시 기름을 칠한 관계로 황갈색의 색조를 띤다. 기다란 화면의 근경에는 말을 달리며 호랑이를 사냥하는 장면이,

중경에는 산을 배경으로 둘어앉아서 악기를 연주하며 놀고 있는 인물들과 그들을 향하여 짐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그리고 원경에는

평형한 대지 위에서 사냥하는 기마 인물들과 물위에 떠있는 원산이 묘사되어 잇다. 근경과 중경에서는 흐르는냇물을 표현하여

화면을 적당히 구획하면서 동시에 변화를 주고 있는 점도 괄목할 만하다.

 

이 그림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물론 수렵 장면이다. 사냥은 고대의 서역, 중국, 우리나라에서 즐겨하였고 또 미술품에 중요한 주제로

자주 등장하였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국가적 행사로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고분벽화에도 주인공 생활도의 하나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 벽화고분의 <수렵도>는 산과 사냥 장면ㅇ르 함께 표현한 가장 오래된 예로서, 그리고 무용총은 가장 박진감

넘치는 사냥장면을 특이한 모습의 산을 배경으로 표현한 점에서 각별히 관심을 끈다.

 

이 <수렵연락도>가 이러한 고구려의 <수렵도>와 깊은 연광성이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주제면에서 상통하는데, 특히 사냥과

야유회를 함께 표현한 것은 장천1호분의 <수렵야유회도>와 잘 비교된다. 다만 장천1호분에서는 남자들이 사냥을 하고 있는 반면에

주로 여자들이 야유회를 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수렵연락도>와 무용총의 그림에 표현된 산은 모두 괴량감, 깊이감,

거리감 등을 결여하고 있어 평면적이며, 산다운 분위기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고 상징적 표현의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의 표현에 관한 한 두 작품 모두 고졸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인물과 동물의 표현이 산의 묘사보다 훨씬 능숙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도 두 작품을 상통한다. 그렇지만 쇼소인의 이 <수렵연락도>는 화면의 짜임새와 포치, 원근감 있는 공간의 표현에

있어서 고구려 무용총의 것보다 발전된 것이어서 시대적으로 무용총의 연대보다 훨씬 뒤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편편 이 쇼소인 작품에서 중경에 그려진 연락 장면을 감싸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은 고구려 후기의 고분인 진파리1호분의 수목과 대체로

유사하며, 원경의 바다 위에 떠있는 산은 역시 고구려 후기의 고분인 내리1호분과 강서대묘의 벽화에 보이는 것들과 대단히 비슷하여

이 <수렵연락도>가 7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아무튼 고구려 회화와의 이러한 깊은 연관성으로 볼 때 이 그림에

호복을 입은 인물이 보인다는 이유로 당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산수의 표현이 당나라 회화와는 현저하게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수렵연락도>는 7세기 고구려 회화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이들 작품은 대부분 고구려 회화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 당대의 양식을 수용해 고졸한 삼국계 양식과 신양식을

혼합 또는 절충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혼합절충 양식을 거쳐 보다 일본적인 취향의 헤이안 미술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인용서적 : 안휘준 著 『고구려 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