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산수화에 깃든 정신사1

茶泉 2018. 1. 7. 17:59


산수화(山水畵)에 깃든 정신사(精神史)

(1편)

 

 

 

 

 

<유춘도(遊春圖)>

전(傳) 전자건, 중국 수대의 것을 송대에 모사, 비단에 채색, 43×80.5cm, 북경 고궁박물원.

 

위진남북조를 통합한  통일국가 수나라(581~617)의 전자건(展子虔)의 그림으로

비록 모사한 것이지만 전자건의 산수화 양식이 틀림 없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고.

발해 출신으로 산수, 인물, 도석에 모두 뛰어났으며, 산수의 원근과 의치(倚置)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 채색산수화와 수묵산수화 -

 

 

 

 

<명황행촉도(明皇幸蜀圖)>

전(傳) 이소도, 중국 당대의 그림을 송대에 모사 , 비단 채색, 56.9×81cm, 대북 고궁박물원

 

당나라 현종이 촉으로 행차하는 모습으로, 

이른바 '채색산수화'에서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로 발전한 작품.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고려, 1310년경, 비단에 채색, 419.5×254.2cm, 일본 카가미진자(경신사)

 

 

 


<오백나한도> 중 제23 천성존자

 고려13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59.7x41.5cm, 일본도쿄국립박물관.

 

 '수월관음도'는 채색이고 '오백나한도'는 수묵임을 볼 때, 고려 때에는 양 쪽 모두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이후로 점차 수묵이 대세를 이루 게 된다. '먹이 오채를 띈다'는 믿음이 갈수록 확고해짐을 본다.

필묵의 변화무쌍한 기법을 자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자하 신위(申緯)도 높은 인격과 기운이 담긴 그림으로는 채색화 보다는 수묵화가 적합하다고 하였다.

수묵은 정신성을 담보하는 기법으로 널리 통용 되었던 것으로, 인물이나 화조화 혹은 각종 행사 관련

그림 보다는 유난히 산수화에 많이 운용되고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수관(山水觀)은 이른바 정신사(精神史)와 맥을 같이 할 것이며,

이는 곧 관념사관(觀念史觀)으로 이어지게 될 터이기에...

 

 

 

 

 

- 산수화 내용의 이해 -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범관(范寬), 북송 11세기, 비단에 수묵 담채, 155×74.5cm,  대북 고궁박물관.

 

'영웅적 산수', '기념비적 산수'라 불리우는 매우 커다란 화폭에

우람하고 거대한 풍경을 펼쳐놓은 그림으로 이에 압도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산셩춘행도(山徑春行圖)>

ㅁ마원, 남송, 12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27.4×43.1cm, 대북 고궁박물원.

 

남송대에 이르면 산수화의 분위기가 감상적, 시적으로 옮겨 간다.

우아한 차림새의 문인이 아득한 산수를 여유롭게 감상하는 서정성이 듬뿍 배인 내용이다.

 

 

 

 

 

 

<운산도(雲山圖)>미우인, 남송, 12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43.4×194.3cm, 미국 클리블랜드 아트 뮤지엄.
앞의 화가들 모두는 중국 황실에서 종사한 이른바 화원화가(畵院畵家)들이었다.허나 같은 시기 송대의 문인(文人)들은 직접 그림을 그리고 회화이론을 정비하면서 새로운 장을 열어나간다.그림쟁이[畵工]보다 이른바 문인화가(文人畵家)의 산수화가 더 인정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미우인의 점을 찍듯 그려나가는 '미점산수'는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황제문도도(皇帝聞道圖)>대진, 명대, 15세기, 비단에 수묵, 대북 고궁박물원.
명나라의 대표 산수화풍은 '경험'과 '이상'의 구분이랄 수있다.절강성(浙江省)을 근거지로 한 절파(浙派)는 화원 출신의 직업화가들이고, 다른 하나는 강남의 소주 지역[옛 이름 오현(吳縣)]에서 활동한 오파(吳派)로 모두가 학식을 겸비한 문인화가들이었다.절파산수는 어부나 은둔자, 전설적 인물이 주로 등장하는 반면, 오파산수는 화가 자신의 문화공간을 그리는 경험산수가 많았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절파 산수의 예인 <황제문도도>를 보면,  먹의 농담 대비가 강하고 거친 붓질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야좌도(夜坐圖)>심주, 명대, 1492년, 종이에 수묵담채, 84.8×21.8cm, 대북 고궁박물원
오파(吳派)의 종주인 심주(沈周) 자신을 그린 것으로, 상단에 자신의 성찰 내용을 길게 적어놓았다.문인의 자부심과 자기표현이 경험산수를 본격적으로 화풍에 담아 낸 것이다.
우리나라 산수화의 주제와 화풍 등을 이해하려면,  절파, 오파로 대변되는 이들 중국 화풍의 유입과 변화를 살피고 이해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조선 초, 중기 우리나라 화원과 문인들 대부분이 중국 절파(浙派)의 화풍을 응용하였다면,조선 후기 진경산수는 근원적으로 오파(吳派)에서 시도된 경험적 주제가 활용되었기 때문.
원대 말 사대가로부터 명대 오파로 전잘된 문인 산수화를 청대 산수화의 중심부로 연결시켜주는 데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명대 말 동기창(董其昌)의 "남북종론(南北宗論)'이었다.
중국 역대 산수화를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으로 길게 가르고 평가한 이론으로써 '문인화', '원말사대가', '절파' 등의 용어 모두가 다 동기창의 글에서 시작 되었다는 사실.


 

 

<광릉도(廣陵圖)><양강명승도책>에 수록.

심주, 명대, 15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42.2×23.8cm, 상해박물관.

 

남북종론은 판화(版畵)의 발달과 함께 중국, 한국, 일본에서 남종화 학습이라는 대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흥기되고 정착된 산수화 양식을 '남종문인화풍'이라 부르는 것이다.

  '피마준(披麻皴)' '미점(米點) 으로 대표되는 특정 필묵법 등 문인화풍에 많은 힘을 쏟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우리 회화의 배경을 이루었다.

 

 

 

 

 

 

 

<개성시가(開城市價)>

표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중에서.

 

 

 

 

- 여말선초의 산수화 -

 

 

 

 

 

 

<산수도>

전(傳) 최숙창, 조선, 15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39.8×60.1cm, 일본 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

 

 

 

 

 

<산수도>

전(傳) 이장손(위), 전(傳) 서문보(아래) 조선, 15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39.8×60.1cm,  일본大和文華館

 

<청산백운도>라는 제목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조서 초기 회화 작품은 없다.하지만 일본에 전하는 우리 회화 중 <산수화>라는 제목의 여러 점 회화가 청산백운을 그린 조선의 그림으로 판단된다.이 산수도들은 모두 흰 구름과 푸른 산, 그리고 구름 속에 그려진 먼 사찰과 수목 등을 표현하고 있다.수묵을 위주로 하면서 담록(淡綠)을 베풀어 청산을 표현하였으며, 자욱한 구름은 비법(米法)의 먹점을 사용하여 자연스런 효과를 얻었다.

 

 

 

 

<청산백운도>전(傳) 고극공, 원대, 13세기, 48.9×107.2cm, 비단에 수묵담채, 대부 고궁박물원.
중국의 원(元)대에 '운산(雲山)' 혹은 '청산백운'이라는 제목의 산수화가 많이 그려졌다는 사실은 우리 <청산백운도>의 연원을 시사한다. 고극공은 미점(米點)을 능숙하게 활용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조선 초기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에 원대의 <청산백운도> 1점이 소장되어 있었으며,안평대군과 안견이 매우친밀하게 지냈던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이러한 원대풍의 '청산백운도'와 여말선초 '청산백운도'와의 연관성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운횡수령도(雲橫秀嶺圖)>고극공, 원대, 13세기, 비단에 채색, 182.3×106.7cm, 대북 고궁박물관.
세종, 성종, 연간에 청산백운의 산수화 문화는 정점에 이른다.이상사회로 향하는 문사들의 역동적, 긍정적 에너지와 이상의 순간을 현현(顯現)하는 낭만적 산수경의 교묘한 조응이었을까.

 

 

 

초춘, 만춘, 초하, 만하《사시팔경》화첩에 수록, 전(傳) 안견, 조선, 15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35.2×28.5cm, 국립중앙박물관.

 

 

초추, 만추, 초동, 만동

《사시팔경》화첩에 수록, 전(傳) 안견, 조선, 15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35.2×28.5cm, 국립중앙박물관.

 

 

 

 

<풍우장면>

《사시팔경》화첩에 수록, <만하>(부분)

 

여말선초 시기 '사시도'는 높은 인기를 누리면서, 대개 '사시팔경(四時八景)으로 그려졌다.

사계를 다시 둘씩 나누어 팔경으로 만든 것이다.

각각을 차이 나게 그리려면 정치(精緻)한 수준의 수묵 표현이 요구 되었다.

8면의 화첩이나 8폭 병풍에 순서대로 그려지기도 했고, 혹은 여덟 장면 중 한 장면이 단독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조선 초기 문인들이 사시류 산수화에 부친 제화시들을 살피면, 늦여름의 풍경에 해당하는 '풍우(風雨)'와

늦겨울에 해당하는 '풍설(風雪)' 및 '설경(雪景)'의 그림에 부친 시가 비교적 많다. 비바람이나 눈보라,

혹은 눈 쌓인 풍경을 156세기 조선의 문인들이 각별히 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이상좌, 조선, 15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90×82.2cm, 국립중앙박물관.
생몰년 미상으로 자는 공우(公祐), 호는 학포(鶴圃). 중종의 어진을 그린 화가이다.구도와 소나무, 인물, 원산 표현등이 모두 남송대 화풍을 반영한 것으로 조선 초기 문인들의 정서에 잘 부합되는 산수 주제이자 이미지였다.

 

 

 

 

<한산적설도>오위, 명대, 15세기, 비단에 수묵, 242.6×156.4cm, 대북 고궁박물원.
대지와 산야가 하얗게 뒤덮인 설경 앞에서의 아뜩함이다. 몰아치는 비바람만큼이나 긴장감이 감돈다. 풍우로 늦여름을 대표하였듯 설경으로 늦겨울을 대표하였던 것은 계절 감각의 극단적 표현이었으며, 동시에 관념적 계절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계절의 특징적 정취를 담아내는 사시산수도는 고려 말에서 부터급증하여 조선 초로 이어졌다. 풍우나 설경 등 극화된 순간으로 한 계절을 일관시킨 점에서, 청산백운을 영원의 자연경으로 감상했던 태도와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조춘도(早春圖)>곽희, 중국 북송, 1072년, 비단에 수묵담채, 158.3×108.1cm, 대북 고궁박물관.
아랜은 작가의 저서 『임천고치(林泉高致)』중 일부이다.
실제로 산수의 안개와 저녁나절 푸르스름한 기운이 네 계절 모두 같지 않다.봄 산은 조용하고 요염하게 웃는 듯하고, 여름 산은 무르녹게 푸르러서 흠씬 젖은 듯하고,가을 산은 맑고 깨끗하여 단장한 듯하고, 겨울 산은 어두침침하여 잠자는 듯하다....산은 하나지마 수십 수백의 정취를 겸하고 있으니, 깊이 관찰하지 않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소상팔경도 8폭 병풍瀟湘八景圖 瀟湘八景圖

 

산시청람山市晴嵐

맑게 개인 산 어스름, 산시가 열리다

 

 

 

연사모종 煙寺暮鐘

안개 속 절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

 

 

 

 

어촌석조 漁村夕照

어촌의 저녁과 노을

 

 

 

원포귀범 遠浦歸帆

먼 나루로 돌아 오는 배

 

 

 

 

소상야우 瀟湘夜雨

동정호에 뿌리는 밤비

 

 

 

 

평사낙안平沙落雁

넓은 모래펄 내려앉는 기러기

 

 

 

동정추월 洞庭秋月

동정호 가을 달

 

 

 

 

강촌모설 江村暮雪

눈 내린 강마을의 저녁

 

 

 

 

소수와 상수는 중국 후난성 동정호(洞庭湖)의 남쪽 영릉(零陵) 부근으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그린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북송(北宋)의 이성(李成)에 의해 처음으로「소상팔경도」가 그려졌고,

송적(宋迪)도 이른 시기에 ‘소상팔경’을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려졌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줄곧 유행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민화(民畵)에서도 종종 그려졌다. 이처럼 수백 년에 걸쳐 끊임없이 그려졌으며, 사대부 계층은 물론

서민 대중들 사이에서까지 유행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나 미술이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전해지고 어떠한 변모를

겪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소상팔경도」는 이미 고려시대 명종 연간(1171∼1197년)에 그려졌다. 명종은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을 소재로 글을 짓게 하고,

 이녕(李寧)의 아들 이광필(李光弼)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 이제현(李齊賢) 등 여러 문인들이 소상팔경시를 남기고 있어 당시 인기있는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 소상팔경도는 더욱 크게 유행하였다. 세종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화가를 시켜「소상팔경도」를

그리게 한 바 있고, 16세기에는 안견파(安堅派) 화가들이 빈번하게 그렸다. 조선 중기에는 이징(李澄), 김명국(金明國) 등이,

 후기에는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최북(崔北), 김득신(金得臣), 이재관(李在寬) 등이 작품을 남겼다.

 이 밖에 민화로 전하는 작품도 적지 않아 유행의 폭이 넓었음이 확인된다.

 

 

「소상팔경도」의 여덟 장면은 대체로 화첩과 병풍에 그리는데, 그 순서는 일정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개 ① 산시청람(山市晴嵐), ② 연사모종(煙寺暮鐘) 또는 원사만종(遠寺晩鐘), ③ 원포귀범(遠浦歸帆),

 ④ 어촌석조(漁村夕照 또는 漁村落照), ⑤ 소상야우(瀟湘夜雨), ⑥ 동정추월(洞庭秋月), ⑦ 평사낙안(平沙落雁),

⑧ 강천모설(江天暮雪) 등으로 구성되었다.

 

계절로 보면 봄·가을·겨울 장면이 주로 그려지고,

하루 중 아침이나 낮보다는 저녁이나 밤이 주로 표현되었다.

이는 시적(詩的)인 분위기와 운치를 중요시했던 때문으로 믿어진다.

이처럼 「소상팔경도」는 순수한 감상화의 대표적인 주제라 할 수 있다.

 

 

 

 

 

 

<소상야우(瀟湘夜雨)>《소상팔경》화첩에 수록, 傳 안견,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 35.3×29.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상팔경도가 단폭으로 그려질 때는 대개 '소상야우', '강천모설', 그리고 '평사낙안'이 그 소재가 된다.흥미로운 점은 단폭으로 그려질 경우 비바람 치는 여름밤과 눈 쌓인 겨울 저녁이 애호된 점이 사시도의 경우와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그 외에 멀리 줄지어 내려앉는 기러기를 그린 '평사낙안'의 인상적 장면이 또한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강촌모설(江村暮雪)>

《소상팔경》화첩에 수록, 傳 안견,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 35.3×29.9cm,  국립중앙박물관.

 

사시도와 소상팔경도는 화면 속 인물 표현도 유사하다.

나그네(客), 등 굽은 노스님(老僧), 뱃사공 노인 등이 모두 일정한 패턴이다.

한반도에서의 소상팔경도 제작은 여말선초 이후 근대기 민화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 긴 역사를 보여준다.

 

 

 

 

<적벽도(赤壁圖)>

傳 안견, 조선, 15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61.5×102.3cm,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의 명승, 유명 인물, 문학 내용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특별히 '산수인물도'라 불린다. 중국 문학이 소재가 된 경우로는

 도잠의 글에 의거한 도원(桃源), 이백의 시에 바탕한 문월(問月)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적벽도>(부분)

 

안견의 전칭작 <적벽도(赤壁圖)>는 소식이 적벽 아래를 지나는 장면으로,

화면에 그려진 거대한 적벽과 배 위에 검은 동파모를 쓴 소식의 모습을 통해 중국의 명소와 명인이 부각되어 있다.

소식의 시문과 예술론은 한반도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적벽야범(赤壁夜泛)>

 

《고사인물첩》에 수록, 김홍도, 조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98.2×48.5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성호 이익(李瀷)은 소식이 형사(形似)를 중시했던 것이라 뒤짚어 해석하면서까지

그의 문인화론을 지지했고, 조영석은 동파모에 동파 부채를 들고 동파 그림을 보는 당시 문인의 풍류를

글로 남겼으며, 19세기 김정희는 남루한 복장의 소동파 상(象)을 실로 극진하게 모셨으니....

 

 

 

 

 

 

<박연폭포>정선,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119.5×52cm, 개인소장.
조선 초기 문인들의 제화시문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박연폭포도(朴淵瀑布圖)'조선 초기 문인들의 문집을 살피면 그들이 유난히도 옛 도시 개경으로의 유람을 즐겼음을 볼 수 있다.개경의 최고 명승지로 중국의 폭포 그림에 겨주어 우리 폭포를 그림에 담고 싶었을 것은 자명한 일.다만 조선 초기에 그려진 박연폭포는 오늘날 전하는 것이 한 점도 없다.

 

 

 

 

<몽유도원도 화권 중 신숙주 제시 부분>
도원(桃源)은 육조시대 도연명(陶淵明)의 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그 출처를 둔다.안평의 도원 꿈이 보여주는 현실에서 도원으로의 이동과 도달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와 유사하다.허나 그 이동 상황과 도원 이미지는 같지 않다. 자신이 꿈을 곡진히 기록하여 안견에게 그림을 부탁했고그림이 완성되자 주변 문사들에게 시문을 부탁한 것이다. 제찬 시문에 참여한 이들만 자그만치 21人.

 

 

 

 

<몽유도원도의 도원 입구 산세 부분>

안견, 조선, 14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 일본 텐리대학교 중앙도서관.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당시 해몽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한 부류는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유가적, 현실적 의미로 해석하였다면, 다른 한 부류는 그림에도 없는 상상을 동원하여 안평의 꿈을 도가적 사유나 신선세계로 해석하였던 것이다.위 신숙주의 시는 첫 번째 현실적 해석에 속한 이다.
반면 상상으로 화면을 표현한 경우는 아래와 같은 이현로의 시를 예로 들 수 있다.
냇물에는 금고가 타고 놀던 붉은 잉어 뛰놀고들에는 의젓한 푸른 소가 숨어 있네.붉은 대추 가마솥에서 끓고향그런 물가에 두약이 어지럽게 피었구나.
안평의 꿈이나 그림 속 도원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붉은 잉어, 푸른 소, 두약 등이 시문이 현란하다.이건 결코 이현로 한 사람으 개인적 공상만은 아니었던 듯. 이는 그 시대 관각 문인들의 마음속에 서려 있던 내면의 표출로 봐야 한다고. 실제로 조선 초기만 해도 노장적 풍류사상이 만연하고 있었다고 한다.다른 이들도 도가적 차원으로 몽유도원을 해몽 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로운 산수경에 그들이 주장하던 치도(治道)의 유가적 측면과 마음  한편에 모무는 신선계 지향의 도가적내면을 응축적으로 발로해낸 셈이다. 그림 한 폭 가운데 당시 사회 엘리트들의 숨어 있는 시대의 내면을 본다.

 

 

 

 

 

<몽유도원도의 도원 부분>

 

이 두 양면성은 충돌 차원이 아니라 즐겁게 어울리는 세계였다.

적어도 <몽유도원도>를 감상한 집현전 학사들에게 현실과 산수는 대척적 공간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 관인 문사들이 유가적 현실과 도가적 환상이 공존하는 낙관적 세계를 살았던 점은

이 시대 산수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관건이 된다.

 

 

 

 


- 조선중기의 산수화 -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

김시, 조선, 1584년, 비단에 수묵담채, 53×67.2cm, 미국 클리블랜드 아트뮤지엄.

 

조선 중기 문인들에게서는 조선 초기 유행했던 청산백운, 소상팔경 등의 낭만적 이상경 보다는

비자연스러움을 오히려 강조하는 듯한 구도와 산수, 거친 붓질의 성글고 거친 산수화 선호도가 많아졌다.

위 그림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일반적인 산수화를 떠올리다가 문득 언덕 너머 뒤편으로 불쑥 솟은 산봉우리

하나가 시선을 압도한다. 기괴하고 기묘한 느낌의 산이 강조되는 이른바 16세기 화풍인 것이다.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화원별집》에 수록, 이정근,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9.6×15.8cm, 국립중앙박물관.

 

기이하고 육중한 산이야말로 진정 은거자의 공간이요, 그 속에 머무는 자야말로 분명 탈속의 지경이라는 것.

그리하여 감상자는 이러한 그림 속에서 산수 속 은자로 변신,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경건하게 하는 매개물로 삼았던 것.

 

 

 

 

 

<설경산수도>《팔경도》에 수록, 이흥효,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 29.3×24.9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역시 화면 주산의 형상이 마치 부푼 빵 덩어리 모양으로 기괴한 모습이다.앞 뒷산의 원근감은 전혀 무시되었으며 지형의 좌우도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이다. 무슨 내용과 의도일까?조선 중기 문인 최립(崔岦)이 이흥호의 다른 산수화 작품에 쓴 한 편의 글을 보면,

....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이흥효로 나라에서 으뜸가는 화가이다....병풍에 빈 자리가 있다고 재주 없는 이 몸에게 글을 써 넣어 달라기에,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산봉우리는 높고 험하고 골짝은 깊다. 나무와 돌이 모두 고색창연하며, 폭포가 장대하고 계곡이 굽이졌고추위, 더위, 안개, 눈, 비의 변화가 그 속에서 일고, 구름다리와 높은 난간이 있으며, 나그네가 나귀 타고지나가고 종자가 술동이를 들고 따라간다.... 공께서는 산수를 좋아하여 그림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병풍을 만들었으니, 그 일이 훌륭하여 비루한 이 몸은 헤아릴 길이 없다. 이는 공자가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이른 것이니....
이흥효가 그린 거친 내용이 최립에게는 산수경이요, 나아가 공자의 '요산요수'의 도덕적 경지였다.
중국의 절파화풍 가운데서도 특히 절파 후기는 구도와 붓질이 봅시 거칠어져 중국에서는 '미치광이 같다'는혹평을 듣기에 이르렀는데, 조선 문인들은 이런 거친 화풍을 더욱 더 놓아했다고 한다.문인들이 그들의 철학적 지향성과 거친 산수를 부합시켜 향유하였던 상황을 포착할 수 있다.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김명국, 조선, 17세기, 모시에 수묵담채, 101.7×55cm, 국립중앙박물관.
절파화풍 수용은 조선 후기로 이어져 17세기 전반 화원화가 김명국이 충실히 재현해 보였다.조선의 문인들은 모두 한결같은 찬사를 보낸다. 아무도 미치광이 같다는 비난은 없었다.오히려 김명국의 활달한 필치는 초월적 정신세계를 전달하는 조형 요소로 인식되었던 것.절파 산수화와 조선 중기 사림 문사들과의 만남은 조선시대 회화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긴요한 측면이다.

 

 

 

 

<동자견려도(童子牽驢도)>김시,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11×46cm, 삼성미술관 리움.
조선 중기 산수화 중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중국에서 전개된 화원화풍과 절파화풍의 요소들이 다소 부조리하게 조합되어 있다.동자의 몸짓과 표정, 귀를 쫑긋 세우고 앞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는 나귀의 묘사가 일품이다.

 

 

 

 

<관월도(觀月圖)>《산수인물화첩》에 수록, 전(傳) 이경윤,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 31.2×24.9cm, 고려대학교박물관.
뚜렷한 후기절파 화풍으로 산수와 인물 표현이 지극히 단순화 된 정적인 느낌이다.

 

 

 

 

<어부도>장로, 明대, 비단에 수묵담채, 138×69.2cm, 일본 고코쿠지.
과감한 구도에 먹색의 대비, 힘찬 붓질과 에너지 넘치는 어부의 못짓 등은 조선 중기 절파풍 산수화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강렬한 분위기다.위 <관월도>와 비교해 보면 중국 절파 회화와 조선 절파풍의 회화가 같은 양식으로 그려졌으되, 서로 다른 분위기로 전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전(傳) 이징, 조선, 17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03.9×55.1cm, 국립중앙박물관.

 

 

 

 

<니금산수도(泥金山水圖>이징, 조선, 17세기, 비단에 금니, 87.8×61.2cm, 국립중앙박물관,
금가루를 아교 물에 개어 안료로 하여 어두운 바탕의 화면에 그리는 기법으로 이금(泥金)이라고도 한다.은가루를 쓴 은니(銀泥)와 함께 고려 불경(佛經) 도해에 사용되던 기법이다.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산수인물화첩》에 수록, 전(傳) 이경윤, 16세기, 비단에 수묵, 31.2×24.9cm, 고려대학교박물관.
탁족(濯足)의 기원은 기원 전 4세기 『초사(楚辭)』「어부」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 굴원(屈原)을 노래한데서 유래한 것.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전(傳) 이경윤, 16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7.8×19.1cm, 국립중앙박물관.
선비 복장의 은인(隱人)이 물가에 걸터 앉아 한 발을 물속에 담그고, 동자는 차를 준비하고 있다.세상이 갑갑할 때, 이 그림을 펼쳐놓고 세상 시름을 잊을만한 내용이다.

 

 

 

 

 

<산수도>《산수화첩》(12면)중 제9엽, 이정, 조선, 17세기, 종이에 수묵, 19.1×23.5cm, 국립중앙박물관.
어부의 문학적 원형은 탁족과 관련된 <초사>의 어부나 <장자(莊子)>에 등장하는 도가적 현인으로서의 어부, 혹은 <도화원기>의 어부 등이 모두 중요한 테마이지만, 우리 그림 속에서의 어부 원형은 대개 엄광(嚴光) 혹은 강태공(姜太公)이었다.

 

 

 

 

<산수인물도>서위, 중국 명대, 종이메 수묵, 26.9×38.3cm, 대북 고궁박물원.
강태공이 때를 만나 치세에 역량을 발휘한 점에서 유가적 의미의 이상적 어부상이라면,엄광은 끝내 자연을 택하였기에 도가적 의미의 어부였다고 분류할 수 있다.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팔경도》에 수록, 이흥효,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 29.3×24.9cm, 국립중앙박물관.
어부가 동자를 데리고 앉아 하염없이 수면을 바라본다. "소상팔경" 중 '동정추월'의 둥근 달과'평사낙안'의 기러기 모티프가 아름다운 산수의 잔상처럼 남아서 조합되었고, 육중한 뒷산과 잎이 바퀴살같이 생긴  소나무 등 남송에서 절파로 전달된 화풍이 운치 있게 어우러져 달이 뜬 가을밤의 이상경을 만들어 놓았다.

 

 

 

 

<산수도>《산수화첩》(12면)중 제2엽, 이정, 조선, 17세기, 종이에 수묵, 19.1×23.5cm, 국립중앙박물관.
화면 가득 맑은 물이다. 어부들은 한결같이 망망하고 고요한 수면을 향하고 있다.넓게 펼쳐진 수면의 표현은 사색의 깊이를 보장해주는 듯하다. 이흥효는 수면에 잔물결을 그려 넣었고, 이정은 너른 여백으로 남겨 두었다.부드러운 물결 위에 떠 있는 어부의 모습은 그 어느 은자의 형상보다 여유로워 보인다. 부는 물의 깊이만큼이나 내면이 깊고, 물의 부드러움만큼이나 자유롭다. 가만히 앉아 있지만 세상을 관조하는 깨어 있는 사람이며, 강태공이 그랬듯이 때를 기다리고 앉은 잠재적 위정자이며, 혹은 엄광처럼 황제의 존경과 왕림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자유인이다. 부도를 펼친 문사들은 완벽한 수양의 경지를 어부와 고유하면서, 다시금 '강호로 돌아가리라'는 노래를 읊조렸을 것이다.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이명욱, 조선, 17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173×94cm, 간송미술관.
이 그림은 송대 소옹(邵雍)의 「어초대문(漁樵對問)」이라는 글에 연원을 둔다.이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세속의 티끌이 없고 오로지 천지만물의 도(道)가 담겨 있다.의복 표현과 필력, 채색 모두가 뛰어난 대작이다.

 

 

 

<기려도(綺麗圖)>《산수인물화첩》에 수록, 전(傳), 이경윤,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 31.2×24.9cm, 고려대학교박물관.
기려도는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니며 산수를 관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나귀는 말이나 소처럼 힘세고 덩치 큰 짐승이 아니다. 귀가 삐죽 솟은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아무래도빈약한 몸집이다. 그런데도 그림 속 선비들은 느긋하게 나귀 등에 올라앉아 있다.
하염없이 흐르는 물줄기가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산속을 흐르는 실제의 물이 아니라선비의 귓전에 울리는 물소리이며, 오랜 여정의 기억 소글 흐르는 길고 긴 물길이며,말할 나위 없이 온갖 유가적 덕성이 갖추어진 흐름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운치 있는 모습에서 문득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이른 봄, 아직 눈이 소복한 산속으로 매화를 찾아 떠나는 탐매(探梅)의 지경이 떠오른다.

 

 

 

<기려도(綺麗圖)>《화원별집》에 수록, 전(傳), 함윤덕, 조선, 16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5.6×19.2cm, 국립중앙박물관.
다리를 절뚝거리는 나귀를 '건려(蹇驢)'라 했다.나귀의 다리가 휘어져 절뚝거릴수록 나귀의 흥겨움은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덩달아 나귀 등의 문인도 흥에 겨워 어깨가 들썩였다고 시에 적었다.
나귀와 선비가 산 언덕을 돌아간다. 넝쿨 우거진 숲 그늘이 그 머리 위로 늘어졌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구체적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이들 그림 속 산수는 지극히 암시적이다.

 

 

 

 

 

<기려도>김명국, 조선, 17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45.7×31.6cm, 국립중앙박물관.

 

관폭기려도(觀瀑綺麗圖)라 해야겠다.

우산을 쓰고 절뚝대는 나귀 등에 탄 늙은 선비는 산수에 취해 시를 읊조릴 것이다.

선비의 뇌리에서 산수의 구체상은 아련히 사라지고, 떠오르는 것은 산수의 잔상(殘像)이다, 마치 그림 속에 그려진 간략화된 산수의 형상들처럼 말이다.

 

 

 

 

 

 

<관폭도(觀瀑圖)>전(轉) 이경윤, 조선, 16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27.8×19.1cm, 국립중앙박물관.
물을 본다는 의미의 관수 '(觀水)', 폭포수를 감상한다는 의미의 '관폭(觀瀑)'은오래전 유가적 덕목으로 정착된 물의 덕성을 기반으로 한다. 동시에 폭포수의 우람하고도 시원스런 장관은보는 이에게 장쾌한 즐거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관폭'은 '완폭(玩瀑)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렸다.청량함을 소유하는데는 이 폭포 감상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다.

 

 

 

<관폭도>윤정립, 조선, 17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27.7×22.2cm, 국립중앙박물관.
지나치게 간략하고 암시적인 그림으로 실루엣만 그려진 채 폭포의 주변이나 떨어지는부분마져 생략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문인들의 은하수에 대한 기억이나 물에 대한 도덕적 심상을 떠올리는내면의 감상 속에서, 이렇게 간략화된 폭포의 형상은 고도로 압축된 시적 언어로 되살아 났을 것이다.

 

 

 

<여산(廬山)폭포도>심주, 중국 명대, 1467년, 종이에 수묵채색, 193.8×98.1cm, 일본 교토 센오쿠하코간.
중국의 시성 이백 덕분에 여산의 폭포수는 명물이 되었다.이후 중국 회화에서도 명나라 심주, 청나라 석도(石濤)와 같은 중국 최고의 화가들이 모두 걸작의 '여산폭포도'를 남겼다.

 

 

 

<수하취면도(樹下眠圖)>《산수인물화첩》에 수록, 전(傳) 이겨윤, 16세기, 비단에 수묵, 31.2×24.9cm, 고려대학교박물관.
아예 눈을 감고 산수 속에 잠든 '수면(睡眠)'도 지금까지 본 그림들과 잘 어울린다.'수면'은 현실을 초월한 산수 자연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로의 상승이며, 더욱 완전한 본성의 평화와 자유를 보장해주는 경지이다. 그리하여 그림 속 수면은 대개 생리적 의무에서 일탈한 낮잠이며, 꿈마저도 자유로울듯 술에 취한 잠이다.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전(傳) 윤인걸, 조선, 16세기, 종이에 수묵, 33.5×43cm, 한국 개인 소장.
낚시는 제쳐 두고 뱃머리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가롭게 오수에 빠진 모습으로세상사에 초연한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매상숙도도(梅上宿鳥圖)>

전(傳) 조속, 조선, 17세기, 종이에 수묵, 109×56.3cm, 국립중앙박물관.

 

매향(梅香)에 취한 숙조는, 어쩌면 대나무의 기상을 소유한 나 자신의 자화상일지도?

예술의 풍요로움은 해석의 자유스러움이기도 하니까...!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부분)이성길, 조선, 1592년, 비단에 수묵담채, 35.5×398.5cm, 국립중앙박물관.
성리학이 심화되던 16세기, 주자(朱子)가 살며 노닐었던 곳을 시로 읊거나 그림에 담아 감상하는 문화가 성행하게 되었다.퇴계는 무이산(武夷山) 아홉 골짜기를 그린 산수화를 펼쳐놓고 그림에 대한 애정을 토로하였다."나와 나의 벗들만이 주자의 시대에 태어나지 못하였구나."한강 정구도 무이구곡도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한가할 때 가끔 한 번씩 열람하고 있노라면 내 몸이 외진 조선 땅, 사백 년 뒤에살고 있다는 현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저 사백 년 전 매일 주자 선생을 모시고 도()를 강론하면서무이구곡에서 노래 부르며 생활하던 사람들의 그 기상과 흥취는 과연 어떠하였으리오.
조선 중기에 그려진 무이산도는 그 형식이 매우 다양했다. 주자의 초상화와 무이구곡이 그려진 두루마리,혹은 무이구곡이 하나의 산수도로 그려진 축, 8폭이나 10폭의 화첩에 다른 현인들의 그림과 함께 실린 경우 등이 모두 그려졌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두루마리로 그려진 그림이며, 무이구곡에 대한 당대 문인들의 선망이 응집된 그림이라 할 수 있다.장장 4미터에 이르는 긴 그림을 모두 펼쳐놓고 감상할 일은 좀처럼 없었을 것이다.


 

 

 

 

<무이산판화도>『해내기관(海內奇觀)』에 수록, 명대 1609년 양이중이 편집.
중국 명산 및 명승지에 대한 설명과 판화도로 이루어져 있다.'무이산도' 앞에 조선 중기 학자들은 눈물을 쏟으며 감복하였다고 한다.단순한 산수화가 아닌 주자의 행적이 스민 신성한 공간이자 철학의 본향을 알현 한다는 기쁨 때문이었으리라.그들의 내면에서 주자철학이 종교적 차원으로 진행되었기에 무이구곡에 대한 그들의 감상 글 및 기호화돼 그려진 산수화면에서 읽어낼 수 있다.

 

 

 

 

<곡운구곡첩>곡운 김수증이 강원도 화양의 승경지를 스스로 선정하고 화가 조세걸에게 그리게 하였다.조선, 1682년, 종이에 수묵담채, 42.5×64cm, 국립중앙박물관.

 

 

 

 

<관암도(冠巗圖)>《고산구곡시화병》중 제1곡, 김홍도, 조선, 1803년, 종이에 수묵담채, 138×562cm, 개인소장


 

 

<담총도(潭摠圖)>《고산구곡시화병》중 제9곡, 김이혁, 조선, 1803년, 종이에 수묵담채, 138×562cm, 개인소장.
16세기 무이구곡도가 유행한 이래, 조선의 학자들은 스승이 머물던 곳, 혹은 자신의 주변 산수를 십곡(十曲) 혹은 심이곡(十二曲)으로 이름 지었으며, 이를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였다.퇴계가 머물렀던 도산(陶山)을 그린 <도산도>, 이이가 머물렀던 고산(高山)을 주제로한 <고산구곡도>가 그중 유명하다. 후에는 승경지르 찾아 구곡으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이 그러한 예이다.
앞서 제시한 구곡도들을 통하여도덕철학이 담긴 조선 중기 사림 문화가 우리 회화사에 끼친 커다란 영향을 알 수 있고,나아가 주자철학을 견지한 우리 문화의 특수성도 살필 수 있겠다.

 

 

 

 

<추관계회도(秋官契會圖)>

작자미상, 조선, 1546년, 비단에 수묵, 95×61cm, 개인소장.

 

추관은 혀조(刑曹)를 말한다. 곧 이 그림은 16세기 전반기 형조 관료들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강변의 나지막한 토파(土坡) 위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소박하고 정겨워 보인고,

몸을 조아려 절을 하는 모습은 예법과 절도가 잘 갖추어진 모임을 보여 준다.

 

실경산수인지 이상산수인지는 분명치 않다.

한강변을 그린 듯하지만 실경을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작자미상, 조선, 1572년, 비단에 수묵, 102×57.5cm, 서울대학교박물관.

 

당대 학자들의 모임이 담긴 기념비적 그림이다.

이 계회도의 산수경은 분명 독서당 부근의 실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핀 <무이구곡도>가 떠오른다. 계회도의 배경 산수로, 성정도야의 장으로서

적절한 깊고 숭고한 산수 이미지가 채택된 것이다. 정작 실제 계회를 그린 계회 산수도에도

주자와 제자들이 노니는 산수 분위기가 여실히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 문인들의 유람 모습>

《사군강산참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중 <사인암> 부분.

이방운,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2.5×26cm, 국민대학교박물관.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부 문인들 사이에 명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산수 유람 문화'가

급격하게 성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18세기에 주목되는 하나의 풍조가 되었다.

안동 김씨 가문이 김창협, 김창흡 형제는 새로운 유람 문화를 이끈 선봉자들이었다.

"위험을 무릎쓰고 산수 깊이 찾아들지 않으면, 산수의 오묘함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시를 읊었다.

너도 나도 산수 유람의 길에 올랐고, 장편의 기행 시문을 남기는 일이 예사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화가를 대동하여 산에 올랐고 유람한 곳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았던 화가는 단연 겸재(謙齋)였으니...

 

 

 

 

 

 

<구룡연(九龍淵)>

정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9.2×25cm, 개인소장.

 

김창협은 금강산 구룡폭포 앞에서의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갑자기 기이하고 장엄하니

내 마음도 우쭐거려져 어제와 다름을 느끼겠노라.

대개 사람의 마음이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겠도다.

 

금강산을 열세 번이나 올랐다느 김창흡의 말이 놀랍기만 하다.

산수 유람이란 화류계(花柳界)에 빠져드는 것과 같아 그만두려 할수록 더욱 찾아들게 하는

유혹이라고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한 세대 뒤의 담헌 이하곤은 산수 유람을 주색에 빗대어 표현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산수 유람이란 술의 진맛을 알아가는 과정과 같다고 하였으며, 특히 명산 유람에 끌리는 마음은

마치 절색(折色)이라고 알려진 미인의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 얼굴이 몹시 보고 싶어지게 되는 것과 유사한 일이라고 하였다.

 

 

 

 

 

<금강전도(金剛全圖)>정선, 1734년, 종이에 수묵담채, 130.8×94cm, 삼성미술관 리움.
18세기 전반기, 문인들의 산수 유람에 동반하여 절경 곳곳을 그린 겸재는 당시 이 분야의 독보적 존재였다.조선시대 화가로서, 그것도 오로지 회화 작품으로써 최고의 명예를 누린 예는 정선이 유일하였다고 할 것이다.정선의 그림이 최고 문인들의 시무노가 나란히 비견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그림이 문인들로부터 확실히 인정을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선 그림에 대한 문인들의 만족을 뜻한다.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정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73.8×100.8cm, 간송미술관.

 

금강산 내 명승지 위에 이름이 적혀있다.

금강산 속 유명 명승지들을 한눈에 보이도록 재구성한 화면이다.

정선이 어느 지점에서 명승지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는지를 조사한 결과

그러한 지점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문인들이 언표한 명소의 특징, 내부 명소들의 위치 관계,

나아가 유람의 여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재구성한 일종의 여행 지도와 같은 그림이라고.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신묘년풍악도첩》에 수록, 정선, 1711년, 비단에 수묵담채, 39×34.3cm, 국립중앙박물관.

 

 

 

<정양사(正陽寺)>

정선,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61×22.2cm, 국립중앙박물관.

 

금강산 전경이 훤히 보이는 정양사의 위치가 표현되어 있다.

 

 

 

 


 

<만폭동(萬瀑洞)>정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22×32cm, 서울대학교박물관.
정선의 그림을 감상한 당시 문인들의 시문 중에는 진짜 같다는 뜻으 '핍진(逼眞)'이란 말이 거듭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유람 중 보고 느꼈던 흥쾌의 알짬을정선의 그림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만족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김창협은 그림이 실제보다 더 멋질 수 있다고 말했다.절경을 표현한 그림이 사실적일 필요는 없다고 단언한다.

 

 

 

 

<총석정>《금강사군첩》에 수록, 김홍도, 1788년, 비단에 수묵담채, 30.4×43.7cm, 개인소장.

 

 

 

<총석정>《풍악도첩》에 수록, 정선, 1711년, 비단에 수묵담채, 36×37.4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그려낸 우리 명산 그림은 18세기 후반 회화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많은 화가들이 정선의 화풍을 계승하면서 남종화풍으로 세련된 자신의 면모를 살려 다양한 진경산수를 남겼다.
최근 연구자들은 산수 유람이 기록된 산수화를 기유도(記遊圖)라하고, 산수 속 거주의 모습을 그린 산수화를산거도(山居圖)라 부르고 혹은 거주 산수화들의 속성에 초점을 두어 소유지(所有地)그림이라고 하는 등과감한 명명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진경(眞景)'이라는 말을 조선 후기의 문맥에서 이해하자면, '참 경치', 즉 '진짜 경치'를 뜻한다.아울러 조선 전기부터 문인들이 산수화를 '진경(眞境)이라 부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眞境'은 참된 경지라는 뜻으로 마음속 경지를 포함하며, 실경(實景)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실경을 강조하려는 의미는 별로 없다, '眞景'이라고 했을 때 비로소 '실경'의 뜻이 된다.설령 당시 개념이 사진으로 찍어낸 듯한 실경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眞景'이란 실경을 염두에 둔 개념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사용된 '眞景'이란 말은 산수화의 장르를 지칭하는 정착된 용어가 아니었다.진경이라는 한자어의 진원지는 중국이지만 산수화의 일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기에,오늘날 중국 학자들은 '진경'을 생소한 단어로 여긴다.우리 회화사에서 '진경산수화'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 새롭게 부여된 이름이다.

따라서 '진경산수화'의 축어적 의미는 그대로 '실경산수화'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고이에 더하여 정선을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를 기리켜 특별히 진경산수화라 부르고 있다는사실을 기억해 두면 될 것이다.


 

 

 

<옹천도(甕遷圖)>

《금강사군첩》에 수록, 김홍도, 1788년, 비단에 수묵담채, 30.4×43.7cm, 개인소장

 

김홍도는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백여 곳을 그렸다.

정선의 그림과 비교한다면, 김홍도의 그림이 더욱 사실적이었음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웅천>

<겸재화첩>에 수록, 정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9.2×25cm, 개인소장.

 

 

 

 

 

<태종대>

<송도기행첩>에 수록, 강세황, 조선, 1757년경, 종이에 수묵담채,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많은 문인화가들이 산수 유람을 직접 화폭에 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커다란 변화였다.

강세황이 그러했고 문인화가 정수영이 실상의 묘사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영통동구>

<송도기행첩>에 수록, 강세황, 조선, 1757년경, 종이에 수묵담채, 32.8×53.4cm, 국립중앙박물관.

 

 

 

 

 

 

<구룡연>

이인상, 1752년 종이에 수묵담채, 182.2×58.5cm, 국립중앙박물관.

 

각진 면을 이루는 선으로만 처리된 화면은 서늘한 정신을 전달해 준다. 절경의 흥분을 표현하려 한

정선의 그림과 다르고 개인의 내면적 경험을 구현한 것이요 감정의 발로라는 점에서

뒤에서 다루게 될 18세기 서정 표현 산수화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고,

 정신적 분위기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19세기를 예고해 준다.

 

 

 

 

 

<귀담>

정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고려대학교 박물관.

 

단양의 뱃놀이 그림이다.

작은 유람선이 유유히 돌아든다. 잔잔한 물줄기를 그린 몇 가닥 붓질에서

림 속 배 위로 스쳐갔던 시원한 강바람이 느껴진다.

 

 

 

 

 

<압구정>

정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31×20cm, 간송미술관.

 

산수 절경을 찾아다니던 조선 후기 문사들이 한강의 뱃놀이를 빼놓았을 리 없다.

정선과 친했던 이변연이 한강 주변이 완상할 만한 곳을 시로 읊었고 정선이 이를 그려 시화첩으로 만들었다.

금강산을 그릴 때의 힘찬 붓질을 내려놓고 차분한 필묵으로 잔잔한 수면의 흥겨움을 표현하였다.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

정수영, 1797년경, 종이에 수묵담채, 24.8×1575.6cm, 국립중앙박물관.

 

장장 15미터에 이르는 한강 유람도로써 금강산을 눈에 보이는대로 그리겠다고 선언한

그의 진지한 실사의 노력은 한강변을 그린 이 그림에서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한강변을 따라 가며 구경한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등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낸 것이다.

정수영은 53세 봄에 경기도 광주를 출발하여 이듬해 일정을 마쳤다.

 

 

 

 

 

<경기도 광주군 우천>

정수영, <한임강명승도권>의 부분.

 

 

 

 

<경기도 광주군 여주읍>

정수영, <한임강명승도권>의 부분.

 

 

 

 

<도담>

《사군강산참선수석첩》에 수록, 이방운,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2.5×26cm, 국민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 문인들의 선유는 강호에서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이루어 졌다.

바다느 바라보는 관망(觀望)만으로도 흡족한 흥취를 주는 거대한 대상이었기에,

바다에서의 뱃놀이는 더욱 각별한 흥쾌를 약속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금강>

《겸재화첩》에 수록, 정선, 18세기, 비단에 무묵담채, 19.2×25cm, 개인소장.

 

해금강(海金剛)에서의 선유는 바다 선유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정선에게 해금강 그림을 부탁한 조유수는 조선 중기 정철의 「관동별곡」에

해금강이 빠진 것을 지적하며 해금강의 절경을 각별히 중시하였다.

 

정선의 <해금강>은 문인들의 바다 유람을 그린 것이다.

물결이 몹시 거칠게 출렁이고, 문인들의 유람 배는 가랑잎처럼 작아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 위에 앉거나 선 문인들의 모습은 마냥 느긋하다.

 

 

 

 

 

<통천문암>정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53.4×131.6cm, 간송미술관
흥에 겨워 어깨가 솟은 유람 문인과 그들이 즐긴 바다의 흥취가 율동적 물결로 표현되어 있다.

 

 

<삼일호>

《동유첩》에 수록, 이풍익, 1825년, 종이에 수묵담채, 20×26.6cm,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이재묘도(夷齋廟圖)>

《중국기행첩》에 수록, 강세황, 1784, 종이에 수묵, 26.5×22.5cm, 통도사 성보박물관.

 

18세기 문인들의 글을 보면, 중국의 산천을 유람하고픈 그들의 욕구가 매우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개인적 해외여행은 불가능하였다.

일 년에 두어 차례 국가적 차원의 사신 왕래만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72세의 노구 강세황이 북경 사행을 다녀와 <중국기행첩>을 엮었다.

 

 

 


참고서적  /  고현희 著 《조선시대 산수화》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