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3
미술로 본 국화
하나 | 한국 | 회화로 본 국화
성긴 듯한 묘사로 살려낸 순박한 정서
묵국도(墨菊圖) | 심사정(沈師正). 조선, 한양대학교 박물관 소장.국화 그림은 다른 사군자 그림에 비해 만이 그려지지는 않았다. 군자의 상징으로서의 국화보다는 오리려 자연계 식물의 하나로 많이 그려졌다.
갈고 닦은 서법에서 피어나는 묵국
국화는 고답(高踏)의 경지에서 인내와 지조를 지키는 군자이 상징형으로 의인화되어 오상화(傲霜花), 가우(佳友), 절화(節華)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면서 선비들의 시문과 서화는 물론 장식미술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사랑받아 왔다. 현존 유물을 기준으로 할 때 국화를 소재로 한 문양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를 고려시대로 볼 수 있다. 물론 전 시대에도 국화를 소재로 한 문양이나 그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유작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 등 도자기를 보면 국화가 장식 문양으로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표현 형식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국화꽃을 평면적으로 도안화한 것을 단위 문양으로 하여 반복적, 연속적으로 시문한 것,둘째, 줄기와 잎, 꽃을 함께 묶어 도안화한 단위 문양을 반복적으로 시문한 것.셋째, 줄기, 잎, 꽃 등 국화의 생태적 특징을 회화적 묘사법으로 표현한 것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회화적 묘법으로 시문한 국화 문양은 동시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묵국(墨菊)의 양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조선시대 도자기에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한 문양들이 적지 않게 보이는데, 국보 제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간송미술관 소장)의 경우도 그런 예 중의 하나다. 구고하가 장식 문양으로 시문되어 있으나 표현 형식이나 구도면에서 회화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국화 꽃향기에 끌린 곤충까지 포함된 이 도자기 장식 문양은 한 폭의 화조화를 보는 듯하다. 화조화적인 도자기 장식 문양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화단에서는 매화, 대나무, 난초 등 사군자 식물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고, 그와 함께 사군자 그림의 한국적 양식이 어느 정도 굳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화는 매화나 대나무, 난초 등에 비해 그린 사람이 많지 않고, 유작 또한 적은 편이다.
사군자 그림이 옛 선비들 간에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산수화나 인물화에 비해 그리기가 비교적 간단하고 이미 터득한 서예의 기법을 적욛시켜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화는 다른 사군자 식물과 달리 많은 꽃잎과 복잡한 형태의 잎을 가지고 있어서 서법(書法)에만 의존해서 그리기는 다소 번거로운 감이 없지 않다. 이 점이 국화 그림이 크게 유행하지 못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구고하가그림의 소재로 홀대를 받은 것만은 아니다. 연대가 좀 올라가는 작품으로 이우(李瑀, 1542~1609)의 <국화도>가 있다.이우는 신사임당의 아들이며 율곡의 아우로 당대에서 시 · 서 · 화 ·금(琴)을 다 잘해 사절(四絶)이라 불렸다. 초충(草蟲) · 사군자 · 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유작으로 <설중매죽도(雪中梅竹圖)>(개인 소장) · <노매도(老梅圖) · <수과초충도(水瓜草蟲圖)>(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 <포도도>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우의 <국화도>는 한 포기 국화꽃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국화 한 줄기가 화면에 솟아오른 단순한 구도이면서도 만발한 국화를 보는 듯 담백한 여운을 풍기고 있다. 담묵으로 잎의 형태를 대강 잡고 농묵의 필선으로 잎맥을 그렸다. 작은 꽃송이는 측면을, 큰 꽃송이는 위쪽에서 바라본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 묘법이 경직된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다. 필획마다 정성과 애잔함이 깃들어 있고, 성근 듯한 묘사에도 순박한 정서가 배어 있다.
동리채국도(東籬採菊圖) | 정선,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연명의 <음주>시의 내용 일부를 주제로 삼은 그림이다. 사립문이 열려 있는 동쪽 울타리가 보이고, 그 울타리 밑에는 도연명이 채국했을국화가 자라고 있다. 나무 그늘 밑 바위 위에 한 선비가 앉아 있는데, 그 옆에 방금 꺾은 것으로 보이는 국화 송이가 놓여 있다.
정선의 <동리채국도>에 살아난 은일의 삶
문인화가들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국화 자체가 아니라 국화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인격이었고, 국화를 그린 것은 인격 도야와 자기수양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우가 그린 국화는 문인화에서도 볼 수 있는 관념적인 꽃이라기보다 자연의 꽃에 더 가깝다. 따라서 그의 <국화도>는 문인화의 평가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한국적 국화 그림의 정형을 성립시키는 데 공헌한 그림으로 평가돼야 한다. 18세기 히후 조선 후기와 말기 화단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화가들 간에 활발한 작품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18ㅅ기 심사정의 <묵국도>, 강세황의 <사군자팔곡병풍>(부산 개인 소장), 19세기 전반 조희룡의 <사군자팔곡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 순수한 묵국화(墨菊畵)가 이 시기에 그려졌다. 심사정의 <묵국도>는 괴석, 대나무와 함께 국화를 그린 것으로, 활달하고 거침 없는 필획을 구사했다.강세황의 <묵국도>는 대나무 잎을 가미해 그렸는데, 아래쪽에서부터 붓을 일으켜 굴곡을 이루면서 상승하는 구도를 취했다. 농묵과 담묵을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몰골법을 구사했는데, 간결한 필치와 능숙함이 그의 높은 문인화격을 보여 준다.
이와는 다른 분위기의 국화 그림이 전해 오는데, 고려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잡화도첩(雜花圖牒)》에 수록된 <죽국도>가 그것이다.괴석, 대나무와 함께 국화를 그렸는데, 능숙환 필치로 그린 이 그림에는 성글고 야일(野逸)한 한국적 정취가 짙게 배어 있다. 강세황보다 약 70년 후에 나타난 조희룡은 강세황과 대조적으로 김정희의 서법을 토대로 한 화법으로 <국화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그렸다. <국화도>는 같은 병풍 속에 있는 매화·난초·대나무와 비교할 때 정리가 다소 덜된 듯하지만 활달하고 변화 있는 필치에 힘입어 국화가 지닌 은일한 정취를 표현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국정추묘(菊庭秋猫) | 변상벽(卞相璧), 조선, 간송미술관 소장.고양이는 70세 노인을 뜻하고 국화는 은거를 뜻한다. 따라서 '유유자적 은둔하며 학문에 힘쓰던 선비가 고희를 맞다'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른 한편에서 정선(鄭敾)은 국화와 고양이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영모화(翎毛畵)로 분류될 수도 있는 이 그림은 <국일한묘(菊日閑猫)> 라는 이름을 달고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의 국화는 사군자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길상적 의미를 상징으로 가지고 있다. 국화의 '국(菊)' 은 중국어에서 '거(居)'와 동음이성이며, 고양이 '묘(猫)'는 '모(耄)' 와 동음이성이다. 국화와 고양이를 조합하면 '거모(居耄)' 가 되는데, 나이 70세까지 산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에 「70세를 모(耄)라 하고, 80세를 질(耋)이라 하며, 100세를 기이(期頥)라고 한다.(七十日耄 八十日耋 百年日期頥),」고 적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의 국화와 고양이는 거모(居耄)의 상징형이고, 그림의 뜻은 장수를 기원하는 데 있다.
1763년과 1773년 2번에 걸쳐 영조의 어진을 그린 변상벽(卞相璧) 도 똑같은 내용의 그림이 <국정추묘(菊庭秋猫)>를 남겼다. 정선의 <국일한묘>와 차이점이 있다면 정선의 경우는 국화를 고양이에 비해 상당히 크게 다룬 반면에, 변상벽의 경우는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국화를 배경으로 다룬 점이다. <국일한묘>의 화가 정선은 국화 자체가 아니라 국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재로한 <동리채국도>도 그렸다. 부채에 그린 이 그림은 전원에 은거하면서 국화와 함께하는 은둔 생활을 즐겼던 도연명의 행적과 시적 세계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화면 앞쪽에 선비, 즉 도연명이 한정(閑靜0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그 뒤쪽 담 아래에 국화 몇 포기가 자라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그림은 도연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어 왔던 시화일체사상(詩畵一體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음주>는 전원생활을 동경했던 조선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시 중에서 '採菊東籬下' 라는 대목이 정선의 <동리채국도(東籬採菊圖)>의 내용이 되어 있다. 이 그림은 정선의 또 다른 부채 그림인 <유연견남산도(悠然見南山圖)>와 짝을 이루는데, 두 그림 모두 시 <음주>의 한 부분을 시각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야일한 묵국의 여백미와 청초한 필치
18세기 국화 그림 중에서 가작(佳作)으로 꼽을 수 있는 그림은 조선 22대 정조(正祖, 재위 1777~1800)의 <국화도>일 것이다.<정조대왕필국화도>(국화 2편 참조) 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74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그림은 원래 ,정조대왕필파초도>와 쌍폭을 이루고 있었거나 아니면 여러 폭으로 된 병풍에서 떨엊 나온 것으로 보인다. 바위에서 자라는 잡풀과 국화를 그린 그림으로 바위는 담묵을 사용해 기본적인 형체를 완성한 후 농묵의 태점(胎占)으로 마무리했고, 구고하의 잎은 농묵으로, 꽃은 담묵으로 처리해 평범할 수도 있었던 화면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정조의 <국화도>가 <파초도>와 함께 연작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사군자로 대표되는 문인화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부터 상서로운 구름, 영지버섯, 악기의 일종인 경쇠, 돈과 구슬, 방승(方勝), 물소 뿔로 만든 잔, 서화, 옛날 돈, 솥 등과 함께 길상물로 애호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파초를 국화와 연작 형태로 그렸다면 <국화도>도 길상적 의미를 가진 그림으로 봐야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옥산국화도(玉山菊花圖) | 이우(李瑀), 조선,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사임당의 넷째 아들 옥산 이우가 그림 수묵화로 사임당의 예술적 자질을 이어받았다. 화면 중앙에 국화 줄기를 그리고 만개한 꽃송이를 그렸는데, 잎맥에 농묵을 써서 그림에 힘을 주었다.
18세기 조선에서는 비교적 많은 국화도가 그려졌으나 조선 후기 및 말기,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국화 그림이 더욱 성행하기 시작했다.당시의 국화 그림은 국화를 단독으로 그리지 않고 괴석 등 다른 경물이나 식물과 더불어 그리는 형식이 성행했다. 괴석뿐만 아니라 연꽃, 오동나무, 모란, 파초, 소나무, 포도 등과 함께 6폭 또는 8폭 이상의 병풍 그림으로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대에 활동한 신명연(申命衍), 김수철(金秀哲)의 국화 그림은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등 중국식 화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욱동(旭東)이라는 호를 쓰는 대한제국 당시의 화가가 그린 <국화와 병아리>(순천대학교박물관 소장)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경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다. 한국적 미감을 느낄 수 있는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안정된 구도와 묵법의 능숙한 활용을 보여 준다.
이 시기에는 순수회화뿐만 아니라 다식판, 떡판, 필통 등 서민공예품과 문자도, 황계도(黃鷄圖) 등 민화에도 국화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국화가 유교적 관념의 탈을 벗고 자연계 식물의 하나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 | 중국 | 회화로 본 국화
사대부 계층의 자기 발현의 수단
국석명금도(菊石鳴禽圖) | 이인(李因, 청(淸), 리순 시박물관 소장벼랑 위의 괴석 옆에 추국이 활짝 피어 있고, 작은 새가 마른 가지 이에 앉아 주위를 돌아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웅건한 필력과 자유자재한 필피를 구사해 수묵화의 묘미를 충분히 발휘했다.
뒤늦게 화제(畵題)로 등장한 국화
국화는 《초사》나 《예기》등 중국의 고전에 이미 언급되었다. 동진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음주>나 <귀거래사>와 같은 문학작품 이래로 지조와 은일의 상징으로 그 위취를 굳혔다. <귀거래사>에서 「삼경취황 송국유존(三經就荒 松菊猶存)」이라 할 정도로 국화는 소나무와 함께 줄기차게 시인묵객들의 상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시가(詩歌)가 아니더라도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국화는 남다른 상징체계로 시인묵객의 의식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도연명은 <음주>에서 「채구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고 하면서 국화와 더불어 사는 은일한 삶을 노래했고, 「꽂이 동그란 것은 천심(天心)」이고, 색이 노란 것은 지심(地心)이고, 늦은 계절에도 꽃피는 것은 군자의 덕이고, 서리를 이기는 것은 지조의 표상이며, 술잔에 동동 떠 잇는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답의 표본」으로 미화했다.
묵죽의 잘 그린 소식(蘇軾)과 문동(文同) 그리고 묵매를 잘 그린 북송의 중인(仲仁)과 그 뒤를 이은 남송의 양무구(楊无咎, 1097~1354) 간은 문인 화가에 의해서 묵죽 화첩 형식으로된 새로운 묵죽화보가 만들어졌으며, 이와 같은 전통은 명대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묵란화와 묵국화는 청대 이전에는 화보 형식으로 널리 보급된 예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송대의 몇몇 난보(蘭譜)와 국집보(菊集譜)들이 있으나, 이들은 본격적인 화보라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청대에 와서는 《개자원화전》이 1679년과 1701년에 걸쳐 발간되었다. 그 중 제2집이 《난죽매국보(蘭竹梅菊譜)》인데이것이 중국 회화사상 비로소 사군자가 한꺼번에 화보로 만들어져 사군자 화법이 일반에게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군자의 하나로서 그린 국화 그림은 매화, 난초, 대나무 그림에 비해 발달한 시기가 늦은 편이다. 중국 송나라 때 범석호, 유준호 등에 의해 국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려지기는 했다고 하나, 묵국만을 전문으로 다룬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사람은 시인이자 화가인 정사초다. 뿌리를 그리지 않은 난초, 노근란(露根蘭)으로 유명한 정사초는 자신이 그린 국화 그림에 이런 제시를 썼다.
다른 꽃들과 함께 피지 않으려 꽃 피는 시절이 다 지나서야 핀 국화,성긴 울타리가에 홀로 서 있어도 그 기상과 의취(意趣)는 무궁하구나
정사초가 그린 국화는 평범한 꽃이 아니라 서리를 이기는 높은 기상을 가진 의인화된 국화이며, 어려운 시국을 맞이한 자신의 심경이 투영된 국화이다.
국석도(菊石圖) | 여성(余省), 청(淸), 난징 박물관 소장.이 그림은 빼어난 바위 근처에 무성하게 핀 국화를 그린 것으로 사실적인 품격으로 채색이 곱고 아름다우며 필법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다.
풍경화의 대상으로서의 국화
명대의 문인 화가 중 한 사람인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은 묵죽과 묵란으로 유명했고, 심주(沈周), 1427~1509)는 여러 가지 식물 소재와 더불어 국화를 잘 그렸으며, 서위(徐渭, 1521~1593)는 자유분방한 필치로 <국죽도>와 같은 묵죽, 묵국을 많이 그렸다. 그 밖에 손극홍(孫克弘)의<죽국도>와 <죽석문황도(竹石文篁圖)>, 미만종(米萬鍾)의 <죽석국화도>, 왕탁(王鐸)의 <난죽국도>, 진순(陳淳)의 <죽석국화도> 등이 현존 하고 있는데, 모두 국화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서위의 <국죽도> 역시 국화를 대나무, 난초와 더불어 그렸다.
이처럼 국화가 사군자의 하나로서 그려지기보다는 화조화 또는 화훼화의 소재로 취급되거나 대나무나 바위 등 다른 소재들과 함께 그려진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추세였다. 그나마 매화나 대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그림의 수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인데, 이런 상황은 원나라, 청나라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과 근세에 들어와 오창석(吳昌碩, 1844~1927) 등에 의해 국화가 단일 소재로 많이 채택되었고, 회화성이 강한 채색 국화 그림이 많이 그려지면서 국화 그림은 활기를 찾았다. 오창석은 50세가 넘어서 그림을 시작했으며, 특히 화훼화를 잘 그렸다. 화풍은 서위나 석도(石濤), 1641~1720)를 모범으로 삼아 독특한 경지를 열었고, 글씨 쓰는 화법을 창출해 소나무 · 대나무 · 매화의 세한삼우(歲寒三友)와 괴석(怪石)을 잘 그렸는데, 국화 그림도 호방하면서도 참신하다. 그가 남긴 <국화도>를 보면 전통의 국화 그림과 다른 화면 구도를 취하고 있고, 표현 또한 서법을 최대한 구사한 독특한 선묘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그림은 동양 회화사상 근대적 문인화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다.
중국의 국화 그림은 명대에서부터 청대에 이르는 기간에 비교적 많이 그려졌지만 대나무, 난초, 매화 그림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림이 아니라 삼청도(三淸圖) · 오우도(五友圖) 형식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한국과 비교되는 것은 자연 속의 국화를 그린 그림이 드물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의 국화 그림은 하나의 풍경화가 아닌 어떤 법칙에 따라 그린 관념적 그림이 많다는 이야기다.
셋 | 한 · 중 | 회화로 본 국화
애완품이 된 정물화, 우의 가득한 국화도
병국도(病菊圖) | 이인상(李麟祥),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을 서릿발 처럼 오만하고 고고한 절개를 상징하는 국화의 쇠잔한 모습은 혹여 초심을 져버린 군자의 변심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
국화는 쇠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국화의 덕목은 오연한 성품과 어여쁜 빛깔과 가장 늦게까지 남는 향기다. 국화는 눈맛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화는 한 몸을 다 바쳐 인간의 입맛을 돕는다. 봄에는 움을 먹고, 여름에는 잎을 먹고, 가을에는 꽃을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먹는 식물이 국화다. 국화는 또한 꽃이 지는 방식에서 미덕의 절정을 보여 준다. 오죽하면 송대이 왕안석과 구양수가 꽃 떨어지는 것을 두고 티격태격했을까. 왕안석이 읊기를 「황혼의 비바람에 수풀이 어두운데 쇠잔한 국화 떨어지니 온 땅이 황금색이네(黃昏風雨暝園林 殘菊飄零滿地金).」라고 했다. 이를 구양수가 맞받았다. 「모든 꽃이 떨어져도 국화는 가지 위에 붙어 있는데 어찌 떨어졋다고 말하는가.」발끈한 왕안석은 《초사(楚辭)》를 전고로 들이대며 대꾸했다. 「《초사》를 보면'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다( 夕餐秋菊之落英)'고 한 글이 나오는데 구양수는 그것도 읽지 못했단 말인가.」《서청시화(西淸詩話》에 나오는 애기다. 힘센 비바람에 지지 않을 꽃잎이 있을까마는 국화꽃은 말라 비틀어지면서도 가지를 지킨다. 낱낱이 산화(散花)하는 매화꽃, 한순간에 자진(自盡)하는 동백꽃과 다르다. 국화꽃은 참혹한 쇠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해서 오상고절(傲霜孤節)이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인상의 <병국도>는 쇠잔한 국화의 자태를 그린 보기 드문 그림이다. 화가는 그림 속에 「겨울날 병든 국화를 우연히 그리다.」라고 적었다. 시들고 병든 국화가 겨울을 견디는 모습은 화가의 흉중이 고난과 맞서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인상은 그의 심회를 물기 없이 바짝 마른 갈필의 효과로 드러낸다. 가지는 비바람을 지택할 여력이 거의 없어 보인다. 꽃송이들이 모두 고개를 꺾은 채 매달린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참혹하다. 국화 사이로 보이는 한 그루 대나무와 겹겹이 놓인 바위는 비록 사위어 가지만 서릿발 같은 국화의 마지막 기상을 대변한다. 중국에서도 송 · 원 · 명대에 이르기까지 국화의 은일한 정취를 묘사하기 위해 채색 없이 담묵으로만 그린 국화 그림이 꽤 많다. 하지만 적막하고도 칼칼한 선비의 내심을 이인상의 <병국도>만큼 문기 넘치게 표현한 국화 그림은 찾기 힘들다.
풍부하고 화려한 장식을 즐기다
중국의 국화 그림은 빚깔과 형태와 기법이 다채롭다. 형태의 실감을 공교롭게 드러내기 위해 정치한 필치의 구륵(鉤勒)과 화면에 물기가 마르기 전에 채색해서 몽롱한 효과를 얻는 선염(渲染)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솜씨는 기가 막힐 정도다. 국화를 그릴 때 붓놀림은 맑고 고상해야 하며 거친 운필을 꺼린다. 잎이 적고 꽃이 많아서는 안 된다. 꽃이 가지에 어울리지 않거나 꽃잎이 꼭지로부터 나와 있지 않아서도 곤란하지만 빛깔이 메말라 있는 것은 아예 거부한다. 생기발랄한 정취가 숨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대 화가 여성(余省), 1692~1773)이 그린 <국석도>는 이런 그림의 전형이다. 꽂과 잎이 풍성하면서, 맑고 깨끗한 기운이 화면을 꽉 채운다. 화심에서 벙글어 나가는 낱낱의 꽂잎은 색깔도 다양하지만 싱싱한 호흡이 느껴져 사실적 풍격이 가득 차 있다. 화제에 쓰기를 「동쪽 울타리의 흥취가 있어 도연명의 은일한 꽃을 그린다.」고 했지만 포만한 공간감 때문에 은일함에 앞서 장식성이 더 돋보인다. 이처럼 중국의 국화 그림은 대개 수묵에서 풍기는 사의성보다 채색에서 풍기는 부려(富麗)함을 애호했다. 국화를 야생의 정취로 표현하지 않고 하나의 정물로써 애완하는 풍조는 조선 말기 화가들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장승업의 <파조귀어도(擺釣歸漁圖)>나 양기훈의 <국병도>가 그런 그림이다. 장승업은 커다란 중국제 항아리 위에 국화분을 올려놓고 안줏감으로 쓰일 소가리 한 마리를 매달아 놓은 기명절지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화제에는 「노란 국화를 꺾어 항아리 위에 올리니 바야흐로 술꾼이 제철을 맞은 가을이네.」라는 내용이 들어 있어 국화를 한가하게 즐길 거리이자 정물화의 소재로 보고 있음을 알려 준다. 양기훈도 전형적인 완상용 정물화를 그렸다. 화병의 몸통을 반만 보이게 그리는 대신 세 송이 국화로 화면의 균형을 잡아 시선이 구고하에 쏠리게끔 포치했다. 담묵으로 처리된 꽃잎은 성글게 묘사해 아취를 띠게 했지만 구고하의 상징성과는 거리가 먼, 보고 즐기는 장식성에 치중한 그림이다.
파조귀어도(擺釣歸漁圖) | 장승업(張承業), 조선, 개인 소장.
장승업이 판선 민영달에게 그려준 그림으로, 한가로운 가을의 정취를 엿보게 해 준다.
'노란 국화를 꺾어 항아리 위에 올리니 바야흐로 술꾼이 제철을 맞은 가을이네,'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국화도는 그림이되 우의가 살아있다
낙목한천에 홀로 꽃을 보듬으며 풍상을 이기는 국화는 세상을 등진 선비의 고결한 지조를 닮았지만 그렇다고 은일과 절개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적막하고 황량한자태로 그려진 국화가 있는가하면 다른 소재와 더불어 속 깊은 寓意)를 연출하는 조연급 국화도 있다. 흉중석죽(胸中成竹)이란 말이 있듯이 국화도 가슴에서 먼저 그려져야 운치가 표현된다. 운치는 어떻게 드러내는가. 꽃은 높고 낮은 것이 있으면서 번잡하지 않고, 잎은 두텁고 윤기가 있는 게 좋다. 꽃과 꽃술은 덜 핀 것과 활짝 핀 것을 구비하되 만개한 것은 가지가 무거우므로 누워 있고 미개한 것은 가지가 가벼우니 끝이 올라가는 것이 제격이다. 올라간 가지는 지나치게 꼿꼿해선 안 되고 누운 가지는 너무 많이 드리워선 못 쓴다. 갖가지 국화의 자태를 그려 놓은 중국의 화보를 보면 이런 요목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모두가 국화의 운치를 표현하는 기법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국화도는 사군자 중에서 그려진 숫자가 가장 적은 화목이다. 꽃이 매화나 난초에 비해 그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화가의 무딘 솜씨가 들통 나기 쉽지만 반대로
꼼꼼한 공필이 돋보이는 국화 그림은 장식용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넷 | 일본 | 회화로 본 국화
계절화와 장식화로서의 국화도
사군자로서의 국화
국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덴표(天平) 시대라는 것이 통설이다. 처음에는 약초로 사용되었으나 9 세기 헤이안 시대 들어 생김새나 색깔, 향기가 뛰어나므로 관상용 식물이 되었다. 문학작품인 《겐지모노가타리》,《이세모노가타리》18단과 51단 등에는 흰 국화와 붉은 국화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군자의 정신세계를 의미하는 상징성을 모티브로 한 것이 아니라, 관상용 꽃이나 계절꽃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13세기 가마쿠라 시대 공예품인 벼루집에서는 문양으로 등장한 국화가 보일 뿐이다. 사군자로서의 국화 그림은 14세기 후반인 남북조 시대에 처음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그림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는 무로마치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헨쇼코인ㄴ이라는 절에 소장괸 <국도(菊圖)>는 1419년경에 그려진 그림으로 국화만을 독립된 대상으로 삼아 그린 것이다. 지면에 자라는 두 줄기의 국화를 유연한 곡선적 형태를 강조해 묘사했으며, 줄기에서 뻗은 잎과 화사한 꽃에는 담백하면서 사실적인 묘사 태도가 드러나 있다. 또한 10명의 승려들이 지은 제시(題詩)가 도연명의 시 <음주>에 등장하는 '피(披)', '리(籬)', '시(詩)' 3글자를 운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국화를 보면 도연명의 시를 떠올리는 당시의 선종 사찰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즉 그들은 은일사상의 보급에 따라 도연명을 은일생활 구현자의 이상형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도연명상국도(陶淵明賞菊圖)>에서도 국화는 사군자으 하나로 혹은 도연명과 연관된 모티프로 등장하고 있다.1425년 이시요 도쿠간,(1360~1437)의 찬문이 있는 이 그림에는 지팡이를 짚고 국화꽃이 피어 있는 언덕 사이를 걸어가는 도연명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의 <음주>시에 나오는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의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백지추초문양고소데 | 오가타 고린,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계절을 나타내는 국화
이후 일본 미술에서 국화는 주로 가을을 나타내는 계절꽃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상징적인 의취를 담기보다는 일반 화조화 모티프의 하나로 그려지게 된다. 그 이른 예로 16세기 후반 모모야마 시대의 장벽화 <소나무에 초화도>를 들 수 있고, 에도 시대에 들어 순일본적인 회화로 분류되는 수위 야마토에 화가들 가운데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도사 미쓰오키(1617~1691)와 그의 아들 미쓰나리가 그린 <추교명순도>, 1659년 스미요시 죠케이가 그린 <국화사생도권>이 있다. 이후 국화는 소타쓰린파 혹은 린파로 불리는 오가타 고린(1658~1716)을 비롯해 장식적인 화조화를 주로 그렸던 화가들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했다. 국화가 등장하는 고린의 그림 가운데 특이한 예가 <백지추촘누양고소데>다. 이 고소데에는 옷감 위에 가을 풀들을 그린 대단히 멋스러운 감각이 두드러져 있으며, 세련된 구도에 <초화도병풍>이나 <초화도권>에서와 마찬가지의 경쾌한 붓질로 국화를 비롯해 도라지, 싸리 등 각종 가을 풀들을 묘사했다.
국화도(菊花圖) | 마쓰무라 게이분, 온건하고 섬세한 시죠파 화가들의 조형 감각이 잘 드러나 있다.
19세기에 들어 에도와 교토 지역에서 그려진 국화 그림은 사생 경향이 두드러진다. 19세기 전반 에도에서 린파를 부활시킨 에도린파 화가인 사카이 호이쓰(1761~1829)는 <화조12개월도병풍>에서 국화를 음력 8월의 꽃으로 그렸다. 이 그림은 계절꽃으로 등장한 이래 독립된 화제로 그려진 드문 예이며, 고린의 화조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성보다는 사생의 비중이 더 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경향은 교토에서 활약한 시죠파 화가 마쓰무라 게이분(1779~1843)의 그림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ㅖ는 18세기 마루야마 오쿄(1733~1795)의 사생화의 남화의 서정성 표현을 받아들여 시죠파를 창시한 마쓰무라 고슌의 동생인 게이분의 3폭으로 이루어진 <국화도>다. 보라색과 노란색, 흰색의 구고하를 각각의 폭에다 그린 이 그림에는 온건하고 섬세한 시죠파 화가들의 조형 감각이 잘 드러나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호이쓰의 제자인 스즈키 기이치(1796~1858)는 <초화도병풍>을 남긴 바 있다. 이같은 사생 경향과 달리 남화가인 츠바키 진잔은 중국 명나라 문인 화가인 진순의 화제에 영향을 받아 국화를 비롯해 모란, 난초, 해바라기 등 8종의 화훼를 그린 <화훼도권>을 남기기도 했다.
끝으로 천황가의 문장인 국화 문양은 12세기 말 천황이었던 고토바 천황이 국화문을 즐겨 사용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천황가를 섬긴 공로자에게 국화문이 새겨진 하사품이 내려지곤 했으며, 일반 가문에서 국화문을 사용하는 경우도 천황가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다섯 | 한국 | 도자 문양으로 본 국화
장생의 염원과 국화의 도자 문양
청자상감국화문탁잔 |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2세기 중엽에 전성기를 이룬 국화 문양
우리나라에서는 10세기 고려청자에 이미 국화 문양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10세기의 청자바래기 내면에 음각으로 국당초(菊唐草)문이 등장하기 시작해 11세기 중엽경까지 접시 대접류에 음각 문양으로 많이 유행했다. 11세기 후반경에도 양인각(陽印刻)으로 이형(異形)의 복잡한 중국적 유사(類似) 국당초가 대접 내측면에 시문되고 대접 등 내저(內底)에는 국판문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국당초와 국판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릇에 국화의 향기를 담으려는 상징적인 뜻이 있다고 생각된다. 12세기 전반에는 국화 문양이 더욱 일반화되어 접시나 대접에 사실적 양인각의 국판문이 계속 등장하고 국화 모양의 향합이 많이 나타나며 뚜껑 중앙에는 따로 커다란 화심(花心)을 갖춘 국판문이 선명히 나타난다. 무문향합 뚜껑에 국화절지를 음각으로 나타낸 예도 있으며, 특히 탁잔(托盞) 내외에 음각 국화 절지문이 많이 등장한다. 12세기 전반의 이러한 예는 전 시대보다 적극적으로 국향을 담으려는 뜻이 엿보인다. 특히 향합 자체가 국화형인 것 등을 보면 국향을 높이 평가했으며 거의 전부라 할 수 있겠다.
12세기 중엽에 이르면 상감 절지문으로 나타나 국향의 상징이 더해져서 12세기 중후반에 전성기를 이룬다. 각종 기물에 절지문으로 화사하게 국화문이 널리 시문된다. 이와 더불어 나비와 벌이 부수적으로 시문돼 국화의 향기가 더욱 강조되었다. 또한 모란 절지문 또는 운학문같이 국화가 주문양으로 시문된 예가 많고, 운학문과 당초문 가운데 별도로 국화가 시문되기도 했으며 백자 대접에도 화사한 절지문이 시문된 예도 있다.
이때까지는 아직 공예 의장화된 도식적 문양이 아니고 사실적 문양이면서 화사한 국화 문양이 들어 있는 그릇들도 있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부터 사실적인 국화문이 양식화되고 국화꽃이 인화문(印花文)으로 바뀌면서 국화의 상징성이 조금씩 줄어든다. 하지만 13세기 말경까지 여전히 술과 관계가 있는 병과 주전자와 탁잔에는 국화문이 주문양으로 전면에 시문되어 국향과 국화주로서의 약효의 상징성이 이어진다. 조그만 유병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양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국화의 엑기스를 추출, 참기름같이 고급 조미향료로 이용할 때 사용한 기기로 보면 국화 문양의 비밀이 무리 없이 풀릴 것이다. 14세기에 들어서면 국화꽃은 인화문으로 나타나고 주로종속문으로 나타나서 장식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14세기 후반부터 청자와 청자 문양 자체가 조잡해지고 퇴화되어 문양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도가의 장생사상과 국화 문양
에 조선조에 들어와 15~16세기 전반에 국화문은 분청사기(粉靑沙器)에 대량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단지 인화분청(印花粉靑)의 화장토(化粧土) 장식 수단으로 항아리 · 병 · 대접 · 접시 등 모든 그릇의 내외전면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인화의 국화판문으로 장식된다. 그렇지만 왜 국판문으로만 인화시문(印花施文)이 되었느냐를 생각하면 역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국화문이 상징하는 국향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 이례적이고 소수지만 15세기 대형 조선청자 향로에 처음 국화문과 梅 · 모란문과 나비가 갈대와 함께 상감 시문된 예가 있고, 분청사기 화분에도 국당초문 · 매국문 역시 상감 시문된 예가 있다. 이러한 예는 역시 고려시대에 이은 국향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매화와 함께 시문된 것으로 보아 고절(高節)의 유가적인 뜻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15세기 말경의 청화백자로, '망우대(忘愚臺)'란 명문이 있는 술잔받침접시는 중앙에 주문양이 국화이고 벌 한 마리가 날고 잇어서 국화주와 국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커다란 매조문에 죽문이 곁들인 항아리가 있는데 큰 매화나무 아래 국화 몇 송이가 피어 있다. 앞선 예와 같이 화괴(花魁)로 일컬어지는 매화가 국화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역시 군자의 상징성을 나타내기 이한 것이라고 본다.
15 · 16세기 청화백자는 매우 희귀해서 문양 자체도 매죽, 송죽, 매조죽문, 송조매문 등이 있을 뿐 국화문은 예를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왜란 이후 피폐한 도자산업으로 17세기에 들어서 청화백자로는 명기(明器)에서만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중엽이라고 생각되는 10여 점 가운데 4점의 명기에 국화문이 주문양으로 시문되었다. 그것은 절지 형태로 시문된 국화문이다. 이는 국화의 실용적인 상징 체계에서 의식적인 사군자의 상징체계로의 전환과 장식성을 추구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칠보문이 부수된 예도 있고 나비와 벌이 날고 있고 꽃이 핀 난초가 한데 섞여 등장한 예도 있기 때문이다.
18세기부터는 꽃이 없는 난초만이 국화에 부수된 문양으로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서 국화에 나비와 벌이 날고 있고 난초꽃이 함께 시문된 것은 역시 전통적인 군자의 덕향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자철화문으로는 크고 작은 항아리와 병, 연적 등에 국화문이 다양하게 시문되고 있다. 국화문만이 시문되는 경우도 많고 간혹 죽엽과 나비문이 부수된 예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철화문백자의 이러한 국화문은 15세기 청화백자 국화문이나 17세기 청화백자명기의 국화문과 같이 높은 향기와 약효로 대변되는 실용성의 국향과 국화주의 전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조선, 간송미술관 소장
도가와 유가의 애매한 경계선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부터 도자산업이 다시 일어나면서 문양과 관계없이 백자의 질도 우수하지만 조선조 특유의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조형으로 발전해 우리에게 다가서게 된다. 18세기 전반에 국화문으로 첫머리에 내세울 것은 <천화백자동 · 철화양인각국화난엽초충문병>이다. 이 병의 양면에는 모두 주문양이 국화인데 난엽이 곁들여 있다. 조선백자에서 18세기에는 양인각이 매우 희귀한데, 이 병에는 여기에 더해 청화 · 철사 · 진사(銅)로 화사하게 설채를 했으며 이러한 예는 이 병 하나밖에 없다. 이 병은 의심의 여지없이 국화주를 담기 위해 특수제작되었다고 생각되면, 양면의 멋진 국화 그림만 봐도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듯 벌과 나비가 모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8세기 전반과 중엽에 걸쳐서 국화문은 큰 항아리에 주문양으로 나타나면서 칠보문 · 문자문 · 초충문이 부수되기도 하고 매화, 파초문이 등장한 에도 있다. 매화에는 새가 앉아 있는가 하면 날아들기도 한다. 그러나 국화에 날아드는 벌과 나비는 국화 향기의 상징적 모티프가 분명하다. 특별한 것은 국화와 나엽문이 같이 주문양으로 시문된 예가 이 시대부터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국화에 난엽이 곁들여지는 것은 18세기 전반의 특징인데 후반까지 계속 난엽이 국화에 곁들여지고 있음은 군자를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때에는 괴석에 의지해 핀 국화가 난엽과 함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예도 있어 유가적인 의식 속에 도가적인 인식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이에 앞서 18세기 전반에 주문양인 국화에 칠보문관 새와 수복(壽福) 문자가 같이 등장한 예를 보면 그런 경향이 더욱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난 · 죽 · 국문과 난 · 국문이 등장하고 사군자인 매난국죽문이 등장해 국화가 사군자적인 인식을 대변하고 있으나 일시적 현상으로 끝난다. 19세기에 이르면 18세기에 이어 국화가 주문양이면서 난엽이 곁들여진 예도 더러 있으나 벌과 나비가 같이 어우러지는 예가 많다. 이외에 드물게는 매 · 국이 같이 등장하기도 하고 괴석과 난과 국화가 같이한 예도 있고 국화절지가 주문양으로 칠보와 수 · 복문이 함께 하기도 하며 국화가 병과 같은 기명의 전면을 가득 메운 예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도자 문양에 나타난 국화문은 한마디로 도가 쪽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장수식품으로 알려진 국화의 전설적인 속설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소비계층의 취향이 아닌가 한다. 사군자와 같은 덕목을 기리는 유가적 발상과 장수와 향을 중시하는 도가적인 요소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아 보이지만 나타난 선호도로 볼 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섯 | 중국 | 도자 문양으로 본 국화
길상 문양에 치우친 국화문
장식과 길상 문양으로서의 국화
중국의 도기나 원시시대에 재작괸 토기에는 국화로 추정되거나 국화문 자체가 간략하게 음각 및 인각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이 경우의 국화는 특정한 상징 의미보다는 관습적이거나 자연적인 문양 시문에 불과해서 상징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송대(宋代)의 청자나 백자에 등장하는 국화문도 이러한 대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대 이후 사군자로서의 상징성을 획득하기 전까지 상징성보다는 장식 요소로서의 성햐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그릇의 중앙에 국화 꽃잎을 인화하거나 그릇 내 · 외면에 간략하게 조각하는 경우가 흔한데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이 기능이 더 강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릇의 형태가 국화를 모방한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도 상징성과는 거리가 멀다. 국화문의 경우 다른 사군자 문양들보다 일찍부터 도자기 위에 시문되기 시작한 점에서 회화이 묵국(墨菊)과는 그 전개를 달리한다.그러나 송대까지 청자나 백자의 주문양으로 등장하는 빈도수는 연화문이나 모란문에 비해 적은 편이다. 국화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통해 지조와 은일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당 · 송대까지 도자자기에 표현된 국화는 화면의 긴 둘레나 여백을 채우는 장식도안으로서 그 역할이 중요시되었다. 표현 형식에 있어서도 초기에 가지와 꽃봉오리를 표현한 단독 절지문 형태에서 시기가 지남에 따라 연화당초나 모란당초와 마찬가지로 국화당초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징 의미 또한 지조나 은일과는 상관없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장식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원대에 이르러 국화는 그릇의 주제 문양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도자기의 경우 다른 문양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운필과 농담 표현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 청화자기의 개발로 문양의 회화성을 중시하게 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원대 황실룡 관요인 화남의 경덕진요에서 생산된 도자기에는 국화당초가 빈번히 그려지는데 지조와 은일의 상징이 아닌 황실의 취향과 권위를 반영한 길상적 의미의 도자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문양 장식에서 독립구도까지
그것은 특히 2마리의 봉황과 결합한 <청화백자쌍봉국당초문반(靑華白磁雙鳳菊唐草紋盤)> 내부의 국당초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황제를 상징하는 쌍봉문에 국화당초가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국화의 본래 의미보다는 봉황의 배경문으로서 그 역할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중국 국외로 수출되어 터키의 톱카피궁에 보물로 전해지는 <청화봉황화훼초충문팔각표형병(靑華鳳凰花卉촟草蟲文八角瓢刑甁)>을 통해서도 이러한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팔각표형병에는 봉황과 결합한 국화당초 외에 원대 자기의 문양으로 많이 시문되는 포도당초 그리고 길상의 의미를 내포한 석류나 모란당초 등이 각 면에 시문되어 있다. 여기에서 포도와 석류는 다산을,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것으로 국화 문양의 상징 의미 역시 이들의 상징의미에 부합하는 복록수(福祿壽)의 추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명대에는 그릇에 시문되는 주문양의 대부분이 초화나 화훼 등 식물문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이는 홍무연간(1368~1398)에 제작된 <청화백자국화문반(靑華白磁菊花文盤)>을 통해 확인된다. 반의 내부 중앙면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입국(立菊)이 배치되었고, 그 주위를 보당당초문대와 국당초문대가 이중으로 둘러싼 형국을 보인다. 이처럼 국화가 주누양으로 등장한 예는 소수지만 분명히 감지된다. 그러나 보조문양대의 일부로서 독립 문양이 들어가기 어려운 부위를 메우거나 주문양과 주문양을 구획시키는 국당초의 역할도 여전히 지속도고 있다. 이들의 상징 의미 역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좌) 청화백자국화문반 | 명(明) 홍무.우) 분채국접문반 | 청(淸) 옹정청화.
청대에 이르러 국화는 드디어 문양장식대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독립적인 구도를 갖춘 회화형식에 따라 그려지게 된다.옹정연간(1723~1735)에 제작된 <분채국접문반(粉彩菊蝶文盤)>의 내저 중앙면에는 대나무 및 나비와 결합한 4색 국화가 그려져 있다.회화에 있어 묵국화가 원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대나무와 바위를 동반하다가 청대에 와서야 단일 소재로 채택되는 흐름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구성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회화와는 다른 흐름 속에서 성장한 도자기 위의 국화문도 회화와 도자기 시문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는 청대에 이르러서는 상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단순한 장식도안에서 출발한 도자기 위의 국화문은 사군자의 일원으로서 국화가 부각되던 회화사적 흐름에 편승해 일종의 유행을 타게 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영향이 극에 달해 청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회화적 표현으로 시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상징성은 오히려 간접적인 영향에 그쳤을 뿐 직접적으로 현자의 은일이나 군자의 정절을 나타내지 않았던 점에서 도자기 문양만의 특징을 찾을 수 있겠다.
일곱 | 일본 | 도자 문양으로 본 국화
장식 문양으로 나타나는 국화
오채국화문국화형발(五彩菊花文菊花形鉢) | 이마리, 17세기 후반, 개인 소장.
국화 문양은 가마쿠라 시대의 고세토 도기로부터
일반인들에게 국화는 곧 일본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인식돌 정도로 일본 각 무사 계급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나 염직과 공예품 등에 자주 사용 되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실제로 일본 도자기 중에 국화 문양이 등장하는 것은 가마쿠라 시기에 생산된 고세토 도기부터다. 세토야기는 중국 화남 지역의 백잠누화를 받아들인 가마쿠라 정권의 지지 속에서 발전한 13~14세기 전반까지의 도기들을 일컫는다. 전성기 테토야키의 문양 표현 방법으로는 문양의 형태를 그릇 표면에 눌러 나타내는 인화(印花)와 비수(肥瘦)가 분명한 빗살로 새기는 획화(劃花) 그리고 문양이나 소상(塑像)을 별도로 제작해 덧붙이는 첩화(貼花)의 세 종류가 있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국화 문양 역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회유도기국화문병(灰釉陶器菊花文甁)>에서는 인화로, <철유국화문병(鐵釉陶器菊花文甁)>에서는 첩화기법으로 국화를 장식했다. 이들 자기에 나타난 국화 문향은 국화가 지닌 특정의 상징 의미를 나타낸다고 보기 어렵고 그릇의 장식성을 증가시키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세토야키가 13~14세기경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나 당시 중국에서 모란문이나 연화문 계통의 문양이 유행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국화 본래의 상징성이 미미하긴 해도 국화문 자체는 세토야키의 도공이 창조해 내거나 가마쿠라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던 문양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또 국화 문양이 통일된 구도 아래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잎과 줄기가 생략된 채 만개한 꽃의 모습이 일종의 도안이나 문장처럼 배치, 표현도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국화의 상징의미는 찾아볼 수 없는 장식성이 강한 문양 요소에 불과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시기를 거쳐 국화가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그 상징성도 명확히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한 시기는 대개 17세기 이후로 짐작된다. 17세기 에도 시대에 일본 도자에는 이마리야키와 쿄야키, 규슈와 교토 지역을 기반으로 한 두 갈래의 커다란 흐름이 있었다. 그 중 최초의 자기 생산은 이마리야키가 구워지던 아리타 지역에서 이뤄졌다. 이 시기 아리타 지역 자기들은 주롱 이마리 항으로부터 각지에 출하되었고, 이후 유럽 등지에도 이 항구를 통해 수출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마리 자기라고도 불린다.
좌) 오채국수도차항아리 | 노노무라 닌세이 소장우) 오채인형 | 이마리 가키에옹, 17세기 후반, 개인 소장
좌) 오채모란국화문대발 | 나베시마, 18세기 전반, 개인 소장우) 백자청화유국화문접시 나베시마, 17세기 후반, 개인 소장
이마리 양식을 보여 주는 예로 <오채국화문국화형발>을 들 수 있다. 이 발은 기형 뿐 아니라 문양도 장식적 요소가 강한 국화를 사용했다.꽃잎 모양으로 구획된 화려한 배경 색상에 국화의 하얀 꽃잎이 커다랗게 시문되었는데 기하학적 구성과 다양한 색상, 극명한 색상대비 효과를 노린 백국의 시문은 이 그릇이 국화의 상징성 보다는 그릇의 장식성에 얼마나 무게를 두었는지 실감나게 보여 준다.
가문의 문장에서 일본적인 자기 문양으로
한편 168090년대 사이에 새롭게 등장해 적색을 주색상으로 사용하면서 정교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가키에몽의 그릇이 있다.그 가운데 <오채인형>을 보면, 이 인형이 입은 기모노 문양 중에서도 앞서 살펴본 도자 문양중의 만개한 국화를 찾ㅇ르 수 있다. 빨간 바탕색 사이에 자리한 국화는 도식적으로 그려졌는데, 이들 국화가 상징하는 것은 국화의 본래 전통적인 의미인 군자나 정절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들은 단순한 장식 요소이거나 혹은 그릇을 사용하거나 그릇 속의 주제로 등장하는 인물이 속했을 법한 가문(家門)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에도 시대 사가현의 나베시마에서는 어용요(御用窯)를 직접 경영해 규격화와 완벽함을 보여 주는 나베시마 양식의 자기를 생산하고 있었다.나베시마의 어용요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다이묘(大名)들에게 헌상되거나 막부의 선물용 또는 고급식기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인에게 판매하지는 않았다. 또 모든 태토는 이즈미야마(泉山)의 특수석이 사용되었으며, 안료나 유약의 원료도 번(藩)에서 엄선해 사용했다. 장식 문양에 있어서도 일본 취향이 반영된 '가장 일본적인 자기'로 일컬어진다. <백자청화유국화문접시>의 내저면 중앙에는 도안화된 16잎의 커다란 국화꽃 두 송이가 겹쳐져 있다. 오채자기보다 청화자기가 더 귀하게 취급된 나베시마 양식의 자기에서 16잎의 국화 역시 국화 본래의 상징 의미보다는 장식성을 최우선으로 여긴 의장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도안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라진 전통적인 국화의 상징성
위와 같은 장식적인 국화 시문은 에도 시대 도기의 한 갈래인 쿄야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교토를 중심으로 제작된 쿄야키는 정보(正保) 4년 무렵, 노노무라 닌세이가 어실요를 축조하고 명력(明曆) 2년경부터 색회 도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 막이 열렸다. 그가 만든 <오채국수도차항아리>에 표현된 국수도(菊水圖)는 격렬하게 굽이치는 물결 위에 국화꽃이 반쯤 떠 있는 모습을 주제로 한 일본 전통의장에서 유해한 것이다. 이 경우의 국화 역시 전체 문양의 장식성을 고려한 시문 계획에 따라 그려진 것이다. 또한 국수 문양은 남북조시대 토호(土豪)인 쿠스노키 집안의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리타 지역으 오채 및 청화자기에는 인물화나 화훼문과 결합하는 형식의 국화 문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이마리양식의 <청화백자인물문대호>에는 인물문보다 크게 묘사된 국화 문양이, 나베시마 양식의 <오채모란국화문대발>에는 회화적 구도를 띠고 모란 아래에 작게 조화를 이룬 국화가 그려져 있다. 이들 모두 상징 의미를 찾는다면 길상적인 의미가 그 해답이 될 것이다.
여덟 | 한국 | 민화로 본 국화
민화 속에 피어난 국화
민화의 단골손님 국화
서민들의 대중문화 속에서 발전핝 민화는 꽃과 새가 주제로 된 화조도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화조도 중에서는 모란과 함께 국화꽃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문자도, 책가도 등과 함께 화훼도, 초충도, 소과도 등의 문인 취향의 민화 속에서도 국화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민화 속에서 예쁘게 ㅍ어난 국화야말로 고결한 자태로 수많은 문인과 문객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사랑받아 왔음을 다시 한번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민화에서 그려지는 국화는 전통적인 문인수묵화에서보다 화려하고 탐스럽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상의 꽃으로 그려지는 것이 특색이다. 뿐만 아니라 책가도나 문자도의 국화분(菊花盆) 또는 화병에 꽂아 놓은 국화처럼 민화 속의 다양한 국화꽃 그림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3가지 또는 5가지 색상으로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실물보다도 더 진한 빨강, 노랑, 보라색들이 원색으로 현란하게 표현된다. 마치 문인 취향의 수묵화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과장되고 대담한 필치와 색상으로 민화의 아름다움을 더욱 강조하는 생기발랄한 꽃이 국화다.
좌) 병아리와 국화(민화) | 가희박물관.원색적인 국화꽃과 서민들의 삶 속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닭과 병아리가 어우러져 실질적인 상징성을 강조하는 문인화풍의 국화 그림과 대비된다
우) 책가도(민화) | 가희박물관.문인화풍의 수묵화와 달리 민화 속의 국화는 화려하고 탐스러우며 아름다운 색상으로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민화 화조도 병풍 속의 국화는 무병장수와 번영, 꿋꿋함과 굳은 지기(志氣), 신선세계의 선약(仙藥) 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그것은 난초와 대나무, 매화와 국화가 다 같은 사군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상징되는 선비정신과는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심지어 민화에서의 국화의 형상은 봉황이 날개를 펼쳐 춤추는 듯하나 실은 부부금슬이 좋다고 하는 난새(鸞鳥) 모양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또한 민화 속에 피어난 국화는 계절의 상징인 단풍과 새, 괴석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누가 봐도 편안하고 친숙하게 보인다. 때문에 민화에서의 국화의 채색이 요란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민화 병풍 속에 등장하는 촤조도는 자연 속의 사계절을 그려내거나 불로장수, 입신출세, 부부금금, 벽사진경(壁邪進慶) 등의 일상적 삶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전통적인 기법, 준법 등의 화법을 떠나 작가의 진솔한 표현에 따라 국화는 괴석, 새, 닭, 꿩, 기러기, 물고기, 구기자, 맨드라미, 갈대, 가을풀 등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그려낸다. 이처럼 서민들의 생활환경 속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친극한 대상들을 국화와 함께 그리기 때문에 감상만을 위주로 한 순수 문인화풍의 국화 그림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민화 속의 국화는 빨강, 노랑, 보라색 꽃이 한 그루에서 원색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생화가 봄, 여름에 피는 꽃이라면 국화는 찬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피어 고고한 자태로 더욱 아름답고 개성적인 향을 피워내는 서정적인 꽃이다
닭과 국화(민화) |벼슬을 상징하는 수탉과 인고와 절의의 상징인 국화, 오복을 뜻하는 5마리의 병아리에는 화가 자신의 소망이 모두 담겨 있다.
전통을 뛰어넘은 세속적인 욕망
민화는 대상물을 국사실화로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제 모습이나 색상과는 무관하게 그리기도 한다. 이는 화가의 기호와 생활, 활동, 정서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세상을 조롱하듯 같은 사물을 가지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예 정형화된 사회규범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괴석 틈에서 자란 한 그루 국화에 오색 꽃이 피어 있고, 5마리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닭 한 쌍을 그린 그림이 있다. 한편, 그림 속에는 벼슬을 상징하는 수탉과 인고와 절의의 상징인 국화꽃이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이 그림이 이야기하는 속내는 아마 따로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부귀다남의 복락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하는 화가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국화가 여러 가지 색상으로 그려질 수 있는 배경에 대해서는 단순히 작가 개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는 성향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화단의 대가이며 매화 그림으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조희룡(趙熙龍)이 "국화는 다섯 가지 색이 있다."고 굳이 밝혀 놓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국화의 색이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의미를 동시에 지닌 국화를 민화에서는 다양한 색으로, 전통을 뛰어넘은 세속적 욕망을 그리도 화려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 국화는 가장 늦은 때 고고한 꽃을 피워 지켜보는 이들에게 오랜 즐거움을 준다. 국향이 싱그러운 가을 하늘 아래 국화 한 송이를 띄운 국화차를 마시며 민화 속 국화를 감상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 인용서적 : 책임편찬 이어령 著 『국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