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 선비교육 회초리 回 . 初 . 理 (3편)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여행
밥상머리 선비교육 회초리 回 . 初 . 理 (3편)
2016. 4. 1 ~ 2
이튿날 아침의 청백당
청백리 뱍수량 선생의 백비 견학
장성(長城) 출생으로 1513년(중종 8년) 진사, 1514년(중종 9년)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지평(持平)·헌납(獻納)·장령(掌令)· 사간(司諫)을 역임했다.
1534~5년 함경도 경차관(咸鏡道敬差官)이 되어 안원보 권관(安原堡權官) 전주남(全周男)이
야인(野人)들에게 결박당하여 소와 말을 주고 풀려난 사실을 감추고, 또 절도사도 보고하지
않은 죄상등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536년 노모의 봉양을 청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받았으나,
삼공(三公)이 '대간이나 시종이 될 만한 이에게 적절치 않다'고 부당성을 간하자,
모친을 모셔오도록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통정대부로 승진해 병조참지로 임명되었고
또 의항(蟻項) 공사의 찰리사를 맡아 수행하였다. 또 동부승지로 특진되고,
이듬해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맡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의주까지 동행하여 사신을 전송했다.
그 후 호조, 예조, 공조참판(參判), 한성판윤(判尹)을 지냈다.
1546년(명종 1)에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지중추부사·형조판서(判書)·우참찬(右參贊 : 1550년)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도총관(都摠管) 등을 겸직,
이듬 해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이 해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해 사임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에 전직되어 고향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1552년) 다시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후 왕명에 의해 찬성(贊成:종1품)으로 증직되었다.
주세붕과 깊이 교유하여 유림(儒林)간에 학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신중·치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관리 생활 30여 년 동안 남의 집을 빌어서 살았다.
40여년의 관리생활에서도 집 한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544년 사망시 명종이 형편이 어려워 운구할 형편이 되지않는다는 말을 듣고 관인들로 호송케하고
장사비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명종이 청백의 상징으로 백비(白碑)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현재까지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묘소에 아무 글씨도 없는 한국에서 유일한 백비(白碑)가 서있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조림왕 임종국이 일군 집념의 숲, 영혼의 숲
그 숲이 바로 사진에 보이는 축령산 편백림과 삼나무 숲이다.
고(故) 춘원(春園) 임종국 선생.
그가 가꾼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은 한국 최고 밀도를 자랑한다.
1㏊당(약 3,000평) 700~2,500 그루정도다. 나무의 평균 높이는 18m로 성인 키의 10배 이상.
수령도 대부분 30년을 넘는다. 2005년 말 기준 입목축적(단위면적당 산림 밀도)을 보면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축령산 언저리에서 나고 자란 숲해설사의 현장 강의.
출발에 앞선 몸풀기
코스 / 모암마을 ~ 추암마을.
생강나무꽃
임종국 선생은 장성군 덕진리 소재 인촌 김성수 선생의 산에 자라는
삼나무와 편백을 보고 성장의 가능성을 확인한 후 조림을 시작했다고.
.
임종국 선생의 장남 임지택씨의 증언.
68년, 극심한 가뭄으로 밭작물뿐만 아니라 그가 조림한 나무들이 전부 말라죽을 위기에 처했다. .
물지개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한 선생의 어깨는 피투성이였다. 보다 못한 가족들이 나섰고,
마을 주민들도 하나 둘씩 감동. 급기야 온 마을 주민들이 산으로 물을 져 나르기 시작했다고.
임지택씨 자신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물지개를 지고 산을 오르내렸음은 물론.
60년대 이후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원으로 임종국 선생의 조림․조경사업이 쏠쏠했다고.
하지만 정부에 납품하던 물량이 때때로 줄거나 없어지면 자금순환이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박 전 대통령은 재벌 몇 명을 불러 산림보전을 위해 조림지 일부를 매입하라고 권유했다.
재벌 몇 명은 장성 축령산 일대를 직접 현지답사하기도 했다. 일부는 이미 지분을 약간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결정이 난 후 최종적으로 청와대에 가서 보고하고 계약서만 받아오는 작업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운명은 선생을 외면하고 만다. 10. 26으로 박정희가 그만 불귀의 객이 돼버렸기 때문.
충격으로 인해 80년 결국 임종국 선생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이후 7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남긴 마지막 유언.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게 나라사랑하는 길이다.”
축령산을 내려와 이동한 곳은 광곡 마을의 '고봉학술원'
애일당 방문
칠송정에서의 담론.
월봉서원 앞 담장가의 명품 살구나무
월봉서원에 대하여...
강수당에서의 다담.
맨드라미차와 황국차
방문 기념으로 즉석에서 매화도를 그려주신 강금복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