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살롱 드 월봉
-제19회-
고품격 문화살롱 - salon de wolbong
● 주제 / 그릇 됨됨
강사 : 김치준 / 아리랑 공방 조형 연구소 대표)
연주 : 그레이스 앙상블
그레이스 앙상블
비로제떼 / 섬집아기 / 마이웨이 / 아리랑 변주곡 / 여인의 향기 / 차르다시(몬티)
세컨바이올린 : 신미지, 퍼스트 : 윤선웅, 피아노 : 김지현, 첼로 : 이유영, 비올라 : 김원준
앵콜연주
강의 / 도예가 김 치 준
'흥부 놀부 흙놀이'를 내 어법으로 풀어보겠다.
나는 흙의 재주부림을 원치 않는다. 자기 재주에 넘어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깎고 돋고의 정도에 그쳐야지 사람이 흙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은 반드시 폐해가 따른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평생 흙을 만져오면서 도달한 결론이다.
무등산 자락에서 그릇을 빚어온 만큼,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우는 무등산과,
또한 잠 자고 있는 땅에 대한 예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진도 사람이다. 진도의 정서 중의 하나가 '욕'이라 말 할 수 있다.
욕을 빼놓곤 얘기가 성립될 수 없기에 나는 그 욕을 무지 사랑합니다.
그 욕 중에서 내 어머니를 닮은 욕이 하나 있습니다.
거북스럽다고 느끼시는 분은 첫 마디에 빨리 귀를 막으시기 바랍니다.
"네~~ 니미 씨발노~~~옴"
나는 흙을 만지면서 어머니에 대한 禮가 아니면 흙을 빚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최대의 禮는 '나는 어머니 아들이오' 이다.
인간 못된 놈은 어머니 자궁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라는 이 시대의 '할'이라 보면 된다.
다시 태어나고 거듭 남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광주시 첨단단지를 조성할 무렵 그 일대 온갖 흙을 다 파서 만져보고, 맛보고, 구워보았다.
삼소동, 오룡동 일대에 가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가지고 나온 '오색토'가 나온다.
땅과 흙의 개념정리라고나 할까?
대지로 부터 한 줌 흙을 떼어낸 순간 그 흙은 내 어머니다.
땅 , 대지 = 어머니, 자궁으로 들어갔다 다시 태어 남.
이것이 바로 내가 흙을 주무르는 철학이다.
어머니로 부터 한 줌을 떼어낸 것. 초심을 생각 해보면 대지를 안아 줄 수 밖에 없다.지구의 한줌의 흙을 떼어낸다는 것은 뭔가를 만들기 위함이다.이 흙은 그냥 흙이 아니다. 전문가는 '가소성(점력)'을 따진다.
오색토의 점질위에 싹이 튼다.
천지자연의 조건이 갖춰진 곳에서만이 쌀이 자란다.
질팍한 곳, 햇빛과 폭우 속에서 흙의 기운과 작용으로 벼가 자라나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밸런스가 바탕이 된다. 토층과 지층을 일러 풍토라 한다.
작용과 갈망의 형상을 만들고 지우는 것,
어린이의 초롱한 눈망을의 차이를 보지 못하면 변화를 읽을 수 없다.
상선약수는 차이를 타고 흐를 뿐이다.
- 오색토에 삽질을 가하기 시작하는 강사. -
삽질을 하다보면 리듬이 생긴다.
온갖 소리를 듣는 사람, 즉 내재율을 듣게되면 행복하다.
하늘의 소리, 마이산 곁을 지날 때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올때,
내, 외부의 내재율을 듣는 사람, 율 속에 들어가면 통증까지도 잊게된다.
각기 다른 소리, 각기 다른 파장을 지닌 것을 합하는 것이 반죽이다.
한결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릇이 완성되는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통합의 과정이 반죽이라는 뜻이다.
여러 선생님들의 가르침 속에 온 몸으로 부딧칠 그 무엇을 찾다가
발견하고 안착한 것이 바로 도예의 세계였다.
이제부터는 '흥부와 놀부' 편으로 들어 가겠다.
이렇게 무거운 그릇을 빚을 때는 중력의 축을 자주 바꿔야 한다.
무겁기 때문에 항시 같은 패턴을 적용시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정체되지 않고 증폭되는 파장을 바꾸어 가는 것이 바로 운동이다.
오늘 날 그릇의 원형은 박이라는 생각이다.
땅에 씨앗 하나를 심었을 뿐인데 이렇게 튼실한 박이 열린것이다.
실겅 실겅 박을 타세~~
유기체 적으로 완성된 박을 절반으로 잘라 보자.
하지만 속 창아리를 빡빡 긁어내고 보니 아직 아무 쓸모가 없다.
흥부전에서의 '군선징악'의미는 너무 과장된 것이다.
그해서 이렇게 던져 깨뜨려버렸다.즉 자연으로 되돌린 것이다.
유기체로 완성된 생육성장의 의미를
조롱박과 함지박의 예를 통해 여러분께 보여드린 것이다. 장자의 '고분이통'도 같은 맥락이다. 흥부놀부를 통해 이시대를 열어나가는 시대적 사명감, 그릇 다움, 교육의 중요성 등을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그릇을 빚을 때 물레의 회전 속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집중력의 중요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도예에 필요한 여러가지 훈련과정을 거쳤고 심지어는 호흡수련 공부도 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처럼 나만의 흙의 성질을 나누는 기준이 있다.
점질과 사질의 정도에 따라 그릇의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굽이 없는 그릇은 상에 올리지 않는다.
굽이 없다는 것은 아직 땅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다.
땅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아직은 적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존엄을 높이는 형태가 바로 그릇의 굽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옹기도 아니고 도자기도 아닌 묘한 상태의 그릇들이다.
그냥 찻그릇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것은 유약이 아니고 흙물이다.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위해 손자국 조차도 그대로 남긴다.
살롱에 참석한 어린이에게
흙물을 덩벙기법으로 직접 적용시켜 보게 한다.
김치준 作 다관
김치준 作 완
이 얼마나 자연스런 조형의 세계인가?
자신이 빚은 순백색 백자와의 비교 설명.
미려함에 대하여...
질박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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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월봉' 사상 가장 긴 시간의 강의와 체험에 이르기까지.
도에가 김치준의 독특한 캐릭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대략난감.
며칠을 허비하고 나서야 그의 인물 됨됨이가 다소나마 정리된 느낌.
그는 전형적 진도인의 DNA를 지녔으며 달변을 눌변에 감춘 예술가 더라는 사실.
김치준은 심지굳은 도예가 였으며, 따뜻한 심성을 지닌 그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이어가는 그의 어투 또한 한없이 정겨웁기만.
하지만 강의 현장에선 다소 혼란스러웠다는게 이내 정확한 심중.
솔직히 말해서 그의 내심과 의중을 빨리 읽어내고 후다닥 정리할 수 없었기에 말이다.
요 며칠 그의 강의를 곱씹다 보니 그가 대단한 강의 고수였음을 점차 알게된다.
아무나 초저녁 부터 밤 열한시가 넘도록 수강생 모두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분명한 것은, 기나긴 시간의 강의를 마주했는데도 뭔가가 다소 미진한 느김.
그것은 인간 탐구 완성에 반드시 필요한 이른바 '곡차한담'이 빠졌기 때문일 터.
만남과 시간은 마련하라고 존재하는 것.
나만의 '살롱문화'에 다시 한 번 그를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