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장승업

茶泉 2018. 1. 28. 15:29

취선(醉仙) 장승업

 

 

 


〈호취도(毫鷲圖)〉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135.4×55.4cm, 호암 미술관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참 맛을 보여준다.

나무가지의 뒤틀림에다  매 두 마리를 앉혔을 뿐인데.

오원의 수식어에 등장하는 '천재'라는 타이틀이 괜한 허명이 아님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장승업은 1843년생으로, 정확한 생몰 연도나 출생지, 출신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며, 조선 시대

 중인 및 하층민들의 전기를 모은 장지연의 《일사유사(逸士遺事)》에 실린 기록이 거의 유일하다.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문수산인(文峀山人) 등이다.

오원이란 호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의식하여 “그렇다면 나도 원(園)이다.”라며 지었다고 한다.

 

장승업은 화인으로서 이름을 날렸음에도 부를 쌓거나 안락한 생활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호방한 기질과 자유로운 성정 때문이었다. 그는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여 만취할 때까지 마셨는데,

그림값으로 받은 돈을 모두 술값으로 썼다. 또한 마음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렸을 뿐 세속적 명예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림값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술상을 차려 놓고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면 당장 옷을 벗고 책상다리로 앉아 그림을

그려 주었고, 돈이 떨어지면 화명(畵名)이 무색하게 야주개(종로)의 지전(紙廛)에서 싸구려 그림을 그려 팔기도 했다.

 

장승업의 기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 미술계의 총아가 된 장승업의 이름은 고종의 귀에도 들어갔고,

그는 입궐하여 그림을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고종은 천민인 장승업을 대령화원(待令畵員)으로 불러들이고,

정6품 감찰직에 제수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 궁궐 한쪽을 내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런데 술을 너무 좋아하여 만취 상태로 그림을 못 그리는 일이 허다하다는 소문이 들리자,

고종은 궁녀들에게 술을 주지 않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장승업은 열흘 만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문지기에게 그림 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한밤중에 궁궐을 탈출했다. 다시 잡혀 왔으나

 이후로도 세 번이나 궁을 탈출해 고종의 진노를 샀다. 큰 죄를 받을 지경에 처했으나 민영환이

 장승업과 친하니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가까스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을 단풍을 감상하는 선비>

종이에 담채, 40×211.5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처음부터 오원의 그림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던 듯.

위 그림은 초기 습작으로 장승업 그림의 특징인 섬세함이나 호방함과는 거리가 멀다.

'취선'의 화격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다.

 

장승업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일가친척 집을 전전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머슴살이와 날품팔이 등을 했다고 한다. 몇 살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떠돌던 끝에 서울에 올라온 장승업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이응헌은 역관 출신으로 고서화와 금석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장승업은 글을 몰랐으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다고 한다(글을 몰랐기 때문에

작품의 화제는 다른 사람이 써 주곤 했다). 어느 날 장승업이 그린 그림을 보고 주인인 이응헌이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았고, 이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하면서 화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장승업은 이름난 중국 고서들을 모방하며 홀로 그림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다만 초기의 작풍이 혜산 유숙과 유사한 점이 많고, 이응헌과 유숙의 친분으로 미루어

이응헌의 주선으로 유숙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설도 있다.

 

 

 

 

 

<산수도>

종이에 수묵, 16×21cm, 서강대학교 박물관.

 

어딘지 적막감이 감도는 분위기다. 전체적인 표현을 보면 당시 유행하던 남종 산수화풍을 적용한 듯.이 그림 또한 아직 오원의 그림이라 부를만한 특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승업은 신묘한 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어떤 그림이든 한 번만 보면 모두 기억했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재현해도 털끝 하나 다르지 않게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산수, 영모, 인물, 기명, 절지 등 모든 그림에 능했고, 붓을 들어 한 번에 거침없이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곧 그림을 좋아한다는 이들이 모두 그를 찾았고, 그는 이응헌을 비롯해 당대 고서화를 좋아하던 중인들의 후원을 받았다. 장승업은 이 과정에서 이름난 고서화들을 비롯해 당시 유입된 서양화를 접할 수 있었다.

 

 

 

 

<황학산초가 그린 가을 강의 모습을 본뜬 그림>

1879년, 종이에 수묵, 22×21.4cm, 서울대학교 박물관.

 

'황학산초'는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인 왕몽의 호로, 오원은 특히 그를 좋아했다.

서른일곱 살에 그린 것으로 습작기를 벗어나는 단계로 보인다.

 

 

민영환을 비롯해 한성부 판윤 변원규, 흥선대원군 이하응, 오세창, 오경연 같은 당대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그를 후원했으나 장승업은 이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민영환이 목숨을 구원해 주었음에도 곧

그의 집에서도 탈출하여 저자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렸다. 또한 여자를 좋아해서 미인이

옆에 앉아 술을 따라 주면 최고의 그림이 나왔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속박을 싫어하여 40세가

넘은 나이에 장가를 들었으나 하룻밤 만에 집에서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다.

 

 

 

 

 

 

 

 

<꽃과 동물이 그려진 10폭 병풍>

1879년, 종이에 수묵, 100.5×27cm, 고려대학교 박물관.

꽂과 동물과 함께 특이하게도 인물까지 그려 넣었다.

 

 

 

 

 

 

 

 

 병풍 맨 왼쪽 폭에

 "기묘년 여름 추성관의 남쪽 창 아래서 신라산인을 모방하여 그린다. 장승업."

이라는 글이 써 있어 제작 연도를 알 수 있다.

신라산인이란 중국 청나라 때 양주팔괴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화암(1682~1765)의 호다.

 

 

 

 

나빙이 그린 <인물도> 左  화암이 그린 <매화를 감상하는 산까치> 右


 

양주팔괴(揚州八怪)
18세기 중엽 청나라의 강남, 양주 지방에서 작품 활동을 한 여덟 명의 화가왕사신, 이선, 황신, 김농, 정섭, 나빙, 고봉한, 화암을 일컫는다. 미술사가들에 따라 고봉한과 화암 대신고상, 이방응, 민정, 고기패를 넣는 사람도 있고 빼는 사람도 있다. '괴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이들의 화풍은 개성이 매우 강하고 특이할 뿐만 아니라 혁신적이고 자유 분방하 것으로 유명하다.

 

 

 

 

김농이 그린 <연꽃이 핀 연못 감상하기>

 

 

 

 

 

 

<왕희지가 항정경을 쓰는 모습>

종이에 담채, 75.5×122.3cm,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위 《꽃과 동물이 그려진 10폭 병풍》의 아홉 번째 그림에는 왕희지가 거위를 얻어서 돌아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에 비해 <왕희지가 황정경을 쓰는 모습>은 왕희기가 아직 거위를 얻기 전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장승업의 그림을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이 여항 문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장승업 그림에 왜 왕희지를 비롯하여도연명 같은 이들이 만이 등장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걸판진 술 하 상만 차려주면 장승업은 그 즉시 웃옷을 벗어 젖히고 붓을 휘둘렀다.

장승업이 궁궐을 도망쳐 나온 뒷수습을 했던 민영환. 사람을 풀어 금방 찾아낸 다음 집으로 데려와

술과 음식을 넉넉히 주고 그림을 그리도록 했는데 그리 오래 가지 못했던 듯.

도망가면 잡아오고 또 도망가고... 이런 와중에도 민영환은 변함없이 장승업을 후원 하였다고 한다.

 

장승업을 도와 주었던 많은 후원가들이 여항 문인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재력과 서화에 대한

애호 정도가 얼마나 크고 너른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여항 문인이란 사대부도 평민도 아닌 중간 계층, 즉 역관, 의원 등의 기술직 중인과

 이서, 향리, 서얼 등 비 양반 계층의 지식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송석원시사, 옥계시사, 일섭원시사, 벽오사, 직하시사, 육교시사 등의 모임을 만들어

 사대부 문인들의 전유물이었던 문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항지사', '위항전문 지사', '독서지사', '당세지사', '소유' 등으로 자처하며 기록과 문집을 남긴다.

 

 

 

 

 

 

 <매화 핀 집에서 독서하는 사람>우봉 조희룡, 종이에 담채, 106.1×45.1cm, 간송미술관.
추사의 제자이자 중인 신분이었던 우봉(1789~1866)은《호산외기壺山外記》라는 여항 문인 화가들의 열전을 정리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

 

 

 

 

민영익이 그린 <난> 종이에 수묵, 128.5×58.4cm, 호암미술관
이하응이 그린 <난> 종이에 수묵, 119×61.5cm,

'을사보호조약'이후 상해로 망명했던 민영익은 장승업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해파 화가들과잦은 교류를 하게 된다. 또한 그 자신도 그림 재능이 뛰어났던지라, 조선인 상해파 화가가 되기도 했다.물론 상하이 지역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스님>과 <잉어>

1890년, 비단에 담채, 149×48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스님> 세부도.
스님의 발 앞으로 수초 속에 숨어 있던 잉어가 나타나고이에 깜짝 놀란 피라미 떼가 바위틈으로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다.잉어는 효(孝)와 관련이 있고 과거 급제 염원과 출세와도 관련이 깊다.

 

 

 

 

 

<민화 책거리>


많은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여 잉어가 용이 되듯, 등용문 통과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고양이>  <용을 희롱하는 두 동자승>右1890년, 비단에 채색, 149×48cm, 서울대학교 박물관.
2폭 병풍 오른쪽 밑에 "인인 춘일 오원 장승업."이라 적혀 있다. 한 폭에는 인물을, 다른 폭에는 동물을 그리고 있는 구도도 같다. 다만 잉어 대신 고양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여의주를 들고 용을 희롱하는 두 동자승의 모습이 재치있게 그려졌고,풀밭에 앉아 날아가는 벌을 보고 있는 고양이 그림에는 위쪽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괴석이 있다.

 

 

 

 

 

 

 

 

 

<창덕궁 낙선재 괴석>

 

 

 

 

 

<괴석과 모란> 左 작자미상, 조선, 종이에 채책, 124.5×54.5cm, 호암미술관.<괴석과 대나무> 右 정학교, 종이에 수묵, 159.5×80cm,  개인 소장.

 

 

 

 

 

 

 

 

 

 

 

 

 

 

<한일통상조약기념연회>

안중식, 1883년, 비단에 채색, 53.9×35.5cm, 승전대학교 박물관.
 장승업의 제자라 부를 수 있는 안중식이 그린 것으로 식탁 위에 차려진 나이프와 포크를 비롯하여서양 상차림 그릇들로 채워져 있다. 서양 문물이 꽤 많이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미산리 계곡>1891년 이전, 비단에 담채, 126.5×63cm, 간송미술관.
이 그림의 무대 미산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산이다장승업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매>등을 그렸던 호방한 필치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부드러운 필치로 그려졌다.조선시대를 통틀어 '기량 제일의 화가'라 일컫는 게 결코 무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세 사람이 시간을 묻고 있는 모습> 左          <세 사람이 시간을 묻고 있는 모습> 右

비단에 채색, 143×69cm, 국립중앙박물관.                  비단에 채색, 143×69cm, 간송미술관

 

신선 셋이 모였다. 한 신선이 말하길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변할 때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놓아 두었는데그 나뭇가지가 열 개가 되었다.'라며 나이 자랑을 하는 모습으로 고사성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원류다.영지와 천도복숭아, 사슴 등 십장생의 상징물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그려진 세 신선은 장승업의 그림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인물 표현법이다.

꼼꼼한 보색 대비에 의한 화려한 색채 묘사를 사용,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을 본다.

국립중앙박물관 것이 간송미술관 것에 비해 지나치게 섬세하고 꼼꼼하다.

호방한 성격에 자연스러운 필치가 특징인 오원이 과연 이런 그림을 그렸을지를 의심하기도 한다.  

 

 

 

 

 

 

 

<십장생도 8폭 병풍>

비단에 채색, 99×259cm, 호암미술관.

 

 

 

 

<추남극노인>右  <춘남극노인> 左

64.1×134.7cm, 간송미술관.
그림 오른쪽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대령 화원 신 장승업 진상"이라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고종에게 그림을 그려 바친 어용 화원임을 알 수 있다. 남극성의 화신으로 여겼던 노인 그림을

'수성도'라 하는데 통상 장수 축원의 목적으로 그려진다.


<춘남극노인>에서는 소나무 위에 걸터앉은 남극노인과 그에게 천도복숭아를 바치는 동자가 그려져 있다.천도복숭아는 한 개를 먹으면 삼천년을 살 수 있다고 하니, 남극노인과 어울리는 소재일 수 밖에.

 

 

 

 

 

 

 

김홍도가 그린 <청오자> 右,  김명국이 그린 <수노인>左

 

장승업은 시대적인 요청 탓인지 신선도를 많이 그렸다. 그가 그린 신선도를 잘 살펴보면 김명국과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꿩과 메추라기> 右

종이에 담채, 135.4×55.4cm, 호암미술관

<매> 右

종이에 담채, 135.4×55.4cm, 호암미술관.

 

 

 

 

 

 

<말> 右

종이에 담채, 137.7×55cm, 일본 유현재<고양이> 左종이에 담채, 136×52.8cm,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매 그림은 연도가 표지되어 있지 않지만 장승업의 필력이 무르익을대로 익은 시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매가 나무 줄기에 앉아 있는 구도라든가, 매의 표정과 능숙한 필치로 매의 특징을 잡아 낸 화면 구성은

유숙(1827~1873)의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같은 형식으로 그려진 <꿩과 메추라기> 역시 훌륭한 작품이다. 나무와 꿩에 표현된 거친 필치와 수선화가

함초롬히 피어 있는 바위 밑 공간이 대조되면서 긴장감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이다.

 

 

 

 

 

 

오원의 제자였던 조석진과 안중식을 절망감으로 몰아간 스승의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유숙이 그린 <매> 右 비단에 담채, 87.4×20.7cm, 국립중앙박물관.

 

매는 새 중에서도 영웅적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한 화면에 두 마리를 함께 그리지 않는다.

유숙이 그린 것이 그 예인데, 오원은 한 화면에 위 아래로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그것도 완벽한 구도와 함께 말이다. 오원의 자신감이  잃혀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매는 죽은 고기는 먹지 않고, 새끼 밴 동물은 잡지 않는다고 한다.'지킬 것은 지키는' 매의 모습에서, 죽은 먹이를 먹는 독수리 보다 훨씬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색되어 왔다.민간에서는 마마를 치료하는 부적으로 여겼고, 특히 물,  불, 바람 삼재를 막아준다고 여겨설 날 문설주에 매 그림을 붙이곤 했을 정도다.

 

 

 

 

<꽂과 동물이 어우러진 10폭 병풍>

비단에 담채, 각 148.5×35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장승업의 병풍 그림 중에서 가장 뛰어난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각 폭마다 오원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있는 것이 특징이다.

 

 

 

 

 

 

 

 

 

 

 

 

 

<꽂과 동물이 어우러진 10폭 병풍> 중에서 제3폭, 제 6~10폭

 

 

 

 

 

 

 

 

 

<꽂과 동물이 어우러진 10폭 병풍> 중에서 제4폭과 제5폭

 


 

 

 

 《꽃과 동물이 있는 10폭 병풍》중 제2폭

안중식, 1901년, 비단에 담채, 각폭 131×34.5cm, 개인 소장

 

안중식이 마흔한 살 때 그린 이 작품에는 스승이었던 장승업의 흔적이 역력하게 베어 있다.

 

 

 

 

 

 

 

<명마를 기르는 행복>과 세부도

종이에 담채, 124×33.6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세찬 바람에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꺾인, 장승업 특유의 독특한 나무 표현법을 볼 수 있다.

인물과 색채 배합이 뛰어난 이 작품이다.

 

 

 

 

 


변상벽이 그린 <암탉과 병아리> 左  비단에 담채, 94.4×44.3cm, 국립중앙박물관.장승업이 그린 <대나무와 닭> 右 비단에 채색, 74.9×31cm, 간송미술관.
닭은 원래 벽사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변상벽의 닭 그림은 유명하다. 그의 그림에서 어미닭과 병아리 들이 어울리는 평화로움이 있다면,장승업의 그림은 화사한 장닭을 묘사하고 있다. 장승업의 개성과 필력이 어김없이 발휘되어 있다.다른 작가들이 주로 암탉과 병아리가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정경을 그렸다면 장승업은 장닭 이외에는아예 관심조차 없다. 이것은 장승업의 그림에 여인의 모습이 전혀 없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그의 호방하고 담대하 필치는 상해파 화풍을 단순 추종하는 단계가 아니라 완전 자기 화풍으로 소화 했음을 볼 수 있다. 즉 구도와 소재는 상해파를 취했으되, 그 안에 조선의 닭과 풀을 배치하여 외래 화풍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녹여냈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장웅이 그린 <닭> , 1840년 둥근 부채 비단에 설채, 지름 24.2cm, 개인 소장.

 

 

상해파

1840년, 아편 전쟁으로 상해가 개항되고 중국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자

많은 상인과 화가들이 난을 피해 상해로 몰려든다.그 결과, 상하이는 상업 도시로 급속도로 성장하고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다.활기찬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로운 감각의 그림을 요구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전통 보다는 분주한 시대에 어울리는 감각적이고 대중적인 작품이 제작되는데  그 시기 (1840년대~1920년대)까지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 경향을 상해파라 이른다.

 

 

 

 

 

 

장웅이 그린<닭>, 1876년, 둥근 부채 비단에 설채, 지름 29cm, 개인 소장.

 

장승업의 그림과 장웅의 그림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중국에 망명한 민영익이 상해파 화가가 되었다.

상해파의 형성기인 1840년대에서 1860년대까지 활동했던 장웅, 임웅, 주옹을 일컬어 이른바 상해삼옹이라 칭한다.

 

 

 

 

 

<대나무와 닭>, <꽃과 새 2>, <원앙과 연꽃>, <파초와 사슴>

비단에 채색, 74.9×31cm, 간송미술관.

 

 

 

 

<꽃과 새>, 확대도

 

 

 

 

<꽃과 새 1>

다른 병풍과는 달리 이 그림들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다.

사슴도 두 마리, 원앙도 두 마리, 심지어 연꽃을 찾아 날아드는 잠자기까지 두 마리다.

이 작품에서는 다른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거친 붓놀림을 찾아볼 수 없다.

장승업의 그림에서는 대나무가 무척 귀하다. 대나무를 그린다 해도 호면을 장식하는 배경의

한 부분 정도로 등장할 뿐이다. 장승업은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장승업이 사군자를 전혀 그리지 않을 것은 아니다.

 

 

 

 

<홍백매 10폭 병풍>

종이에 담채, 90×433.5cm, 호암미술관.

 

이 그림은 장승업이 사군자만을 단독으로 그린 유일한 그림이다.마치 카메라 레즈로 클로즈업시킨 것처럼 노매의 둥치 부분만을 확대해서 그린 것이다.앞 뒤로 두 그르 매화가 교차되어 있는데 앞쪽이 홍매이고 뒤쪽 매화는 흐릿하게 처리되었다.농묵과 담묵이 뒤섞인 고매의 진한 향이 배어 나온다.
'일만 권의 책을 읽어야만 진정ㅇ로 청아하고 고아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던 추사의 가르침은장승업에게 더 이상 그 의미가 없음을 본다. 지식인의 전유물로 여겼던 문인 취향의 붓질이장승업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홍백매 10폭 병풍>중 제5폭~제10폭 세부도.

 

여항 문인이었던 조희룡(1789~1866)의 글을 읽어 보면 그 달라진 세상을 알 수 있다.
시는 손재주에 속한다. 때문에 그 재능이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라도 평생을 배워도 할 수 없다.시는 손가락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사군자는 서권기 문자향의 기운이 가득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기르 거부하는 것이다.지식과 인격이 아무리 충만해도 손재주가 없으면 그림은 어렵다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렇다고 손재주가 그 무엇에 우선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가슴 속에 감춰진 큰 기운을 제대로표현키 위해서는 손재주가 필요하다는 소박한 의미로 해석해야 할 터.
이런 점에서는 조희룡과 장승업의 그림을 접근하는 자세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자신의 거처에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을 달고 침실엔 매화 병풍을 둘렀으며, 매화차를 마시고 매화 벼루에매화 먹을 갈아 매화 시를 썼을 정도라니 그의 매화 사랑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또한 백매 일색이던 매화도에 처음으로 홍매를 등장시킨이도 우봉이라는 사실.
우봉의 매화를 더욱 화려하게 이어간 이가 유숙이다.유숙의 매화도를 보면 장승업이 그의 화법에 얼마나 깊이 매료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월매도> 左

어몽룡, 비단에 수묵, 119.2×23cm, 국립중앙박물관.

<매죽도> 右

최북, 종이에 담, 101.4×59.2cm, 호암미술관.

 

최초로 홍매를 등장시킨 우봉 조희룡은 중인 출신으로 남종 문인화이 대가 추사의 제자이다.

조희룡 이전에는 거의 수묵으로 매화를 그려 매화 본래의 상징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나 우봉은 매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펼쳐내는 형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홍매대련>

조희룡, 종이에 담채, 각 127×30.2cm, 개인 소장.

 

매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은유가 아닌 직접 화법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작품으로

만개한 홍매의 아름다움에 온 천지가 매향으로 가득찬 듯.

 

 

 

 

 

 

<홍백매 8폭 병풍>

유숙, 종이에 담채, 112×387cm, 호암미술관.

 

유숙의 매화는 늙고 굵은 매화의 위 아래가 생략된 채 가운데 나무 둥치와 가지가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홍백매 10폭 병풍>

허련, 1888년경, 종이에 담채, 100.5×398cm, 개인 소장.

 

유숙의 매화를 모본으로 삼은 허련의 매화는 장승업의 매화와 매우 유사하면서도 훨씬 차분한 느낌을 준다.

 

 

 

 

 

 

<오동나무를 닦고 있는 모습>

비단에 담채, 141.5×40cm, 호암미술관.

 

원 말 사대가 중 한 사람인 예찬의 결벽증 일화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책을 들고 있는 예찬은 아끼던 오동나무에 침이 묻은 것이 무척이나 불쾌한 표정이다.

이 그림에서 예찬의 손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색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허나 나름의 계산 끝에 저리 그려졌다는 사실. 예찬이 비록 신선은 아니었지만 신선급의 인물이었기에

부러 저리 그린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신선이나 신선처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은 예외 없이

기괴한 손 모습으로 그려놓았음을 볼 수 있다.

이 고사는 예찬을 추종하는 여러 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하는데 장승업 또한 같은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지나칠 정도로 가는 선묘로 나무 몸체를 세심하게 살려 내고 있다.

나무 둥치에서 보이는 과장된 표현은 예찬이 앉아 있는 곳에 배치된 바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은 중국 상해파 화가 마도가 만든 판화  《시중화(詩中畵)》에서 그 기본 구도를 찾을 수 있다.

 

 

 

 

 

 

 

 

 

 

 

 

 

맨 앞 밤색 옷의 인물 오른쪽 어깨 위에 매가 앉아 있다. 매 사냥을 떠나려는 듯.

비록 네 명의 인물들이 중국식 관모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인물 표현에서는 전혀 어색함이 없다.

말의 다양한 자세화 담채의 적절한 배합은 장승업이 동물화에도 특출한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기명절지도

 

<기명절지도>

장승업은 모든 그림에 능했으나 특히 동물과 새, 기명절지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의하면, '날랜 운필로 번개같이 그리되, 묵색이 빛나고 채색이 은근하며

화면에 신운이 떠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수선화와 그릇>

비단에 담채, 110.9×46cm, 국립중앙박물관.

 

맨 위에 청동 그릇 정을 배치하고 반원형으로 연적과 수선화, 난초를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쏘가리와 그릇>

1892년에 그린 기명절지도이다.

1892년 초여름에 장승업이 그리고, 김영이 보았다고 기록된 이 작품의 우측엔

'우당대인 감정'이라고 적혀 있다. 채색을 전혀 쓰지 않고, 진하고 옅은 먹빛 만으로 담백하면서도

운치 있는 분위기르 자아 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장승업의 먹 다루는 수준이 어떤 경지인 것인지 잘 보여 준다.

그림 왼편에는 춘방 김영(1837~?)의 글이 실려 있다.

 

노란 국화를 꺾어 항아리에 꽂아 놓으니

그야말로 술꾼이 제철을 맞은 가을이구나.

귤이 노랗게 익고, 무도 통통한데, 낚시꾼도 큰 고기를 낚아 왔으니

두서너 친구와 함께 마음껏 놀면서 세상 사는 시름을 잠시 잊을까 한다.

 

 

 

 

 

<포의풍류>

김홍도, 종이에 담채, 27.9×37cm, 개인 소장.

 

그릇에 꽃을 꽂고 책이나 길상물을 함께 그린 이 작품에서

당시 선비들이 그리던 운치와 풍류 등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고대 청동기나 도자기 같은 그릇과, 젝와 서책같은 길한 물건이 함께 그려지는 기명절지도는

신선사상과 결합이 되면서 호리병, 보검, 산호 같은 다양한 소재들이 첨가되기도 하다.

중국 송대 이후 금석학에 대한 관심과 골동 취미가 유행하면서 많이 그려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이후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기명절지> 右

안중식, 1914년 비단에 채색, 각폭 141.3×33.6cm,

 

안중식은 장승업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참시하고 신선한 색채, 사실적인 표현,

감각적이면서도 위엄있는 격조 등 기명절지도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형식을 보여 준다.

 

<민화 책거리> 左

19세기 이후부터 길상적 의미를 지닌 그릇, 서책, 화초 등을 다양하게 그려 넣은 민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민화는 화려한 색채 사용과 과장스러운 물건 표현이 특징이다.

 

 

 

 

 

 

<백물도권>

비단에 담채, 38.8×233cm, 국립중앙박물관.

 

백가지 물건이 그려졌다는 뜻을 가진 이 장승업의 그림은 2미터가 넘는 긴 두루마리에

갖가지 물건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그릇, 주전자, 화분, 벼루 같은 그릇류와 조개, 게 같은 어패류에다

우리나라 특산물인 인삼이 들어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이다.

 

 

 

 

 

<채소와 물고기가 있는 10폭 병풍>

종이에 담채, 130.5×30cm, 개인 소장.

 

그림의 중심이 되는 그릇을 뒤에 배치하고 그 앞에는 수선화, 고기, 복숭아, 밤 같은 여러 가지 정물들을

흩뜨려 놓는 형식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기에 그릇의 위치를 각 폭마다 다르게

배열하기도 하고 어떤 폭은 반원형으로, 또 어떤 폭은 수평으로 배치하여 변화를 주었다.

 

 

 

 

 

제4폭과 제6폭에서처럼 탁자나 그릇의 절반만 보이게 그리는 화법은 장승업이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그릇과 여러 가지 기물들을 표현하면서 입체적인 음영법을 쓰거나 맑고 산뜻한 색채를 구사하는 등

장승업은 기명절지도에서 그의 양식을 완전히 형성하게 된다.

이후 다른 작가들이 그린 기명절지도는 장승업이 만들어 놓은 틀에 자신들의 색채를 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만큼 그가 이 분야에서 얼마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물을 감싸고 있는 날카로운 바위 표현은 장승업의 나이 쉰 살을 전후해서 발견되는 특징적 표현이다.

물론 이런 표현은 사십대 초반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이렇게 심하게 각진 바위와 능란한 표현법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사십대 후반 이후에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다.

 

 

 

 

 

 

<웅시팔황도>와 세부도>

비단에 담채, 141.5×40.5cm, 개인 소장.

 

부벽준을 써서 표현한 바위는 얼음 조각을 깎아 놓은 듯 위태로우면서도 견고해 보인다.

채색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매의 눈과 부리, 발톱과 날개 등에 찍힌 검은색이 아주 강렬하다.

화면 왼편으로 장승업의 그림에 많은 제시를 남겼던 안중식의 글과 도장이 보인다.


 

 

 

 

 

 

 

<암탉과 수탉> 左

1896년, 종이에 채색, 141.8×36.9cm, 개인 소장.

<괴석 위에 선 닭> 右

1896년, 종이에 담채, 140×43.5cm, 개인 소장.

 

장승업의 그림 중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두 점의 닭 그림이다.

그가 죽기 일 년 전인 1896년, 그의 나이 쉰네 살 때 그린 것으로 괴석 아래 닭이 모이를 쪼아먹고 있다.

수탉과 달리 암탉의 시선은 모이에서 떠나 있다. 산뜻한 표현과 감각저긴 색채 사용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괴석 위에 선 닭> 그림은 닭과 바위와 나무가 한 가지 색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장승업은 색깔 있는 대로 아름답고, 자연과 동화된 것 또한 그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의 그림을 생애의 끄트머리에서 까지 자유자재로 그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뭇가지 위의 매> 左

비단에 담채, 120×28cm, 선문대학교 박물관.

<괴석 위에 선 매> 右

비단에 채색, 각 145×26.7cm, 선문대학교 박물관.

 

그림도 작가에 따라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

그 예가 바로 <나뭇가지 위의 매>와 <괴석 위에 선 매>이다.

나뭇가지 위에 노쇠한 매가 한 마리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매가 늙은 탓인지 털이 많이 빠졌다.

다만 형형한 눈빛과 유난스레 큰 발고 발톱만이 젊은 때를 상기시켜 줄 뿐이다.

장승업은 이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수묵만을 쓰는데, 그것은 어쩌면 자신에게 당도하 겨울을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정홍래가 그린 <해가 떠오를 때의 매의 모습>

궁중의 세화로 제작되었을 이 작품은 청색과 갈색, 붉은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구중 장식화이다.



 

 

 

 

 

<산수 인물과 동물을 그린 8폭 병풍>

비단에 채색, 130×32cm, 개인 소장.

 

장승업 말년에 그려진 것으로 오원 특유의 강한 에너지지와 격정은 사라지고 쇠잔한 노인의 고요함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열정을 불태우던 질퍽한 욕망이 마치 물기 빠지듯 사라지고 뼈다귀만 남은 그림.

이 작품에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담담한 관조가 깃들어 있다.

 

 

 

 

 

 

 

 

장승업은 타고난 기질처럼 특정한 유파나 기법,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렸다.

때로는 선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백묘법을, 때로는 정묘한 공필 채색화법을, 때로는 호방한 필묵의 감필법(減筆法)을,

때로는 먹의 농담을 극대화한 파묵법(破墨法)을 사용했다. 일생 수없이 그림을 그려서인지 전하는 그림도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 500여 점, 북한의 조선미술박물관에 1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이 남아 있다.

 

사후에는 제자인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에 의해 그 화법이 전해져 근현대 한국 동양화의 발판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두 사람은 1911년 왕실의 후원으로 설립된 서화미술원과 1919년 민족미술가들이 설립한 서화협회를

통해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이곳에서 배출된 조선의 마지막 궁중화가 이당 김은호, 근대 초의 동양화가인

정재 오일영과 묵로 이용우 등 수많은 화가들이 장승업의 영향을 받았다.

 

 

장승업은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사람의 생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오,

그러니 어디 경치 놓은 곳을 찾아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지

요란스럽게 앓다 죽는다, 혹은 장사를 지낸다, 번거롭게 할 필요가 무에 있겠소?"

 

장승업의 친구로 청일전쟁 때 종군기자를 지냈던 한 일본인 기자는 장승업의 죽음을 두고

"신선이 되어 갔다."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시대를 붓 한 자루로 풍미한 장승업은 홀연히 세상을 떠나갔던 것.

 

 

 

 

참고도서 : 『신선이 되고 싶었던 장승업』.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