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예술작품
'마사초'초 알려진 토마소 디 지오반니, (1401~1428년)
<낙원에서의 추방>, 1427년 작, 프레스코화, 208×88cm,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히의 브란카치 예배당,
左: 1980년대 작품 복구 이전 모습으로 17세기에 그려 넣어진 무화과 잎들이 보임.
右: 작품을 원상태(마사초가 그린 형태)로 되돌리는 복구 작업 이후.
1427년 당시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드러낸 발칙함이 예술적 혁명 수준이었다. 그림의 일부인 <낙원에서의 추방>은
특히 그처럼 시대를 앞선 표현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당시 피렌체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마사초는 이 프레스코화를
완성치 못하고 죽었고, 필리피노 리피가 이를 이어받아 완성했다. 2세기 후 이 작품은 또다시 심각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1674년에 이르러서는 원근법이 더 이상 새롭고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발거벗은 인물들의 모습이 문제가
되어 메디치 가(家)의 코시고 3세는 신체를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무화과 잎들을 그려 넣도록 명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를 따라 그린 차치아 일 베키오(1496~1561년경)
<성 세바스찬>, 1526년 작, 목판에 유채, 147×86cm, 피에롤레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성 세바스찬은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화살형을 선고받았다. 화살형은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로,
역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형을 받던 성 세바츠찬이 결국 쓰러졌을 때 그는 고슴도치와 같은 상태였다고 한다.
1514년경프라 바르톨로메오(1472~1517년)가 그린 성 세바스탄의 그림은 폭력과 고통의 거의 모든
흔적들을 없애고, 대신 적나라하게 육감적인 성인(聖人)의 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스 홀바인
<무덤 안 죽은 그리스도의 몸>(부분), 1521~1522년 작, 패널에 유채, 32×202m, 바젤 바젤미술관.
"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Nulli concedo)." 이 말은 위대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명언이다.
이 문장에서 일인칭인 '나'가 그 자신이 아니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지칭하는 것인지 묻는다면 그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기꺼이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한스 홀바인(1497~1543년)은 당시 에라스무스의 절친한 친구였고, 1523년에는 실제로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 <무덤 안 죽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에라스무스의 그러한 사상은 명확하게 구현되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부분 세부묘사), 1536~1541년 작, 프레스코화, 1483×1330cm,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벽화.
미켈란젤로는 그의 일생 동안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시인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뛰어난 재능만큼 까다로운 성미를 가졌다는 그이지만, 로마의 유명인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작업을 맡겼다.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에게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맡겼고, 차기 교황인 클레멘스 7세는 예배당의 제단 벽화를 요청했다.
미켈란젤로의 제단 벽화는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외설 시비에 휘말리는 등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그의 사후 수 세기에 걸쳐
수정지시와 함께 작품 변형에 반대하는 논쟁에 휘말렸고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1980년부터 1994년 사이에 진행된 복구 작업으로 원래의 다채로운 화면이 드러난 바 있다.
"베로네세"로 알려진 파올로 칼리아리(1528~1588년)
<레위 가의 향연>, 1573년 작, 캔버스에 유채, 555×1280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의 최후의 만찬··· 하지만 여기에 개 한마리, 앵무새를 동반한 어릿광대, 하인들, 미늘창을 든 병사들,
16세기 복장을 한 군중들이 가지각색으로 바글거리는 모습이 더해진다면? 베로네세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이처럼
북적거리고 호화로우며 세속적인 만찬으로 묘사하였다. 물론 종교 재판소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었다.
그림을 주문했던 수도원은 개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를 그려 달라고 했지만 화가는 거부한다. 이에 수도사들이 종교재판을
청했고, 재판관들은 그림을 고치도록 명한다. 베로네세는 영리하게도 그림이 아닌 그림의 제목을 바꾸게 된다
. 이로써 <최후의 만찬>은 <레위 가의 향연>이 된 것이다.
'엘 그레코로 알려진 코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성 모리스의 순교>, 1580~1583년 작, 캔버스에 유채, 448×301cm, 마드리드 에스코리알 왕립수도원.
엘 그레코(1541~1614년)의 화법은 불온했다. 반종교개혁 시기의 스페인은 통제가 심해 예술의 관리와 감독을 담당하는 재판관들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런 검열관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 태생의 엘 그레코는 어두침침한 단색조를 사용하고, 비정상적으로 가늘고 길쭉한
인물 형태를 고집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데 단 세 개의 못을 그려 넣는 위험한 화가였다. 당시 이런 화법은 큰 화를
불러있으켰다. 왕 역시 당시 규범을 존중하기 위해 엘 그레코의 <성 모리스의 순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민과 경의를 불러일으키는
여느 이미지가 아닌(원래 로마 병사였던 성 모리스는 이교도 의식을 행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군중 속에
한 무리의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사내들을 묘사함으로 써 그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수도사였던 호세 데 시구엔자는 왕이 엘 그레코이 그림을 거절한 것을 지지하면서,
예술가들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성인의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성모의 죽음>, 1601~1605/1606년 작, 캔버스에 유채, 369×24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카라바조(1571~1610년)의 삶은 그의 그림들만큼이나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로마에서 교회를 포함한 귀족 계층의 후원자와 수집가들을 매료시켰다.
카라바조는 당시 사회 계층의 가장 옾은 지위에도 오를 수 있었지만, 서민들과 어울려 지내며 그들 가운데 그림의 모델을 찾는
삶을 선택했다. 자신의 애인, 어린 거지와 매춘부들을 성경과 신화 속 인물로 등장시키곤 했는데, <성모의 죽음>에서도
성모를 익사한 매춘부로, 아니면 몸이 부풀고 다리가 노출된 채 테베레 강에서 끌어 올려진 시골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카라바조의 사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 그의 화법을 흉내 내는 새로운 움직임, 이른바 '카라바지즘'을 발전시켰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환희>(부분 세부묘사), 1647~1652년 작, 흰 대리석과 청동, 높이 350cm, 로마 산타라리아 겔라 비토리아 교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그녀가 신과 교감하면서 경험했던 기이한, 신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황홀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과 교감하면서 느끼는 황롤경은 많은 신앙인들이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설명되거나 묘사될 때는 종종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베르니니는 성녀 테레사가 겪은 것과 같은 겸험은 성(性)적인 것에 가깝지만 전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매우 독실한 신자였고 결코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의도가 아니었으며, 성녀 테레사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술한 것을 바탕으로 그를 충실히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손에 금빛의 긴 창을 들고 있는 천사를 보았다‥‥ 간간히 마치 그가 나의 심장 깊숙히 창을 찔러 넣고 나의 몸 속을 꿰뚫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고통이 너무나 강렬해서 나의 영혼은 이것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한
만족을 줄 수 없을 듯 했다." (『성녀 테레사의 삶』1562~1565년 작)베르니니의 작품에 신성 모독적인 요소는 전혀 없지만,
일부에서는 지금도 이를 거북하게 여기고 있다.
디에고 데 실바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1650년 작, 캔버스에 유채, 114×119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벨라스케스(1599~1660년)의 초상화는 강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왕에 예속된 궁정화가로서 그는 왕실 가족들을 화려한 옷과 보석 등으로 치장한 모습에서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방식으로 그려냈다.지배층의 위엄을 그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던 대부분의 궁정화가들과는 달리, 벨레스케스는
심신의 괴로움과 번민을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가 보는 이의 마을을 동요케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격렬함으로 가득찬 피빛처럼 붉은 색, 금색, 티 없이 깨끗한 것과는 거리가 먼 흰색 등, 보는 즉시 눈길을 끄는
색채부터 그러하다. 표독에 가까운 교황의 냉엄한 표정도 그렇고 오므린 입술, 크고 일직선으로 뻗은 코, 갈고리처럼 둥글게 말린 손 등
그림 속의 모든 것이 혹독한 느낌을 자아낸다. 위협적인 태도에 자비심이라곤 찾기 힘든 교황은 그의 몸에 있어서는 속수무책이다.
날카로운 눈빛을 제하고 남는 것은 고꾸라진 몸과 수구러진 얼굴이다. 교황의 강렬한 눈빛이 우리의 시선을 그의 몸에서 거두게
하고연로함과 고독감이 그에게 남긴 흔적들을 가리고 있지만, 교회 권력이 그에게 주는 과시적인 장치들 뒤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 앉아 있는 것이다.
폴 퓨나바르
<마곡>, 1865~1869년 작, 캔버스에 유채, 400×55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폴 슈나바르(1807~1895년)는 이상한 인물이었다. 그림보다는 먼저 말솜씨로 인정받은 화가로,
1869년에 열린 아카데미데보자르 살롱전에 첫 작품을 전시했을 때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대망의 슈나바르의 그림을 보고자
모여든 사람들은 몸들이 뒤엉켜 있는 이 그림을 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도 전시회 책자가 있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사실 이는 화가가 그림에서 의도했던 것과 반대되는 내용, 즉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었다. 이 그림은 두 진영에서 각각 비난을
불러있으켰다. 먼저 일반 대중들은 그림의 복잡한 종교적 상징성 - 사실상 교회의 뜻과는 거리가 먼 - 에 반대했고,
반면 슈나바르의 지지자들은 미술관이 그림을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그 본래 의미를 왜곡했다며 분개했다.
안드레 세라노
<침례>, 1987년 작, 플렉시글라스 위에 올려진 시바크롬 프린트, 나무 액자, 152.4×101.6cm,
작가 및 파리 이본 앙베르 미술관 제공.
언뜻 보기에 이 사진에서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은 지난 20년 이상 변함없이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불쾌하게 만들었다. 사진만 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 제목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침례(오줌 예수)>는 실제 소변 그것도 이 사진을 찍은 작가 자신의 소변에 담근 십자가상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1988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안드레 세라노(1950~)는 국고로 운영되는 국가 기구인 국립예술기금에서 대부분 지급되는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세라노의 <침례>가 미국 전역을 도는 순회 전시에 포함되었을 때 언론인, 큐레이터,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