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근현대의 격동

茶泉 2018. 8. 19. 08:16

돌아봄은 반드시 필요한 법.

미래의 행로가 거기 제시되어 있기에...

 

 

 

1871년 강화도로 출항하는 미국 해군함 콜로라도에 승선한 조선 대표단.

 

 

 

성벽에 둘러싸인 동대문을 북쪽에서 본 모습.

사진은 1909년 아내와 함께 세계여행 중이던 은행가 윌리엄 위즈너 채핀(Willam Wisner Chapin)이 찍었다.

그는 세계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어 기록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절반은 사자이고 절반은 유니콘인 해태상이 경복궁에 있는 광화문을 지키고 있다.

광화문은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968년 기능성 콘크리트로 재건축되었다.

 

 

 

한성 근교의 흰색 불상

 

 

 

독립문은 1897년 조선과 중국의 종속관계가 종식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 중국 사절단을 영접하던 장소에 건립되었다.

 

 

 

한복을 입은 스님들.

 

 

 

도롱이(짚으로 짠 우비)입고 삿갓을 쓴 남자.

가판대에 소형 일장기가 보인다.

 

 

 

 

지게꾼이 살아 있는 돼지를 시장에 내다 팔려고 지게에 꽁꽁 묶어 운반하고 있다.

 

 

 

떡을 만들기 위한 메치기 작업(왼편)과 닭 장수.

 

 

 

항아리들을 잔뜩 짊어진 지게꾼.

 



 


숙녀와 가마꾼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잠시 멈춰서 폭포를 감상하고 있다.

이 사진은 허버트 폰팅(Herbert Ponting)이 1906년 러일전쟁 취재를 마친 뒷 찍은 사진이다.

 

 

 

 

1899년 대한제국에 철로가 최초로 개설된 직후 한성-제물포 행 기차가 지나가는 한성역의 모습.

사람들은 신문물을 보러 가다갔다가 기차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거나 기적 소리가 울리면 놀라 도망가곤 했다.

 

1930년대 변형된 전통 의상. 소년이 쓴 갓은 소년이 이미 결혼했음을 말해준다.

 

 


자신의 집에서 포즈를 취한 양반 부부.


 

 

표를 주기로 미리 약속한 유권자들에게 나눠주려고 준비해놓은 고무신과 운동화들.

 

 

 

1948년 10월 여수 · 순천사건. 제주도 4 · 3사건 진압 목적으로 파병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군대는 지방 경찰의 탄압에 지친 민간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김구는 통일회담을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년 제헌의회 국회의원 선거 이후 대한민국 공화국의 초대 대통형 후보로 김구가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는 김구의 허락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남북한의 분열을 격렬히 반대한 그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김구는 자신을 후보에 올린 것은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예상대로 이승만에게 패배했다.김구는 1949년에 암살되었다.

아직까지 암살 이유와 배후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화계의 민족주의자 영웅으로 불리는 안재홍.

그는 일본에서 교육받았으며 후에 《조선일보》의 주필이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50년 납북되어 1965년에 사망했다.

 

 

 

 

'은도끼'(Silver Axe, 수려한 외모, 매너 웅변술로 미국인들을 매료시켰으나 보기와는 달리

쓸모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를 늘 불신했던 미국 군정에서 지어준 별명-옮긴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운형.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운동복에서

일장기를 지웠던《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추구하려고 했지만그 이유 때문에 1947년 북한 피난민 출신의 극우파에게 암살당했다.

 

 

 

 

 

김규식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03년에 프린스턴대학원을 졸업하고 1904년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성공적인 로비활동을 한 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도적인인물이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장군의 신임을 얻었으나

남북 분할에 반대했기 때문에하지 장군의 신임은 이승만에게 돌아갔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어 그해 12월에 사망했다.

 

 

 

 

 

1949년 남한에서 철수하는 미군. 미군은 지원군과 훈련군 500명만 남겼을 뿐,

중화기나 군용 차량 한 대 남기지 않고 철수했다. 반면 소련군은 탱크와 총포들을 북한에 남겨두고 철수했다.

 

 

 

 

 

 

 

 

 

 

1947년 남한의 일상생활과 상업 활동.

미제 통조림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부산의 암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미국 화물선에서 대량으로 하역된 밀가루를 가마니에 담고 있는 부산항 모습.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지나가는 행렬을 구경하고 있다.

 

 

 

1947년 서울의 교통 정리원.

 

 

 

1950년 9월 15일 어슴프레한 새벽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고 있다.

 

 

 

1950년 인천에서 미군을 바라보는 아이.

 

 

 

 

1951년 미국식 의상을 입고 미제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 한국 고아들.

 

 

 

1952년 한국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미국의 스카이레이더 전폭기.

 

 

 

휴전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 공산주의자 전쟁포로들이 버리고 간 미제 부츠들.

 

 

 

1963년 서울. 자신들이 짠 바구니를 지방에 내다 팔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1969년 남한. 무거운 짐을 이고 든 아낙네.

 

 

 

 

1960년 서울역사 주변.

 

 

 

1960년 4 · 19혁명.

 

 

 

 

숨진 시위 학생들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스님들.

 

 

 

1980년 5월 광주.

 

 

 

 

 

 

사진 옆에 엎드려 있는 학생. 하지만 이 학생도 결국 사망했다.

 

 

 

시위 학생들이 손이 묶인 채 끌려가고 있다.

 

 

 

"이게 나라냐~~"

 

 

 

 

 

※ 위 내용 모두는 (주)알에이치코리아에서 펴낸

로저 허드슨 글 · 정미우 옮김《코리아 A photographic Album》내용 중 일부를 스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