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庶民) 풍속화
서민(庶民) 풍속화
조선 후기 풍속화에는 대부분 서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의 생활상을 가장 먼저 화폭에 담은 이는 의외로 사대부 화가였다, 서민들의 일상사를 뛰어난 관찰력과
소묘로 형상화 한 것이다. 윤두서와 조영석이 이룬 풍속화의 전통은 조선 후기의 김홍도와 신윤복을 비롯한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사실성, 묘사의 현장성, 그리고 당시의 풍물에
나타난 시대성을 뛰어난 조형예술로 성취해 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윤진영 著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중에서
<짚신삼기>
윤두서, 18세기, 모시에 수묵, 34.2×21.1cm, 개인 소장
어느 여름날, 그늘을 드리운 나무 아래에 한 남성이 짚신 삼기에 열중해 있다.
짚더미를 깔고 앉아 두 다리를 뻗고서 양 발가락 끝에 새끼줄을 걸었다.
이렇게 새끼 네 줄로 날을 삼아 엮어 가면 짚신이 완성된다.
1920년대 고무신이 생산되기 이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짚신을 신었다.
인물 주위에 간략한 배경이 들어가 있다. 그림 위쪽에 튼실한 둥치를 드러낸 나무, 언덕과 배경의 경계선, 아래쪽의
패랭이 풀과 바위 등이 그것이다. <짚신삼기>는 조선 중기에 유행한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의 구도와 양식을
충실히 따른 그림이다. 상단에 절벽이나 나무가 배치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인물을 그려넣는 방식은, 윤두서가 평소
화보(畵譜)나 중국 그림을 통해 즐겨 그린 양식이다. 고상한 처사와 같은 인물이 그려지던 화폭에 <짚신삼기> 처럼
현실의 인물이 들어간 점은 분명 새로운 변화이다. 서민들의 일상을 친근하게 바라본 윤두서의 시선이
새로운 인물화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짚신삼기> 속의 인물을 다시 보자. 우선 윤두서의 뛰어난 인물 묘사와 사생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인물의 신체 비례와 동세가 매우 자연스럽다. 맨상투를 한 남성의 얼굴은 간결하면서도 세부 묘사가 정확하다.
작은 화면이지만 붓끝의 섬세함이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팔을 덛어 올린 상의, 무릎까지 내려온 잠뱅이는
먹선의 강약과 변화를 주어 그렸고, 팔과 다리 등의 신체는 담묵(淡墨)으로 그려 옷과 구분하였다.
남태응(南泰膺, 1687~1740)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윤두서를 평하길
"인물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면 꼭 종일토록 대상을 주목해서 그 진형(眞形)을 터득한 후에야 붓을 들었다." 라고 했다.
윤두서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인물 묘사는 수많은 습작을 통한 숙련의 과정이 가져다준 결과일 것이다.
윤두서의 <짚신삼기>는 현실 속 서민들의 모습을 화면에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조선 후기 풍속화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 그림이이며, 그 안에 양반의 입장에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보려는 따뜻한 신선이 담겨 있다. 이와같이 윤두서의
풍속화에는 대상을 직시하는 감성과 이를 객관적으로 그리고자 한 사실주의적 회화관이 성공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후 김홍도와 김득신 등이 그 전통을 이어서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의 절정기를 다시 한 번 꽃피울 수 있었다.
<짚산삼기>, 《긍재전신화첩》중
김득신, 18세기 말~19세기 초, 22.4×27cm, 간송미술관
이 그림에 이르면, '짚신삼기'는 완전한 현실 속의 한 장면으로 바뀐다.
윤두서의 설정식 배경 구성은 찾아볼 수 없다. 더욱 현실감이 뚜렸한 생활공간을 배경으로 하였다.
사립문과 울타리를 등진 사내는 광대뼈가 불거졌고, 양팔에는 거친 근육이 두드러져 있다.
상반신의 채색도 부분적으로 짙고 옅게 조절하여 생동감을 더했다.
왼편 노인이 손자의 응석을 받으며, 아들의 손놀림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삼대가 함께 등장한 것이다.
어제를 살았던 노인과 내일을 살아야 할 어린아이 앞에 놓인 엄정한 현실을 짚신짜기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읽힌다.
함께 그린 검둥이는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더위가 한창인 여름날의 한때임을 알려준다.
노인의 뒤로는 논에 모가 가득 심겼고, 사립문 위에는 호박이 영글었다. 안쪽으로는 항아리도 보인다.
소박한 서민의 공간임이 한층 더 다가오는 것이다. 짚신은 짚 공예품 가운데 가장 정교하며, 대중적이고, 서민적이며,
실용적인 신발이다. 주로 겨울에 짚신을 삼지만 그림 속의 상황은 활동량이 많은 농번기를 이용하는 모습이다.
막걸리가 담겨있음직한 주병과 주발, 노인의 담뱃대 등의 소품도 그림의 흥취를 더하는 요소이다.
척박한 시대를 거친 노동으로 헤쳐온 평민 가장의 모습에 촛점이 맞춰져 있음을 본다.
<석공(石工)>
윤두서, 18세기, 비단에 담채, 22.8×15.4cm, 국립중앙박물관
두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극적으로 살려낸 공재(恭齋)의 소묘 수준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바위에 구멍을 내기 위해 해머질을 하는 모습으로 두 사람의 역할과 상황에 따른 표정을 잘 살린 작품이다.이 그림은 영,정조 시절 어의를 지냈던 수집가 석농(石農)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에 포함되어 있다.
右石工攻石圖 乃恭齋戱墨 而俗所謂俗畵也 頗得形似 視諸觀我齋猶遜一籌
위 <석공>은 영,정조 시절 어의를 지냈던 석농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에 포함되어 있다.
근자에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이나니...." 라는 말은 위 그림의 소장자 석농의 소장품을 일별한 문인 유한준(1732~1811)이 밝힌 소회라고.
<석공> (부분)
기계나 장비가 없던 조선시대에 돌을 다루는 것은 가장 힘든 노동 중의 하나였다.석공은 신분이 낮지만, 경험이 많고 기량이 뛰어날 경우에 전문 기술자로 대우를 받았다. 이 그림에서의 작업 내용은 석재로 쓸 돌을 바위에서 떠내는 작업이다. 바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 그 구멍에 나무를 박아 물을 부어두면, 나무가 팽창하여 바위에 금이 가고 결국은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정을 대고 있는 석공의 양발 사이와 왼쪽 발 옆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나 있음을 볼 수 있다.바위 전체에 모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볼 수 있다. 돌을 깨는 게 아니라 구멍을 뚫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의 왼편 사선 방향으로 드리워진 바위는 조선 중기의 소경산수인물화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이다.<석공>에서 사람을 제외하고 배경만을 본다면, 고사(故事) 인물이 등장하는 조선 중기 그림의 배경 설정과 흡사하다.
그림 위쪽의 바위는 먹을 살짝 강하게 쓰면서 흑백의 대비를 준 것으로 절파화풍(浙派畵風)에 가깝다.반면에 아래쪽의 바위는 농담을 준 뒤 점묘로 처리한 새로운 양식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반영하여 그렸다.
<석공>은 배경 표현의 관념적 요소와 인물의 현실적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조합된 형식을 보여 준다.
<석공>
강희언, 18세기, 종이에 수묵, 22.8×15.5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에 활동한 중인화가 강희언(姜熙彦, 1738~1784 이전)이 윤두서의 <석공>을 똑같이 베껴 그린 또 한점의 <석공>이다.
아마도 원본의 형태를 정확히 옮긴 밑그림을 두고서 그린 듯하다. 그림의 크기도 거의 같다.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베껴 그린 그림을 '임모화(臨模畵)라 한다. 비단 옆에 "담졸(淡拙)이 공재(恭齋)의 석공공석도를 학습하다(淡拙學恭齋石工攻石圖)" 라는 부제가 적혀 있다.강희언이 선배 화가의 그림을 얼마나 철저하게 학습하고 익혔는가를 잘 보여 준다.
그림의 형태와 필치는 윤두서의 그림과 큰 차이가 없다. 인체와 옷을 그린 선묘는 농담의 차이를 두어 구분하였는데,인물화에 대한 강희언의 세련된 감각과 회화적 기량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치밀하고 사실적인 필치는 이러한 풍속화로도 호환 될 수 있을 만큼 폭넓은 기량의 세계를 보여 준다. 담졸 강희언의 그림 또한 이에 못지않은 철저한 모방과 학습을 통해 화법을 터득해 갔음을 엿볼 수 있다.
<나물캐기>
윤두서, 18세기, 비단에 담채, 30.2×25.0cm, 개인 소장
비탈에서 나물을 캐는 두 여인의 모습이다.바구니를 손에 든 여인은 뭔가를 발견한 듯 허리르 굽히는 순간이고, 다른 한 여인은 지나온 뒤를 살피고 있다.정황으로 보아 그림 속 계절은 아마도 초봄인 듯하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저고리는 당시의 스타일인 듯 길이가 길다.속바지를 입었기에 치마를 덛어올려 활동하기에 편하도록 했다. 신발은 윤곽만 그렸는데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다.
비탈진 언덕에 풀과 돌맹이들을 간략히 그려 이곳이 산비탈임을 표현했다.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화가는 여인들의 뒤를밟으며 행동거지를 살피고 관찰해야 한다. 양반으로서는 지극히 품위가 손상되는 행위이지만, 공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두 여인의 뒤편으로는 멀리 높이 솟은 산봉우리는 담묵(淡墨)으로 그렸다.
허리를 편 여인의 뒤쪽은 봉우리가 높고, 구부린 여인 쪽은 낮은 능선과 상응하도록 배경을 설정했다.두 여인의 모습은 담묵으로 처리한 배경 안에 가두어져 있어 시선이 더욱 집중 되도록 했다. 인물을 그릴 때 그 배경을 처리하는 것이 화가들의 고민이다. 그리지 않으면 허전하고, 너무 자세히 그리면 인물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
<나물캐기>에서 두 여인을 그리기 위해 실제로 여인들을 이렇게 멈추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렇다고 한 순간에 즉흥적으로 이렇게 그리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썼을까?여인들의 다양한 동작을 관찰하면서 속필로 그려 내는 많은 분량의 스케치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간략히 특징을 잡은 스케치본들을 재구성하여 완성본을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화상을 비롯한 산수와 풍속 등 다방면의 화제에 뒤어난 명작들을 남긴 공재는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물 캐는 아낙>
윤용, 18세기, 종이에 담채, 27.6×21.2cm, 간송미술관
윤두서의 손자 윤용(尹榕,1708~1740)이 그린 <나물 캐는 여인>이다.할아버지 윤두서와 아버지 윤덕희로부터 재능과 가업을 이어받아 사대부 화가로 성장했다.헌데 불과 3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그림에서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돌아선 한 여인이 등장한다.머리에 수건을 동였고 치마는 들어올려 묶었으며, 속바지도 무릎 아래에서 동여맸다. 나물을 캐기 위해 바구니와 호미까지 준비를 갖춘 모습이다. 짚신을 신은 여인의 종아리는 생활력 강한서민 여성의 이미지가 분명한다. 그림 오른쪽에 '군열(君悅)'이라 새긴 도장을 찍었다.
남태웅의 화론서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25세(1732)의 윤용을 두고"재주가 빼어나 앞으로 나아감을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다만 그 성공이 어떨지를 지켜볼 뿐이다." 라고 했다.윤용의 타고난 재능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30대 초반까지 추구한 다방면의 노력은 산수와 풍속, 초충, 화조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윤두서의 <나물캐기>와 윤용의 <나물 캐는 아낙>은 조선시대 서민 여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목기깎기>
윤두서, 18세기, 종이에 수묵, 25.ㅐ×21.0cm, 개인 소장
공재는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은 화가였다. 물건을 제작하는 공구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화면을 구성했다.오른쪽 상단에 "공재 언(彦)이 장난삼아 선차도를 그렸다(恭齋彦製作旋車圖)" 라고 썼다.'장난삼아'라는 말은 겸손의 표현으로 잃힌다. 선차(旋車)는 회전축을 돌려 목재를 깎을 수 있도록 만든 그림 속 공구의 이름이다.
한 사람은 함지박을 장창한 회전축에 피대를 감아 발로 작동시키고, 또 한 사람은 긴 칼날을 대어 회전하는 목기를 깎고 있다. 두 사람의 협업이 중요하다. 그 아래에는 이미 가공한 크고 작은 목기들이 놓여 있다.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는 배경은 그리지않았고, 흥미로운 공구의 작동 원리르 보여 주는 데 초점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두 남자의 옷차림이다.조선 후기 다른 풍속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옷차림새와 차이가 있다. 특히 피대를 돌리는 사람이 머리에 쓴 모자와저고리 옆트임은 어딘가 모르게 이색적이다. 윤두서의 <목기깎기>는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에서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린 것인지, 아니면 중국본 도안을 옮겨 그린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인물 묘사의 현실성보다 기계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보여 주는더 일차적인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윤두서의 행장에 "공은 제가(諸家)의 서적을 연구하되, 다만 문자만 강구하여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천박한 학문의자료로 삼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반드시 정확한 연구와 조사를 하여 옛 사람의 입언(立言)의 뜻을 파악하여 스스로의몸으로 체득하고 실사(實事)에 비추어 증험했다" 라고 적혀 있다. 윤두서의 공장(工匠)에 대한 관심과 실증적인 학문태도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러한 윤두서의 태도에 비추어 본다면, <목기깎기>는 중국 서적류의 도안을 참고하여 공구에 대한 매우 면밀한 검토를 거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목기깎기>, 《사제첩(麝臍帖)》 중
조영석, 18세기, 종이에 채색, 23.0×20.7cm, 기인 소장
풍속화 15점을 묶은 《사제첩(麝臍帖)》이라는 화첩에 실려 있다.풍속화가로서의 공재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그림들로 윤두서의 그림과 유사한 면이 많다.그림의 소재나, 공구, 인물의 배치 등이 그렇다. 조영석은 윤두서보다 나이가 열여덟 살이나 적다.따라서 조영석의 <목기깎기>는 윤두서의 그림보다 뒷 시기에 그렸으리라 짐작되지만, 두 그림 사이의 연관성이나영향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는 단서는 찾을 수 없다.
여기 등장하는 두 인물은 바닥에 앉아 공구르 사이에 두고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이다.두 사람 모두 작업에 집중하고자 윗옷을 벗어 나무에 걸쳤다. 피부색은 햇빛에 그을린 듯 옅은 갈색으로 채색하여 실재감을 높였다. 한 사람이 나무축에 감은 피대를 교차하여 당기면 끌을 든 사람이 목기를가공한다. 칼날 끝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틀에 지탱하여 힘을 받고 있다. 깎여 나가는 부분을 정확히 살펴야 하므로 고개를 기울여 집중하고 있다. 공구의 구조와 사람의 동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각도로 구도를 잡았다.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 시점을 두어 공구의 구조와 작업 원리르 한눈에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했다.
윤두서와 조영석은 주로 공장인의 작업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던 공구의 발명과 사용에 관심이 컸다. 두 사람 모두 사대부 신분의 화가이고고증적인 학문 태도와 실학적인 정서를 지녔지만, 주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애정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그림일 것이다.
<말징박기>, 《사재첩》중
조영석, 18세기, 종이에 담채, 36.7×25.0cm, 국립중앙박물관
징은 거친 땅이나 돌맹이로부터 말발굽을 보호하기 위해 대는 U자형의 쇠붙이로 편자(片子)라고도 한다.편자를 장착하는 일은 오랜 경험과 숙련을 필요로 한다. 교체 시기와 적합성 여부를 잘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조영석의 <말징박기>는 사대부 화가로서 그의 관찰력과 소묘 능력은 화원 화가와 견주어손색이 없는 것이다. 앞 뒷다리를 교차시켜 묶은 뒤 끈을 나무에 매었다. 매우 생동감 있는 모습인 것이다.말의 몸통 가장자리와 다리 부분을 어둡게 처리하고 측백의 대비를 주어 입체감을 강조하였다.말 머리 부분을 비튼 각도나 목 근육 등을 매우 실감나게 표현 하였다. 사람 보다 말에 공력을 더 들인 그림이다.
평소 사물을 꼼꼼히 관찰하는 감각이 남달랐고 스케치 경험이 많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모자를 눌러쓴 사람은 고통스러워 하는 말을 나뭇가지로 어르고 있다. 편자를 박는 것 못지 않게 말을 진정시키는능력에도 기술이 필요 할 터. 징을 박으려는 사람이나 말을 어르는 사람 모두 진지한 표정이다.한 치의 실수라도 범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잘 살려낸 그림이다.
<말징박기>, 《단원풍속화첩》중
김홍도, 18ㅅ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누워 본 적이 없는 말을 눕이는 일도 쉽지 않았겠지만 발버둥치는 말의 네 다리를 모아서 동아줄로 묶었다.그리고 줄이 풀어지지 않도록 장대르 다리 사이에 가로질러 고정시킨 뒤 신속히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이다.
말의 목 부분 근육이 긴장되어 있고, 징을 박는 사람의 팔뚝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말 머리 부분과 갈기, 그리고 꼬리 부분을 매우 섬세히 그려 꿈틀거리는 말의 움직임과 화가의 소묘력을 강조하였다.그림 아래쪽에는 발굽에서 떼어 낸 부러진 편자가 보인다. 비교적 단조로운 X자 구도를 취했지만, 움직이는 말과 이를 제지하며 작업하는 인물의 동세가 매우 자연스럽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지닌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역동적인 화면 구성이다.
위 두 그림 모두 배경을 쓰지 않았다. 조영석의 그림에는 말을 달래 가며 편자를 박지만, 김홍도의 그림에는 힘으로 말을 제압한 상태이다. 조영석은 사대부 화가로는 드물게 동물을 그리는 사생력에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김홍도 역시 소묘력은 물론, 인물 묘사에 있어 박진감 있는 구성과 사실적인 묘사력을 잘 나타내었다.
이 두 점의 <말징박기>는 조영석이 이룬 풍속화의 전통을 다음 세대의 김홍도가 계승해 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일 것이다. 말발굽에 편자를 붙이는 기술은 숙련된 장이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었는데.지금도 편자를 박는 일은 마제사(馬蹄師)라는 전문직 기술자가 맡아서 하고 있다.
<바느질>, 《사재첩》중조영석, 18세기, 종이에 담채, 134.5×64.0cm, 개인 소장
세 여인이 바느질과 마름질에 열중하는 일상의 모습을 그렸다.배경을 그리지 않아 실내인지 바깥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장감 보다 인물 자체에 중점ㅇ르 두었다.사대부 화가의 고사하고 아취 있는 그림이 아니라 평민 여성들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관찰해야 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사대부 화가가 선택한 그림의 소재로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터.
조영석의 풍속화첩인 《사제첩(麝臍帖)》중 첫 번째 그림으로 화첩의 제목인 '사제(麝臍)'는'사향노루 배꼽'이라는 뜻이다. 사향노루의 배꼽이 진한 향기를 내듯이 은밀하게 감추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제첩(麝臍帖)
조영석을 조선후기 서민 풍속화의 선구로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사제첩(麝臍帖)》이다.이 화첩에는 모두 15점의 풍속화가 들어가 있다. 미완성인 그림도 있고, 스케치풍으로 간략히 그린 것도 있다.
표지 좌측 상단에 '麝臍(사제)'라는 두 글자를 썼고, 그 오른쪽에는 "남에게 (이 화첩을) 보이지 마라, 이를 범한 자는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라는 경고성 문장을 조영석이 직접 써 넣었다. 자신이 그린 풍속화는세상에 드러낼 만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했던 듯. 후손들의 입장에서도 이 화첩의 공개 여부에 관해 상당히 고민이 깊었으리라.
<바느질>, (부분)
꿰메고 접고, 가위질하는 여성들의 일상생활 속의 한 장면이다. 여인의 자세 또한 쪼그려 앉고, 무릎 꿇고, 한 다리를 뻗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집안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야만 그릴 수 있으리라.예컨데 여성들의 손을 보면, 손가락의 위치와 형태까지 세심히 관찰하여 그렸다. <사제첩>에 실린 대부분의 그림들이 그렇듯 배경을 그리지 않았다. 배경을 번잡하게 여긴 듯 오직 인물 자체에만 초점을 두어 그렸다.
두터운 한지에 유탄(柳炭)이나 먹선으로 스케치를 한 뒤에 그렸다. 상당한 소묘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특히 가운데에 앉은 여인의 왼 손은 종이를 새로 붙여 틀린 곳을 고쳐 그렸다. 조영석의 치밀하고 세심한 일면을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조영석의 풍속화에는 언제나 현실 속의 인물이 있다. 관념 속의 인물, 화보 속의 사람이 아니다.관심과 애정이 녹아 있는 시선은 서민들을 향해 열려 있었다.
강세황이 정선의 그림을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 했다면,이덕무는 조영석의 그림을 '동국풍속(東國風俗)'이라 하였다.
조선후기 풍속화에서 사대부화가 조영석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점심>, 《사제첩》중
조영석, 18세기, 종이에 담채, 20.0×24.5cm, 개인 소장
그림 오른쪽에 갓을 쓴 양반도 자리를 합께했다. 아마도 경작지의 지주인 듯한 인물이 양반 자세로 편히 앉아 간소한 음식을 먹고 있다. 그 왼편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와 등을 보인 사람의 동세가 매우 자연스럽다. 그림 중간 즈음에는 아낙이 그릇에 밥을 담고 있다. 그 앞에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앉은 남자의 자세는 좀 어색하지만 사생(寫生)의 분위기가 역력하다.
조영석의 <점심>에 나타난 인물 묘사에 기교를 부린 화법은 드러나 있지 않다.다만 개별 인물의 묘사가 번잡하지 않고 간결한 스케치풍을 띄고 있다. 눈으로 관찰한 것이 그가 지닌 소묘의 역량만큼 화면 위에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점심>, 《단원풍속화첩》중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위 조영석의 그림과 비교할 김홍도의 <점심> 역시
일손을 멈춘 남자들이 더위를 식히며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김홍도의 시선은 화면 속의 공간을 장악하면서 사람들 가까이로 다가가 있다.
마치 사다리 위에 올라 이들을 바라보고 그린 듯 사람들의 다양한 움직임을 화폭에 담았다.
윗옷을 입은 사람, 걸친 사람, 벗은 사람 등 다양하지만 중복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밥그릇의 크기에 비해 찬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심이다.
광주리에 음식을 담아온 아낙은 어린아이에 젖을 물렸고, 따라온 꼬마 아이도 자기 몫을 부지런히 먹고 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흑구의 모습이 처연하다.
<점심>, (부분), 《풍속도병》중
김득신, 1815년, 94.7×35.4cm, 삼성미술관 리움
김홍도의 <점심>과 비슷한 장면은 김득신의 <점심>에서도 볼 수 있다.김득신은 김홍도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한 후배 화가이다. 그림 속의 사황은 일손을 멈추고, 점심을 먹기 위해 야트막한 언덕에 모여 앉은 장면이다.농가의 생활 장면을 그린 8폭 병풍 가운데 한 폭에 해당한다. 인물의 구성은 김홍도의 <점심>과 매우 흡사하다.밥과 찬을 가져온 아낙이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도 김홍도의 그림에 나왔던 모습이다.
입골 명의 남성들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다. 왼편 가장자리 쪽에 앉은 한 남성은 사발에 술을 따른다. 그 순간 옆쪽에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이 그곳을 향한다.한 남자는 뒤돌아 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고개를 돌려 술병을 주시한다.밥을 먹고 있지만, 웬지 온 신경이 술병에 가 있는 듯하다. 김득신이 김홍도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다양하고 정확한 인물 묘사와 자연스러운 화면 구성에서 확인되는 셈이다.
<서당>, 《단원풍속화첩》중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이전에 서당을 그린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조선 초기에는 대부분 가정에서 한문 해독을 비롯한 초등교육이 이루어졌지만, 17세기 부터 본격적으로 서당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후 농업 생산물의 증가로 평민층에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대부분 교육에 대한 수요로 이어져 서당의 확산을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18~19세기에는 동족(同族) 마을을 단위로 한 서당의 설립이 가속화되기도 하였다.
그림을 보면, 이 서당의 아이들은 책상이 없이 모두 바닥에 책을 놓고 공부하고 있다.형편이 넉넉치 않아서일까. 그런데 아이들은 책만 놓고 있을 뿐 종이와 붓, 벼루와 먹 등은 보이지 않는다.아마도 이날은 책을 읽고 암송하는 강독 수업을 하는 날인 것 같다. 그런데 이 그림 속의 장면은 어떤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훈장님의 말에 돌아 앉아 발목의 대님을 풀고 있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아이는 무언가 억울한 심정과 창피함 때문인지 눈물을 훔치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종아리를 맞은 뒤가 아니라 맞기 직전의 상황으로 보인다. 종아리를 맞았다면 굳이 이 자리에 앉아서 대님을 묶을 리가 없다.
이번에는 곤경에 처한 친구들 바라보는 학동들의 모습을 살펴보자.오른쪽 열의 맨 위쪽에 갓을 쓴 아이는 장가를 간 양반집 아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입을 벌리고 호탕하게 웃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아래쪽의 아이는 표정이 영민해 보인다.귀 뒤로 머리를 빗어 넘긴 모습도 매우 단정하다. 웃음보다는 약간 측은한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의 세 번재 아이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체벌을 받아야 하는 친구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는 순박한 표정이다.
그런데 그 아래쪽 학동은 표정이 약간 다르다. 눈동자가 동그랗고 입을 약간 벌리고 있다. 무언가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다.분명 화가의 의도가 들어간 표정 묘사일 것이다. 아마도 눈물을 닦고 있는 아이 다음번에 나가서 숙제 검사를 받아야 할 아이가 아닌가 싶다.그래서 무언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이 학동들은 매우 정교하거나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간략한 필치로 쓱쓱 그려나간 그림인데 인물의 표정 묘사가 매우 자연스럽다.
<서당> (부분)
화면 왼편 위쪽에 앉은 세 아이들은 표정이 밝다. 강독 준비를 충실히 했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로 보인다.친구가 종아리를 맞게 되는 와중에도 책장을 넘기며 책을 보고 있다. 가장 마지막에 앉은 아이는 웃음이 나지만 입을 가리고 있다. 철없는 서당 아이들의 모습은 김홍도의 붓끝을 통해 맑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되살아나 있다.
이번에는 훈장님을 보자.사방건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과 가깝다.가는 실눈에 눈썹이 여덟 팔 자 모양이다. 눈물을 닦는 아이는 팔자 눈썹이 어울리지만, 훈장님은 왜팔자 눈썹을 하고 있을까. 아이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심정을 팔자 눈썹으로 표현한 듯.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엄격히 가르치겠다는 훈장님의 깊은 애정이 그림 속의 표정에 담겨 있는 듯하다.
조선 후기 부모들의 교육열은 어땠을까. 이 시기에는 서민들의 자녀도 공부를 잘 하면 과거 시험을 보고관료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서민층의 아이들은 양반가의 아이들처럼 오랜 시간 공부에 전념하기가 어려웠다. 농사일 등 집안의 노동력에 힘을 보태야 했기 때문이다.
<자리짜기>, 《단원풍속화첩》중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평민 가정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길쌈을 하는 가정의 일상 장면이다. 그런데 더벅머리를 한 이 집안의 아이는 기특하게도 뒷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평민 집안의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 시험도 보고,관료로 나아갈 수 있었던 시대, 그 시대가 바로 18세기 후반기 김홍도의 풍속화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김홍도의 <서당>에 담긴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점 하나는 암송의 중요성이다.동 서양 할 것 없이 옛 교육은 배운 것을 모조리 암송할 수 있어야 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으리라.
<씨름>, 《단원풍속화첩》중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구경꾼들의 시선이 집중된 공간의 중심에 두 남성이 힘을 겨루고 있다.곧 승부가 날 듯 극적인 움직임이 감지된다. 입을 벌려 탄성을 지르는 구경꾼들의 표정에 순간 긴장감이 감돈다.관중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한 곳이지만, 그들의 표정과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
약간 높은 곳에서 부감하는 시점으로20명이나 되는 관중들을 이 작은 화면 안에 모두 들어오게 했다. 또한 승부를 겨루는 두 남성과 구경꾼들이 겹쳐 보이지않도록 구도를 잡았다. 구경꾼들을 보면 같은 포즈를 취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김홍도의 치밀한 화면 구성이 돋보인다.
등을 보이는 사람이 승기를 잡은 듯하다. 씨름에서의 배지기 기술이 적용되는 순간이리라.상대도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찌푸린 미간과 당혹스러운 눈망울 표정에서 승부가 예측되는데.
그런데 왜 오른쪽 아래에 앉은 두 사람은 탄성을 지르며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일까? 등을 보이는 사람이 취한 역동작 때문이다. 이렇게 한쪽 다리를 들어올린 채 오른쪽으로 넘기려는 동작을 취하다가순간적으로 왼쪽으로 돌아서면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게 되어 승부를 내기가 쉬워진다.
그림 오른편에 시합중인 두 사람이 벗어놓은 신발이 보인다. 하나는 짚신이고 하나는 가죽신인 듯하다.두 사람 모두 버선을 신었다. 전문 선수가 아니라는 징표다. 전문이라면 상의와 버선을 신었을리 없다.
승부가 결정날 찰라에 관중 모두의 시선이 두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바로 엿장수이다.화면 밖을 향한 시선에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다. 그림의 바깥쪽에도 구경꾼들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엿 파는 아이는 그림 속 구경꾼들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장사를 하고 있다.
<씨름> (부분)
인물 묘사에는 굴곡이 별로 없고 짧고 단조로운 선묘를 썼다.선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화가는 몸의 윤곽과 옷 주름,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을 그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얼굴의 이목구비는 대부분 진한 먹으로 처리하여 포인트를 주었고, 그 나머지 부분은 옅은 먹선을 사용했다.그래서 감상자의 시선이 구경꾼들의 얼굴 표정에 먼저 가도록 했다. 치밀하면서도 세부에 국한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짚어내는 감각적인 필치가 김홍도의 역량을 말해준다.
이 그림에서의 씨름 형태는 분명한 오른씨름이다. 오늘날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왼씨름이 결코 아닌 것이다.내 어릴적 횃불 아래, 지역 장사들이 황소를 걸고 겨루던 씨름은 분명 오른씨름이었다.나 역시도 소년부에 출전, 공책 따위의 상품을 받기도 하였던 기억.
헌데 어찌해서 오늘날의 씨름은 모두가 왼씨름 일색으로 바뀌었을까.?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씨름> (부분)
씨름에는 계층도 필요 없고, 승부에 심판이 없어도 구경하고 참여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장소가 꼭 모래 사장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심판이 되었던
평민들의 최상급 여가(餘暇) 문화가 바로 씨름이었던 것이다.
<대장간>, 《단원풍속화첩》중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불과 얼마 전까지, 최소한 면 단위마다 꼭 하나 이상의 대장간이 존재 했었다.그만큼 기성세대에겐 익숙한 존재가 바로 대장간이다.
두 사람이 쥐고 있는 망치의 위치가 대칭을 이루는 '八'자 모양을 하고 있다.이는 시간 차에 따라 두 사람의 호흡이 일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등장 인물은 모두 5인. 그중 세 사람은 흙으로 쌓아 올린 화로 옆에서 쇠를 담금질하고 있다.한 사람은 화로에서 꺼낸 쇠붙이를 모루에 얹어 집게로 고정시켰고, 나머지 두 사람은 망치로 내려쳐 담금질을 하고 있다.화로 옆 풀무질을 하는 어린 소년은 풀무를 발로 밟으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손잡이를 붙잡은 모습. 낫을 숫돌에 갈고 있는 떠꺼머리 소년의 모습도 보인다. 대장장이들은 긴 옷과 긴 소매의 옷을 헐렁하게 입었다. 머리에는 땀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깔 모양으로 천을 감았다.
<대장간>, 《긍재전신화첩》중
김득신, 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담채, 22.4×27.0cm, 간송미술관
김홍도의 화법을 익힌 직업화가 김득신(金得臣)도 대장간을 소재로 한 그림을 남겼다.김홍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다만 김득신의 <대장간>에는 간략하나마 처마 지붕의 일부를 비롯한 배경이 그려져 있다.
윗옷을 벗고서 등을 보이는 대장장이의 피부색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인물 표현에서 선묘는김홍도 보다 다소 가늘고 날렵하지만, 화면의 구성에는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과 유사한 면이 많다.
집게로 쇳덩이를 쥐고 있는 사람은 이 그림을 보는 감상자의 시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감상의 재미를 더해주는 화가의 독특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빨래터>, 《단원풍속화첩》중김홍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속의 두 여인은 치마와 속바지를 걷어올린 채 쪼그리고 앉아 방망이질을 하고 있다.방망이질에 힘을 쏟으면서도 여유 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팔과 다리의 살색에는 약간의 음영을 주어 매끈한 피부의 색감을 표현했다.
<빨래터> 속의 공간은 넓적한 돌과 바위가 이써 옷을 빨아 널어놓기에 적절한 곳이다.그림 위쪽의 아낙은 머리를 감은 뒤 손질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달라 붙어 젖을 달라고 보채는 중이다.
그림 오른편 큰 바위 뒤에는 얼굴을 부채로 가린 선비가 여인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
막연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선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을 보려고 체면을 무릅쓰고 이런 품위 없는 행동을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인들만의 은밀한 공간을 엿 보고자 한 것일 텐데, 사실 볼 수 있는 건 빨래하는 여인들의허벅지 정도이다.
아낙들이 이 남자를 알아채지 못한 상황이 오히려 화면에 미묘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빨래터>, 《혜원전신첩》중
신윤복, 18세기, 종이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빨래터>에도 한 명의 남성이 등장한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은 당당하게 빨래터 옆길을 지나가고 있다. 더욱이 고개를 돌려 여인들에게로 시선을 향하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김홍도의 <빨래터>에서 바위 뒤에 모습을 감춘 선비와는 대조적이다.
신윤복의 <빨래터>에 나오는 세 여인은 모두 연배가 다르다.뒷편 빨래를 펴고 있는 여인은 어깨가 약간 굽었고, 나이가 가장 들어 보인다.그 다음은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여인이다. 누가 보던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빨래에 집중해 있는 모습이다.그 뒤쪽에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이 가장 젊어 보인다.
그렇다면 활을 든 사내는 고개를 돌려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정황상으로는 머리를 단장하는 젊은 여성이겠지만, 시선의 방향을 따라가 보면 나이 많은 여인을 향해 있다.여인의 상반신이 드러나 있어 선비가 약간 당황한 듯 시선을 거두거 있는 장면처럼 보인다.
신윤복의 그림이 김홍도의 <빨래터> 보다 에로티시즘의 강도가 조금 더 강한 듯 하다.'빨래터'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신윤복 같은 빨래터를 그리면서도 장면의 설정이 과감하고 개방적인 시각을 지녔다.김홍도가 절벽을 배경으로 하여 은폐된 공간을 그렸다면, 신윤복은 개방된 트인 공간을 선택했다.김홍도의 <빨래터>가 여성만의 공간이라면, 신윤복의 <빨래터>는 남성도 포용하는 공간으로 읽힌다.
풍속화에 담긴 서민시대이 군상(群像)들은 평민 여성의 일상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단오풍정(端午風情)>, 《혜원전신첩》중신윤복, 18세기, 종이에 채색, 35.6×28.2cm, 간송미술관
그림 속의 공간은 접근이 차단된 실내가 아니라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야외의 계곡이다.한쪽으로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고목이 드리운 그늘 아래로는 맑은 시내가 흐른다.오른편으로는 약간 경사진 언덕이 있어 한적한 휴식 공간으로 제격이다.
시냇가에는 과감히 상반신을 드러내어얼굴과 팔을 씻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반라(半裸)의 여인을 묘사한 이 그림은 약 250년 전 양반들에게도 파격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언덕에는 머리를 단장하는 여인들과 그네에 오르는 여인들이 보인다.이 그림이 '단오풍정(端午風情)으로 알려진 것은 그네를 타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풍속과의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오만이 아니라 늦은 봄이나 여름철이면 으레 야외로 나와 이 그림 속의 장면처럼 여유를 즐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누구일까?머리에 올린 가체와 속살을 드러낸 대범함으로 볼 때, 기녀로 추측된다. 양반집 부녀자들이 이렇게 대담한 모습으로 노출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들만의 일상 속에서 맞이하는 자유롭고 즐거운 한때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단오풍정>에서 여성들을 묘사한 신윤복의 필치는 매우 섬세하고 운치 있다.얼굴을 씻는 여성과 뒷모습을 보이며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 그리고 얼굴을 보이며 팔을 씻는 여성들의 피부색은그 차체로 백옥색이다. 신체를 그린 선묘는 모두 황갈색 선을 써서 부드러운 피부의 질감을 살렸다.
배경으로 그린 나무는 화면 상단을 모두 가리도록 설정하여 아늑한 느낌을 준다. 잡풀들은 짧은 필치로 그렸지만, 그림 전체에 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정감을 불어넣었다.은은한 녹색조의 담채는 여름날의 맑고 청초한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한다.
신윤복의 세련되면서도 감각적인 필치와 부드러운 감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배경 처리는 인물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고, 그림 전체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단오풍정> (부분)
그런데 이 그림 속에서도 시선을 끌며 긴장을 불어넣는 요소가 있다.그림 상단 왼편의 바위틈에 얼굴을 내민 동자승들이다. 여인들을 훔쳐보는 그림 속의 상황도 파격적이지만,그들이 동자승이라는 점이 해학과 풍자일 터이다. 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동자승을 보는 순간,자신도 그림 속의 동자승처럼 이 장면을 엿보고 있다는 생각이 일순간 스쳐갈 수 있기에 말이다.
그림 속의 기녀들은 동자승들의 은밀한 시선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만이 알게 되는 이러한 구성은 신윤복의 다른 풍속화에서도 접하게 되는 설정이다.오른편 상단에 앉은 여인은 가체를 풀어서 다시 매만지고 있다. 가체의 규모가 매우 크다.
신윤복의 그림은 여전히 유교 질서를 강조하던 조선 후기에 대단히 개방적인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었다.
<단오풍정> (부분)
그네 타는 여인의 저고리와 치마가 발산하는 노랑과 빨강의 강렬한 색감이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네에 오르는 여인의 우아한 동작과 복식의 색감이 맵시 또한 눈길을 끈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화면 안으로 들어온 여인은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주는 아낙네인 듯하다.
보자기 안의 내용물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밖으로 삐져나온 술병이 눈에 띈다.
목욕과 머리 손질하고 난 뒤에 술도 한잔 나누면서 모처럼만의 외출을 즐기려는 것일까?
<단오풍정>은 조선 후기 기녀들의 존재와 그녀들의 일상 속 모습을 단아하게 드러낸 그림이다.
신윤복은 선배 화가인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후기 풍속화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두 화가는 조선 후기의 다양한 사회상을 서로 다른 시각과 조형 세계로 조명하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신윤복은 도시 양반들의 여가와 풍류, 남녀 간에 감추어진 애정 관례 등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하여
현실감 나는 장면과 해학적 표현으로 담아내었다. 그러면서도 풍속화에만 치우치지 않고
산수화와 영모화(翎毛畵)에도 뛰어난 기량을 지닌 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대쾌도(大快圖)>
유숙, 1846년, 종이에 채색, 105×54.0cm, 서울대학교박물관
성벽 모퉁이 옆 공터에서 소년들이 씨름과 택견 경기를 펼치고 있다.군중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사방에 자리를 잡았다. 소년들의 민첩하고 현란한 힘겨루기는 관중들의 흥미를 끌었고,응원의 열기도 고조된 분위기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한 축제 한마당처럼 보이는 이 그림의 제목은'크게 유쾌한 그림'이라는 뜻의 <대쾌도>이다.
그림 왼편 상단에 “병오년 가지가지 꽃피는 계절, 격양세인이 태평한 세월에 그렸다(丙午萬花方暢時節 擊壤世人寫於康衢煙月).”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격양세인(擊壤世人)'이란 태평성대를 만나 땅을 발로 구르며 노니는 사람이요,또한 '강구연월(康衢煙月)'은 거리에서 달빛이 연무에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태평성대의 평화로운 풍경을 나타내는 뜻.
얕은 능선으로 화면을 구획한 공간에서 씨름과 택견을 겨루는 젊은이 두 쌍에 구경꾼들의 시선이 집중되지만,그림을 보는 감상자들은 구경꾼들에게서 오히려 재미난 부분들을 발견한다.
그림 아래 길모퉁이에서는 잔술을 파는 좌판이 자리잡았다. 장사하기 아주 좋은 길목이다.한 선비가 잔술을 마시려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순간, 장사치는 재빠르게 잔에 술을 채운다.그 뒤편에는 담뱃대를 쥐고서 술을 사려는 사람과 이를 만류하는 선비의 모습도 보인다.군중들 사이로 보이는 엿장수는 이제 막 장사를 시작했는지 엿판에 엿이 가지런하다.모두 현장에서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다.
<대쾌도(大快圖)> (부분)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도성의 성벽 모퉁이가 보이고, 그 위쪽에도 구경꾼들이 올라가 있다.<대쾌도>의 씨름 장면을 김홍도의 <씨름>과 비교해 보면, 구경꾼들의 설정과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군중들의 모습도 김홍도의 <씨름>에서 처럼 같은 생김새를 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치밀한 인물 배치와 빈틈없는 화면 구성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택견은 우리나라의 전통 무술로서 손과 발을 순간적으로 유연하고 민첩하게 움직여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이다.그 전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확인되듯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택견의 복장은 특별한 형식이 없고, 솜버선을 신은 버선발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년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쾌도(大快圖)> 작자 미상, 19세기, 종이에 담채, 150.3×42.0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유숙의 <대쾌도>에서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아마도 유숙의 '대쾌도'을 베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고.
그런데 이 그림은 세로가 더 길다. 따라서 그림 속 좌우 공간이 좁아지고, 멀리 보이는 원경의 공간은 더 넉넉히 들어가 있다.
서울대박물관 소장본에 없던 가마와 가마꾼, 그리고 기녀와 남정네들이 등장한다.
<석진단지(石珍斷指)>18세기, 종이와 채색, 21.7×14.7cm, 삼성미술관 리움
조선 초기의 효자 유석진(兪石珍), 1378~1439)의 일화를 담은 그림이다.효행과 감동의 교훈을 전하고자 그린 그림으로 그림 속 주인고인 석진이 행한 효행은 놀랍고 충격적이다.
병든 부친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들어 드려 아버지를 회생하게 한다는 내용이다.그림의 제목인 '서진단지(石珍斷指)'는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라는 뜻.
석진의 이야기는 세종 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의 <효자편>에 실려 있다.채색으로 그린 <석진단지>는 정조 21년(1797년)에 간행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 실린 판화 그림을붓으로 그린 뒤 채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