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논쟁의 예술작품

茶泉 2018. 11. 30. 07:05

 


 

 

'마사초'초 알려진 토마소 디 지오반니, (1401~1428년)

<낙원에서의 추방>, 1427년 작, 프레스코화, 208×88cm,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히의 브란카치 예배당,

左: 1980년대 작품 복구 이전 모습으로 17세기에 그려 넣어진 무화과 잎들이 보임.

右:  작품을 원상태(마사초가 그린 형태)로 되돌리는 복구 작업 이후.

 

1427년 당시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드러낸 발칙함이 예술적 혁명 수준이었다. 그림의 일부인 <낙원에서의 추방>은

특히 그처럼 시대를 앞선 표현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당시 피렌체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마사초는 이 프레스코화를

완성치 못하고 죽었고, 필리피노 리피가 이를 이어받아 완성했다. 2세기 후 이 작품은 또다시 심각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1674년에 이르러서는 원근법이 더 이상 새롭고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발거벗은 인물들의 모습이 문제가

 되어 메디치 가(家)의 코시고 3세는 신체를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무화과 잎들을 그려 넣도록 명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를 따라 그린 차치아 일 베키오(1496~1561년경)

<성 세바스찬>, 1526년 작, 목판에 유채, 147×86cm, 피에롤레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성 세바스찬은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화살형을 선고받았다. 화살형은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로,

역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형을 받던 성 세바츠찬이 결국 쓰러졌을 때 그는 고슴도치와 같은 상태였다고 한다.

 1514년경프라 바르톨로메오(1472~1517년)가 그린 성 세바스탄의 그림은 폭력과 고통의 거의 모든

흔적들을 없애고,  대신 적나라하게 육감적인 성인(聖人)의 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스 홀바인

<무덤 안 죽은 그리스도의 몸>(부분), 1521~1522년 작, 패널에 유채, 32×202m, 바젤 바젤미술관.

 

"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Nulli concedo)." 이 말은 위대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명언이다.

이 문장에서 일인칭인 '나'가 그 자신이 아니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지칭하는 것인지 묻는다면 그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기꺼이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한스 홀바인(1497~1543년)은 당시 에라스무스의 절친한 친구였고, 1523년에는 실제로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 <무덤 안 죽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에라스무스의 그러한 사상은 명확하게 구현되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부분 세부묘사), 1536~1541년 작, 프레스코화, 1483×1330cm,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벽화.

 

미켈란젤로는 그의 일생 동안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시인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뛰어난 재능만큼 까다로운 성미를 가졌다는 그이지만, 로마의 유명인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작업을 맡겼다.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에게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맡겼고, 차기 교황인 클레멘스 7세는 예배당의 제단 벽화를 요청했다.

미켈란젤로의 제단 벽화는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외설 시비에 휘말리는 등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그의 사후 수 세기에 걸쳐

수정지시와 함께 작품 변형에 반대하는 논쟁에 휘말렸고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1980년부터 1994년 사이에 진행된 복구 작업으로 원래의 다채로운 화면이 드러난 바 있다.

 

 

 

 

 

"베로네세"로 알려진 파올로 칼리아리(1528~1588년)

<레위 가의 향연>, 1573년 작, 캔버스에 유채, 555×1280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의 최후의 만찬··· 하지만 여기에 개 한마리, 앵무새를 동반한 어릿광대, 하인들, 미늘창을 든 병사들,

16세기 복장을 한 군중들이 가지각색으로 바글거리는 모습이 더해진다면? 베로네세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이처럼

북적거리고 호화로우며 세속적인 만찬으로 묘사하였다. 물론 종교 재판소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었다.

그림을 주문했던 수도원은 개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를 그려 달라고 했지만 화가는 거부한다. 이에 수도사들이 종교재판을

 청했고, 재판관들은 그림을 고치도록 명한다. 베로네세는 영리하게도 그림이 아닌 그림의 제목을 바꾸게 된다

. 이로써 <최후의 만찬>은 <레위 가의 향연>이 된 것이다.

 

 

 

 

 

'엘 그레코로 알려진 코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성 모리스의 순교>, 1580~1583년 작, 캔버스에 유채, 448×301cm, 마드리드 에스코리알 왕립수도원.

 

엘 그레코(1541~1614년)의 화법은 불온했다. 반종교개혁 시기의 스페인은 통제가 심해 예술의 관리와 감독을 담당하는 재판관들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런 검열관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 태생의 엘 그레코는 어두침침한 단색조를 사용하고, 비정상적으로 가늘고 길쭉한

 인물 형태를 고집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데 단 세 개의 못을 그려 넣는 위험한 화가였다. 당시 이런 화법은 큰 화를

불러있으켰다. 왕 역시 당시 규범을 존중하기 위해 엘 그레코의 <성 모리스의 순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민과 경의를 불러일으키는

여느 이미지가 아닌(원래 로마 병사였던 성 모리스는 이교도 의식을 행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군중 속에

 한 무리의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사내들을 묘사함으로 써 그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수도사였던 호세 데 시구엔자는 왕이 엘 그레코이 그림을 거절한 것을 지지하면서,

예술가들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성인의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성모의 죽음>, 1601~1605/1606년 작, 캔버스에 유채, 369×24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카라바조(1571~1610년)의 삶은 그의 그림들만큼이나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로마에서 교회를 포함한 귀족 계층의 후원자와 수집가들을 매료시켰다.

카라바조는 당시 사회 계층의 가장 옾은 지위에도 오를 수 있었지만, 서민들과 어울려 지내며 그들 가운데 그림의 모델을 찾는

 삶을 선택했다. 자신의 애인, 어린 거지와 매춘부들을 성경과 신화 속 인물로 등장시키곤 했는데, <성모의 죽음>에서도

 성모를 익사한 매춘부로, 아니면 몸이 부풀고 다리가 노출된 채 테베레 강에서 끌어 올려진 시골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카라바조의 사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 그의 화법을 흉내 내는 새로운 움직임, 이른바 '카라바지즘'을 발전시켰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환희>(부분 세부묘사), 1647~1652년 작, 흰 대리석과 청동, 높이 350cm, 로마 산타라리아 겔라 비토리아 교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그녀가 신과 교감하면서 경험했던 기이한, 신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황홀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과 교감하면서 느끼는 황롤경은 많은 신앙인들이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설명되거나 묘사될  때는 종종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베르니니는 성녀 테레사가 겪은 것과 같은 겸험은 성(性)적인 것에 가깝지만 전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매우 독실한 신자였고 결코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의도가 아니었으며, 성녀 테레사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술한 것을 바탕으로 그를 충실히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손에 금빛의 긴 창을 들고 있는 천사를 보았다‥‥ 간간히 마치 그가 나의 심장 깊숙히 창을 찔러 넣고 나의 몸 속을 꿰뚫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고통이 너무나 강렬해서 나의 영혼은 이것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한

만족을 줄 수 없을 듯 했다." (『성녀 테레사의 삶』1562~1565년 작)베르니니의 작품에 신성 모독적인 요소는 전혀 없지만,

일부에서는 지금도 이를 거북하게 여기고 있다.

 

 

 

 

 

 

 

디에고 데 실바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1650년 작, 캔버스에 유채, 114×119cm,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벨라스케스(1599~1660년)의 초상화는 강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왕에 예속된 궁정화가로서 그는 왕실 가족들을 화려한 옷과 보석 등으로 치장한 모습에서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방식으로 그려냈다.지배층의 위엄을 그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던 대부분의 궁정화가들과는 달리, 벨레스케스는

심신의 괴로움과 번민을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가 보는 이의 마을을 동요케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격렬함으로 가득찬 피빛처럼 붉은 색, 금색, 티 없이 깨끗한 것과는 거리가 먼 흰색 등, 보는 즉시 눈길을 끄는

색채부터 그러하다. 표독에 가까운 교황의 냉엄한 표정도 그렇고 오므린 입술, 크고 일직선으로 뻗은 코, 갈고리처럼 둥글게 말린 손 등

그림 속의 모든 것이 혹독한 느낌을 자아낸다. 위협적인 태도에 자비심이라곤 찾기 힘든 교황은 그의 몸에 있어서는 속수무책이다.

날카로운 눈빛을 제하고 남는 것은 고꾸라진 몸과 수구러진 얼굴이다. 교황의 강렬한 눈빛이 우리의 시선을 그의 몸에서 거두게

하고연로함과 고독감이 그에게 남긴 흔적들을 가리고 있지만, 교회 권력이 그에게 주는 과시적인 장치들 뒤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 앉아 있는 것이다.

 

 

 

 

 

 

폴 퓨나바르

<마곡>, 1865~1869년 작, 캔버스에 유채, 400×55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폴 슈나바르(1807~1895년)는 이상한 인물이었다. 그림보다는 먼저 말솜씨로 인정받은 화가로,

1869년에 열린 아카데미데보자르 살롱전에 첫 작품을 전시했을  때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대망의 슈나바르의 그림을 보고자

모여든 사람들은 몸들이 뒤엉켜 있는 이 그림을 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도 전시회 책자가 있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사실 이는 화가가 그림에서 의도했던 것과 반대되는 내용, 즉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었다. 이 그림은 두 진영에서 각각 비난을

불러있으켰다. 먼저 일반 대중들은 그림의 복잡한 종교적 상징성 - 사실상 교회의 뜻과는 거리가 먼 - 에 반대했고,

반면 슈나바르의 지지자들은 미술관이 그림을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그 본래 의미를 왜곡했다며 분개했다.

 

 

 

 

 

안드레 세라노

<침례>, 1987년 작, 플렉시글라스 위에 올려진 시바크롬 프린트, 나무 액자, 152.4×101.6cm,

작가 및 파리 이본 앙베르 미술관 제공.

 

언뜻 보기에 이 사진에서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은 지난 20년 이상 변함없이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불쾌하게 만들었다. 사진만 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 제목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침례(오줌 예수)>는 실제 소변 그것도 이 사진을 찍은 작가 자신의 소변에 담근 십자가상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1988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안드레 세라노(1950~)는 국고로 운영되는 국가 기구인 국립예술기금에서 대부분 지급되는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세라노의 <침례>가 미국 전역을 도는 순회 전시에 포함되었을 때 언론인, 큐레이터,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예수를 욕되게 했다며 이 작품을 철회시키고자 함께 나섰다. 이들의 캠패인은 성곡적이었다.

이 모든 공격들에도 불구하고 세라노는 이 작품으로 무례를 범하거나 모욕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자신은 로마 교황청을 위한 작품을 기꺼이 제작하고 싶다고 밝힐 만큼 "기독교 정신을 가진 예술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

<내 뱃속의 불: 야심>, 1986~1987년 작, 비디오

 

2001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동성애적인 초상화들을 주요 작품으로 하는 '숨바꼭질: 미국 초상화에 나타나는

 차이와 욕망'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애석하게도 이 전시회가 촉발한 동성애 혐오적인 논평들은 사실 새롭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전시 작품 중 하나였던 몇 분 분량의 비디오 영상이 엄청난 논란을 일으킬 것이란 사실이었다.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1954~1992년)의 비디오 영상으로 에이즈 환자가 겪게 되는 고통을 전달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일련의 짧은

연속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자신도 에이즈에 감염되어 1992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이 물의를 일으켰던 것은 4분

분량의 비디오 영상 중 짧게 편집된 11초 분량의 부분에 십자가상을 가득 뒤덮은 수많은 개미때가 나타난다. 이는 피터 후자를 삼켜버린

에이즈를 상징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였다. 카톨릭 연맹은 이를 신성 모독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2011년 1월 뉴욕 현대미술관은

오랜 역사를 가진 뉴욕협회가 이 비디오 작품 중 7분 분량 버전과 13분 분량 버전을 사들여 보이나로비치의 13번재 작품이

미술관 소장품 목록에 들어왔음을 알렸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셈이 되었다.

 

 

 

 

 

알렉산더 코솔라포프

<케비어 성화상>, 1995~2005년 작, 캔버스 위에 프린트, 142×120cm, 런던 추카노프 가족 재단 소장.

 

2007년 3월에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불관은 '금지된 예술 2006'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2005~2006년 당시 당국에 의해 검열 조치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 24점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엄격한 러시아 정교회는 즉각 이 전시회를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나섰다.

러시아 사회 일부에서 번지르르한 사치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철갑상어알이 성모 마리아 성화상을 완전히

뒤덮고 있모습이었다. 작가는 1970년대 태동한 정치 풍자적 예술운동으로 소련의 팝 아트적 면모를 지닌

'소츠 아트'의 일원이었다. 소츠 아트 예술가들은 의식적으로 비국교도적인 태도를 보였고

끊임없이 검열관들의 분노를 샀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홉 번째 계시>, 1999년 작, 폴리에스테르 수지, 사람의 머리카락, 천, 옷, 장신구, 돌, 카펫 작품의 크기는 일정치 않음.

2010년 9월 24일~10월 24일에 밀라노 팔라초 레알레에서 열렸던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전시회에 전시된 모습.

제노 조티 촬영,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카이브 제공.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 병중에도 여전히 바티칸의 수장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의 예술가 타텔란(1960년~)은

교황이 운석에 치여 등골이 부러진 채 바닥에 쓰러진 모습을 그린 작품을 만드는 데 전혀 거리낌이없었다. 그의 도발적인 작품은

대중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 일으켰고, 이로 인한 유명세가 그의 작품을 이탈리아 작품 중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받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무니르 파트미

<잃어버린 봄들>, 2011년 작, 3미터 높이의 빗자루 두 개, 22개의 아랍연맹 국기들,  파리 위스노 갤러리.


무니르 파트미(1970~)는 자신의 작품이 금지당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의 작품은 최근 몇 년 사이, 특히 푸랑스와 두바이에서

여러 번 검열 대상이 되었고 작품을 바꾸지 않으면 철회하도록 강요받곤 했다. 아트페어 측으로 부터 빗자루가 치워진다면

계속 전시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에 파트미는 성명서를 통해 자신이 원했던 것은 "투명한 국기"였다면서, 작품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잘 알고 있음을 밝혔다. "이 설치작품은 진화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주최측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 1799년 작, 에칭(동판화), 애쿼틴트(부식 동판 화법의 일종),<로스 카프리초스(변덕)>, 23번 판화, "먼지 한줌"

드라이포인트(동판 기법), 동판 조각칼, 21.9×145cm, 개인소장,

- 끝이 뾰족한 긴 모자를 쓴 죄수가 교회 성직자의 판결을 듣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먼지 한줌이 이 진흙을 함께 가지고 왔다"

라는 잘 알려진 속담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종교재판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여겨진다.

 

18세기 말 스페인에서 궁정 화가로 산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특히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38년)처럼세상을 풍자하는 것이 타고난 본성이고 그를 억제하기 힘든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그는 판화를 통해 그가 살던 시대와 나라에존재하던 악습들을 재치 넘치게 폭로했다. 거지와 매춘부, 술꾼과 호색한뿐만 아니라 성직자, 연인들, 노파와 먹보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반계몽주의적인 교회, 권력자와 지배계층의 부패, 서민들의 몰락 등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작, 캔버스에 유채, 491×716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데오도르 제리코(1791~1824년)는 신문 기사에서 그림을 위한 영감을 얻곤 했는데, 이런 그가 '메두사호'의 난파 후 뗏목을 타고 생존한이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마음이 꺼림칙했던 이들은 난파 사고 희생자들의 고통을 묘사한 제리코의 그림을 권력남용, 무관심,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 은근한 은근한 비판으로 여겼고, 그 비판이 바로 자신들을 향한 것이라고 느꼈다.

프랑스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29년 전, 즉 1819년 살롱전에 전시되었다. 제리코는 그림 속 중심인물을 타히티 섬 사람(메두사호가 침몰했을

때 배에는 세 명의 타히티 인들이 있었다)으로 내세우면서 노예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주요 논쟁은 노예제에 대한

제리코의 입장이 아닌 그림의 격렬함에 있었다. 이토록 잔인한 장면을 꼭 보여줘야만 했는지 의문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글들이 그림에서

비난의 요소 - 사태를 방관한 정부의 무관심과 난파 당시 구명정을 독차지한 부유층과 권력계층에 대한 비난 - 를 감지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미술작품에서 그 추악한 모습이 그토록 상세히 묘사된 것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 1830년 작, 캔버스에 유채, 260×32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19세기는 정치적 격변의 시대였고, 외젠 들라크루와(1798~1863년)의 정치적 성향이 정확히 어느 쪽이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그는 분명 진보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지만, 혁명가로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평판 역시

그의 문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얻게 된 것이었다. 이 작품은 국가적 문제가 되어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리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물의를 가라앉히기 위해 나서야 할 정도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작, 캔버스에 유채, 83.6×111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년)의 화가 경력 초기는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1848에 일어난 2월 혁명이 민중에게 새로운 승리를 안기면서 그의 작품의 초점도 변화를 겪었는데, 시골 풍경 속에서 눈에 거슬리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밀레와 동시대를 살던 이들은 그의 그림에서 혁명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이 그림을 언뜻 보면 마치 시골 일상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있는 기분이 들게 하지만, 사실 이 그림에서 우연한 것은 없다. 그림의 데생과 구성이 매우 노련하게 통제되어 있어 그것이 자아내는평화로운 상태와 분위기 너머로 화가의 그러한 기술들이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 여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배를 더욱 불리기 위해등골이 부러지도록 일해야 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상징하는 듯 보이고 그렇게 익명의 모호한 위협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년 작, 캔버스에 유채, 252×305cm, 쿤스트할레 미술관.
물의를 일으키는 것에 익숙한 에두아르 마네(1832~1883년)였지만, 위의 그림으로인한 계속되는 검열은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이 그림은 나폴레옹 3세의 최대 정치적 실수 중 하나로 거론되는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867년 6월에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황제가멕시코 민중들에 의해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나폴레옹 3세에게서 비롯된 일로, 그는 본국에서 데려가 멕시코 민중들의의견과 상관없이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하게 되자 홀로 남겨진 가엾은 꼭두각시 황제는 학살 당하고 말았다. 열성 공화당원이었던 마네는 나폴레옹의 방관하에 일어난 황제의 처형을 강하게 비난하는 그림을 그렸다.마네는 너무나 민감해서 묵인될 수 없었던 정치적 주제를 다루고 비난할 수 잇는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마루를 깎는 사람 들>, 1875년 작, 캔버스에 유채, 102×146.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귀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년)는 그의 그림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불편하게 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더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은  그가 유언장을 통해 밝힌 유산의 내용이었다. 자신의 소장품 중 인상주의 회화 65점을 국가에 남겼는데 국가가 이를 거절했다. 인상주의 회화는 당시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부를 경계 시키고 여론을 선동했다.이 사건은 자극적인 신문기사들과 논쟁들, 그리고 주요 정치인들의 열정적인 선언들을 이끌어냈다.


 

 


오귀스트 로댕<발자크>, 1898년 작, 조각, 석고, 275×13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오귀스트 로댕(1840~1917년)이 발자크를 모델로 만든 석고상에 관한 비평가들의 상상력은 끝이 없었다.이것은 눈사람이다, 비를 맞아 녹아내린 큰 소금 덩어리다, 서고히석으로 만들어진 종유암이다 등등… 로댕은 6년의 시간을 들여이 석고상을 완성했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앗다. 하지만 이 스캔들에서 가장 믿기 여려운 부분은, 이 석고상으로 인해 프랑스 사회에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로 악명 높은 드레퓌스 사건에 로댕이 휘말리 되었다는 사실이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군인 차림의 자화상>1915년 작, 캔버스에 유채, 69.2×61cm, 오하이오 오벌린 대학 앨런 메모리얼 미술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1880~1938년)는 브뤼케('다리'라는 뜻의 독일어로 1905년에 창립된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그룹을 지칭) 창시자 중 한 명이었다. 이 독일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모임은 관습적인 화법을 버리고 창작에 있어 주관성을

선호했다. 이들은 나치스가 미술관 '숙청'에 나섰을 때 최초 검열대상이 되었던 화가들이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키르히너는 이런 사태에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크리스토퍼 리터드 윈 네빈슨

<영광의 길>, 1917년 작, 캔버스에 유채, 45.7×61cm, 런던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그리스토퍼 리터드 윈 네빈슨(1889~1946년)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구급차 운전 자원병으로 복무했다. 1917년에 전선에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심각한 우울중에 걸린 그는 사진처럼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표현된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네빈슨이 평소 보여주었던

입체-미래파 스타일과 동떨어진 것이다. 네빈슨은 영국 정부가 고용한 전쟁화가의 신분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군인들의 영웅 행위 대신 전쟁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 이 그림은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오토 딕스

<참호>, 1920~1923년 작, 캔버스에 유채, 227×250cm,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 당시 1937년에 촬영된 (현재 소실된) 작품의 사진. 베를린 국립미술관 중앙아카이브.

 

오토 딕스(1891~1969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병으로 참전했다. 전쟁에서 몸에 부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의 경험과 전쟁의 참상을 감내하기 위한 노력의 수단으로 데생과 그림을 그렸다,

 1933년에 퇴폐적인 작품으로 매도되어 교직을 박탈당했다. 이 작품은 1937년 '퇴폐미술'전에 전시된 후로 사라졌는데, 다른 수 천 점의

작품들처럼 나치스에 의해 파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작품 사진만 남아 있지만, 딕스가 그린 세 폭으로 된 <전쟁>의 가운데 패널을

통해 그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은 <참호>를 그린 후 10년 뒤에 제작된 것으로, 제3제국의 검열에서 살아 남았다.

 

 

 

 

 

마르크 샤갈

<코담배 한 모금(라비)>, 1923~1926년 작, 캔버스에 유채, 117×89.5cm, 바젤 바젤 미술관.

 

샤갈(1887~1985년) 역시 나치스의 공격 대상이 된 또 다른 화가였다. 표현력이 강한 색채와 천진난만하고 비현질적인

인물들이등장하는 그의 그림들은 나치스가 '퇴폐미술'이라 규정했던 것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샤갈은 유대인이었고

 종종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나치스를 더욱 자극했다. 위 작품은 히틀러의 제3제국이 경멸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림 위쪽 오른편 구석을 보면 다윗의 별(삼각형을 두 개 짜 맞춘 형태의 별 모양으로,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상징), 유대교 율법 책, 일곱 갈래로 나뉜 큰 촛대 등 유대교 상징물들로 장식된 유대교 회당에서

야물커(유대인 남자들이 머리 정수리 부분에 쓰는 작고 동글납작한 모자)를 쓴 라비가 코담배를 피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샤갈은 공산 당원이었던 전력을 가진 유대계 이방인이었다.

 

 

 

 



겐페이 아카세가와

<천 엔 권 지폐 재판 압수 물건: 가면, 1963년 작, 모조 1,000엔 권 여러 장, 석고 가면, 노끈, 철사, 종이꼬리표, 37×25×19cm,

미니애폴리스 워커 아트 센터 소장, 2009년 토마스 바로우 워커 기금 기증, 스카이 더 배스하우스 제공.

 

겐페이 아카세가와()1937~)는 일본의 개념미술가이자 작가로, 일상적인 사물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즐긴다.

일본의 '반예술'그룹과 함께 아카세가와는 대중문화에 의해 특징 없이 단조롭고 기발함이 부족해진 일상생활의 형태에 의의를 제기한다.

1960년대에 한 소송사건에 휘말린 아카세가와는 설득력 있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위조지폐를 작품에 사용한 혐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그를>, 2001년 작, 밀랍, 사람의 머리카락, 제복, 폴리에스테르 수지, 101×41×53cm,

파올로 펠리온 디 페르사노 촬영,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카이브 제공.

 

 

옛 바르샤바 게토에서 히틀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 할까? 유대인 단체가 보기에 이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 행위이다. 카댈란의 설치 작품으로 전시된 장소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살해 당했던 장소였기 때. 나치스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에 대한 기억을 모욕하는 비상식적인

도발행위로 여긴 것으로, 대학살을 지휘했던 사람이 아닌 그저 우리와 같은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잉카 쇼니바레

<두 개의 머리를 동시에 날리는 방법(숙녀들)>, 2006년 작, 두 개의 마네킹, 권총 두 개, 네덜란드 왁스를 이용해 프린트 된 면,

신발, 가죽 승마화, (작품을 올려놓기 위한) 주추, 160×245×122cm,

 

대영제국 훈작사인 잉카 소니바레(1962~)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반대하는 일종의 반항아이다.

그의 불온한 작품들 속에는 그가 탐구하는 문제들 - 인종에 관한 편견들, 문화의 혼재, 서구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 결코 메워지지

않는 간극 등 - 이 드러나고 이러한 주제들은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이들의 문제에 대새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혼혈 태생의 나이지리아계 영국인으로 머리가 없는 마네킹을 통해 우리에게 문화, 인종, 그리고 국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의 분배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목이 잘릴 것이라는 것을 ….

 

 

 

 

 

아이웨이웨이

<1994년 6월>, 1994년 작, 흑백사진.

 

아이웨이웨이(1957~)는 작가 경력 초기에 중국 당국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했다. 하지만 이 평범하지 않은 반체제주의자는

국가의 인정을 받는 예술가로 사는 편안한 길에 만족하지 않고 작품과 인터넷을 기발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아이웨이웨이는 자신의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 투쟁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620년경, 캔버스에 유채, 199×162.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17세기에 여류 화가인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이 여류 화가가 자신을 강간한 이를 소란스럽고 강한 어조로 비난하는

것은 당시 로마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압력들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결심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년)는 정당한 재판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녀는 작품을 통해 길이 남을 복수를 해냈다.

성경 속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결정적인 복수를 가하는 방법을 찾아낸 듯하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는 젊은 유대인 여인 유디트가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에게 몸을 바치는 것처럼 꾸민 다음 그의 목을 베어서 유대 민족들을

구했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은 성 추문의 진상이 폭로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남성 우월주의적인 당시 로마 사회에

골칫덩이가 되었고, 신중을 기하는 소장자들의 손에 머물며 아주 오랫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옷 입은 마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프란시스코 고야

<옷을 입은 마하>, 1800년 작, 캔버스에 유채, 95×19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옷을 벗은 마하>가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를 빤히 바라보는 반면, 옷을 입은 마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훨씬 더 담담해 보이고 자신을 보는 이와 눈빛을 교환하는 듯 보인다. 카롤로스 4세가 통치하던 스페인의 재상 마누엘 데 고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옷을 벗은 마하 그림을 먼저 의뢰한 다음, 똑 같은 그림에 옷을 입힌 것을 주문한 데서 드러난다.

이 에로틱한 이야기에 또 다른 관점을 더하고 싶었던 고도이는 두 마하의 그림을 벨라스케스의 <거울 속의 비너스> 옆에 걸어 놓았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나체 여인의 뒷모습을 담고 있으므로, 이러한 배치는 감상자에게 여성의 몸매를 더욱 더 잘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고도이가 세상을 떠난 뒤 이 그림들의 존재를 알게 된 종교재판소는 이를 가차 없이 비난하면서 그림이 그려진 경위를

알고자 했다. 고야는 이미 이전에 자신의 작품 <로스 카르리초스>에서 풍자적으로 묘사한 바 있던 종교재판관들이 반감을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사실 재판관들은 고야를 어찌하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분명 궁정화가였던 고야의 지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터키 목욕탕>, 1862년 작, 목판에 유채, 108×108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1780~1867년)가 그린 이 그림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에로틱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림이 그려진 뒤 50년이 자나고 루브르 박물관의 상당한 망설임 끝에 그림은 루브르의 소장품이 되었다.

해부학을 무시한 인물들에게 관능성을 부여하는 곡해를 적용한 그림으로,원형 틀 속 구도는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작, 캔버스어ㅔ 유채, 130×19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1863년 마네의 <올랭피아>가 파리 살롱전에 전시되었다. 이 여인의 누드화는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란을 일으켰다.

격분한 수많은 관람객들이 그림을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하여 이 그림은 보호차원에서 다른 작품들보다 높은 곳에 걸려야 했다.

단순 누드화였기 때문이 아니라 흔히 볼 수없는 매춘부가 등장했던 것이다. 예법에 어긋남을 숨기려 하기는 커녕,매춘부임을

알리는 여러 암시들을 그림 속에 그려넣었다. 발밑 고양이는 부끄럽고 추한 욕망의 상징이고 꽃다발도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마네의 입장에서는 계획적인 선택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얼굴의 여인과 평범한 몸매, 빛과 반사에 의해

그늘진 피부표현 등이 비평가들의 악평을 끌어내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마네는 "나는 내가 본대로 그렸다"라며 자신의 그림에

명분을 세우려 했고, 작가 에밀 졸라와 같은 이들은 마네의 업적을 사상 유래가 없는 것으로 평하가도 했다.

 

 

 

 

 

장 바티스트 카르포

<춤>, 1869년 작, 대리석, 420×29×14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현재 파리 오페라 극장 전면에 보이는 조각은 폴 벨몽도가 만든 모조품이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설게자였던 샤를 가르니에로부터 오페라 극장을 위한 무용의 상징물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은

장 바티스트 카르포는 당시 부도덕한 것으로 널리 여겨지던 주신 바커스를 주제로 한 조각품을 만들었다.

작품 속에 춤의 우아함과 동적 효과를 포착해낸 카르포의 뛰어난 기술도 수많은 비난론자들을 회유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에곤 쉴레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여인>, 1914년 작, 구아슈와 연필, 30.4×47.2cm, 빈 알베르티나 판화수집 소장.

 

불과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에곤 실레(1890~1918년)는 전혀 미화되지 않은 벌것벗은 알몸 그대로를 그렸다.

실레의 인물화에서 우아함이나 조화로움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쓸쓸함과 의기초침한 분위기 속에 뒹굴고 있는 이들의 뒤틀리고

괴로운 몸뚱아리들이 있을 뿐이다. 1918년 아이를 잉태하고 있던 그의 아내가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질레 자신도 감염되어 며칠 후 죽었다.

 

 

 

 

 

콩스탕탱 브랑쿠시

<공주 x>, 1915~1916년 작, 청동과 돌(석회암) 받침대, 61.7×40.5×22.2cm, 파리 조르주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작품은 누구나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거울"이라고 콩스탕탱 브랑쿠시(1876~1957년)는 말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이미지에서 무엇을 보는가? 남근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스캔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든

브랑쿠시의 주장은 자신은 그저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방식으로 여성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요체는 남근 모양의 여성스러움일 터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붉은 누드>, 1917년 작, 캔버스에 유채, 60×92cm, 밀라노 자니 마티올리 미술관.

 

1917년 12월 3일에 모딜리아니의 첫 개인 전시회가 열렸다. 32점의 그림들 - 데생 몇 장과 4점의 누드화 포함 - .

그리고 돋 등불에 불나방이 모이듯 행인들이 불빛이 환한 화랑의 진영창 앞으로 모여들었다. 모딜리아니는 대담하게 여성을 가장

 에로틱하고 본능적인 모습으로 묘사했고 그로 인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그림 속 모델들의 치골과 겨드랑이의 털

 -당시 보통은 관객들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겨졌던 - 을 보여준 최초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가리개를 깜박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 검열이 부족했던 것일까? 어쨋든 전시회는 네 점의 누드화가 빠진 채로 더 이상의 소동 없이 계속되었다.

모딜리아니는 전시회에서 데생 단 두 점을 팔고 다시 가난한 신세로 돌아왔다.

2년 후, 그는 36세의 나이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타마라 드 렘피카

<장밋빛 속옷 1>, 1933년 작, 나무 패널에 유채, 41×33cm, 플로리다 비어트리스 레비 컬렉션 소장.

 

폴란드 태생의 렘피카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한 상류층 변호사를 점찍은 그녀는 바람둥이인

그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어느 날 열린 가장무도회에 시골 처녀 복장을 하고 줄에 맨 거위를 데리고 나타났다. 전략은 유효했다.

19세의 나이에 렘피카는 타데우즈 렘피키와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식에 그녀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 옷자락이 예배당의 통로를 다 덮을 만큼 길었다. 혁명 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정착한 렘피카는 여자로서, 또 예술가로서

 세상의 이목을 끈다. 렘피카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녀의 삶은 그림처럼 노련하게 빛어낸 결과물이었다.

 자유분방했던 그녀는 양성애자 였으며, 자신은 거의 언제나 사랑했던 사람들만을 그렸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림속의 여인도 양성애자 렘피커의 여자 애인 중 하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스 벨머

<인형>, 1935~1936년 작, 채색한 나무로 이루어진 관절체, 판지, 머리카락, 신발, 스타킹, 61×170×51cm,

파리 조르주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한스 벨머(1902~1975년)는 사물을 의인화시킨 피조물의 원형을 생각해냈다.

이 혐오스러우면서도 사람의 눈길을 끄는 변화무쌍한 인형은 그의 페티시(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것)가 되었다.

하지만 벨머의 인형을 괴상한 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독설을 퍼부으며 이야깃거리로 삼은 이들에게는 그저 혐오스러운 대상일뿐이었다.

감수성이 강한 관객들은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어떤 뒤틀린 상상이 이런 흉악한 일을 가능하게 한단 말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나치즘에 시달린 한 남자의 상상력에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욕망 - 그것이 비록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일지라도 -

 이 더해진다면 가능하다.

 

 

 

 

 

발튀스로 알려진 발타사르 크롤소프스키 드 롤라

<기타 레슨>, 1934년 작, 캔버스에 유채, 161×138.5cm, 개인 소장.

 

상아생전 유명했던 기이한 화가 발튀스(1908~2001년)는 사춘기 소녀의 신체에 대한 애호를 결코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은밀한 상황에서 몰래 관찰의 대상이 되는 조숙한 소녀들을 즐겨 그렸다. 그런 까닭에 종종 오해를 사는 발튀스의 작품들은

20세기 대표적 금기 사항 중 하나인 소아성애(小兒性愛)를 다루고 있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한 성인 여자가 어린 소녀를 자신의무릎에 마치 기타를 놓듯 뉘여 놓았다.  무슨 내용이건 간에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마찬가지다. 발튀스 스스로도 이 그림을 검열하여대중에게 공개 하지 않았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이 그림을 입수했지만, 일부 영향력 있는 기부자들의 압력으로 4년 동안 소장목록에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팔린 그림은 현재 개인소장품 되어 모든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불루 노지즈

<자비의 시대> 연작 중 <키스하는 경찰관>, 2005년 작, 컬러사진, 75×100cm, 10판.

 

2005년에 블루 노지즈(Blue Noses, 1999aua~)(엄격한 청교도 인들을 일컫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1999년에 결성된 러시아 예술가 단체를 말한다)

영국 거리무술가인 벵크시를 기리는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껴안고 입 맞추는 두 명의 런던 경찰관들이 등장하는 뱅크시의 유명한

스텐실 작품<키스하는 경찰관>을 재해석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의 취지를 인정하지 못했던 러시아 정부는 작품을 알수 조치했다.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판 레인

<야간 순찰>, 1642년 작, 캔버스에 유채, 363×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군상화는 큰 유행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지위만큼 작품 값 중 일정 부분의 몫을 지불했고

그 몫에 상당하는 비중으로 그림에 등장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당시의 제작 기법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 사람들의 반응은

당혹감 그 자체였을 게 뻔하다. 렘브란트는 제작 의뢰자였던 코크 대위 민병대는 렘브란트에게 속은 것이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 서부 철도>, 1844년 작, 캔버스에 유채, 91×121.8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무엇보다도 자연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 그가 보여주었던 혁신적인 시도들이 동시대인들을 거북하게 했던 것.

그러한 혁신적인 시도들은 말년에 그가 거의 추상적 무정형을 그리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귀스트 프레오

<학살>, 1834~1850년 작, 부조, 청동, 109×140cm, 샤르트르 순수미술관.

 

낭만주의 조각가였던 오귀스트 프레오(1809~1879년)는 조급한 성미에 타고난 기질이 괴팍했고,

그의 작품 역시 잠자코 있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프레오는 사실상 그의 전 생애를 자신의 작품이 살롱에 전시될 수

있도록 애쓰며 보냈지만, 심사위원들은 그의 작품에 드러난 혼돈과 미완의 느낌에 번번히 퇴짜를 놓았다.

 

 

 

 

 

제프 쿤스

<풍선 개(진홍색), 1994~2000년 작, 투명한 착색층과 크롬을 입힌 스테인리스강, 307.3×363.2×114.3cm.

파리 베르사유 궁전 내 헤라클레스의 방,

 

'위험'과 '덧없는 어리석은 짓',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제프 쿤스(1955년~) 전시회의 큐레이터들이 자신들이 기획한 전시회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단 두 표현이다. 프랑스 군주의 거주지였던 장소에서 키치예술과 네오팝아트의 왕으로 군림하는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기획이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님이 드러났다.

 



 

 

 

샤오위

<루안>, 1999년 작, 설치작품.

 

포르말린이 채워진 여섯 개의 용기 속에 각각 떠 있는 <루안>이 포함되어 있는 작품으로

 샤오위(1965년~)의  위 작품은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예술창작을 위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이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큰 물의을 일으킨 것이다.

 

 

 

 

 

퀸터 폰 하겐스

폰 하겐스의 폴라티네이션 과정에 따라 처리된 인체들 중 하나2009년 5월 6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체 세계'전에 전시된 모습.

 

15세기까지 인간의 영(靈)과 육(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은밀한 경우를 제외하느는 사람을 해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주요 문제는 이 전시회를 과학적 이벤트로 볼 것이냐, 아니면 예술적 이벤트로 볼 것이냐 하는

분류의 문제에 다다른 것이다.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논란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

 

 

 

 

 

데미안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하여>, 2007년 작, 백금, 다이아몬드, 사람의 치아, 17.1×12.7×19.1cm, 프루던스 커밍 조합 촬영,

데미안 허스트 앤 사이언스 판권 소유(DACS 2012)

 

데미안 허스트(1965년~)는 허영심 강한 선동가이자 냉소적인 기회주의자이며, 자신을 알리는 능력이 타고난 인물이다.

그의 과도한 제작과 마케팅 감각은 미술 지장 참여자들을 긴장시키고, 그의 작품들은 자주 대서특필된다.

'쇼커홀릭, 충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중독된'이라는 뜻으로 쓰인 합성어)'이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계속해서 스스로의

최고 팬이 되려 하고, 지금도 활발히 예술계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참고 서적 : 엘레아 보슈롱 & 디안 루텍스 지음, 박선영 옮김. 스캔들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