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2016. 8. 4
단기 4291년 3월 3일(1958년) 이내 생일날 찍은 사진.
잔뜩 볼이 부은 모습의 연유를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생일이랍시고 도령복을 입네, 마네로 기분이 상해 저 모양이 됐다나 뭐라나.... ㅎ
배경이 된 흙돌담 너머 초가집은 울산김씨 인촌家 사람들이었던 기억.
어머니(오른쪽)와 친구 어머니.
아마 내가 중고교 시절 쯤에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그 시절 우리 집은 예술인들과 선생님들로 늘상 복작댔었다.
하여, 그나마 시원찮은 공부와 성적에 토~~옹 진척(?)이 없었다는 사실. ㅎ
69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교내에 자리한'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서 급우들과 함께.
(좌측에서 두 번째)
구불거리는 말티재 너머 속리산 정이품송 근처였던 것 같은데...
고교시절 지리산 종주시 화엄골 눈썹바위에서.
멀리 왼편으로 섬진강과 구례 일대가 흐릿한 모습이다.
키슬링 배낭을 짊어지고 형제바위 왼편 끝 부분에 올라 선 내 모습.
바위 사면에 붙어 모진 생명을 이어가던 두 그루 소나무는 몇 년 전에 그만 고사하고 말았다.
그 시절엔 군용 탄띠와 대검 정는는 등산에 있어 거의 필수품이었다.
세석봉이라는 이정목이 생경하기만 하다.
오늘날 제석봉의 황폐한 모습과 한 번 비교해 보시라.
믿기 힘들겠지만 이게 바로 그 옛날 울창했던 제석봉 구상나무 수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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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 천왕봉을 지키던 '성모각'의 모습. (월간 '산'에서 발췌)
양철 지붕에다 벽 부분은 나무 판재를 둘렀고 돌담을 높이 쌓아올렸던 기억이다.
맨 처음 천왕봉을 오를때는 문이 잠겨있어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전혀 몰랐었다.
그도 그럴것이 도대체 산에 대한 정보라는 게 형편 무인지경이었던 시절인지라...
옛 시절 천왕봉을 지키던 아담한 정상 표지석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모습.
각자의 모자를 표지석 위에 얹고 만고천왕(萬古天王)의 황홀 지경에 빠졌던 기억이다.
후로 수 없이 천왕봉을 오르내렸지만 저 시절의 감동과 비견 될 수는 없었다.
삼대에 걸쳐 공덕을 쌓아야 행운을 잘을 수 있다고 했던가?
지리 종주의 대미 천왕봉 일출의 감격을 어이 필설로....
- 아래는 월간 '산'에 실린 '성모사상'에 관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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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됐다.
왕건의 지시로 천왕봉 아래 건립한 성모사가 그 대표적인 상징이고, 성모사에 만든 왕후의 석상은 위숙왕후의 모습이었다.
고려 조정은 왕건의 지시로 세운 성모사 내부에 제사를 전담하는 관리인 신관을 두었다고 전한다. 말을 탄 신관이 군위를
성모사를 지리산 정상 천왕봉 아래 두면서 고려 때부터 지리산 산신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천왕봉의 주신인 ‘성모(聖母)’와
먼저 성모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자. ‘성모’는 애초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가리켰지만 고려시대부터는 왕건의 어머니인
노고단의 마고할미 전승은 이어져
천왕봉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리산 산신의 중심이었던 노고단의 ‘노고’는 마고할미 산신으로 계속 전승된다. 하지만 고려시대는
지리산의 중심이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가고, 산신제도 노고단보다 국가에서 주례하는 천왕봉으로 더욱 중심이 쏠린다.
하지만 태초의 산신은 마고, 즉 노고라는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전문가도 이견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1>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실질적인 동이족과 한민족의 조상이자 1만2,000년 전에 세운 최초 국가의 건국주로 간주한다.
그 태초 마고도 <삼국유사>에서는 성모로 변신하기도 한다. 당시까지는 노고단이 지리산신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노고와
마고,성모는 혼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노고와 성모는 조금씩 구분되면서 서서히 천왕봉 계열의
산신과 노고단 계열의 산신의 두 계파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왕건의 지시로 건립한 성모사(聖母祠)는 천왕봉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모사에 가기 위한
가장 빠른 코스는 바로 백무동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백무동 거의 끝 지점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백무동(百巫洞)은
지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많은 무당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신라의 박혁거세와 고려 왕건의 어머니가 산신으로 변신한
성모사였으니 역술인이나무속인들에게도 가장 영험한 장소로 당연히 각광받았을 것이다. 자연 무속인들은 성모사에 가기
위해 백무동으로 몰렸고, 그 주변에 터전을 내렸다. 성모사에서 제사를 올릴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백무동으로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태을산신이 새롭게 등장
조선시대에는 이전과 같이 더 이상의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된 새로운 산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박혁거세와 왕건 같이 조선의 건국주 이성계도 비슷한 신비주의나 신성시하는 작업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상의 신격화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통한다.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 작업이 사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살아 있는 동안 또는 탄생 시에 이미 신비로운 징표를 지녔거나 그 같은 변신이 가능한
인물이라야 가능했다이성계는 사실 최영에게 발탁된 장군이었으며, 최영 장군의 그늘에 가려 있다가 어느 순간 최영
장군을 처형하고 왕이 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를 신격화하는 작업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최영 장군은 한국 최고의 산신으로 모셔진다는 점에서도 이성계와 비교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리산에 새로운 산신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역사서나 문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산신은 태을산신이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1481년 조선 성종의 명을 받아 노사신 등이 각 도의 지리·풍속 등을 기록한 관찬 지리지)에
‘태을이 (지리산) 위에 거하니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명찰명찰편에도 ‘지리산은 태을이 사는 곳으로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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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신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 들어 도교, 그리고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산신이 새롭게 태어난다.
유교에서 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고대 문헌에서 나타난 신으로, 흔히 상제(上帝) 혹은 천(天)으로 표현된
조선시대는 불교국가인 고려와 달리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성리학의 이념이 산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리산 산신에 대한 큰 틀은 시대에 따라 다소 바뀌기는 했지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설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태을성신을 포함한 여러 신선 거주설 등이 주된 지리산 산신이라는 사실.
왕건의 지시로 만들어진 성모사에 모셔진 지리산 산신의 성모석상은 일부 전문가들은 복장양식이나 스타일이 40대의 신라
여인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1,000여 년 이상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인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때로는 선도성모로,
때로는 위숙왕후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바로 한민족의식을 계승한 우리 조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두 자 높이의 이 석상은 마치 모진 풍파 속에서 시달려 온 한민족의 역정을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소박하면서 아담한 모습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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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지리산의 중심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바뀐다.
진주 과수원에 버려져 있던 석상을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두류산악회, 천왕사 세 단체 대표가 과수원 주인을 설득해 다시 천왕봉 인근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김임규 지리산국립공원관리소장은 “당시 돌려받은 성모석상은 공단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1983년 천왕사 혜범스님이 가져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천왕사 주지는 성모석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못하도록 천왕사에 아예 콘크리트로 접합해서 고정시켜버렸다.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공단과 두류산악회의 주장을 아예 무시하고 독점해 버린 것이다. 소송을 하기도 했으나
돌려받지 못하자 두류산악회에서 회원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산청 주민 500여 명의 지원을 받아 천왕사 맞은편에
모양은 비슷하게 크기는 훨씬 더 크게 해서 성모석상을 독립적으로 세워놓았다.
지난 1970년 장흥 보림사의 모습.
국보로 지정된 남북 석탑 상륜부도 오늘날의 모습관 판이하게 다름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보림사 석탑.
보림사 뒷편 가지산 정상에서...
9人의 Sophist 라 불리우던 '흙'회원들과 한라산 등반에 나선 모습.
한해(旱害)가 심했음에도 그 시절 백록담은 어지간 해서는 마르지 않았다.
백록담에서 수영하다 얼어죽을 뻔 했던 치기와 그 물로 밥을 지어먹은 기억도...
초임 발령지에서(맨 오른쪽).
손에 작은 카메라가 들려있다.
기종이 뭐였는지 기억 나진 않지만 암튼 늘상 카메라는 내 분신같은 존재였다.
돌아 보니, 내 생애 있어 순수한 열정과 패기가 가장 빛나던 시기였던 듯.
군에 가기 직전 쯤으로 보인다.
한 시절, 세고비아, 카르캇시 등 이런저런 음악 교본들이 이내 벗이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군 시절, 원주 섬강 유격장에서.
옛 시절 사진 몇 장을 발견.
사라지기 전 스캔하여 보관하는 게 상수일 듯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