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탐매

신묘탐매(辛卯探梅) - 5

茶泉 2011. 3. 19. 21:09

 

           

신묘탐매(辛卯探梅)  제5편

        남녘매향은...

                                                                                                                                                                   2011. 3. 18

소치매(小癡梅)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사당을 지키는 매화

 

 

운림매(雲林梅)

 

운림산방 곁에 서 있다.

아직 꽃망울도 채 부풀지 않았다.

 

 

꽃이 피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운림산방 정면에 선 매화, 아직 고매는 아니다.

 

조선 후기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인소치(小痴) 허유(許由, 1808~1892)가 말년에 기거하며 작품을 제작했던 곳이다.
허유는 자를 마힐(摩詰), 호를 소치라 하였는데, 뒤에 연(鍊)으로 개명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付事)에 이르렀다.
진도 출생인 소치는 원래 화원체(畵阮體) 산수화로 출발했으나 다도(茶道)를 일으킨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천거로
31세 때부터 김정희에게 배우면서 조선시대 후기의 남종 문인화의 전통을 세웠다.

 

조선 중기의 학자요 도사였던 남사고(南師古)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은 물을 것도 없이 복된 땅이다(二水相合 不問福地)”라는 말에 따라 선택된 곳이라고 한다.
즉 여기는 계곡물이 양쪽에서 흘러내려 만나는 곳이다.
운림산방에는 소치가 손수 심어서 가꾸고 사랑하던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첫째는 일지매(一枝梅)요, 둘째는 백일홍이오, 셋째는 자목련이었다.
이 가운데 일지매는 해남 대흥사(대둔사)의 일지암(一枝庵)에 거주하고 있었던 스승 초의선사가 준 것을 소중히 옮겨
운림산방의 동남쪽 뜰에 심었던 것이다.
소치는 운림산방 주변의 여러 산봉우리와 계곡 또 마을 등에 그 자신이 지은 고유명사를 붙인 것이 19개소에 달했는데,
그 중 매화천(梅花泉)이란 것이 있다. 이 매화천은 “큰 매화 한 그루를 옮겨 심고 돌 연못에 물을 끌어 가두었다.
푸른 구름이 늘 물에 젖어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의 매화나무는 일지매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 일지매를 운림산방에 심은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소치가 운림산방을 건립했다는 말을 들은 초의선사가
그 준공에 맞추어서 선물로 준 것이라면 1856년에 심은 것으로 된다.
그리고 이 나무의 수령은 해방이 되던 1945년에 147년이었다고 하니 1856년에 수령 58년의 나무를 심은 것으로 확실시 된다.
이 매화나무의 이름을 왜 ‘일지매’라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초의선사가 거처했던 곳이 일지암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매화나무가 일지암의 뜰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혹은 일지암의 주인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일지매

 

일지매는 소치와 그 가족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힘차게 뻗어나 해마다 이른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 후 1892년에 소치가 타계한 다음 운림산방은 그의 넷째 아들 허형(許瀅)의 손을 거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관리되었으나
일본 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일지매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는 임순재(任順材)씨와 얽힌 사연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겪었던 불행과 관련된 사연이기도 하다.
임순재의 아버지인 호석(湖石) 임삼현(任三玹)은 16세 때(1889) 소치의 문하에 입문하여
소치의 유언에 따라 소치가 타계한 뒤에도 1914년 41세로 운림산방을 떠날 때까지 26년 간 운림산방을 관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운림산방으로 돌아온 일지매,

원래의 일지매는 진즉에 없어지고, 지금의 것은 본래의 일지매 후계목이다.

 

 

임순재도 1911년 운림산방에서 태어나 네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일지매가 일본 강점기 말기에
임순재의 정원으로 옮기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김문규라는 사람이 임순재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당시 운림산방을 매입하여 살고 있던 차(車)모씨의 말에 의하면
의신 주재소(지금의 경찰서·파출소)소장이었던 엔토(遠藤)라는 일본사람이 욕심을 내어 이 운림산방에 있던 일지매를

5원을 주고 사서 곧 일본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순재는 곧 일지매를 캐오기 위해 읍내에서 인부 30여명을 데리고 운림산방을 찾아와 차모 씨에게

주재소 소장이 준 5원의 배인 10원을 인부들 앞에서 건네주고 그날로 일지매를 캐어 자신이 살고 있는 정원에 옮겨놓았다.
그러나 다음날 엔토소장이 찾아와서 “수고했다. 여기다 캐어놓았으니 일본으로 가져가기가 한결 쉽게 되었다”고 하면서
일지매를 곧 가져가겠다고 공갈을 치는 것이었다.임순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 매화나무는 아버지(임삼현)께서 26년간을 키운 나무다.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 우리 조선 풍속으로는 팔려간 물건을 되돌려 받으려면 판값의 배를 보상해주면 된다.
당신이 5원을 주었으니까 나는 10원을 주고 다시 되 찾은 것이다. 또 운림산방은 건물과 땅만 판 것이지 일지매도 함께

팔았다는 증거나 등기가 있으면 가져와봐라. 매도증서에는 일지매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도로 찾은 것이다”하고 버텼다.
그러나 3일 후에는 곤토(近藤)라는 일본인 경찰서장이 또 찾아와서 “여기까지 옮기느라 고생했다.
곧 가져가겠다.”하기에 “내가 이 나무 하나를 옮기는데 70원이 들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서 26년간을 관리하던 나무를 내가 캐온 것이다. 법이 있으면 법에 따라 가져가라”하고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결국 임순재 씨의 일지매에 대한 사랑과 기지,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효도와 애국심이 일본으로의 강제 이식을 막게 되었고,
피신 책으로 임순재 씨의 정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일지매는 1995년에 기구한 사연을 안은 채 죽고 말았다. 당시 수령은 187년이었다.
그리하여 그 밑등걸만 지금도 임순재 씨의 집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무서운 탑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일지매를 지켰던 임순재 씨도 2001년에 작고하고 말았다.

 

- 일지매에 관한 내용은 이상희님의 글을 참조 -

 

 

호수곁에 피어난 백매

해마다 운림산방에서 가장 빨리 피어나는 매화인데 그리 관심을 둘만한 매화는 아니다.

 

 

한 마디로 격조가 떨어지는 매화라는 말씀.

 

고성흑매

 

진도군 고군면 고성초등학교 교정에 선 매화이다.

 

 

 

 

 검붉은 색이어서 흑매라 명명.

 

 

 

 

 

 

 

 

 

 

 

 

 

 

 

 

 

 

소중하게 관리해야될 자산이다

 

 

 

 

아직은 많이 알려져지 않은 흑매이다.

 

 

 

 

 

 

 

 

 

 

탐매 대상 가운데 일급에 속하는 개체라고 봐야겠다.

 

 

 

 

 

 

 

 

고성흑매에 날아든 직박구리

 

 

 

 

 

새가 날아와 앉은 모습은 탐매의 격을 가일층 높여준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어찌 이리 탐매객의 마을을 읽고 한동안 포즈를 취해 줄수가...

 

 

고산매(孤山梅)

녹우당이 있는 해남 연동리 고산유물전시관  앞

구멍가계 안집에 서 있는 연분홍만첩매.

 

 

지금 막 한 송이 터지는 참이었다.

 

 

윤고산의 후손댁에 피어나기에 고산매라 부른다.

 

 

 

 

 

 제대로 된 관리가 무척 아쉽다.

 

 

고산매가 있는 안집 옆 매대에 딱 한 송이 수줍게 피어난 백매

 

 

강진 무위사 해탈문

  

 

기세 좋게 피어나는 무위사 홍매.

이 무위사 홍매도 가히 흑매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보물  제507호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년(1550) 태감(太甘)이 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선각대사편광영탑과 나란히 서있는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비는 귀부(龜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이首)를 구비한 전통적 일반형의 것이다.

귀부의 두부(頭部)는 양각(陽刻)을 뚜렷이 조각한 용두(龍頭)로 되었으며 함주구강(含珠口腔)은 투각되어 있다.

배면에는 육각(六角) 갑문(甲文)을 양각하고 비좌(碑座)의 전후 2면에는 보운문(寶雲紋), 양측면에는 안상(眼象)을 각각 조각하였다.

이수에는 삼단의 충급형 받침을 새겨 복련화문(覆蓮華紋)을 장식하였고 이수 주위는 모두 반결운룡문(蟠結雲龍紋)과

반결쌍룡문(蟠結雙龍紋)을 각식하였다.

비제(碑題)는 "고려국(高麗國) 고무위갑사(故無爲岬寺) 선각대사(禪覺大師) 편광영탑비명(遍光靈塔碑銘) 병서(幷序)"라 시작해서

찬자(撰者) 최언휘(崔彦)와 서자(書者) 유훈률(柳勳律)의 관등(官等) 성명(姓名)을 기록하고 있다.

건립은 고려(高麗) 정종(定宗) 원년(元年)(946)으로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無爲紅梅  無爲紅女

 

 

무위사삼층석탑(無爲寺三層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긴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5년에 만들어짐)와 같은 때이거나

보다 조금 떨어지는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무위사 극락보전(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13호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은 무위사 입구에서 맨처음 대하는 해탈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조선초기인 1430년(세종 12)에 건립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柱心包(주심포) 맞배집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진 주심포 건축중에서 가장 발달된 구조형식을 지니고 있어 하나의 건축양식이 정착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건물이 국보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건축양식사적인 분류로는 주심포 중기 건축에 속하나 조선중기부터는 多包(다포)계 건축이 주류를 이루어서 실제적으로는 주심포계의

 전형적인 규범을 보여주는 완성기의 건물로 볼 수 있다. 다듬돌과 거친돌을 바른층으로 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한 원주로 세웠다.

기둥위에는 三出目(삼출목)의 공포를 올리고 있다. 架構(가구)구조는 二重梁(이중량)구조로 되었으나 건물 측면을 보면 이중량으로 보이지 않고

두 高柱(고주)위에 중종보만이 올려져 있다. 건물의 전면에는 3칸 모두가 빗살무늬창을 달았으며 측면에는 井字(정자)살 무늬창이 달려 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기둥이 없는 공간이며, 불단 위쪽에는 닷집모양의 보개천장을 올리고 단상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다.

특히 불단 후면의 수월관음도·아미타극락회도 등의 탱화는 회화사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으로 국보급에 속하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극락전은 1955년 완전해체 수리되었는데 그때 벽화는 대부분이 건물에서 분리되어 1974년 신축된 벽화보존각에 전시되었으며

1979년 건물의 동서 양벽에서 해체된 벽화도 추가로 안에 진열 전시되어 있다.

 



- 극락보전 측면 -
심포식의 대표적인 불전으로 맞배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알맞은 평면 구성에 현저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우고 간결하고 아름다운 조각의 공포를 얹어 가구를 짰는데 그수법이 고려기 양식보다 세련미가 있다. 고려 말기 건축에 곡선재를 많이 쓴데 비하면 이건물은 직선재를 써서 측면관이 간결하면서도 짜임새가 균형을 잘 이루었고 조선 초기 양식을 어느 건물보다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어 주목 받는 건물이다



<무위사사적>을 보면 절은 삼국 통일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다.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은 이미 형미가 입적한 30년 뒤에 최언위가 지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라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 형미가 모옥9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가지 활동 기록이 보여지는 등 자못 활기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結社)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통폐합의 2차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보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가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9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잰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 시왕전이 있었다. 당시의 주지는 극잠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 무위사 홈피에서 발췌 -

 

 

 

 

 

 

 

 

 

월월남사지 모전석탑(月南寺址 模塼 石塔) - 보물 298

 

월남사지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양식의 석탑으로서 고려시대에 왜 이곳 월남사에 백제계통의 석탑이 세워졌을까

하는 의문을 시하면서 일찍부터 국내에서 주목되어온 탑이다그러나 이 의문점을 풀어줄만한 관련자료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월남사에 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탑의 기단은 단층이며 밑에 두꺼운 하대석을 놓고 우주석과 면석을

별석으로 하여 그 위에 갑석을 놓았다. 탑신부는 1층탑신이 2∼3층에 비해 높은 편이고 결구수법은 각면이 일정하지 않은데 남쪽에서는

엇물림식으로 서쪽은 1매의 벽판석이며, 북쪽은 또 엇물림식, 동쪽에서는 좁은 1석을 삽입하여 면석을 마련케 하였으나 1매의 삽입석이

 유실되어 현재는 잡석을 채워 놓았다. 2층탑신부터는 급격히 높이가 낮아지면서 결구매수도 4매로 줄어들고 각면에 우주가 모각되었다.

3층탑신은 1석으로 되었으며 각면 우주의 모각 등은 그 수법이 동일하다.
옥개석은 추녀끝이 약간 반전되었을뿐 거의 수평이며, 옥개석의 상·하를 수매의 별석으로 결구하여 층급받침을 이루었는데,

하면의 층급받침은 3단이나 중앙받침은 하면에 모를 죽인 각형이고, 상하의 2단은 4분원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형식은 2층까지 계속되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줄었다. 상륜부는 탑신과 같은 석재와 소로형의 옥개석을 올렸으나

이들 전체는 노반으로 볼 수 있으며 그위로 복발과 양화가 있다.
이 탑은 塼塔(전탑)을 닮았다 하여 모전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는 탑재의 각 부재를 수매의 여러조각으로 결구하였을 뿐으로

그 석재 자체가 塼(전)을 닮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석탑은 월남사지석탑 또는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해야 옳겠다.

또 이 탑은 좁은기단, 가벼운 배흘림이 보인 탑신, 옥개받침에서 나타난 형식 등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라 하겠다.


이 탑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이 탑을 조각하게 된 석공에게는 아릿답고 젊은 부인이 있었다.

공은 이 불사가 끝나기까지 나를 찾아오지 말고 집을 잘 지키라고 당부한 후 왔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운 남편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었다. 어느날 그녀는 몰래 이곳 월남사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먼 발치로 석탑일에 열중한 남편을 훔쳐보았다.

불사에 열중한 남편은 그 일에만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지 수척해 보였다.
돌아서려던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봤다.

랑하는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그가 완성직전에 있던 석탑은 조각나고

그의 사랑하는 부인은 돌로 변해버렸다. 석공은 돌이 되어버린 부인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석공은 인근을 뒤져 석재를 구했으나 쓸만한 돌이 없었다.

공은 생각 끝에 그의 부인이 화신한 돌을 쪼아 다시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탑 근처에 서 있었던 월남사지 고매....


 

 

 

 

 

 

 

 

  

위  월남사지 매화는 이제 더 이상  이 곳에서 볼 수 없다.

약 2년 전에 고사해 버린 것을 누군가가 배어갔다는데, 아마도 한 줌 재가되어 하늘로 사라졌을 것이다.

600년 이상을 살아온 대한민국에서 가장 커다란 굵기였던 월남사지 고매.

너무나, 너무나도 소중한 국보급 매화를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다.

 

 

 

 

**********************************************************

 

 

매향이 코 끝에 아른거려 더 이상 미적 거리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하여 남녘으로 달려 내려간 것이다.

 

운림산방의 매화 들은 아직 개화 전일 거라는 예측대로 미동도 없었다.

허소치의 진한 묵향에도 불구하고 아직 첨찰산의 봄은 깨어나지 않은 듯.

 

하지만 기대했던 대로 고성초등학교의 교정에 자리한 '고성흑매'는

 머나먼 길을 달려 내려온 탐매객을 화들짝 반겨 맞아주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들이대고 있는 차, 때 맞춰 매화에 날아든 직박구리 한 마리.

탐매의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순간이다.

 

가만 보니 아까부터 직박구리가 뭔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좀 전 부터 교실에서 초등학생의 맑은 노랫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귀를 세워 들어 보니, 요즘 대한민국의 모든 무대를 독식하고 있다는

아이유 양의 이른 바 삼단 고음 창법의 노래를 어떤 여학생이 흉내내고 있는 중.

 

노래가 끝나 더 이상의 흥미를 잃었음일까?

잠깐 동안 두리번 거리며 이 탐매객에게 포즈를 취해주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마는 직박구리.

이른바 스토리텔링의 일등 공신이 아닐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마냥 흥미로울 뿐.

 

'고성초교梅' 소중하게 관리해야 할 이 시대의 명품 흑매임에 틀림없는데,

과연 누가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지 궁금하기만 하다.

 

녹우당 앞에 새로 들어선 '유물전시관' 그 바로 앞 가계 안쪽에 온 몸을 비틀고 선 '고산매'

근원부에서 부터 윗쪽으로 가운데가 찢겨진 채 버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울 뿐이다.

 

무위사의 홍매도 해탈문 쪽의 가지에 아직도 꽃이 피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리 썩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척박한 토양 탓은 아닐까?

 

어둑해진 하늘, 오늘 탐매의 최종 종착지 월남사지 모전석탑 앞에 선다.

나라안 최고의 굵기, 최대의 수령의 월남사지 고매를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가슴을 친다.

 

한 개비 장작으로 변해 뉘 댁 아궁이 속에서 산화되었을지라도,그 핍진했던 백매향 만큼은

월남사지와 석탑위를 맴돌며 자신을 찾아왔던 탐매객들의 신상을 내내 추억하리라.