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과 미술
앎과 행동을 하나로 하며
마음에서 이치를 찾다
명 말기에는 황제의 잇따른 실정으로 인한 당쟁과 관료의 부패, 환관의 전횡, 빈번한 재해 발생 등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하지만 통치이념인 성리학은 실천을 결여한 추상적 지식만을 추구하는 학문적 풍토를 조장하면서
사회의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학자 왕수인王守仁(호 양명陽明, 1472-1529)은
성즉리性卽理의 주자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심즉리心卽理의 양명학陽明學을 새롭게 제창하였다.
다시 말해 왕양명은 성리학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자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치(理)가 아닌 마음(心)에서 참다운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이성을 중시하여 이학理學이라고도 불린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에서는
마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는데, 결국은 유학의 한 갈래로서 그 지평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
심학의 연원은 남송 육구연陸九淵(1428-119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 초기의 진헌장陳獻章(1428-1500)도 독서를 통한 수련에 회의를 품게 되면서 책이 아닌 마음에서
도道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왕양명은 환관 유근劉瑾의 비리를 고발하였다가 1508년 귀주성貴州省 용장龍場에
유배되었으며 이곳에서 육구연, 진헌장 두 학자의 심학을 근간으로 하여 심즉리의 원리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기 하였다.
다음 해 유근의 사형으로 풀려난 왕양명은 귀양貴陽에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처음 주장하였고,
1513년 저양에서는 정좌靜坐의 수양을 가르쳤으며, 1521년 강우江右에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양심인 양지를 지극한 곳까지
확충해야 한다는 '치양지致良知'를 귀결점으로 제시하며 심학의 본체를 완성하였다.
동시에 수행의 방법도 자신을 억제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전환하였다.
왕양명이 제시한 단계적 변화를 교敎의 삼변三變이라고 하며, 지행합일은 성리학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이 만들어낸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한 반론으로 '지식과 실천이 마음에 의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지행합일의 방법으로 처음에는 '정좌'를 제시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요한 것을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면서
실제로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폐단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마음의 천리를 보존하고
실행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법으로 입지立志, 성의誠意, 치양지致良知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입지는 잡념을 버리고
양지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며, 성의란 사물을 대할 때 진실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실천력과 진실성이
겸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치양지는 보이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