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차 문화 소고 (7)

茶泉 2018. 9. 5. 07:23

 

 

백운동 별서別墅와 월산 작설차月山雀舌茶

 

백운동(白雲洞) 원림은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옥판봉 자락에 위치한 전통 별서(別墅)다.

소쇄원, 명옥헌, 다산초당, 일지암 등과 더불어 몇 남지 않은 호남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입산조인 이담로(李聃老,1627-?)가 만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李彦吉, 1684-1767)과 함께 이곳에 은거하여

별서를 조성한 이래 지금까지 11대에 걸쳐 이어져온 유서 깊은 공간이다.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은 다산 정약용에게 직접 배운 막내 제자였다.

그는 백운동 대숲에서 나는 차잎을 따서 떡차를 만들어 다산에게 보냈던 인물이다.

 다산은 그에게 차 만드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일러준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백운동 원림의 공간 구성과 내력, 다산과 얽힌 인연,

그리고 일제시대 백운옥판차로 이어진 차의 연혁 등을 살펴보겠다.

 

 

 

백운동 별서에 이르는 울창한 동백숲.

 

 

 

 

 

월출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수.

 

 

 

 

백운동 제4경 홍옥폭(紅玉瀑)의 풍리홍폭(楓裏紅瀑).

가을 날,  창하벽(蒼霞壁)의 단풍나무가 물에 어리는 모습이 홍옥같다는 말씀.

 예전엔 이 지점에 물레방아도 있었다고 한다. 

 

 

 

 

 석대 정자에 올라 바라본 백운동 별서 전경



백운동 별서의 공간 구성과 내력

이담로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자는 연년(延年), 호는 백운동은(白雲洞隱)이다. 장사랑(將士郞)을 지냈고, 사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다. 절조를 숭상하여 세상에 뜻을 끊고, 백운동으로 들어와 금서(琴書)로 즐기며 만년을 보냈다. 이시헌이 백운동 관련 제현의 시문을 모아 엮은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이 전한다. 여기 실린 이담로가 지은 「백운동명설(白雲洞名說)」을 먼저 읽어 본다.

백운동은 월출산 옛 백운사(白雲寺)의 아래편 기슭에 있다. 앞에 석대(石臺)가 있는데, 올라가서 보면 뒤편으로 층암(層巖)이 옥처럼 서있다. 송죽(松竹)이 길을 덮고, 맑은 시내가 어리비친다. 이 물을 끌어 구곡(九曲)으로 만들어 섬돌을 따라 물소리가 울린다. 냇가의 바위 위에는 또 ‘백운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옛 이름을 인하여 현판을 걸어두고 그 그윽함을 기록해둔다.


백운사의 아래에 있어 백운동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조 ‘불우(佛宇)’에 백운사와 수암사(秀巖寺)가 월출산에 있다고 했으니, 이 절을 말한 것이다. 실제 백운동 골짝을 따라 올라가면 백운사의 절터가 남아 있다. 백운동의 앞쪽에는 석대(石臺)가 뒤편에는 층암(層嵓)이 섰고, 시내를 끌어와 구곡(九曲)을 돌려 섬돌을 따라 냇물 소리가 울며 지난다고 했다. 냇가 바위 위에 ‘백운동’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것으로 이름을 정했다.
대개 이러한 기술 내용은 현재 백운동 별서의 공간 구성과 그대로 일치한다.




『백운세수첩』에 수록된 「백운동유서기」

이담로는 「백운동유서기(白雲洞幽棲記)」란 글도 따로 남겼다.

월출산 남쪽, 천불동 기슭에 골짜기가 있다. 땅이 후미지고 그윽하며, 물은 맑고도 얕다. 층암이 절벽처럼 서서 우뚝하고, 흰 구름이 골짝을 메워 영롱하니, 또한 아름다운 곳이다. 구양수의 저주(滁州)와 유종원의 우계(愚溪)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그윽한 운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울물을 끌어서 술잔을 띄움은 왕희지의 난정(蘭亭)을 본받고자 함이요, 바람의 가락에 맞춰 종소리가 들림은 임포(林逋)의 고산(孤山)을 본받기 위함이다. 대저 한가로이 지내며 뜻을 기르고, 문묵(文墨)으로 즐거움을 부치는 것은 또한 이것들을 인하여 도움 받을 수 있다. 이에 물에는 연꽃을 심어 천연스런 자태를 아끼고, 동산에는 매화로 해맑은 풍격을 숭상하며, 국화는 절개를 취해 서리에도 끄떡 않는 자태를 돌아본다. 소나무는 절조를 취해 뒤늦게 시드는 자태와 문채 남을 시험하였다. 물가에는 대나무가 있어 마음 맞음을 의탁하고, 뜨락에는 난초를 심는다. 조롱에는 학을 두어 달빛에 울고, 시렁에는 거문고가 있어 바람에 운다. 이것이 백운동의 대강이다. 마침내 기문으로 삼는다.


구양수가 「취옹정기」에서 말한 저주(滁州)의 서쪽 시내와 유종원이 「우계기」에서 묘사한 우계의 풍광을 백운동에서 만날 수 있다고 말한 뒤, 이곳의 공간 구성을 나열했다. 먼저 처음 꼽은 것이 유상곡수(流觴曲水)다. 계곡 물을 수로로 끌어와 섬돌 아래로 돌려 마당의 상하지(上下池)를 돌아 다시 방향을 꺾어 시내로 흘러나가게 만든 구곡(九曲)이 민간 정원에는 유일하게 백운동 원림 안에 현재까지 남아 있다. 왕희지가 난정(蘭亭)에서 행했던 유상곡수를 본뜬 것이다. 못에는 연꽃을 기르고, 동산에는 매화를 심었다. 국화와 소나무, 대나무와 난초를 각각 심어 그 절조에 의탁했고, 조롱에는 학을 길렀다. 시렁에는 거문고가 놓여 바람이 지나면 저 혼자 스스렁 울었다.
이담로가 묘사하고 있는 백운동의 이러한 풍광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최근 이 원림은 강진군에서 본격적인 복원 사업에 착수하여, 현재 본채를 제외한 대부분의 원림이 예전 상태를 회복했다. 소쇄원을 이어 잊혀졌던 전통 별서 하나를 되찾게 된 셈이다.

 



백윤유거 현판

 

 

 


 복원된 유상곡수.
백운세수첩』에는 이담로의 두 글에 이어 적와기수(適窩畸叟) 신명규(申命圭, 1618-1688)가 쓴
「백운동초당팔영(白雲洞草堂八詠)」과 임영(林泳, 1649-1696)과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백운동팔영」이 각각 실려 있고, 송익휘(宋翼輝)의 「백운동십영(白雲洞十詠)」과 이시헌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8영은 송(松)·죽(竹)·국(菊)·란(蘭)·매(梅)·련(蓮)·금(琴)·학(鶴) 등 8가지를 노래한 것으로, 위 「백운동유서기(白雲洞幽棲記)」의 내용에서 취해왔다.
 이밖에도 각자의 문집에 백운동을 노래한 시가 몇 수씩 더 있고, 김창집(金昌緝)의 『포음집(圃陰集)』과 『해석유고(海石遺稿)』 등에도 백운동을 노래한 시편들이 보인다.
당시의 쟁쟁한 문인들이 앞 다퉈 백운동의 승경을 노래한 데서 알 수 있듯, 당시에도 백운동 원림은 경향간에 이름이 높았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두타초(頭陀草)』중 「남행집(南行集)」에도 「백운동은 고(故) 정자(正字) 이언렬의 별업이다. 뜰 가운데 샘을 끌어 유상곡수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묻혔다. 동백이 바야흐로 성대하게 피었다.(白雲洞故正字李彦烈別業也. 庭中引泉爲流觴曲水, 今廢. 冬柏方盛開)」란 작품이 실려 있다.

駐馬白雲洞 백운동 골짜기에 말을 세우고
入門松滿庭 문에 드니 소나무가 뜰 가득하다.
花開餘雪樹 눈 쌓인 나무에 동백은 피고
人去獨林亭 사람 가고 없는데 임정(林亭)만 있네.
曲水何年廢 유상곡수 어느 해에 폐하여졌나
脩篁只自靑 대숲만 다만 홀로 저리 푸르네.
古壇來拄杖 옛 단(壇)을 찾아가 서성이자니
幽意更泠泠 그윽한 뜻 더더욱 쓸쓸하구나.

 

 




이하곤은 기행문 「남유록」에서 이곳의 풍광을 또 이렇게 직접 묘사했다.

15리를 가서 월남촌(月南村)에 이르렀다. 월출산 남쪽에 있기 때문에 월남이라고 한다.

옛날에 월남사가 있었는데 자못 경치가 훌륭했다. 지금은 폐사가 되어 일반 백성이 산다.

또 서쪽으로 5리쯤 가면 백운동이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이언렬의 별업이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다.

나무는 동백이 많은데, 마침 꽃이 피어 화려하였다. 마당 가운데에는 산골 물을 끌어 곡수(曲水)를 만들었다.

대개 지난 날 술잔을 띄워 놀던 장소다. 언렬이 죽고 나서는 또한 폐하여진 지 오래다.

 남쪽에는 작은 동산이 솟아 있고, 장송을 열지어 심었다.

그 아래는 단을 만들어, 앉아서 구정봉(九井峰)의 여러 봉우리를 볼 수가 있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로 보아 이하곤 당시 마당의 유상곡수는 이미 매몰되었고, 골짜기엔 동백이 군락을 이뤄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쪽의 작은 동산에는 소나무를 심고, 그 아래 단(壇)을 만들어 월출산 구정봉이 바라보이게 했다.

 

 

 

 


별서 뒷편에 위치한 입산조인 이담로의 묘표석. '백운동은이공지묘(白雲洞隱李公之墓)라 적혀 있다.

 

 

다산의 「백운첩(白雲帖)과 초의의 「백운동도(白雲洞圖)」

 

백운동이 다시금 주목 받게 되는 것은 몇 세대가 지난 후 다산 정약용에 의해서다.

다산은 1812년 9월에 제자인 초의(草衣)와 윤동(尹峒)을 데리고 월출산에 산행 와 백운동에서 하루를 묵었다

. 다산은 7년 전인 1805년에 월출산에 놀러 왔다가 정상에서 탈진하여 간신히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에 전날의 유감 풀이를 겸해 제자 둘을 데리고 원족을 왔던 것이다.


유람 후 다산은 백운동의 승경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이곳의 12승사(勝事)를 노래한 13수의 시를 짓고,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白雲洞圖)와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를 그리게 하여 『백운첩(白雲帖)』으로 묶었다.

서시격의 시는 「백운동 이씨 산거(山居)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山居)」이다.

 다산이 꼽은 백운동 12승사는

옥판봉(玉版峯)·산다경(山茶徑)·백매오(百梅塢)·취미선방(翠微禪房)·모란체(牧丹砌)·창하벽(蒼霞壁)·

정유강(貞蕤岡)·풍단(楓壇)·정선대(停仙臺)·홍옥폭(紅玉瀑)·유상곡수(流觴曲水)·운당원(篔簹園) 등이다.


지면의 제약으로 시를 일일이 소개하지는 못하고, 시의 내용을 간추려 당시 백운동의 원림 공간을 재구성 하면 이렇다.

백운동의 제 1경은 옥판봉을 꼽았다. 옥판봉은 월출산 구정봉의 서남쪽 봉우리의 이름이다.

이름하여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玉版爽氣]’이다. 산다경(山茶徑)은 동백나무 오솔길이다.

지금도 백운동으로 들어서는 별서의 아래 자락에는 길 양편으로 동백나무가 무성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매오(百梅塢)는 집 둘레 바위 언덕에 심어둔 1백 그루의 홍매를 가리킨다.

 취미선방(翠微禪房)은 본채 아래 쪽에 화계(花階) 위에 세운 세 칸 초가집이다. 모란체(牧丹砌)는

 모란을 심어둔 화단이고, 창하벽(蒼霞壁)은 계곡을 건너 별서로 들어설 때 집 앞을 막고 선 푸른 절벽이다.

 다산은 여기에 붉은 먹으로 크게 ‘창하벽’이라고 써 놓았다고 했다.

정유강(貞蕤岡)은 소나무를 열 지어 심은 집 남쪽의 작은 묏등이다. 창하벽의 위편에 해당한다.

 

풍단(楓壇)은 시냇가에 임한 양편에 단풍나무를 심어둔 평평한 땅이다.

다산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단풍나무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가 강진에 귀양 살 적에 백운동 이씨 산장에 단풍나무 몇 그루가 있는 것을 보았다.

높고 커서 하늘을 찌를 듯 하여 기둥감으로 쓰기에 마침 맞았다. 주인에게 물어 보니,

여태 꽃이 피어 열매 맺는 것을 못 보았다고 하니 기이하다 할만하다.

(余謫康津, 見白雲洞李氏山莊, 有丹楓數株, 高大拂雲, 可中棟梁. 問之主人, 亦未見開花結實, 可異也.)고

적은 바로 그 단풍나무다. 정선대(停仙臺)는 정유강 옆에 세운 작은 정자의 이름이다.

현재 아름드리 세 그루 소나무 옆 예전 주춧돌 자리에 정자를 복원해 놓았다.

홍옥폭(紅玉瀑)은 계곡을 건너기 전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다. 지금은 건천이 되어 유량이 거의 없지만,

 여름 철 비가 많이 내리면 장관을 이룬다.

풍단을 지나 내려온 물이 물가에 있던 죽정(竹亭) 앞을 세차게 치며 흘러 폭포가 된다.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앞서 언급한 마당에 있는 물굽이 길이다. 계곡 물을 끌어서 담장 밑으로 들이고,

섬돌 밑을 따라 들어와 상지(上池)로 든다. 다시 물길을 꺾어 하지(下池)로 대이고,

한번 더 꺾이어 바깥 계곡으로 되흘러 나간다.

 다산은 시에서 6곡(曲)이라 했는데, 바깥쪽의 구비 수를 합치면 9곡이 맞다.

 운당원(篔簹園)은 집 오른편의 무성한 대나무 밭을 가리킨다.

이곳에 야생차가 군집을 이루며 자란다.

 

 

 

이와는 별도로 이 집의 주인이었던 다산의 제자 이시헌도 백운동 14경을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가 손꼽은 14경은 다음과 같다.

백운동(白雲洞)·자이당(自怡堂)·천불봉(千佛峯)·정선대(停仙臺)·백매원(百梅園)·만송강(萬松岡)·운당곡(篔簹谷)·

산다경(山茶徑)·모란포(牧丹圃)·영홍체(暎紅砌)·창하벽(蒼霞壁)·홍옥담(紅玉潭)·풍단(楓壇)·곡수(曲水) 등이 그것이다.

대개 다산의 12승사와 비슷하나 이름이 조금씩 차이난다. 취미선방은 자이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산홍을 심은 화계(花階)를 하나 더 꼽았다.


초의는 1839년 가을에 백운동을 다시 찾았다.

그는 그곳에 심어져 있는 백학령(白鶴翎)이란 고급 품종의 국화를 보고 시를 지었고,

이 국화 한 그루를 얻어가며 한 수 더 지었다. 이런 것을 보면

당시 백운동의 정원은 여러 종류의 나무 뿐 아니라 기화이초들도 심어져 정성스레 가꾸어지고 있었다.


백운동 별서는 대단히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룬 원림이며,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유상곡수는 민간정원에서는 달리 예를 찾기 어려워 그 가치가 높다.

다산은 이 백운동의 풍광을 동행했던 초의를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리고는 맨 뒤에 다음과 같은 발문을 남겼다.

가경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으로부터 백운동에 놀러가서 하루밤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 승려 의순을 시켜 백운도(白雲圖)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勝事)를 읊어서 주었다. 끝에는 다산도(茶山圖)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백운첩』에 나오는 초의 의순이 그린 「백운동도」

 

초의가 다산의 분부로 그린 「백운도」는 다산의 백운동 12승사 시와 함께 『백운첩(白雲帖)』으로 묶여 전한다.

『백운첩』 끝에는 역시 초의가 그린 「다산도」가 실려 있다. 당시 다산이 거주하던 다산초당의 실경이 아주 상세하다.

그 구조도 지금과는 사뭇 달리 돌담장이 있고, 울타리 안과 밖에 각각 상하의 방지(方池)가 있었다.

또 석가산(石假山)은 연못 가운데가 아닌 연못 위쪽에 자리 잡았다.

다산은 『백운첩』의 첫장에 「백운도」를 그리고, 끝에는 「다산도」를 실어

둘 사이에 어느 곳이 더 나은지 겨뤄보자는 뜻을 비췄다.

 

 

 

 

『백운첩』끝의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린 경위를 적은 다산 친필.

 


이 두 공간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있다.

계류나 샘물을 끌어와 상하 방지에 물을 대고, 화계(花階)를 두어 꽃과 채소를 심으며,

 암벽에 각자(刻字)가 있고, 구역별로 화훼와 나무를 구분하여 심었다.

이점은 담양 소쇄원이나 명옥헌, 대둔사 일지암에도 보이는 공통점이다.

 이것으로 호남 원림의 원형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이시헌 자신이 직접 백운동 14경을 노래한 후, 총괄해서 노래한 「총영(捴詠)」 한 수를 읽어보자.



松桂芬深薜荔門 솔과 계수 향기 깊고 벽려가 문이 되니
一區粧得小邱園 한 구역을 단장하여 작은 원림 얻었다네.
千峯靜立觀心靜 천봉은 고요히 서서 고요한 맘 지켜보고
萬瀑喧廻洗俗喧 만폭은 떠들썩 돌아 세속 시끄러움 씻어준다.
峒號華陽持贈物 골짝은 화양 은자 지녔던 물건으로 이름삼고
家在摩詰畵圖村 집은 왕마힐의 그림 속 마을일세.
琴書遺業生涯足 금서(琴書)의 유업(遺業)으로 생애가 족하거니
不羨桃源長子孫 도원(桃源)에서 자손 기름 하나도 안 부럽다.



5구는 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이 화양(華陽)에 숨어 살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고조(高祖)가 그를 만나러 갔다가 대체 산중에 무엇이 있길래 나올 생각을 않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는 다음 시에서 따왔다.

“산 속에 무엇이 있냐 하시니, 고개 위엔 흰 구름 많기도 하죠. 다만 혼자서 기뻐 즐길 뿐,

임금께 드리진 못한답니다. (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但可自怡悅, 不堪持贈君).”

골짜기의 이름이 백운동이란 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호인 자이당(自怡堂)도 바로 이 시에서 따온 말이다.

 

 

 

백운동과 월산작설차(月山雀舌茶)


이제 백운동 원림과 차와의 관련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앞선 시기 『백운세수첩』에 수록된 제가의 제영 속에는 차에 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백운동에서 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역시 다산 이후의 일이다. 다산이 해배되어 69세 나던 1830년 3월 15일에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는 예전에 한 차례 소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다산이 떡차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부분만 다시 소개한다.

 
 

 

 


이시헌이 다산의 편지를 다시 배껴 갈무리해둔 글씨.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 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 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잘 알아두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산은 이 편지에서 찻잎을 삼증삼쇄(三蒸三曬), 즉 세 번 쪄서 세 차례 말린 후 이를 절구에 곱게 빻아서 석천수(石泉水)에 개어 진흙처럼 짓이긴 후, 작은 떡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제다법을 제시했다. 다산이 주로 마신 차가 떡차임은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
필자가 이번에 새롭게 찾은 다산의 편지에도 백운동 이시헌에게 차를 부탁한 내용이 보인다.

나는 전처럼 몸이 좋지가 않다. 근래 들어서는 풍증마저 점차 더해져서 목 부분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더더욱 견딜 수가 없다. 차의 일은 이미 묵은 약속이 있었기에 이번에 다시 일깨워 준다. 좀 많이 보내주면 아주 고맙겠다.

자신이 풍증으로 인해 목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정황을 말하고 나서, 차를 약속대로 보내주기를 청했다.
 이왕 보내줄 바에는 좀 많이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말한 것이 재미있다. 이시헌이 해배 후에도 다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차를 만들어 두릉으로 보냈음을 알려준다.

이시헌은 자신의 문집 속에 차시를 몇 수 남겼다. 이를 통해서도 백운동 원림에서 이루어진 그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다.

白首無賴夢仙官 흰 머리로 뜬금없이 선관(仙官)을 꿈꿨지만
世人難逢强半歡 세상사람 기뻐함은 만나보기 어려웠네.
未幾昏眸妨識字 얼마 못가 눈 어두워져 글자 보기 힘이 들고
無多薄髮不勝冠 몇 안 되는 성근 터럭 관조차 못 쓰겠네.
雲牕睡罷尋蠹簡 구름 창에 잠 깨어나 묵은 글 뒤적이다
茶竈煙消煮龍團 다조(茶竈) 연기 잦아들 제 용단차(龍團茶)를 끓이누나.
時向停仙臺上望 정선대(停仙臺) 위 가끔 가서 위쪽을 올려 봐도
飛昇難得化羽翰 날개 돋아 신선 되어 날아오름 어려워라.

백운동 흰 구름 속 유거(幽居)에서 신선을 꿈꾸며 살아가는 나날을 노래했다. 흰 머리에 눈은 어둡고, 머리카락은 빠졌어도, 운창(雲牕)에서 옛 글을 뒤적이다 무료하면 다조에 용단 떡차를 끓여 마신다. 산보 삼아 집 앞의 정선대(停仙臺)로 올라가 멀리 월출산 구정봉을 올려다 보며 문득 날개가 돋아 훨훨 선계로 날아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을 노래했다.
또 「동려가 와서 밤중에 소동파의 시운으로[桐廬至夜拈坡詩韻]」 4수 중 제 3수의 5,6구에서는 “일곱 사발 차 마시자 막걸리가 생각나고, 삼첩의 시 지은 뒤 길게 노래 부르네.(茶七碗餘思薄酒, 詩三疊後且長家)”라 했다. 또 「파산이 와서 소동파의 시운으로[坡山至拈坡詩韻]」의 7.8구에서도 “일곱 사발 향차에 마음조차 담박하니, 석 되 술을 어이 굳이 동고(東皐)에서 사모하리.(七椀香茶心淡泊, 三升何必戀東皐)”라고 했다. 「실제(失題)」 3수의 제 2수 5,6구에서도 “시름 녹임 구태여 석잔 술이 필요없고, 근심 흩음 오히려 한 잔 차로 충분하리.(消愁未必三盃酒, 散慮猶須一碗茶)”라 한 것이 있다.

 

 




 

 

한편 집안에 전하는 이시헌의 친필 중에

 “월출산에서 나는 작설차 한 갑과 황초 두 자루를 부칩니다(月山所産雀舌茶一匣, 黃燭二柄付上)”라고 한 것이 있고,

이시헌의 아들 이면흠(李勉欽, 1824-1884)이 누군가에게 보낸 서찰 중에도

 “향명(香茗) 8갑(匣)을 삼가 드리오니, 정으로 받아주시길 바라나이다

.(香茗八匣伏呈, 領情伏望耳)”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두 글 모두 차의 단위를 갑(匣)으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떡차가 아닌 산차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백운동에서 만든 차는 다산 방식의 떡차와 갑에 넣어 포장하는 산차가 함께 만들어졌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백운동 대숲에서 나는 차는 대를 이어 전승되며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음다풍이 일제시대까지 이어져,

백운동 인근 월남리에 살던 이 집안의 이한영(李漢永, 1868-1956)이 만들어 판매한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나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로 그 맥이 이어졌다.

금릉(金陵)은 강진의 옛 이름이고, 월산(月山)은 월출산을 줄여 말한 것이다.

또 백운동 옥판봉에서 나는 차라는 뜻이다.

이곳 대숲에서 자라는 야생차를 따서 만든 백운동의 월산작설차(月山雀舌茶)는 지금도

 이효천 옹에 의해 5대조인 이시헌이 만들었던 옛 방식대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차시와 차생활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의 자는 혜길(惠吉) 또는 윤진(允進)이다. 우선(藕船)은 그의 호다.

 본관은 우봉(牛峰). 그의 문집 『은송당집(恩誦堂集)』은 1848년 북경에서 오찬(吳贊)이 펴냈다.

철종 13년(1862) 1월 20일에 60세의 나이로 종신직인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865년 8월 5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역관으로 전후 12차례 연행길에 올랐다.


추사의 제자였던 그는 세한도(歲寒圖)에 얽힌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름났다.

 열 두번 중국을 오가는 동안 중국에서 나는 온갖 명차(名茶)를 두루 맛보았다.

차에 대한 높은 안목을 바탕으로 생활 속에서 늘 차를 즐겼다.

 그의 문집 속에는 자신의 차생활을 노래한 차시가 적지 않다.

그의 「백산차가(白山茶歌)」는 백두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백산차의 실체를 증언하여,

우리 차문화사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띤다.

그밖에 당시 고려 고탑에서 발견된 용단승설차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는 한편,

 일본차와 중국차에 대한 시도 남겼다. 이 글에서 차례로 살펴보겠다.

 

 

 

 

 

우선 이상적 초상화와 중국에서 간행된 『은송당집』표지

 

 

일상 속의 차시(茶詩)

 

우선은 일상에서 차를 즐겼던 차인이다. 당시 조선에서 차는 호사스런 기호품이었다. 역관이었던 그는 중국을 드나들며 자연스레 차를 익혔다. 다음 「임한정(臨漢亭)」이란 작품을 읽어보자.

信宿江亭病欲蘇 강정(江亭)에서 이틀 묵자 병도 나으려는데
酒人吟子日相須 술꾼과 시인들이 날마다 기다린다.
漁梁蟹籪探消息 어살과 게 통발로 소식을 탐문하니
水榭雲廊闢畵圖 물가 정자 구름 회랑 그림인양 펼쳐졌네.
菰葉斜陽分曬網 향초 잎에 기운 볕은 말린 그물 나누고
棗花微雨映呼盧 대추꽃의 보슬비는 놀이판을 비추누나.
石泉新汲供淸瀹 돌 샘물 새로 길어 맑게 차를 다리려니
陸羽經中品酪奴 육우의 『다경』중에 낙노(酪奴)라 한 것일세.

임한정(臨漢亭)에서 술 마시고 시 지으며 이틀간 머물렀다. 어살과 게 통발을 설치해서 싱싱한 안주감을 잡아 올리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자에서 봄 풍경에 담뿍 취했다. 7, 8구에서는 그렇게 먹고 마시고 바둑 장기로 놀다가 돌샘물을 길어 차를 다리는데, 그 차가 바로 육우가 『다경』에서 낙노(酪奴)라고 품평했던 고급차라고 하였다.


중국 사신길에 올라서는 도중에 숙소가 여의치 않아 노숙을 하면서도 차를 끓여 마셨다.

「금석산모설(金石山暮雪)」에 보인다.



鴨綠江頭雪 압록강 어귀에 눈이 내리니
飛飛送遠行 흩날려 먼 여행길 전송한다네.
素心千里隔 본디 마음 천리나 떨어져 있어
華髮一朝生 흰 머리털 하루 아침 생겨나누나.
漸覺征衣重 나그네 옷 무거움을 점점 깨닫자
還憐去路明 가야할 길 분명함이 외려 슬프다.
今宵中野宿 오늘 밤 들판에서 잠을 자면서
祗好試茶烹 차 끓여 마심만 다만 좋아라.



국경을 막 넘어 중국 땅으로 들어서는데 압록강 어귀에 눈발이 흩날린다.

 요동벌 건너 북경까지 가는 나그네를 전송하는 손길인 것 같다.

 신산스런 나날 속에 흰 머리털은 날로 늘어만 가고, 나그네 옷은 하루가 다르게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는 이 추운 밤에 들판에서 노숙을 하면서 모닥불과 따뜻한 한잔 차가 주는 위안에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런가 하면 심양에 도착해 포도주로 손님 대접을 받고, 이어 함께 차를 마시면서 지은

「심양에서 겸수에게 보이다(瀋陽示謙受)」의 7, 8구에서는 “화로 향과 차 사발에 한가한 운치 넉넉하여,

산창에서 연침(燕寢)하던 그때인 줄 알았네. 爐香椀茗饒閒趣, 認得山窓燕寢時”라 노래하였다.

또 「내가 오랜 병으로 추위를 겁내는데 집이 너무 썰렁해서 새로 가리개를 마련해

그 위에 제하다(余久炳怯寒, 堂宇疎冷, 新設障格, 因題其上)」란 시의 둘째 수 3,4구에서도

“만약에 세상 맛의 농담(濃淡)을 따지려면, 고주(羔酒)도

 마침내 설수차(雪水茶)만 못하리라. 若將世味商濃淡, 羔酒終輸雪水茶”고 했다.

고주는 양고주(羊羔酒)라고도 부르는 명주(名酒)다.

하지만 이 짙은 맛의 양고주도 눈을 녹여 끓인 눈물차의 담백한 맛을 따라올 수 없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중양절 이튿날 삼태산장에 들러(重陽之翌, 過三台山莊)」란 시를 읽어본다.

 

我來展重九 내가 오자 중양절이 막 지났는데
菊未有黃華 국화 여태 노란 꽃을 못 피웠다네.
林㬉收紅柿 따스한 숲 홍시를 따서 거두고
泉香試綠茶 향그런 샘 녹차를 끓이는도다.
何妨近城市 성시에 가까운 것 무에 문제리
卽此是山家 바로 이곳 틀림없는 산가(山家)인 것을.
少酌耽佳趣 조금 따라 좋은 운치 한껏 즐기며
留連坐暮鴉 땅거미 내리도록 머물러 앉네.



삼태산장의 국화는 중양절이 지났는데도 아직 노란 꽃을 피우지 못했다.

숲 속에선 감나무에 빨갛게 익은 홍시를 따고, 나그네는 샘물을 길어와 녹차를 끓인다.

 이곳이 근교라 성시에서 가까워도, 주변의 운치는 산가(山家)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차를 마신 뒤에도 남는

 흥취가 거나하여 술잔에 술을 조금 따라 손에 들고서 점차 땅거미 속으로 지워져 가는 사물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과자인사(過慈仁寺)」의 5,6구에서는 “작은 방 차향기에 봄 눈이 따스하고,

 고단(古壇)의 푸른 솔에 석양이 둥글다. 小院茶香春雪暖, 古壇松翠夕陽圓”고 노래하기도 했다.


「강주도중(江州途中)」 5수 중 제 4수의 풍경을 또 읽어보자.



靑藜扶野老 청려장(靑藜杖) 들 늙은이 부축하는데
黃犢守山家 누렁소가 산집을 지키는구나.
樵徑穿林細 숲 사이 가늘게 나무꾼 길 나있고
村容逐岸斜 마을 모습 언덕 따라 비스듬하다.
鹿眠谿畔月 냇가 달빛 받으며 사슴은 자고
蠭釀石間花 바위 사이 꽃꿀을 벌이 따누나.
暫向松陰憩 솔그늘서 쉬려고 잠시 향하여
淸泉手煮茶 샘물 길어 손수 차를 다린다.



사행 길에 한적한 시골 마을을 지나다 마주친 풍경을 노래했다.

청려장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보이고, 그 곁에는 누렁소가 음머하며 산집을 지킨다.

 나무꾼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금시라도 들릴 듯한 작은 소롯길이 숲 사이로 나 있다.

 사슴은 시냇가 달빛 아래 달고 편안한 잠이 들겠지. 꿀벌은 잉잉대며 바위 사이에서 꽃꿀을 빨기 위해 부산스럽다.

나는 그 솔그늘로 찾아가 맑은 샘물을 길어와 직접 차를 달인다.

 비록 눈앞의 풍경에 촉발되어 그려본 광경이지만, 그가 생활 속에서 차를 어찌 사랑하고 얼마나 아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음에 읽을 「우제(偶題)」도 중국 사행 시에 지은 작품이다.



石銚茶烟靑縷縷 돌솥의 차 연기는 오리오리 푸른데
繁陰如水日欹午 짙은 그늘 물과 같고 날은 뉘엿해졌구나.
臥聽啼鳥不開門 새 소리 누워 듣다 문도 열지 않으니
椶葉無風桐葉雨 종려잎엔 바람 없고 오동잎엔 비 내린다.



차솥에선 푸른 연기가 오리오리 피어오른다. 대낮의 그늘은 마치 고인 물 같다.

그는 문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서 새 울음소리를 듣는다. 창밖의 종려 나무 큰 잎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도 없는데, 후두둑 오동잎 위로 빗방울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선의 차시는 이렇듯 차를 배경에 둔 아련한 풍경을 선사한다.

 

 

 

 

 

 

이방운(李昉運)의 「광산상화도(匡山常花圖)」. 개인 소장.

 

 

차를 통한 삶의 성찰

 

우선에게 차는 단지 풍경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성찰과 관조의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다음의 「야좌구점(夜坐口占)」시가 그렇다.

小罏文火手煎茶 작은 화로 은근한 불 손수 차를 끓이는데
落月娟娟竹外斜 지는 달 곱게곱게 대숲 밖에 기우누나.
半夜紙窗春氣暖 한밤중 종이 창에 봄기운이 따스해서
水仙初放一囊花 수선화 한 떨기 꽃 처음으로 피었네.

작은 화로의 문화(文火)를 말한 것에서 우선이 차를 끓일 때 화후(火候)의 조절에도 세심하게 신경 썼으리만치 차에 대한 이해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차 심부름 하는 차동(茶童)도 곤한 잠이 들었다. 혼자 앉아 있던 그는 문득 차 생각이 일어 손수 찻물을 얹는다. 은근한 불에서 보글보글 차가 끓는다. 문득 밖을 내다보면 지는 달빛은 대숲 너머로 고운 빛을 흘리며 사위어 간다. 겨우내 서탑 위 수반에 놓아둔 수선화 구근이 따스한 화로의 온기와 차 연기의 훈김을 쐬더니, 마침내 그 향기로운 꽃 주머니를 부끄럽게 살며시 열었다. 작은 화로의 차 끓는 소리, 대숲 사이로 부서지는 달빛, 따스한 봄밤의 방안, 수줍은 수선화 향기, 생각만 해도 행복한 풍경이다.


그런가 하면

「윤 5일, 괴로운 비에 밤새 잠 못들다. 이때 각기병이 다시 도졌다(閏五苦雨, 終夜不寐, 時脚氣復作)」란

시의 7구, “등롱 등불 깜빡깜빡 차 연기 스러지고 篝燈耿耿茶烟歇”와 같은 구절에서는

깊은 밤 병으로 잠 못 들며 오두마니 앉아 외론 등불과 차 연기를 벗 삼은

그의 깊은 사색의 시간이 엿보인다.


다시 한수를 더 읽어본다. 제목은 「양한(養閒)」이다.



養閒無物與心違 한가로움 기르니 걸리는 물건 없어
今是幡然悟昨非 이제야 화들짝 지난 잘못 깨닫네.
蕉葉似雲高覆屋 파초잎 구름인양 집을 높이 덮었고
桐花如雪細侵衣 오동꽃 흰눈처럼 옷에 살풋 스며든다.
倦眠不覺茶初熟 곤한 잠 깨지 않고 차가 막 익으니
卻掃何妨鳥亦稀 다 치운 들 무슨 상관 새 조차 드물다오.
分付園丁樵汲外 하인에게 나무 하고 물 긷는 일 외에는
終年勿許啓雙扉 일년 내내 사립문을 못 열게끔 분부하네.



늘 부산스레 길 위에서 종종거린 삶을 돌아보는 각성을 담았다.

한가로움을 기른다는 제목에서 차와 함께 하는 조용한 삶에 대한 열망이 느껴진다.

 파초잎은 지붕 위로 일산을 드리우고, 흰 눈 같은 오동꽃 향기가 은은하다. 차가 알맞게 끓었지만 곤한 잠이 더 달다

. 새조차 오지 않는 이 적막 속에서 번잡한 세상사를 저만치 밀쳐두고, 내 마음 속에 한가로움을 더 깃들이고 싶다.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아예 사립문을 열지도 말라고 분부하는 마음 속에 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과 만난다.

 아마 이때 그는 사행을 마치고 돌아와 칩거 중이었던 모양이다.


차를 통한 내면 성찰은 다음 「추회잡시(秋懷雜詩)」 중 제 2수와 제 8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古木淸谿繞短籬 고목과 맑은 시내 짧은 울을 둘러있고
邨深門巷自逶迤 마을 깊어 골목길은 구불구불 돌아가네.
尋詩茶畔香初候 차 마시고 향 피우며 싯귀를 찾다가
歀客花開酒熟時 꽃 피고 술 익어 손님을 접대했지.
小別經年芳草怨 작은 이별 해를 넘겨 방초를 원망하고
幽盟指水白鷗知 깊은 맹세 물 가리키니 백구도 안다는 듯.
爛柯昨夢觀碁罷 간밤 꿈에 바둑 구경 도끼 자루 ?었나니
誰道仙家日月遲 선가의 일월 더딤 그 누가 말했던가.



깊은 골목 안쪽의 호젓한 거처에서 날마다 하는 일은 차 끓이고 향을 사르며 시를 짓는 일이다.

 꽃 시절에 술이 굼실 익었을 제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니 그 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

하지만 봄날 헤어진 벗과 자연을 벗삼아 노닐자던 약속은 가물가물 가을이 다 지나도록 지키지 못했다.

 간밤 꿈 속에 만나 만단의 정회를 나누었지만, 이 가을 문득 돌아보는 마음은 슬프다.



畵贉書籤整復橫 그림 비단 책의 찌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燕居偏愛小窗明 사는 거처 작은 창 밝음 몹시 아끼노라.
瓦當借拓長生字 와당 빌려 장생(長生)이란 글자를 탁본하고
茶品傳看勝雪名 다품(茶品)은 승설(勝雪)이란 이름이 전해 온다.
海內親朋同好古 해내(海內)의 친한 벗들 모두 옛것 좋아하니
少時風雅更關情 젊은 시절 풍아(風雅)가 몹시 맘을 끄는구나.
吳山楚水非天上 오산(吳山)과 초수(楚水)는 천상이 아니건만
矯首年年候雁聲 머리 들고 해마다 기러기 소리 기다리네.



「추회잡시(秋懷雜詩)」 제 8수다. 방안엔 그림 두리마리와 책의 찌가 가지런히 시렁에 얹혀 있다.

작은 방엔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그저 그 볕 속에 가만 앉아만 있어도 행복하다.

한나라 때 장생(長生)이란 각자(刻字)가 있는 와당을 빌려 탁본하고,

중국에서 구해온 승설차(勝雪茶)를 달여 마시는 운치를 얘기했다.


다음에 읽는 「읍차(挹茶)」시는 호흡이 비교적 길다.



小盌挹茶水 작은 찻잔 찻물을 따라 내자니
千漚何蕩發 일천 거품 어이 저리 막 일어나나.
圓光散如珠 둥근 빛 흩어져 구슬 같은데
一珠一尊佛 구슬마다 한 분의 부처님 있네.
浮生彈指頃 뜬 인생 손가락 튕기는 사이
千億身怳惚 천억의 몸뚱이가 황홀도 하다.
如是開手眼 이처럼 손과 눈이 활짝 열리고
如是分毛髮 이같이 터럭이 나뉘는도다.
悟處齊點頭 깨달은 곳 고개 함께 끄덕이다가
參時同竪拂 참선할 땐 동시에 고개 치든다.
誰師而誰衆 그 누가 스승이고 제자이던가
無我亦無物 아(我)도 없고 물(物) 또한 아예 없다네.
茫茫恒河沙 아득한 항하사(恒河沙) 같은 중생들
普渡非喚筏 다 건넘은 뗏목을 부름 아닐세.
泡花幻一噓 거품 꽃 한번 불자 다 스러지고
空色湛片月 공(空)과 색(色)에 조각달만 맑게 빛난다.
三生金粟影 삼생(三生)의 금속영(金粟影) 여래께서는
坐忘何兀兀 좌망(坐忘)함 어찌 그리 오똑하던가.
萬緣了非眞 온갖 인연 애오라지 참이 아니니
焉喜焉足喝 어이 족히 기뻐하며 어이 화내리.
經傳陸羽燈 『다경』으로 육우(陸羽)는 등불 전하고
詩呪玉川鉢 차시(茶詩)로 노동(盧仝)은 의발 이었지.



차를 끓여 따르니 보글보글 거품이 잔에 가득하다. 가만 보니 거품 하나하나가 영롱한 구슬이다.

그 구슬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구슬 하나마다 부처님이 한분씩 들어있지 않은가?

마치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세음보살이 거품 하나마다 나투신 것만 같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일천 거품 속의 부처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고개를 빳빳이 들면 거품 속의 부처님도 나를 따라 한다.

물방울 속의 저 부처님은 나인가 대중인가? 아(我)인가 물(物)인가?

항하사(恒河沙), 즉 인도 갠지즈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중생들을 모두 다 건져낼 뗏목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차라리 거품을 한번 후 불어서 허환(虛幻) 속으로 되돌릴 밖에.

거품을 불어 걷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치를 드러내니 남은 것은 금속영(金粟影) 여래와 같이 오롯한 내 모습 뿐이다.

 그러니 한바탕의 허깨비 놀이를 두고 기뻐할 것도 화낼 일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육우는 『다경』을 지어 전등(傳燈)의 불을 밝혔고, 노동(盧仝)은 「칠완차가(七碗茶歌)」를 남겨 의발을 이었다.

자신 또한 이 시를 통해 차삼매의 경지에서 얻은 홀연한 깨달음을 드러내 보였다.


실제 차탕(茶湯)이나 약탕(藥湯) 위에 뜬 거품에서 수천 수만의 부처를 발견하고,

 이를 깨달음의 과정과 관련짓는 것은 연암 박지원의 「주공탑명(麈公塔銘)」에 이미 보인다.

 차탕 위에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 우선이 마신 차는 우려내는 침출 방식이 아니라 덩이차를 차맷돌에 갈아 가루 내서

차탕으로 펄펄 끓여 마신 것임을 알 수 있다. 휘저어 거품을 낸 말차(抹茶) 종류는 아닌 듯하다.



竹罏石銚雅相宜 죽로(竹罏)와 돌솥이 서로 썩 잘 어울리니
活火新烹雪水時 활화(活火)로 눈 녹인 물 새로 끓여 낼 때일세.
一榻風輕縈鬢影 방안에선 미풍이 살적 밑을 스쳐가고
重簾雨細綴花枝 발 저편 보슬비는 꽃 가지를 적시네.
淸於煮酒初回夢 뎁힌 술 보다 맑게 꿈에서 막 깨나니
韻似燒香半入詩 향 사른 듯한 운치 시속에 반쯤 드네.
領略幽情何處好 그윽한 정 어느 곳이 좋은 줄 알겠던가
蒼松陰裏碧溪涯 푸른 솔 그늘 아래 푸른 시내 물가로다.



「다연(茶煙)」이란 작품이다. 대나무로 겉을 두른 작은 다로(茶罏)에 돌솥을 얹었다.

눈 녹인 설수(雪水)를 넣고 활화(活火)로 차를 끓인다. 찻물 끓는 소리가 마치 솔바람 소리 같다.

눈을 가만 감으면 가벼운 미풍이 살적 밑을 살며시 스쳐지나는 듯 하다.

눈을 뜨면 아무 일도 없고, 주렴 너머로 보슬비에 꽃 가지가 젖고 있다.

한 모금 가만히 머금어 내리자 내 속으로 푸른 솔 그늘 아래 푸른 시내가 흘러간다. 촉촉하다.

 

 

 

 

 

우리 차와 외국 차에 대한 기록

 

우선은 차생활을 노래한 시 말고도 우리 차문화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먼저 읽을 시는 「백산차가, 사박경로(白山茶歌, 謝朴景路)」이다. 모두 7언 24구의 장시다.



我曾九泊燕河槎 내 일찍이 아홉 차례 연경 행차 참예하여
嘗盡天下有名茶 천하의 이름난 차 죄다 모두 맛보았지.
十二街頭茶博士 열 두 거리 길가에는 차박사(茶博士)들 넘쳐나서
賣茶多於賣漿家 음료 파는 가게보다 차 가게가 더 많다네.
歸臥敝廬談龍肉 돌아와 집에 누워 용육(龍肉)을 얘기하다
手把茶經空咨嗟 손에 『다경(茶經)』 들고서 공연히 탄식한다.
湖僧竹露出新製 호남 스님 죽로차(竹露茶) 새 제품을 내 놓으니
時人往往如嗜痂 부스럼 딱지 먹듯 지금 사람 좋아하네.
秪應所貴吾鄕物 귀하게 여겨짐은 우리 것임 때문이니
終始香味澁齒牙 애당초 맛과 향은 이빨 사이 떫기만 해.
不咸一網感君惠 불함산(不咸山)의 일강차(一綱茶)를 그대 줌에 감사하니
天寒肺病當三椏 찬 날씨 폐병에는 인삼만큼 효과 있네.
誰知此士乃有此 이 땅에도 이런 것이 있을 줄 뉘라 알리
譬如人才出荒遐 비유컨대 인재가 먼 시골서 나옴인양.
但恨難得中泠水 안타깝다 중령수(中泠水)를 얻기야 어렵지만
無勞遠購武夷芽 굳이 멀리 무이차(武夷茶)를 사올 필요 전혀 없네.
君不見 그대 보지 못했나
江南御茶不入貢 강남 땅의 어차(御茶)를 공물로 못 바치자
旗槍埋沒隨蟲沙 창기(槍旗)가 매몰되어 쓸모없이 되었음을.
又不見 또 보지 못했나
泊汋年年通百貨 남쪽 배가 해마다 온갖 물품 교역해도
今秋無箇水仙花 올 가을엔 수선화가 하나도 없는 것을.
茶話故人散如雨 다화도(茶話圖) 그린 벗은 비처럼 흩어지고
烽烟已入天津涯 봉화 연기 어느새 천진(天津) 물가 이르렀네.
何幸吾生享多福 내 인생에 많은 복을 누림 정녕 다행이니
煎茶覓句送年華 차 달이고 시 지으며 세월을 보내리라.



1853년 박경로가 보내준 백산차(白山茶)를 받고서 답례로 지어 보낸 시다.

 처음 1-6구는 자신의 중국차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전후로 아홉 차례나 북경을 다녀오면서,

 천하에 이름난 차는 모두 맛보았다.

 거리마다 찻집에는 차박사(茶博士)가 넘쳐나고, 음료를 파는 가게 보다 차 파는 가게가 더 많아,

차 마시는 풍습이 일상 속에 보편화된 중국의 정황을 말했다. 귀국해서 집에 누워 있노라면

그곳에서 마셨던 용단차의 향기가 혀끝에 맴돌아 공연히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뒤적이며 안타까운 탄식만 했노라고 했다.


7, 8구에서는 호남의 스님이 새로 죽로차(竹露茶)를 만들면서 지금 사람들이 그 차에 대해 벽(癖)에 들린듯이 열광한다고 했다.

호남 스님은 바로 초의(艸衣)를 두고 한 말이다. 초의가 구증구포의 방식으로 법제한 떡차를 죽로차라 한 것은 이미

이유원(李裕元)이 그의 「죽로차(竹露茶)」에서 상세히 노래했다. 추사나 자하, 금령 박영보 등이 초의차를 맛보고

열광하여 초의에게 전다박사(煎茶博士)의 칭호를 선사하고, 「남차병서(南茶幷序)」등의 작품을 준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우선은 초의차의 맛과 향이 이빨 사이에 떫은 맛만 남길 뿐

중국의 고급한 차와는 견줄 바가 못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차여서 귀하게 여긴 때문이라고 했다.


11구에서 16구까지는 박경로가 준 불함산(不咸山) 즉 백두산에서 난 백산차(白山茶)에 대한 예찬이다.

박경로가 불함산에서 난 일강차(一綱茶)를 보내왔다.

추운 겨울 기침을 가라앉히는 데 이 차가 인삼탕만큼 효과가 있다는 말을 적고,

이 땅에서 이처럼 좋은 차가 나는 줄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치 뛰어난 인재가 먼 변방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했다.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으로 이름 높은 중령수(中泠水)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굳이 비싼 돈을 치러가면서 강남의 무이차(武夷茶)를 살 필요가 없으리만치

백산차의 맛과 향이 뛰어남을 칭찬했다.


17구에서 끝까지는 백산차를 끓여 마시면서 자신의 근황과 차생활을 담담하게 술회했다.

송나라 때 강남에서 나던 어차(御茶)를 공물로 바치지 못하게 하자,

차나무 재배를 하려 들지 않아 좋은 차밭이 모두 망가지고 말았다.

 또 올 가을엔 강남에서 배가 올라왔어도 수선화 구근조차 한 뿌리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니 차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21구는 벗 정치형(程穉蘅)이 그려 선물한

「다화도(茶話圖)」 얘기를 꺼내, 예전 차를 함께 마시며 얘기 나누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준 벗도

이제는 소식이 끊겼고, 강남 쪽에선 전쟁 소식만 들려오는 답답한 현실을 환기했다.

 이러구러 좋은 차를 구해 마실 일은 점점 더 멀어져 안타깝기 짝이 없었는데,

생각지 않게 박경로가 보내준 백산차를 마시게 되어 더없는 복을 누릴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백산차의 실체다. 백두산 지역은 차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백산차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백산차의 존재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이는 백두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진달래과 또는 석남과의 상록 관목으로, 한 겨울 흰 눈을 뚫고 솟은 어린 차 잎을 채취해서 만든다.

 솔잎향과 박하맛이 어우러진 독특한 향기가 난다. 잎은 긴 타원형이다. 최근에는 옛 문헌과 우선의 이 시를 근거로 상품화 되었다.

「백산차가」는 자칫 잃어버릴뻔 했던 백산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 차문화사의 소중한 증언이다.


다음에 읽을 「기용단승설(記龍團勝雪)」은 석탑에 봉안된 고려 때 용단승설차에 대한 진귀한 기록이다.

용단차 한 덩이는 표면을 용의 형상으로 둥글게 만들었다. 비늘과 수염이 은은히 일어나고,

옆에는 ‘승설(勝雪)’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해서체의 음각문이다.

건초척(建初尺)으로 가늠해서 사방 한 치인데 두께는 그 절반이다.

근래 석파 이공(李公)께서 호서의 덕산현에 묘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시대의 옛 탑을 찾아가

소동불(小銅佛)과 니금경첩(泥金經帖), 사리와 침향단(沈香檀) 및 진주 등과

용단승설(龍團勝雪) 4덩이를 얻었다. 근래 내가 그 중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귀전록(歸田錄)』를 살펴보니, “경력(慶歷) 연간에 채군모(蔡君謨)가 처음으로

소품용차(小品龍茶)를 만들어서 바치면서 소단(小團)이라 하였다”고 했다.

『잠확류서(潜確類書)』에는 “선화(宣和) 경자년(1120)에 조신(漕臣) 정가간(鄭可簡)이 은선빙아(銀線氷芽)를 처음 만들었다.

 사방 한 치의 새 덩이로 만들었는데, 작은 용이 그 위에 꿈틀꿈틀 서려 있어 이름을 용단승설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또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살펴보니, “고려의 토속차는 맛이 쓰고 떫어 도무지 마실 수가 없다.

 다만 중국의 납차(蠟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만을 귀하게 여긴다

. 직접 하사품으로 받은 것 외에 장사꾼도 통상하여 팔므로 근래들어 자못 차 마시기를 좋아하고,

또한 차도구도 갖추었다”고 했다. 대개 인종 때에는 이미 소용단(小龍團)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승설(勝雪)이란 이름은 송나라 휘종 선화(宣和) 2년(1120)에 비롯되었다.

하지만 서긍(徐兢)은 선화 5년 계묘(1123)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이다.

중외의 풍속과 물산에 대해 이미 낱낱이 다 듣고 보았던 까닭에 이처럼 말했던 것이다.

또 고려의 승려 의천(義天)과 지공(指空), 홍경(洪慶)과 여가(與可)의 무리가 앞뒤로 바다를 건너

 도를 묻고 경전을 구하려고 송나라를 왕래한 것이 계속 이어졌으니,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때 이들의 무리가 반드시 다투어 이름난 차를

구입해서 불사(佛事)에 바쳤고, 심지어는 석탑 안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7백여년이 지나서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또한 기이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릇 물건 중에 가장 쉽게 부패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음식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

런데도 두강차(頭綱茶)의 한 종류가 우리나라 땅에까지 흘러 전해져서, 그 수명은 흰 매를 그린 그림과 나란하고,

 보배로움은 수금천보(瘦金泉寶) 보다 더 낫다. (내가 전부터 선화 연간의 매 그림과 숭녕중보(崇寧重寶) 몇 매를

소장하고 있는데, 바로 휘종 황제가 직접 쓴 수금체(瘦金體)다.) 지금에 이르러 예림(藝林)의 훌륭한 감상 거리가 되니,

어찌 신물(神物)이 이를 지켜 남몰래 나의 옛 것 좋아하는 벽을 도우심이 아니겠는가?

이에 전거를 뒤저서 동호인에게 알린다.


앞 대목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대원군 이하응은 1846년 충남 덕산에 수덕사 인근 가야산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를 불태우고, 가야사 5층석탑을 헌 뒤 석탑 자리로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장했다.

이때 고려 때 절인 가야사 5층 고탑에서

소동불(小銅佛)과 니금경첩(泥金經帖) 및 사리와 침향단(沈香檀) 등을 얻었는데,

놀랍게도 이와 함께 700년 전의 용단승설차 네 덩이를 얻게 되었던 모양이다.

우선은 이 중 하나를 얻어, 용단승설차에 대한 여러 문헌을 고증하여 정리했다.


우선은 이때 발견된 용단승설차의 외형을 이렇게 묘사했다. 단차(團茶)로 표면에 용의 형상을 새겼고,

 비늘과 수염이 희미하게 보였다. 곁에는 승설(勝雪)이란 두 글자가 음문(陰文)의 해서체로 찍혀 있었다.

크기는 건초척(建初尺)으로 지름이 한 치 가량이고 두께가 그 절반 쯤된다고 했다.

건초척은 기원 81년 후한의 장제(章帝)가 제정한 것이니 한 척이 23.58cm다.

그러니 한 치는 2.4cm 가량이다. 네모난 방형차로 표면에 용을 새기고 측면에 승설이란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를 본 우선은 송나라 구양수의 『귀전록(歸田錄)』과 명나라 진인석(陳仁錫)의 『잠확류서(潜確類書)』,

그리고 고려 때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차례로 인용하여,

 이 차가 송나라 휘종 선화 2년(1120)에 중국에서 정가간(鄭可簡)이 만들어 바친 그 용단승설차가

 틀림없다고 고증했다. 또한 당시 고려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마실 수가 없을 정도라 했으니,

당시 중국에 유학했던 의천과 지공 같은 고승들이 중국에서 구해와서 부처님 전에 바치고

 탑 속에 넣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송나라 웅번(熊蕃)이 찬한 『선화북원공차록(宣和北苑貢茶錄)』에 보면,

 “선화 경자년에 조신(漕臣) 정가간(鄭可簡)이 처음으로 은선빙아(銀線氷芽)를 만들었다.

대개 장차 이미 익혀 비빈 차싹을 다시 벗겨내어 다만 그 속 심지 한 줄기만 취하여 진귀한 그릇에다

맑은 샘을 담아 이를 적시면 환하게 빛나고 결백한 것이 마치 은실과 같다.

그 제법은 사방 한치의 신과(新銙)로 작은 용이 그 위에 꿈틀대고 있었으므로 이름하여 용단승설이라 하였다

(宣和庚子歲, 漕臣鄭公可簡, 始創爲銀線水芽. 盖將已揀熟芽再剔去, 秪取其心一縷, 用珍器貯淸泉漬之,

光明瑩潔, 若銀線然. 其製方寸新銙, 有小龍蜿蜒其上, 號龍團勝雪)”고 분명히 적고 있다.

 바로 이 실물이 고려 때 탑 속에서 7백년을 견디다가 온전한 상태로 네 개나 한꺼번에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용단(龍團)이 네모난 단차에 용을 새겨서 붙은 이름이고,

승설(勝雪)은 가려뽑은 찻잎을 비벼 익힌 뒤 다시 껍질을 벗겨서 마치 은실처럼 가는 흰 줄기만 취해,

그 흰 빛깔을 두고 붙은 이름임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용단승설은 고려 중기 차문화의 융성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에 고려의 고탑에서 7백년 만에 발견된 용단승설차 네 덩이의 존재는 참으로 놀랍다.

 실물이 지금껏 남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은 장시 「백산차가」를 남겨, 백두산에서 생산되는 백산차의 존재를 내외에 알렸고,

또 「기용단승설(記龍團勝雪)」을 통해 1120년에 송나라에서 생산된 용단승설차가

 700년의 세월을 견뎌 고려 때 고탑에서 네 덩이나 출현한 사실을 증언으로 남겼다.

 우리 차문화사의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우선은 또 자신이 직접 마신 중국차와 일본차에 대해서도 작품을 남겼다.

먼저 「접암(蝶菴) 비부가 송차(淞茶)를 부쳐오다(蝶菴比部寄餉淞茶)」란 작품을 읽어본다.

 

白甀封題綠雪芽 흰 항아리 봉하여 녹설아(綠雪芽)라서 써서
郵筒迢遞返星槎 멀리 사신 오는 편에 우통(郵筒)으로 보내왔네.
夢逈穀雨淞江路 곡우 시절 송강(淞江) 길은 꿈 속에 아득한데
臥聽松風洌水涯 누워서 열수(洌水) 물가 솔바람 소릴 듣네.
七盌試新如吸露 일곱 잔 새 차 맛은 감로(甘露)를 마시는듯
一樽憶昨共籌花 한동이 술 꽃가지 꺾어 마시던 때 생각나네.
更爲後會知何日 다시 후회(後會) 가질 날이 그 언제이리요
撥盡爐灰賦木瓜 화로의 재 뒤적이며 목과(木瓜) 시 지을 날이.

 

「접암(蝶菴) 비부가 송차(淞茶)를 부쳐오다(蝶菴比部寄餉淞茶)」란 작품이다.

접암이란 호를 가진 비부(比部)의 관리가 백자 항아리에 「녹설아(綠雪芽)」란 이름을 부쳐

 송강(淞江) 특산의 명차를 북경에서 서울로 우편에 부쳐왔다.

그 깊은 우정에 감격하여 서둘러 봉함을 열자, 송강에서 곡우 시절에 햇차 딸 때의 배릿한 향이 꿈결처럼 떠오른다.

한강 가에 누워서 송강차 찻물 끓는 소리를 듣는다.

노동(盧仝)의 칠완차(七椀茶)를 연이어 마시자 마치 감로수를 마신 듯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끝에서는 언제나 다시 만나 화로의 식은 재를 뒤적이며 그대의 경거(瓊琚) 같은 작품에

 내 투박한 목과(木瓜) 시로 화답할 날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아쉬워 했다.

 

 
 

 

 

 

안중식의 「고사방우」개인 소장.

 

 

 

다음은 「김소당이 부사산차(富士山茶)와 차호(茶壺)를 주었는데 모두 일본 물건이다.(金小棠惠富士山茶及茶壺, 皆日本物也)」라는 시다. 소당(小棠)은 유명한 서화가인 김석준(金奭準, 1831-1915)이다. 우선은 후배인 김소당이 일부러 구해서 보내준 일본 후지산에서 나는 차와 차호에 대해 각각 한 수 씩 시를 남겼다.

徐巿祠前野草花 서불(徐巿)의 사당 앞 들풀에 꽃이 피니
三山何處有仙家 삼산(三山) 어드메에 선가(仙家)가 있단말가.
可憐秦帝求靈藥 가련타 진시황이 영약을 구한데도
爭似先生一椀茶 어이해 선생의 일완차(一椀茶)만 하리오.

부사산차를 노래한 첫 수다. 서불은 진시황의 명에 따라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명을 태우고 불로초를 찾아 삼신산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신선은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고, 불로초도 찾지 못해 서불은 그저 일본에 눌러 앉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사산에서 나는 이 훌륭한 차라면 굳이 진시황이 그토록 찾으려 했던 불로초 못지 않다고 했다. 다시 이어지는 일본 차호를 노래한 시다.

卵色瓷壺天下一 달걀빛 자호(瓷壺)는 천하에 으뜸인데
일본인은 그릇을 정밀하게 잘 만드는 자를 일컬어 ‘천하제일’이라고 한다.(日本人稱製器之精良者曰天下一)
手煎新茗滌煩惱 손수 새 차 달여내니 번뇌가 씻겨지네.
松風活火深深夜 송풍(松風)과 활화(活火)로 깊고 깊은 밤중에
似聽殘潮海上音 썰물에 바다 물 소리 들리는 듯 하여라.

계란 빛깔의 자호는 천하제일로 꼽는 장인이 만든 절품(絶品)이다. 이 차호에다 부사산차를 넣고 직접 차를 끓이니, 가슴 속에 찌든 번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다. 깊은 밤중 시인은 솔바람 소리 같은 찻물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저 멀리 바닷물 썰려가는 파도소리를 듣는다.


이상 우선 이상적의 차시를 통해 그의 차생활과 우리 차문화사의 증언이 될 중요한 언급들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그는 일상 속에서 차를 즐겼고, 차를 통해 인생을 음미하고 삶을 성찰할 줄 알았던 차인이었다.

또 그의 기록을 통해 백산차(白山茶)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고려 고탑에서 700년 만에 나온 용단승설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소중하고 의미있는 기록이다.

 이밖에 중국의 송차(淞茶)와 일본의 부사산차(富士山茶) 및 일본 차호(茶壺) 등에 관한 시를 남겨,

당대 활발해진 차문화의 교류상을 밝혀 주었다.  

 

 

가야사 탑에서 나온 700년 된 용단승설차

 

앞에서 우선 이상적이 남긴 고려 때 조성한 석탑에 봉안되었다가

우연히 발견된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이 글을 읽고, 필자가 찾아낸 용단승설차에 관한 두 기록을 함께 묶어 읽어 보기로 한다.

 

 

이상적의 「기용단승설」

 

먼저 이상적이 남긴 글을 읽어보자. 우연히 고려 때 고탑에서 나온 용단승설차를 얻은 뒤 문헌 고증을 통해 그 차의 연원을 추적한 내용이다.

용단차 한 덩이는 한면에 용의 형상을 만들어, 비늘과 수염이 은은히 일어났다. 옆에는 ‘승설(勝雪)’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해서체의 음각문이다. 건초척(建初尺)으로 가늠해서 사방 한 치이고, 두께는 그 절반이다. 근래 석파 이공(李公)께서 호서의 덕산현에 묘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시대의 옛 탑을 찾아가 소동불(小銅佛)과 니금경첩(泥金經帖), 사리와 침향단(沈香檀) 및 진주 등과 용단승설(龍團勝雪) 4덩이를 얻었다. 근래 내가 그 중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귀전록(歸田錄)』을 살펴보니,
 “경력(慶歷) 연간에 채군모(蔡君謨)가 처음으로 소품용차(小品龍茶)를 만들어서 바치면서 소단(小團)이라 하였다”고 했다. 『잠확유서(潜確類書)』에는 “선화(宣和) 경자년(1120)에 조신(漕臣) 정가간(鄭可簡)이 은선빙아(銀線氷芽)를 처음 만들었다. 사방 한 치의 새 덩이차를 만들었는데, 작은 용이 그 위에 꿈틀꿈틀 서려 있어 이름을 용단승설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또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살펴보니, “고려의 토속차는 맛이 쓰고 떫어 도무지 마실 수가 없다. 다만 중국의 납차(蠟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만을 귀하게 여긴다. 직접 하사품으로 받은 것 외에 장사꾼도 통상하여 팔므로 근래 들어 자못 차 마시기를 좋아하고, 또한 차도구도 갖추었다”고 했다. 대개 인종 때에는 이미 소용단(小龍團)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승설(勝雪)이란 이름은 송나라 휘종 선화(宣和) 2년(1120)에 비롯되었다. 하지만 서긍(徐兢)은 선화 5년 계묘(1123)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이다. 중외의 풍속과 물산에 대해 이미 낱낱이 다 듣고 보았던 까닭에 이처럼 말했던 것이다.
또 고려의 승려 의천(義天)과 지공(指空), 홍경(洪慶)과 여가(與可)의 무리가 앞뒤로 바다를 건너
 도를 묻고 경전을 구하려고 송나라를 왕래한 것이 계속 이어졌으니,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때 이들의 무리가 반드시 다투어 이름난 차를 구입해서 불사(佛事)에 바쳤고, 심지어는 석탑 안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7백여 년이 지나서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또한 기이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릇 물건 중에 가장 쉽게 부패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음식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두강차(頭綱茶)의 한 종류가 우리나라 땅에까지 흘러 전해져서, 그 수명은 흰 매를 그린 그림과 나란하고, 보배로움은 수금천보(瘦金泉寶) 보다 더 낫다.(내가 전부터 선화 연간의 매 그림과 숭녕중보(崇寧重寶) 몇 매를 소장하고 있는데, 바로 휘종 황제가 직접 쓴 수금체(瘦金體)다.) 지금에 이르러 예림(藝林)의 훌륭한 감상 거리가 되니, 어찌 신물(神物)이 이를 지켜 남몰래 나의 옛 것 좋아하는 벽(癖)을 도우심이 아니겠는가? 이에 전거를 뒤져서 동호인에게 공개한다.


이상적은 용단승설차의 외양을 설명하고,
이 물건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과정을 적은 후 옛 기록을 두루 인용하여 제작 연대와 탑에 봉안된 연유를 추정했다.


당시 발견된 용단승설차는 단차(團茶)로 표면에 용의 형상을 새겼다.

 용의 비늘과 수염이 은은히 일어나고, 옆면에는 해서체 음문(陰文)으로 ‘승설(勝雪)이란 두 글자가 찍혀 있었다.

700년의 세월에도 차는 조금도 썩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크기는 건초척(建初尺)으로 사방 한 치,

두께는 그 절반이라고 했다. 건초척은 기원 81년 후한의 장제(章帝)가 제정한 것이다. 한 척이 23.58cm이고,

 한 치는 2.35cm 가량이다. 사방 2,35cm, 두께 1.2cm 정도 크기의 네모난 떡차였다.

 

 

 

 

 

『선화북원공차록』에 실린 용단승설차의 모습.

 



이상적은 떡차의 출현 과정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하게 적었다.

흥선대원군이 충청도 덕산현으로 묘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 때 세워진 옛탑에서 찾았다고만 했다.

 구체적인 절 이름도 없고, 탑에 대한 설명도 따로 없다.

다만 덕산현에 있던 어느 절의 5층 석탑에서 소동불(小銅佛)과 니금경첩(泥金經帖) 및 사리와 침향단(沈香檀),

그리고 진주가 무려 700년이나 묵은 고려 때 용단승설차 네 덩이와 함께 나왔다고 적었다.

대원군에게서 그 중 하나를 얻게 된 이상적은 여러 문헌을 꼼꼼히 고증하여 이 차의 가치를 밝혔다.


이어 이상적은 송나라 구양수(歐陽修)의 귀전록(歸田錄)과 명나라 진인석(陳仁錫)의 잠확류서(潜確類書),

그리고 고려 때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등 관련 문헌을 차례로 인용하여,

이 차가 송나라 휘종 선화 2년(1120)에 중국에서 정가간(鄭可簡)이 만들어 바친 바로 그 용단승설차임을 고증했다.

어떻게 송나라에서 황제께 바친 차가 우리나라 탑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당시 중국에 유학했던 의천(義天)과 지공(指空) 같은 고승이 중국에서 어렵게 구해 와서

부처님 전에 바치고 석탑 안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했다.


송나라 웅번(熊蕃)이 찬한 ?선화북원공차록(宣和北苑貢茶錄)?에도 용단승설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선화 경자년(1120)에 조신(漕臣) 정가간(鄭可簡)이 처음으로 은선수아(銀線水芽)를 만들었다.

 대개 장차 이미 익혀 비빈 차싹을 다시 벗겨내어 다만 그 속 심지 한 줄기만 취하여 진귀한 그릇에다

맑은 샘물을 담아 이를 적시면 환하게 빛나고 결백한 것이 마치 은실과 같다.

그 제법은 사방 한 치의 신과(新銙)로 작은 용이 그 위에 꿈틀대고 있었으므로

 이름하여 용단승설이라 하였다.


바로 여기서 말한 용단승설차의 실물이 탑 속에서 7백년을 견디다가 네 개나 한꺼번에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특히 위 기록은 용단승설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먼저 용단(龍團)은 네모난 단차에 용 무늬를 찍어서 붙은 이름이다.

승설(勝雪)은 눈 보다 희다는 뜻인데, 엄선한 차싹을 비벼 익힌 뒤 중심의 은실처럼 흰 줄기만 취해 만들었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위 문헌의 ‘수아(水芽)’는 ‘빙아(氷芽)’가 맞다.


이 용단승설은 고려 중기 차문화의 융성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7백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19세기 후반에 고탑에서 발견된 용단승설차 네 덩이의 존재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

당시에 크게 회자되었던 듯 하다.

 

 

 

 

 

가야사 5층탑을 헌 자리에 조성한 남연군 묘. 바닥이 온통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보이는 기록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에도 이 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위 이상적의 글이 용단승설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매천야록』은 흥선대원군이 선대의 이장(移葬)을 위해 절과 탑을 불태우던 일의 시말을 자세히 적었다.

 이 두 기록을 합칠 때 비로소 앞뒤 맥락이 소연해진다. 조금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남연군 이구(李球)는 아들이 넷인데, 흥선(興善)이 막내다.

처음에 남연군이 세상을 떴을 때, 흥선은 나이가 18세였다.

지사(地師)을 따라 덕산(德山)의 대덕사(大德寺)에 이르자, 지사가 한 오래된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큰 길지입니다. 귀함을 말로 할 수가 없지요.

” 흥선이 즉시 돌아와 재산을 다 팔아 돈 2만냥을 얻었다.

그 절반을 가지고 절의 주지승에게 뇌물로 주고, 그에게 불을 지르게 했다.

 이에 절이 다 타버렸다. 흥선이 상여를 모시고 와서, 재를 쓸고서 멈추었다.
한 밤중에 여러 형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꿈 이야기를 했다. 흰 옷을 입은 늙은이가 성이 나서 나무라며 말했다.

 “나는 탑의 신이다. 네가 어찌 내 거처를 빼앗느냐? 만약 끝내 장사 지낸다면 삼우(三虞)가 끝나기도 전에

 4형제가 폭사하리라. 속히 떠나거라.” 세 사람이 같은 꿈을 꾼 것이었다. 흥선이 흥분하여 말했다.

 “과연 그렇다면 진실로 길지(吉地)올시다. 운명은 주장함이 있으니, 탑신 따위가 어찌 능히 빌미가 되겠습니까?

게다가 종실이 날로 쇠퇴하여 우리 형제가 빌빌대고 있으니, 차라리 장김(壯金)의 문하에서

소매를 끌며 아첨하여 빌붙어 구차히 살기를 바라느니, 어찌 단번에 통쾌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형님은 모두 자식이 있고, 한 점 혈육이 없는 사람은 저 뿐입니다.

럴진대 죽는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여러 형님들 많은 말씀 마십시오

.” 이튿날 아침 탑을 부수니, 밑바닥이 모두 바위였다. 도끼로 찍게 하자 도끼가 문득 절로 튀어 올랐다.

마침내 스스로 도끼를 메고서 허공을 향해 크게 외치자, 도끼가 다시는 튀지 않았다.
묻고 나서는 훗날 혹 이장을 할까 걱정되어, 쇠 수 만근을 녹여 봉해버렸다. 거기에 다시 사토(沙土)까지 더했다.

인하여 승려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수원의 대포 나루를 건널 때였다.

중이 배 가운데서 갑자기 큰 소리로 ‘불이야!’하고 외치더니만, 머리를 감싸며 불이 붙는 시늉을 했다.

좀 있다가 물에 뛰어 들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이 남연군의 묘는 꿩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일컬었다.

14년 뒤에 지금 임금께서 태어나셨다.

갑자년(1864, 고종 원년) 이후 나라 돈으로 대덕사 북쪽에 절 하나를 창건하고, 보덕사(報德寺)라고 하였다.

 토목과 단청이 지극히 장려하였다. 땅과 밭과 재물과 법보를 하사함이 몹시 후하였다.

병인년(1866) 겨울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도로 숨어들자, 우리 백성 중에 사학(邪學)에 물든 자가 이를 인도하여

 덕산에 이르러 무덤을 파헤치려 하였다. 하지만 단단해서 무덤을 열 수가 없게 되자, 다만 무덤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대원군이 일찍이 이건창(李建昌)에게 장례 지낼 때의 일을 말해주었다.

“탑을 무너뜨리자, 그 속에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병(缾), 사리 구슬 3매가 있었네.

구슬은 소두(小豆) 만했는데, 몹시 밝고 투명했지.

물에 담궈 머금게 하자 푸른 기운이 마치 실낱이 환히 뻗친 것처럼 물을 꿰뚫더군.”


『매천야록』의 기록은 다소 오류가 있다. 절 이름을 덕산현의 대덕사(大德寺)라고 했는데,

 충남 덕산현 가야산에 있던 가야사(伽倻寺)가 맞다.

흥선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922)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18세 때의 일인 듯이 적고 있으나,

실제 산소의 이장은 27세 때인 1846년에 이루어졌다. 원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다.


지관에게서 대덕사의 석탑 자리가 대단한 명당이란 말을 듣고, 흥선군은 가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1만냥으로 대덕사 주지를 뇌물로 매수하여 절을 불 지르게 했다. 이후 상여를 옮겨

그곳에 묘를 쓰게 된 앞 뒤 경과를 자세하게 적었다.

 

 

 

 

 


 

 

남은들 상여

 

경기도 연천에서 이 곳까지 릴레이 식으로 현지 주민들을 동원하여 상여를 운반한 다음

 이 동네에  상여를 주었다고 한다, 진품은 따로 보호각에 넣어 두었고 위의 상여는

전종수 대목장이 실측 제작하여 이 곳에 기증했다고 한다. 

 

 


여러 전문에 따르면 남연군 사후 10여년이나 명당을 찾아다니던 흥선군에게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二代)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흥선군은 망설임 없이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다.


지관이 지목한 묘자리는 풍수지리의 측면에서 볼 때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천하의 명당이었다.

문제는 그 자리에 고려 때 옛 절인 가야사의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야사의 폐사(廢寺)는 위 황현의 기록처럼 주지에게 뇌물을 주어 불을 지르게 했다는 설과,

 당시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단계연을 뇌물로 주어 강압해서 불을 지르게 했다는 설로 나뉜다.

 이후 흥선군은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유해를 상여로 운구하여 이곳까지 옮겨 왔다.

이때 사용한 상여는 현재도 남연군의 묘소 옆 자락에 건물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황현은 흥선군의 형님들 꿈에 일제히 나타난 탑신(塔神)의 이야기와,

이장을 마치고 함께 상경하던 가야사의 승려가 갑자기 제 머리에 불이 붙는 시늉을 하며

 배 위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을 따로 기록해 두었다.


이장 당시 흥선군은 도굴의 염려 때문에 수만근의 쇳물을 녹여 붓고, 그 위를 석회로 다시 다졌다.

그리고 나서 얻은 아들이 훗날 고종이 된다.

 1864년 고종 원년에 흥선군은 가야사 북쪽에 보덕사(報德寺)란 절을 나라 돈으로 창건케 했다.

 절을 허문 죄의식도 씻을 겸 임금이 되게 해준 은덕을 갚는다는 의미에서였다.

보덕사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절 앞 마당에는 가야사 옛터에서 수습해온 탑재와 석재가 적지 않다.

 

 

 

 

 

 

보덕사로 옮겨진 가야사 탑.

3층탑이어서 용단승설차가 나온 그 탑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기였던 1868년에는 유태계 독일인인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이 발생하여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서구 열강의 통상 교섭 요구가 대원군에 의해 번번히 좌절되자,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그 유골을 확보 한 뒤 협상용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역시 개방을 원했던 천주교도들을 앞세워 1868년 4월 21일 밤에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석회로 다지고

쇳물을 부어 둔 묘는 하루 밤 사이에 파헤칠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조수(潮水) 때문에 이들이 철수함으로써 도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도 이로 인해 더욱 가혹하게 시행되었다.


이것이 남연군 묘에 얽힌 사연의 대강이다. 하지만 본고의 주된 관심은 『매천야록』 끝 단락의 내용에 있다.

 대원군이 이건창(李建昌, 1852-1898)에게 장례 때 생긴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다.

탑을 무너뜨리자,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병(缾), 사리 구슬 3매가 나왔다.

사리 구슬은 소두(小豆)만 한 것이 밝고 투명했는데, 물에 담그자 푸른 빛이 뻗쳐 물을 꿰뚫었다고 했다.


앞서 이상적의 「기용단승설」에서는 용단승설차 네 덩이를 얻었다고 했다.

여기서는 2병(缾)이라고 다르게 적고 있다.

 병(缾)는 그릇 이름이다. 귀한 차를 그릇에도 담지 않은 채 탑 안에 노출시켜 놓았을 리는 없고 보면,

그릇 하나에 용단승설차가 각 두 덩이씩 담겨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당시로서도 용단승설차는 그만큼 구하기 힘든 귀한 차였던 것이다.


고려 때 절 가야사 5층석탑에서 700년 묵은,

그것도 송나라 휘종 황제 때 중국에서 법제한 용단승설차가

조금도 썩지 않은 상태의 원형 그대로 발굴된 것은 참으로 희유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유서 깊은 절을 자신의 야심으로 불태워 버린 것은 드러내 놓고 자랑할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상적은 이장에 얽힌 사연은 슬쩍 얼버무려 버렸고, 반대로 황현은 이장 이야기 끝에 사족으로 차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제 이 두 기록을 한 자리에 엮어 읽자 비로소 이 때 발굴된 고려 때 용단승설차의 실체와 전후 사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탑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서 이제 와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아로레허시픽미술관 소장.

 

 

이유원의 다옥과 차시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다산이 제법을 가르쳐준 보림사 죽로차(竹露茶)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다.

그 자신이 거처에 별도로 다옥(茶屋)을 마련해 놓고 차를 즐겼을만큼 차를 사랑했고,

우리 차와 일본차, 그리고 중국차에 관한 풍부한 기록도 남겼다. 자신의 차생활을 노래한 시도 꽤 많다.

이 글에서는 그의 문집 『가오고략(嘉梧藁略)』과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수록된 차 관련 기록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남양주시에 위치한 가오곡 입구의 표지석.                                   가오곡 계곡 폭포 곁 이유원의 호인 '귤산' 각자.

 

 

다옥을 짓고 차를 즐긴 차인

 

이유원은 46세 때인 1859년, 지금의 남양주시 화도읍 수동면 가곡리 마을에 자리한 가오곡(嘉梧谷)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이곳에 장서각(藏書閣)과 다옥(茶屋)을 짓고, 사시향관(四時香館)과 오백간정(五百間亭) 등을 세워 만년 은거의 계획을 세웠다. 그의 「가곡다옥기(嘉谷茶屋記)」에 차 애호의 변과 자신의 다옥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내 성품이 평소에 차를 좋아한다. 사방의 이름난 차를 얻으면, 문득 산수가 좋은 곳으로 달려가 끓여 마신다. 한강 가에 살 때는 작은 집을 지어 ‘춘풍철명지대(春風啜茗之臺)’라고 하였다. 글씨는 수옹(遂翁) 섭동경(葉東卿)이 써서 주었다. 후에 가오곡(嘉梧谷)으로 이사해서는 퇴사담(退士潭)을 파서 좋은 물을 얻어, 호남의 보림차와 제주의 귤화차(橘花茶)를 끓여 마셨다. 근자에 연경에서 돌아온 주자암(周自菴)이 진짜 용정차와 우전차를 주므로 못물을 길어다가 함께 달였다. 솔 그늘과 대 그림자 사이에 솥과 사발을 늘어놓고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손을 대고서 찻물을 따라도 오히려 티끌이나 모래 등이 날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 나무를 세워 시렁을 만들고, 위에는 판자로 덮었다. 집 모서리에다 이를 세우니, 간데없이 하나의 집이 되었다. 길이는 다섯 자 남짓 되고, 너비는 두 자가 넘었다. 가운데에는 화로를 고일 틀이 있었다. 구리 줄로 다관(茶罐)에 드리워 고리에 매달았다. 수탄(獸炭)을 화로 구덩이에 넣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면 바람이 스스스 불어 솔가지가 바람에 울부짖는 소리를 낸다. 해안(蟹眼)의 상태가 막 지나고 나면 어안(魚眼)이 또 생겨난다.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차를 마시면 정신이 깨어나곤 했다. 소동파가 간직해두었다는 밀운룡(密雲龍) 차가 어찌 내가 얻은 용정차나 우전차가 아닌 줄 알겠는가? 다만 네 학사를 후대해 줄 기약이 없음이 안타깝다. 물건의 신품(神品)은 언제나 있지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늘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 다옥(茶屋)을 나 홀로 좋아할 밖에.


서울 집에는 봄바람에 차를 마시는 집이란 뜻의 ‘춘풍철명지대(春風啜茗之臺)’란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고,
 가오곡으로 이사한 후에도 따로 다옥을 지어 차생활을 지속했음을 밝힌 글이다. 차만 얻으면 산수 좋은 곳으로 달려가 차를 달여 마신다고 하여, 차벽(茶癖)이 있음을 말했다. 호남의 보림차와 밀양 황차, 제주 귤화차 등을 즐겨 마셨고, 선물로 받은 중국산 용정차나 우전차도 마셨다.
차를 마실 때는 솔숲과 대밭 사이에 솥과 사발을 늘어놓고 마셨는데, 바람 때문에 먼지나 모래가 자꾸 들어가므로 아예 집 모퉁이의 별도 공간에 다옥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다옥은 길이가 다섯 자, 너비는 두 자 남짓한 작은 공간인데, 나무로 시렁을 얹고 그 위를 판자로 덮은 허술한 구조였다. 가운데에는 화로를 고일 만한 틀을 만들었다. 다관에는 구리줄로 손잡이를 만들고, 화로에 숯을 넣어 부채로 불어 불을 피웠다. 물이 끓기 전에 생기는 기포의 모양새로 해안(蟹眼)과 어안(魚眼)을 구분하고, 찻물 끓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차를 마신 후에는 정신이 깨어나곤 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차에 대한 애호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임하필기』에도 이따금씩 차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 필시 중국 다서를 전재한 것으로 보이나 원전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였다.

차는 가는 것을 채취해야 하고, 차는 따뜻하게 보관해야 한다. 차는 뜨겁게 끓여야 한다. 가늘지 않은 것을 채취하면 맛이 쓰다. 따뜻하게 보관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핀다. 뜨겁게 끓이지 않으면 맛이 줄어든다. 특히 깨끗한 것을 높게 친다. 햇볕을 쬐면 안 되니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제 음다(飮茶) 체험에 비추어 공감 가는 내용이어서 옮겨 적은 듯하다. 또 「옥경고잉기(玉磬觚賸記)」에서는 “차는 빛깔로 고르고, 대나무는 그림자로 택한다. 茶取其色, 竹取其影”고 하여, 빛깔로 차를 가리는 것을 삶의 한 운치로 삼기도 했다.
그는 차와 관련된 시를 여러 수 남겼다. 중국산 햇차를 선물 받고 끓여 마신 후 지은 「시신차(試新茶)」 시 한 수를 먼저 읽는다.

蜀州雀舌名今古 촉주 땅의 작설차는 고금에 유명한데
烏嘴無多麥顆香 오취(烏嘴)는 많지 않고 맥과차(麥顆茶)가 향기롭다.
漆牌金字瀋陽路 심양 길에 사온 차는 칠패(漆牌)에 금박 글씨
一盞聲增二盞良 첫 잔에 소리 치고 둘째 잔은 더 좋아라.

오취(烏嘴)나 맥과(麥顆)는 까마귀 부리나 보리쌀알만큼 하게 돋은 차의 첫 싹을 따서 만든 고급의 우전차다. 심양에서 구입해온 칠패에 금박으로 글씨를 쓴 고급 작설차를 얻어, 서둘러 다관을 앉혀 끓여 내오니, 첫 잔에 환호성이 터지고, 둘째 잔도 흐믓한 마음이 가시지 않더라고 한 것이다. 「정향 나무 아래서 향기를 맡다가 명차를 떠올리며(丁香樹下聽香憶名茶)」란 제목의 시 5수에서도 자신의 차 생활을 노래했다.

篋中藏舊茗 상자 속에 오래도록 간직한 차가
塵土十年昏 티끌 세상 10년을 묻혀 있었지.
洗滌淸流下 맑은 샘물 아래서 깨끗이 씻자
元規莫自尊 원래의 그 모습이 절로 드높네.

茗豈原來斯 좋은 차 애초에 여기 올적엔
頹廊棄寘久 퇴락한 집 오래 버려 둘 줄 몰랐네.
鼠虫跡互成 쥐와 벌레 자취가 서로 이어져
西突又東走 서쪽에 부딪치다 동으로 갔지.

我其憐茗朽 좋은 차 썩어감 내 슬피 여겨
舀蘸藤籭兒 등나무 체 건져내어 차를 끓였네.
一服換形殼 처음 마시니 껍질이 변화할 듯
再烹潤膚肌 두 번을 끓이니 피부에서 윤기 나네.

春風臺榭高 봄바람에 누대는 높기만 한데
茗氣花香雜 차 내음 꽃 향기와 섞이었구나.
灑落人間緣 인간 세상 인연이 깨끗도 하여
聲聲松韻颯 소리마다 솔바람 노래 들리네.

毆陽洗垢硯 구양수는 벼루 때를 씻어내었고
沈約潔癯身 심약은 여윈 몸을 깨끗이 했지.
癖好無今古 벽(癖)을 즐김 고금이 차이 없거늘
茗胡累以塵 차를 어이 먼지 속에 묻어두리오.


오래 전에 구한 떡차를 상자 속에 넣어둔 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10년만에 이를 끓여 마시며,
그 감회를 노래한 내용이다. 좋은 차가 그저 ?어 가는 것을 슬피 여겨서 샘물로 깨끗이 씻어 채반에 헹궈내어 끓였다. 첫잔을 마시니 껍질이 벗어져 신선이 되어 날아갈 듯 하고, 둘째 잔을 마시니 피부에서 윤기가 나는 듯하였다. 구양수는 벼루에 앉은 더캐를 씻는 벽이 있었고, 심약은 목욕 벽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차 즐기는 벽이 있다고 하여, 차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을 말했다.
「한좌(閒坐)」란 작품에서는 또 이렇게 노래했다.

除非茶具無他物 다구(茶具)를 제외하면 다른 물건 없으니
不置花盆少雅容 화분조차 두질 않아 우아한 모습 적네.
引蔓補墻樊蔽邃 덩굴 끌어 담을 기워 울을 깊이 덮고서
穿池疊石勺流溶 못을 파서 돌을 쌓아 물을 떠서 담았지.
閒中事業誰過此 한가할 때 하는 일로 이만한 것 있으랴
山外炎凉詎識庸 산 밖의 염량세태 어이 알아 쓰리오.
坐臥便身心未掣 앉고 눕고 몸 편하니 마음도 느긋하여
居居端合養衰慵 거처에서 단정히 쇠한 몸을 기르노라.

집안에 다구(茶具) 외에는 변변한 물건 하나 없다 하여, 차와 늘 함께 하는 생활을 말했다. 다른 꾸밈없이 담쟁이 넝쿨로 무너진 담을 가리고, 연못을 파서 물을 길어 한가롭게 차를 마신다. 염량세태를 다 잊고 거처에서 차와 더불어 쇠한 몸을 기르겠노라는 다짐이다. 「철다음(啜茶吟)」 3수에서도 자신의 차에 대한 벽(癖)을 노래했다.

居若僧寮訝有髮 절집 같은 거처라 터럭 있음 의아하고
隱如處子愧無鉛 처녀 같이 숨어 사니 연지 없음 부끄럽다.
閱盡窖壺寒暖味 술병의 차고 더운 맛은 이미 보았거니
衰年何妨喚茶顚 늙은 나이 다전(茶顚)으로 불려도 괜찮으리.

靑山捫虱抱書遲 청산에서 이 잡으며 책 덮음도 더디니
睡裏生涯也自知 잠 속의 생애임을 스스로 아는도다.
水厄此間猶不到 수액(水厄)이 이곳에는 오히려 이르잖아
枯腸縮縮未堪飢 마른 장이 움츠려져 주림을 못 견디네.

老去原來少氣岸 늙어지면 원래부터 기운이 적어져서
尋常家冗並無關 평범한 집안 일도 상관하지 않는다네.
猶有一端專力處 그래도 한 가지 힘 쏟는 곳 있나니
烹茶飼鶴未全閒 차 끓이고 학 기르느라 한가하지 않다네.

술이야 지금껏 실컷 맛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차만 즐겨, 다전(茶顚) 즉 차 미치광이로 불려도 괜찮겠다고 했다. 둘 째 수 3구의 수액(水厄) 또한 차를 즐겨 마시는 일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차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만큼 차만 마시며 지내고 싶은데, 수액(水厄)이라 할만큼 차가 넉넉지를 않아, 차에 굶주린 장을 적실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셋째 수에서도 온갖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차 달이고 학 기르는 데만 마음을 쏟으며 지내는 삶을 술회했다.
이밖에도 「화사(花史)」 중 「청상(淸賞)」이란 작품에서는 “명상(茗賞)이 으뜸이고 담상(譚賞)이 다음. 茗賞最優譚賞次”이라 하여 차를 음미하는 일이 좋은 벗과 이야기 나누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했고, 「오팽년차제(吳彭年茶題)」의 “손 따라 차 가늠해 얼마간 마시니, 찻상 머리 은침아(銀針兒)의 향기가 끼쳐오네. 隨手量茶多少啜, 床頭香聞銀針兒”와 같은 구절들은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그의 차 사랑을 잘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우리 차에 대한 애정과 감식안

 

이유원은 자신의 차 생활을 노래한 것 외에도

 우리 차문화사에서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기록도 적지 않게 남겼다.

 특히 다산의 제법에 따라 강진 보림사에서 나는 찻잎으로 만든 국산차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한

 장시 「죽로차(竹露茶)」는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普林寺在康津縣 보림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縣屬湖南貢楛箭 호남 속한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일세.
寺傍有田田有竹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竹間生草露華濺 대숲 사이 차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世人眼眵尋常視 세상 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이 보는지라
年年春到任蒨蒨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何來博物丁洌水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丁洌水) 선생께서
敎他寺僧芽針選 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千莖種種交織髮 천 가닥 가지마다 머리카락 엇 짜인듯
一掬團團縈細線 한 줌 쥐면 웅큼마다 가는 줄이 엉켰구나.
蒸九曝九按古法 구증구포 옛 법 따라 안배하여 법제하니
銅甑竹篩替相碾 구리 시루 대소쿠리 번갈아서 방아 찧네.
天竺佛尊肉九淨 천축국 부처님은 아홉 번 정히 몸 씻었고
天台仙姑丹九煉 천태산 마고선녀 아홉 번 단약을 단련했지.
筐之筥之籤紙貼 광주리 소쿠리에 종이 표지 붙이니
雨前標題殊品擅 ‘우전(雨前)’이란 표제에다 품질조차 으뜸이라.
將軍戟門王孫家 장군의 창 세운 문, 왕손의 집안에서
異香繽紛凝寢讌 기이한 향 어지러이 잔치 자리 엉긴 듯 해.
誰說丁翁洗其髓 뉘 말했나 정옹(丁翁)이 골수를 씻어냄을
但見竹露山寺薦 산사에서 죽로차를 바치는 것 다만 보네.
湖南希寶稱四種 호남 땅 귀한 보물 네 종류를 일컫나니
阮髥識鑑當世彦 완당 노인 감식안은 당세에 으뜸일세.
海橽耽䔉檳樃葉 해남 생달(栍橽), 제주 수선(水仙), 빈랑(檳榔) 잎 황차(黃茶)러니
與之相埓無貴賤 더불어 서로 겨뤄 귀천(貴賤)을 못 가르리.
草衣上人齎以送 초의 스님 가져와서 선물로 드리니
山房緘字尊養硯 산방에서 봉한 편지 양연(養硯) 댁에 놓였었지.
我曾眇少從老長 내 일찍이 어려서 어른들을 좇을 적에
波分一椀意眷眷 은혜로이 한잔 마셔 마음이 애틋했네.
後遊完山求不得 훗날 전주 놀러가서 구해도 얻지 못해
幾載林下留餘戀 여러 해를 임하(林下)에서 남은 미련 있었다네.
鏡釋忽投一包裹 고경(古鏡) 스님 홀연히 차 한 봉지 던져주니
圓非蔗餹餠非茜 둥글지만 엿 아니요, 떡인데도 붉지 않네.
貫之以索疊而疊 끈에다 이를 꿰어 꾸러미로 포개니
纍纍薄薄百十片 주렁주렁 달린 것이 일백 열 조각일세.
岸幘褰袖快開函 두건 벗고 소매 걷어 서둘러 함을 열자
床前散落曾所眄 상 앞에 흩어진 것 예전 본 그것이라.
石鼎撑煮新汲水 돌솥에 끓이려고 새로 물을 길어오고
立命童竪促火扇 더벅머리 아이 시켜 불 부채를 재촉했지.
百沸千沸蟹眼湧 백 번 천 번 끊고 나자 해안(蟹眼)이 솟구치고
一點二點雀舌揀 한 점 두 점 작설(雀舌)이 풀어져 보이누나.
胸膈淸爽齒根甘 막힌 가슴 뻥 뚫리고 잇뿌리가 달콤하니
知心友人恨不遍 마음 아는 벗님네가 많지 않음 안타깝다.
山谷詩送坡老歸 황산곡(黃山谷)은 차시(茶詩) 지어 동파 노인 전송하니
未聞普茶一盞餞 보림사 한잔 차로 전별했단 말 못 들었네.
鴻漸經爲瓷人沽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은 도공(陶公)이 팔았으나
未聞普茶參入撰 보림사 차를 넣어 시 지었단 말 못 들었네.
瀋肆普茶價最高 심양 시장 보이차(普洱茶)는 그 값이 가장 비싸
一封換取一疋絹 한 봉지에 비단 한 필 맞바꿔야 산다 하지.
薊北酪漿魚汁腴 계주(薊州) 북쪽 낙장(酪漿)과 기름진 어즙(魚汁)은
呼茗爲奴俱供膳 차를 일러 종을 삼고 함께 차려 권한다네.
最是海左普林寺 가장 좋긴 우리나라 전라도의 보림사니
雲脚不憂聚乳面 운각(雲脚)에 유면(乳面)이 모여듦 걱정 없네.
除煩去膩世固不可無 번열(煩熱)과 기름기 없애 세상에 꼭 필요하니
我産自足彼不羨 우리 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다.



이 시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뜻 깊은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보림사의 죽로차가 다산 정약용이 절의 승려들에게 가르쳐준 방법에 따라 구증구포의 방식으로 법제된 차임을 언급했다.

차계에서 다산의 구증구포법을 두고 오랜 논란이 계속되어 온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 둘째, 아침(芽針) 즉 바늘 같은 첫 싹만을 골라 따서 머리카락이 엇짜인 듯 찻잎의 결을 살려 만든 떡차의 구체적 제법을 설명했다

. 셋째, 대오리로 얽어 짠 용기로 공기가 통하게 포장하고, 종이 표지에 우전(雨前)이란 상표를 붙인 상품의 포장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넷째, 그가 마신 보림사 죽로차가 엽전 모양으로 끈에다 꿰어 꾸러미로 포개 110조각이 담긴 소형의 떡차였음을 밝혔다.

다섯째, 당시의 차 끓이는 과정과 절차를 설명하고,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가 달콤하다 하여 구체적인 효과와 맛을 제시했다.

 여섯째, 비싸기만 한 중국차 못지 않은 우리차의 우수성과 번열과 기름기를 없애주는 차의 효능에 대해 칭찬했다.

 이 한편의 시로 말미암아, 다산 이래로 초의를 거쳐 이어온 보림사 죽로차의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보림사 죽로차를 젊은 시절 자하 신위의 집에서 처음 맛보았다.

 초의가 스승인 완호대사의 삼여탑(三如塔)을 건립하면서 비문을 받기 위해 폐백으로 드린 선물이었다

. 이후로는 다시는 그 차 맛을 볼 수 없어 그리워했는데,

1872년 대보름날 자신의 사시향관에서 고경선사(古鏡禪師)가 가져온 보림사 죽로차를 맛보고,

 예전의 그 차인 줄을 알았다고 했다.

 

 

 

 

 

엽전 꾸러미 모양으로 만든 떡차 꿰미

 


이유원은 『임하필기』중 「호남사종(湖南四種)」이란 항목에서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는 열수 정약용 선생이 이를 얻어,

 

구증구포(九蒸九曝)의 방법으로 절의 승려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이 중국의 보이차만 못하지 않다.

 곡우 이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우전차라 해도 괜찮다. 고 하여,

위 시의 언급을 재확인하고 있다.

 또 「삼여탑(三如塔)」 항목에서는 “내가 임신년(1872) 대보름날 사시향관(四時香館)에 고경선사(古鏡禪師)와 함께

 보림차를 마셨다. 대화가 초의에게 미치자 탑명 서문을 적어 서로 보았다. 초의는 박금령(朴錦齡)과 가장 마음이 맞았다.

보림차는 강진의 대밭에서 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차다.

라고 하여, 보림사 죽로차에 대한 언급을 다시 남겼다.

 

 

 

 

 

대껍질로 꽁꽁 싼 떡차 포장.

 


이유원의 「걸차신판추(乞茶申判樞)」란 작품에서도 초의차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보인다.

신판추(申判樞)는 초의와 가까웠던 신헌(申櫶, 1811-1884)이니, 그에게 초의차를 나눠 달라고 청하면서 보낸 시다.



草衣老釋揀名茶 연로하신 초의 스님 이름난 차 가려내니
自足殊邦移種芽 중국에서 옮겨 심은 차싹 절로 넉넉하다.
風末孤雲子玉譜 바람 끝 외론 구름 자옥보(子玉譜)가 이것이요
雨前靑雪毗陵家 곡우 전의 푸른 눈은 비릉(毗陵)의 집일래라.
竹皮套緊知新製 대껍질로 꽁꽁 싼 것 새 제품임 알겠고
書面毛生感不遐 글씨 위로 터럭 돋아 얼마 안 된 줄을 아네.
病暍三庚回白首 삼복에 더위 먹어 흰 머리로 변했나니
淸香應貯將軍衙 맑은 향기 장군 관아 저장되어 있으리라.



초의가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이름난 차를 만들었다.

3구의 자옥보(子玉譜)는 옥천자(玉川子)가 엮었다는 『다보(茶譜)』를 말한 듯 하나,

 4구의 비릉가(毗陵家)는 출전을 확인하지 못하겠다.

5,6구를 보면 초의차가 대껍질로 아주 야무지게 단단히 포장을 하고, 그 위에 글씨로 차 이름을 써놓았음을 알 수 있다.

삼복에 더위를 먹어 견딜 수가 없으니, 장군의 관아에 응당 보관되어 있을 초의 스님의 햇차를 좀 나눠달라고 부탁한 내용이다.

앞서 본 「죽로차」의 내용과 함께 초의스님이 만든 차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증언하는 아주 귀한 기록이다.
이밖에도 『임하필기』의 「죽전차(竹田茶)」 항목에서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와서

옛 기록에 신라 때 차 씨앗을 당나라에서 구해와 지리산에 뿌렸다는 기록을 보고,

부로에게 물어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숲 속에서 차 몇 그루를 얻어 이를 배양해서

크게 번식 시킨 일을 적었다.


또 이유원은 밀양 황차(黃茶)에 대한 귀한 기록을 시로 남겼다.

「정은(貞隱) 강로(姜㳣) 상공께서 밀양 황차를 주신데 감사하며(謝貞隱相公贈密陽黃茶)」란 작품이 그것이다.



幽竹窓陰待我歸 창 그늘 대 그림자 내가 오길 기다리니
洛城春夢轉依微 서울의 봄날 꿈이 외려 더욱 설핏하다.
何來一葉淸凉味 어데서 온 한 잎 차의 청량한 맛이라니
滌了胸襟悟昨非 흉금을 씻어주어 지난 잘못 일깨우네.

短童奔走汲名泉 어린 동자 분주히 이름난 샘물 길어
竪罐橫鐺錯前後 솥과 물통 가로 세로 앞뒤로 늘어놓네.
瀋肆川箱猶退步 심양(瀋陽) 저자 사온 차도 외려 이만 못하거니
從知貞老以延年 정은(貞隱) 상공 이것으로 장수하심 알겠구나.



강로(姜㳣, 1809-1887)가 보내준 밀양 황차를 받고서 답례로 쓴 시다.

 서울의 벼슬길에 매여서도 생각은 늘 전원으로 돌아갈 마음뿐이다.

답답한 서울 생활에 찌들어 지내던 터에 청량한 황차를 받았다. 절로 입에 군침이 돌아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다.

다동(茶童)은 좋은 샘물을 길어오랴, 먼지 앉은 다구(茶具)를 꺼내오랴 갑자기 부산스럽다.

숯불로 물을 끓여 차를 우려낸다. 한잔을 마시자 흉금이 환하게 트여온다.

밀양 황차의 맛을 보고서, 중국 심양에서 사온 상자에 든 차도 이 황차만은 못하리라고 칭찬했다.

 밀양 황차에 대한 것은 따로 알려진 기록이 없는데,

 이 시에 의해 조선 후기에 밀양 지역에서 발효 떡차인 황차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즐긴 차 중에 제주 귤화차(橘花茶)가 또 있다. 「사혜귤차(謝惠橘茶)」시를 보자.

橘老橘茶滿竈堆 귤로가 귤차를 부엌 가득 쌓아두니
天樞光散楚江隈 천추(天樞)의 빛 초강(楚江)의 물굽이로 흩어진다.
玉川舊譜添新品 옥천자(玉川子)의 구보(舊譜)에다 신품(新品)을 첨가하니
千里奇香咫尺來 천리의 기이한 향 지척까지 왔도다.

귤차는 「가곡다옥기」에서 제주의 귤화차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귤꽃을 따서 말려 만든 차인 듯하다. 그

 구체적 제법은 알 수 없다. 귤꽃만 말려 차로 만든 것인지, 여기에 찻잎을 함께 넣어 우려 마시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이렇듯 이유원은 자신의 문집 속에 보림사 죽로차와 함양의 죽전차, 그리고 밀양 황차와 제주의 귤화차 등

우리 차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이를 통해 초의차의 구체적인 제법과 모양새, 그리고 포장 방법까지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밀양 황차의 존재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차문화사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중국차와 일본 차에 관한 기록

 

한편 이유원은 드물게도 중국차와 일본차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게 남겼다. 특히 일본차를 직접 맛보고서 지은 12수의 연작시는 우리나라 문인이 지은 최초의 일본차에 관한 기록이다. 먼저 중국차에 관한 언급이다.

연경 시장에서 파는 차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반드시 우전차를 귀하게 치는데 곡우 이전에 채취한 것이다. 차 시장 중 가장 큰 것은 심양에 있다. 심양 근처의 북비(北鄙) 의 부락은 명나라 말엽의 각다시(榷茶市)인데, 군수 비용으로 보충해 썼다. 이때는 호인(胡人)이 강성한지라 차에 드는 비용이 대단히 컸다. 명유(明儒)가 말하기를, 호인은 늘 양젖을 마시는 까닭에 차탕(茶湯)을 잘 마신다. 차는 대개 강남에서 난다. 무역으로 옮겨오면 오로지 오랑캐 땅에 내다판다. 이 풍토가 여태도 그치지 않아, 여태껏 뒷골목과 깊은 골짜기에도 대개 차 가게가 있다.

연경 시장에서 우전차가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말하고 나서, 가장 큰 규모의 차시장은 심양에 있고, 이곳은 명말의 각다시(榷茶市) 즉 국가에서 차를 전매하던 시장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의 시장은 당시 강남에서 생산된 차를 가져와, 육식 때문에 차 없이는 배열병(背熱病)이 나서 견디지 못하는 북쪽 변방 민족에게 비싼 값에 내다 팔던 데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도 곳곳에 차 가게가 즐비하다고 하여, 당시 심양 일원의 차 마시는 풍속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유원은 보이차(普洱茶)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한 언급을 남겼다.

보이차는 전남(滇南), 즉 운남성에서 난다.

목방(木邦)이니 보이(普耳)니 하는 몇 종류가 있다. 목방은 덩이차로 만든다.

위보(胃普)란 이름으로 파는데, 지역이 서로 가깝다.

보이차의 진품(珍品)으로는 모첨(毛尖)․아차(芽茶)․여아(女兒) 등의 이름이 있다.

 모첨은 곡우 이전에 채취한 것으로 덩이차로 만들지 않는다.

 아차는 조금 자란 뒤에 채취하여 덩이차로 만든다.

 2냥 또는 4냥을 단위로 한다. 운남 사람들이 아낀다. 여아차 또한 아차의 종류다.

곡우 이후에 딴 것이다. 1근에서 10근까지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

 운남 여자들이 은화와 맞바꿔 이를 모아 화장품 사는 비용으로 삼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나머지는 조보(粗普)라 하는데 잎이 모두 흐트러졌다. 운남에서 판다.

 거친 것을 가져다 찐득찐득하게 졸여 떡을 만든다.

 도장을 찍어 쌓아두고 대접하는데 또한 예주차(蕊珠茶)라고도 한다. 능히 열병을 다스린다.

 항주의 용정차(龍井茶)와 다름없다. 다만 향이 너무 강하고, 성질이 또 너무 차며,

쓴 맛에 가까워 용정차의 중화(中和)한 기운이 없다.

그 나머지 홰나무나 버드나무에 기생하는 것을 채취하여 대신하기도 한다.

내가 두 번 연경에 들어가 차 가게 사람에게 자세히 들었다.

상품(上品)은 용정차이고, 그 다음이 덩이차로 만들지 않은 보이차다.

 그 다음은 2냥 4냥 단위로 된 덩이차다.

이밖에 근 단위의 덩이차나 고약처럼 졸인 것은 모두 족히 논할 것이 없다.

보이차의 여러 종류와 제조법 및 효능에 대해 상세하게 적고 있다.

 직접 연경에 갔을 때 차 가게 사람에게 들은 내용이라 하였다.

 하지만 앞의 내용은 18세기 중국의 장홍(張泓)이 지은 『전남신어(滇南新語)』의 내용을 그래도 옮겨 적은 것이다.

어쨌거나 보이차에 관한 최초의 상세한 기록을 이유원이 남긴 것은 주목할만 하다.


일본차에 관한 이유원의 기록을 볼 차례다. 다음은 『임하필기』의 기록이다.

차 이름은 한 가지가 아니다. 일본차 또한 아치(雅致) 있는 것이 있다.

그 가운데 능삼(綾森)․응조(鷹爪)․유로(柳露)․매로(梅露)․국로(菊露)․초적백(初摘白)․문명석(文明昔)․명월(明月)․

청풍(淸風)․박홍엽(薄紅葉)․노락(老樂)․우백발(友白髮)․남산수(南山壽) 등의 이름이 가장 좋다.

일본차의 구체적인 이름을 무려 13가지나 들고 있다.

문집에는 다시 「영산본원차종(詠山本園茶種)」시가 실려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차 가운데

 ‘문명석(文明昔)’이란 품종을 뺀 나머지 12 품종에 대해 각각 한 수씩 노래했다.

병서를 보면, “일본 동경에는 산본원(山本園)이 있는데, 차가 나는 곳이다.

그 상품이 하나 뿐이 아니고 이름 또한 많다. 내가 어떤 것은 보았고 어떤 것은 보지 못했다.

그 중 좋은 것을 가려 상품마다 시를 짓는다고 적고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차 문화 습속을 담은

『심지명연도록(深志名讌圖錄』과 『전다조지남(前茶早指南)』의 판화.

 

이유원이 어떤 경로로 일본 동경의 산본원 차를 종류별로 구해 맛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동경의 산본원은 산본(山本) 가문에서 대대로 운영해온 다원(茶園)으로, 에도(江戶)에서 차를 만들어 팔아 당시 영주들에게 천상천하에 으뜸가는 차란 평판을 얻어, 우치제(宇治製)란 이름을 얻었던 차원이다. 열 여덟 곳에 따로 다원을 운영하여, 각기 다른 상품을 출시했다. 이 산본씨의 다원에서 생산되는 차를 이유원이 직접 맛보고서 감상 평을 단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제 자료 제시를 겸하여 12수의 시를 번역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능삼(綾森)
鮫人杼柚曬淸霜 교인(鮫人)이 베틀에다 맑은 서리 말려서
夜夜瑤池襯玉牀 밤마다 요지에서 옥 평상에 잔치하네.
一帶流雲歸斂迹 한 떼의 구름이 자취 거둬 가더니만
去尋春雨野丁筐 야정(野丁)의 광주리에 봄 비가 내리누나.

응조(鷹爪)
龍團揀綠雀生舌 용단차 초록빛 작설을 가려내어
獸炭吹紅蟹吐涎 수탄(獸炭)을 붉게 불자 게가 침을 토한다.
臂上秋鞲鷹爪健 팔뚝 위 깍지 위에 매 발톱이 건장터니
幻他之乙採中田 이게 변해 저게 되어 밭에 가서 채취하네.

유로(柳露)
賽線賽金梭曉風 줄을 넣고 금을 넣어 새벽 바람 비단 짜니
若輕若重枕南宮 가벼운 듯 무거웁게 남궁(南宮)에서 누었구나.
繁華且置前身事 번화했던 전생의 일 가만히 놓아두고
却向深山綠茁叢 깊은 산 문득 향해 초록 싹을 틔웠다네.

매로(梅露)
美人高士共爭先 미인과 고사가 함께 앞을 다투는 듯
濃湛明珠雨雪天 눈 비 오는 날씨에 짙고 맑은 밝은 구슬.
生涯澹泊貧家事 사는 일도 담박한 가난한 집 일이라
擧白何須辨聖賢 온통 흰데 성현을 구분해 무엇 하리.

국로(菊露)
楚辭影落三閭村 초사(楚辭)는 삼려촌(三閭村)에 그림자로 떨어지고
晉史淸傳五柳門 진사(晉史)는 오류문(五柳門)에 맑은 풍도 전하네.
一掬誰分泉水積 한 웅큼 길은 샘물 그 누가 분간하리
千年靈壽問眞源 천년의 영수(靈壽)가 참 근원을 묻는구나.

초적백(初摘白)
尖尖白白向新陽 뾰족뾰족 흰 싹이 새 볕을 향해 나니
穀雨之前不滿箱 곡우가 오기 전엔 상자조차 못 채우리.
若箇銀針千萬縷 은침(銀針) 같이 가는 잎이 천만 가닥이라면
往來九轉煉金光 앞뒤로 구전(九轉)하여 금빛으로 정련하리.

명월(明月)
中天月上見虛明 중천에 달이 떠서 텅빈 밝음 드러나니
燃點金爐氣益淸 쇠 화로에 살라서 기운 더욱 해맑은 듯.
一錢不費買如許 돈 한푼 들이잖코 사는 것이 어떠하리
十二樓高白玉京 백옥경엔 열 두 누대 높이 솟아 있나니.

청풍(淸風)
誰道三庚天氣炎 삼복 더위 날씨가 무덥다고 뉘 말했나
輕淸受用近莊嚴 경쾌하고 맑기가 장엄함에 가깝구나.
響送玎璫人不見 쟁글쟁글 소리 나도 사람은 뵈잖으니
姮娥手捲水晶簾 항아 아씨 수정 발을 손수 걷고 계시는 듯.

박홍엽(薄紅葉)
石上仙薑紫吐芽 바위 위 선강(仙薑)이 자줏빛 싹 토해내니
輕霜初過野人家 풋서리 야인(野人) 집에 처음으로 지나누나.
春葉爭如秋葉染 봄 잎이 앞 다투어 가을 잎인양 물이 드니
較來厚薄孰多嘉 후박(厚薄)을 견줄진대 누가 더 고울런지.

노락(老樂)
樂事殘年睡與食 늙마에 즐거운 일 자는 일과 먹는 일
睡餘味在食餘留 잠깬 뒤 마시는 맛 밥 먹은 뒤 남았구나.
矮箱弊篚藏香久 작은 상자 낡은 합에 오래 향을 간직타가
供給時時却忘憂 이따금 마셔보면 문득 근심 잊는다오.

우백발(友白髮)
星星我髮黑無餘 성성한 내 머리털 검은 머리 하나 없고
天下親朋少尺書 천하의 친한 벗들 짧은 편지 한통 없네.
一烹二啜三宜漱 한번 끓여 두 번 마셔 세 번째는 양치하니
知己於今固莫如 지금에 날 아는 벗 너 만한이 없구나.

남산수(南山壽)
酌斗南山祝聖人 남산의 술을 따라 성인에게 축수하니
奚徒以酒陋誠伸 어이 한갓 술 가지고 못난 정성 펼쳐보리.
征稅關門斯亦一 관문(關門)의 구실 세금 여기도 한가지라
搖搖船泊洛城津 흔들흔들 낙성진(洛城津)에 배가 정박 하누나.

시를 보면 각각의 차종을 직접 맛보고서 나름의 특성을 파악한 뒤에 쓴 시임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차에 대한 애호벽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려주는 자료일 뿐 아니라, 19세기에 일본차에 대한 유일한 본격 품평의 내용을 담은 시여서 일본 쪽에서 볼 때도 매우 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한일 차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상 이유원의 차관련 시와 그의 차생활을 알려주는 각종 기록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았다.

그는 차를 너무도 사랑한 차인이었다. 집에 다옥(茶屋)까지 짓고, 각종 다구를 구비해 놓고서,

귀한 샘물을 길어다가 차맛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이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샘물에 대한 감식안도 남달랐다.

특히 보림사 죽로차와 함양 죽전차, 그리고 밀양 황차 제주 귤화차 등 우리 차에 대한 귀한 기록을 남겨

 차문화사 정리에 소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중국차와 일본차에 대해서도 해박하고 정심한 기록을 남겨,

차문화 교류의 실상을 정리한 업적도 크다.

 

 

범해 각안의 「차약설茶藥說」과 「차가茶歌」

 

 

범해(梵海) 각안(覺岸, 1820-1896)은

완호(玩虎) 윤우(倫右, 1758-1826)의 법맥을 이은 호의(縞衣) 시오(始悟, 1778-1868)의 법제자다. 『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지은 학승이자, 「차약설(茶藥說)」과 「차가(茶歌)」 및 여러 수의 차시를 남긴 차인이다.

이 글에서는 그가 남긴 차에 관한 글을 함께 읽어 보겠다.

 

 

 

「차약설(茶藥說)」의 차 효용론

각안은 33세 때인 1852년 가을에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차를 마시고서 병이 나았다. 이때의 신기한 차 체험을 「차약설」 한 편에 담았다. 전문을 제시한다.

백약이 비록 훌륭해도 모르면 못 쓴다. 온갖 병으로 괴로워도 구해주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구해주지 않아 못 살게 되었을 때, 구해주고 살려주는 기술이 있다. 몰라서 못 쓰고 있는데, 알려주어 쓰게 하는 묘함이 있다. 사람이 느끼고 하늘이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약이나 병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나는 임자년(1852) 가을에 대둔사 남암(南庵)에 머물고 있었다. 이질을 앓아 사지가 늘어지고 세 끼니마저 잊은 지가 어느덧 열흘 넘어 달포 가량 되었다. 틀림없이 죽게 될 줄로 알았다. 하루는 같이 입실한 무위(無爲) 형님이 어버이를 돌보러 갔다가 왔다. 같이 선탑(禪榻)에 참례(懺禮)하던 부인(富仁) 아우님도 스승님을 모시던 곳에서 이르러 왔다. 머리를 들어 좌우를 보니 삼형제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라 스스로 틀림없이 살게 될 줄을 알았다.
잠시 후 무위 형님이 말했다. “내가 냉차(冷茶)로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계시던 어머니를 구했으니, 급히 달여서 써보기로 하세.” 부인(富仁) 아우님이 말했다. “제가 아차(芽茶)를 간직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해 두었으니 쓰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 말대로 차를 달이고, 그 말대로 차를 썼다. 한 잔을 마시자 뱃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두 잔을 마시니 정신이 상쾌해졌다. 석 잔 넉 잔을 마시자 전신에서 땀이 흐르고 맑은 바람이 뼈 속까지 부는 듯 상쾌하여, 마치 애초에 아무 병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는 것이 점차 나아져서 기운을 차리는 것이 날마다 좋아졌다. 6월이 되자 70리 떨어진 본가로 가서 어머니의 기제사에 참석하기까지 했다. 이때가 청나라 함풍 2년(1852년) 임자년 7월 26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가 놀라고, 본 사람은 나를 가리키곤 했다.
아아! 차는 땅에 있고, 사람은 하늘에 있으니, 하늘과 땅이 감응한 것인가? 약은 형님에게 있고, 병은 아우에게 있었으니, 형제가 감응한 것인가? 어찌 신통한 효험이 이와 같단 말인가? 차로써 어미를 구하고, 차로써 아우를 살려냈으니, 효제(孝悌)의 도리가 극진하다 하겠다. 아! 안타깝구나. 병이 그다지 심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틀림없이 죽을 줄로 알았으며, 정이 그리 두텁지 않았건만 어찌 반드시 살 줄 알았더란 말인가? 평생의 정분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겠다. 이에 기록하여 뒷날에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병을 구하지 못하는 무리에게 보여준다.

보름 가까이 이질을 알아 사지가 축 늘어지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그저 죽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때 동문의 형제들이 간직해 둔 아차(芽茶)를 달여 그에게 마시게 했다. 차를 마시자 금세 약효가 나타났다. 첫 잔에 부글부글 끓던 배가 진정되었다. 두 잔을 마시자 혼미하던 정신이 상쾌해졌다. 석 잔 넉 잔을 마시니 막혔던 땀구멍이 뚫리면서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맑은 바람이 뼛속까지 불어오는 듯 상쾌했다. 언제 아팠던가 싶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다시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어, 얼마 후에는 70리 떨어진 본가로 가서 어머니의 기제사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두들 차의 약효에 놀랐고, 보는 사람마다 나를 가리키며 차 마시고 병 나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차는 무위(無爲) 스님의 어머니를 거의 죽을 위태로운 상태에서 구해냈고, 이질로 생사를 넘나들던 각안 스님을 낫게 했다. 그 효용이 얼마나 대단한가?


한편 이 이야기는 당시 대둔사에서 뜻밖에 차가 그다지 널리 보편화된 상태가 아니었음을 증언한다.

 1830년 초의가 서울로 보림백모(寶林白茅) 떡차를 가져가 전다박사의 호칭을 들으며 초의차 신드롬을 일으켰던 것이

23년 전의 일인데도, 당시 33세였던 대둔사 승려 각안은 차의 효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무위(無爲)나 부인(富仁) 같은 승려들이 비록 차의 약효를 알고는 있었으나,

상음(常飮) 목적이 아닌 약용으로 소량 보관하고 있었다.

또 차를 마시고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대둔사에서 차는 일부 승려들이 비상약으로 소량 보관했을 정도이지,

음료로 마실 만큼 일상화된 것은 아니었다.

 

 

 

 

 

 

야생차밭

 


「차가(茶歌)」의 차론

 

어쨌거나 이 일을 계기로 각안은 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듯하다.

이후 그는 문집에 차에 관한 시를 적지 않게 남겼다. 그의 대표작인 「차가」를 먼저 읽어본다.



1 攤書久坐精神小 책 펴고 오래 앉아 정신이 희미하니
2 茶情暴發勢難禁 차 생각 간절해져 참기가 어렵구나.
3 花發井面溫且甘 우물에 물꽃[水花] 피어 따습고도 달콤하니
4 㪺罐擁爐取湯音 물 길어 화로 안고 끓는 소리 기다린다.
5 一二三沸淸香浮 일비(一沸) 이비(二沸) 삼비(三沸) 되니 맑은 향기 떠오르고
6 四五六椀微汗泚 네 다섯 여섯 잔에 땀이 살풋 나는구나.
7 桑苧茶經覺今是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이 옳은 줄을 알겠으니
8 玉泉茶歌知大體 노동(盧仝)의 「다가(茶歌)」는 대체를 알았도다.
9 寶林禽舌輸營府 보림사의 작설차는 관청으로 실어가고
10 花開珍品貢殿陛 화개동의 진품은 대궐로 바쳐지네.
11 咸務土産南方奇 함평(咸平) 무안(務安) 토산차는 남방의 기화(奇貨)이고
12 康海製作北京啓 강진 해남 만든 것은 서울까지 알려졌네.
13 心累消磨一時盡 마음 찌꺼기 씻어내어 일시에 스러지니
14 新光淨明半日增 새로운 빛 환히 밝아 반나절이 가뜬하다.
15 睡魔戰退起眼花 졸음은 물러가고 안화(眼花)가 일더니만
16 食氣放下開心膺 음식 기운 쑥 내리고 가슴 열려 시원쿠나.
17 苦利停除曾經驗 괴론 설사 딱 멈춤은 진작에 경험했고
18 寒感解毒又通明 감기 낫고 해독 되니 더더욱 신통하다.
19 孔夫子廟參神酌 공자(孔子) 모신 사당에선 참신(參神)하여 잔 올리고
20 釋迦氏堂供養精 부처님 법당서도 공양 올림 정성일세.
21 瑞石槍旗因仁試 서석산(瑞石山)의 창기차(槍旗茶)는 부인(富仁) 통해 시험했고
22 白羊舌嘴從神傾 백양사의 작설(雀舌) 조취(鳥嘴) 신(神)을 좇아 기울였지.
23 德龍龍團絶交闊 덕룡산의 용단차(龍團茶)는 절교(絶交)조차 시원하고
24 月出出來阻信輕 월출산서 나온 것은 신의(信義) 막힘 일 없다네.
25 中孚舊居已成丘 초의 스님 옛 거처는 이미 언덕 되었나니
26 离峯棲山方安缾 리봉(离峯) 스님 계시는 산 물 긷기 편안하다.
27 調和如法無爲室 조화를 법대로 함 무위(無爲) 스님 바로 그요
28 穩藏依古禮庵帲 옛 법 따라 잘 보존함 예암(禮庵)의 휘장일세.
29 無論好否南坡癖 좋고 나쁨 따지잖음 남파(南坡)의 성벽(性癖)이요
30 不讓多寡靈湖情 많고 적음 마다찮음 영호(靈湖)의 뜻일래라.
31 細看流俗嗜者多 세속을 살펴봐도 차 즐기는 이가 많아
32 不下唐宋諸聖賢 당송 시절 성현(聖賢)만 못할 것이 하나 없네.
33 禪家遺風趙老話 선가(禪家)의 유풍(遺風)이야 조주(趙州) 스님 화두거니
34 見得眞味霽山先 참된 맛을 얻어봄은 제산(霽山) 스님 먼저일세.
35 挽日工了玩月夜 만일암(挽日庵) 중수(重修) 마쳐 달 구경 하던 밤에
36 茗供吹籥煎相牽 차 올리고 피리 불며 차를 달여 이끌었지.
37 正笥彦銍臘日取 언질(彦銍)이 정사(正笥)에다 납일(臘日)에 취해 오니
38 聖學汲泉呼太蓮 성학(聖學)은 샘물 길어 태연(太蓮)을 부르누나.
39 萬病千愁都消遣 온갖 병과 갖은 근심 모두 다 스러지매
40 任性逍遙如金仙 성정 맡겨 소요함이 부처와 한가질세.
41 經湯譜記及論頌 차 달이며 기록하고 찬송을 하는 동안
42 一星燒送無邊天 가없이 넓은 하늘 별똥 별이 지나간다.
43 如何奇正力書與我傳 어이해야 기정(奇正)을 힘껏 써서 나와 함께 전해볼꼬.



모두 43구, 303자에 달하는 장시다.

단계별로 차 끓이는 방법과 차의 주요산지, 차의 효용,

그리고 차를 즐기는 여러 승려들의 이름을 차례로 풀이한 내용이다.

처음 1-8구는 차 끓이는 방법을 설명했다. 오래 책을 보니 정신이 희미해져 차 생각이 간절하다.

몽글몽글 솟아나는 새 샘물이라야 성질이 따뜻하고 달다. 두레박으로 이를 길어 화로에서 끓인다.

탕음(湯音), 즉 물 끓는 소리를 가려서 일비(一沸) 이비(二沸) 삼비(三沸)의 단계를 거쳐 차를 넣는다.

금세 맑은 향이 퍼진다. 찻잔에 따라 몇 잔을 마시자 전신에 땀이 배이면서 기분이 상쾌해진다.

 7,8구는 이러한 차 끓이고 마시는 일에 대한 설명이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다가(茶歌)」에 적힌 것과 꼭 맞는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9-12구와 21-24구는 주요한 차 산지를 구체적으로 꼽았다.

보림금설(寶林禽舌)은 보림사의 작설차이고, 화개진품(花開珍品)은 지리산 화개동 칠불선원의 차다.

함무토산(咸務土産)은 함평과 무안에서 나는 토산차이고, 강해제작(康海製作)은 강진과 해남에서 만든 차다.

 서석창기(瑞石槍旗)는 무등산에서 나는 일창일기(一槍一旗) 차다. 백양설취(白羊舌嘴)는 백양사의 작설차다.

덕룡용단(德龍龍團)은 덕룡산 불회사의 용단차이고, 월출출래(月出出來)는 월출산 백운동에서 나는 차를 가리킨다.

 모두 10곳의 차 산지를 구체적으로 꼽았다. 차도 창기(槍旗)·금설(禽舌)·설취(舌嘴)·용단(龍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13-20구는 차의 효용과 쓰임을 노래했다.

 차를 마시면 마음에 답답한 것이 말끔히 가셔지고, 정신이 번쩍 들어 졸음이 가시며, 소화에 도움이 된다고 적었다.

설사도 멈추게 하고 감기를 낫게 하며, 독성을 해독해주는 다양한 효능이 있다.

 이러한 차를 유가에서는 공자의 사당에 다례(茶禮)를 올리고, 불가에서는 부처님 전에 차공양을 올린다.


25-38구까지는 차를 즐기는 대둔사 승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아, 당대에 성대하게 퍼진 차문화의 실상을 증언했다.

중부(中孚:艸衣)·리봉(离峯)·무위(無爲)·예암(禮庵)·남파(南坡)·영호(靈湖)·제산(霽山)·언질(彦銍)·성학(聖學)·태연(太蓮) 등

10명의 이름이 보인다. 모두 초의 이후 그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다.

리봉이 초의를 이었고, 무위는 차의 조화(調和)를 법도에 맞게 끓여 내는데 특별한 역량이 있었다.

예암은 예전 방법대로 차를 잘 보관할 줄 알았다. 남파는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차를 즐겼고, 영호는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차와 늘 함께 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승려들의 영향으로 세속의 인사 중 차를 즐기는 이들이 당송 제현들만큼이나 늘어났다고 했다.

 제산(霽山)은 차의 진미(眞味)를 즐길 줄 알았고, 언질(彦銍)이 납일(臘日)에 따서 덖은 찻잎을

성학(聖學)이 끓여내어 태련(太蓮)을 불러 함께 마시는 성황을 이어서 노래했다.

차는 만병천수(萬病千愁), 즉 온갖 질병과 갖은 시름을 다 걷어가고, 성품에 따라 소요하게 만든다.

경탕(經湯), 곧 차를 끓이는 동안 기록을 하고 찬송을 한다.

 문득 하늘을 올려 보면 유성 하나가 꼬리를 태우며 가없는 하늘가로 지나간다.

 그저 두면 밤하늘에 잠시 명멸했던 별똥별처럼 스러질 이러한 기록들을

모두 꼼꼼히 적어서 길이 세상에 전하겠노라는 다짐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생생한 현장을 증언한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다.

 

 

 

 

 

초의차에 대한 증언과 그 밖의 차시

 


이밖에도 각안의 문집에는 적지 않은 차시가 실려 있다.

특히 그의 「초의차(草衣茶)」는 초의가 만든 차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한 중요한 기록이다.



穀雨初晴日 곡우에 이제 갓 날이 개어도
黃芽葉未開 노란 싹 잎은 아직 펴지 않았네.
空鐺精炒細 빈 솥에 세심하게 잘 볶아내어
密室好乾來 밀실에서 아주 잘 말리었구나.
栢斗方圓印 잣나무 그릇 방원(方圓)으로 찍어내어서
竹皮苞裹裁 대껍질로 마르재어 포장한다네.
嚴藏防外氣 잘 간수해 바깥 기운 단단히 막아
一椀滿香回 한 사발에 향기 가득 떠도는구나.



곡우 전 미처 잎이 펴지지 않은 일창일기(一槍一旗)만을 가려 따서 돌솥에서 세심하게 잘 볶아낸다.

 이를 밀실에서 잘 건조해,

바싹 마른 뒤에 빻아 돌샘물로 반죽해서 잣나무 틀에 넣어 네모지게 혹은 둥근 모양으로 찍어낸다.

건조 후 틀에서 떼어낸 차는 대나무 껍질로 싸서 포장한다.

외부의 습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잘 감싸서 건조한 곳에 보관해 두고, 이를 꺼내 끓여 마시면

한 잔 차에 맑은 향기가 온통 가득 감돈다고 했다.


이 시는 1878년에 지은 작품인데, 초의가 세상을 뜬지 12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는 1852년 자신이 직접 차의 약효를 체험한 이후, 초의차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듯,

제다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위 시는 초의차가 떡차임을 증언하고, 잣나무 틀에 넣어 여러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대나무 껍질을 이용해서 포장하고 보관한 내용까지 상세하게 적었다.


다음 「다구명(茶具銘)」에서도 자신의 차생활을 담백하게 노래했다.



生涯淸閒 생애도 청한(淸閒)해라
數斗茶芽 몇 말의 차싹일세.
設苦窳爐 힘들게 화로 앉혀
載文武火 문무(文武) 불을 피워낸다.
瓦罐列右 오지 다관 오른 편에
瓷盌在左 화자잔(花瓷盞)은 왼편에.
惟茶是務 오직 차만 힘 쏟으니
何物誘我 무슨 물건 날 꼬이리.



몇 말 차싹을 동무 삼아 건너가는 청한한 삶을 노래했다.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낡은 화로를 어렵게 꺼내, 숯불을 피워 문화(文火)와 무화(武火)를 조절한다.

오지로 만든 다관과 도자기로 구운 찻잔을 양편에 벌여 놓고, 차 마시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밖에 어떤 물건이 다시 내 마음을 유혹할 수 있겠는가?


「김금사에게 화답함[和金錦史]」이란 작품을 읽어 보자.



妖魔間闖一山空 요사한 마귀 틈을 타서 온 산이 텅 비었고
石徑荒涼久不通 돌 길은 황량해라 오래도록 막히었네.
掃榻承顔長日短 평상 쓸어 얼굴 뵙자 긴 날이 외려 짧고
煎茶促膝小房洪 무릎 맞대 차 끓이니 작은 방이 드넓구나.
浮林暖氣無心碧 뜬 숲의 따순 기운 무심히 푸르고
滿塢花情有意紅 두둑 가득 핀 꽃들은 뜻 있는 듯 붉도다.
詩境談軒雙具足 시경(詩境)과 담헌(談軒)을 둘 다 갖춰 넉넉하니
逢場不似恨應同 만남만은 못하지만 안타까움 같으리라.



김금사란 이에게 화답한 글이다.

작은 방에서 무릎을 맞대고 차를 달이며 시 짓고 담소하며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차를 끓이니 좁은 방이 문득 훵하니 커보인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김구암을 전송하며[送金構庵]」란 작품의 3,4구에서는

 “차 달이며 기다리니 맑은 바람 일어나고, 책을 펴자 괴론 비도 까맣게 잊는다네". 라고 노래했다.

 또 「운포 이사백의 시에 차운하다」의 3,4구에서는

“달 뜬 누각 자리 옮기니 숲엔 초록 넘쳐나고, 차 마시는 화원에는 찻잔에 붉음 떠오른다". 고 노래했다.

당시 마신 차가 발효된 떡차였음을 짐작케 한다.


다음은 「쾌년각에 제하다[題快年閣]」란 작품이다.



新開法宇鎭崗頭 절집을 새로 열어 산 머리를 진압하니
虎踞龍盤百谷流 용과 범이 서린 곳에 온갖 골이 흘러든다.
古寺千年回運吉 천년의 옛 절에는 회운(回運)이 길하고
殘僧一鉢卜居幽 남은 중의 바리때로 거처가 그윽하다.
淸風吹起東茶興 맑은 바람 건들 불자 동차(東茶)가 일어나고
好鳥噪分謾語愁 좋은 새 지저귀니 공연한 말 근심겹다.
竭力成功裨補地 힘을 쏟아 공을 이룬 비보(裨補)의 땅에서
虛消水火等閒遊 물과 불 그저 꺼서 마음 편히 노닐리라.



쾌년각은 대흥사 경내의 건물 이름으로 초의가 입적한 공간이기도 하다.

새로 건물을 짓고서 쓴 시인데,

5구에서 맑은 바람이 일어나자 동차(東茶)가 일어났다고 한 말이 흥미롭다.

초의의 「동다송」으로 비롯된 다풍의 진작이 이 공간에서 일어났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상 살펴본 시 외에도 각안은 십 여수의 차시를 더 남겼다.

「북암을 찾아[訪北庵]」의 7,8구에서는 오랜 만에 찾은 북암에서

 “나이 들자 인정이 중해짐 탄식타가, 땀 닦으며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네.

堪嗟年邁人情重, 掩汗尋來共喫茶”라고 차가 주는 위안을 노래했고,

「차태연(次泰演)」의 1,2구에서는 “공문(空門)에 한번 들어 시비를 끊었거니,

다방(茶坊)과 강사(講肆)에는 나무람 아예 없네. 一入空門斷是非, 茶坊講肆了無譏”라고 적었다.

「조행탄과 윤백은의 월야운에 화답하다[和趙杏綻尹白隱月夜韻]」의

1,2구는 “차 마시고 고담(古談)하니 흰 달이 떠오르고, 골짜기 바라보자 흰 구름 깔려있다.

 茶罷古談皓月生, 洞天一望白雲平”고 생활 속에 깊이 깃든 차를 노래했다.


만년에 지은 차시 한 수를 읽으며 글을 맺는다.

「무자년 봄에 다시 보련각에 들어[再入寶運閣戊子春]」는 67세 때인 1888년에 지었다.

 

再入寶運閣 보련각에 다시금 들어서려니
騁過十九春 열 아홉 번 봄날이 지나갔구나.
光陰依舊在 세월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物色到今塵 물색은 이제 와서 티끌 되었네.
竹樹迎人喜 대나무는 사람 맞아 기뻐하건만
香燈見老嚬 향등(香燈)은 늙은이 보며 낯 찌푸린다.
茶爐溫堗坐 차 화로 온돌에 앉았노라니
誰謂我家貧 그 누가 내 살림 가난타 하리.



역시 19년 만에 보련각을 찾았다가 온돌방에 차화로를 앞에 놓고 무상한 감회에 젖어 노래한 내용이다.

 이렇듯 차로 죽을 병에서 소생한 이래로 만년까지 차는 그와 늘 함께 했던 벗이었다.

「범해선사행장」에는 마지막 「임종계」를 소개한 후

"인하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를

평소처럼 밤새도록 염불하다가6일 새벽에 앉아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적고 있다.

그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차와 함께하다가 훌쩍  떠났던 것이다.

 

 

 

 

 

 

《에필로그》

 

조선 후기 차 문화사의 전망과 과제

 

- 전략 -

 

 

대표적 차 고전이라 할 『동다송』은 각 구절 밑에 해당 전거를 각주로 달아놓았다.

이것을 단락 표시로 착각하면서 17송이니 31송이니 하는 이상한 분절법이 생겨났다. 고작 40여 구에 불과한 

한 편의 시를 수십 토막으로 잘라 읽는 독법이 지금도 바른 방법인 양 행세하고, 아예 토막을 쳐서 비석에 새기기까지 한다.

창피한 노릇이다. 이 간단한 상식조차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흔히 다산의 말로 즐겨 인용되는 "차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는 음다흥국론 같은 것은 다산이

한 번도 한 적이 없은 말이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얘기가 오늘도 신화처럼 떠돈다.

초의가 백운동에 갔다가 거기서 백학령(白鶴翎)이란 신품종의 국화를 보고 쓴 시가 있다.

그런데 첫 번역에서 이 백학령이 국화 품종의 이름인 것을 모르고 백학이 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다음에 실린 "그중의 한 그루를 나눠 화분에 심고"라는 시가

느닷없이 "차나무 한 그루를 화분에 심고"로 둔갑해버렸다.

나중에 이 시는 한국의 차시 속에 버젓이 포함되었다. 차나무를 화분에도 심는가?

여태껏 10여 종 『초의시집』의 번역이 나왔어도 이오류는 전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동다기』에 '구방지상마(九方之相馬)'란 말이 나온다. 중국 고대에 천리마를 잘 알아보던 구방고란 사람이

말을 관상 보듯이, 차의 맛을 잘 감별해낸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정작 차 문화 강의 교재에는 "아홉 방향으로 서로 말을 타고"로 풀이되어 있다.

그 아래 해설을 보면 더 우습다. 이런 식의 오역과 오류의 답습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다도 예절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다법이 개발되곤 한다.

차 잡지에 실리는 찻자리 퍼포먼스를 보면 야단스러원 우습기까지 할 때가 많다.

보여주기 위한 공연에 그칠 뿐 삶 속에 뿌리내리지는 못하는 눈치다.

차는 이제 근사한 다실을 꾸며 값비싼 다기를 늘어놓고 갖은 격식을 다 갖추어야 할 수 있는 호사 취미가 되었다.

차를 마시고 향을 사르며 인생의 정취를 음미했던 선인들의 정신은 까마득히 잊혀진 기억 저편의 일이 되고 말았다.

 이제라도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조선 시대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차 문화사의 전망과 정신사적 맥락을 수립하는 문제가 시급하다.

초의 이후 모처럼 중흥을 맞이했던 우리 차 문화는 초의가 세상을  뜨자 다시 잊혀진 문화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한영 같은 이가 차를 만들어 팔기도 했으나, 일본인들이 차를 상품화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한 것이지,

우리 차 문화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 이후 다도는 일본 다도의 흉내요 이식이었을 뿐이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우리의 차 문화가 오롯한데 저들의 꽁무니만 따라다닌 데서야 될 법한 일이겠는가?

우리도 중국처럼 우리 차 문화를 종합하는 전망을 수립할 때가 되었다.

자료를 집성해서 묵직한 자료집으로 간행하고,

차 문화사의 전체적 전망을 세우는 작업을 좀 더 정치하게 진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

 
 
- 후략 -

 

 

참고도서 : 정민 著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Nuages En Montagne - Pierre Po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