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차 문화 소고 (6)

茶泉 2018. 9. 4. 05:07



 

 

 

 

 

김명희가 향훈 스님을 위해 써준 「다법수칙

 

 

 

산천 김명희의

「다법수칙」
추사의 동생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역시 향훈에게 보낸 친필인 「다법수칙(茶法數則)」. 향훈에게 채다(采茶)와 제다법(製茶法)에 대해 6개 항목에 걸쳐 써준 내용이다. 초의의 『다신전(茶神傳)』과 함께 조선 차문화사의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이제 이 글을 쓰게 된 전후 사정을 살펴보고, 원문을 소개한 후 자료가치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새 자료 「다법수칙」에 대하여

「다법수칙」은 누가 언제 왜 쓴 것일까?
이 자료는 모두 7면에 걸쳐 경쾌하고 유려한 산천의 친필 행초체로 적혀 있다. 각면 끝에 면수를 작은 글자로 적어 놓았다. 필자가 보기에 원래는 위 사진 자료에서 보듯 긴 종이에 잇대어 쓴 것을 뒤에 한 장씩 잘라 따로 첩장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본 것은 복사본으로 원본의 소재는 현재 알 수가 없다.
내용은 채다(採茶)와 제다(製茶)에 관한 여섯 항목의 짤막한 글이다. 글 끝에는 다음과 같은 후기가 적혀 있다.


다법 몇 항목을 써서 견향(見香)에게 보인다.
이 방법에 따라 차를 만들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부처님의 일 아님이 없을 것이다. 산천거사.
茶法數則, 書贈見香, 要依此製茶, 以利衆生, 無非佛事耳. 山泉居士.


산천은 추사의 동생 김명희(金命熙)다. 김명희가 견향(見香), 즉 대둔사 승려 향훈(香薰) 스님에게 써준 것이다.
여기 적힌 방법대로 차를 만들어서, 이를 통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 부처님 전에 공덕을 쌓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원래 글의 제목이 따로 없지만, 위 글 첫머리에 ‘다법수칙’이라 한 것을 표제로 삼는다.
여기에 적힌 여섯 항목의 내용은 김명희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권 27에 실린 『만학지(晩學志)』 권 5, 「잡식(雜植)」조의 차 관련 내용 중에서 간추렸다. 산천이 직접 중국 다서를 보고 베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원문을 대조해보니 서유구가 옮겨 적으면서 생략한 대목이나 원본과 다르게 적은 몇 글자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서유구의 저술에서 추려 적은 것이 분명하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피기 전에, 산천이 인용한 항목별 서목을 잠깐 검토해본다.

1. 송 조길(趙佶), 『대관차론(大觀茶論)』 중 「채택(采擇)」조
2. 송 조여려(趙汝礪), 『북원별록(北苑別錄)』 중 「채다(採茶)」조
3. 명 허차서(許次紓), 『다소(茶疏)』 중 「채적(採摘)」조
4. 명 허차서(許次紓), 『다소(茶疏)』 중 「초차(炒茶)」조
5. 명 도륭(屠隆),『다전(茶箋)』 중 「채다(採茶)」조
6. 명 문룡(聞龍),『다승(茶箋)』 중 첫 항목

『대관차론』과 『북원별록』, 『다소』와 『다전』, 『다전(2)』 등 모두 5종 다서에서 6단락을 인용했다.
『대관차론』은 송나라 휘종황제 조길(趙佶)이 지었다. 차를 심는 일에서 찻잎 채취, 차 제법과 품상(品賞)에 이르는 내용을 담았다. 대관(大觀)은 휘종의 연호(1107-1110)다. 『북원별록』은 송나라 조여려(趙汝礪)가 지었다. 남송 효종(孝宗) 때 사람이다. 웅번(熊蕃)의 『선화북원공다록(宣和北苑貢茶錄)』을 보완하기 위해 지었다. 『다소』는 명나라 허차서(許次紓, 1549-1604))의 저술이다. 고금의 제다법을 참고하여 채다에서 음다까지 차문화의 제 방면을 간추려 저술했다. 『다전』은 명나라 도륭(屠隆)(1542-1605)가 지었다. 그의 저작인 『고반여사(考槃餘事)』 중의 일부분인데 따로 떼어 이렇게 부른다. 차의 주요 산지와 채다법, 보관법, 찻물론, 찻그릇, 그리고 차의 효능까지 정리한 글이다. 『다전(2)』는 명나라 문룡(聞龍)이 1630년 전후 하여 편찬한 다서다.
이렇듯 산천의 『다법수칙』은 송대와 명대의 5종 다서에서 한 두 항목을 초록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 2, 3, 5는 모두 찻잎 따는 요령과 시기를 다룬 채다(採茶)의 내용이고, 4와 6은 차덖기에 관한 내용이다. 그밖에 보관이나 찻물, 차 끓이기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 글이 단지 차를 따서 덖는 과정에 도움을 주려고 필사된 것임을 말해준다.
추사는 이전부터 초의와 향훈에게서 차를 얻어 마시고 있었다. 그 차를 산천도 나눠 마셨다.
그런데 산천이 왜 새삼스럽게 차를 만들고 덖는 방법에 대해 글로 써서 향훈에게 보낸 걸까? 향훈이 바른 제다방법을 산천에게 물었거나, 아니면 향훈이 만든 차 맛에 부족한 점이 있는 듯하여, 제다법을 일러주려 했던 듯하다. 이 방법대로 만들라고 한 언표로 보아 당시까지도 차 만드는 방법이 온전하게 자리잡지 못했던 형편을 가늠할 수 있다. 이는 초의나 향훈 당시 조선에 이렇다 할 제다 이론이 없었고, 중국 다서를 참조하여 실험해보고 적용해보는 단계에 머물렀다는 뜻이 된다. 초의도 명나라 장원의 『다록』를 베껴서 『다신전』이란 제목으로 묶은 일 또한 제다 이론의 정립 과정에서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전남 보성의 차밭.

 

 

「다법수칙」의 채다법

 

 

 

이제 위 여섯 항목을 채다법과 초다법으로 나눠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원문은 처음에 서유구가 중국 다서를 옮겨 적으면서 필요에 따라 일부 내용을 삭제한 것이 있다.

해당 원문 중 [ ] 부호로 표시한 것은 원전 상태를 보여준다. 전사 과정의 명백한 오자는 원문에서 바로 잡았다.

[1] 차를 따는 것은 동트기 전에 하여 해가 나면 그만 둔다.

손톱을 써서 싹을 끊어야지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면 안 된다.

 기운이 오염되고 내음이 스며 차가 깨끗하지 않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그런 까닭에 찻 일은 흔히 새로 길은 물을 뒤따르게 하여 싹을 따면 물에다 넣는다.

 무릇 싹이 참새 혀나 낟알 같은 것을 투품(鬥品)으로 치고, 일창일기(一槍一旗)는 간아(揀芽)로 여기며,

일창이기(一槍二旗)는 그 다음이고, 나머지는 하품(下品)이다.


찻잎 채취에 알맞은 시간과 채취 요령을 적었다. 찻잎의 채취는 해 뜨기 전에 시작해서 해가 뜨면 그만 둔다.

반드시 손톱으로 싹을 끊고,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지 말라고 했다. 진이 나와

기운이 오염되고 잡내가 스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특이한 점은 맑은 물을 길어 찻잎을 따는 즉시 물에다 담가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게 한 것이다.

가장 상등품은 작설(雀舌) 즉 참새 혓바닥이나 곡식의 낟알처럼 이제 막 움터나 잎이 채 펴지도 않은 첫 싹을 꼽는다.

그 다음이 일창일기(一槍一旗)다. 일창일기는 찻잎이 처음 나올 때 창처럼 곧추서서 채 펴지 않은 잎과

그 옆에 깃발처럼 펴친 한 잎이 달린 상태를 말한다. 그 다음은 다시 일창 옆에 두 잎이 펴진 상태다.

산천의 원문은 ‘이창이기(二槍二旗)’라고 썼는데, 『대관차론』의 원문에 따른다. 서유구의 오자를 그가 그대로 베껴 쓴 결과다.

이로만 본다면 당시 서유구나 산천 또한 실제 찻잎의 모양이나 찻잎의 성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했음이 드러난다.

 이후 한 줄기에 여러 잎이 돋아나면 하품으로 친다.
이러한 구분은 지금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찻잎을 채취할 때 맑은 물을 길어 찻잎을 따는 대로 물에 담그라고 한 점이 특이하다.



[2] 차를 따는 방법은 모름지기 새벽에 작업을 해서 해를 보게 하면 안 된다.

새벽에는 밤 이슬이 아직 마르잖아 차싹이 살지고 촉촉하다.

해를 보면 양기에 엷어지는 바가 되어, 싹의 기름진 것을 안에서 소모시키므로 물에 담궈도 선명하지 않게 된다.

이 글에서도 역시 찻잎 채취를 해 뜨기 전에 시작해서 마칠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도 설명했다.

동트기 전에는 찻잎이 밤 이슬에 젖어 차싹이 수분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해가 뜬 뒤에는 양기(陽氣)가 왕성해져서 수분이 엷어진다.

그 결과 차싹의 기름기가 소모되어, 물에 담궈도 빛깔이 선명하지 않게 된다고 적었다.



[3] 청명과 곡우는 차를 딸 때이다. 청명은 너무 이르고, 입하는 너무 늦다. 곡우 전후가 가장 알맞은 때다.

 만약 다시 하루 이틀 기간을 지체하면서 기력이 완전히 채워지기를 기다리면, 향기가 배나 더 짙어지고 거두어 보관하기가 쉽다.

 [매실이 익을 때는 덥지가 않아] 비록 조금 크게 자라더라도 여전히 여린 가지요 보드라운 잎이다.

이 항목은 1년 중 차를 따는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청명과 입하 사이가 차를 따는 시기인데,

청명은 너무 이르고, 입하는 너무 늦으므로 곡우를 전후한 시기가 가장 적기라고 했다.

혹 날씨에 따라 찻잎에 기력이 충분치 않아 보이면, 곡우를 지나서도 오히려 하루 이틀 더 기다려 적절한

발육을 보일 때 채취해야 향이 더욱 짙고 보관도 용이하다고 적었다.

매실이 익을 무렵에는 아직 날이 찌지 않아, 찻잎이 크게 자랐다 해도 여전히 여린 잎이어서 차로 만드는데 문제가 없다.


다만 초의는 『동다송』의 주석에서

『만보전서』에서는 곡우 닷새 전이 가장 좋고, 닷새 뒤가 그 다음이며, 다시 닷새 뒤가 그 다음이라고 적은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곡우 전후는 너무 이르고, 입하 이후가 가장 좋다고 보았다.

 또한 입하 이후에 밤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동트기 전 이슬 머금은 잎을 딴 것이 가장 좋고,

그 다음은 해가 났을 때 딴 것이며, 비올 때는 찻잎을 따면 안 된다고 적었다.


찻잎의 채취 시기는 각 지역의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초의의 위 언급은 그가 중국 다서를 교조적으로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실제 최근 들어서는 봄이 앞당겨져서 아예 청명 이전에 채취한 찻잎으로 만든 명전차(明前茶)까지 출시되는

 것으로 보아, 채다 시기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야 한다는 [3]의 언급은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준다.



[5] 차를 딸 때는 너무 가는 것은 딸 필요가 없다.

가늘면 싹이 갓 움터서 맛이 부족하다. 너무 푸를 것도 없다. 푸르면 차가 쇠어서 여린 맛이 부족하다.

모름지기 곡우 전후에 줄기가 잎을 두르기를 기다려 옅은 녹색에 둥굴고 두터운 것이 상품이다.

[5]는 찻잎을 채취할 때 유념해야 할 찻잎의 모양과 빛깔에 관한 내용이다.

너무 가는 잎은 맛이 충분히 배지 않았으므로 따지 말고, 푸른 것은 너무 쇠었다는 증거니 역시 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곡우 전후에 일창이기, 일창삼기 쯤 되었을 때, 잎 빛깔은 연녹색을 띠고, 잎 모양은 둥글고 도톰한 것이

가장 상품이라고 적었다. 이점은 오늘날도 같다.


이상 네 항목의 채다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하루 중에는 동트기 전에 찻잎을 따야 한다.
둘째, 찻잎을 딸 때는 손톱으로 끊어야지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면 안 된다.
셋째, 일년 중에는 곡우 전후한 시기가 채다의 가장 적기다. 시기가 좀 늦더라도 맛이 밴 뒤에 따야 향이 좋다.
넷째, 잎은 연녹색에 둥글고 도톰한 것이 상품이다.
다섯째, 채취한 찻잎은 맑은 물에 즉시 담궈 두는 것이 좋다.

 

 

「다법수칙」의 초다법炒茶法


나머지 두 항목은 차덖기에 관한 내용이다. 차례로 보자.

[4] 생차를 처음 따면 향기가 아직 스미지 않아 반드시 불의 힘을 빌어서 그 향기를 펴낸다.

 하지만 성질이 힘든 것을 견디지 못하기에 오래 덖으면 안 된다. 너무 많이 가져다가 솥에 넣으면 손의 힘이

고르지가 못하다. 솥 가운데 오래 두면 너무 익어서 향기가 흩어진다. 심하여 타버리면 어찌 차를 끓일 수 있겠는가.

차 덖는 그릇은 신철(新鐵), 즉 새것의 쇠를 가장 싫어한다. 쇠 비린내가 한번 배면 향기가 다시는 나지 않는다.

더 꺼리는 것은 기름기이니, 쇠보다 해로움이 심하다.

[모름지기 미리 솥 하나를 취해, 오로지 밥을 짓는데만 쓰고 따로 다른 용도로는 쓰지 않는다.]

차를 덖는 땔감은 나뭇가지만 쓸 수 있고 둥치나 잎은 쓰지 않는다. 둥치는 불의 힘이 너무 맹렬하고, 잎은 불이 쉬 붙지만

금세 꺼진다. 솥은 반드시 깨끗이 닦아 잎을 따는 즉시 바로 덖는다.

솥 하나 안에는 다만 4냥만 넣는다. 먼저 문화(文火) 즉 약한 불로 덖어 부드럽게 하고, 다시 무화(武火) 곧 센 불을 더해

재촉한다. 손에는 대나무 손가락을 끼고서 서둘러 움켜서 섞는다. 반쯤 익히는 것을 법도로 삼는다.

은은히 향기 나기를 기다리니, 이것이 바로 그때이다.


생차에는 차향이 배이지 않아, 불의 힘을 빌어서 향을 펴나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린 찻잎이라 열기에 약하므로

오래 덖으면 향기가 다 흩어지고 만다. 또 한꺼번에 너무 많이 덖어도 안 된다. 손의 힘이 고르게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차가 타기라도 하면 버린 물건이 된다. 가장 금기해야 할 것은 새 철의 날내가 배는 것이다. 차향에 쇠 비린내는

치명적이다. 또 차는 기름기를 몹시 꺼리므로, 차를 덖는 솥에는 기름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러니 차를 덖는 솥에 밥 짓는 것 외에 다른 음식을 조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다음은 차를 덖을 때 쓰는 땔감이다. 나뭇가지만 써야지 통나무나 잎을 쓰면 안 된다. 통나무는 화력이 너무 세서

찻잎을 태우기 쉽고, 잎은 너무 약해 금세 꺼지기 때문이다. 찻잎은 따는 즉시 묵혀 두지 말고 바로 덖어야 한다.

한 솥에는 4냥 이상을 넣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약한 불로 기운을 부드럽게 하고, 센 불로 마무리를 한다.

 손가락에 대나무를 가락지처럼 끼워 뜨거운 찻잎을 고루 섞어주어야 한다. 반만 익혀야지 푹 익히면 안 된다.

찻잎에서 은은한 향기가 코 끝에 훅 끼쳐오는 바로 그때가 덖기를 마쳐야 할 가장 적절한 시점이다.

 



[6] 덖을 때는 모름지기 한 사람이 곁에서 부채질을 해주어 열기를 없애야 한다. 뜨거우면 황색이 되어, 향과 맛이 모두 줄어든다.

[6]은 덖을 때의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차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면 곁에서 부채질을 해서 뜨거운 열기가 엉기지 않도록 한다.

너무 뜨겁게 되면 빛깔이 황색으로 변하고, 향과 맛이 그만큼 줄어든다.


초다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여린 잎을 오래 덖거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덖으면 안 된다.
둘째, 한 솥에 한꺼번에 덖는 분량은 4냥 이하가 적합하다.
셋째, 화기가 지나쳐서 태우면 절대로 안 된다.
넷째, 쇠솥의 날 비린내가 배거나 기름기가 스며도 안 된다.
다섯째, 찻잎을 덖을 때는 나뭇가지를 써야지 통나무나 잎을 쓰면 안 된다.
여섯째, 찻잎을 고루 섞어 주려면 손가락에 대나무를 깍지 끼워 쓰면 좋다.
일곱째, 차를 덖다가 향기가 올라 올 때 덖기를 멈추어야 한다.
여덟째, 곁에서 부채질을 해서 열기를 걷어내 주어야 한다.

이상 산천 김명희가 향훈 스님에게 준 「다법수칙」 6항목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내용은 찻잎 채취의 방법과 시기를 적은 채다법과, 찻잎을 덖을 때 주의 사항을 적은 초다법으로 구분된다.

이 글은 향훈에게 채다와 초다의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산천이 중국 차서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초의를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차를 만들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다 할 제다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조선 차문화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정작 산천 자신은 제다에 경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차의 생태나 성질도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의 다서를 읽음으로써 그 과정을 체득했고, 이를 향훈에게 요령있게 가르쳐 주어 그가 만든 차맛이

 한결 더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기여한 공이 있다. 실제 산천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다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이론으로 섭렵한 데 그친 서유구에 비해 산천의 「다법수칙」은 바로 향훈에게 전해져서 실전에 적용되었다.

 초의의 『다신전』과 함께 산천의 『다법수칙』이 차문화사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천 김명희의 「사차 謝茶」시와 초의의 제2다송

 

 

앞서 살폈듯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7)는 향훈(香薰)에게 「다법수칙(茶法數則)」을 써주었을만큼

차를 몹시 즐겼을 뿐 아니라, 그의 호가 말해주듯 샘물에도 관심이 높았다. 초의가 보내온 차를 마시고 감사의

뜻을 담은 「사차(謝茶)」시가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수록되어 있거니와, 초의 또한 이에 화답한 시를 남겼다.

이번 호에서는 산천과 초의의 수창시를 꼼꼼히 읽어 보겠다.



산천과 초의의 인연

산천과 초의의 첫 대면은 1815년 초의가 처음으로 상경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후 두 사람은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1830년 10월 8일 추사의 부친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이 정쟁에 몰려 강진현에 속한 고금도(古今島)로

위리안치 되면서 다시 왕래가 재개되었던 듯하다. 당시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강진에 있던 다산의 제자들에게 친구인

 추사의 부친을 돌보게끔 했다. 이 과정에서 초의를 비롯한 대둔사 승려들도 추사 형제가 부친을 뵈러 고금도에 내려오자

유당도 보살필 겸 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모양이다. 『일지암시고』에 실려 있는

금호에서 산천도인과 유별하다(琴湖留別山泉道人)」란 시에 이때의 일이 적혀 있다.



憶曾傾蓋西館雪 일찍이 눈 오던 서관(西館)에서 만났을 때
更闌華燭光明滅 밤 깊자 화촉 불빛 모두 다 사위었지.
颯爽不似在人間 상쾌하여 인간에 있는 것 같지 않고
爲近仙子氷玉潔 신선에 가까워서 빙옥인양 깨끗했네.
忽間氛䘲久冥冥 홀연 나쁜 기운 오래도록 깜깜하여
海闊天長鱗鴻絶 넓은 바다 긴 하늘에 소식조차 끊겼었지.
참소로 인해 10여년이나 소식이 끊어졌다(-因讒阻絶十有餘年) .
明月久曠同澄輝 밝은 달 오래어도 맑은 빛은 한가진데
白雲空復淸怨結 흰 구름 하릴없이 맑은 원망 맺혔구나.
天涯涕淚爲汍瀾 하늘가서 흘린 눈물 하염없이 흐르니
舊日天機還高挈 지난 날의 천기(天機)가 도로 높게 이끄누나.
고호(古湖)에서 본 뒤로 다시 예전처럼 좋아졌다.(古湖見後, 還如舊好)
蘭操細將幽恨傳 고운 가락 세세히 그윽한 한 전해주니
償音最是關情切 노래 듣자 마음 끌림 몹시도 간절해라.
當時世事何崢嶸 당시의 세상 일은 어찌 그리 험했던고
太行孟門同嶻嶭 태항산 맹문산과 높고 험함 꼭 같았네.
千里忽傳新安耗 천리라 홀연히 신안(新安) 소식 전해지니
공이 고호에 있을 적에 요절의 슬픈 소식을 들었다.(公在古湖, 聞夭慼之報)
人間何怨可相埓 인간 세상 어떤 원망 여기에다 견주리오.
我亦曾看英妙姿 나도 진즉 영묘한 자태를 보았거니
玉蘭銀桂藹將擷 옥란(玉蘭)과 은계(銀桂)가 우거져 캘만 했네.
我若詳言恐斷腸 내 자세히 말을 하면 애 끊을까 염려되어
爲君且置休煩說 그댈 위해 공연한 말 놓아두고 그만하리.
扶旺今日泰運來 오늘은 왕성하게 큰 운이 돌아와서
琴堂影翠摩漢洌 금당(琴堂) 푸른 그림자가 한강물에 비치누나.
사면을 받아 서올로 올라왔을 때 금호(琴湖)에서 지냈다.(蒙宥上洛時居琴湖.)
三秋高會窮憐歡 삼추의 고회(高會)에서 슬픔 기쁨 다 나누며
-甲午秋重會琴石亭 갑오년(1834) 가을에 다시 금석정(琴石亭)에서 만났다.
閒碾鳳團燒鷄舌 한가로이 봉단(鳳團) 갈고 계설향(鷄舌香)을 살랐다네.
人生聚散苦難常 인생 만나 헤어짐이 일정찮음 괴로운데
凄勵風前復遠別 차고 매운 바람 맞고 다시 멀리 헤어진다.
또 남겨두고 작별하여 남쪽으로 돌아간다. (又留別南歸 )
醉德飽義更何時 덕에 취하고 의에 배불릴 날 다시 어느 때일런가
此身還復如飢餮 이 내 몸 도리어 굶주려 배고픈 듯.



1834년 가을에 초의는 철선(鐵船)과 향훈(向薰), 자흔(自欣) 등과 함께 상경했다.

 산천과 불등(佛燈)에 걸고 약속한 금강산 유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때 산천이 중병을 앓아

여행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은 수십 일 동안 불경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천의 병구완을 하며 지냈다.

위 시는 해남으로 돌아갈 때 산천에게 작별 선물로 지어준 시다.


초의는 자신이 산천과 처음 만난 곳을 서관(西館)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분명치 않다.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부터 의기가 통해 밤새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는 참소로 인해 10여년 간 소식이 끊어졌다고 했다. 이후 추사 집안에 불어 닥친 정쟁의 회오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다가 고호(古湖)에서 다시 만나 예전의 우의를 회복하게 되었다.

고호는 1830년 이후 4년간 유당이 귀양 와 있던 고금도(古今島)를 가리킨다.


시를 보면 당시 산천이 부친을 모시려고 고금도로 내려와 있을 때 아들이 요절하는 참척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들은 초의가 10여년 전 처음 만났을 당시 이미 영묘한 자태를 보았다고 했으니, 근 20세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다.

장성한 자식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산천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법 하다.


이후 1834년 가을 상경 시에 초의 일행은 한강가 금호(琴湖)에 있던 추사의 별장에서 잠시 묵었다.

그곳의 금석정(琴石亭)에서 초의가 가져온 떡차인 봉단차(鳳團茶)를 차맷돌에 가루내어 차를 끓이고,

정향나무 꽃잎으로 만든 계설향(鷄舌香)을 피우며 반가운 재회의 자리를 가졌다.

산천의 아우인 기산(起山) 김상희(金相喜)도 이때 초의차를 받고서 「사차장구(謝茶長句)」를 지어 사례하였고,

초의가 이에 화답한 시가 『일지암시고』에 실려 있다. 기산의 시는 남아 있지 않다.

 

 

 

 

 

 

김홍도의 「취후간화(醉後看化」국립박물관 소장.

 

 


산천의 「사차」시

1834년 만남 이후 두 사람은 또 한 동안 서로 대면하지 못했다.

 1838년 초의는 4년 전에 이루지 못한 금강산 유람을 실행에 옮겼고, 이후 동대문 밖 청량사 등에서 머물렀다.

1840년 이번에는 추사가 제주로 유배를 갔다. 초의는 1843년에 바다를 건너가 추사를 만났으나,

 산천과의 회면은 이뤄지지 않았다. 1848년 추사가 해배되어 상경하면서, 초의차를 요구하는 추사의 편지가

과천과 해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다음 시는 1850년, 초의차를 받은 김명희가 감사의 뜻을 담아

초의에게 보낸 「사차(謝茶)」시다. 이 시를 지을 당시 산천은 이미 63세의 노인이었다.

『일지암시고』에는 「부원운(附原韻)」이라 하였고, 시 끝에 다음과 같은 긴 글이 제목 대신 들어 있다.

학질을 앓아 갈증이 심하므로 신령한 차를 청했다.

 근래 연경의 시장에서 구입해 온 것은 비단 주머니에 수 놓은 천으로 싸서 한갓 겉치장만 힘쓸 뿐

거친 가지와 질긴 잎이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다. 이러한 때 초의가 부쳐온 차를 얻으니,

응조(鷹爪)와 맥과(麥顆)가 모두 곡우 이전의 좋은 제품이었다. 한 그릇을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문득 번열을 씻어내고 갈증을 해소시키니, 전씨(顓氏)의 갑옷은 이미 저만치 멀리 물러나고 말았다.

고려 때 차를 심게 하여 토산의 공물과 대궐의 하사품을 모두 차로 썼다.

 5백년 이래로 우리나라에 차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이를 따고 덖어 묘함이 삼매에 든 것은 초의에게서 처음으로 얻었다.

공덕이 참으로 무량하다. 산천 노인이 병든 팔뚝으로 쓴다.




老夫平日不愛茶 이 늙은이 평소에 차 즐기지 않았는데
天憎其頑中瘧邪 하늘이 미워하여 학질에 걸렸다네.
不憂熱殺憂渴殺 열 나는 것 걱정 않고 갈증 심함 염려되어
急向風爐瀹茶芽 급히 풍로(風爐) 가져다가 차싹을 달인다네.
自燕來者多贋品 연경(燕京)에서 들여온 것 가짜가 많다하니
香片珠蘭匣以錦 향편(香片)이니 주란(珠蘭)이니 비단 갑에 담았구나.
曾聞佳茗似佳人 듣자니 좋은 차는 고운 여인 같다는데
此婢才耳醜更甚 이 계집종 재주 용모 추하기 그지없다.
艸衣忽寄雨前來 초의 스님 갑자기 우전차(雨前茶)를 부쳐오니
籜包鷹爪手自開 대껍질 싼 응조차(鷹爪茶)를 손수 직접 끌렀다네.
消壅滌煩功莫尙 막힘 뚫고 번열(煩熱) 씻음 그 공이 대단하여
如霆如割何雄哉 우레 같고 칼 같으니 어이 이리 웅장한가.
老僧選茶如選佛 노스님의 차 고르기 부처를 고르듯 해
一槍一旗嚴持律 일창일기(一槍一旗) 여린 싹만 엄히 지켜 가렸다네.
尤工炒焙得圓通 덖어 말림 솜씨 좋아 두루 통함 얻으니
從香味入波羅蜜 향기와 맛을 따라 바라밀(波羅蜜)로 드는구나.
此秘始抉五百年 이 비법 5백년에 비로소 드러나매
無乃福過古人天 옛 사람 그때보다 내 복이 훨씬 낫네.
明知味勝純乳遠 그 맛은 순유(純乳) 보다 훨씬 나음 알겠거니
不恨不生佛滅前 부처님 계실 적에 나지 못함 유감 없네.
茶如此好寧不愛 차가 이리 좋으니 어이 아끼잖으리오
玉川七椀猶嫌隘 노동(盧仝)의 일곱 잔도 오히려 부족하다.
且莫輕向外人道 가벼이 외인에게 말하지 마시게나
復恐山中茶出稅 산 속의 차에 대해 세금 매김 염려되니.



평소에 자신이 차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는데,

 그 잘못을 하늘이 미워해서 자신이 학질에 걸리게 되었노라며 말문을 열었다.

 열 나는 것이야 그러려니 한다 해도, 갈증이 나서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만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제서야 차 생각이 나서 풍로를 가져오게 해 차를 달이기 시작한다.

그 차는 어떤 차인가? 초의가 부쳐온 우전차다.


산천은 시 앞에 수록한 글과 시의 중간 부분에서 당시 중국에서 흔히 들어왔던 형편 없는 품질의 가짜 차에 대해 성토했다.

중국차는 비단 주머니에 수놓은 천으로 차를 포장해서 향편(香片)이니 주란(珠蘭)이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놓았다.

 막상 차를 끓여보면 가지는 거칠고 잎은 질겨서 향은커녕 입에 댈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산천은 좋은 차는 가인(佳人)과

 같다고 한 소동파의 싯귀를 끌어 온 뒤, 중국에서 들여온 차는 재주와 용모가 몹시 추악해서

차마 봐줄 수 없는 계집 종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러다가 초의 스님이 부쳐온 곡우 전에 딴 응조차(鷹爪茶)와 맥과차(麥顆茶)를 마주했다.

응조는 매발톱이고, 맥과는 보리 알갱이다. 채 펴지 않은 차의 첫잎을 형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응조차니 맥과차니 말하는 것은 곡우 전에 딴 첫물차라는 말이다.


이어 산천은 초의차의 포장 상태와 효능에 대해서도 적었다. 포장은 탁포(籜包), 즉 대나무 껍질로 쌌고,

 응조와 맥과라 했듯이 일창일기(一槍一旗)의 여린 싹만을 엄선해서 덖고 말리는 수단을 발휘했다.

효능은 ‘소옹척번(消壅滌煩)’ 즉 막힌 체증을 뚫어주고 번열(煩熱)을 씻어내 준다고 했다.

전씨의 군대가 저만치 물러나고 말았다는 것은 온 몸을 옥죄던 답답한 기운이

활짝 가시어져서 흔적 없이 되었다는 의미다.


또 우리나라가 고려 때 토산의 공물과 대궐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을 모두 차로 썼을만큼 차문화가 진작에 발전하였으나,

지난 500년간 적막하게 단절되어 차가 무슨 물건인지조차 모르게 되었는데, 초의에 와서 그 단절을 메워 제다의 비법이

복원될 수 있었으니, 공덕으로 쳐도 큰 공덕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끝은 차맛이 이다지도 훌륭하므로,

공연히 바깥 사람에게 알려져서 차에 세금을 매기게 되거나,

이런저런 요청으로 성가시게 될 것이 걱정이란 말로 맺었다.

 



제 2의 다송(茶頌), 초의의 답시

산천의 「사차」시를 받아든 초의는 다시 같은 운자로 답시를 썼다.

초의가 정학연과 김상희의 사차시를 받고 쓴 답시가 문집에 실려있지만, 다른 시에는 차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해 초의의 이 답시는 「동다송」에 이은 제 2의 다송(茶頌)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차에 대한 깊은 논의를 담았다.

 제목은 「산천도인의 사차시에 삼가 화운하여(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이다. 경술년(1850)에 지었다.



古來賢聖俱愛茶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차를 아꼈나니
茶如君子性無邪 차는 마치 군자 같아 성품에 삿됨 없다.
人間艸茶差嘗盡 세상의 풀잎 차를 대충 맛을 다 보고서
遠入雪嶺採露芽 멀리 설령(雪嶺) 들어가서 노아차(露芽茶)를 따왔다네.
法製從他受題品 법제하여 이를 통해 제품(題品)을 받고서는
玉壜盛裹十樣錦 옥그릇에 갖은 비단 감싸서 담았다네.
水尋黃河㝡上源 황하의 맨 위 근원 그 물을 찾고 보니
具含八德美更甚 여덟 덕을 두루 갖춰 더욱더 훌륭하다.
『서역기(西域記)』에 말했다. “황하의 근원은 아욕달지(阿褥達池)에서 처음 나온다. 물이
여덟 가지 덕을 머금어,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냄새나지 않고, 마실 때
알맞으며, 마신 뒤에 병이 나지 않는다.”
(西域記云: 黃河之源, 始發於阿褥達池. 水含八德, 輕淸冷軟美, 不臭, 飮時調適, 飮後無患.)
深汲輕軟一試來 경연수(輕軟水) 깊이 길어 한차례 시험하자
眞精適和體神開 참된 정기 마침 맞아 체(體)와 신(神)이 열리누나.
『다서』「천품(泉品)」에 말했다. “차란 것은 물의 신이고, 물은 차의 몸체다. 참 물이
아니고서는 그 신을 드러낼 수가 없고, 좋은 차가 아니라면 그 체를 살피지 못한다.
(茶書泉品云: 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莫顯其神, 非精茶莫窺其體.)
麤穢除盡精氣入 나쁜 기운 사라지고 정기(精氣)가 들어오니
大道得成何遠哉 큰 도를 얻어 이룸 어이 멀다 하리오.
持歸靈山獻諸佛 영산(靈山)으로 가져와서 부처님께 올리고
煎點更細考梵律 차 달임 더욱 따져 범률(梵律)을 살피었네.
閼伽眞體窮妙源 알가(閼伽)의 진체(眞體)는 묘한 근원 다하였고
범어로 ‘알가화(閼加花)’는 차를 말한다.(梵語閼加花言茶.)
妙源無着波羅蜜 묘한 근원 집착 없어 바라밀(波羅蜜)이 그것일세.
-『대반야경』에 말했다. “일체의 법에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大般若 經云: 於一切法無所執着, 故名波羅蜜.)
嗟我生後三千年 아아! 나는 삼천년이 지난 후에 태어나
潮音渺渺隔先天 물결 소리 아득해라 선천(先天)과 막혔구나.
妙源欲問無所得 묘한 근원 묻자 해도 물을 곳이 바이 없어
長恨不生泥洹前 부처님 열반 전에 나지 못함 한탄 했지.
-니원(泥洹)은 열반과 뜻이 같다.(泥洹涅槃義同.)
從來未能洗茶愛 이제껏 차 사랑을 능히 씻지 못하여서
持歸東土笑自隘 우리 땅에 가져오니 속좁음을 웃어 본다.
錦纏玉壜解斜封 옥그릇에 비단 두른 빗긴 봉함 풀어서
先向知己修檀稅 지기(知己)에게 먼저 보내 단세(檀稅)를 바치구려.



예전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사랑했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차의 성품은 군자와도 같아서 삿된 기운이 하나도 없다. 이어지는 차의 연원에 대한 설명이 묘하다.

 작품에는 「동다송」과 마찬가지로, 중간중간에 협주를 달았다. 협주는 모두 5개다.

『서역기(西域記)』와 『다서』,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인용했고,

『다서』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모두 불경에서 끌어왔다.


차의 근원에 대한 설명도 특이하다. 인간 세상에서 나는 풀잎 차를 대개 맛 본 뒤에 설령(雪嶺),

즉 히말라야로 들어가서 노아차(露芽茶)를 따와 제품으로 만든 것이 차의 시원이라고 했다.

수품(水品) 또한 황하의 발원지인 아욕달지(阿褥達池)에서 나는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냄새 없고,

마실 때 알맞고 마신 뒤에 뒤탈이 없는 여덟 가지 덕을 갖춘 경연수(輕軟水)를 길어서 이 물로 차를 끓였다.

그러자 차의 체(體)와 신(神)이 환하게 열려, 나쁜 기운은 말끔히 사라지고 정기(精氣)가 스며들어, 청정한 정신으로

 득도의 경지에까지 가볍게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차를 영산(靈山)으로 지녀와 부처님께 바치기 시작했다.

또 점다법(點茶法)을 더욱 발전시켜 범률(梵律), 즉 부처님의 율법처럼 정밀하게 체계를 갖추니

차의 진체(眞體)가 묘원(妙源)을 다하게 되어 바라밀의 대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초의는 이 시에서 차의 연원을 신농씨의 『식경(食經)』에서 찾는 전통적인 설명법과 달리 불경에 근거하여

 차의 불교 시원설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차가 범어로는 알가화(閼加花)라 한다든지, 부처님 열반 전에 태어나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든지 하는 언급은 차가 부처님 시대부터 이미 세상에 행해져서 득도(得道)의 한 방편으로 사랑을 받았음을

 밝힌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다. 근거로 삼은 문헌은 당나라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인 듯 한데,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좀더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초의는 자신이 부처님보다 3천년이나 뒤늦게 태어나, 당시의 다도를 물을 길이 없고, 그 방법도 알 수가 없게 되었음을

안타까워 했다. 그런데 여태까지도 차를 사랑하는 습벽만은 씻어낼 수가 없어, 이 차가 우리나라 땅에까지 전해져 널리

 퍼지고 있으니, 차에 대한 그 맹목적인 집착을 웃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산천이 말한 옥그릇에

 비단으로 감싸둔 비싼 중국차를 혼자만 마시지 말고, 단세(檀稅) 즉 부처님 전에 바치는 세금 삼아

자신에게도 좀 보내 보라고 말한 것이다.


이상 초의와 산천 김명희의 교유를 살펴보고, 산천이 초의에게 보낸 「사차」시와 이에 대한 초의의 답시를 읽어 보았다.

두 작품은 모두 차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펼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초의의 답시는 차의 불교 시원설을

과감하게 제창한 내용으로, 문헌 근거를 비롯하여 향후 차계의 더 꼼꼼한 연구가 요청된다.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모든 중심에는 이렇듯 늘 초의가 존재했다.

 여기에 그의 스승인 다산과 벗인 추사 형제 등이 포진하여,

 차문화의 힘찬 고동을 알렸다.

 

 

 

 

 

정학연의 차 편지와 호의縞衣의 장춘차長春茶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9)과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1786-1855)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이다.

 형제는 아버지 다산의 강진 유배지를 몇 차례 왕래했고, 이후 아버지의 제자 및 대둔사의 승려들과 지속적인 교유를 나누었다.

이들은 아버지 다산을 이어 차에 일가견을 지녔던 차인이었다.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에는 형제가 초의 스님에게 보낸 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근자에 영인된 정학연의 시집 『삼창관집(三倉館集)』과 『종축회통(種畜會通)』에도 차시 및 차와 관련된 항목이 있다.

필자가 최근 확인한 영남대학교 동빈문고 소장 『유산일문기대둔사제선사간찰첩(酉山一門寄大芚寺諸禪師簡札帖)』

(이하 『유산일문첩』)과 일산 원각사 소장 『다암서첩(茶菴書帖)』은 다산의 아들과 손자들이 호의(縞衣)와

 안익(安益), 각안(覺岸) 등 대둔사의 승려에게 보낸 친필 편지들을 합첩한 서첩이다.

여기에도 차와 관련된 내용이 매우 많아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정학연 형제를 위시한 다산 후손들의 차생활에 대해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 고 예용해 선생 소장 간찰 한편이 따로 전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정학연의 차시와 차 편지를 소개하겠다.



정학연의 차시와 차 관련 기록

정학연의 시집 『삼창관집』필사본 1책은 일본 궁내청 서릉부(書陵部) 소장 자료로

 1802년부터 1808년까지 7년간의 작품을 연도별로 수록했다.

정학연의 나이 20세 때부터 26세까지의 작품 모음이다.

이 중 23세 때인 1805년 봄에 지은 시 가운데 차에 관한 내용이 처음 나온다.

「서회(書懷)」란 작품이다.



世棄書猶著 세상이 버려도 저술은 하고
家貧酒亦賒 집 가난해 술조차 외상을 하네.
晩雲凝埭樹 늦은 구름 방죽 나무 걸리어 있고
春雨沒堤沙 봄비에 제방 모래 잠기었구나.
江市賤粳米 강가 저자 멥쌀은 값도 헐하여
山房開茗芽 산방에서 차싹 봉지 열어본다네.
鄕居恰六載 시골 살이 6년간 흡족도 하니
幽事足堪誇 그윽한 일 자랑하기 충분하구나.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지만 저술에 힘쓰고, 집안 살림은 궁색해서 외상 술을 먹는다고 했다.

 6구에 산방에서 ‘명아(茗芽)’를 열어본다 하여, 차싹을 따로 보관해두고 차를 달여 마신 일을 적었다.

 바로 이어지는 시가 「전다(煎茶)」인데, 여기에는 매우 구체적인 차생활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卯酲仍帶午眠遲 간밤 숙취 깨질 않아 낮잠이 늘어지다
石炭微烘蟹眼奇 석탄 살짝 지피니 해안(蟹眼)이 기이하다.
水味堪羞惠山澗 물 맛은 혜산천(惠山泉)에 부끄럽다 할만 하나
木癭不讓越州瓷 목영(木癭)은 월주자(越州瓷)만 못하지 않다네.
賸澆司馬相如渴 사마상여 갈증이야 적셔주기 너끈해도
難求東方曼倩飢 동방만청 굶주림은 구하기가 어려워라.
喫菜枯腸何用飮 채식 하던 마른 장에 어이 차를 마시랴만
閒中聊作澹生涯 한가한 중 담박한 생애를 지어보네.

 



숙취를 깨려고 찻물을 달인다고 했다. 물맛이야 천하 제일 혜산천에 견줄 수가 없겠지만,

나무 둥치를 돌려깎아 만든 찻잔만큼은 월주 땅의 흙으로 구운 자기만 못지 않다고 했다.

차가 갈증을 적셔줘도, 굶주림을 구할 수는 없다고 한 것은 재미난 표현이다.

자신은 늘 채식을 하는 처지라 기름기를 제거하는 효능을 지닌 차를 마시는 것이 적절치가 않지만,

 담박한 생활 속의 한가로운 정취를 즐기기 위해 이렇게 차를 마시노라고 적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다산이 21세 나던 임인년(1782)

봄에 지은 춘일체천잡시(春日棣泉雜詩)에 백아곡에서 난 새 차를 얻은 뒤 지은 시가 있고,

 

「미천가(尾泉歌)」에도 용단차를 마셔 고질병을 다스린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정학연 또한 아버지를 이어 어려서부터 차에 익숙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석탄을 지펴 찻물을 끓이는 절차뿐 아니라, 갈증을 적셔주고 기름기를 제거하는 차의 효능에 대해서도 숙지하고 있었다.


3년 뒤인 1808년에 지은 「다관(茶罐)」이란 작품도 있다.

 

去覓燕京市 연경의 저자를 가서 뒤져서
來供牛渚堂 소내 물가 집으로 선물하였네.
松煤頻上面 솔 그을음 여러 번 뒤집어 쓰매
石髓好充腸 석수(石髓)를 마시기에 아주 좋구나.
臨卷沾餘滴 책 보며 남은 물로 적시어주면
依爐放暗香 화로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지.
爲余淸口吻 날 위해 입 속을 맑게 헹구니
終不避流湯 마침내 유탕함도 피하지 않네.



누군가 그의 차에 대한 기호를 알아, 연경에서 구해온 다관을 선물했던 모양이다.

솔 그을음이 자주 묻는다고 한 3구와 석수(石髓)로 장을 채운다는 4구는 자신이 차를 평소에 즐겨 자주 끓여 마신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또 책을 보다가 남은 물을 다관에 부어 화로에 올라오는 은은한 향기를 음미하고,

이것으로 입을 맑게 헹구었다. 남들이 이러한 호사를 두고 유탕(流蕩)하다고 나무란다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의 차생활은 이때 이미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비교적 만년의 시를 수록한 고려대 소장 필사본 『순리어필집(蒓里魚疋集)』에도

「호옥전다(湖屋煎茶)」시 3수가 실려 있다. 제 1수 1,2구에 “한 심지 향 사르며 차를 더디 달이니,

연실인양 정화(情話)가 새록새록 피어나네.(燒香一炷煎茶遲, 情話抽新似藕絲)”라고 했다.


『종축회통(種畜會通)』은 정학연의 농업 및 축산 관련 저술이다. 필사본 8권 3책으로,

현재 일본의 개인이 소장한 유일본이다. 이 가운데 제 3책 권 5에 「차」항목을 따로 마련했다.

자료 제공을 겸해 여기에 소개한다.

『사시유요(四時類要)』에 말했다.

 “익었을 때 거두어 열매를 취해, 젖은 모래 흙에 섞어 대광주리에 휘저어 담는다.

 볏짚이나 풀로 덮어주지 않으면 바로 얼어 싹이 나오지 않고, 2월 중에야 나온다.

 이를 나무 아래나 북쪽 그늘진 땅에 심는데, 둥글게 석 자의 구덩이를 파되 깊이는 한 자로 해서, 잘 쪼개서

 인분과 흙을 붙여 매 구덩이마다 6,70개의 씨를 심는다.

대개 흙은 한 치 남짓 두텁게 덮어주고, 풀이 멋대로 나게 내버려두어 김매지 않는다.

서로 거리는 두 자로 하고 한 방향으로 심는다. 가물 때는 쌀 뜨물을 준다.

이 물건은 햇빛을 두려워하므로 뽕나무 밑이나 대나무 그늘에 심으면 다 좋다.

2년 뒤에야 바야흐로 김을 매서 손볼 수 있다. 오줌이나 묽은 똥, 누에 똥을 거름으로 주어 북돋우되

지나치게 많아서는 안 되니, 뿌리가 약해질까 염려해서다. 대개 산중에 비탈진 곳이 좋고,

 만약 평지라면 양쪽 두둑에 깊게 이랑을 파서 물이 빠지게 해야 한다.

물이 스미면 뿌리는 반드시 죽고 만다. 3년 뒤에 차를 거둔다.

 

○ 『화경(花鏡)』에 말했다. “차를 보관할 때는 반드시 주석으로 만든 병을 써야 한다.

그러면 차의 빛깔과 향이 비록 해를 넘겨도 전과 같다.

○ 현호선생(玄扈先生)이 말했다.

 “거두어 간수하는 것은 반드시 대 그릇에 자른 대껍질을 섞어서 저장하면 오래 되어도 눅지 않는다.”


세 대목의 인용으로 이루어졌다.

『사시유요(四時類要)』는 한악(韓鄂)의『사시찬요(四時纂要)』를 말한다.

차씨를 받아 발아시킨 후, 땅에다 옮겨 심는 절차와 거름주는 법, 재배 상의 주의 사항 등을 적은 내용이다.

 그리고 차의 보관에 대해 쓴 『화경(花鏡)』과 현호선생의 글 한 단락 씩을 인용했다.

현호선생은 서광계(徐光啓, 1562-1633)를 가리키니, 인용은 그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서 따왔다.

정학연의 차에 대한 공부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 시와 위 인용은 아버지 다산이 유배 가기 전부터 다산 집안에서 차를 즐기고,

관련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이는 다산의 차생활이 유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차를 보관하는 중국의 주석병

 

 

 

호의의 장춘차

 

호의(縞衣) 시오(始悟, 1778-1868) 스님은 초의와 함께 완호(玩虎) 윤우(倫佑, 1758-1826)의 법맥을 이은 대둔사의 승려다.

 동복 적벽 사람으로 속성이 정씨(丁氏)였다. 다산은 그가 한 집안이라 하여 특별히 아끼는 뜻을 담아 호게(號偈)와 서문을

 써주기까지 했다. 호의가 초의와 마찬가지로 제다(製茶)에 깊은 조예를 지녔고, 그의 차가 서울까지 올라온 사정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다. 금번에 소개하는 정학연이 호의에게 보낸 11통의 편지는 호의차의 구체적 내용을 증언한다.

 이중 먼저 소개할 것은 고 예용해 선생 소장의 간찰 1통이다.

지금 세상에서 차의 지기(知己)는 두실(斗室) 태사(太史) 뿐입니다.

두실 태사께서 나를 통해 장춘차(長春茶) 몇 사발을 마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어려서부터 중국의 이름난 차를 두루 맛보았네.

차의 품질을 품평하는 것은 스스로도 나만한 이가 없으리라 여기지.

무슨 놈의 기막힌 차가 저 먼 고장에서 생산되어 이제야 비로소 이름이 드러난단 말인가.

절강(浙江)과 나개(羅岕)와 동갱(銅坑)은 진품이 제법 많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맛보기가 힘들다네.

 질 나쁜 중국차를 마시느니, 차라리 장춘차를 취하겠네 그려.”

 이 말이 몹시 좋아 스님을 위해 외워드립니다. 내년 곡우 때는 능히 유념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괜시리 산인(山人)께 한바탕 번뇌만 안겨드릴까 염려됩니다.
작년 꽃 필 적에 초의(艸衣) 스님과 더불어 함께 임청정(臨淸亭) 아래 앉아 해묵은 소나무 사이에서

술항아리와 붓 벼루로 온종일 읊조리려 하였는데, 세속 일이 연실[藕絲]처럼 끊이질 않아,

마침내 뜻과 어긋나 꽃 시절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안타깝습니다.

 이제 이때가 다시 돌아왔으니 모두 환세(幻世)의 기이한 인연입니다. 16일이 마침 가까웠으니

한 잎 고깃배로 사라담(䤬鑼潭) 위로 거슬러 올라가 지난 봄 마치지 못한 빚을 보상받을까 합니다.

 다만 열흘 밖에 남지 않아 또 능히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대사와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글로 알려드립니다.
7월 4일 학가(學稼) 돈수


정학연이 보낸 발신자와 발신 연대가 분명치 않은 편지다. 서명을 ‘가(稼)’라고 했으니, 학연으로 개명하기 전

학가(學稼)란 이름을 쓰던 젊은 시절의 편지다. 『유산일문첩』 제 6신도 학가로 서명이 되었는데,

1819년 7월 4일자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쓴 것인 듯 하다. 수신자의 이름도 분명치 않다.

 다만 호의와 관련된 다산의 편지가 합첩되어 있고, 초의와 나란히 거론된 것으로 보아

수신자는 호의였을 것으로 본다. 이때 다산은 귀양에서 풀려나 두릉에 있을 때였다.

 

 

 

 

 

 

정학연이 초의에게 보낸 차에 관한 편지.

 


편지에서 정학연은 자신의 차 지기(知己)로 두실(斗室) 태사를 꼽았다.

두실은 심상규(沈象奎, 1766-1836)의 호다. 영의정까지 지낸 당대의 거물이었다

. 그는 자신의 집인 가성각(嘉聲閣)에 무려 4만권의 장서와 온갖 기이한 물건을 갖춰두고 호사를 누렸던 인물이다.

 진귀한 중국차도 산지별로 다 구해 맛보았다.

 

 그는 스스로 차맛의 감별에 관한 한 자기만한 사람이 없으리라고 자부했던 모양이다.

 그런 그가 정학연이 끓여준 장춘차 몇 사발을 마셔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대체 어디서 이런 기막힌 차를 구했느냐고 물었다.

 정말 좋은 중국차는 구하기가 어렵고, 값만 비싼 저질품은 마실 수가 없으니,

엉터리 가짜 중국차를 마시느니 차라리 장춘차가 훨씬 낫겠다고 품평했다.


정학연은 심상규의 이 칭찬을 전하면서

슬쩍 내년 곡우 때에는 그를 위해서도 따로 차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워낙에 차가 귀할 때였던지라 이렇게 억지를 부리지 않고는 차를 입에 대어볼 수도 없었다.

 정학연은 호의의 차에 장춘차(長春茶)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장춘동(長春洞)은 해남 대둔사의 골짜기이니

장춘차는 해남 대둔사에서 만든 차란 뜻이다. 이로써 우리는 차문화사의 뜻 깊은 이름 하나를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꿔, 작년 봄, 초의 스님과 초천 가에 있던

임청정(臨淸亭)에서 시회(詩會)를 열며 봄꽃 구경을 하려 했는데

 이루지 못한 애석함을 적었다. 또 집 앞의 사라담에 일엽편주를 띄워놓고

7월 16일 소동파의 「적벽부」 뱃놀이를 본떠 지난 해의 유감 풀이나 하려한다는 사연을 적었다.

편지를 보내는 날이 이미 7월 4일이어서 대둔사에서 이날까지 대어오기는 늦은 때였으므로,

함께 하지 못해 유감이란 말로 편지를 맺었다.


위 편지는 몇 가지 사실을 증언한다.

첫째, 그간 차에 있어서는 초의의 존재만 알려져 있었으나, 호의 또한 따로 차를 만들어 두릉으로 보내고 있었다.

둘째, 해남 대흥사에서 만든 차를 장춘차(長春茶)라고 불렀다.

셋째, 중국차를 두루 맛보아 차에 대한 안목이 높았던 심상규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만큼 차맛이 훌륭했다.

 

 

 

 


 

『유산일문첩』제3신. 영남대 도서관 소장

 

 

정학연의 차 청하는 편지

이제 『유산일문첩』에 수록된 차 관련 편지를 차례대로 검토하겠다.

지면의 제약으로 다 읽지는 못하고 차와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유산일문첩』 제 3신이다.

초의가 이곳에 있는 덕분에 연달아 글을 받자오니, 매번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다만 서폭 가득 서로 그리며 연면히 애틋한 정의 말씀이 넘쳐 흘러, 저로 하여금 더더욱 아득히 마음이 녹아들게 합니다.

초가을에 선정(禪定)이 맛나고, 지체도 청건(淸健)하심을 알게 되어 몹시 기쁩니다.

저는 양친의 병환이 봄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지고, 제 묵은 병도 또 이와 같은지라,

눈썹을 펴고 입을 열 날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스스로 연민할 따름이지요.

글씨첩은 만약 제가 한가로이 지내며 즐거운 일이 많을 것 같으면,

 팔꿈치를 시험해 글씨를 쓰는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습니까?

다만 이처럼 근심으로 골몰하여 잠깐의 틈조차 탈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단지 한 폭의 싯귀와 몇 조각의 벽에 붙일 글씨를 받들어 부칩니다.

 이로써 천리의 면목을 대신할 뿐이니 글씨라고야 하겠습니까?

 연적 하나를 함께 보냅니다. 한번 따를 때마다 저를 한 차례 생각해 주십시오.

 부쳐주신 차는 참으로 기이한 선물이니, 사양하지 않으렵니다.

뒷 인편에 또한 이같은 갈망을 생각하셔서 더 낫게 보내주시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연거푸 보내 주실 수 없다면 만에 하나라도 남겨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신미년(1831) 8월 6일, 학연 삼가.

 

 

 

 

『유산일문첩』제10신.


1831년 8월 6일에 호의에게 보낸 편지다.

 이때 초의는 스승 완호의 탑명을 받는 일로 해를 넘겨 정학연의 집에 머물며, 장안의 명류들과 시회를 여는 등

명성을 드날리고 있었다. 초의의 체류가 예상 외로 길어지자, 호의가 연거푸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편지의 내용이 참 정스럽다. 호의는 정학연에게 글씨를 요청했고, 정학연은 넉넉히 써보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 했다.

 편지의 주된 용건은 기이한 차 선물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말과 다음번에는 훨씬 더 많이 보내주면 감사하겠다는

부탁에 놓여 있다. 앞서 본 편지와는 10년 가량의 시간적 거리가 있다.

호의는 그후로도 줄곧 정학연에게 차를 만들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유산일문첩』 제 10신이다.

가을 들어 범리(梵履)는 청안하신지요. 찬 산에 잎은 지고 종소리와 등불 그림자에 꿈을 깨어 일어나면,

대공(臺公)의 축지법을 배워 한 달음에 스님을 찾아보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쇠약한 형상이 날로 심해져서,

이번 여름에 겪은 것을 말하려니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다행이 가을바람이 불어옴에 힘입어 겨우 예전처럼

움직이고는 있지만, 자고 먹는 것이 남만 못합니다. 다만 방안 사이에 뒹구는 물건이 되었을 뿐입니다. 시 한 수를

받들어 보이니 뜻에 맞으실런지요. 보통의 차는 요동의 돼지일 뿐이니, 반드시 초의와 대사께서 손수 만든 것이라야

훌륭합니다. 큰 차포(茶包) 하나를 목헌(牧軒) 서아사(徐雅士) 편에 부쳐 주시면 어떠실런지요.

서아사가 또한 마땅히 장춘동에 들리게 되면 반드시 스님을 찾아갈 것입니다.

차를 맡기는 부탁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겝니다. 인편이 기다리고 있어 이만 줄이옵고 다 적지 못합니다.

 살펴보소서. 신축년(1841) 8월 20일, 종말(宗末) 정학연 돈수.


앞서의 편지에서 다시 10년 뒤인 1841년의 편지다. 이때 정학연은 61세였다.

수신자를 “호의선사(縞衣禪師) 정탑(定榻)”이라고 적었다. 자신이 지난 여름에 건강을 잃어 심하게 앓았던 일을 말했다.


요동시(遼東豕)는 고사가 있다.

요동 사람이 기르던 돼지가 머리가 흰 새끼를 낳자, 신기하게 생각해서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 하동 땅으로 갔는데,

그곳의 돼지를 보니 모두 흰지라 부끄러워 그저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보잘 것 없다는 뜻으로 썼다.

보통의 차는 별 볼일이 없고, 초의나 호의가 직접 만든 수제차라야 맛이 훌륭하다고 하면서,

내려가는 인편에 직접 만든 장춘차를 큰 포로 하나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유산일문첩』제12신.


다음은 제 10신에서 함께 부친 시다.


一夢尋僧紅葉家 하루밤 꿈 홍엽가(紅葉家)로 스님 찾아 갔더니
松風澗水趙州茶 솔바람 시냇물에 조주차(趙州茶)를 내오시네.
玉泉寺裏仙人掌 옥천사 안에는 선인장 차 난다 하니
腸斷中孚碧玉花 중부(中孚)의 벽옥화가 애를 끊게 하는구려.



청련 이태백의 집안 승려인 중부선사가 옥천사에서 찻잎을 땄는데 벽옥과 같았다.

맑은 향기가 매끄럽고도 부드러워 다른 것과는 달랐다.

중부가 수십 포를 이백에게 부치니 인하여 선인장차라고 이름 지었다.

중부는 금릉에 살았으므로, 이백과 늘상 왕래하였다.




시 바로 다음에는 「호의 스님 선감(禪鑒)에 읊어 드리며 인하여 차포(茶包)를 청하다.

(吟呈縞衣開士禪鑒, 仍乞茶包.)」란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는 따로 중부선사의 선인장차 고사를 친절하게 부기하였다.

꿈 속에도 차가 그리워 단풍잎 붉게 물든 절집으로 찾아갔다.

 스님은 냇물을 길어와 조주차(趙州茶)를 끓여 내온다.

 3,4구는 옥천사에 난다는 중부선사(中孚禪師)의 선인장차(仙人掌茶) 생각이 간절하니,

여유가 있으면 조금 나눠달라는 뜻을 적었다.

 



 

 

『유산일문첩』제13신.

 


이어지는 내용은

이백의 「족질 중부(中孚)가 옥천산의 선인장차를 준 데 답례하여(答族侄中孚贈玉泉仙人掌茶)」란

시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초의의 자(字)인 중부(中孚) 또한 바로 중부선사에게서 따온 것임은 앞서도 지적한 바 있다.

 중부는 금릉(金陵)에 살았는데, 다산의 유배지였던 강진의 다른 이름 또한 금릉이어서 차를 통한 인연이 묘하게 이어졌다.

 정학연은 집안 승려인 호의를 중부선사에 견주고 자신을 이백에 비겨, 중부가 이백에게 선인장차 수십 포를 부쳐주었듯이

 자신에게도 장춘차를 넉넉히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다음은 위의 요청에 따라 이듬해인 1842년 1월 12일에 호의가 차를 부쳐오자,

기쁨을 이기지 못해 보낸 답신이다.

 

 

 

 

 

청나라 김정표(金廷標)의 「품천도(品泉圖)」. 대만 국립박물원 소장.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니 쇠약하고 하얗게 센 것이 이와 같은지라,

노사께서 비록 십사(十使: 인간의 마음을 제멋대로 부리는 열가지 번뇌)에 시달림이야 없다 해도,

 연세가 절로 높아 이 장벽에 편안하게 대처하여 능히 지난날 마주하던 모습과 같을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겠습니다.

 이 세상은 몹시도 짧고, 둘 다 모두 이리 늙고 말았군요. 얼굴을 볼 방법이 없어 다만 천정을 우러러 혀를 찰 뿐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매 해를 넘겨서 온 것인데, 날짜를 헤아려 보니 겨우 30일밖에 되질 않아 몹시 기뻤습니다. 새해에 법리는

청안하시겠지요. 남녘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다만 맺힌 그리움만 더할 뿐입니다.
부쳐주신 좋은 차를 직접 봉함을 끄르니 정성이 담뿍 담겨 있어서, 샘물을 길어 끓이기도 전에

이미 마음의 향기가 차포(茶包)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겠습니다. 마땅히 진주처럼 아껴서 봄철을 지내는 밑천으로 삼으렵니다.

 다만 차에 고질 든 것이 이미 고황(膏肓)까지 들어 마치 홍로(洪爐)나 묵뢰(黙雷)인양 한정이 없는지라,

 이것이 염치 없습니다. 서아(徐雅)가 비록 서울로 돌아왔지만, 이 목관(牧官)은 아직 체직되지 않아

차와 편지를 전하는 것은 염려가 없습니다. 다만 노사께서 번번이 이어 보내주실 수 없음을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저는 노병이 점점 심해져서 형제가 서로 마주하여 구슬피 상심하며 좋은 마음이라곤 아예 없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정성을 펼 물건이 없어 더더욱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다만 초의가 올라오기를 기다리지만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붓을 들고 마음만 내달립니다. 다 갖추지 못합니다. 임인년(1842) 1월 12일 종인(宗人) 학연 돈수. 


지난 해 8월 차 부탁을 받고 호의는 연말 인편에 차와 편지를 올려 보냈다.

 이것이 해를 넘겨 1월 12일에 도착한 것이다. 두근거리며 차 봉함을 열자 훅 끼쳐오는 차향에 찻물을 끓이기도 전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봄 내내 진주처럼 아껴 마시겠노란 말이 조금도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차감(茶疳), 즉 차벽(茶癖)이 이미 고질이 되어 아무리 많은 양의 차라도 성에 차지 않으니,

 염치없지만 가능하다면 다른 인편에 계속해서 더 부쳐주면 좋겠다는 부탁으로 편지를 맺었다.

인편을 구하지 못한다면 결국 초의가 서울로 올라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데,

 이 또한 어찌 바랄 수 있겠느냐며 편지를 맺었다.


1843년 6월 13일의 편지에도 차 이야기가 나온다.

 “이제 문득 어렵사리 도착한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두강차(頭綱茶)의 맑은 맛은 만다라의 보액(寶液)입니다.

천리 길에 보내주심은 실로 노사의 심력이 먼데까지 미치신 덕분이니,

그 감사함을 헤아릴 길 없어 더더욱 깊이 흠탄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이들 편지는 정학연과 호의 사이에 오간 여러 곡진한 사연들을 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로 살펴보기로 한다.

호의 외에 초의와의 사이에도 더 많은 편지가 있었을 것이나,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에 정학연이 초의에게 차를 받고서 보낸 「사차시(謝茶詩)」와

 이에 대한 초의의 답시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의가 만든 차 또한 부지런히 해남과 두릉 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정학유의 차 편지와 두륜진차頭輪眞茶

 

 

다산 집안에서 대둔사 승려에게 보낸 편지첩에는 맏아들 정학연뿐 아니라,

 다산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의 차 편지도 적지 않게 들어 있다.

그 또한 차를 아끼고 애호했던 차인이었다. 그가 남긴 차시와 차 편지를 차례로 읽어 본다.



정학유의 차시와 초의의 화답시

문집이 일부나마 전하는 정학연과 달리 동생 정학유의 시문집은 현재 따로 전하지 않아, 그의 차시는 남은 것이 없다.

다만 초의의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에 초의에게 보낸 「차시(茶詩)」 한 수와 초의가 이에 화답한

「봉답운포차시(奉答耘逋茶詩)」가 함께 실려 있다. 제목은 차시라고 했지만 차와 직접 관련된 내용은 없다.

하지만 일지암의 주변 풍경과 초의의 일상이 잘 그려져 있어 자료 제시 겸해서 읽어보겠다.


운포(耘逋)는 정학유의 호다.

 다음은 정학유가 서울로 부쳐온 초의의 차를 받고 감사의 뜻을 담아 보낸 시다.



艸衣老禪不緶草 초의 스님 정작 풀은 가꾸지 않으시고
手種靑竹萬竿好 손수 청죽 심으시니 만 그루가 어여쁘다.
竹香室中見日遲 죽향실 안에서는 해를 봄도 더디겠고
金剛巖畔迎風早 금강암 기슭에선 바람 맞이 이르겠네.
自從趺坐頻出難 가부좌 하고부터 잦은 출입 어려워
只得池塘十步看 다만 겨우 연못 가를 열 걸음쯤 보신다네.
魚鼓纔沈半牀月 목어 소리 잦아들면 침상 절반 달빛 들고
滴露淸宵鳴未歇 이슬 듣는 맑은 밤엔 풍경 소리 끊이잖네.
靑鸞何日下香臺 푸른 난새 언제나 향대(香臺)로 내려오리
赤霞南溟一道開 남쪽 바다 붉은 노을 한 길이 열렸구나.
無風自動君知否 바람 없이 절로 떨림 그대는 아시는가
夢裏漁簔曾拂來 꿈 속에서 도롱이 옷 떨쳐입고 오시누나.ᅠ

 

시는 『일지암시고』에 따르면 1848년에 지은 것이다.

대둔산 금강암(金剛巖) 기슭에 자리잡은 초의의 일지암 풍경과 초의 스님의 하루 일과를 그려본 내용이다.

 초의는 1830년에 일지암을 짓고, 1833년에는 둘레에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그 경과는 「종죽(種竹)」이란 장편시에 적혀 있다.

둘레가 온통 대밭이었으므로 일지암의 거처를 죽향실(竹香室)로 부른 것을 3구에서 알 수 있다.

 5구는 초의가 제주도 유배지로 추사를 만나러 갔다가 낙마 사고로 다리 뼈가 부러진 사고를 당한 일을 말한 것이다.

당시 초의는 목발을 짚고 겨우 일지암 앞 연못가를 몇 발짝 둘러볼 정도의 상태였던 모양이다.

저녁 무렵 큰절에서 목어와 법고 소리가 잠잠해지면 달빛은 어느새 거처하는 방의 절반 쯤 스며들고,

맑은 밤중에도 처마 끝의 풍경소리는 쉼없이 쟁그랑대며 잠든 정신을 일깨운다.

언제나 회복해서 푸른 난새 같은 스님이 서울 걸음을 하실 수 있으시려나 하며 시상을 마무리했다.


다음은 위 시를 받고 초의가 보낸 답시 두 수다. 제목은 「운포의 차시에 삼가 답하다(奉答耘逋茶詩)」」이다.



百樣奇花千般艸 백 가지 기이한 꽃 천 가지 풀들은
朝艶暮萎不長好 아침 피어 저녁 지니 늘 곱지가 않다네.
爭似此君抱貞德 어이타 대나무가 곧은 덕성 품고서
不怨春晩淸霜早 늦은 봄 이른 서리 원망찮음 같겠는가.
移來不辭逾嶺難 옮겨올 젠 고개 넘는 어려움도 마다않고
曲爲主人愜幽看 곡진하게 주인 위해 그윽한 태 상쾌하다.
疎影孤伴池心月 홀로 성근 그림자는 못 속 달빛 벗을 삼고
弱條猶蘄鳳來歇 여린 가지 봉새 와서 깃들기를 기다리네.
夕陽漏紅滿涼臺 석양이라 번진 노을 찬 누대에 가득하여
炎瘴欲透無門開 무더위가 뚫으려도 문을 열지 않는다네.
無風搖綠玉磨響 바람 없이 잎 흔들자 옥을 가는 소리 나니
始覺乘鸞披拂來 난새 탄 이 옷깃 떨쳐 오는 줄을 알겠구나.

幽巖靜坐對碧艸 숨은 바위 가만 앉아 푸른 풀을 마주하며
終日凝然澹無好 멍하니 종일 봐도 담담히 별 일 없네.
雲端鶴師來相訪 구름 끝의 학(鶴) 스님이 나를 찾아 오셨는데
屨粘靑霞起行早 푸른 안개 신을 적셔 일찍 나선 줄을 아네.
忙手輕輕致不難 바쁜 손길 경쾌하게 어렵잖케 펼치니
促余開緘要共看 날 재촉해 함께 보려 봉함을 열게 하네.
中裹驪珠同明月 속에 싼 여룡 구슬 밝은 달빛 한 가지라
盈抱溢目光無歇 품에 가득 눈에 온통 광채가 끝이 없다.
千里相共照靈臺 천리길에 서로 함께 영대(靈臺)를 비추시니
一生懷抱細細開 일생의 회포가 하나하나 열리누나.
傷心最是難抑處 무엇보다 마음 상해 억누를 수 없는 것은
生前猶欠一往來 생전에 한 차례 더 왕래하지 못함일세.



이름은 초의(草衣)인데 어째서 풀은 안 심고 대만 잔뜩 심었냐는 장난의 말에, 풀꽃은 금방 시들지만 대나무는 변치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며 말문을 열었다. 일지암의 대나무는 원래 고개 넘어 적련암(赤蓮庵)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었다.

제 10구를 보면 이 시를 쓴 때가 한 여름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수 3구에 나오는 학사(鶴師) 즉 학스님은 바로 호의(縞衣) 스님을 가리킨다.

학의 별칭이 호의현상(縞衣玄裳)이라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두릉에서 정학연 형제가 보낸 편지와 선물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의가 이른 새벽에 산 위에서 일지암으로

초의를 찾아 내려왔던 모양이다. 선물 꾸러미를 열자, 호의는 어서 편지를 열어 보자고 재촉을 한다.

선물로 보낸 여룡의 구슬은 형제가 답례로 써준 글씨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일생의 회포가 하나하나 열린다 했으니, 자신과 나눈 그간의 우정을 시로 노래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다리를 다쳐 이제 더는 서울 걸음을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까지 내려올 수도 없으니

그것이 상심이 될 뿐이라고 했다.


주고 받은 시는 시상의 아름다움이나 담긴 마음의 따뜻함도 훌륭하지만, 초의와 호의의 차를 받고서

정학유가 보낸 답시와 이에 대한 초의의 화답시란 점에서 차를 매개로 한 정 깊은 교유의 장면을 잘 보여준다.

정학연이 보낸 차시와 이에 대한 초의의 답시도 『일지암시고』에 실려 있으나 지면 관계로 소개하지 않는다.

 

 

 

 

 

『유산일문첩』제9신.

 

호의의 두륜진차(頭輪眞茶)

이제 정학유의 차 편지를 읽어보자.

앞서 소개했던 영남대학교 동빈문고 소장 『유산일문기대둔사제선사간찰첩(酉山一門寄大芚寺諸禪師簡札帖)』

(이하 『유산일문첩』)에 역시 호의(縞衣, 1778-1868)와 안익(安益)을 수신인으로 하는 정학유의 친필 편지 4통이 실려있고,

일산 원각사 소장 『다암서첩(茶菴書帖)』에 1통이 더 남아 있다. 5통의 편지를 차례로 살펴본다.

바다 산이 아득히 멀어 소식 듣기는 생각지 못해도 다만 미처 다 스러지지 않은 것이 옛 기억 속에 또렷합니다.

뜻하지 않게 초의가 와서 스님의 편지까지 얻게 되니 몹시 기뻤습니다. 근래 들어 더워지기 시작했는데, 산속 거처는

괜찮으신지요. 담은 마음이 오가도 저는 애틋함이 끊이지 않는데, 차마 의관을 갖추고 사람을 마주함이겠습니까?

 일찍이 목석 같은 마음이 혼자서 슬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손수 만드신 좋은 차는 포장을 열자

 이미 맑은 향기가 골수에 스며, 지난 십 수년의 해묵은 체증이 두륜진품(頭輪眞品)에 힘입어 열에 서넛은 물러나

버렸습니다. 이것을 얻은 뒤로 말할 수 없이 기뻐하니, 그 은혜 받음을 가늠할 만 합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초의는 산행에서 겨우 돌아오자마자 또 이같은 더위를 무릅쓰고 길에 오르므로,

 작별하려니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병중에 힘들여 쓰느라 다른 말은 적지 못합니다.
무술년(1838) 윤달 24일, 병든 사람이 격식을 갖춰 감사드립니다.

 도자기 차호(茶壺) 하나를 보냅니다.



1838년에 보낸 편지다. 이해에는 윤달이 4월에 들었다. 윤 4월 24일에 쓴 것이다.

 이해 초의는 금강산 유람을 위해 서울 걸음을 했다가, 유람을 마치고 대둔사로 돌아올 때 앞서 받은 차에 대한 감사의 뜻을

 편지에 담아 보낸 것이다. 호의차를 두륜진품(頭輪眞品)이라 부른 것이 흥미롭다. 두륜산에서 채취해서 만든 훌륭한 차란 의미다.

앞서 정학연은 장춘차(長春茶)라고 했었다. 병으로 누워 있다가 부쳐온 차의 포장을 끌르니, 고소한 차향이 골수에 스미는 듯하여,

묵은 체증이 열에 서넛은 벌써 간 곳이 없더라고 했다. 이때 정학유는 답례로 도자기로 구운 차호(茶壺)를 호의에게 선물했다.

 

 

 

 

 

『유산일문첩』제14신.

 


병으로 게을러 능히 글을 올리지 못했는데 편지로 먼저 문안을 주시니,

종이 위로 넘치는 정성에 단지 부끄럽고 송구함만 더할 뿐입니다.

 삼가 섣달 추위에 법리(法履)가 평안하시고, 참선의 즐거움이 나이 들어 더욱 맛이 있는 줄을 알겠습니다.

기쁜 나머지 마치 다정한 말을 나누는 듯하였습니다. 저는 늙어 쇠약함이 더욱 심해져서 단지 형해만 남았을 뿐

 다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슬퍼하고 불쌍히 여길 것 같아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지 않습니다.

 부쳐주신 진차(珍茶)는 이 맛을 못 본지가 이미 1년이나 되었던지라 생각은 본시 법도대로 선미(仙味)를 찾으려 했으나,

헛되이 몽상만 수고로울 뿐이었습니다. 뜻밖에 정스런 편지로 온통 황홀하여 묵은 병이 문득 없어지니,

 새겨 감사드려 마지 않습니다. 병 중에 힘들여서 어지러이 써서 보냅니다.

다만 바라기는 천(泉)을 위해 스스로를 아끼시지요. 이만 줄입니다.
임인년(1842) 1월 11일, 학유 돈수.

 

 

역시 호의가 보내준 차를 받고서 감사를 표한 내용이다. 1842년 1월 11일에 보낸 것이다.

 두륜진차가 떨어진 지 1년이나 되어, 선미(仙味)는 몽상 속에서나 맛보려니 했는데, 갑작스레 차가 도착하니,

황홀한 마음에 해묵은 병이 벌써 저만이나 달아나고 말았다고 적었다. 차향이 글 밖으로까지 왈칵 끼쳐온다.

 끝의 한 구절은 의미가 분명치 않다.


『유산일문첩』에는 호의 외에 안익(安益) 스님에게 보낸 편지도 4통이 실려 있다. 안익은 호의의 상좌였던 듯 한데,

현재 남아있는 승전(僧傳)에서는 어쩐 일인지 그의 존재를 찾아볼 수가 없다.

다음 편지는 정학유가 위 호의에게 편지를 보낸 것과 같은 날짜에 안익에게 보낸 글이다.

피봉에 ‘사익상인경창(謝益上人經窓)’이라고 써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차를 보내준 안익 상인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다.

아득한 바다 산을 향한 몽상이 더욱 괴롭던 차에 손수 쓰신 편지가 병들어 버려진 사람에게 도착하니,

이는 자비로움이 특별한 것입니다. 편지 보고 법리가 청적하시고 정진하심이 나날이 좋으심을 알 수 있어 먼 곳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됩니다. 제 병은 해마다 깊어져서 단지 비쩍 마른 고목의 몰골을 하고 방구들 사이에서 뒹굴고 있을 뿐입니다.

 초의가 제주도로 가려던 것은 소원을 이루지 못했군요.

 땅이 비록 하늘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일 또한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를 어찌하겠습니다.

 몸의 병 중에 가장 괴로운 것은 기침입니다. 한창 심할 때는 두꺼비처럼 잠자려고 애쓰고,

 게처럼 거품을 토하곤 하여, 마치 오랜 시간 꽉 막힌 듯함이 있습니다.

 이때는 백약이 다 쓸모없고, 오직 두륜진차(頭輪眞茶) 일기(一旗)나 이기(二旗)를 입에 넣어 머금어 내려야만

비로소 가라앉습니다. 비록 병의 뿌리를 뽑을 묘한 약제는 아니나, 근심을 건져주는 훌륭한 처방은 될만 합니다.

앞뒤로 여러 스님께서 부쳐주신 것이 적지 않지만, 1년간 마시는 것이

몇 십근이 더 되니, 이것을 어찌 계속 보내줄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생에서 죽을 때가 다 되어 가까운 사람에게 수고를 끼치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은 아니겠지요.

올 봄 곡우 전에 딴 좋은 차를 반드시 이 병든 이를 위해 애써 주신다면 그 감사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초의도 함께 이 편지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각각 따로 쓰려 했지만 어지럽고 피곤해서 그리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만 쓰고 다른 말은 적지 않습니다. 임인년(1842) 1월 11일 학유 돈수.


당시 정학유는 천식을 심하게 앓고 있었던 듯하다. 두꺼비처럼 잠만 자려 하다가도, 기침이 나오기 시작하면 게거품을 문 것

같았다고 적었다. 이러할 때 특효약으로 정학유는 두륜진차(頭輪眞茶)를 꼽았다. 그것도 일양기(一兩旗), 즉 일창일기

(一槍一旗)와 일창이기(一槍二旗)로 만든 우전차를 달여 마셔야 다급하게 쏟아지던 기침이 겨우 가라앉는다고 했다.

 앞뒤로 여러 스님이 부쳐준 차가 적지 않지만, 자신이 1년에 소비하는 차의 양이 수십근이 더 되므로, 이것을 계속

이어 대줄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적은 대목이 흥미롭다. 중국이나 강진 다신계 등 다른 경로로 얻은 차도 적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다 치더라도 해남에서 두릉으로 올라온 차의 양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끝에 가서는 초의가 이 편지를 함께 읽어, 올봄 우전차를 다시 더 보내달라는

자신의 당부를 똑 같이 염두에 두어 줄 것을 부탁했다.

 

 

 

수제진품차의 효능

이듬해인 1843년 여름에도 정학유는 호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두 형제는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차의 힘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지내던 형편이었다.

먼 곳 향해 달리는 생각이 늙어갈수록 더욱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글월을 받자오매 산거가 청적하시고 참선하는 재미가 기쁜 것을 알겠습니다.

 마치 마주하여 다정한 말을 나눈 듯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쇠약함이 외려 심해졌고,

게다가 형님께서도 해를 넘겨 학질을 앓으셔서 육신과 정신이 다 나간 듯합니다.

들어앉아 약을 먹어봐도 효험이 없군요. 안타깝고 걱정스러움을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부쳐주신 좋은 차는 틀림없이 손수 만드신 정이 담긴 선물이로군요.

먼저 문 앞의 강물을 길어다가 시험 삼아 한 차례 끓였더니 문득 병든 목구멍이 시원스레 뚫리는 것을 느끼겠습니다.

 천리 길에 감사를 어찌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람결에 부치는 소식이라 마음을 다 펴기 어려워

다만 다음 인편을 기다릴 뿐입니다. 아픈 중에 어지럽게 씁니다. 이만 줄입니다.

계묘년(1843) 6월 14일, 종말(宗末) 학유 돈수.


1843년 6월 14일에 호의에게 부친 편지다. 차를 받자마자 갈급한 마음에 서둘러 앞 강물을 길어와 차를 끓여 마시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뿐만 아니라 병으로 답답하던 목구멍을 타고 차가 내려가자 시원스레 뻥 뚫리는 느낌이 있었다고 적었다.

 이렇듯 정학유가 남긴 편지에는 모두 차를 보내 주어 감사하다는 말과 차의 효능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유산일문첩』에는 1843년 6월 15일에 정학연의 아들 정대림(丁大林, 1807-?)이 호의와 안익에게 각각 보낸 편지가

두 통 따로 실려 있다. 이로 보아, 해남에서 부쳐온 두륜진차는 다산 집안으로 전해져서 분배되었고,

두 집안 모두 따로 편지를 써서 같은 인편에 답장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정대림이 호의 스님께 부친 편지는 서두가 “매번 중부(中孚)의 선인장차 고사를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몰래 기이하다고 외치며,

마음에 품어 두곤 합니다. 관편(官便)에 보내신 스님을 편지를 얻어 보니, 마치 선탑(禪榻)을 마주한 것만 같아 흔쾌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물며 근래 지내심도 청적함을 알게 되니 더욱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노친께서 병환으로 열 달이나

위중하시다가, 겨우 수십 일 전부터 조금 나아지셨습니다. 하지만 잠자리와 식사의 절차는 잠시 평상을 회복치 못한 지라

초조하게 날을 보내느라 족히 소식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보내주신 차와 동백 기름은 전처럼 당상(堂上)께 올려 드리겠습니다.

 로 시작된다. 이백(李白)과 한 집안이었던 금릉의 중부(中孚) 스님이 옥천사의 선인장차를 이백에게 드렸던 것처럼,

다산과 한 집안인 호의가 강진의 별호인 금릉에서 차를 보내온 것이 너무나 똑 같아 기이하다고 말한 내용이다.

 

 

 

 

『다암서첩』에 실린 정학유가 호의에게 보낸 친필 편지.

 

 

끝으로 정학유가 호의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더 읽어 본다.


작년 여름 각안 스님이 돌아갈 때 일이 마치 어제 새벽 같은데, 잠깐 사이에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어찌 애타게 그리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묘총(妙總)이 와서 보내신 편지를 받자와

봄철에 법리가 청적하심을 알게 되니 마음이 놓입니다. 마치 손을 맞잡고서 한 차례 얘기를 나눈 것만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두륜산 도량에서 온갖 꽃그늘에 새로 나온 죽순이 일제히 솟아날 제,

푸른 가죽신과 등나무 지팡이를 짚고서 만일암(挽日庵)과 북암(北庵) 사이를 왕래하던 것이 36년 전의 일입니다.

 폐질이 생긴 듯하므로 서둘러 몸에서 떨어내야겠는데, 돌아보면 이루려고 바라던 바에 안주하고 말았으니

다만 스스로 한탄할 뿐입니다. 스스로 병증을 헤아려 보니, 마치 달리는 수레가 비탈을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 들어서는 방안에서도 걸음조차 뗄 수가 없어, 다만 겨우 숨만 붙어 있습니다.

보내주신 수제진품(手製珍品)이 여태도 끊어지지 않음에 힘입어, 이것으로 옥초(沃焦)의 감로수로 여깁니다.

초의가 정을 담아 보내준 것이 이제 또 잇달아 이르니,

두 분 스님이 나를 아껴주시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겠습니까?

글을 쓰려니 더더욱 망연할 뿐입니다. 팔 힘이 달려 다 적지 못합니다.

경술년(1850) 3월 24일, 종말 학유 돈수.


일산 정각사 소장 『다암서첩(茶菴書帖)』에 실린 1850년 3월 24일자 편지다.

『다암서첩』은 호의와 각안 두 스님을 수신인으로 유산 형제와 그 아들 및 조면호, 신관호 등이 보낸 편지를 묶은 것이다.

앞서 본 『유산일문첩』보다 뒷 시기의 편지가 대부분이다.


36년 전 아버지 다산을 뵙기 위해 강진으로 내려왔다가 놀러갔던 대둔사의 만일암과 북암 등의 아름다운 광경을 떠올렸다.

 옥초산(沃焦山)은 동해 바다 어딘 가에 있다는 전설 속의 산이름이다. 호의의 차가 이 선계의 감로수와 같다고 말했다.

 이리 귀한 수제진품차를 끊이지 않고 마실 수 있었던 것이 호의와 초의 두 스님의 두터운 정 때문이었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이상 정학연·정학유 형제가 호의 스님께 보낸 차 편지를 차례로 읽어 보았다.

그간 초의와 추사 사이에 오간 차 편지는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정학연 형제의 차 편지는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들 편지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둔사에서 호의가 만들어 서울로 보낸 차에 대해 장춘차(長春茶)·두륜진차(頭輪眞茶)·두륜진품(頭輪眞品)·

두강차(頭綱茶)·수제가명(手製佳茗)·수제진품(手製珍品)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 것을 확인하였다.


둘째, 그간 초의만 차를 만들어 서울로 보낸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호의의 두륜진차가 초의차 못지 않은 명성을 지녔음을 구체적 자료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밝혔다.


셋째, 초의와 호의, 그리고 안익 등 대둔사의 여러 승려들이 각자 따로 차를 만들어 제각금 보냈으리만치

 대둔사 승려들의 차 생산량은 일반적 예상을 넘어서는 상당한 분량이었음을 알았다.


넷째, 차는 이들에게 주로 체증을 내려주고 기침을 가라앉혀주는 약용으로 애용되었고,

이들은 답례로 글씨와 차호(茶壺) 등을 보내며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


다섯째, 해남에서 올라온 차는 시기가 확인된 것만도 1831년부터 1850년까지 20년에 이르는 세월에 걸쳐 있다.


여섯째, 정학유의 언급을 통해 볼 때, 이들이 1년에 마신 차의 양이 수 십 근이 넘을 만큼

상당한 규모로 차 생활을 영위했던 차인임을 알게 되었다.  

 

 

 

 

호의의 암자가 있던 두륜산의 정상 부근.

 

 

 

 

 

 

염제 신농씨의 모습

 

 

이규경의 「도차변증설茶辯證說 」고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에

「도차변증설(茶辯證說)「종차의이청양변증설(種茶薏苡靑辨證說)」,

「전과다탕변증설(煎果茶湯辨證說)」등 차와 관련된 여러 글을 남겼다.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유행하던 당시 학풍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차 관련 전적을 섭렵하고

일일이 전거를 찾아 소종래를 밝혔다. 이 글에서는 이규경의

「도차변증설을 중심으로 그의 차 관련 논의를 살펴보겠다.

이 글은 '도()' 자와 차(茶)' 자의 관계, 중국 역대 명차에 대한 정리,

우리 차의 역사에서 차 재배법과 끓이는 법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작자 미상.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개인 소장.

 

 

 

 

 

 

명 구영(仇英) 「송계논화(松溪論畵)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명차와 차 끓이는 도구 및 방법에 관한 논의를 모았다.

                                                                                                              우리나라 차의 내력을소개하는 한편,  중국 역대의 각다 정책을 설명했다.

                                                              차 씨앗을 심어 가꾸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본 사람의 기록까지 꼼꼼히 살펴 친절하게 설명했다. 

                                                                                                               또 차를 함께 넣은 다탕과 그 밖의 여러 대용 음료에 대해서도 소개하였다.

                                                                                            그는 수 십종의 중국 다서를 섭렵하여 이들 내용을 간추렸다.

                                                                 중간 중간 우리나라 차에 대한 설명을 보태

                                                             단순한 편집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였다.

 

 

 

「초의선사화상」.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신헌(申櫶)과 초의

 

 

신헌(申櫶, 초명은 申觀鎬, 1811-1884)은 자신의 문집 중에 초의에게 준 여러 명사들의 시문첩을 옮겨 적은

『금당기주(琴堂記珠)』를 남겨, 초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다. 『금당기주』에 실린 여러 글에

 대해서는 앞서 다른 글에서 몇 차례 살펴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신헌은 「초의시집발」과 「초의선사화상찬」,

그리고 「초의대종사탑비명」 등 초의와 관련된 중요한 글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선종과 교종의 이치를 두고 장문의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이글에서는 신헌과 초의의 교유를 알아보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수창시문과 신헌의 차시를 읽어 보겠다.



신헌과 초의의 교유

먼저 신헌과 초의의 교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신헌은 1866년 8월 2일, 81세를 일기로 초의가 세상을 뜨자 제자 선기(善機) 등의 요청에 따라

「초의선사화상찬(草衣禪師畵像贊)」 병서를 짓는다. 그 글은 이렇다.

내가 일찍이 연영(蓮營)을 맡아 나갔을 적에 스님과 더불어 노닐었다.

뒤에 녹도(鹿島)에 귀양 가자 스님이 산과 바다를 건너와 종유하였는데 또한 두 번을 만났다.

 서울로 돌아온 이듬해에도 창랑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두터이 대하여 끝내 버리지 않았으니 또한 감사할만 하다.

 스님은 불교의 경전에 정심하였다. 일찍이 나와 더불어 선종과 교종이 본시 두 가지 이치가 아님을 토론하였는데,

스님은 이를 몹시 옳게 여기며, 내게 자신이 지은 선문(禪門)의 변이(辨異)에 대한 글을 보여주었다.

 나 또한 답한 것이 있다. 스님은 시문에 뛰어났으니, 대개 다산 정약용 공에게서 받은 것이다. 또 서화에도 뛰어났다.

사대부와 더불어 노닐기를 기뻐하였고, 자하 신위와 추사 김정희 등 제공과 특히 친하였다. 또한 근세의 혜원(惠遠)과 

관휴(貫休)의 부류이다. 일찍이 두륜산의 광명전(光明殿)에 거처하였고, 법랍이 80세였다.

그 고족 선기(善機) 등이 스님의 영정을 맡겨 보내 내 말을 구하였다. 스님의 깊은 학문과 맑은 모범은

형상으로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 세상에 다시 일으킬 수도 없다.

아! 마침내 이를 위해 쓰고, 다시금 찬한다.


신헌은 1843년 11월 15일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해남에 내려왔다.

그는 호남으로 내려오기 전부터 초의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초의가 신헌보다 25세가 더 많았다.

당시 신헌은 「증초의순공(贈草衣洵公)」과 「증초의상인(贈草衣上人)」 등의 작품을 지어 인사를 건넸고, 1845년에는

직접 두륜사로 초의를 찾아가 「춘유두륜(春遊頭輪)」과 「초암제증초사(草庵題贈草師)」 2수를 지어 초의에게 주었다.

 초의는 뒤에 이 시에 화답하여 10수의 시를 지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간 신헌은 1849년 7월 신원이 분명치 않은 의원을

데려다가 왕을 진찰케 해서 갑작스레 병사에 이르게 한 죄목으로 녹도(鹿島)에 귀양을 간다.

이후 1854년까지 머물게 되는데, 당시 초의는 녹도로 두 번씩이나 신헌을 직접 찾아가 위로하였다.


당시 신헌은 녹도 유배지에서 헝크러진 마음을 추스릴 겸 해서 송나라 때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엮은

『심경(心經)』을 읽고 있었다. 초의는 신헌과 함께 이 책을 읽다가 빌려줄 것을 청해 이듬해 다시 올 때 돌려주었고,

신헌에게 이때 자신의 시집에 발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신헌은 이에 1851년 9월에 『초의시고』에 발문을 써주었다.

1857년 신헌이 해배되어 서울로 올라오자, 이듬해인 1858년 봄에 초의는 다시 서울 한강가의

창랑정(滄浪亭)으로 신헌을 방문했다. 당시 초의는 완당의 영전에 분향하고 제문을 올릴 겸 해서 상경했던 터였다.


또한 두 사람은 당대 불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백파(白坡) 긍선(亘璇, 1767-1852)과의 논쟁에도 함께 참여했다.

윗 글에 따르면 일찍이 두 사람은 선종과 교종이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니라는 점을 두고 토론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기 전, 백파가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을 살활(殺活)과 체용(體用)의 나뉨을 근거로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한데 대해, 초의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지어 그 논리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본격적인 비판을 전개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추사도 가담하여 당시 일대 뜨거운 논쟁이 붙었다.

초의는 토론 끝에 자신이 지은 백파 비판의 글을 신헌에게 보여 주었다.

 

 이에 신헌이 다시 이 논의에 뛰어들어 장장 수천 자에 달하는

「여초의선사의순서(與草衣禪師意洵書)」를 보내 초의의 논점 중 의문 나는 점을 비판했다.

 워낙 복잡한 논의인데다 필자의 역량을 벗어나는 문제여서 이에 관해서는 여기서 따로 논하지 않는다.


이후 초의는 일지암에 칩거했고, 신헌은 벼슬길에 복귀하여 바쁜 나날을 보냈으므로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1866년 초의가 대둔사 쾌년각에서 81세를 일기로 입적하자 제자들이 신헌을 찾아와 「화상찬」을 부탁했고,

 신헌은 평생의 우의를 기려 「화상찬」을 지어주었다.

 글 끝에 남긴 찬(贊)에서 신헌은 초의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師來旣空 스님 오심 공이요
其去亦空 떠나심도 공일세.
來空去空 가고 옴이 다 공이나
將亦無同 또한 장차 같지 않네.
一幅丹靑 한 폭의 그림에다
强留神丰 풍신(風神) 굳이 남긴데도,
儼然天竺 천축국 엄연하니
本無其蹤 그 자취 본시 없다.
撈之掬之 붙잡고 움키어도
水月松風 물위 달빛 솔바람일세.
師在不在 스님이 있건 없건
孰謂始終 처음과 끝 뉘 말하랴.



모든 법이 다 공(空)한데, 영정으로 그 모습을 남긴대도 본시 없는 자취의 허상을 붙들려는 것일 뿐이니,

스님이 계시고 안 계시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신헌의 이 글은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이 소장한 초의선사 진영 상단에도 신헌의 친필로 적혀 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문집에 실린 것과 달리 초의선사의 입적시 나이를 84세라고 잘못 적었고,

글을 쓴 시기도 초의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을축년(1865) 7월 25일로 적혀 있는 사실이다. 연유를 알 수 없다.

서명란에는 ‘유경도인(留耕道人) 훈찬(薰贊)’이라 적고 그 아래에 금당(琴堂)이란 신헌의 인장을 찍었다.

향후 더 면밀히 살필 점이 있다.

 

 

 

 

 

신헌과 초의의 시문 수창

이제 신헌과 초의가 주고 받은 시문을 살펴 보기로 하자.

 다음은 신헌이 1843년에 지은 「초의 의순에게 주다(贈草衣洵公)」이다.

 

頭輪山下轉摩尼 두륜산 아래에서 마니주(摩尼珠)를 굴리니
色色如如影影隨 색색마다 여여(如如)하여 그림자 따라오네.
南來不見曾遐想 멀리서 그리다가 남쪽 와도 못 만나니
奇畵奇文未展時 기이한 그림과 글 아직 보지 못했구려.


추사의 제자였던 신헌은 해남으로 내려오기 전부터 추사를 통해 초의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다.

3구에서 일찍이 품어온 먼 곳을 향한 마음을 남쪽에 와서도 펼쳐 보지 못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헌이 먼저 초의에게 시를 보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한 내용으로 여겨진다. 신헌은 초의의 거처에 들러

그의 기이한 그림과 시문을 펼쳐 보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이 시를 받아본 초의는 답례로 자신이 법제한 차 2,3봉지를 신헌에게 보냈다. 그러자 신헌은 다시

「초의상인에게(贈草衣上人)」란 시를 지어 보냈다.



草衣上山去 초의가 산 위로 떠나가서는
聞居草庵中 초암의 가운데서 산다고 하네.
結草四十年 띠집을 얽은 지 40년인데
往來有淸風 오가는 건 해맑은 바람이라네.
白雲抱石宿 흰 구름 바위 안고 잠을 자노니
細谷沿溪通 좁은 골 시내 따라 길이 통한다.
連床書畵裏 책상에 쌓아둔 서화 속에서
長明一燈紅 붉은 등불 하나가 늘 환하구나.
拾枯以爲爇 고목 주워 이것으로 땔감을 삼고
抉芽以爲茗 차싹을 따와서 차를 만든다.
春陰邃曬箔 봄 그늘서 발에다 쬐어 말리니
火候適炒鼎 볶는 솥에 화후(火候)가 마침 맞구나.
百煎石間水 바위 틈 솟는 물을 백 번 달여서
點來光澈瀅 차 끓이자 그 빛이 몹시도 맑네.
感君兩三封 그대가 두 세 봉 줌 감사하노니
奇絶出塵逈 빼어남 티끌 세상 벗어났도다.
我來蓮葉界 이내 몸 연잎 세계 들어와 보니
頭輪山邇密 두륜산이 더더욱 가까웁구나.
七寶粧伽藍 칠보로 가람을 단장했어도
一爐淨禪室 일로향실(一爐香室) 선실(禪室)은 정결도 하다.
振衣欲相尋 옷깃 떨쳐 서로를 찾고자 하나
魔累恐自遹 마가 끼어 어긋날까 걱정이 되네.
一見山人足 산인의 발자취 한번 보고는
白雲心上出 흰 구름이 마음에서 피어나는 걸.



신헌의 문집은 어지러운 초고 상태여서 워낙에 오자가 적지 않다. 이 시 또한 원문에 미심한 글자가 여럿 된다.

 2구의 ‘문거(聞居)’는 ‘문거(聞去)’로 되어 있고, 4구의 첫 글자는 결자인데 의미를 살펴 ‘왕래(往來)’로 채워 넣었다.

 20구의 ‘일로(一爐)’는 필사본에는 ‘일로(一罏)’로 되어 있는데 오자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신헌은 초의의 일지암에 대해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가보지는 못한 듯하다.

 9구부터는 초의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찻잎을 채취해서 발에 펴서 봄 그늘에 말리고,

이후 화후(火候)를 조절하여 솥에서 덖는다. 그리고는 석간수(石間水)로 달여 내오면 빛깔이 투명하여 해맑다고 했다.

이런 차를 두 세 봉지나 보내주니 당장이라도 초의가 머무는 일로향실(一爐香室)로 달려가고픈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음은 「금당기주」에 실린 신헌의 「초의」란 글이다.

내가 일찍이 연영(蓮營) 임소에 있을 적에 대둔사 승려 초의 의순 중부와 함께 두륜산에 놀러가서

운을 뽑아 율시 두 수를 짓고 인하여 초의에게 주었다. 그 뒤 6,7년이 지나 초의가 내 귀양지 거처로 나를 찾아와,

그 시권(詩卷)을 가지고 와서 발문을 청하였다. 그 시권을 뒤져 내 시운에 화답한 시 10수를 얻었는데,

 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초의가 내게 대해 각별한 줄을 알았다.

또 그 시는 연천 홍석주 선생과 해거 홍현주 선생, 자하 신위 선생에게 허가받은 바다.


이 글은 이후 두 사람이 반갑게 해후하여 주고 받은 시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신헌이 다시 초의에게 시 두 수를 지어 주었고,

6,7년 뒤에 초의가 자신의 화답시 10수가 포함된 시집에 발문을 요청했다.

먼저 신헌이 초의에게 준 두 수의 시를 살펴본다.



時平裘帶樂時休 평소 갖옷 허리띠를 즐거울 땐 풀어두니
山寺雲烟起我遊 산사의 구름 안개 날 일으켜 노닐게 하네.
別有氤氳春以外 이 봄날 저 너머로 따로 성한 기운 있어
元來盤礴海之頭 원래부터 바닷가서 다리 뻗고 편히 쉰다.
襌祠紀績知回向 선사(禪祠)의 기적비(紀績碑)에 회향함 알겠거니
溪榭憑虛覺大浮 허공 기댄 냇가 정자 허망함을 깨닫겠네.
喫惱趙州茶供養 조주(趙州)의 차 공양을 괴롭도록 마시니
相關花柳亦成尤 화류(花柳)와 상관함이 또한 허물 되겠구려.



제목이 「봄에 두륜산을 노닐며(春遊頭輪)」이다. 바쁜 벼슬길의 와중에서 모처럼 대둔사로 놀러온 한갓진 마음을 노래했다.

절 입구의 부도탑과 비림(碑林)에서 이미 이 절을 거쳐간 고승대덕의 자취를 보고 회향하는 마음이 일었는데,

침계루(枕溪樓)를 지나면서는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한 줄을 새삼 깨달았노라고 했다. 절에 와서 초의에게서 차 공양을

 실컷 받고 나자, 화류(花柳) 즉 기생들과 풍악 잡히며 노는 것은 오히려 허물이 되겠기에 그만 둔다고 말한 내용이다.


두 번째 시는 앞서의 운자로 다시 지은 「초암에 제하여 초의스님에게 주다(草庵題贈草師)」이다.

이때 신헌은 초의를 따라 일지암까지 올라갔던 모양이다.



君寄襌林是貫休 선림(禪林)에 기탁하니 그대 바로 관휴(貫休)인데
平生喜與士夫遊 평생에 사대부와 함께 노님 기뻐했지.
貝徑深悟空中色 공즉시색(空卽是色) 깊은 이치 불경에서 깨닫고는
茆屋移居最上頭 산꼭대기 높은 곳에 띠집 지어 옮겨 사네.
佛土過來求極樂 부처님 땅 지나와서 극락을 구하려니
吾身忘却在閻浮 내 몸이 염부제(閻浮提)에 있는 줄도 잊었다오.
若逢人世淵明輩 세상에서 만약에 도연명 무리 만난다면
三笑溪橋孰更尤 시내 다리 세 번 웃음 뉘 다시 허물하리.



초의를 진나라 때 도연명 등과 사귀었던 승려 혜원(惠遠)과 관휴(貫休) 등에 견주었다.

 이어 8구의 삼소(三笑)는 진(晉)나라 때 승려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적에 손님을 전송하더라도

 호계(虎溪)를 건너는 법이 없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 등이 방문했을 적에는 이야기에 팔려 저도 몰래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초의가 신헌의 시 2수에 화답한 10수는 『초의시집』에 「

삼가 우석(于石) 신공(申公)께서 주신 시에 화답하다(奉和于石申公見贈)」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지면 관계상 읽지 않는다. 신헌은 또 1837년 초의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올 때 지은 금강산 시첩을 보고 장시인

 「차운하여 의순 공의 금강첩에 제하다(次題洵公金剛帖)」를 지어주기도 했다.

 이렇듯 신헌과 초의는 처음 만남 이후 차와 시문을 매개로 한 교유를 줄곧 이어갔다.

 

 

 

 

 

 

 

신헌 초상화. 고려대 박물관 소장.

 

 

신헌의 차시

이제 신헌의 문집 속에 남은 차시를 살펴, 그의 차생활에 대해 알아보겠다. 신헌이 젊은 시절에 쓴 「벽간소기(壁間小記)」를 보면 거처의 벽에 주문공(朱文公)의 「백록관학규(白鹿館學規)」를 써 붙여 놓고, “아침 차 마시기 전에 20번, 마신 뒤에 20번, 저녁 차 마시기 전 20번, 마신 뒤 20번을 읽는다”고 한 내용이 보인다. 태만해지기 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는데, 이 글에서 그가 젊은 시절부터 아침 저녁으로 차를 즐겨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차를 노래한 한시도 여러 수 남겼다. 다음은 「중유가 차를 보내준 데 감사하며(謝仲猶惠茶)」란 작품이다.

 



遠來一縫麻 멀리서 삼베 꿰맨 봉지가 오니
中有七斤茶 그 속에 일곱 근의 차가 들었네.
慇勤手自坼 은근하게 손으로 직접 뜯어서
遂令口吻佳 마침내 입맛에 좋게 하였지.
茶味猶可得 차맛이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其趣固難賒 그 운치 참으로 얻기 어렵네.
握椒不足比 한줌의 산초도 견줄 수 없고
報瓊猶爲些 패옥으로 갚기는 외려 작다네.
何以繼芳訊 어이해야 꽃다운 소식 이을까
再復興三嗟 다시 거듭 세 번 탄식 일으키누나.



신헌이 17세 나던 1827년 봄에 쓴 시다. 중유(仲猶)는 젊은 시절 벗인 변길(邊佶)이다. 그가 멀리서 차 7근을 보내왔다.

차는 삼베로 만든 주머니에 잘 꿰매어져 있었다. 주머니를 끌러 차를 끓여 마시고, 차맛도 차맛이지만 차를 베주머니에

담아 보낸 그 정성에 감동하는 마음을 적었다. 7구의 악초(握椒)는 『시경』「진풍(陳風)」 「동문지분(東門之枌)」에

 나온다. 남녀가 어울려 교외로 소풍 나갔다가 산초 한 줌을 선물로 건네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여기서는 벗이 보낸

7근의 차가 『시경』의 산초 한 줌 보다 더 고맙고 귀하다는 뜻이다. 8구의 보경(報瓊)도 『시경』 「위풍(衛風)」의

「모과(木瓜)」에서, “내게 모과를 보내주매, 패옥으로 보답하니.(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한 대목에서 따왔다.


앞서 「벽간소기」 뿐 아니라 위 작품을 보더라도

신헌은 초의와 만나기 훨씬 전부터 차에 대해서는 비교적 익숙했던 것이 분명하다.

 다음에 읽을 시는 「차를 끓이며(烹茶)」이다. 24세 때 작품이다.



梅前酒後小燈靑 매화 보며 술 마신 뒤 작은 등불 푸른데
帷幙深深擁雪亭 장막은 깊고 깊다 눈 온 정자 둘러있네.
山味一杯分舊雨 산미(山味) 한 잔을 옛 벗과 나누고는
泉香數点付童星 천향(泉香) 몇 점을 동자에게 주노라.
世間事業成恒飰 세간의 사업이야 늘상 먹는 밥이 되고
病餘精神註逸經 병 앓은 뒤 정신은 일경(逸經)에 주를 다네.
近日不堪昏似夢 요즘 들어 꿈속처럼 어지러움 힘들더니
塵腸滌盡悅如醒 찌든 내장 씻어내자 술 깬 듯이 기쁘도다.

 

매화꽃을 앞에 두고 벗과 술자리를 가졌다. 작은 등불 하나 푸르다. 눈쌓인 정자에 장막이 둘러쳐 있다.

산미(山味), 즉 차를 끓여 오랜 벗과 함께 마신다. 그리고는 아이를 시켜 향을 사른다. 돌이켜 보면 세간의

사업이란 것은 하루 세 끼 먹는 밥처럼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병 앓은 뒤 투명한 정신으로 일경(逸經), 즉

옛 경전에 주석을 달며 정신을 추스린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부쩍 멍하게 지내던 나날이었는데,

한 잔 차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찌든 내장을 말끔히 씻어내자, 어리 취한 듯

몽롱하던 정신이 산뜻하게 되돌아온다.


28세 때인 1838년 겨울, 수파산(壽坡山)에 가족과 함께 머물 때 지은 「추려삼십수(楸廬三十首)」

 연작 중 제 24수에도 차를 노래한 시가 있다.



建州雙井著茶經 건주차와 쌍정차는『다경』에도 나오는데
此物眞堪養性靈 이 물건 참으로 성령(性靈)을 기를만 해.
雪片每當煎處見 차 달일 때 언제나 설편(雪片)이 보이고
松風更擬沸時聽 물 끓을 땐 다시금 솔바람 소리 들리는 듯.
索居奚止孤愁破 외진 거처 근심을 없애줄뿐 아니라
暮境偏冝宿醉醒 노년에 숙취에서 깨는데도 꼭 맞다네.
可愛香芽三數裹 어여쁘다 향그런 차 세 겹이나 포장하니
來從去歲玉河星 지난 해 옥하(玉河)에서 보내온 것이라네.



중국에 연행갔던 친지에게서 선물로 받은 중국차에 대해 노래한 작품이다.

1구의 『다경』은 실은 모문석(毛文錫)이 지은 『다보(茶譜)』를 가리킨다. 이 책 속에 건주의 북원차(北苑茶)와

 쌍정의 백아차(白芽茶)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 때 구양수가 『귀전록(歸田錄)』에서 “납차(臘茶)는

검주(劍州)와 건주(建州)에서 나고, 초차(草茶)는 양절(兩浙) 지방에서 많이 난다. 양절 지방에서 나는 제품으로는

 일주차(日注茶)가 으뜸이다. 경우(景佑) 년간 이후로는 홍주(洪州) 쌍정의 백아차(白芽茶)가 점차 성행했는데

근년에 만든 것은 더더욱 훌륭하다”고 언급했던 바로 그 차다.

아마 이때 선물로 받은 차에 건주와 쌍정의 이름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3,4구는 눈[雪片]을 녹여 찻물을 끓이는데, 물이 끓을 때 송도성(松濤聲)이 이는 것을 묘사한 내용이다.

쓸쓸한 거처에서 묻혀 지내니 고적한 근심을 없애주는 것이 차이고, 나이 들어 간밤의 숙취에서

깨어나게 해주는 것도 차라고 하여, 차와 늘 함께 하는 생활을 노래했다.

중국에서 온 차는 세 겹이나 겹겹이 포장되어 있었던 듯하다.

 8구의 옥하(玉河)는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옥하관(玉河館)을 지칭한다.


다음은 전라우수사 시절인 1844년경에 지은 「밤중에 일어나 회포를 적다(夜起書懷)」란 작품이다.



官居半在病吟中 벼슬살이 절반은 병 앓아 신음하니
瘴海相連合一空 바다 장기(瘴氣) 잇닿아 온 허공과 합쳐지네.
百壽湯煎茶失水 백수탕(百壽湯) 끓이다가 차는 물을 잃었고
三重帳掩燭搖風 세 겹 장막 닫았어도 등불 바람에 흔들린다.
睡餘怊悵迷鄕夢 잠깬 뒤 구슬피 고향 꿈만 어지러워
年後支離檢已功 세밑에 지리하게 자기 공부 점검한다.
若問公私長處語 공사(公私) 간 좋은 점을 말로 물어 본다면
頭生佛氏白毫同 부처님의 백호광(白毫光)이 생겨남과 한가지리.



당시 신헌은 익숙치 않은 바닷가 생활에 장기(瘴氣)로 인해 병치레가 잦았던 듯하다.

3구에서는 백수탕(百壽湯)을 끓이다가 차가 물을 잃었다고 했는데, 백수탕은 당나라 소이(蘇廙)의

「십육탕품(十六湯品)」에 나오는 말이다. 물이 십비(十沸)를 넘긴 노숙(老熟)한 상태를 가리키며

 백발탕(白髮湯)이라고도 한다. 넋놓고 앉았다가 물이 너무 끓어 쇤물이 되는 것도 몰랐다는 말이다.

차를 끓이면서 탕비(湯沸)의 단계까지 가늠하고 있을만큼 차에 대해 상당한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겹이나 되는 장막을 둘러쳐도 웃풍이 스며드는 찬 방에서 꾸다 만 고향 꿈이 슬프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지난 1년 동안의 성과를 점검해 본다. 7,8구에서는 이곳에 와서 지낸 생활에

무슨 좋은 점이 있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부처님의 미간에서 백호광(白毫光)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고 했다

. 그만큼 묵묵히 자기 내면과 맞대면한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는 의미로 읽었다.

원문의 ‘약문(若問)’은 필사본에 ‘약향(若向)’이라 되어 있고,

 ‘백호(白毫)’도 ‘백호(白豪)’로 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바로 잡았다.


이밖에도 「유사(酉史)가 보여주는 시에 차운하여(次酉史示韻)」의 1,2구에서는,

“그대와 우리 집서 스무 해를 시 읊으니, 차향과 시경(詩境)으로 몇 번이나 자리했나

.(君嘯我家二十年, 茶香詩境幾番筵)”(133면)고 하여, 벗과 더불어 시 지으며 노니는 자리에

늘 차향(茶香)이 함께 했음을 노래한 바 있다.

「낮잠이 한창 달다 일어나 시를 짓고 허소치에게 주다(午睡適酣起而試草贈許小痴)」의 1,2구에서도,

“낮잠서 갓 깨어나 정신이 해맑은데, 한잔 차가 폐를 맑게 해 기운 가득함 깨닫누나.

(午睡初逥秋水神, 甌茶淸肺覺氤氳)”(139면)라고 한데서도 그의 생활과 늘 함께한 찻자리의 풍경이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신헌은 30대에 금위대장을 지내고,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摠戎使)로 강화도를 수비하고,

 병법에 밝아 「민보집설(民堡輯說)」을 엮었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 당시 조선측 수석 대표로 활동한 정치가로 기억된다.

 그런 그가 젊은 시절 전라우수사로 해남에 내려와 맺은 초의와의 교분을 통해

 우리 차문화사에 기억할만한 족적을 남겼다.  

 

 

 

 

신헌구의 「차설茶設」과 초의 차

 

 

 

신헌구(申獻求, 1823-1902)는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다.

그의 필사본 문집 『추당잡고(秋堂襍稿)』는 유일본이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학계의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그는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발문을 썼다.

초의의 『동다송』 끝에 적힌 시를 쓴 백파거사(白坡居士)는 그의 별호이기도 하다.

그는 「차설(茶說)」을 지었고, 차시도 여러 수 남겼다. 특히 대둔사 승려들과 폭넓은 교분을 나눠,

여러 관련 글을 문집에 싣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신헌구의 차 관련 시문을 소개하겠다.



신헌구의 생애와 대둔사 승려와의 교유

신헌구는 자가 수문(秀文), 호는 추당(秋堂)·옥침도인(玉枕道人)·백파거사(白坡居士)를 쓴다.

본관은 고령(高靈). 40세 때인 1862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864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186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승승장구 하던 그의 벼슬길은

대원군의 견제로 급제동이 걸렸다. 1875년 대원군은 비밀스럽게 봉함 편지 한 통을 그에게 내렸다.

반드시 성밖에 나가서 열어보라는 명이 있었다. 성 밖에서 열어본 편지에는 먼 변방으로

 내려가서 한동안 세상과 절연한 채 한가롭게 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국 원치 않게 유배 아닌 유배길에 오르게 된 그는 멀리 해남으로 내려왔다. 그는 1875년 봄에 해남으로 내려와, 5년 뒤인

1880년 봄에야 상경할 수 있었다. 연세대 도서관 소장 『추당잡고(秋堂襍稿)』는 모두 2권 2책이다. 1,2권의 표제 아래

 ‘남정록(南征錄)’ 상하라고 적혀 있다. 오롯이 해남 시절의 기록만 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문집을 통해 볼 때 그는 어성촌(漁城村) 어귀 부서만(扶胥灣) 동쪽 기슭에 자리한 해창촌사(海倉村舍)에

소요원(逍遙園)을 열고 꽃과 대나무를 가꾸며 은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의 유배나 다름 없었지만, 공식적인 죄목을 입어 내려간 것은 아니어서, 그곳의 지방관들과도 비교적 자주 왕래했다.

해남 지역의 이름난 문인이었던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 1813-1886)과는 특히나 가깝게 왕래하며 수많은

시문을 수답했다. 현재 송파와 백파 두 사람의 시문을 한데 엮은 필사본 『양파집(兩坡集)』이

따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을 정도다.


기약 없는 해남 체류 중에 딱히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그는 대둔사를 자주 드나들며 그곳의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추당잡고』에는 대둔사의 각 암자를 따로 노래한 한시와 그곳 승려들에게 준 여러 작품이 실려 있고,

이밖에 「호의대사시오화상찬(縞衣大師始悟畵像贊)」․ 「하의대사지정화상찬(荷衣大師止定畵像贊)」․

「성묵대사태원화상찬(性默大師太垣畵像贊)」․ 「일지암시집발(一枝盦詩集跋)」․「철선소초서(鐵船小艸序)」․

「무위화상안인소조찬(無爲和尙安忍小照贊)」․ 「운파화상익화소조찬(雲坡和尙益華小照贊)」․

「호의선탑명병서(縞衣禪塔銘幷序)」․ 「대둔사모연문(大芚寺募緣文)」 등

 대둔사 승려들을 위해 써준 많은 산문이 수록되어 있어 자료 가치가 매우 높다.


그는 1880년 봄 상경하여 벼슬길에 복귀했다. 1883년 이조참의에 올랐고, 1884년 12월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87년에 이조참판을 거쳐, 1892년 1월에 형조판서가 되고, 같은 해 8월에 한성부 판윤(判尹)에 임명되었다.

1894년 경기관찰사로 체직되었을 때 강원도 일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진두지휘한 일도 있었다.

1898년 중추원 일등의관(一等議官)을 거쳐 1902년 4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고령신씨세보』에 따르면 공사간(公私間)의 글을 묶은 기문이 50여권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 현재는 다 전하지 않고, 일부만 남았다.


특히 그는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발문을 쓰고, 『동다송』 끝에 제시(題詩)를 남겼다.

신헌구가 해남에 내려갔을 때는 초의가 세상을 뜬 지 이미 9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따라서 신헌구는 초의와 생전에 대면한 적은 없었다.

1875년 10월 대둔사를 방문한 신헌구에게 초의의 고족인 월여상인(月如上人)이 요청하여 「일시암시집발」을 지었다.

또 『동다송』 뒤에 붙인 제시는 1877년에 지었다. 이로 보아 현재의 『동다송』은 초의 당시의 편집이 아닌,

초의 사후 제자들에 의해 다시 정리된 것임도 확인된다.

 

 

 

 

 

 

신헌구의 『추당잡고』에 수록된 「차설」원문. 해(海)자에 지우는 표시가 있다. 연세대 도서관 소장.



신헌구의 「차설(茶說)」

먼저 읽어볼 글은 『추당잡고』 권 1에 수록된 「차설(茶說)」이다. 원래 제목은 「해차설(海茶說)」인데,

 나중에 ‘해(海)’자를 지워 「차설」로 고쳤다. 해남에서 만든 초의차에 대해 적은 대단히 소중한 기록이다.

내가 사물이 나는 것을 살펴보니, 먼데 것은 버려지고, 때와 만나지 못하면 감춰진다.

도리(桃李)의 문에 있지 않으면 사람이 알지 못하고, 종남산 가는 길목에 들지 않으면 재목이 팔리지 않는다.

슬프다. 해양(海陽)의 옥천차(玉川茶)는 기운과 맛이 꽃답고 짙어서, 설화(雪花)와 운유(雲腴)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다.

그러나 먼 시골의 풍속이 어리석어 차 보기를 돌피처럼 본다. 서울의 사대부는 토산을 보기만 하면

낮고 우습게 여겨, 한갓 건양(建陽)의 단산(丹山)과 벽수(碧水)만을 따라 화로 연기와 걸맞지 않다.

저것이 실로 황량하고 궁벽한 곳에서 생장하여, 요행히 나무꾼의 낫을 면한다 해도,

 마침내 뒤섞여 썩은 풀이나 마른 그루가 되고 마니, 어찌 능히 백수탕(百壽湯)을 시험하겠는가?
근래 대둔사의 산방에서 처음으로 마셔 보았는데, 일찍이 초의 스님이 만든 제품이었다.

옛날 부대사(傅大士)는 몽정(蒙頂)에 암자를 엮고, 성양화(聖楊花)와 길상예(吉祥蕊)를 나눠 심었다.

각림사(覺林寺) 승려 지숭(志崇)은 삼품(三品)의 향을 구별하여, 경뢰소(驚雷笑)는 자신이 마시고,

훤초대(萱草帶)는 부처님께 바치며, 자용향(紫茸香)은 손님에게 접대해서 마침내 천하에 이름이 났다.

 초의는 바로 이러한 부류이다.

신령한 마음과 지혜의 눈으로 풀 나물 가운데서 가려 캐어 오래 가는 훌륭한 맛을 얻었으니,

물건도 만남이 있는 것인가? 하지만 몽정과 각림은 당대의 명사들에게 많이 들어가, 제품이 이를 통해 드러났다.

초의의 차는 홀로 절집에서만 이름 났을 뿐, 세상에서는 일컫지 않는다.

이는 사대부들이 대단히 훌륭한 것을 놓쳤기 때문이니, 누가 자료를 수집하고 망라하여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이으려 하겠는가?

아! 내가 이 설을 짓는 것은 다만 초의의 차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가만히 남쪽 땅의 인사들이 훌륭한 것을 지녔으면서도

흔히 세상과 만나지 못한 탄식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서이다. 


원래 제목 속의 ‘해차(海茶)’는 초의가 만든 해남차를 줄여서 한 표현이다. 도리(桃李)의 문 운운한 것은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의 고사에서 따왔다. 도리는 뛰어난 인재를 뜻한다. 적인걸이 추천한 수십 인이 모두 명신(名臣)이

 되자 어떤 이가 천하의 도리(桃李)가 모두 공의 문하에서 나왔다고 말한데서 나온 말이다.

종남산 길목을 말한 대목 역시 당나라 때 노장용(盧藏用)의 고사가 있다. 종남산에 은거했던 그가

그로 인해 명성을 얻어 벼슬길에 올랐다. 종남산에 은거해 살던 사마승정(司馬承禎)을 만났을 때

그가 종남산을 그리워하는 뜻을 말하자, 사마승정은 “종남산은 벼슬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지요”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노장용이 몹시 부끄러워했다는 고사다.

 

두 이야기 모두 여기서는 권세 있는 사람에게 줄을 대지 않고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썼다.

본인의 능력보다 줄을 잘 서야 세상의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두를 던져놓고서야 해양(海陽)의 옥천차(玉川茶) 이야기로 넘어갔다. 해양은 해남을 말하고,

옥천차는 초의차의 다른 이름이다. 노동(盧仝)의 「옥천차가(玉川茶歌)」에서 따온 것이지, 구체적인 고유명사로 쓴 것은 아니다.

신헌구는 세상 사람들이 명성만을 쫓아 건양(建陽)의 단산벽수(丹山碧水)만 찾을 뿐, 해남 옥천차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을 통탄했다. 마치 도리의 문에 들지 않고, 종남산에 은거하지 않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능력 있는 인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정작 해남 사람들도 무지하여 차 보기를 돌피 보듯 잡초 취급을 하고,

서울의 사대부는 토산(土産)이라 하여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어 신헌구는 자신이 대둔사 월여산방에서 처음으로 마셔본 초의 스님이 만든 차맛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용된 부대사(傅大士)는 제나라 동양군(東陽郡) 사람 부옹(傅翁)을 가리킨다.

그는 몽산(蒙山) 꼭대기에 암자를 짓고 차를 심어 삼년 만에 성양화와 길상예라는 좋은 차 다섯 근을 얻어 황제께 바친 일이 있다.

 이 대목은 초의의 『동다송』 제 29구에서 32구까지에 그대로 실려 있다.

또 각림사 승려 지숭(志崇)의 경뢰소(驚雷笑)․훤초대(萱草帶)․자용향(紫茸香)의 삼품향차(三品香茶) 고사를 끌어왔다.

초의가 바로 부대사나 지숭에 해당하는 인물임을 들어 말하기 위함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초의가 뛰어난 안목으로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풀 더미 속에서 귀한 찻잎을 가려 내

 훌륭한 차를 얻은 것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몽정차와 각림차는 지금껏 이름이 전해오나,

초의차는 여전히 절집에만 알려지고 세상에서는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만 것을 안타까워했다.

 육우의 『다경』을 이어 속편을 지으려면 마땅히 초의차를 한 항목 두어 정리해야 할 것인데,

세상의 사대부들은 중국제 차만 찾느라 우리 것은 거들떠보지 않으니,

이래서야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나아가 그는 남쪽 인사들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도

세상과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탁하며 글을 맺었다.


이상 신헌구의 「차설」은 초의 사후에 초의가 만든 차를 처음 맛보고 숨은 인재에 견주어

그 차의 가치를 선양한 글이다. 차문화사에서 의미 깊은 글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신헌구 「추당잡고」「향차」

 


신헌구의 차시

신헌구의 『추당잡고』 권 1에는 「화훼잡시(花卉雜詩)」 20수 연작이 실려 있다. 남쪽 땅에서 나는 초목화과(草木花果) 중

 이름도 우아하고 서울서 보기 드문 것만 가려 한 수 씩 노래했다. 이중 제 19가 「향차(香茶)」다. 이 작품이 바로 초의의

『동다송』 끝에 적힌 백파거사 신승지의 제시(題詩)이다. 『동다송』에는 따로 제목 없이 시만 적어 놓아, 전후 경과를 알기

 어려웠는데, 금번 『추당잡고』의 확인을 통해 이 시의 원제목이 「향차」임을 확인하였다.

게다가 시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긴 글이 부연되어 있다. 그 글과 시를 함께 읽어 보겠다.

차나무는 덤불을 이루면 마치 과로(瓜蘆) 같고 잎은 치자 같다. 겨우내 시들지 않는다. 가을에 비로소 꽃을 피우는데 백장미 같다.

속이 노란 것이 마치 황금 같다. 곡우를 전후하여 참새 혀 같은 새 잎을 딴 것이 다품(茶品) 중에 으뜸이고, 효과도 뛰어나다.

승려 초의는 박식한데다 아치(雅致)가 있고, 차를 덖는 방법을 깊이 얻어 「다송(茶頌)」을 지은 것이 자못 자세하다.

각림(覺林)의 경뢰소(驚雷笑)․자용향(紫茸香)이나, 몽정(蒙頂)의 성양화(聖楊花)․길상예(吉祥蕊)에 견주어진다.

소동파와 황산곡의 설화(雪花)나 설유(雪腴), 단산(丹山)과 벽수(碧水)의 운간(雲澗)과

월감(月龕)도 모두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艸衣曾試綠香煙 초의 스님 일찍이 초록 향연(香煙) 시험하니
禽舌初纖穀雨前 곡우 전에 갓 나온 새 혀 같은 여린 싹일세.
莫數丹山雲澗月 단산(丹山)의 운간월(雲澗月)은 아예 꼽지 말지니
一鍾雷笑可延年 한 잔의 뇌소차(雷笑茶)가 수명을 늘여주네.
‘증시(曾試)’는 ‘신시(新試)’라고도 하고, ‘일종(一鍾)은 ’만종(滿鍾)이라고도 한다.(曾試一作新試, 一鍾一作滿鍾.)



차나무의 외양과 성질, 우전차의 우수한 효과에 대해 말한 후, 초의의 제다 솜씨가 출중해 「동다송」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앞서 「차설」에서 말한 각림과 몽정의 이야기와 소동파 황산곡의 차 관련 설화를 끌어와,

초의차가 이들 차에 전혀 손색 없는 우수한 품질을 지녔음을 칭찬했다.


시에서 단산(丹山)의 운간월(雲澗月)을 말했다. 이 또한 초의의 『동다송』 35, 36구에서 “건양(建陽)과 단산(丹山)은 푸른

물의 고장이라, 제품으로 특별히 운간월(雲澗月)을 꼽는다네. 建陽丹山碧水鄕, 品題特尊雲澗月”라고 한 대목에서 끌어왔다.

 운간월은 운간월감(雲澗月龕)을 글자 제약 때문에 세 글자로 줄여 말한 것이다. 『둔재한람(遯齋閑覽)』에 나온다.


사실 위 「차설」과 「향차」 두 편만으로도 차문화사에서 신헌구의 위치는 뚜렷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정쟁에 밀려

해남에서 5년을 일 없이 머문 일을 계기로, 초의차의 특별한 맛과 위상을 뚜렷하게 자리매김해 놓은 것이다.

 

 

 

 

 

명나라 왕문(王問)의 「자차도(煮茶圖)」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이제 『추당잡고』에 실린 그의 차 관련 한시 몇 수를 더 읽어 보고 글을 맺겠다.

먼저 읽을 글은 자신의 거처인 산재(山齋)의 다섯 가지 물건 중 하나로 차 끓이는 솥을 노래한 글이다.

제목은 「산재오물명(山齋五物銘)」 중 「다당(茶鐺)」이다.



相其䫉烟火籠 그 모습 살펴보면 연화(烟火) 낀 대그릇이요
罩見其心芬郁 그 속을 맡아보면 향기가 자욱하다.
沈深敲之而鏗 속이 깊어 두드리자 쟁그렁 소리 나니
繄爾百鍊之英 아 너는 백번 단련한 꽃다움이로구나.



그는 자신의 거처에 아예 차 달이는 솥을 마련해두고 차를 즐겼던 듯하다.

 모습은 연화롱(烟火籠)인데, 향기가 자옥히 짙다. 두드리면 쟁그렁 소리가 나니, 백 번 단련한 무쇠로 만든 것이다.


다음에 볼 시는 「견한(遣閒)」 12수 가운데 제 9이다.



碧篆淸幽繚竹欞 푸른 연기 그윽하다 대 마루에 서리었고
茗泉新汲甔甁靑 새로 길은 차 샘물로 물병이 푸르도다.
瘴嵐消滌惟渠賴 장기(瘴氣) 남기(嵐氣) 씻어냄은 다만 차에 힘입으니
却悔疎看陸羽經 육우(陸羽) 『다경(茶經)』 대충 봄을 이제와 후회하네.



남쪽 바닷가에 살다보니 산람(山嵐)과 해장(海瘴), 즉 산과 바다의 나쁜 기운에 맞아 병치레가 잦다.

이 나쁜 기운을 씻어내 주는 것은 오직 차뿐인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육우의 『다경』을

 열심히 읽어 차에 대한 공부를 더 많이 해둘 걸 하는 아쉬움을 달랜 내용이다.

차에 점차 맛을 들여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월여상인께 드림(贈月如上人)」이란 작품을 읽어 보자.



高僧居處竹爲林 고승의 거처라 대나무로 숲을 삼고
夜宿經齋月滿襟 밤에 자며 재 지내니 달빛 옷에 가득하다.
流水深山留我久 흐르는 물 깊은 산은 나를 오래 붙들고
淡雲疎雨共君尋 엷은 구름 성근 비에 그대 함께 찾는도다.
草衣古鉢傳神偈 초의의 옛 바릿대는 전신(傳神)의 게송이요
蓮閣寒鍾發省心 보련각(寶蓮閣)의 찬 종소리 성심(省心)을 일깨운다.
煮取茗香消碧痞 좋은 차 끓여내어 막힌 체증 해소하니
六根不敎世塵侵 육근(六根)에 세상 티끌 침입하지 않게 하리.
스님은 초의의 고족으로 보련각에서 지낸다. 차를 끓여 손님 접대를 잘 한다.
(師卽草衣高足. 住寶蓮閣, 善煮茗供客.)



초의 스님의 제자인 월여상인의 거처 보련각(寶蓮閣)에서 스님이 끓여 내온 차를 마셔 체증을 가셔내고,

세속에 찌든 속을 말끔히 씻어냄에 감사를 표했다. 보주에서 월여상인의 차 끓이는 솜씨를 특별히 칭찬했다.


다음은 「만일암을 지나다가 유산의 시운을 차운하다(過挽日菴次酉山韻)」란 시다.

대둔사의 암자인 만일암에 들렀다가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지은 시를 보고 차운했다.



春風吹不盡 봄바람 쉼 없이 불어오는데
白日駐禪家 흰 해는 선가(禪家)에 머물고 있네.
地高千年石 땅에는 천년 바위 우뚝 솟았고
山餘二月花 산에는 2월 꽃이 여태 남았다.
遠帆穿樹見 먼 돛단배 나무 사이 얼핏 보이고
危磴入雲斜 가파른 길 구름 잠겨 기울어졌다.
欲上高峰去 꼭대기에 올라 가보려 하여
催僮午點茶 동자에게 한낮 차를 재촉한다네.



만일암은 다산 정약용이 「만일암기」를 비롯하여 「만일암사적」 등 여러 편의 글을 남겼던 이름난 암자다.

그곳에 적힌 정학연의 시에서 흥취가 일어 한 수 남겼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암자여서 먼 돛이 보인다 했고,

정상으로 가는 길이 구름에 잠겨 있는 모습을 적었다. 다시 정상까지 올라가기 전에

그곳 사미승에게 차를 한 잔 청한다.


또 「낙서암에 올라(登樂棲菴)」에도 차 마시는 풍경이 보인다.



殘村小麓隱禪堂 쇠락한 마을 작은 기슭 선당(禪堂)이 숨었는데
樵牧侵尋少棟樑 규모도 자그마해 초동목부(樵童牧夫) 찾아올 뿐.
活引茗泉催武火 명천(茗泉)을 길어와서 무화(武火)를 재촉하니
澹飡草具甘迷陽 담백한 밥 풀 반찬에 미양(迷陽)의 삶이 달다.
徑莎冪磴迷平側 향초 덮힌 산길은 평지 비탈 어지럽고
野竹成籬任短長 대나무는 울을 이뤄 제멋대로 길고 짧다.
山外鳴籃停處久 산밖의 이름난 절 멈춰 지냄 오래거니
坐看紅樹入曛黃 붉은 나무 석양 비침 앉아서 바라본다.



3구의 ‘활인명천(活引茗泉)’이 그것이다. 활수(活水)를 끌어와서 차 달이는 샘물로 쓴다는 말이다.

 ‘최무화(催武火)’의 무화(武火)는 문화(文火)를 거쳐 불길이 거센 것이니, 어서 차를 마시고픈 마음을 담았다.

 4구의 미양(迷陽)은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로, 거짓으로 미친 체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낙서암을 찾았다가 차 대접에 이어 저녁 공양을 받은 뒤, 석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 새로 찾은 『추당잡고』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신헌구의 「차설」과 여러 차시를 읽어 보았다.

 신헌구는 중년에 5년간 해남에 쫓겨가 머물면서 대둔사 승려들과 폭넓은 사귐을 맺었고,

이 과정에서 뒤늦게나마 초의차와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차설」은 초의차의 우수성을 선양하는 한편,

알아주는 이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되어 있다.

또 그의 「향차」 시는 그간 제목 없이 시만 「동다송」 끝에 붙어 있던 것인데,

 금번에 시에 달린 소서(小序)까지 찾아내서 함께 읽어 보았다.

 다른 여러 차시들도 그의 차생활을 증언한다.

 

 

참고도서 : 정민 著 『새로쓰는 조선의 차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