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쇄동 원림
두륜산 고계봉 일대의 하늘이 무겁게 내려 앉은 모습이다.
지난 1996년 지역 향토사가에 의해 마침내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되었다는 금쇄동.
해남땅에 들어서자마자 대흥사 초입의 장춘마을에서 완도 방향으로 급 우회전,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감춘 땅」이라는 고산 윤선도가 조영한『금쇄동(金鎖洞)』원림을 찾아간다.
금쇄동기(金鎖洞記)와 산중신곡(山中新曲)의 산실 금쇄동(金鎖洞) .
윤선도가 금쇄석궤(金鎖石櫃 : 황금의 자물쇠로 잠긴 궤)를 얻는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 속 장소로 각인된 이곳을 찾아 금쇄동이라 명명하고. 빼어난 22곳 마다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그가 원림(園林)을 조성하고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척한 문학산책로, 건물지와 연못지등의
유구가 남아 있고,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산고성(懸山固城)은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문지, 수구의 성곽시설과 망루지, 건물지, 제방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금쇄동은 단순한 원림이 아니다. 윤선도의 시문학이 창작된 산실로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크다해야겠다.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 보물 제482호 -
고산이 이곳 금쇄동에 은거할 당시 (인조 연간)
도연명 · 이백 · 백거이 등의 시구를 모아 지은 한시와 우리말로 쓴 단가를 합한 가첩(歌牒)이다.
산중신곡 오우가
1642년(인조 20)에 금쇄동에서 지은 연시조 18수로 ≪고산유고≫ 권6에 수록되어 있다.
금쇄동 / 부분<자료사진>
방금 전 사진을 찍던 나를 추월하여 먼저 이곳에 당도한 여성 한 분이 차단기 앞을 서성이는 모습.
그도 그럴 것이 인적이라 곤 없는데다 거리 표시 등, 유적에 관련된 안내가 전혀 없으니 망설일 수 밖에
더더욱 비까지 내릴 기미가 보이는 산골짜기의 음습한 풍경에 그녀의 답사 의지는 이미 물 건너 간 듯.
그렇다고 덩달아 나까지 뒤로 물러설 수 는 없는 일. 오랜 기간 간절히 찾고 싶었던 곳인데.
날씨도 후텁지근한 판이니 임도에 내리는 약간의 비 정도야 맞아주면 그 뿐.
신경 끄고 일단 출발이다.
왼편은 사방댐 시설. 오른편 길을 따른다.
다녀온 느낌으로 고산 묘역까지는 십여 리 조금 못 못미치는 듯.
원림은 금쇄동과 수정동으로 나뉘는데 진입도로에서 서북쪽으로 산 정상이 금쇄동.
수정동은 금쇄동으로 오르는 길 입구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처럼 초목의 이파리가 무성한 계절 위 안내도는 별로 도움이 안 된는 사실.
예전에 다녀온 이들의 자료를 보면 거리 표시 등의 안내판이 보이던데,
지금은 거리표시 등은 전혀 없고 두어 개 이정표 정도가 전부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한참을 들어가 답사 의지가 꺾일 즈음에야 겨우 모습을 보인다는 점.
금쇄동은 15만 평방미터의 넓은 면적으로 이 일대에 현산고성(懸山固城)이 있다.
이 포곡식 산성은 고려시대에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문지, 수구의 성곽시설과
망루지, 건물지, 제방 등의 성내시설이 남아 있다고.
일반 산행을 목적으로 한다면 좌우 생길이라도 치고 오를 수 있겠지만
한 두 군데 유적지도 아니고 오뉴월 칡덩굴 무성한 상태인지라 규모나 형태등을 가늠키 어려울테고,
결정적으론 다음 일정 시간표와의 간격에서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하여 오늘은 그저 윤고산 묘역 정도를 목표로 삼는 게 현명할거라는 판단.
《산중신곡》에 수록된 『오우가五友歌』전문을 웅얼거리며 다소 빠른 걸음으로 얼마쯤 걷다 보니,
베어낸 대나무가 널부러진 광경이 눈에 들어 온다. 이 곳도 분명 금쇄동 원림의 한 부분이 분명할 터인데...
「내버디 몃치나 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오르니 긔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 밧긔 또 더
야 머엇
리. 구룸빗치 조타
나 검기
로
다.
람소
ㅣ
다
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 믈뿐인가
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플은 어이
야 프르
누르니, 아마도 변티 아닐
바회뿐인가
노라. 더우면 곳 퓌고 치우면 닙 디거
,
솔아 너 얻디 눈서리
모
다.
구천(九泉)의 블희 고 줄을 글로
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거시 풀도 아닌거시. 곳기
뉘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다. 뎌러코 사시(四時)에 프르니그를 됴하
노라. 쟈근 거시 노피 떠셔 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의 광명이 너만니 또 잇
냐, 보고도 말 아니
니내 벋인가
노라.」
처음 만나는 이정표다.
판단컨데 우측길로 해서 좌측길로 내려올 수 있겠다는 결론.
잠시 후, 우측으로 고산 제각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잡풀 무성한 텅빈 제각에 발을 들여 놓기란 그리 내키지 않는 게 사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수북한 잡풀을 제치고 제각 탐방에...
정적에 휩싸인 고산의 추모 영역이 조금은 묵직하게 다가온다.
고산 제각 역시 녹우당이나 녹우당 뒷편 추원재의 덧처마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덧처마 형식이 마치 해남 윤씨의 문장을 상징이라도 하는 듯.
이 멀쑥한 건물에 제실지기 한 사람 정도는 거주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감?
정적 속의 재실 풍경을 둘러 보니 설령 귀신이 방문했다 해도 놀라 도망갈 판.건물 사이로 눅눅하고 을씨년스런 바람만이 스쳐서야 어디 원...
제각을 나와 얼마간 오르니 길 좌우로 제법 너른 장소가 펼쳐진다.
지세로 보아 아마도 금쇄동의 핵심적인 장소가 아니었을까?
드디어 계곡이 끝나는 지점의 산마루에 당도 한다.
계속해서 길은 좌측 마루금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불쑥 나타나는 이정표는 예상대로 왼편 골짜기 쪽으로 내려서라는 주문.
고산 선생의 묘역에 당도.
'연화부수형'에 해당한다는 안산의 조화를 일별한 연후 나름의 예를 갖춘다.
묘역 한 켠의 전사석.
현종 년간(1671년 7월 16일) 향년 85세,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생을 마감한 윤선도.
그해 9월 22일, 국가 공인 풍수가 이기도 했던 자신이 직접 낙점한 이곳 금쇄동 혈처에 묻히게 된다
경사백가에 무불통지하고 의약, 음양, 천문지리에까지 정통하였다는 조선 최고의 종합 지식인.
선대로 부터 엄청난 부를 상속 받았고, 자신 역시 간척 등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는 고산.
그 후손들도 선대의 유지를 잘 받들어 오늘에 이른다고 들었다.
이 묏자리에 얽힌 전설따라 삼십센티...
윤선도의 집에 여러날 머물게 된 풍수 이의신. 헌데 매일밤 집을 나서는 게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저녁상에 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취한 이의신이 잠에 빠져들게 되자
평소 이의신이 타고 다니던 말의 고삐를 당기니 능숙하게 지금의 이곳으로 와 멈추는 게 아닌가.
이튼날 아침 이의신에게 청하여 자신이 진즉에 묏자리를 정한 곳이 있으니 한 번 봐 달라고 이곳으로 데려오니
임자는 따로 있노라며 이의신이 윤선도에게 현재의 혈처를 양보했다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잦은 유배와 고초를 당했던 고산.
거침없는 발언과 형식,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수 많은 반대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대단한 지식인이자 자산가요 풍류인이기도 했던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으로 평가된다.
묘역 아랫쪽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신도비.
남인의 거목 미수 허목이 지었다는 신도비는 명문으로 꼽힌다고 들었다.
헌데 무슨 사연일까? 비석 양 끝 모서리 지점을 누군가 고의로 망치질을 해댄 흉한 모습이다..
증이조판서시충헌윤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諡忠憲尹公神道碑銘)
유명조선증자헌대부이조판서 ~마멸~조 국 숭록대부 ~마멸~ 의정겸 ~마멸~추관사(有明朝鮮贈資憲大夫吏曹判書 ~마멸~ 朝 國 崇 祿大夫 ~마멸~ 議政兼 ~마멸~ 秋館事) 허목(許穆)이 찬술하였고,
외손(外孫) 숭록대부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行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 世子右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 심단(沈檀)이 삼가 글씨를 썼으며,
4세 종손(宗孫) 유학(幼學) 덕희(德熙)가 삼가 전액을 썼다.
윤선도(尹善道)의 자는 약이(約而)로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4세조(世祖)는 국자감 상사(上舍) 윤효정(尹孝貞)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로 숨어 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스스로 호를 어초은자(漁樵隱者)라 하였다. 홍문관 부교리 윤구(尹衢)를 낳았는데, 또한 기묘 명신(己卯名臣 기묘사화 때에 화를 입은 사림(士林))으로 이 사실이 기묘당적(己卯黨籍 기묘년에 화를 입은 제유(諸儒)의 약전(略傳))에 실려 있다. 교리는 우참찬 윤의중(尹毅中)을 낳았으며, 우참찬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윤유심(尹惟深)이고, 작은아들은 윤유기(尹惟幾)이다. 윤유심은 부정(副正)까지 하였고 윤유기는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는데, 공(公)은 부정의 아들로 관찰사의 양자가 되었다. 본래의 생모(生母)는 안씨(安氏)로, 좌의정 안현(安玹)의 손녀이다.
만력(萬曆) 15년(1587, 선조20)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읽었으며,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26세에 국자감 진사에 보임되었으며, 광해군 때에는 초야(草野)에서 극언으로 상소하기를, ‘폐행신(嬖幸臣) 이이첨(李爾瞻)이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며, 의정(議政) 박승종(朴承宗)과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 한 글이 대개 수천 마디나 되자, 조야(朝野)가 크게 놀라 아주 변방인 경원(慶源)의 맨 북쪽 2천여 리나 되는 곳에 귀양 보내었다. 그곳은 오랑캐 땅과 인접하였는데,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이래로 죄를 얻어 귀양 가 있는 자들 가운데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기밀(機密)을 가지고 오랑캐와 내통한다 하여 모두 남쪽 변방으로 옮기자, 공도 기장(機張 경상북도 동래군에 있는 지명)에 옮겨졌다. 이곳은 동해(東海)의 한 모퉁이로 해가 맨 처음 뜨는 곳이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을 하고 나서 갇혀 있던 죄수를 크게 석방하여, 공도 귀양살이 13년 만에 돌아왔다.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전에 ‘죄를 입은 사람을 모두 뽑아 쓰자.’는 말이 있었는데, 공이 병진년(1616, 광해군8) 상소에서 김제남(金悌男)의 일을 말한 것 때문에 막는 사람이 있자, 장유(張維) 공이 말하기를,
(주1) “형가(荊軻)는 연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고 살아 있는 번오기(樊於期)에게 머리를 달라고 했는데, 윤선도는 간신 이이첨을 죽이자고 청하였거늘, 도리어 죽은 김제남을 아끼는가?”
하니, 말하던 사람이 그제서야 중지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6)에는 대군(大君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어 학범(學範)을 엄하게 세워 교훈하되 《소학(小學)》으로써 근본을 삼았으며, 학문을 강론할 때마다 반드시 옛 공자(公子)의 득실(得失)과 선악(善惡)을 인용하여 되풀이해서 극진히 하니, 상(上 인조)이 더욱 어질게 여겼으며, 공자(公子)도 또한 더욱 삼가서 존경하고 예우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옮길 때가 되었으나, 상이 교훈을 잘했다고 생각하여 5년 동안 옮기지 않다가, 임신년에야 옮겼는데, 호조(戶曹)의 좌랑(佐郞)ㆍ정랑(正郞), 사복시 첨정, 한성부 서윤을 지냈다.
계유년(1633, 인조11)에 과거에 급제하여 시강원 문학이 되었는데, 세자(世子)의 집에서 유언비어가 나돌기를,
“윤선도가 몰래 모략을 꾸미니, 앞으로 세자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다.”
하자, 공이 이 사실을 듣고 즉시 벼슬을 내놓았다.
갑술년(1634, 인조12)에 성주(星州)를 죄인(罪人)의 고을이라 하여 현(縣)으로 강등(降等)하였다. 공이 현감이 되었는데(전에는 목사(牧使)를 두었다), 겉으로는 상의 교지(敎旨)가 있어서 특별히 선임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마음에 거슬려 배척한 것이다. 이때에 삼남(三南 충청ㆍ경상ㆍ전라도의 총칭)에서 전답(田畓)을 측량한 것이 많은 원성을 사서 상소하여 ‘전정(田政)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에게 너그럽게 하라.’ 하였다. 그러자 당사자가 노하여 공이 죄를 얻게 되었는데, 상이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그러나 결국 사은(謝恩)하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에 공이 변란(變亂)을 듣고 생각하기를,
“국가의 대란(大亂)에 같이 일을 꾀할 만한 사람은 없고, 강도(江都 강화도(江華島)로 고려 원종(元宗) 때 서울을 이곳으로 옮겨 생긴 이름)는 종사(宗社)가 옮긴 곳이라 모든 공경 대신이 많이 가 있다.”
하고, 따라가려고 하여 향읍(鄕邑)의 자제를 모집하고 가동(家僮) 1백 명 정도를 동원하여 배를 타고 대양(大洋)으로 나갔다. 강도까지 수천 리나 되어 배로 밤낮없이 매우 빨리 갔는데도, 성은 벌써 수일 전에 함락되고, 남한산성도 포위된 지 40여 일로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상이 이미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나갔는데, 적이 길을 막았다.”
하니, 공이 생각하기를,
“거가(車駕)는 이미 좇아갈 수 없고 호남(湖南)은 대령(大嶺 차령 산맥(車嶺山脈)) 밖에 멀리 떨어져 막혀 있어서 온전할 것이니, 급히 배를 돌려 남방으로 돌아가면 행재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해남(海南)에 이르렀는데, 거가가 성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바다에 들어가서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살 만한 작은 섬을 택하여 살았다. 연달아 사도시 정, 대동 찰방에 임명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대간의 논핵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실제로는 죄상이 없었으므로 판의금부사 이덕형(李德泂)이 말하기를,
“윤선도가 먼 곳에 살면서 변을 듣고는 배를 타고 난리가 난 곳으로 달려왔었다. 바닷길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비록 이르지는 못했으나, 충신의 의(義)이다.”
하니, 상이 빨리 와서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덕(盈德)에 도배(徒配)하였는데, 1년 만에 돌아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유유자적하게 금쇄(金鏁), 문소(聞簫 전남(全南) 보길도(甫吉島)에 있음) 같은 곳에 정착하였는데, 다 산수가 아름다운 바닷가이다.
갑신년(1644, 인조22)에 상이 병을 얻자 태의(太醫)가 상에게 아뢰어 불렀으나, 공이 병 때문에 가지 못하고 상소하기를,
“마음은 몸의 주인으로 장부(臟腑), 규맥(竅脉), 기혈(氣血), 음양(陰陽)의 조화가 다 마음에 매어 있어, 마음이 편안하면 몸도 편안해서 풍한(風寒), 서습(暑濕), 귀매(鬼魅), 백사(百邪)가 저절로 들어오지 못하지만, 마음이 편치 못하면 곧 이것과 반대로 됩니다.”
하고, 이어 약석(藥石)으로 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호할 것을 비유하였으나, 보고되지 않았다.
(주2)소현(昭顯)이 죽자 큰 옥사(獄事)가 있어 세 왕손(王孫)을 제주(濟州)에 귀양 보냈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오랑캐를 정벌하여 원수를 갚고 상의 뜻을 움직여 드디어 일을 계획하자, 공이 다시 상소하여 ‘몸을 닦고 도를 닦아 왕손을 너그럽게 용서하여야 된다.’는 일을 현도(顯道)에서 올렸으나, 감사(監司) 이시만(李時萬)이 올리지 않았다. 공이 아들 윤인미(尹仁美)를 시켜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약칭)에 올리자, 정원이 기각하려다가 한참 뒤에야 올렸다. 상이 마음을 기울여 답하기를, ‘직접 바른말을 듣고자 한다.’ 하였다. 권력자들은 상의 뜻이 공에게 있음을 알고 다시 불러들일까 두려워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막았으나, 상의 뜻이 삼사 관직(三司館職 사간원ㆍ사헌부ㆍ홍문관에 속한 벼슬)에 쓰고자 하자, 임명을 맡은 사람이 사예(司藝 장악원(掌樂院)의 별칭)도 관직(館職)이라 하고 드디어 제수하였다. 상이 특별히 부르자 도성문 밖에 이르러 상소하여 죄를 청하고 물러가기를 빌어 마지않았으나, 상이 바로 공을 불러들여 특별히 승지에 제수(除授)하여 늘 경연(經筵)에서 모시도록 하니, 권력자들이 공을 더욱 꺼렸으므로 또 상소하여 강력히 물러날 뜻을 말하고 드디어 떠났다. 상은 생각하기를, ‘음모 때문에 밀려났다.’ 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힘써 만류하게 하여 특별히 예조 참의를 제수하였으나, 다시 맡을 뜻이 없음을 말하고,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것을 빌었다. 또 시폐(時弊) 8조(條)를 올려,
“공신(功臣) 원두표(元斗杓)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니, 제재하여 공신을 보전(保全)하소서.”
하였다. 김자점(金自點), 송시열, 원두표가 각각 당(黨)을 세우고 권세를 다투다가 김자점은 죽임을 당하고 원두표는 송시열에게 붙었는데, 이때 원두표를 편든 사람들이 윤선도를 논핵하여 벼슬을 빼앗고 내치자고 하자, 상이 처음에는 허락했으나, 곧 다시 서용하였다.
이때에 권력을 쥔 자들이 도민과 연해의 모든 어부를 다 강도(江都)에 차출하여 여러 성루(城壘)를 쌓자고 의논하였고, 또 양전(量田)ㆍ호패(號牌 16세 이상 남자에게 차게 하던 신분증명패)에 대한 의논이 있자 사방이 소요(騷擾)하였으므로, 공이 온당치 않음을 극진히 말하자, 상은 고맙게 생각하여 답변하였지만,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아 도민의 성 쌓는 일은 상이 특별히 그만두었고, 연해의 어부들을 옮기는 일도 역시 이의(異議)가 많아서 옮기지 않았다. 병신년(1656, 효종7)에 또 교지(敎旨)에 응하여 정치의 폐단을 논한 것이 수천 언이나 되었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왕후(王后 효종비(孝宗妃))가 병이 있자 공을 경사(京師)에 불러올려서 상이 특별히 공조 참의를 제수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상의(上意)는 움직이기 어렵다.’ 하여 헐뜯는 말이 날로 심해지니, 공이 진정(陳情)하여 파직해 달라는 소(疏)를 열 번이나 정원에 올렸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이 막고 덮어 버린 것을 말한 뒤에야 소가 올려졌다. 공이 떠나기를 청해 마지않자, 상이 마침내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이 정개청(鄭介淸)의 일을 추무(追誣 지난 일을 죽은 뒤에 무고하는 것)하여 그의 사당을 헐기까지 하자, 공이 또 상소하여 극진하게 변명해 주니, 당시의 의론이 사설(邪說)이라고 지적하여, 상에게 아뢰어 소를 물리치고 더욱 공격하였으므로 공은 드디어 파직되었다.
다음해에 효종(孝宗)이 승하하시자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상에게 아뢰어, 산릉(山陵)의 일에 대해 불러 의논하여 수원(水原)에 길지를 정하고 나자, 송시열과 송준길이 노하기를,
“능을 정하는 것은 큰일이니, 윤선도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드디어 고쳐 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공이 좇지 않자, 곧 불경죄를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공이 사사로이 이르기를, ‘뒤에 반드시 능을 옮기는 변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런 뒤 15년(1674, 현종15)에 산릉이 안에서 무너져 여주(驪州)로 개장(改葬)하였다.
전년 대행(大行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받기 전에 그를 높여 부르는 말)의 상(喪 효종의 상)에 태후(太后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는 마땅히 장자 삼년복(長子三年服 장자가 죽으면 어머니가 삼년 동안 상복을 입는 제도)을 입어야 하는데, 송시열과 송준길이 (주3)체이부정지설(體而不正之說)을 고집하고, 또 (주4)단궁지문(檀弓之免)과 자유지최(子游之衰)를 인용하여 기년(朞年)으로 내려 정하자, 공이 상소하여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나누어 둘로 할 수 없다.’ 하여 더욱 간절하게 강개(慷慨)하자, 상이 어렵게 여겨 결정을 못하였다. 이에 다들 ‘선왕(先王)을 범(犯)하고 현자(賢者)를 무함(誣陷)한다.’ 하여 상의 마음을 노하게 만들어 법으로 처단하게 하니, 상이 명하여 삼수(三水)에 안치(安置)했다. 이곳은 북쪽 끝으로 삼강(三江), 허천(虛川), 읍루(挹婁)의 옛 땅이었으며 뒤에 말갈(靺鞨)이 되었는데, 산과 못은 일찍 얼어붙고 오곡(五穀)은 생산되지 않으며 청강(靑江) 밖에는 예부터 파저(婆豬 만주인)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의 유계(兪棨: 시남)라는 사람이 상에게 아뢰어 소(疏)를 불태워 버렸다.
신축년(1661, 현종2)에는 가뭄이 들어 북청(北靑)으로 옮기려 하는데 송시열과 송준길이 막아서 결국 옮기지 못하자, 판중추부사 조경(趙絅: 용주)이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받들어 상차(上箚)하기를,
“윤선도가 무슨 죄입니까? 윤선도의 죄는 종통 적통을 말한 것이니, 효묘(孝廟 효종)를 위하여 좌단(左袒 남의 편을 들어 동의함)한 것입니다. 윤선도가 소(疏)를 드리던 날에 누가 전하에게 소를 태우자는 계책을 내었습니까? (주5)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워 버렸고, 지난번 광해군은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는데, 국사(國史)와 야사(野史)에 쓰기를 만약 ‘아무 조정 아무 때에 윤선도의 「예를 논한 소」를 불태웠다.’ 한다면 성조(聖朝)에 누(累)가 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조경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공은 죄를 가중시켜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계묘년(1663, 현종4)에 교리(校理) 홍우원(洪宇遠: 남파(南坡))이 또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설을 극진히 말하면서 ‘윤선도를 용서하여 풀어 달라.’ 하자, 홍우원까지 금고(禁錮)에 처하였다.
을사년(1665, 현종6)에 또 가뭄으로 인하여 공을 광양(光陽)에 옮겨 귀양 보내니, 또한 남쪽 끝 바닷가로 풍토가 매우 나빠서 난환(癱瘓 수족이 마비되는 병)과 괴질이 있어 객지에서 와 사는 사람 10명 가운데 8, 9명은 죽었다. 2년 뒤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러자 상이 그가 오랫동안 죄입은 것을 생각하여 풀어 주려고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다 석방하라고 하였으나 오직 수상(首相) 홍명하(洪命夏)만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이 특별히 석방하였다. 공이 사면되어 나와서, 바로 바다에 들어가 바닷가를 거닐면서 글을 읊어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漁父詞)를 지었다. 바닷가로 간 지 5년이 되던 해에 85세로 공이 별세하니, 현종(顯宗) 12년(1671) 6월 11일이다. 고향인 문소(聞簫)에 돌아가 장사 지내니, 치명(治命 죽을 즈음에 맑은 정신으로 하는 유언(遺言))을 좇은 것이라 한다. 그 다음해에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3년 뒤에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비 장씨(張氏))가 승하하였는데, 태왕태후(太王太后 자의대비)는 인선왕후가 첩자부(妾子婦 서자 며느리)라 하여, 대공복(大功服 대공친(大功親)의 상사에 9개월 동안 입는 복제)을 입으려 하자, 유생(儒生)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고례 경문(古禮經文)은 그렇지 않다.’ 하니, 상이 깨닫고 이에 경문을 친히 고찰(考察)하며 경자년(1660, 현종1)에 윤선도의 ‘예를 논한 소’를 명하여 들여오게 하였으나, 벌써 대궐 아래서 불태워 버렸고 《실록(實錄)》에도 올리지 않았으므로 들여오지 못하였다.
상(숙종(肅宗)을 말함)이 즉위하여 예를 논하다 죄를 얻은 모든 신하를 불러 등용하게 되자, 송시열을 북변에 안치(安置)하려 하였다. 그러자 권력을 쥔 자가 덕원(德源)도 북변에 있는 고을이라 하여 덕원에 안치하였다가 뒤에 웅천(熊川)에 옮겨 안치하였다. 수상 허적(許積)이 말하기를,
“웅천은 병이 심한 고을로 여기에 안치함은 살인(殺人)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여 또 장기(長鬐)로 옮겼다. (주6)이유정(李有湞)의 사건이 있자 송시열을 거제(巨濟)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고, 송준길은 이미 죽었으므로 삭탈관작하니, 나라의 예(禮)가 바로잡혀 마땅히 종묘(宗廟)에 고하고 반교(頒敎 나라에서 경사가 있을 때 그 사실을 널리 백성들에게 반포하여 알림)하려 하였으나, (주7)허적이 방해하여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고, 공(公)은 마땅히 의정(議政)으로 추작(追爵)하여야 하나, 허적(許積)이 또 옳지 않다 하여 이조 판서로 강등하였으며, 태상(太常)이 의논하여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는데, 상 6년(1680)에 (주8)허적이 사사되고 송시열의 제객(諸客)이 다시 진출하여 송시열은 작위를 회복하고, 공은 추증(追贈)한 작위와 내려 준 시호를 삭탈당했다.
공은 엄정하며 인의(仁義)를 많이 쌓아 널리 베풀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세세한 예와 작은 은혜로 명예를 바라거나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남의 뜻에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아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았고, 바른 도리 때문에 배척을 당해 죄수 명부에 있은 지 전후 20년이나 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 만큼 정당하여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의를 봄이 밝고 목숨 걸고 지켜서 뜻을 바꾸지 않는 이가 아니라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집에 거처하면서 가정 교육하는 것을 살펴보면, 의식(儀式)에 잘못됨이 없고 남녀와 내외의 분별을 더욱 근신하되 곡례(曲禮)나 내칙(內則)의 가르침과 같이하였으니, 풍속을 더럽히고 교육하지 않는 일에 경계(警戒)됨이 또한 크다 하겠다. 용주(龍洲 조경(趙絅))는 말하기를,
“예부터 나라의 존망이 달린 때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사람을 내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에 죽게 하여, 한 세대(世代)를 일깨우고 후인(後人)을 가르치게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공이 바닷가로 들어가 사람들이 해옹(海翁)이라 하였는데, 한때 다들 이렇게 불렀으며, 혹은 고산 선생(孤山先生)이라 하니, 고산은 바로 나라의 동쪽 교외 강가에 있는 구업(舊業 전에 살던 곳)이다. 묘명(墓銘)은 다음과 같다.
(주9) 비간은 심장을 갈라 죽었고 / 比干剖心
(주10) 백이는 굶어 죽었으며 / 伯夷餓死
굴원은 강물에 빠졌는데 / 屈原沈江
옹은 궁하면 더욱 굳으며 / 翁窮且益堅
죽게 되어도 변치 아니하였으니 / 至死不改
의를 보고 죽음으로써 지킨 것은 / 其見義守死
다 동일하다 / 一也
정부인(貞夫人) 윤씨(尹氏)는 본관(本貫)이 남원(南原)인데, 판서(判書) 윤돈(尹暾)의 딸로, 부덕(婦德)이 있어 한집안이 모두 어질다 칭찬하였다. 정부인은 공(公)보다 1년 뒤에 태어났고, 17년 전에 68세로 죽었다. 무덤은 바닷가 수정동(水晶洞)에 있었는데, 공을 장사 지낼 때에 고향인 문소에 옮겨 합장하였다.
장남(長男) 윤인미(尹仁美)도 학식이 많기로 알려져 명성이 있었다. 공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급제(及第)하였으나, 분관(分館)에서 배척을 받아 13년 동안 금고(禁錮 벼슬을 못하는 것)되고, 공이 죽은 지 4년 뒤(1674, 현종15)에 죽었는데, 금상(今上 숙종을 말함) 3년(1677)에 이르러 사간원 헌납을 추작(追爵)하였다. 차남(次男) 윤의미(尹義美)는 진사(進士)이고, 또 삼남(三男) 윤예미(尹禮美)는 모두 일찍 죽었다. 두 딸이 있는데, 사위는 심광면(沈光沔)과 이보만(李保晩)이다. 또 서출남(庶出男)이 두 명인데, 윤순미(尹循美)와 윤직미(尹直美)이고, 서출녀(庶出女)가 세 명인데, 직강(直講) 이익로(李翼老)의 첩(妾)과 황도빈(黃道彬), 양헌직(楊憲稷)의 처(妻)이다.
윤인미의 아들 윤이석(尹爾錫)은 상이 특별히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제수하였고, 윤의미의 아들 윤이후(尹爾厚)는 금년에 국자감 생원으로 새로 충원되어 선인(先人)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부탁한 사람이다.
[주1]형가(荊軻)는 …… 했는데 : 형가는 위(衛) 나라 사람으로 연 태자(燕太子) 단(丹)의 명을 받아 진 시황(秦始皇)을 죽이러 갈 때, 진 시황에게 의심 받지 않으려고 진 나라에서 망명해 온 번오기(樊於期)의 머리를 요구한 일을 말한다.
[주2]소현(昭顯)이 …… 귀양 보냈다 : 소현은 인조(仁祖)의 장자 소현세자를 말하며, 옥사는 소현세자의 강빈(姜嬪)의 옥사를 말한다. 소현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은 뒤 소의(昭儀) 조씨(趙氏)의 무고로 조씨에 대한 저주 사건의 배후자로 강빈이 지목되었다. 게다가 이듬해 인조의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은 사건이 일어나자, 그 소행의 장본인이라는 무고로 후원 별당에 유폐된 뒤 사사(賜死)되었고, 이듬해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에 유배되었다.
[주3]체이부정지설(體而不正之說) : 적처(嫡妻) 소생이라도 장자(長子)가 아니면 적장(嫡長)이 될 수 없다는 설이다. 이조 판서 송시열과 좌참찬 송준길 등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기년설(朞年說)과 국제(國制)를 참고하여 대행(大行 효종)이 이미 승통하여 왕이 되기는 하였으나, 순서로 보면 차자이므로 태후(자의대비)의 복제는 기년을 넘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주4]단궁지문(檀弓之免)과 …… 인용하여 :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공의중자(公儀仲子)가 아들의 상을 당하여 손자를 세우지 않고 작은아들을 세우자 단궁은 문복(免服)하여 기롱하였고,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상에 자유가 예가 아닌 최복을 입었는데 그것은 혜자가 맏아들 호(虎)를 폐하고 서자(庶子)를 세운 것을 기롱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 두 가지를 인용하여 송시열 등이 기년(朞年)을 주장하였다.
[주5]고려 …… 불태워 버렸고 :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이존오가 정추(鄭樞)와 함께 신돈을 가까이하지 말 것을 상소하니, 왕이 노하여 소를 다 읽기도 전에 불에 태우라고 명하였다. 《高麗史 卷112》
[주6]이유정(李有湞)의 사건 : 이유정은 송상민(宋尙敏)과 함께 스승인 송시열의 원통함을 풀고자 예론(禮論)을 제기하여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으나, 숙종의 격분을 사 도리어 고문을 당해 죽고 송시열과 송준길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주7]허적이 …… 못하였고 : 1675년 송시열이 장기(長鬐)로 이배(移配)된 뒤 남인 중에도 청남(淸南)은 더욱 송시열을 추궁하여 ‘송시열을 종묘에 고하여 가형(加刑)하라.’는 주장을 일으켰는데, 탁남(濁南)인 허적은 ‘송시열이 비록 예를 그르쳤다고는 하나 사형까지는 시킬 수 없다.’고 온건한 태도를 취한 것을 말한다.
[주8]허적이 사사되고 : 1680년(숙종6) 허적은 서자(庶子)인 허견(許堅)의 모역(謀逆) 사건으로 고향에 돌아가 형벌을 기다리던 중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사사된 일을 말한다.
[주9]비간(比干)은 심장을 쪼갰고 : 비간(比干)이 은(殷)의 주(紂)가 무도함을 보고 “신하된 자는 죽음으로 간해야 한다.”고 3일 동안을 간하니, 주가 노하여 “나는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이 있다고 들었다.” 하며, 죽여서 비간의 심장을 쪼개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주10]백이(伯夷)는 굶어 죽었으며 : 백이는 상(商)의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치려고 하자 신하로서 임금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주 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은 것을 말한다.
[주11]굴원(屈原)은 강물에 빠졌는데 : 굴원은 초(楚) 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초 양왕(楚襄王)이 간신의 참언을 듣고 굴원을 강남에 유배 보냈는데,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다가 되지 않자 멱라수(汩羅水)에 빠져 죽은 것을 말한다.
[주12]분관(分館) : 조선 시대에 새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을 성균관(成均館),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의 각관에 분속(分屬)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던 일이다.
약 두어 시간에 걸친 얼치기 답사를 마치고 나서 계곡물에 얼굴을 씻는다.
금쇄동 입구를 굳게 가로지른 차단기를 보며 떠올린 한 생각.
야박함 보다는, 되려 사색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어떨지?
이 시설물을 금쇄(金鎖)의 21세기 버전으로 치환시켜 접수해 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학문은 논외로 치더라도 고산 윤선도를 조선 최고의 원림 경영가로 꼽는데 모두들 주저함이 없다고 들었다.
출중한 조원(造園)능력을 지닌 고산(孤山)이 금쇄석궤(金鎖石櫃) 의 현몽 등을 제시해 가며 예찬한
문학적 속내에는 끝내 접근조차 못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키워지는 부분도 없진 않았다.
다른 원림 들, 예컨데 보길도 원림을 비롯하여 녹우당 일대 등은 한 눈에도 기막힌 절경이다.
그러하기에 이곳 금쇄동을 이상향으로 평가한 고산의 심미안이 더욱 더 궁금함으로 다가올 뿐.
안내판에 적힌대로 정말로 빼어난 것인지의 승경 여부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산세의 골기(骨氣)가 완연히 드러나는 계절에 다시 찾아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소들과 섬세하게 대차대조한 연후 살뜰하게 평가해도 늦지 않으리라.
다가올 늦가을이나 눈 내린 겨울의 금쇄동 재 답사를 예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