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국화 4

茶泉 2019. 1. 22. 10:34

 


 

생활 속의 국화

 

하나 | 한국 | 여인들의 장신구를 통해 본 국화

 

 

장수를 꿈꾸는 여인의 꽃

 

 

 


 

 

 

 

  

 

좌) 뱃씨댕기 | 조선, 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소장.

우) 굴레댕기 |조선, 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소장.

 

 

 

 

어린이의 머리 위에 핀 장수화

 

서너 살 정도의 여자 어린이의 종종머리를 꾸미는 데 사용하는 배씨댕기에는 매화 문양 이외에 국화 문양이 대부분이다. 은겹국화꽃, 파란 국화꽃 등 그 모양새도 다양하다. 이 배씨댕기에는 붉은 빛 화심(花心)이 박힌 양각된 국화꽃이 있고, 그 밑으로 4개의 국화가 나란히 달려 있다. 태어나서 처음 사용하는 장신구일 뿐 아니라 병마와 액운을 차단하는 주술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즉 이집단 국화꽃은 건강과 장수의 의미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굴레댕기는 어린아이들의 호사용 모자로 여름에 쓰는 것과 겨울에 쓰는 두 종류가 잇어서 여름에는 갑사로 만들어 시원하게 했고, 겨울에는 비단을 써서 따뜻하게 했다. 머리 앞 중심과 여러 가닥의 천에는 각종 꽃과 길상 문자를 수놓아 어린이의 장래를 축원했다. 이것은 원래 서너 살까지의 어린이들에게만 씌웠으나 부모의 생존 시에 딸이 회갑을 맞는 경우 일명 노래자(老萊子)라고 하는, 색동옷보다 섭이 약간 길고, 고름의 윗부분을 5가닥에서 7가닥을 내어 매듭지은 옷이나 오방장 두루마기를 입고 굴레를 쓰고 부모의 무릎에 안기는 풍속도 있었다. 이 굴레댕기는 굴레와 댕기가 합한 특이한 모양으로 장식적인 '쓰개' 라 할 수 있다. 천을 말아서 만든 여러 송이의 꽃과 술 장식을 원형의 판에 붙여 화관처럼 머리에 얹고 양쪽의 실끈은 머리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화려한 도투락댕기에는 큼직한 국화꽃 은장식이 되어 있다. 이는 어린이의 무병장수를 비는 장수화(長壽畵)다. 

 

 

 

 

 

 

칠흑 같은 쪽머리에 핀 신선의 영초

 

뒤꽂이는 쪽머리 위에 장식적으로 덧꽂는 비녀 이외도 수식물로 부녀수식 가운데 크기가 작은 편이다. 뒤꽂이의 형태는 꽂과 나비로 된 화접문(花蝶紋)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연꽃 봉오리나 불로초로 꾸민 것도 있으며, 실용을 겸한 귀이개 뒤꽂이와 빗치개 뒤꽂이도 있다. 재질은 비녀와 같으며 비녀의 재질에 맞추어 꽂는다. 은으로 만든 뒤꽂이의 국화꽃은 변신이 눈부시다. 전통 사회에서 서민의 장신구에 진주나 다이어몬드는 짚신에 국화꽃 그리기다. 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 정품일 수가 없다. 그래도 디자인은 산뜻하고 싱그럽다. 파란으로 만든 뒤꽂이에는 매화와 단짝을 이룬 것이 많다. 시골길에서 만나는 풀꽃 같은 이미지가 친근하고 사랑스럽다. 국화는 신선의 영초라 하여 불로장수를 가져다 주는 신성한 식물, 즉 선약을 상징한다.

 

 

은가락지에 새겨진 부부의 백년가약

 

조선시대 가락지는 궁중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필수 패물로 보급되어 왔다. 형편대로 값진 귀금속부터 헐값의 납가락까지 주로 혼례의식에 백년가약의 징표가 되어 왔다. 《춘향전》에서도 가락지는 끝없는 사랑을 뜻했고 옛 민요에도 가락지가 등장한다. '굴레 같은 은가락지 동이굽에 다 달았네.' 시집 올 때 받은 은가락지가 물동이에 다 닳아서 가늘어졌다는 비유다. 조기잡이 뱃사람들의 노래에 선주(船主) 마누라의 손에 끼어 있는 '말굽 같은 저 가락지 해에 번쩍 달에 번쩍' 하는 노래가 있다. 말굴은 바다에서  따는 굴 중에서 가장 큰 굴이다. 조선시대 가락지는 쌍으로 만들고 굵고 큰 것이 특징으로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표지로써 기혼 여자만 사용할 수 있었고, 미혼 여자는 한 짝으로 된 반지(半指)를 사용했다. 은가락지는 국화문이 음각되어 있고, 파란 반지에는 육모에 국화꽃이 양각되어 있는 것과 겹국화에 진주 화심이 박혀 있는 것이 있다. 가락지는 예부터 마음을 담는 장식품으로서, 국화 문양은 남녀의 애정에 대한 믿음과 절개의 불변함을

약속하는 정표로 쓰였다.

 

 

 

 

 

 

 

 

우리 옷의 구조는 원래 품이 넉넉하고 깊숙히 여며지는 것이어서 띠나 고름, 끈 등으로 맸기 때문에 단추는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단추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개화기 이후 양복의 도입에 의해서지만 맺은 단추나 원삼(圓衫)단추, 배자(褙子)단추 등은 사용한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금국화단추와 파란국화 단추는 원삼이나 배자 단추로 추정된다. 여기에 국화 문양도 가을 서리를 맞으면서 홀로 피는 것이 군자의 상징으로 사랑을 받았고, 불로장수를 가져다주는 신령한 식물로 여겨져 많이 이용된 꽃문양이다.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품격

 

관자(貫子)는 조선시대 기혼 남자가 상투를 틀어 머리를 수발하기 위해 망건(網巾)을 사용할 때 망건의 좌우에 달아 당줄을 꿰어 거는 작은 고리를 말한다. 관자는 재료와 문양에 따라 관품 내지 계급을 표시하고 있다. 품계에 따라 관자를 사용한 예를 보면, 두툼하고 입체감이 있는 이 국화 문양의 금관자는 종2품이 사용하는 관자이며, 매, 난, 국, 죽과 함께 군자의 품격을 상징한다. 의(義)를 지켜 꺾이지 않는 지조로 일관해 온 선비정신과도 부합된다. 정자(頂子)는 흑립(黑笠)이나 전립(戰笠)의 정상에 장식한 꾸밈새로 증자라고도 한다. 고려 31대 공민왕 때 직품에 따라 백옥 · 수정 등의 정자를 흑립에 달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 법전에 의하면 대군은 금(金), 당상관은 은(銀), 사헌부 · 사간원의 관원과 관찰사 · 절도사는 옥(玉)으로 감찰관은 수정(水晶)으로 했다고 한다. 금동(金銅)과 은으로 만든 정자는 전립에 달고, 옥정자(玉頂子)는 흑립에 장식했다. 전립에 달았던 이 은정자(銀頂子)는 칠보문 여의주문 안에 국화, 연화 등을 투각, 음각으로 새겨 화려함을 강조했다. 투각된 국화 문양은 고고한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둘 | 한국 |선비들의 문방사우와 애완품을 통해 본 국화

 

 

문방공예에 꽃피운 은일선비의 품격

 

 


 

 

국화에 걸맞은 인격자의 문양

 

예로부터 덕성과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인격자를 군자(君子)라고 했다. 군자에 애한 인식은 그 신분성볻다는 고매한 품성에 대한 인격적 가치로서 존중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군자를 실현해야 할 인생의 궁극적 지표로 설정하고 적극 추진했었다. 국화를 포함한 사군자는 바로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삶을 확충 · 고양 시키고 그 마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서 특히 사랑방 가구에서 그려지고 새겨지기 시작했다. 군자란 모든 선비가 지향하는 최고의 지순한 덕목으로 그들이 있는 곳에 책장, 필통, 연상, 시전지 등이 있게 마련이다. 그곳에는 당연히 국화가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랑방 의걸이장, 문갑, 묵호(墨壺 ) 등의 가구에서도 드물게 국화 문양이 보인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층 책장(二層菊花紋冊欌)은 규모가 크고 여러 가지 문양을 조각해 알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전면은 기하돌림 문양의 테두리에 국화, 나비, 난초, 학, 거북이 파도 등을 음각했고 측면에는 둥근 원 안에 새와 나무, 물결 등을 자유롭게 배채해 표현 했다. 장의 내부에는 '게묘오월팔일조성(癸卯五月八日造成), 통영인 전순흥 김일욱(統營人 全舜興 金日郁)' 이라는 명문이 있다. 제작 기법으로 보아 계묘년의 연도는 1843년으로 보이며, 통영 사람인 전 씨와 김 씨가 사용자나 혹은 제작자로 추정된다. 국화 문양은 일, 이층 중간 문판에 2개씩 음각되어 있다.

 

 

 

 

 

 

 

투박한 목질에 국화를 새긴 선비의 아취

 

문방구를 벌여 놓아 두는 작은 연상(硯床)에는 서랍의 앞면과 기둥, 네 측면에 모두 국화를 새겨 넣었다. 대나무로 만든 육합죽제필통(六合竹製筆筒)은 큰 통을 중심으로 크기가 같은 5개의 대나무통을 접합한 모양이다. 중앙의 필통을 제외한 각각 면에 박지기법으로 바탕을 따내고, 국화를 비롯해 매화, 운학, 초엽문을 양각했다. 국화는 모든 꽃이 만발하는 계절을 비껴 늦은 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무릎쓰고 늦게까지 그 인내와 지조의 꽃을 피운다. 그래서 사랑방의 문갑 위에 혹은 의걸이장에서도 국화는 꽃을 피워 선비들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잡아 준다.

 

 

 

 

 

시전지 목판 | 조선 후기. 가회박물관.

벗이나 정인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마음과 정성을 국화의 향과 정취를 함께 실어 보냈다.

 

 

 

600여 년 동안 시들지 않는 국화

 

시전지(詩箋紙)란 시를 쓰기 위해 별도로 만든 예쁜 종이를 말한다. 시전지에는 꼭 시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정겨운 벗이나 정인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시전지는 옛 선비들이 마음과 정성을 담아 보내 줄 때 즐겨 사용해 온 낭만적 정서의 산물이다. 박물관에서 조선시대의 생활문화를 전시하거나 사랑방가구, 선비 문화를 꾸밀 때 시전지와 시전지판은 꼭 함께 선보인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시전지 중에서 오세상(吳世昌,( 1864~1953)이 수집한 《근묵(根墨)》에 실린 최덕지(崔德之, 1383~1456)의 <시고(詩稿)>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는 이조(吏曹)에서 임금으로부터 받은 원운(原韻) 두 구절을 쓴 글인데, 임금에 대한 공경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시전지 왼쪽 아래편에 목판으로 새겨 놓아 수백 년 동안 시들지 않고 피어 있는 노랗고 빨간 국화꽃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또 《근묵》에 실려 있는 이희검(李希儉), 1516~1579)의 <운봉 홍사군에게 바치는 글> 기대승(奇大升, 1516~1572) 의 <시고> 및 윤복(尹復, 1510~?)의 <송별시> 등에도 역시 노랗고 파란 시전지 전면에 국화꽂이 먹빛으로 은은히 비치도록 찍혔다. 조선에서 제작된 임란 이전의 시전지는 아주 드물게 남아 있어 그 문양의 종루를 전부 말할 수는 없으나, 이처럼 국화꽃을 사용한 예가 많다.

 

 

장수의 염원을 담은 국화 한 송이

 

국화는 고려 이후 각종 공예품에 많이 사용된 문양의 소재다.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에서도 국화 문양의 전통이 이어졌다. 특히 사랑방 문방구 중에서 연적, 먹, 묵화 등에 국화가 등장한다.  울 밑에 피어난 몇 송이 국화꽃을 즐기는 서정과 통하는 전통의 멋과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문방공예의 유품에서, 가을 무서리를 맞으며 피어나는 군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곧은 품위가 한결 같아서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문방구에 새겨진 국화는 선비정신의 본질적 가치와 의의를 집약시킨 하나의 표상으로서 전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셋 |한·중·일 | 속설, 설화를 통해 본 국화

의식세계를 지배한 국화의 신의성


 


한국

 


중양절이란 따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양절(重陽節)이란 음력 9월 9일 그해 수확한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서로서로 나누어 먹으며 노래하며 춤추는 날이다.

조선 중종 때의 시인 북창 정렴(北窓 鄭磏, 1505~1549)과 고옥 정작(古玉 鄭碏, 1533~1603) 형제가 시를 통해 중양절과 국화의 소중함을 이야기 하는 대목이 나온다. 정렴의 시 「19 · 29가 모두 9자 수인데/ 9월 9일로 정해진 때가 없도다(후략).」와 정작의 시 「(전략) 국화를 마주보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면/ 구추(九秋) 어느 날인들 중양이 아니랴.」 하고 그들 형제는 특히 9월 9일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양절은 국화가 주인공의 자리에 앉아 있는 9월 어느 날인들 '중양'이 아니겠는가 했다. 중양절의 습속은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기상 이변으로 오곡 과일이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는 중양절에 추석제(秋夕祭)를 모시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자수국화문수저집 | 가회박물관 소장.

 




국화 꽃잎 술에 띄워 마시는 풍류
술잔에 국화 꽃잎을 띄워 마시는 것은 중양절의 세시습속에서 비롯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조 시사년 중양절에 신숙주 등 중신과 왕족들을 불러 국화잔치를 벌였는데 황국화 백국화 각각 한 그루씩을 심은 화분을 전(殿) 복판에 놓고 말하기를 "오늘 경들과 더불어 국화를 감상하고자 하니 마땅히 각각 취하도록 마셔라." 하고 '술과 국화와 임금과 신하가 모두 (調和)되다,' 라는 시제(詩材)를 내어 글을 짓게 했다. 시재가 남달랐던 연산군(燕山君)도 가장 선호했던 시제(詩題)가 국화였으며, 중양절에는 승정원에 술과 국화 화분을 내려 보내 국화를 띄워 즐겁게 마시고 시를 지어 올리라고 분부했다는 것이다. 이상이의 실록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국화잔치에서 마셨던 국화주는 꽃이나 잎을 말려 넣어 양조한 술이 아니라 신용개처럼 생 국화 꽃잎을 띄워 마시는 국화주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청화백자국화문술병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청화백자국화문술병 조선 후기



창호지의 국화는 사계절 살아 있는 드라이플라워
옛날 우리 한옥의 여닫이 창문의 손잡이이 부근에는 문종이를 덧붙여 발라 두텁게 하고 그 속에는 어김없이 국화의 꽃이나 잎이 살아 있는 듯 자리잡고 있었다. 문종이를 다시 바르는 시기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국화가 피는 계절인 것이다. 그리하여 국화를 창호지 안에 발현시키곤 했었다. 온 가족이 함께 하여 새 종이로 문과 창을 발라 따뜻한 햇살을 방 안으로 맞아들이곤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미적 감각으로만 창호지에 국화를 붙인 것이 아니라, 국화의 주술적인 힘으로 가족의 안위를 지키려는 염원을 담았는지도 모른다.




경복궁 후원 연경당 굴뚝에 새겨진 국화 | 조선 후기

 




머리 풀고 바지품 내리는 등고 민속
등고(登高)라 하여 이 날 등산하는 것을 중국 설화에서 사람과 가축을 몰살시키는 사기(邪氣)를 피해 등산한 것으로 돼 있지만, 음양학에서는 산에 오를 때 보다 높이 오를수록 양기의 원천인 태양 가까이에 접근하는 행위로 해석한다. 그 산봉우리의 양기가 내려 쪼이는 곳에서 역시 양기가 농축된 국화주를 마시는 것은 보다 많은 양기를 얻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날 등고 민속에는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한국만의 습속이 있었다.'풍즐거풍(風櫛擧風)'이 그것이다. 픙즐이란 바람으로 머리를 빗질한다는 뜻으로 산에 올라 상투머리를 풀고 산바람에 날리는 일이요, 거풍이란 바지를 벗어 내리고 연중 바지 속에서 음산하게 갇혀 살아온 국부를 왕성한 산꼭대기의 양기 앞에 노출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때 국화 한 송이를 입에 물어야 효력이 배가한다 하여 들국화를 꺾어 물고 바지춤 거둬 내려 햇볕과 바람을 쏘이곤 했다. 그 밖에  황국과 백국을 한 송이씩 꺾어 꽃대의 한쪽 껍질을 벗겨 삼끈으로 꽁꽁 묶어 심으면 뿌리가 동아 반은 황국 반은 백국의 양색꽃이 핀다 하고, 두 사람의 마음을 맺는다 하여 이를결심국(結心菊)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이름을 짓는 전통에 여자 아이 아명(兒名)으로 국화란 이름을 많이 썼다고도 한다.




민화 화조도 병풍(부분) | 조선 후기, 가회박물관 소장.국화는 꿩과 함께 절개와 충절을 상징하며 아름다운 꿩의 자태와 국화를 함께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음양설과 9월과 국화
자연과 신사(人事)의 오묘한 맥락을 풀이하는 동양철학은 주(周)라라 초에 지어진 《역경(易經)》으로, 그 중추이념을 압축하면 우주 삼라만상의 기본은 음(陰)과 양(陽)의 이원론(二元論)으로 그 조화와 부조화로 성쇠 화복의 운수가 정해지는 것으로 알았다. 수에 있어 음수(陰數)는 짝수요 양수(陽數)는 홀수다. 곧 홀수는 귀신이 사는 응달이 아니고 햇볕이 사는 양지의 수이므로 동양철학에서 홀수를 상서로운 수로 반겼다. 한 해 가운데 홀수가 겹친 1울 1일 정초와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그리고 9월 9일 중양을 명절로 맞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상서로운 홀수 '1+3+5'를 보태면 9*가 된다 하여 그 중 9수를 특별석에 앉힌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역경》에서의 9를 하늘(天)을 뜻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천하는 구주(九州)로 나뉘며 나라는 구경(九卿), 곧 9명의 대신이 다스리게 했고 관료의 계급도 구품(九品)으로 나누었다. 궁궐 벽도 구룡벽(九龍壁)이요, 천자가 쓰는 왕관은 구룡관(九龍冠)이라 했다. 그 아홉 9가 겹친 중구일(重九日)의 비중이 그로써 분명해지며 이 날 양수가 겹쳤다 하여 중양(重陽)이라 일컬어 음에 기생하는 사기(邪氣), 곧 불행이나 화를 쫒는 척사(斥邪) 민속이 한·중·일 3국에 고루 발달했었다. 이 중양의 양기를 농축시킨 것이 이 철에만 고고하게 피는 국화다. 국화를 중양화(重陽花), 구월화(九月花)라 일컬음도 그 때문이다. 곧 국화는 음양학에서 양을 눈 앞에 실체로 보여 주는 유일한 꽃으로 양의 의미를 극대화 시키고 있으니 그것을 기리는 민속이 다양하게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류리 기쿠바다케 가부키 공연 장면  국화를 앞에 놓고 왼쪽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야츠코 지에나이는 기이치의 딸에게 아버지의 속내를 알아본다.


일본

 


가부키와 국화인형
요곡(謠曲) 가부키(歌舞伎)의 '국자동'은 이국적인 국화에 대한 일본인의 향수를 자락에 깔고 있다. 국화는 남성의 의리, 남녀 간의 정분을 확인하는 꽂이라는 생각이 서민의 꿈에 날개를 달아 주었고 국화의 이미지는 마침내 가부키 무대로 진출했다. 18세기 초 처음 공연된 조류리 기쿠바다케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랑의 약속, 가족의 유대, 스승과 제자, 사무라이의 의리, 목표를 위한 희생이 인연의 고리를 풀고 갈등을 극복하는 환상적인 해법을 보여 준 연극이다. 배경에는 중세를 지배한 겐지, 헤이케 두 진영의 대결이 있다. 미나모토 요시트네는 부하인 지에나이와 함께 천민으로 분장하고 헤이케의 전략가 기이치 호우겐의 집에 종으로 들어간다. 중국의 병법서(六韜三略)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국화가 만발한 안마당에서 요시츠네와 지에나이, 요시츠네를 연모하게 된 기이치의 딸, 미나즈루 히메는 그동안 은혜의 빚을 진 채 헤이케 편에 섰던 기이치의 비밀을 비로소 알게 된다. 기이치는 구라마 산에서 수양하는 우시마루(요시츠네의 아명)에게 무술을 가르친 다이덴구,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스승은 제자요, 주군인 요시츠네에게 '사위에게 주는 선물'이라 하며 《육도삼략》을 내준 다음 자결한다은 내용이다.






넷 | 중국 | 신이, 벽사 정화로 본 국화

천년 수명 이어 준 국화꽃 이슬방울




팽조의 전설과 국화

 

주나라의 목왕(穆王)을 섬기던 국자동(麴子童)이란 사람이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으나 왕의 베개를 타 넘은 죄로 남양의 역현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역현산은 호랑이 소굴이었으므로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왕은 그래도 마음이 쓰여 《법화경(法華經)》두 구절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처럼 집 앞에 자라는 국화잎을 뜯어 그 위에 경구를 써서 흐르는 냇물에 띄웠다. 그리고 그것이 임금이 사는 곳에 닿기를 빌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결에 백발의 신선이 나타나 경을 적은 국화잎을 띄우는 그 냇물을 마시도록 일렀다. 그는 그로부터 그 물을 마시며 살게 되었는데 물맛이 좋을 뿐더러 무서운 호랑이마저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덧 건강하게 800년을 살았으나 육신은 조금도 늙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자동은 이름을 팽조(彭祖)로 바꾸고 세상에 나왔다. 위나라 문제(文帝)를 만나 그 비법을 알려 주어 오래 살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15세 밖에 살 수 없는 인물이었다. 팽조가 국화를 먹고 1700세를 살았다고 한나라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동이 살았던 역현산 골짜기가 바로 감국의 집단 서식지였고, 그가 먹고 마신 물은 국화의 잎과 꽃에 맺혔던 이슬방울이 떨어져 흘러내리는 감로수였던 것이다.



감곡국천도(甘谷菊泉圖) | 정섭(鄭燮), 청(淸), 난징 박물원 소장.가파른 절벽 사이에 폭포 한 줄기가 절벽 아래로 세차게 흘러내리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바위 사이에 국화 더미가 무성하게 자라 꽃의 빛깔이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이 뛰어나고 경지가 초탈하다.

 

 

 

장수촌으로서의 명당, 감곡

 

《한서(漢書)》나 진나라 갈홍의 《포박자》 외 오래된 중국의 전적들에는 국화의 신이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남성의 어느 산중에 감곡(甘谷)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물을 먹고 사는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많게는 140~150세를 넘고 80~90세는 요절하는 축에 든다. 그것은 국화 군락지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을 먹는 것이 장수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 물은 국화의 자액(滋掖)인 것이다. 국화가 몸을 가볍게 하고 기를 보충해 준다는 약효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뒷날 왕창(王暢), 유관, 원외 등은 모두 남양태수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는 역현에 명해 매월 20곡(斛)의 물을 실어오게 해 마셨다. 이들은 풍기와 현기증 등의 병이 있었는데 모두 깨끗이 나았다. 또 동방삭(東方朔, BC

154~93)DML 《해내십주기(海內十州記)》에서는 상수가 200~300세사고도 되어 있다. 여러 설화에서 각기 다른 지역과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는 경우가 있으나, 현재의 허난 성 나양 시 네이샹 현 부근에 있는 계곡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계국산금도(桂菊山禽圖) | 여기(呂紀), 명(明),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그림 중간에 있는 꽃은 색을 칠해 묘사했고 새들의 깃털은 훈염하여 완성했으며, 전형적인 밀화중채 화법에 속한다.

붓으로 거침과 정교함이 서로 대비되도록 한 대표화가의 기본 화풍의 작품이다.

 

 

 

 

 


 

 

다섯 | 한 · 중 | 식용과 약용으로서의 국화

향과 약효로 어우러진 가을의 향기



한국

 

약이 되는 국화와 해가 되는 국화

 

국화에는 크게 2가지가 있는데, 줄기가 자색이고 향기가 있으면서 맛이 좋고 잎으로 국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진국(眞菊)과 줄기가 청색이면서

크기가 크고 쑥 향이 있으며 맛이 쓰고 먹을 수 없는 고의(苦薏, 과꽃 또는 野菊)가 있다. 이들은 꽃이 서로 비슷하지만 단맛과 쓴맛의 차이로 구별한다. 또한 백국(白菊)이 있는데 줄기와 잎이 서로 비슷하고 오직 꽃만이 백색이다. 남양국(南陽菊)에도 역시 2종류가 있는데 백국(白菊)은 잎이 쑥과 같이 크고 줄기는 청색이고, 뿌리는 가늘며 꽃은 흰색이며 꽃술은 황색이다. 황국(黃菊)은 잎이 쑥갓과 비슷하며 꽃과 꽃술이 모두 황색이다. 음식으로 먹을 때는 백국을 많이 이용한다. 또한 작은 꽃을 피우는 종류가 있는데 꽃잎이 작은 구슬처럼 떨어져 주자국(珠子菊)이라 한다.

이 국화는 약으로 사용하면 좋다. 국화에 대한 약으로서의 성질과 효능을 판단하는 표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어 왔다.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국화의 꽃 · 잎 · 뿌리 · 줄기 · 열매 모두가 쓴맛이 있다고 보았고, 단맛이 있는 것을 약으로 사용하고 쓴맛이 있는 것은 약으로 쓰지 않는다고 보았다. 진나라 초대 황제 무제 때의 장화(張華, 233~300)의 《박물지》에는 2가지의 국화가 있어 싹과 꽃이 같지만 맛이 약간 다른데 쓴 것은 먹지 않는다고 했다. 범성대의 《범천국보》에는 감국(甘菊) 한 종류만 먹을 수 있고 약재로 쓴다고 했다. 나머지 황색과 백색의 꽃은 비록 먹을 수 없어도 약으로는 쓸 수 있으며 두풍(頭風, 머리가 늘 아프거나 부스럼이 나는 병)을 치료하는 데는 백색이 더 좋은 것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이시진은 국화에는 쓴맛과 단맛 2가지 중에서 식용으로는 감국이고, 약용은 모든 국화가 다 좋으나 고의라고 하는 야국은 설사만 나니 모름지기 사용해서는 않 된다고 했다.

 

 

 

 

  

 

좌) 청화백자국당초문팔각병 |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청자상감국화문탁잔 고려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침은 고려의 것이 최고다

 

1123(인종 1)년에 송나라 사신의 한 사람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 견문록이라 할 수 있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인들이 쓰는 향침(香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들어서 그 속에 향기로운 풀을 넣고 양쪽 마구리를 오므려 꿰맨 다음 비단으로로 싼 듯한데 가는 금실로 극히 정교하게 무늬를 수놓았다. 다시 여기에 붉은 비단ㅇ로 장식을 한 바 그 무늬가 연꽃 모양과 같았다.」바로 이것이 이미 고려의 상류층에서 흔히 사용했던 국침인 것이다. 조선 정조 때에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 인물린 위항시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 또한 국침(菊枕)에 대해 시를 남겼다. 그는 국침을 베고 있으면 「······ 효험도 신기하여 몸이 가뿐하고/ 더욱 신기한 건 두 눈이 점차 밝아지네/ 머릿속의 잡 생각이 말끔히 가셔지고/ 목욕을 하고 난 듯 그 기운이 온몸에 퍼지네. ······」라고 했다.

 

조수삼의 국침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서긍의 국침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가 고려를 다녀갔을 때는 고려가 개국한 지 불과 12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송나라 사신이 신기하게 생각해 기록에 남겼다는 이 이야기는 중국에는 국침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고려의 산하에는 국화가 많이 자라고 있었거나 아니면 재배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민화 화조도(부분)  | 조선 후기. 가회박물관 소장.

만개한 국화 송이 아래 원앙새 한 쌍을 그려 부부의 금슬을 기원하였다.

 

 

 

중국

 

불로장수와 제의 식품으로서의 국화

 

중국 사람들은 목란에 맺힌 이슬을 마시는 것은 정양(正陽)의 진액을 마시는 것이고, 저녁에 방국(芳菊)의 떨어지는 꽃을 먹는 것음 정음(正陰)을 마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제수(祭需)식품으로도 쓰였다. 《초사》에 의하면 「봄에는 난으로 가을에는 국화로 제사를 지내어 예전부터 내려오는 도를 이어지게 한다.」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기원전에는 제사를 지낼 때에 국화를 제수식품으로 썼던 것이다. 국화를 복용한 신선의 전설은 수없이 많다. 강풍자(康風子)는 감국화와 잣을 먹고 신선이 되었고, 주유자(朱孺子)는 국화를 달여 마시고는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하며 유생(儒生)은 흰 국화의 즙을 짜서 단을 단들어 일 년을 복용하고 500세를 살았다고 《포박자》에 기록되어 있다.

 

 

 

 

 

책가도 병풍(부분) | 조선 후기, 가회박물관 소장.

선비 방에서 애장품으로 사용되었던 책가도 병풍 속에 진귀한 그릇과 국화를 꽂은 화병이 눈에 띤다.

 

 

 

국화의 복용 활용도에서 국화차는 단연 최상위에 위치한다. 국화는 달짝지근하고 쓰지만 시원해 차로 마시면 향기가 그윽하며 뒷맛이 오래간다.

국화차는 건강음료로서 꾸준히 마시면 중년이나 노년기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으며, 요즘에도 중국과 동남아 일대에 유행이 되고 있다. 또한 국화차에 일정한 한방약재를 함께 넣어 배합하면 더욱 좋다. 국화와 구기자를 배합하면 색과 향이 더욱 좋아지고, 눈을 밝게 해 주면서 간에도 유익해 수명을 연장하며 뽕잎을 함께 조합하면 「풍열(風熱)로 인한 감모(感冒), 감기)와 풍화(風火)로 인한 목질(目疾), 눈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말조개 나비와 반대해(胖大海), 벽오동과에 속하는 고목)를 넣으면, 목을 맑게 하고 인두(咽頭)에 좋다. 볶은 결명자를 넣으면 고혈압을 치료할 수 있고, 금은화를 배합하면 어린아이들의 땀띠, 등창 등의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화차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좋은 건강 음료로 사랑받아 왔다.

 

 

 

 

 

말린 국화                                                  국화차

 

 

 

 

죽국도(竹菊圖) | 강세황(姜世晃), 조선,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9폭의 그림으로 된 《장화도첩》중 일부로서 가을 국화를 그린 것이다.

 일의고행(一意孤行)하는 조금은 오만한 군자의 모습같다.

 

 

 

 

   

 

좌) 수묵국화도 | 가회박물관 소장.  

우) 국화문떡살 | 가회박물관 소장.

떡살의 무늬에는 각각 특별한 의미가 있어 사용하는 시기가 달랐다. 백일에는 기쁨을 의미하는 물고기, 결혼에는

원앙이나 나비, 회갑에는 수복(壽福) 문자나 태극 팔괴 무늬 그리고 장수를 의미하는 잉어나 거북, 국화 등의 무늬를 새겼다.

 

 

 

 


 

 

민요로 본 국화

 

 


 

 

찬 서리, 거센 바람에도 고절은 꺾어지 않는다.

 

치열한 상록의 계절을 건너온 반도는 가을의 고비를 넘기 즈음이면 맹령한 만추의 서정에 사로잡힌다. 산산곡고 붉은 혈설(血雪)이 내린 듯 온 산천에 뜨거운 불을 지르는 때깔 고운 단풍이 지천을 한지 삼아 한 폭의 화려한 산수화를 토해 낸다. 초근(草根)의 시린 양태(樣態)를 모르는 듯 낙엽이 쌓이고 가을 무서리가 내리는가 싶더니 된서리가 내리고 스산한 찬바람이 읾녀 조용하고 평화롭던 대지에 냉기가 그득하고 모든 것이 눕는다. 가을은 그렇게 깊어 간다. 생로병사의 자연스러운 섭리를 목격하면서 인간은 삶을 체념하는 법을 배우고 관조하는 자세를 배운다. 그래서 늦가을은 지는 석양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허무한 것으로 비유되곤 했다. 한편으론 자조적인 자세와 허무함을 극복하려는 부단한 노력들이 새로운 방어기제를 무수히 만들어냈는데 된서리가 수북이 내린 와중에도 사방 가득 그윽한 향기를 품고 서 있는 국화는 그러한 방어기제로서 탁월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화의 외연은 지조와 절개를 숭상하던 성인군자의 기품에 비유되었고, 그 강인함과 고매함은 '오상고절'이라 하여 문인들과 양반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아써다. 국화의 고매함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요 속으로 흘러들어 왔는데 오상고절의 강인한 모습이 반영된 노래 중 널리 알려진 것이 남도명창들이 즐겨 부르는 단가 ,사철가>가 아닌가 싶다.

 

··· 중략 ···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라.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寒露霜楓)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며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설백 천지백(月白雪白 天池白)허니 모도(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 중략 …

 

여기서 황국은 단풍과 함께 찬 서리, 거센 바람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는 사물로 묘사되고 있다. 경기 지방의 대표적인 민요인 <자진방아타령>에도 국화의 고매한 절개는 잘 드러나 있다.

 

구월이라 구추절에  황국단풍 빚도 곱다 능상고절 굳은 절개 국화 송이 떴다 에라이여 에헤요 에여라 방아흥아로구나.

 

가사는 월령체 형식을 띤 노래들처럼 정월부터 2월, 3월을 대표하는 행사를 나열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서민 대중의 민요인 <창부타령>에도 구고하의 강인하고 고절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국화도 | 강세황, 조선

민요에 흘러든 국화는 오상고절의 강인함, 고매한 절개, 혹한을 견뎌내는 인고,

사랑을 엮어 주는 노리개, 흥취와 신명을 돋우는 매개체 등으로 다양하게 녹아내리고 있다.

 

처량할 손 저 국화야 양춘가절 마다하고 낙목한천 찬바람에 너만 홀로 피었으니

화중은인이 이 아니냐 얼시구나 절시구 지화자자 저절시구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네.

 

<창부타령>에 묘사된 국화는 낙엽지고 황량한 시절의 혹한을 견뎌내는 인고의 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모습을 '은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은인은 '은자(恩者)'를 뜻하는 '은인(恩人)'과 속세를 초탈한 '은인(隱人)' 2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한 이중적 의미로 해석된다. 시조 혹은 가사문학을 통해 된서리에 굴하지 않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일관한 국화를 절개에 비유한 양반층과는 달리 서민은 국화를 그때 그때의 감정에 따라 때로는 고절한 멋의 대상으로, 때로는 희롱의 대상으로, 때로는 탄식의 대상으로 묘사했으며 이러한 정서가 반영된 민요는 전국적으로 발견된다.

 

들국화 한 송이 살짝끈 꺾어 산처녀 머리 위에다 꽃아 줌세

에야 이야 에헤에 헤야 에헤야 디여도 산아지로구나.

 

중모리 혹은 중중모리로 부르는 전라도 산간지방의 대표적인 민요 <산아지타령>에서 보이는 국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를 엮어 주는 노리개로 등장하고 있다.

 

함박꽃이 곱다한들 자식보다 더 고우며 국화꽃이 곱다 한들 임보다 더 고울소냐

얼시구 좋다 좋을시구 아니나 놀지는 못하겠네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네 태평성대가 예로구나

구십춘광(九十春光) 좋다해도 구월 중구만 못하다네 봉봉이 단풍이요 골골이 황국이라

국화야 너는 어찌 춘삼월을 다 보내고 추일 수심 띠어 있냐

얼씨구 좋네 저절시구 지화자자 저절시구 아니나 놀지 못하겠네.

 

경기민요 <창부타령>에 등장하는 국화꽂 역시 임과의 연정, 이별의 정한 등에 대비해 묘사되고 있다. '구십춘광'으로 시작하는 민요의 경우 따뜻한 봄날을 지내고 가을날 애처로운 모습으로 피어 있는 국화의 자태를 창부타령조의 흥겨운 가락으로 읊어내고 있는데 가사만 놓고 보면 처연한 느낌을 주지만 선율은 흥청거리는 느낌이 강하다. 흥겨운 선율과 한스런 가사의 대비는 우리 민족 고유의 성품, 즉 인생을 달관하면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천성과도 많이 닮아 있다.

 

단풍은 연홍(軟紅)이요 황국은 토향(土香)할 제 신도주(新稻酒) 맛 들었는데

금은어회(金銀魚膾) 별미로다 니나노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얼싸 좋다 얼씨구 좋아

벌나비는 이리저리 퍼벌펄 꽃을 찾아서 날아든다.

 

 

 

 

 

민화 화조도(부분) |가회박물관 소장.

서민 대중에게 있어 민요 속의 국화는 그때 그때의 감정에 따라 고절한 멋의 대상으로, 희롱의 대상으로, 탄식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흥취와 신명을 돋우는 국화

 

평안도 지역에서 주로 창민요꾼들에 의해 전승되는 서도잡가 <제전>은 제일에 임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며 조사(早死)한 임에 대한 원망을 노래한 애상한 곡인데 이 노래의 특징은 제사를 지내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실제 제례의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상당부분 닮아  있는데다 제사에 사용되던 각 지역의 제수품들이 쭉 나열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특이하다.  이 제전 중간에 유명한 술 이름이 열거되는데 국화주를 처음으로 명명한 '도연명'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어 이채롭다.

 

 

 

창밖에 국화를 심고

 

창 밖에 국화를 심어 국화밑에 술을 빚어 놓으니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 돋아온다. 아이야 거문고 청 쳐라 밤새도록 놀아 보리라.

 

국화주와 관련해 전해 오는 대표적인 시가 작자 미상의 <창밖에 국화를 심고> 라는 시조로, 전형적인 3 ·  4조의 평시조다. 유흥적이고 쾌락적인 느낌을 많이 주기 때문에 양반층에게도 일반 서민 대중에게도 매우 인기 있는 시조였으며, 이 시조를 차용한 많은 민요가 전해 오는데 가사 자체가 주는 흥겨운 느낌 때문에 어떤 종류의 가락에 얹어 불러도 흥청거리게 되고 무척이나 신명난다.

 

 

 

 

 

민화 화조도 | 가회박물관 소장.

화면 가득히 국화와 새 한 쌍을 크게 그려 가을의 풍만한 정경을 담았다.

 

 

 

황국 향기로 날려 버리는 응어리진 한

 

관서 지방 사람들은 역사를 통틀어 수백년 동안 핍박받고 차별받았다고 느꼈으며, 그 때문에 자조적인 자세로 삶을 일관하고, 그러한 삶에 대한 견지는 또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인생을 반어적으로 표현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내 춘색은 다 지나가고 황국 단풍이 찾아를 오누나 이에 지화자자 좋다

천생만민은 필수지업이 제각기 달라 어떤 사람은 팔자 좋으나 어떤 사람은 팔자 사나워

우리는 구태여 선인(船人)이 되어 … 중략 …

 

 

 

일장춘몽, 인생무상의 정선 국화

 

국화가 관서 지방 사람들어ㅔ게는 차별받는 자신들의 분신 혹은 처지를 비관한 자신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존재했다면, 조선시대 폭정을 피해 낙향, 은둔 생활을 했던 강원도 정선 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었을까?

 

앞남산에 황국단풍은 구시월에나 들구요 이내 몸에 속단풍은 시시 때때로 든다 .

산천초목 황국단풍은 년년이나 들고 이팔청춘 우리 인생은 해마다나 늙어요.

국화 매화가 곱고 고와도 춘추단절(春秋短節) 아니냐 여자 일색이 아무리 고와도 삼십 미만이로다.

국화도 한철 매화도 한철 우리도 요때 조때가 한철이로구나 국화와 매호는 몽중에도 피잔나

사람의 이내 신세가 요렇게 되기는 천만 의외로다.

 

 

 

 

 

국화 화조도(부분) | 조선 후기, 가회박물관 소장.

보통 민요 속에서의 국화는 그 자체가 상징성이나 신명과 흥을 돋우는 매개로 노래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단한 서민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거나 은둔생활을 한 사람들의 일장춘몽과 인생무상을 담기도 했다.

 

 

 

 

 


 

 

일본 황실문장으로 본 국화

 

 


 

 

 

 

일본의 다양한 국화 문장들

 

 

 

일본에서 최고훈장은 대훈위국화장(大勳位菊花章)이다. 국화가 일본에서 최고의 위상을 차지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됐다고 본다.

 

첫째, 일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꽃은 국화(國花)인 벚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론 조사시 국화(菊花)가 늘 1위를 차지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국화를 제일 좋아한다는 국민성의 표출이기도 하다. 매년 화훼 생산량과 판매량도 35~38퍼센트로 국화가 1위를 차지한다.

 

둘째, 일본(日本) 곧 태양의 본체라는 국체(國體) 이미지에 팔방으로 방사하는 햇살과 국화의 꽃 모양이 흡사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곧 해와 햇살 문양인 일본의 군함기나 욱일(旭日)훈장은 국화 문양과 훈동되리만큼 유사하다. 거기에다 음양설로 태양의 원형질인 양기가 집결된 꽃이 국화이기 때문에 왕실의 문양 선택에 당연히 첫 번째로 올랐음직하다.

 

셋째. 8세기 이후로 궁중에서 중양절에 국화잔치를 베풀어 왔고 국화를 기르면 그 기운이 나쁜 기운을 쫒고 연수(延壽)를 한다는 음양설의 영향으로 일본 궁궐에서 가장 많이 심어 내려온 꽃이 국화다.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과 제도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유럽 왕가의 문장을 본 떠, 왕실 상징의 어문(御紋)으로 국화가 선택되었을 것이다. 민간에 널리 번졌던 이 국화무늬의 민간 사용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 1869년(明治 2년)인 것으로 비루어 이 해에 국화어문이 시작된 것일 게다. 왕실에서도 임금만이 16겹 국화무늬를, 왕족은 두 잎 모자란 14닢 국화무늬를 쓰게끔 차별화하기도 했다.

 

 

 

 

 


 

한·중·일 | 속담과 관련어풀이

 


꽃 중의 꽃


 

 

색깔로 붙여진 의칭으로는 황예(黃蘂) · 황영(黃永) · 금예(金蘂) · 금영(金英) · 금류(金蕌) · 금경(金莖) · 금영롱(金玲瓏) 등이 있는데 '예'는 꽃술이라는 뜻이다. '영'은 뿌리이고, '류' 자는 황제의 면류관과 같이 매달아 늘어뜨리는 구슬줄을 말한다. '영롱'은 앞에 금자를 붙여 찬란한 구슬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앞에 '금'자가 붙는데 황색이나 금색을 말한다. 이는 중국인의 황색(中央)중심주의 사상으로 보아 꽃 중의 꽃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이 의칭들은 모두가 중국인들의 국화에 대한 서정적 극칭이라 할 수 있다.

 

 

한국

 

●  매화도 한철 국화도 한철 : 모든 것은 한창일 때가 따로 있다는 말.

●  짚신에 국화 그리기 :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 바탕이 중요한 것이지 아무리 겉을 치장해도 속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  거적문에 국화 돌쩌귀 : 제 격에 맞지 않아 어울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

 

 

중국

 

●  동녘 울타리 밑에서 국화나 따라 : 때에 따라서는 유유자적하는 것이 좋다는 말.

도연명의 <음주>란 시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국화를 먹으면 난쟁이도 신선이 된다 : 국화가 장수식품임을 강조한 말로 중국에서는 국화를 먹어 장수한 일화들이 특히 많다.

●  국화는 비를 무릅쓰고 꽃을 피운다 : 중양절 때가 되면 국화는 누가 뭐래도 꽃이 핀다는 말로 때를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

 

 

 

일본

 

●  국화 향기가 나면 나라 나라, 나라에는 옛 부처들 : "옛 부처들!' 하고 말을 하는 순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사찰을 떠올린다.

물론 사찰의 저녁 종소리부터, 나라의 색채, 소리, 향기 그리고 쌉쌀한 맛까지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  6일의 창포, 10일의 국(菊) :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머리에 꽂아야 할 창포꽃을 하루 늦게 꺾어 오고, 9월 9일 중양절에 국화꽃

구경을 나가야 하는데 그만 하루 늦게 나간다는 뜻으로 일상사에 바쁘면 항시 때를 놓친다는 말이다.

●  국화에 맺힌 이슬이 못이 된다 :작은 것이 모이면 큰 것이 된다는 말로 꽃잎에 맺힌 맑은 이슬방울이 넘쳐 흘러 못이 되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  국화 키우기는 죄 키우기 : 국화 가꾸기에 몰두하다가 부모가 임종하는 자리도 지키지 못한다.

즉 국화 키우기가 그만큼 재미  있다는 뜻이다.

 

 

●  인용서적 : 이어령 책임편찬 『국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