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자화상 컬렉션

茶泉 2017. 12. 27. 00:31

 

자화상 컬렉션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
독일의 뒤러가 미술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된 작품이다.기능인 '화공'에서 예술가 '화가'를 선포한 뒤러.미술사가들은 예술가의 자의식을 갖고 자화상을 그린 첫번째 화가로 뒤러를 꼽는다고. 굵고 풍성한 머릿결이 시선을 당긴다.

 

 

 

 

<스물 두 살의 자화상>


뒤러가 도제 수련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린 첫 번째 자화상으로 송아지 가죽에 그렸다.


 

 

 

<장갑을 낀 자화상>
뒤러가 스물일곱 살 때 그린 것으로, 당당한 자신감과 기품이 느껴진다.




<자화상 소묘>
깊은 사색이 표현된 예순 살의 다빈치의 <자화상>이다.마치 내면의 세계를 관조하는 듯.

 




 

 

<다빈치>

프란체스코 멜치 소묘, 연대 불명
"혼자일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자기 자신을 만나게된다. 약 누군가 곁에 있다면 반쪽의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절대 고독이 깊게 배인 천재 화가이 주름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갖게한다.

 

 

 

<모나리자>

 

1986년 영국의 그래픽 전문가 릴리안 F. 슈바르츠는

컴퓨터에 <모나리자>와 다빈치의 <자화상>을 오버랩 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두 인물의 눈,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 코 등의 윤곽이 완벽하게 일치함을 알아냈다.

이에 따라 슈마르츠는 <모나리자>가 바로 다빈치의 자화상이라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다빈치는 왜 자신의 얼굴을 <모나리자>에 남겼을까?

모나리자는 남녀 양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이는 화가의 눈에 가장 이상적인 결합방식이었다.

다빈치는 남성과 여성을 평등하게 하나로 합치는 방식으로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의 남성우월주의를 은밀하게 비판한 것이다.

 

 

 

 

 

<스물세 살의 자화상>

라파엘로 산티, 1484~1520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활약했던 라파엘로.그는 수려한 용모에 우아하고 댄디함까지 갖춘 매력남이었다. 요즘말로 치면 꽃미남이었던 것.  다른 거장들의 자화상이 권위를 상징하거나 그로데스크한분위기를 연출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스물한 살의 자화상>

라파엘로가 목탄으로 소묘한 이 자화상은 얼핏 소녀로 착각할 만큼 아리따운 모습이다.

대상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표현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

우아함을 통해 완벽한 형상화를 추구하여 이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펜싱 코치와 함께>

 

라파엘로가 서른다섯 살 때 그린 자화상으로 화면 뒤쪽에 가르마를 탄 긴 머리를 하고 있다.계속되는 과로와 심적 부담으로 그는 이미 병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었다.결국 1520년 자신의 생일인 4월 6일 로마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눈이 시리도록 여리고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자화상만이 쓸쓸한 생을 마감한 화가를 위로한다.

 

 

 

 

<한스 홀바인 2세의 자화상>

 

15~16세기에 걸쳐 독일은 알브레히트 뒤러,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한스 홀바인 2세라는 세 명의 거장을 배출한다. 셋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홀바인은 북유럽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매우 엄격하고 정교하게 그려진 그의 <자화상>은 중세 북유럽 전통의 사실적 화풍을 그대로 보여준다.그의 나이 마흔네 살에 그린 그림으로 마흔여섯에 숨졌으니 여생이 그리 남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다.1543년 홀바인은 런던에서 전유럽을 휩쓸던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젊은 틴토레토의 자화상>

(519~1594)

 

'베네치아파 최후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틴토레토.

짧은 곱슬머리의 매우 잘 생긴 전형적인 이탈리아 청년의 모습을 어두운 배경으로 가리고 있다.

그림의 배경이 지나치게 어둡고 화가의 표정도 음울하고 경직되어 있다.

긴장된 몸짓과 무거운 표정을 대비시켜서 자신의 열정과 내성적인 성격을 극적 반전으로 표현했다.

 

 

 

 

 

<늙은 틴토레토의 자화상>
전성기 시절 활력 넘치는 틴토레토 특유의 에너지가 많이 퇴색된 느낌이다.삶의 마지막 지점을 힘겹게 건너는 지친 예술가의 눈빛은 애처롭기까지 하다.젊은 시설 그렸던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 준다.

 

 

 

 

<중년의 루벤스>

1577~1640
전혀 바로크적이지 않은, 그러나 바로크의 거장이라 불리는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자화상이다.'바로크((Baroque)'란 포르투칼 말로 '뭉개진 진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15세기를 거쳐 16세기가 저물어 갈 즈음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가톨릭으로의 부활을 부르짖는 구교도들의 외침이 유럽을 뒤흔들었다.
건축과 미술, 음악 등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조화와 균형, 인간미를 강조한 르네상스풍에 맞서거대한 스케일의 웅장함 속에 자유분방함과 불규칙성을 강조한 바로크풍이 새롭게 대두한 것이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르네상스라는 진주를 발로 짓밟아 찌그러트린 뒤 그 자체의 파격미에서 예술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크였다.음악의 최전선에 바흐가, 건축에 에르라흐가 있다면 미술에는 단연 루벤스가 있는 것이다.

 

 

 

<노년의 루벤스>

 

에순두 살에 그린 이 그림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한 것이다.오른손에만 장갑을 끼고 있는데 이는 중풍 기운으로 뒤틀린 손을 가리기 위해서라고 한다.루벤스가 평소 즐겨 사용했던 '과장의 미학'을 이 <자화상>에서만큼은 드러내지 않았다.

 

 

 

<인동덩굴 그늘에서의 루벤스와 브란트>

 

1609년 결혼한 그의 첫 번째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와 자신의 모습을 함께 담은 것.인동덩굴은 행복한 결혼을 암시하는 식물이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

디에고 벨라스케스, 1599~1660
인물의 윤곽선이 화면의 짙은 배경에 묻혔는데, 이 화법은 다빈치의 명암 대조법에에서 유래한 것.작품 속 화가의 나이가 스물네 살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만큼 성숙해 보인다.당시 자신의 신분에 민감했던 벨라케스가 의도적으로 근엄한 귀족처럼 보이려 했던 것이다.

 

 

 

<마흔네 살의 자화상>
1643년에 그린 것이다. 여전히 화가라는 신분에 만족하지 못하 듯하다.내면을 향한 성찰보다는 외향적 시선에 초점을 맞춘 자화상이라는 인상이 짙다.벨라스케스는 순수 혈통을 지닌 귀족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에는 기사단의 제복을 입게 된다.

 

 

 

<서른여섯 살의 자화상>

니콜라 푸생, 1594~1655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푸생의 미술사적 위치가 가늠된다.1630년 작으로 자화상 속 화가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하다. 오랜 세월의 지병 탓이리라.일그러진 미간과 인중, 곱슬머리 등은 화가의 고집스러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사물과 현상에 대해 깊이 참구하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쉰여섯 살의 자화상>
이 작품은 그림 속 여러 상징들로 인해 다양한 해석을 낳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뿐만 아니라 미술사적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본다(ㅣook)'는 기존의 감상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림은 문학이나 논문을 읽듯이 '읽어야 한다(read)는 지론을 푸생은 이 자화상에 담아낸 것.즉 '보는 미술'에서 '읽는 미술'로 관람자들의 관점을 바꾸고자 한 것이다.
그림 속 화가 뒤편으로 캔버스들이 여러개 겹쳐져 놓여 있다. 맨 앞 배경으로 사용한 캔버스는 그림이 없는 텅 빈 것이다. 거기에는 "레 장들리 출신 화가 니콜라 푸생이 1650년 로마에서 쉰여섯에그린 초상"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배경으로 쓰인 빈 캔버스는 푸생의 서명을 위해 배치한 듯.(물론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그 뒤에 그림의 일부만이 보이는 캔버스에 대해서도 미술평론가들의 해석이 분분하다.캔버스의 일부에 나타난 여인을 두고, 회화를 사람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곤 한다.또 회화를 상징하는 여인을 안으려는 두 팔은, 이 자화상을 주문한 후원자와 화가 자신의 대등한 신분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
 이 작품은 자화상으로는 이례적으로 후원자로부터 주문받아 그린 화가 자신의 초상화인 것이다.

 

 

 

<쉰다섯 살의 자화상>
1년 간격으로 완성한  이 두 자화상은 구도 등 여러 면에서 닮아 있는데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화가의 손이다. <쉰다섯 살의 자화상>에;서는 한 권의 책과 펜을, 그리고 <쉰여섯 살의 자화상>에서는붉은 끈으로 묶여있는 자료집을  쥐고있다. 화가 특유의 지적 풍모를 엿보게 한다.<쉰여섯 살의 자화상>에서 화가가 손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는 고대 그리스 철학 사조인 스토아학파를 상징하는 것이다. 푸생만의 철학과 논리적 정서가 그림에 잘 묘사돼 있다.

 

 

 

<스물두 살의 자화상>

렘브란트 하르먼스 반 레인, 1606~1669
17세기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출신 화가 렘브란트는 자기성찰적인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회자된다.평생에 걸쳐 자화상을 그렸으며, 그가 남긴 자화상은 100여 점이 넘는다.이 그림은 아직 그가 명성을 얻기 전 습작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깃털 장식을 단 베레모를  쓴 자화상>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직업화가의 길을 막 걷기 시작했을 때 그린 작품으로여전히 아직 앳된 청년의 모습이 어려 있다.

 

 

 

<서른 네살의 자화상>

 

렘브란트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그러나 렘브란트의 부와 명예는 그의 낭비벽과 무절제한 생활로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결국 1656년 나이 쉰에 접어들면서 그만 파산하고 만다.

 

 

 

 

 

 

<쉰세 살의 자화상>
1659년에 그린 <쉰세 살의 자화상>을 <서른네 살의 자화상>과 비교해서 보면그림 속 화가의 표정에서 매우 큰 차이가 나타난다. 황혼을 앞둔 초로의 중년의 사내 그 자체다.렘브란트는 말기에 주로 초상화를 주문 받아 그렸고 가끔 성경에서 소재를 취해 종교화를 그리기도 했다.궁핍한 형편으로 인해 모델 조차 구할 수 없었던 렘브란트는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자화상을 그렸던 것.

 

 

 

<화실에서의 자화상>

프란시스코 고야. 1746~1828
그림 속 화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관람자가 화가의 모델이 된 듯하 느낌을 받게 된다.고야는 자신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
1815년 그림으로, 중병을 앓고 난 후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은 모습이다.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된다.화가의 오른쪽 귀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적막에서 오는 공포가 읽혀진다.

 

 

 

<자화상>

자크 루이 다비드, 1748~1825
19세기를 산 프랑스의 화가 가운데 용서받지 못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비드다.유럽 신고전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라는 미술자적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권력만을 쫒은 화가의 삶은 그의 작품에 주홍글씨처럼 따라 붙는다.
한때 왕실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으로 왕권이 몰락하자 어느새 자코뱅파의 일원이 돼 있었다. 그러나 권력암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가 숙청당하면서 그를 지지했던 다비드로 수감자 신세가 되고 만다.
감옥에서 거울을 보며 그렸다는 자신의 첫 자화상.작품 속 다비드의 손에는 총이나 칼 대신 붓이 쥐어져 있다. 화가에게 붓은 총칼과 다름없음을 바깥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자화상>

다비드의 자화상은 모두 네 점이 전해오는데 <감옥에서 감옥에서 그린 자화상>과 같은

구도의 <자화상>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자코뱅당이 집권했을 당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780~1867

 

"화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다시 고쳐 그릴 권리가 있다!"

이 그림은 앵그르가 스물네 살 무렵 그린 자화상인데 그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고쳐 그려 세상에 내 놓았다.

그림을 그린 지 40년이 엄는 긴 세월 동안 앵그르의 마음 한 켠에는 자화상에 얽힌 상처가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

 

 

 

 

 

<일흔여덟 살의 자화상>


구도 등 여러 면에서 <스물네 살의 자화상>과 지나칠 정도로 닮았다.노 화가는 온갖 영예를 누린 저명 인사가 되었지만 자화상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불안했던 모양.그래서인지 앵그르가 남긴 두 점의 자화상은 자화상 특유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고전주의 초상화의 대가라는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는작품이다. 스승 다비드가 그린 <앵그르의 초상>에서 훨씬 앵그르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는 평.


 

 

 

<스물세 살의 자화상>외젠 들라크루아, 1798~1863
사진이 발명되면서 위축되었던 미술계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화가이다.다양한 문학작품들이 녹아든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사진이라는 혁신적인 기술에 빠진 사람들의 이목을 다시 그림으로 되돌릴 만큼 매력적이었다.
<스물세 살의 자화상>은 화가 자신의 모습을 월터 스코트의 소설 『람메르무어의 신부』에 등장하는 레이븐스우드나 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주인공처럼 그린 것이다.당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들 등장 인물에 대입함으로써 어둡고 우울하게 묘사했다.시인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우울(melancolie)'이야말로 커다란 예술적 감동을 선사한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흔세 살의 자화상>
이 작품 또한 문학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비스듬한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은 비탄 그 자체다. 굳게 다문 입술은 세상의 모든 억울함과 분노를 힘겹게 억누르고 있다.
당시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많은 작품을 창작한 경력에 비해 아직까지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그는 오랜 세월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에 시달리는 곤혹을 치렀다.



 

 

<녹색 조끼를 입은 자화상>

 

말년에 그린 이 작품은 몇 점 안 되는 그의 자화상 중에서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으로 꼽힌다.

그림 속 고독한 화가의 모습 그 자체는 한 권의 자서전처럼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관한 자전적 소설을 써내려간 듯하다.

 

 

 

 

 

 

 

 

 

<이젤 앞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 1808~1879
도미에는 잡지에 카툰이나 인물의 케리커처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석판 화가였다.부패한 권력층이나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대부분의 자화상이 얼굴의 표정에 초점을 맞춰 그려진 것과 달리 도미에는 캔버스라는 프레임 안에 어떤 상황을 설정해 묘사한다.
훗날 도미에의 판화를 정리했던 로이스 텔테이유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파리지양은 도미에의 작품으로 세상에 대한 참된 풍자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도미에는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불행과 재난까지도 진솔하고 희극적으로 묘사해낸다.이 예술가의 위대함은 바로 '무자비한 솔직함'에 있다."


 

 

 

<삼십 대 자화상>

장 프랑수아 밀레, 1814~1875
밀레의 소묘 자화상은 그가 서른두 살 때 완성한 것이다.회색 종이 위에 연필과 검은색 분필로 그린 이 자화상은 분필의 농담 조절이 탁월하고 명암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 냈다.
인상적인 부분은 단연 밀레의 눈이다. 옆으로 약간 고개를 돌려 정면을 주시하는 화가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배어 있다.자신의 눈을 어쩌면 이리도 슬프게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이마 주변의 명암도 인상적이다. 암울함이 한껏 배어 있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남자>

구수타프 쿠르베, 1819~1877
쿠르베는 위선적인 현실을 향한 날선 눈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자칭 '미술계의 무정부주의자'였다.기존 자화상이 화가의 내면을 전하는 정적인 그림이었다면 쿠르베는 서사적 요소를 담은 역동적인 자화상을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쿠르베는 매사 격정적이고 반항기 가득한 젊은이였다.
당시 미술계는 쿠르베의 작품에 "한 풋내기 화가의 치기 어린 붓장난" 정도로 취급했다.그러나 후대들은 이 그림을 평하길, "미술사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자화상"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팔레트를 든 자화상>

에두아르 마네, 1832~1883
노년에 그린 이 그림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민첩하면서도 화려한 붓놀림으로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다.검정색의 배경이 화가의 얼굴 및 외투의 밝은 색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빛과 색채의 순간적인 효과를 표현하느라 형태가 흐트러질 수도 있었으나 화가의 뛰어난 소묘 실력이 그림에 안정감을 불어넣고 있다.
자화상을 비롯한 마네의 초상화는 입체성이 배제돼 있다.즉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평평하게 묘사돼 있다.평평한 2차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람자가 인물의 내면을 유추하는 것을 차단했다.
이에 대해 마네는 "그림 한 점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우수꽝스러운 억지인가"라고 되묻는다.

 

 

 

<스물세 살의 자화상>

에드가 드가, 1834~1917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드가의 굴곡진 삶.이십 대 초반에 그린 드가의 자화상에는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약간 내려앉은 드가의 눈꺼풀에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냉소가 가득 담겨 있다.내려앉은 드가의 눈꺼풀은 이후 삼십대와 노년기에 그린 자화상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노년의 자화상>

 

예순여섯에 완성한 이 작품은 파스텔로 그린 작품이다.드가는 파스텔화의 대가로 불릴 만큼 색채미의 구현 능력이 탁월했다.거친 윤곽선을 운용하는 드가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이 돋보인다.화려하고 풍부한 색채의 강렬한 대비 역시 드가 화풍의 전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서른여덟 살의 자화상>

폴 세잔, 1839~1906
자화상 속 제잔의 모습에서 예술가다운 풍모를 찾기는 어렵다.세잔은 이처러 그리 친근감이 가지 않는 자기 얼굴을 평생 30여 점이나 그렸다.위 그림은 세잔의 자화상 중에서 그나마 덜 심술궂게 보이는 작품이라고.
거칠고 육중한 검은 윤곽선이 인물의 형체를 분명하면서 견고하게 잡아준다.

 

 

 

<마흔한 살의 자화상>

 

세잔의 인상을 더욱 비호감형으로 만든 요인에는 대머리를 꼽을 수 있다.제잔은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탈모가 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비해 훨씬 더 권위적인 인상이 풍긴다.
세잔의 자화상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 그림에서도 검은색의 두터운 윤곽선이 형태를 확실하게 잡아주면서 화면의 구조를 안정되게 지탱하고 있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면 고흐의 자화상을 보라는 말이 있다.한 마디로 '진정한 고통의 실체'를 볼 수 있기에 하는 말일 터.
고흐는 렘브란트 다음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다.짧은 생애동안 근 4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 중 대부분이 죽기 얼마 전인인1885~1889년 사이에 그린 것들이다.
이 그림은 1886년 봄에 그린 것으로, 이때 고흐는 화가의 꿈을 안고 처음 파리에 도착한다.그림 속 남자는 중년을 훌쩍 넘겨 보이지만 당시 고흐는 불과 서른세 살이었다.파이프와 수염이 그를 훨씬 나이 들어 보이게 한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강렬하 색채 대비와 거칠고 역동적인 붓놀림을 통해 고흐의 혼란스런 내면을 보여준다.왼쪽 눈 부위가 붉게 충혈 돼 있고, 귀도 피가 맺힌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고흐 특유의 노란 색감의 미학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귀를 자른 후의 자화상>

 

고흐는 명백히 여러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그가 앓던 질병을 추측했는데,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진단은 간질과 조울증이다.
또한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과 감정적 격변을 겪고 있었고, 러한 상황은 결국 그를 신체 훼손이라는 한계에 이르게 했던 것.




 

<고갱을 위한 자화상>
고갱에게 보낼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반 고흐는 그의 침실 그림에 그려져 있는 거울을 사용했을 것이다.거의 민머리에 가깝게 짧게 자른 머리의 반 고흐가 고갱에게 이 그림을 설명하며 그는 자신을 일본 승려에 비유한다.

 

"또한 내 성격을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부처를 경배하는 소박한 일본 승려에 가깝다."

 

 

 

 

 

 

<노란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

폴 고갱, 1848~1903

방 값이 싼 파리 근교 시골을 전전하다 트레말로 성성에 걸린 예수상을 보고

캔버스에 옮긴 작품으로 십자가에 걸린 예수와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동일시 한 듯.

 

 

 

 

 

<후광이 있는 자화상>


자신을 악마 루시퍼의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마흔한 살에 그린 것으로 뚜렷한 윤곽선을 지닌 넓은 평면에 강한 색채를 사용하여 효과를 높였다.하늘로 부터 퇴출당한 대천사이자 악마인 루시퍼의 모습을  케리커처 같은 느낌이다.

 

 

 

 

<레미제라블>

 

미술사의 뒷담화 가운데 고흐와 고갱에 관한 이야기만큼 주목을 끄는 것도 없을 것이다.아를에서 고갱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고흐는 재미있는 제안을 한다.자화상을 그려 서로에게 선물하자는 것이다. 고흐의 독촉에 한 점을 그린게 바로 <레미제라블>이다.고갱은 이 그림에서 오른쪽에 당시 가깝게 지내던 화가 베르나르의 초상을 함께 그려 넣었다.이 그림을 받아든 고흐는 곧이어  자신의 자화상도 한 점 그려 고갱에게 보냈다.
이에 고무된 고갱은 내친 김에 고흐의 초상까지 그렸다.바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이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고흐의 정신발작에 놀라 다시 파리로 돌아온 고갱의 머리속에는

 온통 캔버스 앞에 해바라기를 놓고 씨름하는 고흐의 모습만 떠올랐다.

암튼 아를에서 고흐와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은 고갱에게 평새 잊을 수 없는 충격이자 아픔이었다.

 

 

 

 

 

<저승에서, 자화상>

에드바르 뭉크 1863~1944
죽은 자신을 상상해서 그리는 것만큼 무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뭉크는 두려움과 공포 등 주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탓에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그림 속 화가는 벌거벗은 상태로 몸 전체가 벌겋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불길에 휩쓸릴 것처럼공포와 긴장감 속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화상>


이미 죽은 자신의 영혼을 그린 것이다.빛을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죽은자의 환영을 강렬하게 묘사했다.뿌옇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팔뼈가 있는 자화상>

 

석판화로 제작된 것으로 자신의 두상만 표현된 이색적인 자화상이다.바탕도 온통 암흑이다. 그림 하단의 팔뼈는 화가 자신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추론이다.몸을 썩지만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이승을 떠돌기도 한다는 속설을 담아낸 것이다.죽은 나를 그림 소재로 삼는 화가의 심중은 어떤 것일지...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

마르크 샤갈, 1887~1985
러시아 출신으로 처음 파리에 왔을 때 그린 초기 작품으로, 추상적이고 기하학적 형태를 동원하여 입체적 볼륨감을 이끌어 냈다.회화에 있어 평면성의 극복은 많은 화가들의 공통된 주제였음을 상기시킨다.

 

 

 

 

<흰색 컬러의 자화상>


번뜩이는 눈과 얼굴의 명암은 샤갈의 작품 속 인물에 거의 공통적으로 투영된다.자화상 속 샤갈의 표정이 냉랭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것도 눈과 명암에서 비롯한다.

 

 

 

 

<와인잔을 든 두 사람>

 

자신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그린 것이다. 샤갈의 아내 벨라 로젠펠트는 러시아에서 온 가난한 이방인 예술가에게 사랑의 기쁨을 알려준 메신저였다.샤갈의 머리 위에 있는 아기천사는 이들 부부의 딸 이다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그림 속 벨라의 뱃속에 이다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소묘 자화상>

파블로 피카소, 1881~1973
1900년에 완성한 이 소묘는 피카소가 첫 개인전을 열었던 바로 그 해에 그린 것이다.곡선보다 직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두껍고 거친 선으로 면을 분할하는 소묘 솜씨는열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빼어나다.


 

 

 

<파란 외투를 입은 자화상>

 

스무 살 되던 해 자신의 절친 카사게마스가 실연의 아픔으로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얼마 후 캔버스에 앉은 피카소는 온통 청색 계열만 사용한다. 절망의 색이라 여긴 것.눈과 얼굴까지 온통 푸른빛 창백한 색조가 인상적이다.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

 

1904년 피카소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친구의 죽음으로 겪었던 충격과 고통을 올리비에르 통해 위로 받는다.야수파 아리 마티스와 조우하면서 화풍에 큰 변호가 찾아온다.훗날 평론가들은 당시 피카소가 세탁선에서 머무르던 시기를 '피카소의 장미빛 시대'라 일컫는다.

 

 

 

 

<자화상>

 

피카소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은 그의 예술적 위대함을 그대로 보여준다.그가 아흔이 넘어 그린 것으로 사물의 본질적 구조를 더욱 깊게 꿰뚫는다.극도의 추상적 기법으로 초상화의 형태에 변형을 가해 기하학적 형상을 만들어 냈다.

 

 

 

 

<구운 베이컨과 부드러운 자화상>

살바도르 달리, 1904~1989

상식과 이성을 깨고 현실을 초월하는 화가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초현실주의 화가의 자화상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품이 달리의 자화상이다.

과장과 비약이 지나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작품이다.

자신의 몸에서 환영을 뽑아내어 비합리적인 방식에 의해 새롭게 배열되고 변형된다.

나무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아래로 부드럽게 녹아 흐른다.

그 아래에는 구운 베이컨 한 조각이 놓여 있다. 마치 설치미술과 흡사하다.

 

 


거장들의 자화상 컬렉션

 

 

 

젠틸레 벨리니

1429~1507, 이탈리아

 

 

 

 

필리피노 리피

1457~1504, 이탈리아

 

 

 

 

로렌초 디 크레디

1459~1537, 이탈리아


 

조르조네

1477~1510, 이탈리아


 

한스 발둥

1480~1545, 독일

 

 

 

 

한스 홀바인

1465~1534, 독일

 

 

주 반 클레베 1세

1485~1540, 벨기에

 

 

 

자코포 다 폰토르모

1494~1557, 이탈리아


 

안드레아 델 사르토

1486~1530, 이탈리아


 

줄리오 로마노

1499~1546, 이탈리아


 

루드거 톰 링 2세

1522~1584, 독일


 

안토니스 모르

1517~1576, 네델란드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1532~1625, 이탈리아


 

베첼리오 티치아노

1488~1576, 이탈리아


 

조르조 바사리

1511~1574, 이탈리아


 

조반니 파울로 로마초

1538~1600, 이탈리아


 

페데리코 바로치

1528~1612, 이탈리아


 

카라바조

1573~1610, 이탈리아


 

안니발레 카라치

1560~1609, 이탈리아


 

 

 

 

 

 

엘 그레코

1541~1614, 스페인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1577~1621, 이탈리아

 

 

 

 

 

조반니 다 산 조반니

1592~1636, 이탈리아

 

 

 

 

 

 

 

 

 

 

안토니 반 다이크

1599~1641, 벨기에


 

주 반 크레스벡

1605~1660, 벨기에


 

야콥 요르단스

1593~1678, 벨기에


 

지안 로렌조 베로니니

1598~1680, 이탈리아


 

살바트로 로사

1615~1673, 이탈리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593~1656, 이탈리아


 

 

 

 

 

 

로렌조 리피

1606~1664, 이탈리아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1617~1682, 스페인


 

빌렘 ㄷ로스트

1630~1680, 독일


 

요하네스 안 베르메르

1632~1675, 네델란드


 

카를로 돌치

1616~1686, 이탈리아


 

 

 

 

 

 

장 에티엔느 리오타르

1702~1789, 스위스


 

 

 

 

 

 

토머스 게인즈버러

1727~1788, 영국


 

조지프 라이트

1734~1779, 영국


 

프라츠 사버 메써슈미트

1736~1783, 오스트리아


 

벤저민 웨스트

1738~1820. 미국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1699~1779, 프랑스


 

안젤리카 카우프만

1741~1807, 스위스

 

 

 

 

 

조지 롬니

1734~1802, 영국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그 브륑

1755~1842, 프랑스


 

조지프 뒤크뢰

1735~1802, 프랑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1775~1851, 영국

 

 

존 컨스터블

1776~1837, 영국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774~1840, 독일

 

 

새뮤얼 팔머

1805~1881, 영국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28~1882, 영국

 

 

안젤름 포이어바흐

1829~1880, 독일

 

 

귀스타브 모로

1826~1898, 프랑스

 

 

제임스 티소

1836~1902, 프랑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1834~1903, 미국

 

 

피에르 오그스트 르누아르

1841~1919, 프랑스

 

 

필리포 발비

1806~1890, 이탈리아

 

 

윌리엄 홀먼 헌트

1827~1910, 영국

 

 

존 러스킨

1819~1900, 영국

 

 

아돌프 폰 멘첼

1815~1905, 독일

 

 

클로드 모네

1840~1926, 프랑스

 

 

베르테 모리소

1841~1895, 프랑스

 

 

외젠 카리엘

1849~1906, 프랑스

 

 

오딜롱 르도

1840~1916, 프랑스

 

 

피에르 보나르

1867~1947, 프랑스

 

 

피엘 보나르

1867~1947, 프랑스

 

 

앙리 루소

1844~1910, 프랑스

 

 

오귀스트 로댕

1840~1917, 프랑스

 

 

한스 토마

1839~1924, 독일

 

 

파울라 모더존 배커

1876~1907, 독일

 

 

카미유 피사로

1830~1903, 프랑스

 

 

에곤 실레

189ㅐ~1918, 오스트리아

 

 

 

앙리 고디에 브로제스카

1891~1915, 프랑스

 

 

 

이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1920, 이탈리아

 

 

피트 몬드리안

1872~1944, 네덜란드

 

 

앙리 마티스

1869~1954, 프랑스

 

 

앙리 마티스

1869~1954, 프랑스

 

 

파울 클레

1879~1940, 스위스

 

 

 

막스 베크만

1884~1950, 독일

 

 

프리다 칼로

1907~1954, 멕시코

 

 

참고서적 / 어바웃어북 『자화상展』천 빈 지음 . 정유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